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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부, 성공, 그리고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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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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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부, 성공, 그리고 야망

부, 성공, 그리고 야망에 대한 욕구는 비즈니스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 대부분 경제적인 재 산으로 대변되는 꿈을 현실화하기 위한 욕망의 문화 속에 사는 우리로써는 그다지 놀랄 일 도 아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러한 추구가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어떻게 해야 비즈니스에서 성공하면서도 신실한 제자로 남을 수 있을까?

우리는 둘 다 대학 교수이기 때문에 때때로 깜짝 퀴즈를 내는 특혜를 행사하곤 하는데, 보 통 사람들로 하여금 가까이 당면한 주제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지금 하려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당신이 이 장에서 다루는 내용물들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독려하고자 한다. 퀴즈의 내용은 성경이 돈, 성공, 그리고 야망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맞추는 것이고 모두 참 또는 거짓 형식의 문제이다. 자, 이제 문 제를 풀어보라. 답에 대한 힌트는 이 장을 진행해 나가면서 주도록 하겠다. 이 장이 끝 부분 에 같은 퀴즈가 답과 함께 다시 한 번 나올 테니 꼭 다시 풀어보기 바란다.

1. 성경은 천국이나 지옥에 관한 이야기보다 돈에 대해서 더 많이 언급하고 있다. (참, 거 짓)

2. 성경은 자신이 필요한 분량 이외에 부를 축적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한다. (참, 거짓) 3. 야망은 만족의 반대 개념이기 때문에 성경은 야망을 장려하지 않는다. (참, 거짓) 4.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매우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동질감을 느끼도록 할 수 있었다. (참, 거짓)

5. 성경은 가난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돕 는 하나의 미덕이라고 가르친다. (참, 거짓)

6. 성경은 개인의 돈에 대한 태도를 전반적인 영적 상태와 관련지어 생각한다. (참, 거짓) 7. 가난한 사람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려는 마음 없이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참, 거짓)

8. 초대 교회에서는 모든 물질적 재산을 처분하고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면서 살았다. (참, 거짓)

9. 예수께서 젊고 부유한 통치자에게 “네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고 말씀하신 내용이 오늘날 기독교인의 표준이다. (참, 거짓)

10. 자기 회사의 CEO가 되는 것이 목표인 사람은 너무 야심적이고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 이다. (참, 거짓)

11. 자신의 존엄성과 신앙을 타협하지 않고서도 비즈니스에서 성공할 수 있다. (참, 거짓) 12. 성경이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유혹들(탐욕, 우상숭배, 질투)에 굴복하지 않고는 부유해

질 수 없다. (참, 거짓)

복잡한 문제들이다. 하지만 만약 일터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우리 자신을 드리는 장소인 이상 야망, 성공 그리고 돈에 대한 고찰을 피할 수 없다. 탁월함과 성실함을 가지고 일할 때 이런 것들은 따라오게 되는데, 왜냐하면 일을 잘하면 자연스럽게 출세의 가능성이 트이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힘든 일과 생산성에 대한 보상으로 사회적 신분 상승을 기대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심은 일과 성경의 자족감과 물질주의에 대한 가르침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어려운 의문점을 남긴다. 따라서 성공과 부에 대 한 개인의 가치관은 그 사람의 영적인 성숙도를 알 수 있는 척도가 된다. (질문 6번)

이번 장에서는 3장에서 시작한 비즈니스와 영성에 대한 전반적인 주제, 즉 비즈니스는 개 인의 영적인 삶이 도전 받고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연단의 장이 된다는 내용을 계속해서 좀 더 심화된 형태로 논의할 것이다. 그리고 물질주의적 사고를 억제하는 투쟁을 계속하는 동시에 영적인 성장을 기르고영적인 성숙도를반영하는 부의 영향력을 제고해보도록 한다.

고대 사회의 부와 성공

돈과 경제력이란 과거나 지금이나 그 차이를 크게 평가하기 힘든 항목들이다. 고대사회에 서는 부와 극빈의 차이가 매우 극명했는데, 그럼에도 일부 무역에 종사하는 중하층 계급의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다함께 공존했다. 예수님의 가족은 목수 집안이었기 때문에 중하층 계 급이었던 것 같다. 오로지 농사만 지은 것이 아니라 장사가 가능한 물품을 만들었기 때문이 다. (질문 4번) 또한 제자들도 어느 정도 안정적인 재정 수단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 는데, 만약 매우 가난했다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그들의 생업과 가족들)을 버렸 다는 말의 앞뒤가 좀 맞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9장 27절) 당시의 대부분 사람들 은 최저생활이 가능한 정도의 농업, 목축, 그리고 무역 등을 하면서 살았고 따라서 농장이 생산성 있는 주요 자산에 속했다. 그러나 아주 적은 숫자의 지배계층만이 대부분의 부를 소 유하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장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일을 했기 때문에 지 배계층과 대중들 사이의 경제적인 불평등은 매우 컸다.(주1)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 저히 경제적 약자로 내몰리며 불평등을 감내하며 살 수 밖에 없었다.

고대 사회의 대부분의 경제 상황은 경제학자들이 소위 일컫는 “제로섬(zero sum)” 상태였 다. 제로섬이란 경제 자원은 상대적으로 고정된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은 주 로 다른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성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 대해 역사학자 더글라 스 오크맨(Douglas Oakman)은 이렇게 설명했다. “낮은 생산성과 사회의 불평등은 어짜피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재산은 이미 다 나누어졌기 때문에 절대량은 더 늘 수 없다는 인식 을 낳았다.”(주2) 즉 전체 경제상태가 하나의 파이라고 가정해보면, 한 사람이 큰 조각을 가 져가면 다른 사람이 작은 조각을 갖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렇게 경제적인 승자와 패자와 의 관계는 마치 원인과 결과의 관계 같아서 부자가 더 부유해질수록 보통 가난한 사람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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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해지게 되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부자들의 부유함은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으로 만들 어지게 되는 구조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대 사회에서는 부의 축적 그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이다. 그때는 엄청난 부와 엄청난 가난이 함께 공존했던 시대이기 때문에 부유함은 지금보다 더 타인의 가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주3)

또한 이것이 바로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약점을 노려서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을 강하게 질타했던 이유였다. 예를 들어서 아모스는 고대 이스라엘의 부자들에게 이 렇게 말했다:

이스라엘이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힘없는 사람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 처넣어서 짓밟고,

힘 약한 사람들의 길을 굽게 하였다. (아모스 2장 6-7절) 또한 예레미야는 이렇게 표현했다:

불의로 궁전을 짓고, 불법으로 누각을 쌓으며,

동족을 고용하고도, 품삯을 주지 않는 너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

그런데 너의 눈과 마음은 불의한 이익을 탐하는 것과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과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에만 쏠려 있다. (예레미야 22장 13,17절) 반대로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사람들은 칭송되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서 처리해 주면서, 잘 살지 않았느냐?

바로 이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예레미야 22장 16절)

잠언도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단언했다.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지만,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 (잠언 14장 31 절)

가난한 자를 어떻게 억압하고 그들이 취약하다는 점을 어떻게 이용하는지에 대한 예를 하 나 들어서 설명해볼까 한다. 작은 땅뙈기를 가지고 가족을 위해서 농사를 짓는 한 남자가 있다고 해보자. 그는 가뭄, 게으름 또는 잘못된 농사법 때문에 더 이상 가족을 돌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 때 어떤 자본가가 와서 어려운 시기를 이겨낼 수 있도록 돈을 빌려주었 는데 그 이자가 너무 과해서 결국 갚지 못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물론 이 남자에게는 가진 재산이라고는 그 땅뙈기밖에 없기 때문에 그 땅이 담보가 된다. 이 남자가 돈을 갚을 수 없 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채권자는 돈 대신 땅을 가져가고 이 남자는 소작인이 되어 가족 입 에 풀칠 할 수 있을 정도만의 생산물을 남기고 다 새로운 땅주인에게 바쳐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건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이용하는 예 중에 하나일 뿐이다.(주4) 이러한 행태는 선지자 이사야가 옳지 않다고 꾸짖었던 행동들과 비슷하다.

너희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 나가, 땅 한가운데서 홀로 살려고 하였으니,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 (이사야 5장 8절, 강조 있음)

이것이 바로 구약성경에서의 법이 어떤 사람이 파산하게 되면 그 친족들로 하여금 그 땅을 사서 언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명한 이유이다. 그래야만 원래 땅주인의 가족이 생활의 수단 없이 궁핍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레위기 25장 25-28절) 이 조항을 보면 당시의 법이 가난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지 않으려 했던 것과 경제적 안정을 위해선 땅의 소유가 일차 적이라고 추정했던 것을 알 수 있다.(주5) 이러한 법의 정신은 고리대금을 금지하는데서도 드러나는데 단 이때의 고리대금이란 상업 자금 대출이 아니라 생활에 필수적인 물품을 사는 사람들에게 매기는 이자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개인이 굉장히 심각한 경제적 사정에 처해 있을 때 그 어려움을 비즈니스적 기회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 즉 그 경제적 취약 상태를 이 용하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이들에게는 비즈니스적 접근보단 자선적 도움이 필요하 다.(주6)

고대 사회에서는 개인이 합법적으로 부를 저축할 수 있는 기회가 매우 적었다. 정치적인 힘이 있는 사람들이 세금이란 명분으로 평민들로부터 돈을 갈취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지 배자들은 이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모았고 예수님 시대의 세리들도 다르지 않았다. 솔 로몬 왕 또한 통치기간 동안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세금을 과다하게 부과하고 백성들의 노동력을 동원했다. 어떤 사람들은 도적질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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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을 쥐어짜냄으로써 더 큰 부를 가진 경우도 존재했다. 고대 사회에서 무역이 나 상업으로 부유해진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물론 아브라함이나 욥은 그렇긴 했지만 이들 이 보편적이었기 보단 예외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외에 대부분은 도덕적으로 문 제가 될 소지가 있는 수단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희생을 통해서 부유해졌다.(주7) 성경은 위 와 같은 이런저런 유혹에 당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부를 쫒지 말라고 조언한 것이다.(디모데 전서 6장 9절) 그리고 부유함을 추구하다가 도덕적 덫에 걸릴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유는 당 시에는 비도덕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는 부유해질 방법이 매우 적었기 때문이다. 즉 재 력이 선천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부를 얻기 위한 수단들이 너무나도 자주 도덕적, 영 적 타협을 수반했기 때문이다.(주8)

야망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고대 사회의 일반 사람들은 출세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의 사회경제적인 위치는 태어난 가정에 의해 결정되고 유지되기 마련이었다.(주 9) 그래서 사회의 신분 변동도 드물었고 야망을 실현할 합법적인 길도 매우 적었다. 성경이 만족을 매우 강조하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고, 만족의 반대가 야망이 아니라 질투인 것도 이 때문이었다.(퀴즈문제 3번) 예를 들어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각각 자기의 직업을 가지고 자기 손으로 일해서 살아가십시오.”라고 조언했다.(데살로니가전 서 4장 11절) 이렇게 말한 이유 중 하나가 만족은 하나님이 필요한 모든 것을 적절히 공급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완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모습을 의미했기 때문이 다. 이것이 질투하지 말라는 말씀의 배경이다. 또한 하나님이 필요한 모든 물질을 충분하게 채워주신다고 이미 추정하기 때문에 탐욕스러움을 금지했다.(출애굽기 20장 17절, 신명기 5 장 21절) 하지만 그 이유뿐만이 아니라 당시에는 보통 비도덕적인 사람과 결부되거나 미심 쩍은 행동을 수반하지 않고서는 사회경제적인 출세를 성공시키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했 다.

즉 당시에는 “무일푼에서 거부로”되는 경우를 사실상 찾기 힘들었다. 한사람이 부자가 되면 서 동시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은 달성되기 극히 힘든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근 대에는 산업화된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경제체제가 혁명적으로 바뀌게 되었고 따라서 제로섬 게임 식으로 부를 취하는 것은 옛말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개인이나 회사가 충분히 합법적으로 이윤을 추구할 수 있고 파이의 크기는 늘어나고 있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이 윤은 부의 창조이다. 따라서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 같은 사람들이 엄청난 부자가 된다는 것이 꼭 다른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빈곤해졌음을 뜻하지 않는다.(주10) 또한 빌 게이츠나 워 렌 버핏이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이득을 취한 것도 아니다. 현대의 시장 경제 체제에서는 지속적으로 부가 창출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이 경고하고 있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서도 부 자가 될 수 있게 된 것이다.(퀴즈 문제 11번) 오늘날의 시장경제 체제는 옛날의 농업의 생존 경제 체제보다 훨씬 더 쉽게 부자이면서 동시에 고결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하지만 일부 국 가들, 특히 잘 알려진 많은 개발도상국 같은 경우에는 여전히 고대 사회의 경제 형태를 가 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나라에서는 제로섬 게임이 어느 정도 여전히 적용되어 많은 사람들 이 일상적으로 경제적 불의에 노출되어 있고 개선되리라 싶은 희망조차 없는 심각하게 위험

한 빈곤에 처한 상태로 살아간다. 많은 개발도상국에선 극심한 빈부격차가 도처에 존재하고 이는 고대 사회의 경제 상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번성하는 나라에서 무일푼에서 거부가 되는 경우가 더 이상 드문 일이 아니다. 사회 계층의 이동도 노력하고 교육을 받는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오늘날에도 인구 중의 일부가 가난에 갇혀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스스로를 위해 열심히 일해서 가난 을 극복하고 중산층으로 편입하기를 기대한다. 즉 오늘날의 시장 경제체제의 사회에서는 도 둑질, 과다한 세금부과, 또는 억압 등을 행하지 않고 부유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많은 비 즈니스들이 사람들의 필요를 파악하여 적법한 방법으로 생산한 물품과 서비스를 팔아서 성 공을 한다. 도덕적으로 적법한 방법으로 부를 획득하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여전히 불 법적이고 비도덕적인 수단으로 부자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적법한 비즈니스의 모양 이지만 실상은 노동 착취적이거나 치밀하고 기만적인 재정 술수를 써서 부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출세를 위해서 비도덕적일 것까지는 없더라도 정해진 절차를 무시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근면함과 야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늘날 적법한 비즈 니스를 통해 사회적인 신분 이동과 어느 정도의 부 축적을 이룰 수 있게 되어 있다.

부(富)와 기독교 세계관

성경 시대와 오늘날은 경제적 환경 측면에서 많이 다르기 때문에 부와 소유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이 좀 어려울 수도 있다. 어려운 이유 중에 하나는 성경이 천국이나 지옥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합친 것보다 물질과 돈에 대한 이슈를 다루는 횟수가 더 많다는 데 기인한다.(질문 1) 사람들은 성경이 다루는 돈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순진하게도 물 질만능주의는 전적으로 사람 마음에 관한 문제이고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마음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가정하며 돈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될 거라고 생각 한다. 하지만 과거의 경제 상황과 오늘날의 정보화 시대의 경제상황의 차이점을 짚어가면서 성경의 문맥을 이해해야 한다. 성경이 구체적으로 명하는 경제적 삶의 모습은 오늘날 그대 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예를 들어서 당시에 땅을 배분하는 법(희년과 기업 무름)은 단순한 소유권을 가정하고 확장된 가족 개념을 적용하여 가족 안에서 땅이 유지될 수 있도 록 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이 법들은 오늘날의 복잡한 부동산 시장과 지적 재산권 같은 새 로운 형태의 소유권에 적용하기에는 너무 어렵기 때문에 진지하게 희년이나 기업 무름을 재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또는 사도 바울이 “손으로 일하라”라며 이를 근 면함의 척도로 삼을 것을(데살로니가전서 4장 11절) 꼭 수공일이나 육체노동을 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신적 노동을 하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수공업 에 종사하고 있는 오늘과 같은 정보화 시대에 적합하지 않다. 성경의 돈에 대한 가르침을 배울 때는 대부분의 말은 문화와 문맥을 타고 내려오는 일반적인 원칙을 찾아야 한다. 그래 야 매우 상이한 사회경제적인 상황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돈, 부, 야망을 이해하기 위해 무엇으로 성경적 변수들이 구성되어 있나를 함께 알아보고자 한다.(주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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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물질적 소유의 궁극적인, 최후의 주인이시다. 우리가 소유하는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다 하나님의 것이다. 시편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땅과 그 안 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 온 누리와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것도 주님의 것이 다.”(시편 24장 1절) 그리고 우리의 모든 소유와 부는 주님이 선물로 주신 것이다.(시편 115 장 16절) 이 규칙이 적용된 구약성경의 사례 중 하나는 이스라엘 민족이 고대 사회의 가장 주요한 경제적 자산이었던 땅을 거래하는 방법이었다. 땅은 영원히는 사거나 팔수는 없고 영원히 빌릴 수만 있었다. 또한 희년이 오면 땅은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었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레위기 25장 23절, 강조 포함)(주12) 우리가 어떤 부를 소유하고 있던 간에 그건 모두 하나님의 선한 선물일 뿐이므로(전도서 5 장 19-20절, 디모데전서 6장 17절) 충분히 즐기고 그에 대한 신탁 책임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소유의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라는 개념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개념은 구약 성경과 신약성경 모두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며 예수님의 주된 비유 중에 하나도 달란트에 관한 이야기이다.(마태복음 25장 14-30절) 그 비유를 보면 주인이 각각의 종들에게 자원을 맡기는데 단 그 자원을 책임감을 가지고 생산적으로 사용할 것을 주문했다. 이 이야기의 핵 심은 주인은 그가 없을 때 종들이 맡긴 자원을 생산적으로 활용하길 기대한다는 것이고, 그 자원으로 종들이 얻은 이익을 취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자원이라는 것 은 돈보다 더 넓은 범위의 의미이지만 달란트가 원래 종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 명하다. 따라서 종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자원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이고 주인의 이익을 위해서 주어진 자원들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

2. 인생은 무언가를 축적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예수님은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 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누가복음 12장 15절)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또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물질적 필요]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태복음 6장 33절)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 부를 쫒 는 사람들을 꾸짖으셨다.

나(스콧)는 몇몇 돌아가신 친척들의 유품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엄숙한 교훈을 얻게 되었다. 그분들이 돌아가신 후에 나와 내 아내는 남겨진 자산들을 처리해야 했다. 재산 이 딱히 없었던 한 친척 분의 경우만 오래된 사진이 가득한 가방 하나만 우리가 보관하고 나머지는 쓰레기 수거인을 불러 전부 버려달라고 했지만 말이다. 두 번째 친척의 경우 그가 소유했던 모든 것들이 사실상 누군가에게 증여되거나, 상당히 할인된 가격에 팔리거나, 그것 도 아니면 버려졌다. 이 과정을 진행하면서 기억에 남는 것은 한 사람이 일생에 걸쳐 모았 던 것들이 가차 없이 내다 버려지는 과정이었다. 이 작업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는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 우리 가 보관한 것이라고는 고인들의 인생을 기억할만한 추억들이 담겨 있는 물품들뿐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사도 바울이 우리가 세상에 올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갈 때도 마찬가지라고 말한 내용을(디모데전서 6장 7절)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3. 부와 재산에 대한 소유욕을 초월하여 너그럽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라. 만약 개인이 소유한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다면, 그리고 인생에 있어 무언가를 소유 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면 재산에 대해 초월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라고 말했다.(디모데전서 6장 18절)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말이다.(고린도후서 9장 7절) 또한 에베 소서 4장 28절에 보면 궁핍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돈을 어떻 게 다루냐, 특히 얼마나 아낌없이 나누어주느냐가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측정하는 척도로 인식되어 온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시며 돈을 어디에 투자하는가를 보면 우리의 마음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는 뜻을 전하셨다.

(마태복음 6장 19-21절, 질문6). 이게 바로 예수님께서 젊은 부자 청년에게 모든 재산을 나 누어주라고 하신 이유이다. 하지만 이건 오늘날에 필수적으로 지켜야 할 규범 같은 것은 아 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부유하면서도 예수님을 따랐던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고 이를 통해 재산을 축적하는 것이 성경에서 금지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질문 9) 그래도 젊은 부 자 청년의 이야기에서는 그의 재산이 마음의 중심을 표상하는 상징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재 산을 처분하는 것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일 수 밖에 없었다.

사도행전 초반에 묘사된 교회는 사람들이 모든 물품을 공동으로 소유한다고 했기 때문에 (사도행전 2장 44절)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초기 공동체적 생활을 표방한다고 말하기도 한 다. 즉 모든 세상적인 물질을 다 포기하는 것이 규범은 아니었지만 교회 일원의 기초적인 물질적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소유권의 개념을 좀 느슨하게 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사도행 전 2장 42절이 명시하고 있듯이 초대 교회의 사람들이 재산을 팔았던 것은 소유 포기의 개 념이 아니라 즉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였다.(주13) 또한 그들은 수차례 경제적인 압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진 모든 세속적인 물품들을 다 매각해버리지는 않았다. 초대 교회는 항상, 어떤 때는 세상 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항상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다.(사 도행정 11장 27-30절, 고린도후서 8장 1-12절) 하지만 또한 사도들은 개개인이 자기 자신, 가족,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양하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에베소서 4장 28절, 데살로니가후서 3장 6-10절) 따라서 일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교회 공동체의 소유를 나눠 가질 자격을 부여받지 못했다.

성경은 가난하고 경제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특별히 강조한다. 성경을 통틀어서 개인의 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계속해서 영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로 인 식되어 왔고(질문 7), 예언자들은 개인의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행위와 이스라엘이 국가적 차원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영적인 헌신과 관련지어 이야기하곤 했다. 예를 들 어서 선지자 이사야는 진정한 종교 의식은 의식과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정의 추구를 위해 가난한 자들을 돕는 실제적인 행동에 있다고 말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5)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야 58장 6-7절)

이 장의 초반부에서 예레미야가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것을 하나님을 아는 것(“그는 가난 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서 처리해 주면서, 잘 살지 않았느냐? 바로 이것 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예레미야 22장 16절, 강조 포함])이라고 했던 것과 잠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잠언 14장 31절)]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 이 부분을 두드러지게 행하심으로써 계속해서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심을 보여주셨다. 아니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시작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우선되는 증거로써 이들을 돌보신 것이다. 누가복음에 기 록된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는 다음과 같은 자신의 미션이었다.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 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누가복음 4장 18절) 즉 당시에 소외된 자들을 섬기는 예수님의 사역은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실현하는 것으로 받아들 어졌다.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의 제자가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야인지 직접적으로 물었을 때 도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 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 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마태복음 11장 4-5절)라고 대답하셨다. 따라서 성경이 보편적으 로 베푸는 마음을 키우기를 요구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긍휼의 대상의 우선순 위가 가난한 사람이라는 점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야고보서는 구 약 성경에 이미 언급되어 있는 이 우선순위를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말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 부들[여기서 고아들과 과부들이란 고대 사회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취약한 층을 대표하는 단 어로 쓰였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야고보서 1 장 27절)

4. 성경은 인생과 자산을 하나님의 선한 선물로써 즐기도록 허락했다. 번영은 궁극적으 로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축복하신 결과이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의 근면함도 필요하다고

말하지만(잠언 10장 4절)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모든 소유 재산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다. 따라서 적법하게 일해서 취하고 아낌없이 잘 나누어 줄 수만 있다면 부유해지고 하나님 의 선물로써 그 부유함을 즐기는 것은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질문 2,12) 전도서는 “하 나님이 사람에게 부와 재산을 주셔서 누리게 하시며, 정해진 몫을 받게 하시며, 수고함으로 써 즐거워하게 하신 것이니, 이 모두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다.”(전도서 5장 19 절, 강조 포함)이라고 말했다.(주14)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풍성하게 하시겠 다는 약속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는 비유를 쓰셨으며(주15), 이를 통해 이스 라엘 민족이 그 풍성함의 축복을 즐기기를 원한다는 의도를 분명히 밝히셨다. 또한 창세기 에 나오는 에덴동산과 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도 풍성함을 주시겠다는 동일한 하나님 의 비전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오늘날의 축복은 모세의 율법에서와 같이 민족의 번영에 국 한되어 있지는 않지만 자신의 사람들에게 풍성함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원칙은 분명한 것 같다. 물론 이 원칙은 필요한 사람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마음과 동정심이라는 명령과 잘 균 형이 잡혀야 한다. 주의해야 할 점은 여기서 하나님의 선한 선물로써 인생을 즐기라고 강조 하는 말이 번영신학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공의와 신실함에 대한 축복으로 반드 시 물질적인 풍요를 약속하신다는 논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정말로 인간의 신실함 을 축복으로 보상하시지만 그 축복이 반드시, 아니 일반적으로 재정적인 축복이지는 않다.

오늘날에는 개인의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과 부유함 사이에는 불가피한 관계가 없다고 본다.

또한 가난이 성경의 미덕도 아니다. 가난한 자들과 마음이 가난한 자들은 그들이 가난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몫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기 때문에 복이 있다고 하는 것이 다.(마태복음 5장 3절, 누가복음 6장 20절; 질문 5)(주 16) 지혜 문학에서 가난은 종종 근면 함, 지혜, 그리고 품성의 부족과 관련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잠언 6장 6-11절, 10장 4절, 24장 30-34절). 비록 오늘날에는 개인의 품성과 아무런 상관없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구조 적인 문제들도 존재하지만 말이다. 따라서 부유함이나 가난 그 자체가 굳이 개인의 영성을 말해주지 않는다. 성경에는 내내 악인은 번성하고 의인이 가난으로 고통 받는 내용이 나오 는데, 왜냐하면 악인은 영적인 성숙을 위해 별로 노력하지 않거나 아예 영성이 결핍되어 있 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시편 저자는 악인의 부유함과 안락함에 대해서 이렇게 한탄했다.

그것은, 내가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가 악인인데도

신세가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구나.(시편 73장 3,12절)

한편 신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이 예비해 주시는 삶의 즐거움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은 자신의 가르침을 전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대는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명령하여, 교만해지지도 말고,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고, 오직 우리에 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십시오.”(디모데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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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17절, 질문 2번,12번) 즉 하나님께서는 만족(‘가지고 있는 것을 원하다’로 정의된다), 돈 이 아닌 안전을 위한 하나님을 신뢰함,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선물로써 삶을 즐기라는 명령 을 수행하기 위한 재산에 대한 관대함을 명령하신다.

5. 인간의 안전을 위한 궁극적인 신뢰의 원천은 하나님과 그의 베푸심이지 돈이 아니 다. 성경은 전반적으로 재물을 하나님의 선한 선물이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를 추 구하거나 소유하려는 마음이 유혹적이지 않다고 하지는 않는다. 성경이 자주 말하는 부유함 의 위험 중에 하나가 바로 재산과 우상숭배와의 관련성이다. 예수님과 사도들 모두 신실하 게 따르는 사람 중에서도 부유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보아 이 관계가 불가분하다고 할 순 없지만 주로 주의를 받는 흔한 관계이긴 하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우상숭배에 굴복하 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심각한 문제인데, 그 중에도 하나님의 자리에 재산을 올려놓는 것은 정말 빠지기 쉬운 유혹이다. 따라서 성경은 반복해서 경제적인 안정을 위해 재산을 믿지 말 라고 경고하고 있다. 일례로 시편에서는 저자가 재물을 믿는 사람들을 한탄하는데, 돈이 하 나님이 주관하시는 우리의 생명을 속량할 수 없기 때문이다.(시편 49편 6-7절) 예언자들도 세상에서의 완전한 안전을 위해 부, 지혜, 또는 권력을 믿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고 촉구한다.(예레미야 9장 23절) 신약성경도 하나님 대신 재물을 믿는 것에 대해 경고 하고 있다. 왜냐하면 부는 너무나도 불완전하고 하나님은 온전히 신실하셔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기 때문이다.(디모데전서 6장 17절) 더군다나 예수님께서도 재물이 하나님 나라 에 들어가는데 방해물이 될 수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셨는데(마태복음 10장 24절), 이는 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주 비도덕적인 활동에 연루될 수 있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 는 대신에 부를 신뢰하게 되는 정신적인 위험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차대조표가 인간의 정체성이나 확신의 근거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주17) 크레이그 게 이(Craig Gay)는 돈이 “그 자신이 최종적인 결론이 되는 속성이 있고 따라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최종 목표가 되었다.”(주18)라고 말하며 위험을 경고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 람의 순자산이라는 개념은 가치를 완전히 재정상으로만 측정하기 때문에 인간의 가치 또한 재산적인 측면에서 계량화하여 저평가 할 수 있는 위험이 있으므로 매우 문제가 많은 개념 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게이는 돈이 인간의 세계관을 지배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 중에 하나가 “인생은 상품화된 뜻, 가치, 그리고 의미에 영향 받기 쉬운 혼합물의 일종으로써 경 험되어진다.”는 식으로 모든 것을 돈으로 계량화해서 가치를 매기게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 다.(주19) 사회학자 로버트 우드노(Robert Wuthnow)도 “돈은 주관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정 체성과 관련 된다”며 돈이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는 결론으로 게이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주20)

또한 인간은 구입하는 물품으로 자신을 정의해서도 안 된다. 그것이 집의 위치나 크기이든, 몰고 있는 차의 종류이든, 또는 어떤 문화가 사람을 가치 있어보이게 만드는 다른 소유물들 이든 상관없이 말이다.(주21) 이 문제는 소비자 문화가 “브랜딩(branding)"으로 정의되는 오 늘날에(8장을 보라) 단번에 알아차리기에는 생각보다 좀 더 미묘할 수 있다. 브랜딩은 소비 자들이 특정한 상품, 그것이 옷이든, 차든, 전자 기계든, 해당 문화가 가치를 부여하는 아이

템이든 어떤 상품에 대해서 특정한 브랜드라고 알아보는 방식을 말한다. 카톨릭 신학자 톰 보두인(Tom Boudoin)은 브랜딩은 소비자들이 자기 자신을 정의하는데 영향을 미칠 수 있 을 뿐만 아니라 특정한 그룹이나 하위문화에서 자신이 적합한지를 결정하고, 심지어 각자의 성공에 대한 정의를 형성시킬 수도 있다는 점을 짚어냈다. 특히 정체성을 형성하는 단계에 있는 젊은이들이나 십대들의 경우 더 브랜드가 말하는 다양한 의미와 정체성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또한 보두인은 소위 ”인생을 브랜딩한다“라는 개념에 대해 ”만약 젊은이들이 자신 의 정체성이라고 명명하는 특정한 브랜드에 정착하게 되면 어른이 되고 중년이 돼서도 그 브랜드를 자신의 정체성 중에 일부로 흡수할 가능성이 많다“는 점을 지적했다.(주22) 그리고 이것이 광고의 장기적인 목적 중에 하나이다. 광고주들은 소비자들로 하여금 상품을 통해 자신을 정의하게 만들었을 때가 성공한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주23)

우리 문화의 고질적으로 자리 잡은 물질주의를 해결할 방법 중에 하나는 게이가 “걱정 없 음(lightheartedness)"라고 부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믿음에 의거해 돈에 접근하는 것이다. 후기 가톨릭 신학자 리처드 존 뉴하우스(Richard John Neuhaus)는 재물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발한“ 관점을 취해보기를 권한다.

요점은 재물이라는 것은 취하는 것이든 만들어내는 것이든 간에 정말 별로 중요하지 않다 는 것이다. 소유에 목숨 건 탐욕스러운 자들이나 올바른 경제적인 질서를 만들려는 종교적 인 이론가들은 둘 다 이 요점을 놓치고 있다. 즉, 둘 다 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한다. 경 제생활과 부의 창출에 대해 신학적으로 잘 알고 하는 감사는 우연한, 어떤 여부에 따른, 운 에 맡긴,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경제생활을 기발하게, 그리고 호기심을 갖고 대함으로써 이 루어진다.(주24)

물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는 이렇게 생각하기 힘들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 한 것은 근면함이 중요하다는 것과 자기 자신 및 자신에게 달려 있는 사람을 돌봐야 할 의 무가 있다는 점이고, 이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이걸 잊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 세계관에 따른 성공과 야망

언뜻 보면 성경은 야망을 대단치 않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조용하게 살기를 힘쓰십시오.[Make it your ambition to lead a quiet life.]”라고 교회에게 명하듯이 말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1절) 성경에서 야망을 가지라고 말한 부분은 디모데전서 3장 1절에서 바울이 감독의 직분을 장려한 것 밖에 없다. 고대 상황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개인이 경제 적인 야망을 추구하기에 유효한 수단이 적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 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오늘날 성공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해줄 말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1세기 무렵에 사회경제적인 신분 변화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적었다고 해서 성 경이 비즈니스에서의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질문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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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어쨌든 성경은 고결한 “세상적인” 성공 예시들을 보여준다. 아브라함과 욥은 부유한 사 람들이었고,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 자리까지 올라갔으며, 느헤미야는 바빌론 포로시기 이후 에 페르시아의 고위 관직자였다. 또한 다니엘은 바벨론 문화에서 성공하여 60년 동안 여러 왕을 섬기며 사실상 왕정을 이끌었고, 신약성경 시대에는 예수님과 사도들을 지지하던 부유 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핵심 간부단들이 존재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볼 때 하나님께 신실 하면서 동시에 성공하거나 야망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전혀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그 동 기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면 말이다.(질문 11)

그러나 분명히 기독교 세계관적 성공이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지 짚어볼 필요는 있다. 분명 히 말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에서 말하는 성공은 개인의 대차대조표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또한 영향력 있는 자리에 오르는 것과도 별로 상관이 없다. 유명해지는 것도 그렇다. 어쨌든 사람을 감옥에 가게 하는 것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유명해 질수도 있는 것이니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은 일반적으로 성공이라고 여겨지지만 사실은 다 잘못된 기준들이다. 당신의 일이 당신의 제단이라면, 진정 하나님을 섬기는 변혁적인 장소라면 이런 세상적인 기준으로 성공 을 측정하진 않을 것이다.

나의(스콧) 친구 벤(Ben)이 법조계 일을 시작했을 때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하고, 부 유하고, 잘 알려진 법정 변호사를 도와 일했다. 이 변호사는 법조계 사회에서 선망의 대상이 었고 같은 회사의 많은 변호사들이 그의 직업적, 재정적 성공을 동경했다. 하지만 벤은 그를 알면 알수록 그의 개인적인 삶은 별로 동경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는 철저한 일 중독자였고 이 때문에 여러 번 결혼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자녀들과의 사이 조차도 멀어지게 되었다. 사실 그가 심장마비로 병원에 실려 간 후에도 그를 집으로 모시고 갈 수 있고 또 그러려고 했던 사람은 그의 비서 밖에 없었다. 그의 가족이나 친구 중 누구 도 그를 집으로 데려다 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 변호사는 사회적인 기준에서 성공한 사람 이었지만, 성공의 사다리를 열심히 올라가다 보니 결국 그 사다리가 잘못된 벽 쪽으로 기울 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한 대표적인 예인 셈이다.

위 예와 마찬가지로 통제할 수 없는 야망은 도미닉 오르(Dominic Orr)의 삶을 거의 망쳐 놓았다. 오르는 자극적인 포춘(Fortune)지의 커버를 “CEO의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장식하 며 이목을 끌었던 사람이다. 스스로를 “가차 없이 공격적인”이라고 묘사한 그는 전형적인 워커홀릭이었다. 성공적인 CEO로써 공개적으로 두 개의 실리콘 밸리 첨단 기술 회사를 운 영했지만 그 대가는 자신의 결혼 생활과 거의 아이들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생활하는 것이 었다. 치료를 받고, 우울증을 겪었으며, 잠시 일을 떠나 있기까지 하면서 고통스럽게 보낸 9 년의 시간을 통해서 그는 결국 올바른 시각을 되찾았다. 그는 업계로 복귀하면서 또 다른 신생기업의 CEO를 맡았는데 전에 부하를 마구 부리던 방식에서 탈피한 모습이었다. 마침내 자신의 인생이 통제불능으로 달리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은 아들이 부지깽이와 자신의 스케 이트보드를 가지고 차 쪽으로 왔을 때였다. 그는 “난 아빠한테 중요한 것을 부셔버리고 싶 었어.”라고 말했다. 결국 오르는 기업에서 최고 자리에 있지만 개인의 삶 측면에서는 바닥인 것을 깨닫고 힘겹게 일하는 방식을 바꾸어 두 자녀와의 관계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미 결

혼 생활은 되돌이킬 수 없었지만 말이다.(주25)

이와 대조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추앙되는 인물인 테레사 수녀를 생각해보자. 그녀가 남긴 유산은 죽음 이후에도 남아 있다. 테레사 수녀는 생애 대부분을 거의 무명으로 일하며 캘커 타의 빈민 지역에서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섬겼다. 인생의 말년에서야 수 십 년 동안 이타적으로 남을 섬긴 삶이 세상에 조명을 받게 되었고 심지어 노벨 상까지 수 상하게 되었다.(그리고 모든 상금을 기부했다!) 그녀는 우리 문화가 성공이라고 말하는 것 들, 즉 부유함, 지위, 또는 명예(말년에 유명해지긴 했지만 그녀의 의지에는 다소 반대되는 것이었다)를 전혀 갖지 못했다. 소위 성공했다는 삶의 기준에 비춰 봤을 때 완전 헛된 인생 을 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기독교인의 시각으로 보면 그녀의 삶은 전혀 헛되지 않다. 오히려 세상적인 성공의 기준을 분명히 무시하고 부르신 그 소명대로 하나님의 일을 진행하기 위해 매우 야심차게 일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앞서 비즈니스가 변혁적인 섬김으로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장소 가 된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이에 덧붙여 우리는 비즈니스를 통해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앞당기기겠다는 야망은 온당한 야망이며, 이 과정에서 탁월함을 추구함에 따라 명성 과 지위가 부산물로 따라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별로 섬기려는 마음 없이 명성과 지위를 원하는 것은 노골적인 야망일 뿐이며 목적과 부산물을 혼동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정리하 자면, 우리가 비즈니스를 하는 이유는 변혁적인 섬김을 위해서이며, 그에 따른 지위와 명성 은 부산물일 뿐이다. 절대 그 반대가 아니다.

기업가 정신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에게 비즈니스에서 뭘 하고 싶으냐고 물으면 대부분 “나 는 내 회사를 경영하고 싶어요.”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어떤 종류의 회사를 시작하고 싶냐고 좀 더 구체적으로 물으면 별다른 생각이 없음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목표는 자신의 회사를 경영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들에게 그 회사를 가지고 무슨 일을 할 것인지는 자기 사업체 를 운영하고 “스스로 사장이 된다”는 사실보다 덜 중요한 것 같다. 하지만 그 회사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일하는지가 어떤 사람이 그 회사를 운영하는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성경은 두 가지 기준을 가지고 성공을 측정한다. 바로 탁월함과신실함이다. 성경이 탁월함 을 요구하는 이유는 우리의 궁극적인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일이 제단이라면, 속한 조직과 공동체에 진정한, 장기적 인 가치를 더하도록 탁월하게 일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바울이 골로새서 3장 23-24절에서 말한 것을 기억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이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이 진심으 로 하십시오. ... 여러분이 섬기는 분은 주 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의 모델이시기 때문에 탁월함을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 조물들은 애초에 매우 좋았다.(창세기 1장 31절) 그러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일의 성과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며 멋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모델이 되지도 못한다.

보통 평범함에 안주하는 이들은 일을 하면서도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 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탁월함을 추구하면서 근면함과 인내를 가질 것을 명령하 고 있다.(잠언 10장 4-5절, 20장 4절) 지혜로운 자와 나태한 사람의 차이는 잠언에서 계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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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강조하는 주제인데, 열심히 일하는 것은 고결한 것인데 반해 게으름은 시련을 가져다 준 다고 분명히 말한다.(잠언 6장 6-11절, 24장 30-34절)

하지만 많은 경우 성공 여부는 우리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보통은 열심히 일하는 것과 성공은 상관관계가 있다. 하지만 궁극적인 성취는 하나님께 달 려있다.(전도서 5장 19절) 우리의 부유함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우리의 지위는 보통 신실함 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며, 얻는 모든 명성은 분명히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 다. 부는 본질적으로 나쁜 것이 아니며, 신실하게 일을 하면서 탁월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명성과 지위가 부산물로 따라오게 된다. 성경은 신실한 사람을 칭찬하며 떠받든다. 잠언만 봐도 “신실한 사람은 많은 복을 받지만”이라고 말하고 있다.(잠언 28장 20절) 예수께서도 작 은 일에 충성하여 더 큰 일의 책임을 맡게 된 “착하고 충실한 종”을 칭찬하셨다.(마태복음 25장 21절, 누가복음 19장 17절) 따라서 기독교인들에게는 세상문화 기준의 성공이 아니라 신실함이 요구된다.(고린도전서 4장 2절) 신실하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각자를 부르신 그 일터에서 인내하며 고결함, 탁월함을 가지고 각자의 신앙을 살아내기 위한 하나의 통로로써 일해야 함을 뜻한다. 이미 3장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직장, 경력, 또는 소명으로 생각하 게 된다는 로버트 벨라와 에이미 롸제즈니브스키의 연구 결과를 설명했다.(주26) 이 결과에 따르면 부와 지위, 또는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일을직장(careers)으로 생각 하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 중요하며, 성취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한편 탁월함과 신실함에 전념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소명(callings)을 추구하는데, 이 사람들 에겐 무엇을 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승진이나 진급은 일을 하는 과정에서 얻는 부산품일 뿐이다. 우리의 일이 제단이고 비즈니스가 변혁적인 섬김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직업 적으로 얼마나 빨리, 얼마나 높이 진급하느냐보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더 중요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에 따른 성공이란 어떤 일을 성취하냐 보다 어떤 사람이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것이 비즈니스와 영적인 변혁에 핵심적인 개념이다. 예수께서는 제자 들에게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 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마가복음 8장 36-37저)라고 물으시며 이 점을 강 조하셨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발휘하여 온갖 성공을 이룬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의 성격과 삶의 질을 포기하면서 이룬 대가라면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 과 같다. 이는 물적인 열망보다 “좋은 삶”을 더 우선순위에 둘 줄 알았던 많은 고대 철학자 들이 반복해온 말이기도 하다. 일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과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연 관지어 “행복은 덕(인격적 능력)을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다”고 말했다. 고대 철학자 에피쿠 로스(Epicurus) 또한 “현명하고 명예롭게, 그리고 정의롭게 살지 않고서는 즐거운 인생을 산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결론

다시 퀴즈를 풀 준비가 되었는가? 풀고 나서 먼저 푼 문제의 답과 비교해 보라.

1. 성경은 천국이나 지옥에 관한 이야기보다 돈에 대해서 더 많이 언급하고 있다. (참, 거 짓)

성경의 용어 색인을 사용해보면 예수님이 천국이나 지옥에 관해서보다 돈에 대해 더 많이 언급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왜 오늘날 개인의 영적인 삶에 돈 문제가 이토록 중 요한지 이해할 수 있다. (참)

2. 성경은 자신이 필요한 분량 이외에 부를 축적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한다. (참, 거짓) 성경은 탐욕을 꾸짖고 후한 관대함을 명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선한 선물로써 삶을 즐기기 를 명하기도 한다. 전도서는 부와 부를 누리는 것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신약 성경 역시 하나님의 선한 선물로써 물적인 성공을 누리라고 말한다.(디모데전서 6장 17절) (거짓)

3. 야망은 만족의 반대 개념이기 때문에 성경은 야망을 장려하지 않는다. (참, 거짓) 성경에서 야망은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경제적인 열망을 실현할 도 덕적이고 적법한 방법이 매우 적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성경에서는 만족을 중요한 주제 로 다루어왔다. 하지만 만족의 반대는 질투이지 야망이 아니다. 하지만 야망도 하나님 나라 의 기준에 의해 정의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거짓)

4.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매우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동질감을 느끼도록 할 수 있었다. (참, 거짓)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끝도 없이 계속되는 빈곤속의 길거리 아이들로 자라지 않았다. 부 유하진 않았지만 장사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하층 정도에 속했다. 제자 들의 경우 명백히 생활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신 것이 큰 의미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거짓)

5. 성경은 가난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돕 는 하나의 미덕이라고 가르친다. (참, 거짓)

가난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을 돕는 역할을 하 기도 하지만 성경은 자기 자신과 부양해야 할 가족을 위해 일할 필요가 있다는 점 또한 강 조한다. 가난한 자들이 복을 받는 것은 그들의 몫이 천국에 있기 때문이지 그저 가난해해서 가 아니다. 또한 성경에는 부유하면서도 의로웠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거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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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성경은 개인의 돈에 대한 태도를 전반적인 영적 상태와 관련지어 생각한다. (참, 거짓) 예수님은 이 점에 대해 매우 단호하다. 사람의 마음은 무엇을 소유했는지와 직결되며 자신 이 돈을 쓰는 곳에 마음이 있다.(마태복음 6장 19-21절)(참)

7. 가난한 사람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려는 마음 없이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참, 거짓)

이것이 바로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한 것을 반영한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핵심이다.(이사야 58장 6-7절, 예레미야 22장 16절)(참)

8. 초대 교회에서는 모든 물질적 재산을 처분하고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면서 살았다. (참, 거짓)

초대 교회의 사람들은 모든 물질적 재산을 처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타인의 필요를 위해 놀라운 수준의 관대함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들의 아낌없이 나눠주는 행태는 “일하 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바울의 훈계와 함께였다.(데살로니가후서 3장 6-10절)

9. 예수께서 젊고 부유한 통치자에게 “네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고 말씀하신 내용이 오늘날 기독교인의 표준이다. (참, 거짓)

이 점은 오늘날 매우 부유하고 영향력이 있으면서도 예수님의 참제자인 사람들이 있음을 볼 때 반드시 행해져야 할 규범은 아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사람이 부유하기 때문에 참된 제자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구절은 없다. (거짓)

10. 자기 회사의 CEO가 되는 것이 목표인 사람은 너무 야심적이고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 이다. (참, 거짓)

자기 회사의 CEO가 되고 싶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지나치게 야망에 충실하고 만 족할 줄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있다면 CEO를 꿈꾸는 것도 좋다.

만족과 야망은 상호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다. (거짓)

11. 자신의 존엄성과 신앙을 타협하지 않고서도 비즈니스에서 성공할 수 있다. (참, 거짓) 고대 사회에서는 가난한 자를 억압하고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서는 성공하기 매우 힘들었 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재정적으로 성공하면서 동시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 니라 자본주의의 표준적인 규범이기도 하다. (참)

12. 성경이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유혹들(탐욕, 우상숭배, 질투)에 굴복하지 않고는 부유해 질 수 없다. (참, 거짓)

성경에도 예수님의 가까운 제자들을 포함해서 여러 의롭고 부유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하

지만 부유하면서 동시에 그 부유함에서 오는 유혹에 저항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간과해 서는 안 된다. (거짓)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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