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역사와 문화
1학년 융복합기초과목
이 충 호
무로마치시대의 교역과 문화
(室町時代の交易と文化)
1.왜구(倭寇)와 일명(日明)・일조(日朝) 무역
2.류큐왕국(琉球王国)
3.무로마치문화(室町文化)
학습내용
무로마치시대의 교역과 문화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전반→무로마치시대
●왜구(倭寇, わこう)라고 불리는 해적이 중국과 조선을 위협한 시기 로, 무로마치막부는 중국과 국교를 회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 였다.
●와비(侘, わび)・사비(寂, さび)・유겐(幽玄) 등 현대의 일본문화에
연결되는 무로마치문화가 탄생.
무로마치시대의 교역과 문화
●당시의 중국과 일본 사이에는 894년 견당사(遣唐使) 폐지 이후 정식의 국교는 약 500년 간이나 없었다.
●물론 민간의 교역은 있었고, 완전히 왕래가 끊어진 것은 아니었 지만, 매우 오랜 세월 동안 정식국교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11살에 무로마치막부의 쇼군에 취임했던 아시카가 요시미쓰
(足利義満)는 긴 세월의 국교단절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왜구와 명일・조일무역
●14세기 후반 왜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조선반도나 중국연안을 침범
●왜구는 쓰시마(対馬, つしま)・이키(壱岐, いき)등 동지나해 지 역에 사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집단으로 주민이나 쌀을 약탈하는 사건을 자주 일으키고 있었다.
●1368년 중국에서는 원(元)을 북으로 몰아내고 명(明)이 탄생.
●명은 일본에 왜구의 금압(禁圧)을 강하게 요구
●일반중국인의 해외도항을 금지하고, 명이 인정한 조공형식이 아
닌 무역은 하지 않는 해금정책(海禁政策)을 시행
왜구와 명일・조일무역
●당시 일본에서는 유통의 발달로 화폐의 수요가 급증
●화폐는 국내에서 주조하지 못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동전을 사용
●해금정책으로 동전이 모자라, 화폐가 부족하고 경제가 정체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중국과 무역을 하면 동전을 비롯
한 많은 이익이 있을 거라 기대, 국교회복 추진
왜구와 명일・조일무역
●요시미쓰는 명의 요구에 응해 왜구 진압을 실행하고, 왜구에 붙잡혀 있던 사람들도 중국으로 귀환시킴
●국내에서는 남북조를 합일하여 내란의 종지부를 찍음
●막대한 비용을 들여 북산제(北山第)의 조영을 개시, 금각을 건설
●당시 일본문화의 정수인 로쿠온지 금각(鹿苑寺金閣)에서 중국의 사
절을 받아들일 준비를 함.
왜구와 명일・조일무역
●착착 준비를 한 요시미쓰는 1401년 명에 사자를 보냄
●다음 해 명의 사절을 북산제(北山第)에 맞아들임
●요시미쓰는 명으로부터 「일본국왕(日本国王)」으로 인정받아 약
500년 만에 정식국교가 회복
왜구와 명일・조일무역
●명으로부터는 감합(勘合, かんごう)이라 불리는 증명서를 받 음
→왜국가 횡행하는 중, 일본국왕에 의한 정식 조공선이라는 증명 이 감합임.
●조공형식에 의한 감합무역(勘合貿易)이 시작됨
●일본에서는 부채나 병풍, 마키에(蒔絵) 등의 금을 이용한 공예
품 또는 도검(刀剣) 등이 수출되었다.
왜구와 명일・조일무역
●명으로부터는 회화(絵画)나 생사(生糸), 견직물, 사탕, 서적, 도 자기 등의 공예품을 수입
●명의 공예품은 가라모노(唐物, からもの)라 불리며 중요시되 어 무로마치문화의 형성에 영향을 미침
●동전도 대량으로 수입되어 화폐유통을 촉진시킴
왜구와 명일・조일무역
●조선반도에서는 1392년 이성계(李成桂)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
●이성계도 일본에 왜구의 단속을 강하게 요구
●나가사키현의 쓰시마는 조선에서 약 50km 떨어진 섬으로 당시 왜 구의 본거지 중 하나 였다.
●1419년 조선을 왜구를 제압하기 위해 쓰시마를 공격. 이를 오에
이노 가이코(応永の外寇, おうえいのがいこう)라고 한다.
왜구와 명일・조일무역
●조선은 쓰시마의 슈고(守護)인 송씨(宋氏)와의 사이에 기가이(癸 亥約条)조약을 맺고, 교역을 제한
●교역장소도 부산포(富山浦, ふざんほ)등 세곳의 항구에 제한했는 데, 이곳에 쓰시마 등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거주
●조선과의 무역은 이곳에 설치된 왜관(倭館)을 통해서 16세기 초까
지 활발히 행해짐
류큐왕국(琉球王国)
●13세기 오키나와(沖縄)에서는 호쿠잔(北山, ほくざん), 추잔(中山, ちゅう ざん), 난잔(南山, なんざん)의 3개의 세력, 즉 산잔(三山, さんざん)이 영 토확대와 무역의 이권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다투고 있었다.
●나키진구스크(今帰仁グスク)는 3개의 세력 중 하나인 호쿠잔왕국(北山王国) 의 거점
●이들 유적에서 교역의 증거들이 발굴
→중국의 청자와 백자, 고려나 베트남, 타이 등 아시아에서 유입된 도자기.
●호쿠잔왕국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과 무역을 행하고 있었다는 증거
류큐왕국(琉球王国)
●1429년 추잔왕국(中山王国)이 산잔의 전투(三山の戦い)에서 승 리하여 산잔(三山)을 통일하고, 류큐왕국(琉球王国)을 건국
●류큐왕국은 지리적 잇점을 살려 중계무역(中継貿易)을 행함
→명으로부터 견직물과 도자기를 수입하여 그것을 동남아시아나 일 본, 조선에 수출
→동남아시아로부터 명으로는 향목(香木)과 상아(象牙)를 유통시켜
막대한 부를 축적
류큐왕국(琉球王国)
●당시의 수리성(首里城)에는 류큐의 정신을 기록한 반코쿠신료(万 国 津梁, ばんこくしんりょう)의 종이 걸려 있었다.
→반코쿠신료(万国津梁)의 정신이라는 것은 「류큐는 배를 다리로 하 여 만국의 가교가 된다」고 하는 것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교역시장이었던 류큐왕국은 16세기 중반 포
르투갈이 아시아무역에 등장할 때 까지 번영
무로마치문화(室町文化)
●무로마치시대는 막부가 가마쿠라에서 교토로 옮긴 시대
●교토는 공가(公家)나 승려, 민중 그리고 가마쿠라에서 온 무사들 등 다양한 계층의 문화가 서로 융합하는 장소가 됨.
●신사(神社)나 사원 등의 행사에 헤이안시대(平安時代)부터 공연
되고 있던 사루가쿠(猿楽, さるがく)와 화려한 동작으로 사람들
을 즐겁게 했던 무용인 덴가쿠(田楽, でんがく)를 노(能)라는 예
술로까지 승화시킨 간아미(観阿弥, かんあみ)와 제아미(世阿弥,
ぜあみ)의 부자가 등장.
무로마치문화(室町文化)
●제아미(世阿弥)는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의 보호를 받아 노(能)를 발전시켜 갔다.
●당시는 불교의 종파인 선종(禅宗)이 무사들 사이에 널리 유행
●제아미(世阿弥)는 선(禅)의 사상을 노(能)에 도입하여 제한된 섬 세한 움직임으로 등장인물의 심정을 표현하는 무용을 만들어 냄
●제아미(世阿弥)에 의해서 완성된 노(能)는 600년 후인 현재에
도 이어지고 있다.
무로마치문화(室町文化)
●지쇼지긴가쿠(慈照寺銀閣, じしょうじぎんかく)- 요리미쓰의 손자 요리마사(義政)에 의한 무로마치문화의 정수
●도구도(東求堂, とうぐどう)의 도진사이(同仁斎, どうじんさ い)
- 긴가쿠(銀閣)와 함께 히가시야마(東山)에 세워진 일실(一室)로 、
마루 바닥이 주류였던 시대에 다다미를 깔았다.
무로마치문화(室町文化)
●「쓰케서원(付け書院)」
책상을 장지문 밑에 만들어 붙인 것
●「지가이타나(違い棚, ちがいだな)」
- 그릇을 장식하기 위한 것
●장지(障子)로부터 부드러운 빛을 들어오게 한 것도 이 시기부
터로 「와시쓰(和室)」이 완성된 시기
무로마치문화(室町文化)
●도고노마(床の間)에 꽃을 장식하는 이케바나(生け花)의 원류가 탄생
●긴가쿠(銀閣)에서는 매일 아침 요리마사(義政)가 꽃을 바침
●「다테바나(立花, たてはな)」
풀과 꽃을 하나 하나 세워서 장식
전국 다이묘
(戦国大名)
1.오닌의 난 2.군웅할거
3.도시의 발전
학습내용
오닌의 난(応仁の乱)
●오닌의 난(応仁の乱)의 계기는 쇼군가(将軍家)의 후계 계승문제를 둘러싼 다 툼
●무로마치막부 8대 쇼균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는 후사가 없어 장군직 을 동생 아시카가 요시미(足利義視)에 물려주기로 함
●동생에게 장군직을 물려주기로 한 다음 해에 요시마사(義政)와 처인 히노 토 미코(日野富子)와의 사이에 아시카가 요시히사(足利義尚)가 탄생
●요시마사(義政)로부터 차기 쇼군으로 정해진 요시미(義視)와 아들을 후계자로 하고 싶은 요시마사의 처 토미코(富子)가 쇼군가의 후계문제로 대립.
오닌의 난(応仁の乱)
●한편 이 무렵, 막부의 실권을 쥐기 위해 유력 슈고 다이묘(守護大名)인 호소 카와 가쓰모토(細川勝元)와 야마나 모치토요(山名持豊)가 다툼
→호소카와측은 요시미(義視)를, 야마나측은 토미코(富子)와 요시히사(義尚) 를 지원
●호소카와측(細川方)과 야마나측(山名方)의 두 세력이 동서로 갈려 교토의 시가지에서 진을 치고 전쟁을 시작
→1467년 오닌의 난(応仁の乱)이 발생
오닌의 난(応仁の乱)
●긴키(近畿) 주변의 슈고다이묘(守護大名)들이 각각 가담하여 교토는 20만 이상의 무사가 몰려들게 됨.
●다이묘(大名)들은 진지로부터 적을 몰아내기 위해 자주 방화를 함
●가벼운 무장으로 기동력이 뛰어난 용병인 “아시가루(足軽)”가 각각의 진영 에 가담하여 약탈과 방화를 반복하여 절(寺)과 신사(神社) 등으로 피해가 확대 되어 간다.
오닌의 난(応仁の乱)
●다이묘들은 지방에 있는 적(敵)의 영국(領国)에 대해서도 공격을 행함.
●길게 이어진 전란 중에 각각의 진영의 대장인 야마나 모치토요(山名持豊)와 호소카와 카쓰모토(細川勝元)가 연이어 사망
→1477년 승패가 나눠지지 않은 채로 오닌의 난(応仁の乱)이 종식
●11년이나 이어진 전쟁으로 교토는 황폐화되고, 이 난을 평정하지 못했던 쇼 군과 막부의 권위가 실추.
→오닌의 난(応仁の乱)을 경계로 하여 시대는 난세(乱世)인 전국시대(戦国時 代)로 돌입.
오닌의 난(応仁の乱)
●오닌의 난(応仁の乱)에 의해 막부의 권위가 실추
→유력한 슈고 다이묘(守護大名)의 연립정권(連立政権)이었던 교토의 무로마 치막부는 힘을 잃고, 슈고 다이묘들은 각각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지켜야만 하 는 상황이 됨
●실력자들이 각지에서 세력을 펼치고 대립하는 군웅할거(群雄割拠)의 시대가 도래
군웅할거
●오닌의 난(応仁の乱) 이후, 그때까지의 질서는 무너지고, 전국다이묘 (戦国大名)라고 하는 새로운 타입의 영주(領主)가 출현
●이전의 슈고다이묘(守護大名)는 무로마치 막부에 의해 임명된 다이묘 (大名)
→막부의 권위가 없어지자, 자력으로 영국(領国)을 지배하는 전국다이
묘(戦国大名)가 등장
군웅할거
●전국다이묘(戦国大名)의 3가지 유형
①슈고다이묘(守護大名)가 전국다이묘(戦国大名)가 된 경우 예)다케다씨(武田氏)(甲斐)、시마즈씨(島津氏)(薩摩)
②슈고다이묘의 가신인 슈고다이(守護代)가 지위가 올라간 경우 예)우에스기씨(上杉氏)(越後)、아마고씨(尼子氏)(出雲)
③각지의 유력 무사, 국인(国人)들이 동맹을 맺어, 그 중에서 두각을 나타낸 경 우
예)다테씨(伊達氏)(陸奥)、모리씨(毛利氏)(安芸)
군웅할거
●전국다이묘는 자신들의 영지를 넓히기 위해, 다른 전국다이묘와 전투를 이어 갔다.
●전국시대의 합전(合戦)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다게다 신겐(武田信玄)과 우 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이 싸운 가와나카지마의 전투(川中島の合戦)였다.
→나가노현(長野県) 북부에 있는 가와나카지마(川中島)는 지쿠마가와(千曲川)
와 사이가와(犀川)가 합류하는 삼각지대로, 우에스기 켄신과 다케다 신겐은 이 지역에서 1553년부터 1564년까지 5회에 걸쳐서 전투를 펼쳤다.
군웅할거
●우에스기와 다케다가 다투게 된 계기는 다케다 신겐이 영지(領地)를 넓히기 위해, 시나노국(信濃国)에 세력이 뻗쳐 온 것이 원인
●다케다 신겐은 가와나카지마 주변까지를 지배하에 넣고, 나아가 우에스기 켄신의 영지에까지 압박해 갔다.
●신겐의 영지 확장 움직임에 대해 기타시나노(北信濃)의 사람들이 우에스기 켄신에게 도움을 청해, 켄신이 이에 응한 결과로 둘 사이에 전투가 펼쳐짐
군웅할거
●전투가 격렬햇던 시기에는 하루에 양쪽 합쳐 8000명에 가까운 전사자가 나 오는 등 전국시대 최대의 전투였다.
●전투 중에 다케다군의 본진(本陣)에 들어간 우에스기 켄신(謙信)이 신겐을 칼 로 배려 하자, 신겐이 군바이(軍配, 전투를 지휘하는 부채)로 막아냈다고 하는 에피소드가 유명
→둘의 전투는 승패없이 끝남
●전국다이묘는 약 100년에 걸쳐 이러한 전투를 일본 전역에 걸쳐 펼침.
군웅할거
●전국다이묘는 막부와는 상관없이 실력으로 다이묘가 되었고, 이 시대는 실력만 있으면 누구라도 다이묘가 될 수 있는 시기였다.
●“극(剋)”이라는 글자는 「물리치다. 제압하다(負かす・制する)」의 의미로, 「하극상(下剋 上, げこくじょう)」이라고 하는 말은 아랫 사람이 윗 사람과 싸워 이긴다는 당시의 풍조 를 잘 나타내고 있다.
●전국다이묘가 싸운 이유
・영지를 가신들에게 은상으로 주기 위해
・가신들이 하극상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경제권의 확대를 위해
●영지를 넓혀 농지를 늘리면 연공을 증가시킬 수 있음.
●항구를 손에 넣으면 교역을 행할 수 있음
→전국다이묘에게 있어서 영지의 경제가 번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여 경영자와 같 은 입장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도시의 발전
●전국다이묘들은 자신들의 영지를 보다 매력적인 곳으로 만들기 위해 도시를 건설함.
●전국다이묘의 거성(居城)을 중심으로 조카마치(城下町)가 생겨남
●성 주변에 가신이나 상공업자들을 모으고, 대장간이나 목공기술자 등 중요 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거주시켜 점차 도시의 형태를 갖추면서 확장되어 감.
도시의 발전
●수륙교통의 발달로 항구도시 숙박촌도 번성하여, 유통의 거점으로 발전해 간다
●항구도시 사카이(堺)는 일본 각지뿐만 아니라, 중국의 명(明)과 무역을 하 는 등 외국으로부터도 많은 사람과 물품이 왕래하여, 일본 유수의 항구도시로 번영하였다.
●절과 신사(神社)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여, 주위에 몬젠마치(門前町)가 발달
→이세신궁(伊勢神宮)의 몬젠마치에는 지금도 일본전국의 사람들이 방문하 여 번성하고 있다.
소교토(小京都)
●각지의 전국다이묘들이 자신의 영지에 교토와 같은 도시를 만들려고 한 것이 소교토(小京都)
→오닌의 난(応仁の乱)이 끝나고 영지에 돌아온 전국다이묘들이 교토의 영화롭 고, 번창한 모습을 자신의 나라에도 만들려고 도시를 정비한 것.
●도노(遠野), 유가와라(湯河原), 히다 다카야마(飛騨高山), 가나자와(金沢), 하 기(萩), 쓰와노(津和野), 이마리(伊万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