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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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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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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유림외사>와 연암소설의 비극적 인물형상 비교

한종완1)

Ⅰ. 들어가는 말

Ⅱ. 청과 조선의 과도기 시대 비극

Ⅲ. 비극적 인물유형 1. 지식인형상 2. 여성형상 3. 하층민형상

Ⅳ. 나가는 말

◁ 목차 ▷

1) 조선대학교 중국어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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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Comparative Study on Tragic Images Between The Scholars (儒林外史) and Novels of Yeonam(燕巖)

Han, Jongwan

The best satirical novels of Qing dynasty and Joseon in the mid-18th century include Oh Kyungjae's The Scholars (儒林外史) and Park Ji-won's Chinese novel. Both countries were seen to be politically stable and economically prosperous, but its inner side was full of confusion and contradictions in the feudal times of the transitional period. The two writers' satirical descriptions of social phenomena, including the thought and hypocrisy of corrupt intellectuals, the evils of the gwageo, the breakdown of the feudal status system, the rapid growth of merchant forces, and the downfall of each class of society are very similar. The novels feature characters from various classes of life, satirizing the tragic reality of a phase of gloomy society. In particular, the tragedy, which seems common to intellectuals, women and the lower classes, clearly and realistically illustrates the chaotic realities and social conditions. These figures reflect anguish and criticism as intellectuals of the age looking forward to a new revolution. This article makes a comparison based on the background of the derivation of their three figures’ tragedy, and the consciousness of the age common to the two writers. This research will be useful in examining not only our understanding of the transitional society of Qing dynasty and Joseon, but also the s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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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ciousness of the times as intellectuals of the age.

Key Words

The Scholars(儒林外史), novels of Yeonam(燕巖), tragic Images, intellectual, woman, lower classes

Ⅰ. 들어가는 말

근대 전환기에 들어선 18세기 중엽 청과 조선사회의 암울한 현실을 파 헤친 최고의 풍자소설로 오경재(吳敬梓)의 <유림외사(儒林外史)>와 연암 (燕巖) 박지원(朴趾源)의 한문소설을 들 수 있다. 당시는 양국 모두 정치 적 안정과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내면은 공 통적으로 과도기시대의 혼란과 모순에 싸인 현실이 가득하였다. 청·조선 의 동시대를 살던 두 작가는1) 출신과 사상 그리고 생애 전반의 유사한 경력을 바탕으로 당시 봉건사회의 부패하고 불합리한 사회 비극에 대해 동일한 시대의식으로 풍자와 비판을 가하였다(한종완, 2017: 242). 오경재 는 청대 지식인들의 사상과 위선적인 행동, 과거제도의 폐해와 봉건 신 분제의 와해, 상인세력의 급성장과 사회 각 계층의 몰락 등 사회현상을 생생하게 그려내며 풍자하였다. 이는 박지원의 소설에서도 동일하게 보 이는 모습들이기에, 두 작가 모두 양국에서 최고의 풍자소설가로 꼽히고 있다.

그들의 소설에는 다양한 계층의 인물이 등장하여 당시 암울한 사회 단 면의 비극적 현실이 풍자된다. 특히 지식인, 여성, 하층민들에게 공통적 으로 보이는 비극성은 어지러웠던 현실과 세태를 분명하고 사실적으로

1) 오경재(1701~1754년), 박지원(1737~1805년)은 36년의 차이를 보이지만, 유교문 화와 봉건사회에 대한 풍자와 비판 등 문학사적인 면과 지식인으로서의 시대 의식과 사상 등 여러 면에서 동시대적인 유사성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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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준다. 이들 형상에는 새로운 변혁을 고대하는 당대 지식인으로서 고 뇌와 비판의식이 투영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때문에 두 작가의 작 품에 공통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비극적 인물유형에 대한 비교연구는 당 시 청·조선의 과도기사회에 대한 이해는 물론 두 작가의 문학적 유사성 을 증명할 수 있는 좋은 방편이다. 현재 <유림외사>와 연암소설에 대한 비교연구는 지식인형상, 여성형상, 풍자의식, 작가의 시대의식 등의 비교 연구에 그치고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지식인·여성·하층민형상을 선택하 여2) 그들의 비극이 파생된 배경과 두 작가에게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시 대의식 등을 중심으로 비교를 진행하겠다.

소설에 등장하는 각 계층 인물들이 지향하는 삶이 결국 시대의 장벽에 가로막혀 비극으로 치닫고 마는 결과는 양국의 유사했던 사회배경에서 비롯되었다. 때문에 먼저 당시 청과 조선에서 동일하게 드러난 과도기적 사회상을 살펴본 후, 소설에서 당시의 비극성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인 물유형을 선택하여 분석하도록 하겠다. 특히 갖은 핍박과 억압 속에서도 질곡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과 하층민의 비극성을 통해서는 봉건 유교사 상에 대한 두 작가의 번민과 고뇌를 이해할 수 있다. 오경재와 박지원이 풍자했던 사회모순, 그들이 마주했던 현실, 그리고 그들이 추구했던 변혁 과 이상에 대한 인식을 통해 지식인으로서 품고 있던 동일한 시대의식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Ⅱ. 청과 조선의 과도기시대 비극

작가는 작품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풍조와 사회변화 양상을 묘 사한다. 여기에는 개인의 경험을 통한 현실인식과 개성적인 상상력이 가 미되기도 한다. 특히 소설은 다양한 계층의 삶을 묘사하며 전형적인 인

2) <유림외사>와의 비극적 인물유형 비교를 위해 연암소설 중 <허생전(許生 傳)>, <광문자전(廣文者傳)>, <민옹전(閔翁傳)>, <양반전(兩班傳)>, <열녀함 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을 선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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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형상을 창조하고, 현실과 이상을 넘나들며 작자 자신의 시대의식을 드 러내는 창구가 되기도 한다. 오경재와 박지원 역시 여러 유형의 인물을 창조하여, 그들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투영하고 격변기의 혼란을 살아가 는 사람들의 모습과 당시 사회상을 상세히 묘사하였다.

오경재의 청대 중기는 과거제도의 폐해가 정점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획일화된 형식인 팔고문으로 과거를 치러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이는 청 황실의 통치기반을 공고히 해줄 수 있는 관료를 배양하고 한족과의 민족 적 대립 감정의 반항 정신을 진압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劉大杰, 1984:

415). 그 결과, 과거급제 만이 부귀공명의 지름길로 통하였으며, 맹목적으 로 과거에 매달리는 지식인들이 우후죽순 늘어나기 시작했다. 과거제도 는 단계별로 여러 관문을 거치며, 수재(秀才), 진사(進士), 거인(擧人)에 이르기까지 등급에 따른 각종 혜택과 특권이 확연이 구분된다. 때문에 시험을 거치지 않고 검은 돈의 유혹에 물들어 암암리에 지위를 사고파는 지식인도 생겨났다. <유림외사> 3회에서는 주진이 뇌물을 이용하여 감 생(監生)의 자격을 사고 향시를 치르는 장면이 묘사된다. 당시 사회 전체 에 돈이면 뭐든 이룰 수 있다는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했음을 보여준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병폐를 개선하고 선도해야 할 지배계층마저도 탐 욕과 부패에 젖어 인재발굴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국 부패 하고 타락해버린 과거제도와 매관매직을 통해 선발된 관료들은 자신의 영리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고 국가를 위한 인재선발의 취지는 사라지고 말았다. 사회기강이 붕괴되며 탐욕스런 관료의 폭정, 지주의 핍박, 과중 한 세금의 중압감에 경제적으로 몰락한 백성들은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 했다. 산업구조 또한 농업 중심에서 대규모의 상업경제가 활성화되자 소 작농은 줄어들고 상인·관료가 대지주로 바뀌며 농민들이 몰락하는 악순 환이 거듭되었다. 경제구조의 급속한 변화는 부의 집중 현상을 초래하였 고, 평민 중 일부는 부를 앞세워 세력을 확장하였다. 특히 당시 소금매매 업자와 고리대금업자들이 엄청난 부를 축적하여 지방경제를 좌지우지하 였고, 백성에 대한 이들의 수탈과 횡포는 경제의 무질서를 초래하여 사 회 전체를 혼란에 빠트렸다. 오경재는 이처럼 타락한 사회풍조와 부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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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에 휩싸인 관료사회를 경험하며 느낀 좌절감을 <유림외사>를 통해 풍 자하며 당시 사회의 비극적 상황을 생생히 묘사하였다.

박지원의 조선후기 또한 변화의 시대였다. 연암소설은 사회의 급격한 변동에 따른 구조 및 의식상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양난을 겪 으며 굳건하던 신분제도가 와해되어 요동치기 시작했고 그에 따른 의식 의 변화도 발생했다. 이런 흐름 속에 선진문물을 직접 목도한 박지원 중 심의 실학파 지식인들은 조선 후기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농・공・상의 기술과 원리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은 ‘이용후 생’을 내세워 당시의 성리학적 이념에서 벗어나 보다 실천적이며 현실 생활에 이용 가능한 학문을 모색하였다(이원국 1987: 8). 다음은 박지원 의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글이다.

아버지는 늘 우리나라 사대부들이 대부분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 경세제 국학(經世濟國學), 명물도수학(名物度數學) 등의 학풍을 소홀히 한다는 점, 그 리하여 잘못된 지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그 학문이 몹시 거칠고 조잡 한 점을 병통으로 여기셨다.3)

그는 허례허식에 사로잡혀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당시 지식층에 대한 비난에서 나아가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한 봉건사상을 비판했다. 현 실에 안주하기보다 실용적 사고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깊은 통찰을 통 한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실학사상은 서양문물의 유입에 따른 실 용 중시와 탁상공론만 일삼는 성리학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되었다. 기존 의 독단적이고 공허한 이론은 배제하고 사실에 입각한 객관적이고 과학 적인 연구방법을 채택하자는 학풍이다. 실용적 학풍의 사상적 밑받침이 된 실학사상은 정치·경제·문화·사회 등 다방면에서 획기적인 역할을 하 며 혁신적 변화를 가져왔다. 생산 활동의 자유화로 수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하여 상품 유통의 빈도가 증가하였고, 청과의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3) 先君常病吾東士大夫, 多忽於利用厚生·經濟名物之學, 類多因訛襲謬, 麤鹵已甚.

(박종채 1998: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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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이 증가하며 세력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도시상공업과 농업이 동시 에 발전하며 농촌 사회의 분화, 상업 자본의 발달, 상업 활동의 증대, 수 공업의 성장, 임금 노동자의 출현, 그리고 경제적으로 성장한 서민층의 신분격상, 몰락한 지식인과 빈농의 출현 등과 같은 사회 경제적 현상들 이 나타났다(이우성 1982: 11).

현실사회는 급변하고 있었지만 사대부 지배계층은 구시대적 명분만을 앞세워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패거리 정치에 몰두하였고, 그 피해와 고 통은 몰락한 양반과 백성들의 몫이 되어 막다른 길로 내몰렸다. 박지원 은 모순적 현실에 대해 통찰하고, 실학을 통한 개혁을 주장하며 변화를 원했기에 소설에서 위선에 찬 지식인과 비극적 사회현실을 풍자하며 누 구보다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오경재·박지원이 활약했던 청과 조선은 정치·경제의 안정과 발전으로 번영기를 구가하는 모습이었지만 근대로의 전환을 앞둔 과도기적 양상을 보이며, 누적된 봉건사상의 모순으로 인해 사회도처에서 비극을 양산되 었다. 두 작가는 소설을 통해 공통적으로 과거제도의 폐해, 지식인의 타 락, 몰락한 농민, 비극적 여성 등 사회문제를 해부하고 다양한 유형의 인 물을 그려내어 현실을 풍자하였다. 각 유형의 인물들은 두 작자의 경험 을 통해 창조되었기에 일정부분 현실에 대해 비판적 시대의식을 동일하 게 보여준다. 특히 그들이 처한 시대상황 속에 묘사되는 지식인·여성·하 층민들의 비극적인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청과 조선에서 소설을 통해 현실을 풍자한 그들은 동일한 시대의식을 통해 봉 건 말 과도기 사회의 비극적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었던 것이다.

Ⅲ. 비극적 인물유형

<유림외사>와 연암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유형의 인물들은 작자의 당시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뚜렷이 반영되어 있다. 청과 조선의 혼 란기를 배경으로 두 작자는 풍자와 함께 비극적 형상들을 탄생시켰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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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통해 봉건예교와 지식인들의 위선적인 세태를 비판한다. 본장에 서는 부조리와 폐단에 찌든 현실을 고발하고 풍자하는 과정에 보이는 비 극적 인물들의 삶을 통해 당시 실상과 문제를 살펴보겠다. 이를 위해 두 작가의 작품에 공통으로 보이는 지식인, 여성, 하층민 등 형상으로 구분 하여 그 전형적인 특징을 분석하고,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비판의식의 유 사성을 비교해보겠다.

1. 지식인형상

<유림외사>에는 여러 유형의 지식인들이 다채롭게 등장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식인 형상은 아이러니하게도 본디 자신들이 지향하는 삶과 사회적 지위에 부합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거나 비극적 삶을 살아가는 모 습을 보여준다. 특히 변화와 시류에 편승하지 못한 일부 지식인은 곤궁 한 삶을 벗어나기 위해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는 모습도 보인다. 또한 지식인사회 전체에 자리 잡은 팔고문과 과거제도는 입신양명의 가장 중 요한 발판이었기에 그들 깊숙이 스며들어 적지 않은 사회문제를 야기하 였다. 팔고문에 대한 맹목적인 중시는 당시 지식인들의 사상적 근간을 흔들어 놨을 뿐 아니라 단순 암기로만 문장을 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 ‘팔고문만 외우면 된다’는 획일적인 지식으로 인해 고전에 대한 다각적인 고민과 견해도 없이 허울뿐인 제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급제한 지식인조차 뼛속 깊이 팔고문의 병폐에 물들어 현실 자체를 깨닫 지 못하기도 했다.

<유림외사>에서는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고 팔고문만을 맹목적으로 학 습하는 지식인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이는 작자인 오경재 본인이 실제 과거를 준비하며 직접 경험하고 목도한 현상의 사실적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오경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와 병폐의 정도를 비극적인 상황에 맞추고 그 내면의 어두운 단면까지 묵직하게 그 려낸다. 제 3회에 등장하는 범진을 통해 사회에 만연된 팔고문의 병폐로 인한 비극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범진은 많은 나이를 속여 가며 20여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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례나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비극적 지식인형상의 전형이다. 그는 늙어서 까지 특별한 목적도 없이 길고도 험난한 과거에만 매달린다. 그저 급제 만이 입신양명의 첩경이었기에 당연하다는 듯 과거에 매진하는 모습이 다. 더욱이 급제는 그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태도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이 되기도 한다. 범진의 과거 합격 전 후의 상황을 들여다 보자.

그는 비쩍 마른 몸에, 누렇게 뜬 얼굴에는 희끗희끗한 수염을 기르고 다 해진 전모를 쓰고 있었다, 광동 지방 날씨가 따뜻하다고는 하지만 때는 이미 12월 상순이었다, 그러나 그 동생(童生)은 아직도 삼베 도포를 입고 추위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시험지를 받아들고 자신의 호방으로 갔다.4)

주진이 부임지인 광주에 과거시험의 심사위원으로 갔다가 만난 범진의 남루한 모습을 묘사하는 부분이다. 과거에 합격하기 전 범진이 얼마나 비참하고 궁핍한 생활을 했는지 유추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장인은 평소 범진을 변변치 못한 사위로 생각하여 갖은 모멸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하지만, 무시 받던 범진이 과거에 합격하자 주변의 대우는 완전히 달라 지고 심지어 어처구니없는 행동으로 실성해 보이기까지 한다. 수십 년을 과거에만 매진하던 그가 드디어 합격하여 기뻐하는 모습에 그의 어머니 는 “거인이 되더니 너무 기뻐 돌아 버렸어.”, “지지리도 박복한 놈! 거인 인가 뭔가 되자마자 이런 몹쓸 병을 얻었구나! 이렇게 돌아버렸으니 언 제 제정신이 돌아온단 말이냐!”5)하며 근심어린 모습을 보인다. 범진이 과거에 합격한 후 미친 듯이 외치는 모습에서는 그가 과거합격을 얼마나 열망했는지 측은함까지 느껴진다. 오경재는 과거제도가 당시 지식인을 무능하고 나약한 독서인으로 만든 것에 대한 비판에서 나아가, 합격 후 의 변화된 모습까지도 풍자한다.

4) 面黃肌瘦, 花白胡須, 頭上戴一頂破氈帽, 廣東雖是地氣溫暖, 這時已是十二月上 旬, 那童生還穿着麻布直裰, 凍得乞乞縮縮,接了卷子, 下來歸號.(吳敬梓 1995: 34) 5) “中了一个甚么擧人, 就得了這个拙病”, “這一瘋了, 几時才得好?”(吳敬梓 1995: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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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진은 새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연극판을 벌이고, 술상을 차려 손님을 대접하였다. 그것이 사흘 동안 계속되었다... 아내 호씨는 집 안에서 도 은사를 넣어 만든 장식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때는 마침 10월 중순이라 아직 날이 따뜻한데도, 하늘색 비단 마고자에 담청색 비단 치마를 입은 채로, 남녀 하인들과 어린 계집종들을 시켜 여러 식기들을 씻게 하고 있었다.6)

초라했던 범진의 호화로운 가옥과 아내의 사치스런 치장을 통해 당시 세 태와 과거제도의 어두운 민낯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작자는 범진의 모습 을 통해 과거만이 인생 최고의 목표가 되어버린 지식인들의 아이러니한 비극성을 지적하고, 그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정신적 타락을 풍자하였다.

또 다른 비극적 지식인형상으로는 봉건예교의 신봉자인 왕온을 들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왕온은 비록 빈한한 삶이지만 책을 벗 삼아 마음만 은 평온한 듯 마치 공자의 제자 안현의 삶을 닮아 보인다. 하지만 <유림 외사>를 통틀어 봉건예교의 덫에 갇힌 가장 비극적인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비록 수재라는 지위는 얻었지만 거인이 되지 못해 빈곤 한 생활을 면치 못하고 봉건의 그늘아래 근근이 살아가는 무능력한 가장 이다. 남편을 잃은 첫째 딸이 친정에 얹혀사는 상황에서, 셋째 딸마저 남 편이 세상을 떠나자 친정 부모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며 자결을 결심한 다. 하지만 왕온은 이런 딸을 만류하지 않고 오히려 자결을 종용하며 막 다른 궁지로 내몬다.

“사돈어른, 가만히 들어보니 제 딸아이가 순절하겠다는 뜻은 진심인 듯합 니다. 허니 저 아이 뜻대로 하게 내버려 둡시다. 자고로 ‘마음이 떠나면 생각 을 돌리기 어렵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얘야, 네가 정히 그렇게 하겠다면 그건 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일이거늘, 내가 왜 그걸 말리겠느냐! 네 뜻대로 하도록 해라! 내 지금 집에 돌아가서 작별

6) 搬到新房子里, 唱戱, 擺酒, 請客, 一連三日,.... 見范進的娘子胡氏, 家常戴着銀絲 䯼髻. 此時是十月中旬, 天氣尙暖, 穿着天靑緞套, 官綠的緞裙, 督率着家人, 媳婦, 丫環, 洗碗盞杯箸.(吳敬梓 1995: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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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를 할 수 있도록 네 어미를 보내주마.”7)

왕온이 딸의 순절을 수수방관하며 오히려 권장하는 장면이다. 사돈내 외가 끝까지 반대하는데도 고집을 버리지 않고 딸이 “순절하겠다는 뜻은 진심인 것 같다”며 사돈을 설득하더니, 나아가 “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일”이라며 딸에게 순절을 권유하기까지 한다. 왕온은 온갖 성현의 글을 탐독한 지식인이었지만, 사실은 삶의 가치도 모른 채 봉건예교의 폐해에 빠져 허우적대는 비극적 지식인의 전형적인 행태를 보여준다. 친정부모 의 가난한 살림을 뻔히 알기에 죽음을 선택하는 안타깝고 절박한 상황이 지만, 부모로서 제지는커녕 오히려 사지로 내모는 어리석은 왕온은 그야 말로 시대가 낳은 비극이라 하겠다. 결국 딸이 곡기를 끊고 자결 했다는 소식에도 슬픈 내색을 보이지 않았지만, 마을사람들이 순절을 기려 위패 를 만들자 결국 애끓는 심정으로 울기를 멈추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마 음에 잠시 머리를 식히러 남경으로 떠나지만, “가는 길 내내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보노라니 죽은 딸 생각이 간절하여 그 슬픔에 가슴이 미어 지는 듯했다.”8)는 장면에서는 그도 결국은 봉건예교의 희생양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오경재는 이처럼 봉건사상과 과거의 폐해에 물든 비극적 지식인 범진 과 왕온을 내세워 봉건사상의 몰락과 함께 지식인들의 정신세계마저 다 시는 소생할 수 없을 만큼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박지원의 <양반전>에 등장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양반의 모습 또한

<유림외사> 못지않게 당시 조선사회의 봉건적 신분제도로 인한 비극적 세태를 잘 조명하고 있다. 조선초기에는 지식인들의 관직 진출이 활발하 였으나 사회적 변화와 함께 수적으로 증가하는 신진사대부들을 수용하지 못하며 내부적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지배계층의 갈등은 잦은

7) “親家, 我仔細想來, 我這小女要殉節的眞切, 倒也由着他行罷, 自古‘心去意難留’”, 因向女儿道. “我女儿, 你旣如此, 這是靑史上留名的事, 我難道反拦阻你? 你竟是 這樣做罷. 我今日就回家去叫你母親來和你作別”(吳敬梓 1995: 562)

8) 一路看着水色山光, 悲悼女儿, 悽悽惶惶.(吳敬梓 1995: 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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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변을 통해 그들만의 특권층을 형성하기에 이르고, 나아가 권력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벌열(閥閱)9)을 형성하여 기득권을 장악하였다. 여 기에서 도태된 지식인계층은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낙향하여 근근득생(僅僅得生) 명맥만 유지하였다. <양반전>의 정선양반은 평소 덕 을 지키며 어질게는 살았으나 시대의 흐름에 대처하지 못해 생계조차 어 려운 지경에 처한 지식인이다.

집이 가난하여 관청의 환곡을 빌려 먹다 보니, 해마다 쌓여서 그 빛이 1천 섬에 이르렀다. 관찰사가 고을을 순행하면서 환곡 출납을 조사해 보고 크게 노하여, “어떤 놈의 양반이 군량미를 축냈단 말인가?”하며 그 양반을 잡아 가 두라고 명했다. 군수는 그 양반이 가난하여 보상을 할 길이 없음을 내심 안 타깝게 여겨 차마 가두지는 못하였으나, 그 역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양반이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고 밤낮으로 울기만 하였다.10)

오로지 독서와 수양에만 힘쓰며 생계를 위해 관가의 환곡을 타먹을 수 밖에 없었던 정선양반은 허울뿐인 선비로서 비극적 지식인형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양반은 환곡을 갚지 못해 검열에 적발되고 옥에 갇힐 운명에 처했지만, 현실적 고난에 대처할 방법조차도 없다. 선비의 본분이라는 이 상과 생계유지라는 현실간의 갈등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밤 낮 훌쩍거리며 울뿐 그 어떤 방법도 강구하지 못하는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이다. 결국 양반은 고심 끝에 마을에 사는 평민부자에게 신분을 팔 아 환곡을 갚고자 한다.

양반이 벙거지를 쓰고 잠방이를 입고 길에 엎드려 소인이라 아뢰며 감히

9) 나라에 공로가 크고 벼슬 경력이 많은 훌륭한 집안을 일컫는다. 특히 훈척을 중심으로 결집된 일부 귀족문벌들이 이에 속한다. 조선전기는 사대부정치가 주를 이루었다면 박지원이 살던 조선후기에는 권문세가가 권력을 장악한 벌열 정치가 두드러진다.

10) 然家貧, 歲食郡糶, 積歲至千石. 觀察使巡行郡邑, 閱糶糴, 大怒曰 : “何物兩班, 乃乏軍興?” 命囚其兩班. 郡守意哀其兩班貧, 無以爲償, 不忍囚之, 亦無可柰何.

兩班日夜泣.(박지원 2007, 下: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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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다보지도 못하는 것이 아닌가, 군수가 깜짝 놀라 내려가 붙들며, “그대는 왜 이렇게 자신을 낮추어 욕되게 하시오?”하니, 양반이 더욱 벌벌 떨며 머리 를 조아리고 땅에 엎드리며, “황송하옵니다. 소인이 제 몸을 낮게 하려는 것 이 아니라 환곡을 갚기 위하여 제 양반을 팔았으니, 이제는 마을의 부자가 양반입니다.”11)

군수는 양반이 길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소인”이라 자칭하자 당혹해하고, 양반의 옷차림에서 이상함을 느껴 연유를 묻는다. 사실 정선 양반은 마을 부자에게 신분을 팔아 빚도 갚고 좀 더 주체적으로 살고 싶 었을 수도 있다. 당시 사회규범인 양반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명분과 법도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은 의지의 발로라 할 수 있다. 하지 만 예상치 않았던 군수와의 조우로 정선 양반은 다시 허울뿐인 양반신분 의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모순과 허울만 가득한 양반 신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의 좌절, 불합리한 삶임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도 다시 양반으로 살 수밖에 없는 암울한 상황이야 말로 비극적 현실에 대한 풍자이다. 박지원은 정선지역의 양반가를 모티브로 삼아 그저 단순 히 무능하고 현실에 적응할 수 없는 인물로서 무위 무능한 존재로만 시 선을 두지 않고, 부조리한 현실의 상황에 의해 타율적으로 살아갈 수밖 에 없는 암울한 운명을 지닌 몰락한 양반의 비극성에 시선을 맞추었다 (이석래 1997: 341).

<민옹전>에 비춰지는 지식인형상은 <양반전>과는 조금 다르게 묘사 된다. 민옹은 겉으로는 여유와 낭만이 있는 달변가의 모습이지만, 그 또 한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인해 기득권에서 철저히 배제되는 비극적형상 이다.

“그대는 집이 가난한데 다행히 밥을 잘 먹지 못하니 재산이 남아 돌 게고, 잠을 잘못 잔다면 밤까지 겸해 사는 것이니 남보다 갑절 사는 턱이 아닌가, 11) 兩班氈笠, 衣短衣, 伏塗謁稱小人, 不敢仰視, 郡守大驚, 下扶曰, 足下何自貶辱若 是, 兩班益恐懼, 頓首俯伏曰, 惶悚小人非敢自辱, 己自鬻其兩班以償糴, 里之富人 乃兩班也.(박지원 2007, 下: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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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이 남아돌고 남보다 갑절 살면 오복 중에 수(壽)와 부(富) 두 가지는 갖 춘 셈이지.”12)

민옹의 모습은 언제나 위트와 풍류가 흐르는 흥미로운 형상으로서 현 실에 직접 뛰어들어 대적하려는 치열함과는 거리를 보인다. 하지만 평소 민옹의 해학과 풍자에 찬 행태는 사실 그의 내적 의지와 외적 현실의 괴 리감, 즉 이상과 현실의 갈등상태를 자조적으로 해소시키는 방법이다. 이 러한 반복적 삶의 형태야 말로 곧 당대 지식인의 비극적 형상이라 할 수 있다.

7세 때에는 벽에다 큰 글씨로 “항탁이 스승이 되었다” 라고 썼으며, 12세 때에는 “감라가 승상이 되었다”고 하고, ... 40세가 되었으나 더욱더 이름을 날린 바가 없었기에 마침내 “맹자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라고 크게 써놓 았다. 이렇게 해마다 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벽이 다 온통 새까맣게 되었 다.13)

민옹은 어려서부터 매우 영민하였다. 특히 옛 성현들의 절개를 귀감삼 아 그들의 전기를 벽에 써놓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민옹이 이 들의 이름과 공적을 자신의 방 벽에 쓰고 기록했다는 것은 자신의 이상 과 포부를 표현한 것이었다.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맹자는 마음이 흔 들리지 않았다”라는 글귀를 크게 써놓았다는 대목이다. 이는 민옹의 욕 망이 가장 크게 부각되는 장면이자 자신의 뜻과 상반된 삶을 살고 있는 것에 대한 내적 갈등의 표출이다. 민옹은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는 이상 을 실현할 수 없음을 알고 결국 벼슬에서 물러나 스스로 낙향하여 자연 인으로 살아간다. 즉,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이상과 포 부의 실현불가능을 자각하고 물러나, 풍자와 해학으로 살아가겠다는 결

12) “君家貧 幸厭食 財可羨也. 不寐則兼夜 幸倍年 財羨而年倍 壽且富也.”(박지원 2007, 下: 441)

13) 七歲大書其壁曰: ‘項槖 爲師’; 十二 ,書 ‘甘羅 爲將 ... 至四十, 益無所成名, 乃 大書曰 ‘孟子不動心.’ 年年書益不倦, 壁盡黑.(박지원 2007, 하: 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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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실천한 것이다. 그는 비운의 그림자를 극복하려고 끊임없이 분발하 였으나 이를 극복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이가원 1980: 289) 이처럼 민옹의 비극적인 삶은 당시 불합리한 사회모순에 대한 비판이자, 소외된 지식인으로서의 박지원이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고뇌에 대한 토로라고 할 수 있다.

<유림외사>와 연암소설에 등장하는 비극적 지식인형상들은 공통적으 로 봉건사상, 과거의 폐해, 신분제의 붕괴 등으로 인해 몰락하며 무능력 한 모습을 보인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신세계마저 무너진 그들을 통해 당시의 세태는 물론 두 작자의 사회 비판의식에 내포된 안타까움까 지 이해할 수 있다.

2. 여성형상

오경재는 <유림외사>에서 봉건예교를 풍자하며 여성들이 처한 비극적 현실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비판을 가한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따른 소외감·박탈감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드러내는 한편 남녀평등의 진보적 인 사상을 표출하기도 한다. 비극적 여성형상의 전형으로는 노소저, 왕온 의 셋째 딸 그리고 기녀 빙랑을 예로 들 수 있다.

아들이 없는 노편수는 딸 노소저를 아들 삼아 대여섯 살 적부터 선생 을 불러 팔고문을 가르쳤다. 그녀는 대가들의 문장은 물론 팔고문 선집 에 통달하였고, 글 솜씨 또한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여 매우 출중하였 다. 그러나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여성이더라도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격 이 부여되지 않았기에 그녀가 익힌 팔고문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리하여 차선책으로 출중한 자제를 만나 혼례를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한 다.

“난 그분이 과거 공부가 다 끝나서 조만간 거인이 되고 진사가 될 줄 알 았지, 이런 꼴일 줄 상상이나 했겠어? 이제 내 인생은 다 틀렸어!”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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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소저는 혼례를 치르고 모든 것이 자신이 뜻대로 진행될 거라 생각했 지만, 남편이 자신의 의도와 달리 출세와 거리가 먼 책들에만 관심을 두 자 크게 상심하여 통한의 눈물을 흘린다. 희망이 사라지고 허무와 무력 감에 빠진 노소저를 향해 시종이 위로하며 ‘아들을 내세어 자신의 꿈을 대신하면 된다’고 충고하자, 네 살 된 어린 아들에게 밤을 세워 팔고문을 가르치고 외우게 한다. 노편수도 사위가 과거에 뜻이 없음을 알고 첩을 얻어서라도 아들을 보아 대를 잇게 하려고 한다. 남성중심의 봉건적·권위 적 사회에서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꺾이고 순응할 수밖에 없는 비극 적 여성의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봉건예교의 폐단에 희생되는 왕온의 셋째 딸도 비극적 여성형상의 전 형을 보여준다. 그녀는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유교사상의 희생양이자 모순적 효에서 비롯된 비극을 보여준다. 어릴 적 아버지의 유교적 가르 침에 따라 성장한 그녀는 남편이 병으로 죽자 친정 부모님께 짐이 된다 는 것 자체가 불효를 저지르는 일이라 판단하여, 남편을 따라 죽기를 결 심하고 “제가 며느리로서 효도를 못할망정 짐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제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제가 남편의 뒤를 따르는 길 외는 방법이 없 습니다.”15)며 시어머님께 자신의 생각을 알린다. 남편이 죽고 가문을 이 을 자식마저 없는 상황에서 시부모에 의지하여 살아갈 명분이 없다고 여 겼던 그녀의 순절에 대한 모순적 당위성이다. 생명의 귀중함을 알면서도 삶의 의지를 꺾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그녀의 비극성은 다음 그녀의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여실이 드러난다.

“큰 언니가 형부를 여의는 바람에 아버지께서 돌봐주고 계신 마당에 이제 저마저 남편을 잃고 아버지께 신세를 질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가난한 선비 살림에 어떻게 여러 딸들을 돌보시겠어요?” 16)

14) “我只道他擧業已成, 不日就是擧人, 進士 誰想如此光景, 豈不誤我終身?”(吳敬梓 1995: 141)

15) “爹媽也老了, 我做媳婦的不能孝順爹媽, 反累爹媽, 我心里不安, 只是由着我到這 條路上去罷”(吳敬梓 1995: 562)

16) “我一个大姐姐死了丈夫, 在家累着父親養活, 而今我又死了丈夫, 難道又要父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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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지 않은 집안 살림인데다 언니에 이어 자신마저 집으로 들어오게 되면 아버지의 짐이 가중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기에 자신은 순절을 하 여 조금이나마 시름을 덜어주고픈 딸의 애처롭고 측은한 생각이다. 사실 그녀가 순절하는 이유는 여필종부의 예교를 지키기 위한 순절이 아닌 친 정부모의 시름을 덜기위한 순절이었다. 더욱이 친정아버지조차 봉건예교 에 빠져 딸의 순절을 부추기는 모습은 개인의 비극에 앞서 시대의 비극 이라 할 수 있다.

오경재는 하층민 여성들의 삶도 간과하지 않고 고스란히 작품 속에 그 려냈다. 빙낭은 어려서 배우 출신 하층민 집안에 민며느리로 들어가 이 름난 기녀가 된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를 내세워 관리들을 상대하며 마 님이 되는 것을 목표로 진목남이라는 공자와 사귄다. 빙낭과 진목남은 마치 한 쌍의 아름다운 재자가인의 모습을 보이지만, 사실 두 사람은 동 상이몽에 빠져있었다. 빙낭은 처음부터 진목남을 통해 그 친척이자 명문 자제인 서구공자(徐九公子)에게 접근하려는 의도였다. 그녀의 목표는 지 체 높은 집안의 마님이 되어 마음껏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다. 진목남이 빙낭과 관계를 유지하는 까닭은 그녀가 자신의 시를 높이 평가해주기 때 문이라 핑계하지만, 사실은 여색을 탐하기 위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 다. 결국 서로의 마음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나고 관계는 파탄난다.

오경재는 빙낭과 진목남의 가식에 찬 만남을 통해 지식인부터 하층여 성의 내면까지 깊게 뿌리내린 부귀공명에의 욕망을 풍자하였다. 물론 진 목남이란 인물에 초점을 두고 본다면, 시라는 매개체를 통해 속물 기녀 와 교류하는 타락한 재자가인의 말로를 풍자적으로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빙낭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의 삶을 통해 하층 여성의 비극 적 운명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녀가 처음 민며느리로 들어가게 된 것 도 사실은 그녀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어린 나이에 기녀가 되어 벼슬아치와 속된 남성

養活不成? 父親是寒士, 也養活不來這許多女儿!”(吳敬梓 1995: 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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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노리개 역할을 하며 인격적 수모를 당한다.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런 수모를 당하고 살아! 당신네는 돈이 많 으니 얼마든지 다른 기생을 하나 데려올 수 있잖아! 나 좀 살게 내보내 달란 말이야!”17)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자 하는 그녀의 절박함이 최고조에 달하는 장면 이다. 피를 토하듯 “나 좀 살게 내보내 달란 말이야!”라는 그녀의 ‘외침’

은 당시 여성의 비극적이고 단절된 삶에 대한 암울함을 단적으로 보여준 다. 결국 그녀는 칼을 들고 ‘목을 베겠다’, 줄을 가져다 ‘목을 매달겠다’는 소란 끝에 머리를 깎고 출가하며 끝을 맺는다. 결국 그녀는 아무 것도 얻지도 이루지도 못한다. 물론 작자의 풍자대상이기에 다소 과장된 면도 있겠지만, 하층 여성의 비극적 현실과 삶에 대한 애착을 이해하고 동정 하는 작가의 내심이 투영된 형상이다. 오경재는 최하층 기녀조차 부귀공 명의 노예가 되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설정을 통해, 과거제도로 심화된 부귀공명에 대한 욕망이 지식인 사회를 지배하고, 나아가 사회 구석구석까지 심각하게 오염 시켰다는 비판적 안목으로 빙낭이라는 비극 적 여성형상을 그려낸 것이다.

박지원의 <민옹전>에서 민옹의 아내는 늙은 남편의 출세를 기다리며 먹을 갈고 도와주다가도 때로는 그의 무능을 조롱한다. 대체적으로 부드 러운 감성을 지닌 여인이지만 당시 유교사회의 뿌리 깊은 여필종부의 이 념에서 벗어나지 못해 늦도록 남편의 출세만을 바라보는 무기력한 형상 이다.

“영감, 금년에는 까마귀를 그리시려우?”하니 민 옹이 기뻐하며, “당신은 빨 리 먹을 가시오.” 하고, 마침내 크게 쓰기를, “범중이 기발한 계책을 좋아하였 다.”하니, 그 아내가 더욱 화를 내면서, “계책이 아무리 기발한들 장차 언제 쓰시려우?”하니, 민옹이 웃으며 말하기를 “옛날에 강태공은 80살에 매가 날아 17) “我貪圖些甚么, 受這些折磨! 你家有銀子, 不愁弄不得一个人來, 放我一條生路去

罷”(吳敬梓 1995: 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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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듯이 용맹하였으니 지금 나는 그에 비하면 젊고 어린 아우뻘이 아니오?”

하였다.18)

집안의 가장이면서도 나이 칠십이 되도록 출세도 못하고 이상만을 꿈 꾸자 민옹의 아내가 질박한 어투로 남편의 무능을 질책하며 불만을 토로 하는 장면이다. 고달픈 현실에서 벗어나고픈 늙은 아낙네의 푸념이기도 하지만 부조리한 체제에 대한 작자의 풍자임을 유추할 수 있다. 당시에 는 ‘여필종부’와 ‘부부유별(夫婦有別)’의 봉건적 관념이 극에 달하던 시기 였기에 남성은 여성의 희생과 절대적인 복종만을 강요했다. <양반전>에 서 양반의 아내가 조금은 현실적이라면, 민옹의 아내는 오로지 남편의 출세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여필종부하는 봉건 여성의 전형을 보여준다.

<열녀함양박씨전>에서는 여성의 삶에 대한 비극성이 더욱 심화된다.

<열녀함양박씨전>은 과부의 수절을 소재로 봉건 예교의 폐단인 순절 의 지나침에 대해 완곡히 비판하고 풍자하는 내용이다. 사라져야 할 구 습이 도처에서 행해지던 세태를 묘사하며, 유교사상으로 인한 순절행위 와 과부의 개가를 금지시킨 사회제도까지 비판한다. 작자는 박녀의 삶을 통해 당시 여성들이 열녀라는 미명아래 받게 되는 무언의 압력, 남편이 죽어도 개가 할 수 없는 수절의 어려움 등 봉건시대 여성의 비극적 단면 을 보여준다. 그녀는 정혼자가 병에 걸렸음을 알면서도 예를 따르기 위 해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고 만다.

박녀가 아직 시집가기 몇 달 전에 ‘술중(述曾)의 병이 이미 골수에 들어 부부 관계를 맺을 가망이 만무하다 하니 어찌 혼인 약속을 물리지 않느냐’는 말이 있었다. 그 조부모가 넌지시 박녀에게 일러 주었으나 박녀는 잠자코 대 답하지 않았다.19)

18) “翁今年畵烏未?” 翁喜曰: “若疾磨墨.” 遂大書曰 ‘范增好奇計’ 其妻益恚曰: “計 雖奇將幾時施乎?”, 翁笑曰: “昔呂尙八十鷹揚, 今翁視呂尙猶少弱弟耳.”(박지원 2007, 下: 441)

19) 女未嫁時, 隔數月, 有言: ‘述曾病入髓, 萬無人道之望, 退期?’, 其大父母密諷其 女, 女默不應.(박지원 2007, 上: 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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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녀는 고을 아전의 딸로서 어릴 적부터 예의가 바르고 자식 된 도리 를 다하는 여성이었으며, 결혼 후 병든 남편을 잘 받들었지만 채 반년이 못 되어 죽고 말았다. 이른 나이에 과부가 된 그녀가 홀로 수절한다면 친척들이 불쌍히 여기는 신세가 되는 것은 물론 함부로 마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일이 자명하였다, 결국 그녀는 며느리로서 도리를 다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다. 결혼부터 죽음까지 그녀가 선택한 길이기는 하지만 사실 그 근원은 비인간적인 주변의 시선과 사회풍조에 서 비롯된 비극이다. 박지원은 열녀 박씨라는 비극적 여성을 통해 봉건 예교의 암묵적인 압박과 고통, 희망이 사라진 현실의 절망감 등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가슴아파했다. 오경재가 묘사한 왕온의 셋째 딸과 박 지원이 묘사한 열녀 박씨 모두 봉건예교의 폐단으로 인해 처참하게 희생 된 비극적 여성형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타의에 의해 수절을 강요받아야만 하는 그녀들의 비극적 삶은 당시 폐단에 대한 두 작자의 안타까움이자 소외된 여성들의 비극적 현실에 대한 항변이라 할 수 있다.

3. 하층민형상

<유림외사>의 주요 비판대상은 유림이다. 때문에 많은 지식인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지만, 당시 불균형적인 경제발전의 결과로 비참한 삶을 살 아가는 하층민의 상황도 상세히 그려내었다. 겉으로 보이는 사회는 평화 롭고 번영된 모습이지만, 그 내면은 온갖 부정부패로 계층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봉건 해악이 점차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청대 초기에는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한 여러 정책이 실시되고, 당시 많은 소금매매업자 가 출현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다. 그들은 막강한 부를 앞세워 부정 부패를 일삼았고, 결국 그 피해는 백성들에게 돌아갔다. 백성들의 삶은 나날이 피폐해져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빈곤해졌다. 다음은 우육덕이 선 창가에서 갑자기 강물로 뛰어들어 자결하려는 사람을 구한 후의 대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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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 몰락한 하층민의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인은 이 마을 농부입니다. 남의 땅을 몇 뙈기 빌려 농사를 짓고 있는데, 벼를 수확하면 땅주인이 죄다 가져가 버립니다. 아버님이 병으로 돌아가셨지 만 관을 살 돈조차 없습니다. 나 같은 놈이 살아서 뭐 합니까, 차라리 죽는 편이 낫지요!”20)

우육덕은 인품이 훌륭하여 마을에서 칭찬이 자자했으며, 수재가 되기 전에는 가족을 돌보기 위해 허드렛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어느 날 이 웃마을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강으로 뛰어드는 사람을 구 하고 사연을 들어보니, 악덕 지주의 횡포로 인해 돌아가신 아버지의 관 조차 살 수 없어 자결하려 했다는 처절한 외침이었다. 오경재는 번영과 혼란이 혼재한 시대의 그늘진 단면을 한 소작농의 암울한 삶을 통해 실 감나게 보여준다. 소설에서는 또한 악덕 지주의 횡포를 견디지 못해 산 으로 야반도주 한 후 궁여지책으로 도적질을 자행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보여준다.

곽역은 20년 동안 아버지를 찾아 지방 곳곳을 돌아다니는 효자로서 빼 어난 풍채에 기개도 남다른 인물이다. 어느 날 지인들과 회포를 나누고 길을 나섰다가 깊은 산속에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부부가 서 로 짜고 “여자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붉은색 윗옷을 입었으며, 입에는 시뻘건 천으로 만든 혀를 붙여 늘어뜨려”21) 산길을 가는 행인을 깜짝 놀 라게 하여 그들이 가진 물건을 탈취하는 장면이었다. 그는 분명 딱한 사 정이 있을 거라 여기고 용서한 후 자신이 가진 노자 돈까지 기꺼이 건네 준다. 그리고 남의 물건을 갈취하며 사는 연유를 묻자 속사정을 털어놓 는다.

20) “小人就是這里庄農人家, 替人家做着几块田, 收些稻, 都被田主斛的去了, 父親得 病, 死在家里, 竟不能有錢買口棺木. 我想我這樣人還活在世上做甚么, 不如尋个死 路!”(吳敬梓 1995: 426)

21) 女人被散了頭發, 身上穿了一件紅衫子, 嘴跟一片紅猩猩毡做个舌頭拖着,... (吳敬 梓 1995: 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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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은 목내입니다. 저희 부부도 원래는 착하게 살았습니다만, 요즘 들어 너무 춥고 배가 고파 견디지 못하고 이런 일을 벌였습니다. 감사하게도 이렇게 본전으로 쓸 돈을 주셨으니 이제부터는 개과천선 하겠습니다.”22)

목내라는 사내의 말을 통해 당시 사회의 부조리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동시에 하층민의 황폐해진 삶이 가져온 비극과 참 혹한 현실에 대한 작자의 풍자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목내는 원래 지극 히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했지만 경제 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생계가 어려 워지자 도둑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층민의 경제적 몰락은 어느 시기에 나 발생하던 일이었지만 오경재가 목도한 당시 사회는 거센 변혁의 시기 였다. 변혁의 가장 큰 요인은 소금매매업자의 고리대금 압박, 악덕 지주 의 착취, 탐관오리의 무자비한 횡포 등이 톱니바퀴처럼 연쇄적으로 맞물 려 야기된 것이었다. 결국 가장 기본적인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마지막 방법으로 자결을 시도하고 도적질까지 감행해야 했던 하층 민들의 비극적인 모습에서 당시 빈부격차를 비롯한 사회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연암소설에 보이는 하층민의 삶 또한 <유림외사>에서 보여주는 모습 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조선후기는 급격한 경제 환경의 변화와 신분제의 동요로 계층이 세분화되던 시기였다. 그 결과 시류에 편승하지 못한 양 반들이 하층민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지배계층인 양반 들은 사회 경제의 기본 질서마저 와해되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자신들 의 명분과 실리만을 유지하는데 급급했기에, 몰락한 양반은 물론 피지배 계층인 일반 하층민의 삶은 그야말로 고통의 연속이었다.

<광문자전>에서 당시 하층민들의 비극적 삶이 소상히 드러난다. <광 문자전>은 많은 재산과 권세를 가진 양반과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거 지도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주제로 권모술수에 둘러싸인 양반사회를 풍

22) “小人姓木, 名耐, 夫妻兩个, 原也是好人家儿女, 近來因是凍餓不過, 所以才做這 樣的事, 而今多謝客人與我本錢, 從此就改過了.”(吳敬梓 1995: 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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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는 내용이다. 따뜻한 품성과 의로운 성격의 광문이라는 거지는 신분 으로 인해 양반들에게 온갖 억압과 멸시를 받는다. 연암은 광문을 통해 당시 사회의 참상을 낱낱이 까발리며 위정자들의 가식을 드러냈다. 소설 은 시작부터 거지 아이들이 저잣거리를 떼 지어 다니며 구걸하는 내용을 묘사하고 있다. 격변기의 혼란으로 부모를 잃고 거지로 전락한 많은 아 이들이 몰락한 하층민들의 비극적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23) 주인공 광문 역시 일정한 직업도 없는 거지로서 종루시내를 어슬렁거리고 남들 에게 빌어먹으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 거지 아이들 패거리의 우두머리가 되고 그 중 한 아이가 배고픔과 병으로 죽 게 된다.

하루는 날이 몹시 차고 눈이 내리는데, 거지 아이들이 다 함께 구걸을 나 가고 그중 한 아이만이 병이 들어 따라가지 못했다. 조금 뒤 그 아이가 추위 에 떨며 거듭 흐느끼는데 그 소리가 몹시 처량하였다. 광문이 너무나 불쌍하 여 몸소 나가 밥을 빌어 왔는데, 병든 아이를 먹이려고 보니 아이는 벌써 죽 어있었다.24)

부모를 잃고 구걸하는 거지 아이들, 심지어 추위와 배고픔으로 병에 걸려 죽고 마는 거지 아이는 조선후기 번영에 가려진 어두운 뒷모습이 다. 양난 후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생활터전을 잃은 빈곤층은 처참한 현 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광문이라는 거

23) 조선후기 농업정책의 실패로 농민층이 세분화가 되기 시작했다. 광부, 어부 등의 새로운 계층이 양산되고 이 부류에 소속되지 못한 백성은 도시를 떠나거 나 산촌으로 터전을 옮겼다. 하지만 이마저도 되지 못해 정착을 하지 못한 부 류는 거지가 되거나 도적이 되어야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박지원이 활동하던 시기는 사회전형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농촌에는 부농이 생겨남에 따라 영세민들이 유민으로 전락하고, 도시에서는 도매상들이 부를 축적하자 영세민 들이 몰락하고 물가가 급등하는 등 사회적 모순이 곳곳에서 일어나게 된다.

(이기백 1978: 27)

24) 一日天寒雨雪, 群兒相與出丐, 一兒病不從. 旣而兒寒專纍, 欷聲甚悲. 文甚憐之, 身行丐得食, 將食病兒, 兒業已死.(박지원 2007, 下: 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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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의 의로운 행위를 칭송하는 <광문자전>은 실상 사리사욕에 젖어있는 양반계층에 대한 풍자이자 고통 받는 하층민의 비극에 대한 동정이다.

병들어 죽은 아이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다리 밑에 버려지거나, 광문 이 죽은 아이를 거적에 싸서 공동묘지에 묻고 우는 장면은 시대의 비극 이자 참상이다. 지배계층의 탐욕과 정치적 무능이 정작 백성의 삶에 어 떤 영향을 끼쳤는지 잘 보여준다. 박지원의 소설에 그려지고 있는 일반 하층민의 삶은 이처럼 녹록치 않았다. 물론 시대의 흐름을 타고 신흥부 자로 일어선 하층민도 있지만 소수에 불과할 뿐 대다수는 호구지책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갈 뿐이었다.

하층민의 비극적 삶은 <허생전>에서 군도(群盜)들의 형상을 통해 더 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허생과 도둑 무리의 만남은 변질된 사회질서의 모순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보여준다. 독서만 하던 허생은 부인의 면박 에 견디지 못하고 부자 변씨에게 돈을 빌려 장사로 큰돈을 벌게 된다.

때마침 가진 것도 갈 곳도 없는 수천의 백성들이 변산에서 떠돌다 도적 단을 만들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허생은 계책을 세워 그들과 담판을 짓는다.

허생이 “당신들은 처가 있소?” 하고 물으니, 군도는 “없소”하고 대답했다.

또 “논밭은 있소”하니 군도는 웃으며, “땅이 있고 처가 있으면 무엇 때문에 괴롭게 도둑이 된단 말이요”한다. 허생은 “정말 그렇다면 왜 아내를 얻고, 집 을 짓고, 소를 사서 밭을 갈고 지내려 하지 않는가? 그럼 도둑놈 소리 안 듣 고, 집에는 부부의 즐거움이 있을 것이요, 돌아다녀도 잡힐 걱정도 없고 의식 이 풍부할 텐데.”하니, 군도는 “그것을 어찌 원하지 않겠소? 단지 돈이 없을 뿐이요”했다.25)

평범한 농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 떠돌다 도둑이 되기까지의 질곡 된 삶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저 처자식과 함께

25) 許生曰 爾有妻乎 群盜曰 無 曰 爾有田乎 群盜笑曰 有田有妻 何苦爲盜 許生曰 審若是也 何不聚妻樹屋 買牛耕田 生無盜賊之名 而居有妻室之樂 行無逐捕之患 而長享衣食之饒乎 群盜曰 豈不顧如此 但無錢耳(박지원 2004, 下: 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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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픈 삶을 희망했던 그들은 허생의 권유로 무인도에 들어가 새로운 인 생을 살게 된다. 도적무리가 되기 전 그들의 비참했던 삶에 대한 묘사는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 즉, 정책의 실패와 신분체제의 불균형으로 인한 파열음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보여준다.26)

<유림외사>에서 우육덕이 강에서 구해낸 농민이나 곽역이 목도한 도 둑 부부, <광문자전>의 광문과 거지 아이들, <허생전>의 군도에 이르기 까지 평범하고 선량한 양민들이 몰락하여 거지나 도둑이 되고 마는 과정 을 보면 너무나 닮은 모습이다. 비극적 하층민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이들이야 말로 시대의 비극이었다. 양국의 격변기 혼란의 시대에 고통 받고 죽지못해 살아가는 하층민의 비극적 삶에 대한 묘사는, 오경 재·박지원 두 작가의 현실에 대한 통찰과 비판에서 비롯된 공통된 시대 의식이라 할 수 있다.

Ⅳ. 나가는 말

한국과 중국은 지리적 인접성과 유교문화로 인해 여러 영역에서 비슷 한 모습을 보인다. <유림외사>와 연암소설에서도 청과 조선의 유사했던 과도기적 혼란, 다양한 계층 인물들의 너무나 닮은 비극성, 그리고 두 작 가의 시대의식까지도 동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에 본고는 두 작가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지식인·여성·하층민 등 비극적 인물형상을 선택하여 분석하고 비교해 보았다.

오경재와 박지원은 모두 명문가 출신으로 전통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성장과정에서 가족의 성쇠를 경험하며 입신양명을 포기했다. 모순과 부

26) 조선후기 농·상·수공업의 경제적 성장은 양반사회의 신분체제에 변화를 가져 와 평민부자가 양반이 되거나 양반이 소작농으로 몰락하기도 하였다. 양인인 농민도 소작농으로 몰락하거나 농촌을 벗어나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도는 사람 들이 많았다. 이러한 신분체제의 동요는 여러 가지 사회적인 파란을 일으키게 되었고 결국 떠도는 무리는 도적떼가 되어 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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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로 가득 찼던 어지러운 현실에 좌절하고 분노하였기에 소설을 통해 세태를 풍자하고 비판하며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를 표현하였다. 그들이 처했던 청·조선의 시대적상황도 너무나 닮은 모습을 보인다. 봉건 말 불 합리한 사회구조, 과거제도의 폐단, 급속한 경제변화 등에서 비롯된 신분 제의 붕괴로 몰락한 양반 지식인들이 양산되며 시대비극으로 자리하였 다. 비극적 실상은 지식인뿐만 아니라 여성과 하층민에게서도 동일하게 보이고 있다.

비극적 지식인형상으로, <유림외사>에서는 봉건사상과 과거제도의 폐 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범진과 왕온을 통해 봉건예교의 사회적 폐단 은 물론 지식인들의 정신세계마저 철저히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보여준 다. 특히 팔고문의 신봉자인 범진은 과거제도라는 그림자에 끝내 벗어나 지 못하는 비극성을 보인다. 박지원 역시 정선양반의 무능함과 자신의 재능을 펼치지 못한 민옹을 통해 사회 부조리에서 비롯된 비극을 풍자하 였다. 특히 민옹의 비극성은 당시 불합리한 모순적 현실에 대한 비판이 자, 박지원 자신의 소외된 지식인으로서의 아쉬움과 고뇌에 대한 토로라 고 할 수 있겠다.

비극적 여성형상으로, <유림외사>에서는 노소저·왕온의 셋째 딸·기녀 빙랑을 통해 당시 남성중심의 봉건사회에서 소외되고 단절되어 제자리를 잃고, 예교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아픔을 보여준다. 연암소설 또한 민옹의 아내와 열녀인 박녀를 통해 봉건시대 여성이 겪었던 소외된 삶의 버거움을 보여준다. 여필종부에 따른 무기력, 수절과 순절 등 봉건 예교의 폐단으로 인해 처참하게 희생되는 나약한 여성의 비극적 단면을 뚜렷이 보여준다.

비극적 하층민형상으로, <유림외사>에서는 강에서 자결하려던 농민과 도둑 부부, 연암소설에서는 광문과 거지 아이들, 군도에 이르기까지 평범 하고 선량한 양민들이 몰락하여 거지나 도둑이 되는 비극적 현실이 그려 진다. 경제의 급변과 부패로 인한 소득불균형에 더해 신분제의 동요까지 겹치며 나락으로 내몰리는 하층민들의 비극적 상황묘사를 통해서 두 작 가의 고뇌에 찬 비판적 시대의식 역시 매우 유사함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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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그들의 소설은 다양한 계층 인물들이 사회 성 쇠와 맞물린 채 살아가는 모습을 거울에 비추듯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위에서 언급한 인물유형 외에도 적지 않은 등장인물이 봉건 말 양국의 비극적인 현상들을 잘 보여준다. 이 역시 두 작가 모두에게서 동일하게 보여 지는 시대의식의 발로이자, 그들을 통해 당시 혼란했던 과도기적 사회현실은 물론 서로 닮은 사상적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우리 가 배우고 계승해야 할 비판적 시대의식이자 개선해야 할 미래지향적 사 상이 되고 있다.

주요어

유림외사, 연암소설, 비극적 형상, 지식인, 여성, 하층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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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大杰(1984). 儒林外史與諷刺文學, 明淸小說硏究論文集. 長沙: 湖南人民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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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Han, Jongwan

Belong Dpt. of Chinese Language and Culture, Chosun University

E-mail jwhan@chosun.ac.kr

투고일 2019/12/10 심사일 2019/12/15 게재확정일 2019/12/2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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