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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마당마당마당마당 대륙별대륙별대륙별대륙별 발언발언발언발언 오귀스탱

오귀스탱

오귀스탱오귀스탱 베르크베르크베르크베르크 사회과학 고등 연구원, 파리

berque@ehess.fr

저는 라즐로 박사의 생각과 충고 모두에 동의를 합니다. 하지만 제 견해를 중심으로 그의 발표에서 경시되고 있거나 부족한 몇 가지 지점들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이러한 지점들은 존재론과 관련된 근대성(모더니티, modernity)의 근본적인 성격들과, 그리고 정치경제학과 관련된 현재의 세계 시스템을 지배하고 있는 것 안에 들어있는 그것들의 표현에 관계된 것입니다.

라즐로 박사의 질의문에서 “세계에서 위기를 초래하는 주요한 요인들”을 열거하고 있는 첫 페이지를 읽었을 때, 제가 받은 첫번째 인상은 이러한 열거들이 참으로 우리 세계의 주요한 재앙들 (“기후의 변화, 식량 부족, 경제적인 차이, 극심한 빈곤, 근본주의와 폭력, 군국화 ”)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러한 재앙들은 인류가 고스란히 미래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치유해야 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완화시켜야 하는 것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정반대로, 우리 세계의 현재 추세는 이러한 재앙들을 계속적으로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말해 이런 경향 속에서 이 세계는 유지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물론 객관적인 것들이지만, 앞서의 열거들과 이것들의 전개과정은 라즐로 박사에게 결여된 영역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나를 놀라게 했습니다. 부다페스트 클럽의 창시자로서,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경력에서 볼 때, 그는 특히 미학적인 영역에 대해 예민해져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미학적(aesthetic)’인 것이란 “예술과 관계된”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특히 유미주의자들의 관심거리 같은 “사회적으로 보다 뛰어난 측면에서의 예술과 관련된” 것만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좁은 의미에서의 미학은 분명히 제가 우리 세계의 지속가능성과 관련해서 다루고 있는 것 안에서는 단지 부차적인 것으로만 나타나는 것일 뿐입니다. 저는 이 미학적(aesthetic) 이라는 용어를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저는 이 용어를 감각들을 통한 감정의 능력과 관계되어 있으며,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과 특히 인간들에게 공통된 것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미학은 분명하게 생명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체, 특히 인간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그것들의 물리적인 환경(Umgebung, 環境)을 자신들 실존의 특정한 주변환경(Umwelt, 環境世界(환경세계) 혹은 風土(풍토)) 으로 해석하게 해주는 것이고 ,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가치가 있는 생명으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미학은 그것들과 관련되는 한에 있어서 그것을 존속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무슨 목적으로 그리고 누구를 위해서 세계는 유지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이는 자신들의 생명이 이 누구에게는 바로 가치있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즉 감각적인 존재들에게 말입니다. 존재론적으로 이것은 지속가능한 세계가 대상들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감각하는 존재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감각하는 존재들이란 자신들의 감각들을 통해서 이 세계 속의 특정한 의미를 느끼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에다 자신들만의 고유한 가치들을 부여하는 존재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과 관련되는 한에서, 세계는 그러므로 지속가능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근본 가치들이 부여되어야 합니다. 즉, 선(the Good)과 권리, 그리고 아름다움 말입니다.

플라톤(Plato)이 <티마이오스 Timaios>의 마지막 부분에 세계(혹은 우주, kosmos)의 전체적인 자질을 다음과 같은 형용사로 요약하고 있는 것은 순전한 우연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거대하며, 선하고, 아름답고 완전한” (megistos kai aristos kallistos te kai teleôtatos). 이것은 다른 자질들 사이에서 미(the Beauty)가 바로 세계가 세계로서 존재하는데 있어서, 다시 말해, 하나의 추상물이 아니가 구체적인 현실로서 존재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라는 이유를 알려줍니다.

현재, 라즐로 박사의 고찰 속에는 미에 대한 고려가 빠여있거나, 혹은 –다른 방식으로 돌려본다면- 우리들의 이 세계에서 점점 확대되어가는 추함(ugliness)에 대한 고려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추함은 이 세계를 지속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재앙들 속에 열거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미가 단지 부차적인 문제로 여겨져야 할 것이기 때문일까요? 불필요한 사치로 말입니까? 저는 이것이 라즐로 박사의 의견이라기 보다는 지속가능성을 다루면서 그가 미학적인 것을 고려하지 않고 닫아두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저는 긴급한 상황에서는 모든 사태들이 다른 모든 가치들을 희생하면서라도 자신의 순전한 생명을 보전하려 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심지어 그러한 태도조차도 그것의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는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거나 혹은 자신들에게 의미가 있는 여러가지 다른 이유들을 지켜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할 수 있는 인간들에 대해 많은 예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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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인간 세계에서 가치들의 단순한 위계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가치들의 서열화는 임의적인 것이며, 자연 그 자체가 문명과 역사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 온 이후로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대체적으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세계가 필연적으로 선과 권리, 그리고 아름다움이라는 세 가지의 근본적인 가치들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차이라면 주변환경에 따라서 그것들에 대한 관심들이 표현되어 온 방식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우리는 이 세 가지의 근본적인 가치들에 대해, 전지구적인 규모로, 정반대의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라즐로 박사가 확인시켜 준 위기를 촉발시키는 요소들은 세계 시스템의 전반적인 영향들이 선하지도 옳지도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에서 기후 변화와 같은 전반적인 현상 역시도 심지어 이 세계 시스템이 잘못된 것이며, 바뀌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증명입니다. 그럼에도 이에 추가하여 강조되어야 할 것은, 이 세계 시스템이 지속적으로 인류의 미적인 유산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네스코 (UNESCO)와 같은 몇몇 기관들이 이러한 유산을 보전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플라톤이 말했던 것처럼, 만약 세계가 “가장 아름다운” (kallistos)것이었다면, 그와 같은 기관은 아마도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의 시대에는 미가 그 자체로 충분히 생생하게 살아있었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미를 보전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인위적으로라도 미를 보전해야 하는데, 이는 우리의 세계 시스템이 그것의 남아있는 여분마저도 파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공동 유산으로서의 미는 위험에 처해있는 종류가 되었습니다.

공동 유산으로서의 미는 박물관이나 소수 사람들의 사적인 컬렉션으로 보관되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일상생활 속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공동 유산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표현은 우리가 현재 풍경(landscape)이라고 부르는 것, 즉 우리의 환경 속에서 우리들이 느낄 수 있는 미적인 인상입니다. 지금 현재의 세계 시스템은, 명백하게, 다양한 규모로 전 세계에 걸처서 풍경들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풍경-살해-시스템(landscape-killing system)인 것입니다.

중국어에서 “풍경-살해”(shafengjing 殺風景)라는 개념은 당나라 시대의 시인인 이상은(李商- 또한 이의산( Li Yishan 李義山)이라고도 불린다, 813-859: 역주) 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그는 자신의

<잡문록, Miscellanies>에서, 자신의 관점에서 볼 때, 풍경-살해적인 것들의 목록을 설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이러한 것들의 대부분은 오늘날 우리가 풍경으로 여기는 것과는 크게 관계가 없는 것들로, 예를 들어 꽃을 처다보면서 눈물을 떨구는 것(, kanhua leixia 看花下), 혹은 포도 넝쿨 아래서 닭을 키우는 것(huajiaxia yang jiya 花架下養鴨) 등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보다 일반적인 것에 관계된 것으로, 올바른 미적감각과 대립되는 나쁜 취미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구상은 아마도 (다소간 “속물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나 사물들에게 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골 전원에 세워진 거대한 광고판들은 풍경-살해의 경우입니다. 파리의 중심부에 있는 몽빠르나스 타워 역시 풍경-살해의 경우이며, 반면 이와 반대로, 에펠탑은 특정한 도시풍경을 창출하는데 기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비록 그에 대한 평가가 의식하고 있거나 혹은 의식하지 못한 사람들에 따라 차이가 난다고 할지라도, 우리 세계의 일반적인 추세는 확실히 풍경-살해적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런 점에서 위기를 촉발하는 요소는 너무 늦기 전에, 그리고 풍경이 죽기 전에, 조금의 자연적인 환경이라도 남겨놓으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풍경-살해의 위험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할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리들 대다수가 너무 늦을 때까지 관심을 갖지 않고 있는 것은 바로 현재 우리의 풍경-살해적인 세계 시스템의 본질입니다. 본질에 있어서 이 시스템은 공동선(common good)으로서의 미에 대립되는 것입니다. 그런 시스템 안에서 미는, 사적인 사용을 위해 보전되는 것을 제외하면, 지워지고 있습니다. 공동선 혹은 유산으로서의 미는 사적인 소비에 의해서 파괴되고 있으며, 미 그 자체와 관계되어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자원을 고의적으로 악용하면서 공동선에 대한 고려없이 취급되고 있습니다. 한 예로, 아름다운 풍경 바로 한가운데 세워진 높이 솟은 호텔들은 결국 이 미를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전통적인 도시풍경(machinami, 마치나미)의 독특한 경치를 볼 수 있다고 자랑스럽게 선전하고 있는 교토의 고층 아파트 건설 광고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건물 자체가 바로 마치나미(도시풍경, machinami)를 파괴하고 있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분명히 미학적이고 윤리적인 이유들 모두에서 비판받을 만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상은 현재 세계 시스템이 그러한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는 사적인 사용을 위해 구입하고, 그런 다음 소비된 후에는 내동댕이 쳐버리는 소비의 논리 때문입니다. 우리 세대 이후로는 하늘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풍경이 죽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풍경-살해의 본질은 정확히 바로 그것의 지속불가능성입니다. 우리의 감각들을 통해서 풍경-살해가 더 많이 드러날수록, 현재 우리의 지속불가능한 세계 시스템의 본질 역시 더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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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나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공동선 전반에 대한 사적인 소비의 우월성이 어리석고 자기-모순적인 것이라는 점 때문에 지속가능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풍경을 살해하는 것은 정확하게 바로 우리가 찾아 헤메고 있는 그것을 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풍경-살해는 이런 어리석고 지속불가능한 행위를 감각 가능하게 표출하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것의 본질에 있어서, 현대의 세계 시스템이 감각적인 것(sensitiveness)과 관계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들과 관계가 없으며, 심지어 감각 일반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17 세기의 과학 혁명에 의해 유럽에서 확립된 기계역학적인 패러다임으로부터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특히 인간과 달리 기계는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감각과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에,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유로,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라는 질문과 관계없이 그것들은 단지 작동할 뿐입니다.

이러한 기계적인 패러다임은, 이제 그것의 차례로, 자유 경제와 같은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패러다임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필립 미로우스키(Philip Mirowski)는 이런 경향을 분석하면서 최근의 저서에 <기계의꿈사이보그과학이되어가는경제 Machine dreams. Economics becomes a Cyborg science> (캠브리지 대학 출판부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년)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이 저서에서 이미지를 빌려와보자면, 우리는 자유 경제가 하나의 환경학(economics)이 아니라 인간에게 기계의 추상적인 모델을 부여하는 기계학(mechanomics)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과학이 다루는 것은 인간도 아니고 살아있는 세계도 아닙니다. 그것은 기관실(engine room)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참고문헌으로 이런 학문에 의존하는 자유 이데올로기는 꾸준하게 세계를 그러한 기관실로 축소시키기 위해 분투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 안에서, 풍경-살해는 일상적인 미학의 범위를 너무나 멀리 넘어서고 있는 관심사일 뿐입니다. 이는 현재의 세계 시스템이 인간 세계와 그리고 심지어 그것의 토대인 생물권(biosphere)까지 단순한 물리적 시스템의 기계 법칙으로 되돌림으로써, 그래서 인간의 가치들을 빼앗고, 심지어 생명까지 빼앗아 이 세계를 한갓 행성으로 만들어 버리는 논의를 하는 경향이 있음을 드러내줍니다.

이러한 경향을 역전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분명히 라즐로 박사의 질의문에 나열되어 있는 위기를 촉발하는 요소들을 치유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그리고 동일한 지반에서, 우리는 또한 풍경의 죽음을 초래하는 요소들을 치유해야 합니다.

2006 년 5 월 13 일 모르파에서

번역: 곽선숙, 단국대 강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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