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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연구

제51집

2016. 2.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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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특집 특집특집1111

특집1 ::::: 테크놀로지테크놀로지테크놀로지테크놀로지, 테크놀로지, 이미지, 권력, , , 이미지이미지이미지이미지, , , , 권력권력권력권력

디지털 시대, 확산매체와 성공매체 사이의 긴장 ···정성훈 / 9 특집

특집 특집특집2222

특집2 ::::: 한국사상과 한국사상과 한국사상과 한국사상과 선산철학한국사상과 선산철학선산철학선산철학선산철학

이원구 산업론의 역학적 체계···이선경 / 47 뺷소학뺸을 통해 본 조선시대 여성상 ···이영란 / 71 어문학

어문학 어문학어문학 어문학

고전소설 속에 나타난 미인(美人)의 표상과 미의식 ···김문희 / 101 민족문학론의 인식 구조

- 1960~70년대 백낙청의 김수영론에 대한 비판적 독해 - ·강동호 / 137 죽음 이후의 세계의 서사적 계보와 상상적 전이

- 한국 문학에 나타난 ‘유계(幽界)’의 의미적 지평들 - ···송민호 / 175 텍스트 이론의 역사적 전개와 새로운 글쓰기의 도래···송은영 / 205 김활란 자서전 뺷그 빛 속의 작은 生命뺸에 나타난

여성의 사회 참여 방식과 공간의 정치···송인화 / 233 전쟁 상흔의 현재성과 도시화의 그늘

- 김문수의 1970년대 단편 소설을 중심으로 - ···이호규 / 261 뺷사랑의 선물뺸 再版 과정과 異本 발생 양상 ···장정희 / 291 주변부 문학의 (불)가능성 혹은 문학 대중화의 한계

- 백낙청의 ‘시민/민족/민중문학론’ 재고 - ···조연정 / 323 天象․気象名の日本の艦艇名研究 ···박청국 /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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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學夷 시론의 주요 특성에 관하여···박정숙 / 407 다성적 소설로서의 뺷걸리버 여행기뺸 ···김철수 / 437 Double Articulation and the Dynamics of Deception

- H. C. Andersen’s The Emperor’s New Clothes -

···Sorensen, Eli Park․Lee, Marvin Jin / 467 세기전환기의 여성해방

- 슈니츨러의 작품을 중심으로 - ···박대환 / 493 철학

철학 철학철학 철학

만심(慢心)․탐심(貪心)․진심(瞋心)을 통해 본 번뇌의 정서심리학 - 유식학적 관점을 중심으로 - ···박지현․최태산 / 517 李濟馬의 뺷中庸뺸에 대한 해석과 四象哲學 ···임병학 / 555 대학생들의 자아 중심적 행복관에 대한 로고테라피적 접근··최정화 / 581 교육학

교육학 교육학교육학 교육학

대학생 학습자의 세계영어발음 교수에 대한

인식 및 선호도 조사···박은영 / 619 고등학교 베트남어교육 현황에 대한 연구···이강우 / 643 문화학

문화학 문화학문화학 문화학

예외상태로서의 박정희 시대와 남성 주체의 형성

- 최인호의 초기작을 중심으로 - ···김은하 / 673 시리즈 영화에서 오프닝 시퀀스의 서사적 기능

-<테이큰> 시리즈를 중심으로 - ···홍진혁 / 701 신문 텍스트에 나타나는 외모 이데올로기

- 연예기사를 중심으로 - ···장경현 / 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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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5

◎ 연구윤리 규정··· 770

◎ 논문 심사 규정··· 773

◎ 논문 투고 규정··· 776

◎ 심사 경위··· 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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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훈 디지털 시대, 확산매체와 성공매체 사이의 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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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훈*1)

목 차 1. 서론

2. 루만의 매체이론

3. 디지털 멀티 전자매체와 성공매체 사이의 긴장 4. 결론

<국문초록>

디지털 전자매체 기술의 눈부신 발전이 인간의 지각세계와 커뮤니케이션 방식 을 현격하게 바꾸어놓고 있다. 글과 인쇄의 성격도 바뀌고 있다. 책을 통해 자기 고유의 역사를 구축해온 인문학이 이러한 매체 전환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매체인문학 연구 성과들을 보면, 말, 글, 인쇄, 그림, 동영상, 텔레비 전, 컴퓨터, 스마트폰 등 주로 커뮤니케이션학을 통해 연구되어온 매체, 즉 ‘확산 매체’에 관해서는 비교적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사회학이 전통 적으로 다루어왔던 매체인 화폐, 권력, 진리, 사랑, 신뢰 등에 관한 연구는 희소하 거나 확산매체와 무관하게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통해 매체에 관한 인문학적 논의의 시각을 확장하려 한다.

니클라스 루만의 매체이론을 참조하여 우선 매체 개념을 명확히 할 것이며 그에 기초해 엄밀한 매체 분류를 하려 한다. 나는 특히 커뮤니케이션의 확산매체와 성 공매체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며, 오늘날 이 두 종류의 매체 사이에 일어나고 있 는 긴장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나는 이 글에서 사랑, 화폐, 법 등이 디지털 전 자매체의 시대에 어떤 도전을 받고 있는지 추적한다. 현대 사회의 구조를 허물지

* 서울대학교

(11)

도 모르는 새로운 확산매체와 현대 사회의 구조를 지탱해온 오래된 성공매체 사이 의 긴장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개념화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주제어 : 매체,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확산매체, 성공매체, 사랑, 화폐, 법의 지배

1. 서론

디지털 전자매체 기술의 눈부신 발전이 인간의 지각세계와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현격하게 바꾸어놓고 있다. 20세기 초중반 동영상과 텔레비전이 대 중화되던 시기에 언급되기 시작한 인쇄와 글쓰기의 종말에 관한 다소 성급 해보였던 예견들은 이제 책이 휴대용 컴퓨터의 화면으로 옮겨지고 편지가 휴대폰의 문자메시지로 옮겨지면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글쓰기와 읽기라는 인쇄 시대의 주된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여전히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인쇄나 필기를 거치지 않게 되면서 일직선적 형태를 탈피하고 있다. 워드프로세서의 글쓰기와 문자 메시지 작성은 손쉬 운 중간 삽입과 순서 바꾸기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공간적 순서와 시간적 순서 사이의 연관성을 추정할 수 없게 만든다. 파워포인트와 프레지 등의 프로그램에 의해 화면에 표현되는 글들은 이제 그림과의 경계가 점차 모호 해지고 이미지는 물론 소리와도 뒤섞인다. 서적 인쇄는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원고 분량이 적어지고 글자 크기가 커진다. 그리고 잘 팔리는 책에 담긴 글의 내용은 글이라는 매체에 의해서만 가능했던 추상세계로부터 벗 어나 쉽게 이미지화될 수 있는 것들로 바뀌고 있다. 전자펜을 갖다 대면 글 을 읽어주는 동화책도 널리 팔리고 있다. 글이라는 매체가 구어 사용의 규 칙들과 관습들을 현격하게 바꾸어놓았듯이1), 이제 디지털 전자매체가 글과

1) 월터 J. 옹, 뺷구술문화와 문자문화뺸, 이기우․임명진 옮김, 문예출판사, 1995, 166~17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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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의 성격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책을 통해 자기 고유의 역사를 구축해온 인문학이 이러한 매체 전환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세계 어느 곳보다 디지털 멀티 전자매체의 보급률이 높은 한국에서 인문학자들은 더더욱 높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맥루언(Marshall McLuhan), 플루서(Vilém Flusser), 볼츠(Norbert Bolz) 등 인쇄와 글쓰기 이후의 시대를 예견했던 여러 매체이론가들의 논의는 최근 한국 인문학 저술들에서 자주 발견된다.

그런데 최근의 매체인문학 연구 성과들을 보면, 말, 글, 인쇄, 그림, 동영상, 텔레비전, 컴퓨터, 스마트폰 등 주로 커뮤니케이션학을 통해 연구되어온 매 체, 즉 루만(Niklas Luhmann)이 ‘확산매체(Verbreitungsmedien)’로 분류하 는 매체에 관해서는 비교적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사회학이 전통적으로 다루어왔던 매체이며 루만이 ‘성공매체(Erfolgsmedien)’로 분류 하는 매체인 화폐, 권력, 진리, 사랑, 신뢰 등에 관한 연구는 희소하거나 확산 매체와 무관하게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

물론 매체에 대한 최근의 관심은 이른바 ‘뉴미디어’ 혹은 ‘디지털 미디어’

의 기술공학적 발전에 의해 촉발되었다. 그럼에도 확산매체에 관한 연구만 으로 우리가 “구텐베르크 은하계” 이후의 사회를 그려보기는 어렵다. 비문 자 사회의 청각 중심 문화와 인쇄 시대의 시각 중심 문화를 넘어서 전자매체 에 의해 이루어질 “5개 감각들 간의 균형된 상호작용”3)과 “지구촌”4)을 긍정 적으로 보았던 맥루언의 예견이나 담론(discourse)과 대화(dialogue)가 균형 을 이루어 노동에서 놀이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는 “텔레마틱 사회”에 관한 플루서의 낙관5)은 성공매체에 의해 그 분화가 촉진된 현대 사회의 구 조에 대한 고려를 동반하지 않고서는 설득력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2) 커뮤니케이션의 확산매체와 성공매체에 관한 설명은 Ⅱ의 2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3) 마샬 맥루한, 뺷구텐베르크 은하계뺸, 임상원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 63면.

4) 같은 책, 69면.

5) 김성재, 뺷플루서, 미디어 현상학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3, 77~8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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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만이 지적하듯이, 과거에 인쇄가 이차 관찰(second-order observation) 로서의 ‘비판’을 촉진시키고 그것이 사회의 기능적 분화, 즉 현대화를 이끈 동인들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인쇄 기술이 먼저 발전한 곳에서 곧 현대화가 먼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기술의 수준에서는 중국과 한국이 서 양에 앞서 있었지만, 인쇄가 도서시장과 독서 공중을 형성해 사회의 기능적 분화를 촉진한 곳은 서양이었다.6) 그래서 우리는 전자매체 기술이 지금과 는 다른 사회로의 이행을 보장할 것이라거나 그 사회의 성격을 결정할 것 이라는 예견을 쉽사리 해서는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매체에 관한 인문학적 논의의 시각을 확장하는 것이다.

우선 모호하게 쓰이고 있는 매체 개념이 명확해져야 한다. 그리고 그에 기 초해 엄밀한 매체 분류가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특히 커뮤니케이션의 확산 매체와 성공매체를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오늘날 이 두 종류의 매체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긴장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현대 사회의 구조를 허물지도 모르는 새로운 확산매체와 현대 사회의 구조를 지탱해온 오래된 성공매체 사이의 긴장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개념화하는 데 큰 도 움을 줄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논문의 Ⅱ에서 한국에서는 매체이론가라기보다는 사회학적 체 계이론가로 소개되어온 니클라스 루만의 매체이론을 살펴볼 것이다. 루만 은 매체와 형식의 구별을 통해 매체 개념을 명확히 정식화하였으며, 각 매 체를 그 매체를 통해 세계를 여는 체계들과 관련지어 이해했다. 또한 커뮤

6) Niklas Luhmann,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Frankfurt / M. : Suhrkamp, 1997, p.292; 니클라스 루만, 뺷사회의 사회뺸, 장춘익 옮김, 새물결, 2014, 346면. 가장 자주 인용될 책이기 때문에 이하에서는 ‘GdG’와 ‘사사’로 각각 약칭한다. 한국어판 뺷사회의 사회뺸의 인용 쪽수는 2014년 말에 나온 소프트커버 개역판의 것이다. 이 쪽수는 대체로 2012년 하드커버 초역판의 쪽수보다 제1권의 경우 한두 쪽 뒤로 밀려났고 제2권의 경우 거의 비슷하다. “소프트커버 개역판”과 “하드커버 초역판”이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출판사가 개역판에도 2012년 초판의 출간일자를 그대로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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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이션 매체를 확산매체와 성공매체로 분류하였다. 나는 이러한 구별과 분류를 참조하여 Ⅲ에서는 전자매체 등장 이후의 새로운 확산매체 기술이 성공매체와 어떤 긴장 관계에 놓여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2. 루만의 매체이론

1) 체계 내부의 구별인 매체와 형식의 구별

체계이론에서 출발한 루만에게는 1980년대 중반까지 뚜렷하게 정식화된 매체 개념과 그에 따른 일반 매체이론이 없었다. 그의 개념 목록의 한편에 는 후설의 현상학을 참조해 사회적 체계들의 기본 개념으로 받아들인 “의 미(Sinn)”7)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파슨스 사회학의 “상징적으로 일반화 된 교환 매체”를 변형해 받아들인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커뮤니케이션 매 체”가 있었다.

루만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하이더(Fritz Heider)의 매체이론을 수용하기 시작하며8) 1990년 출간 저작 뺷사회의 과학(Die Wissenschaft der Gesellschaft)뺸 에서 “매체(Medium)와 형식(Form)의 구별”9)을 전면적으로 도입한다. 그에 따라 매체는 유기체들, 심리적 체계들, 사회적 체계들 등 체계이론이 다루어 온 여러 층위의 체계들에서 요소들의 결합을 설명하는 하나의 기본 개념으로 자리 잡는다. 빛, 공기, 전자기장 등 유기체의 지각매체, 심리적 체계들과 사회적 체계들의 공진화(Co-evolution) 매체인 의미, 커뮤니케이션의 기본

7) 루만의 의미 개념에 관한 설명은 정성훈, 「루만의 다차원적 체계이론과 현대 사회 진단 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철학박사학위논문, 2009, 56~83면.

8) Mario Grizelj, “Medien”, Oliver Jahraus and Armin Nassehi(ed.), Luhmann Handbuch, J. B. Metzler, 2012, p.100.

9) Niklas Luhmann, Die Wissenshaft der Gesellschaft, Frankfurt / M. : Suhrkamp, 1990,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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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인 말, 커뮤니케이션의 확산매체인 글, 서적인쇄, 전자매체, 그리고 화폐, 권력, 진리, 사랑 등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모두 ‘매체’라 는 하나의 개념으로 묶이게 된다.

루만의 매체 개념이 가진 특징은 매체가 형식과의 구별에 의해서만 성립 한다는 것, 그리고 매체와 형식은 모두 특정 체계의 요소들이 결합된 상태 라는 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특징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특징은 매체와 형식 의 구별이 체계내적 사태이기 때문에 매체는 그런 구별로 작동하는 체계와 의 관련 속에서만 성립한다는 것이다.

루만은 1926년에 나온 이후 오랫동안 다른 매체이론가들로부터 별로 주 목받지 못했던 하이더의 긴 논문 “사물과 매체(Ding und Medium)”로부터 이 구별을 착안했다. 루만과 달리 전통적인 인식론의 주체/객체 구별법을 사용하면서 주로 지각에 관심을 가졌던 하이더는 “우리는 에테르를 통해 먼 별을 보고, 우리는 공기를 통해 종소리를 듣고, 우리는 기압계에서 공기 의 압력을 읽어내고”10)등등의 예를 통해 매개하는 것과 매개되는 것의 차 이 혹은 매체와 사물의 차이를 탐구했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눈을 건드리 는 빛의 파동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직접 대상을 본다는 것에 주목했 다.11)그리고 빛의 파동과 같이 우리 감각기관을 건드리는 “매체의 진행들 (Mediumvorgänge)”과 그가 “잘못된 통일성” 혹은 “엄격한 질서”라고 부르 는 것들을 구별했다.12)

하이더의 매체/사물 구별은 루만에 의해 매체/형식 구별로 변환된다. 루 만은 매체/형식 구별을 “느슨하게 결합된 요소들과 엄격하게 결합된 요소 들”13)의 형식으로 규정한다.14)이 정식화는 하이더의 구별에 함축되어 있

10) Fritz Heider, Ding und Medium, Kadmos, Berlin, 2005, p.23.

11) Ibid., p.26.

12) Ibid., pp.46~47.

13) GdG p.196; 사사 236면.

14) 루만에게 형식이란 구별되는 뚜렷한 두 항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매체/형식 구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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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구도, 즉 주체가 객체를 인지하는 구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루만에게 요소란 세계 그 자체의 객관적 최종단위가 아니라 각 체계별로 다르게 규 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요소들과 요소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재생산되 는 것이 곧 체계이다. 그래서 매체와 형식의 구별은 체계의 환경에 있는 물 리화학적 질서를 인프라로 삼긴 하지만 그 자체로는 “체계내적 사태”15)이 다. 따라서 체계의 요소들이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는지 아니면 엄격하게 결 합되어 있는지는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체계 자신의 작 동 과정에서 결정된다. 즉 매체와 형식의 구별은 먼저 생겨난 요소들이 사 라지면서 다음 요소들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결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루만은 매체/형식 구별이 “환경의 물리적 사태들을 체계 안에서 ‘재현’하지 않는다”16)고 말한다. 예를 들어, 빛은 물리학적 개념이 아니라 유기체의 지각매체일 뿐이다. 그리고 지각매체가 의미와의 구별을 통해 형성된 새로운 차원의 매체인 말, 글, 전자매체 등의 매체를 사용하는 커뮤니케이션 체계는 결코 빛을 매체로 사물들을 지각할 수 없다. 반면에 심리적 체계들과 커뮤니케이션 체계들의 공진화 매체인 의미는 결코 유기 체에서는 매체가 아니다. 몸 그 자체는 아름답다거나 누구를 닮았다거나 하 는 의미가 없다. 몸에 그런 의미를 부여하면서 비교하는 것은 의식이나 커 뮤니케이션이다.

그러면 매체와 형식의 구별이 체계들의 계속적인 작동(operation process) 에서, 즉 체계들의 자기생산(Autopoiesis)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살펴보자.

루만의 체계이론에서 체계들이란 어떤 정적인 실체들이 아니라 요소들이 다른 요소들을 자기지시적(self-referential)으로 재생산하는 역동적 그물망 이다. 사라지는 요소들과 생겨나는 요소들이 서로를 자기로 지시하면서 이어

다시 하나의 형식이 된다.

15) GdG p.195; 사사 236면.

16) GdG p.195; 사사 23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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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비개연적인 상황에서만 이러한 자기생산은 유지된다. 그래서 작동적 요소들 간의 연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체계는 더 이상 체계가 아니다. 이해 하기 쉬운 사례를 들어 설명하자면, 세포들의 자기증식이 계속되지 않으면, 그리고 새로 생겨나는 세포들이 더 이상 사라지는 세포들을 자기지시하지 않으면, 유기체의 생명은 멈춘다.17)

루만은 이러한 자기지시적-자기생산적 체계들에 관한 이론을 인간의 의 식인 심리적 체계들로 확장할 뿐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을 요소로 삼는 사회 적 체계들에게도 적용한다. 그래서 심리적 체계들은 생각들 혹은 의식작용 들이라는 요소들의 자기생산으로, 그리고 사회적 체계들은 커뮤니케이션들 이라는 요소들의 자기생산으로 파악된다.

루만은 커뮤니케이션이 커뮤니케이션에 연결되는 것이 임의적이고 우발 적으로 일어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임의적이고 우발적이라면 “커뮤니케이 션이 커뮤니케이션에게 커뮤니케이션으로 식별될 수 없을 것”18)이기 때문 이다. 기대를 이끌어주는 개연성이 있어야 하고, 이때 커뮤니케이션 발생의 비개연성을 극복해주는 것이 바로 매체와 형식의 구별이다.19) 예를 들어.

커뮤니케이션의 기본 매체이며 “음성(Laut)과 의미(Sinn)의 구별”20)이라는 형식에 의해 성립하는 언어는 수많은 커뮤니케이션들이 결합될 수 있는 터 전을 제공한다. 그런데 이 기본 매체인 언어는 모든 결합 가능성을 임의로 열어놓지 않는다. 음성이 이미 온갖 소음들을 포함하는 소리로부터 생겨나 는 임의적인 가능성을 제한함으로써 성립된다. 그래서 음성은 유기체의 지 각매체가 아니라 의식의 지각매체이다. 그리고 의미는 이미 문법에 따른 단

17) 자기생산 개념은 원래 인지생물학자인 마뚜라나와 바렐라가 생명체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해낸 개념이다. H. R. Maturana and F. J. Varela, Autopoiesis and Cognition :

the Realization of the Living, p.78.

18) GdG p.190; 사사 229면.

19) 커뮤니케이션의 세 가지 비개연성과 각각의 극복에 관해서는 다음 절에서 다룰 것이다.

20) GdG p.213; 사사 256면.

(18)

어들의 결합 규칙에 얽매여 있다.

언어는 단어와 문장의 분화를 통해 자기 안에서 다시 매체와 형식을 구 별한다. 또한 단어에 대해서는 엄격한 결합인 문장은 통상적인 커뮤니케이 션에서는 수많은 문장들이 결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느슨하게 제한하는 매 체이다. 예를 들어 사랑의 커뮤니케이션 연쇄에서 파트너가 서로 주고받는 문장들은 매체이며, 이것들이 ‘사랑한다/사랑하지 않는다’라는 이항 코드화 된 구별에 의해 사랑의 형식으로 결속된다. 그리고 사랑은 또한 수많은 구 체적인 사랑의 형식들로 커뮤니케이션들을 결속시킬 수 있는 매체가 되어 친밀관계라는 사회적 체계의 자기생산에 기여한다.

주로 커뮤니케이션 체계에 관심을 갖고 있는 루만은 다른 종류의 체계들 에서 매체와 형식의 구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해서는 그리 많은 설 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빛, 공기, 전자기장 등을 유기체의 지각매체의 사례 로 들면서, 그에 기반한 형식들을 사물, 소리, 신호 등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매체와 형식의 차이는 지각하는 유기체 자신의 성취”21)라고 덧붙인다.

나는 루만이 든 이런 사례들을 통해 유기체의 자기생산에서 매체와 형식 의 구별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설명해보겠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루만은 빛을 물리학적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루만에게 영향을 준 구성주의적 생물 학자들에게 빛이란 오직 시지각 세포들의 자극을 뇌를 정점으로 하는 신경 체계에서 처리할 수 있는 생명체에게만 해당되는 매체이다. 그들에 의하면 우리가 보는 것은 외부의 무엇이 아니라 뇌의 디지털 프로세스에 의해 산 출된 아날로그 현상이다. 즉 빛, 공기, 전자기장 등의 지각매체란 세포들의 생멸 및 변화에 기초한 유기체의 신경생리학적 운동일 뿐이고, 이를 통해 유기체는 이들 매체가 엄격하게 결합된 사물, 소리, 신호 등을 보거나 듣거 나 느낀다. 그리고 이렇게 매체와 형식의 구별을 통해 이루어지는 지각이 없다면 유기체의 생존은 불가능하다.

21) GdG p.197; 사사 237면.

(19)

루만은 매체/형식의 구별과 관련해 우리에게 주의할 지점 세 가지를 언 급한다. 이 글에서는 간략하게 요약해 소개하겠다.

첫째, 형식은 매체 기반(medial Substrat)22)보다 강하다. 루만은 “형식은 느슨하게 결합된 요소들의 영역에서 자신을 관철”23)하기 때문에 더 강하 되, 이 강함은 단순히 엄격함을 통한 강함일 뿐임을 강조한다. 즉 형식이 매체보다 더 합리적이거나 더 규범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둘째, 그 대신 형식은 매체 기반보다 내구성이 떨어진다. 즉 시간적으로 지속되기 어렵고 쉽게 보존되지 않는다. 형식들은 “기억, 문자, 인쇄 등 특 수한 조처들을 통해서만 보존”24)되고 이러한 엄격한 결합이 이루어진다 해 도 매체 기반에는 항상 다른 결합을 위한 여유 용량이 남아있다. 단어(매 체)/문장(형식)의 구별을 예로 들자면, 문장들이 인쇄된다고 해도 그 문장 들에 사용된 단어들이 소모되거나 그 단어들의 다른 결합 가능성이 사라지 는 것은 아니다.

셋째, 체계 안에서 작동을 통해 연결될 수 있는 것은 매체 기반이 아니라 형식들뿐이다. 예를 들어, 유기체는 빛이 아니라 사물을 보며, 커뮤니케이 션에서 의미를 형성하는 것은 단어들이 아니라 문장들이다.

2) 커뮤니케이션의 확산매체와 성공매체

루만은 커뮤니케이션을 인간 주체의 의지로 실현될 수 있는 행위로 간주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둘 이상의 주체들에 의한 상호주관성으로도 간주하지 않는다. 그는 커뮤니케이션이 타아(Alter) 역할을 하는 자에게 귀속되는 두 가지 선택인 ‘정보(Information)’와 ‘통지(Mitteilung)’, 그리고 자아(Ego) 역

22) 엄격한 결합은 느슨한 결합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루만은 형식과의 관계에서 매체를 때로는 “매체 기반”이라고도 부른다.

23) GdG p.200; 사사 240면.

24) GdG p.200; 사사 24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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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을 하는 자에게 귀속되는 한 가지 선택인 ‘이해(Verstehen)’의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25)이 세 단계 중 커뮤니케이션을 성립시키는 마지막 결정적 단계인 ‘이해’26)는 “정보와 통지의 구별”, 즉 통지 기호(말, 글, 몸짓 등)로부터 정보를 뽑아내는 것으로 규정된다. 이때 자아의 이러한 구별이 과연 타아의 원래 선택과 일치하는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리 커뮤니케이션이 반복된다 해도 끝내 확인될 수 없다. 이것은 커뮤니 케이션에서의 이해란 상당한 정도의 심리적 오해를 포함하는 개념이라는 것, 그리고 두 의식 사이의 상호이해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서로를 꿰뚫어볼 수 없는 블랙박스인 두 개의 심리적 체계들 사이에서 투명한 이 해나 상호주관적 이해는 성립될 수 없다. 타아의 정보와 통지가 자아에 의 해 구별되면, 즉 그 구별을 통해 통지 기호로부터 정보를 뽑아내면, 그것이 곧 이해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에 이어서 자아 역할을 맡았던 자가 이번에는 타아의 역할을 맡아서 앞선 커뮤니케이션의 정보 혹은 통지에 대해 반응하는 정보를 선택하면, 그 다음 커뮤니케이션의 첫 단계가 시작된다. 루만은 “개별 커뮤니 케이션은 그것이 아무리 작고 아무리 덧없다 하더라도 한 과정의 요소로서만 요소”27)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이란 오직 그 다음 커뮤 니케이션으로 이어짐에 의해서만 성립하는 동적 단위이며 이 동적 단위의 재생산이 갖는 비개연성을 극복하려면 매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루만은 커뮤니케이션의 비개연성을 세 가지로 나누어 지적한다. 첫 번째 비개연성은 “타아가 뜻하는 바를 자아가 도대체 이해한다는 것”28)이다. 커

25) 커뮤니케이션의 세 단계에 관한 설명은 게오르그 크네어․아민 낫세이, 뺷니클라스 루 만으로의 초대뺸, 정성훈 옮김, 갈무리, 2008, 114~129면.

26) 이해가 일어날 때 비로소 커뮤니케이션이 완성되기 때문에 루만은 관례에 어긋나게 수신자를 자아로 통지자를 타아라고 부른다. Niklas Luhmann, Soziale Systeme, Frankfurt / M. : Suhrkamp, 1984, p.195.

27) Ibid., p.199.

28) Ibid.,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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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니케이션에서 이해란 상당한 정도의 오해를 포함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 게 커뮤니케이션을 계속 진행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첫 번째 방해물이다.

두 번째 비개연성은 “수신자들에게 도달”29)하는 데서 일어나는 어려움이 다. 직접 참석한 인격이 이해한다 하더라도 통지 기호는 대면 상호작용 범 위 바깥의 인격들에게는 도달될 수 없다. 세 번째 비개연성은 “성공의 비개 연성”30)이다. 어떤 통지 기호가 도달된 사람에 의해 이해된다 하더라도 이 커뮤니케이션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루만은 이 세 가지 비 개연성을 극복하는 매체를 각각 언어, 확산매체, 성공매체라고 부른다. 그 리고 이 세 가지 매체는 “서로서로를 가능하게 하고, 제안하고 그리고 후속 문제로 부담을 지우는”31)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루만은 “음성과 의미의 구별”인 언어를 “사회의 정규적인 자기생산의 꾸 준한 지속을 보장하는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 매체”32)로 간주한다. 그렇다 고 해서 그가 눈빛, 몸짓, 물건 위치 바꾸기 등 지각에 기초한 비언어적 커뮤 니케이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만으 로는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조정 혹은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갈등이 일어났을 때의 조율이나 다시 만나 자는 약속과 같은 메타커뮤니케이션은 언어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언어라는 기본 매체를 바탕으로 커뮤니케이션은 여러 가지 매체/형식을 형성해왔다. 루만은 이것들을 확산매체와 성공매체의 두 종류로 나눈다. 그 중 확산매체는 “사회적 중복(Redundanz)33)의 도달 범위”34), 즉 수신자 범위

29) Ibid., p.218.

30) Ibid., p.218.

31) Ibid., p.220.

32) GdG p.205; 사사 247면.

33) Redundanz는 ‘과잉’이나 ‘여분’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그런데 같은 통지기호들(글자들) 이 인쇄된 신문이 몇 백만 부 인쇄되는 것을 표현할 때 ‘과잉’이나 ‘여분’이라는 단어를 쓴다면, 자칫 그런 일이 불필요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확산매체의 맥락 에서는 부정적 뉘앙스가 적은 단어인 ‘중복’으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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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규정하고 확대하는 매체이다. 구어로서의 언어는 참석자들의 상호작용 범위를 넘어설 수 없다. 확산 기술 발전의 산물인 글, 인쇄, 전자매체 등은 이 범위를 상호작용 너머로 확대한다. 서론에서 이야기했듯이 오늘날 여러 매체이론가들이 주로 다루는 커뮤니케이션 매체는 바로 이 확산매체이다.

그런데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이 확산된다고 해서 반드시 이것에 다른 커 뮤니케이션들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백만 부 인쇄된 신문의 어떤 기사를 단 한 명의 독자도 읽지 않을 수 있고, 누군가 읽었다 해도 다른 곳에서 이 기사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을 수 있다. 확산이 성공(이어짐)을 보장하지 는 않는다. 구어로 이루어지는 대면 상호작용의 경우 제안된 커뮤니케이션 에 대한 거절이 비개연적이다. 예를 들어, 서너 명이 함께하는 술자리에선 참석자들 중 한 사람이 꺼낸 말로부터 대화가 이어질 가능성이 제법 높다.

하지만 인쇄 이후의 대중매체 시대에는 오히려 수용이 비개연적이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에 나오는 수많은 광고들 중 하나에 주목하여 그것이 상품 구매로 이어질 가능성은 극히 낮다.

루만은 문자의 발명 이후에 강화된 동기유발 수단, 즉 심리적 체계들이 비개연적인 커뮤니케이션에 결합되도록 하는 수단이 “종교”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쇄의 등장으로 종교적인 “우주론에 과부하”가 걸리게 되면서 “사 회는 종교들과는 표면적으로만 통합될 수 있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해법을 새로운 유형의 매체의 발달”에서 찾아내었다고 말한다.35) 그 매체가 바로

“성공매체” 혹은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커뮤니케이션 매체”이다. 화폐, 권 력/법, 진리, 사랑, 예술작품, 기본 가치들(예 : 정의, 평등, 자유 등) 등등이 현대 사회의 기능적 분화를 촉진한 성공매체이다.

루만은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커뮤니케이션 매체들의 기능을 “조건화와 동기유발을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시켜 “‘불편한’ 커뮤니케이션의 경우에서

34) GdG p.202; 사사 243면.

35) GdG p.203; 사사 244~24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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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차 수용 기회를 높인다”고 규정한다.36)예를 들어 설명해보자면, 우리는 집에 배달되어 오는 수많은 편지들을 무시하지만 행정기관이 보낸 민방위 소집 통지서를 무시하는 경우는 극히 적다. 그리고 평소에는 오전 9시에 기상 하던 사람이 그 소집일에만 놀랍게도 오전 7시에 일어나 초등학교 운동장으 로 간다. 이 사례에서 권력이라는 매체는 특정한 조건 하에서만 심리적 체계 들의 동기를 유발한다. 대한민국 국적자로서 예비군을 마친 만 40세 이하의 남성들이 1년에 딱 한두 차례만 이 통지서의 명령에 따른다. 41세로 조건이 바뀐 경우라면, 혹은 이미 올해의 훈련이 마무리된 경우라면, 그는 이 통지서 를 읽고 오전 7시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민센터에 항의 전화를 할 것이다.

화폐도 마찬가지로 조건화와 동기유발이 결합되어 있다. 가게에 온 손님 의 인상이 아무리 사악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가게 주인은 해당 상품의 가격에 맞는 화폐를 지불하는 손님에게 그 물건의 소유권을 넘겨준 다. 그리고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조건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매우 싫어하 는 일을 곧잘 하곤 한다. 사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조건화와 동기유발이 결합되어 있다. 너무나도 사랑하는 여인이 사랑의 증거를 대라고 요구할 경 우, 며칠 밤을 새워 공부하다 녹초가 된 청년이 비를 맞으며 거리를 뛰어다 닐 수도 있다.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커뮤니케이션 매체들은 현대 사회의 주도적인 분 화 형식, 즉 기능적 분화를 촉진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화폐를 성공 매체로 독립분화된 경제를 비롯해 권력을 매체로 하는 정치, 권력의 이차 코드화로 탄생한 법, 진리를 매체로 하는 과학 등이 현대 사회의 기능체계 들로 자리 잡았다. 대중매체라는 기능체계에 의존하기는 하지만 과도한 특 수성 때문에 그 자체로는 결코 범사회적 기능체계를 형성할 수 없었던 사 랑은 소설을 모델로 삼는 작은 상호작용 체계인 친밀관계들을 양산하였다.

그리고 이 친밀관계들 속에서 개인들은 익명적 대중사회의 역할들과는 구

36) GdG pp.203~204; 사사 24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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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되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3) 전자매체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의 변화

대면 상호작용을 넘어선 사회적 중복을 가능하게 한 첫 번째 확산매체는 글이다. 글은 “철자 조합과 의미의 구별”37), 즉 시각매체와 의미의 차이에 의해 성립한 매체이다. 글은 커뮤니케이션의 통지와 이해 사이의 시공간적 분리를 가능하게 하였고 이념들의 진화를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이차 관찰 과 비판을 탄생시켰으며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거절 가능성을 높였다. 즉 언 어 커뮤니케이션에 내재해 있던 ‘예’와 ‘아니요’의 구별이라는 코드화를 뚜 렷하게 만든 것이다. 또한 글은 추상화된 기호 사용을 가능하게 했고, 현실 이해를 ‘양상화’하여 부재하는 것을 상징화할 수 있게 해주었다.38) 그런데 글은 문자의 발명 이후 오랫동안 기록매체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인쇄의 발명 이전까지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 글의 기능은 구어에 대해 기생적인 수준이었고 극히 제한된 계층에 한정되어 있었다.

루만은 인쇄가 문자 커뮤니케이션을 일반화했고 현대 사회로의 이행에 있어 결정적인 확산매체라고 말한다. 그는 인쇄된 문자 텍스트가 보다 비판 적인 태도를 가능하게 했으며, 문자의 진화가 “다른 관찰자들에 대한 관찰 을 유발”하여, “문자를 기초로 해서 장기적인 효과로서 자신의 고유한 자기 생산을 완전히 이차 관찰로 전환하는 체계들이, 바로 현대 사회의 기능체계 들이 생겨난다”39)고 말한다. 그리고 문자 텍스트 덕분에 기능체계들은 이 차 관찰 메커니즘을 갖추게 된다. 정치의 경우 여론이라는 내부 환경을 통 해 여당과 야당의 지지율을 관찰한다. 경제의 경우 시장이라는 내부 환경을 통해 시장가격을 관찰한다. 과학의 경우 출판물이라는 매체를 통해 새로운

37) GdG p.256; 사사 304면.

38) GdG pp.289~290; 사사 343~344면.

39) GdG pp.278~279; 사사 3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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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 성과와 변화를 관찰한다.40)

인쇄가 낳은 인간 지각의 변화와 새로운 문화 현상들에 관해서는 맥루언, 옹, 플루서 등이 루만보다 훨씬 상세하게 묘사해왔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사회구조적 변동에 미치는 효과를 루만처럼 정확히 지적해내지는 못하였다.

루만은 인쇄를 사회 진화의 촉매로 간주하긴 하지만 인쇄 기술이 곧 현대화를 이루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계층적 분화에서 기능적 분화로의 이행이라는 사회구조적 변동은 성공매체들의 기여를 동시에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루 만은 현대 사회의 시작을 인쇄 텍스트가 제작된 15세기라고 말할 수도 있고 계층화의 붕괴와 작동상 닫힌 기능체계들이 형성된 18세기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41)이 말은 새로운 확산매체가 진화의 촉매가 되긴 했지만 성공 매체들과의 협업 덕택에 현대 사회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뜻한다.

뺷열정으로서의 사랑(Liebe als Passion)뺸, 뺷사회의 경제(Die Wirtshaft der Gesellschaft)뺸, 뺷사회의 과학뺸, 뺷사회의 법(Das Recht der Gesellshaft)뺸, 뺷사 회의 예술(Die Kunst der Gesellschaft)뺸 등 루만의 여러 각론적 저작들은 고대와 중세에 준비되어 있던 사랑, 화폐, 진리, 권력, 법, 예술작품 등과 관련 된 의미론들이 인쇄 기술 및 이차 관찰의 증가를 계기로 각각 어떻게 서로 다른 시기에 독립분화된 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예를 들어 뺷열정으로서의 사랑뺸은 중세 말의 이상적 사랑의 의미론이 여러 인쇄 된 소설들을 통해 사랑을 읽는 이차 관찰자들에 의해 17-18세기에 열정적 사랑으로 변화되어 갔는지를 추적하는 책이다. 루만은 열정의 고유한 특성 인 과도함과 단기성으로 인해 18세기까지는 사랑이 독립분화된 사회적 체계 를 이루어내지 못했음을 밝힌다. 그리고 1800년 경 섹슈얼리티 및 결혼과 결합해 영원성을 전망하게 되면서 사랑이 사회의 다른 기능체계들로부터

40) 이 사례들을 비롯한 기능체계들의 이차 관찰들에 관해서는 Niklas Luhmann, Beobachtung der Moderne, Wiesbaden : VS Verlag für Sozialwissenschaften, 2006(2. Auflage), pp.119

~125.

41) GdG p.516; 사사 60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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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렷이 거리를 두는 낭만적 친밀관계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루만은 인쇄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확산매체를 ‘전자매체’라는 개념으로 통칭한다. 그리고 전자매체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특징을 크게 동영상 커 뮤니케이션과 컴퓨터를 이용한 커뮤니케이션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에 관해서는 나의 선행 연구42)에서 소개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그 핵심만 간단하게 요약하겠다.

첫째, 동영상 커뮤니케이션은 기호만 통지되는 것이 아니라 지각되는 전 체 세계가 통지되는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정보와 통지를 구별할 가능성과 필연성이 후퇴”하게 되며,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의 예/아 니오 코드화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한다.43)정보, 통지, 이해의 세 단 계로 정의되는 커뮤니케이션 개념에서 정보와 통지의 차이가 약화된다는 것은 동영상 커뮤니케이션이 커뮤니케이션인지 아닌지를 판정하기 어려워 진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동영상 커뮤니케이션의 확산이 이차 관 찰에 의해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의 행위로의 귀속을 어렵게 만들 것이 라고 추론할 수 있다.44)커뮤니케이션을 누군가의 행위로 귀속시키기 어려 워진다는 것은 이 귀속에 근거한 성공매체의 기능이 약화될 수 있다는 것 을 뜻한다. 경제, 정치, 법 등의 기능체계는 계약, 투표, 판결 등 행위 귀속이 분명한 커뮤니케이션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 성공매체의 위기 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시 다루겠다.

둘째, 컴퓨터를 매개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은 “컴퓨터에 데이터를 입력하 는 것과 정보를 호출하는 것 사이를, 어떤 동일성도 더 이상 존속하지 않을 정도로 분리”함으로써, “통지와 이해의 통일성이 포기”되도록 한다.45)그리

42) 정성훈, 「루만의 사회이론에서 현대성의 한계」, 한국사회역사학회, 뺷담론201뺸 16권 3호, 2013.

43) GdG p.307; 사사 362~363면.

44) 루만은 전통적인 행위이론과 달리 행위를 관찰된 커뮤니케이션으로 간주하며, 이 이차 관찰에 의해서만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을 행위자에게 귀속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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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컴퓨터에서 이루어지는 데이터 처리과정은 누구도 꿰뚫어볼 수 없기 때 문에 “원천의 권위가 기술을 통해 파괴”되며 원천은 미지의 것이 된다.46) 이것은 한편으로는 저자의 종말을 뜻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비가시적 심층 과 표층의 괴리가 커짐을 뜻한다.

루만이 동영상 커뮤니케이션과 컴퓨터 매개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분석 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커뮤니케이션과 커뮤니케이션 아닌 것의 구별이 약 화된다는 것, 즉 인쇄 시대를 기초로 확립된 그의 커뮤니케이션 개념 자체 가 의문스러워진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로부터 우리가 곧바로 커뮤니 케이션의 종말이나 탈현대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섣부른 결론을 내리는 것 은 곤란하다. 루만이 자주 이야기하듯이 현대적 사회구조를 대표하는 대의 제 민주주의, 법의 지배, 화폐적 시장경제, 일반교육 등등은 여전히 지속되 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자 커뮤니케이션은 동영상 속에서도 컴퓨터 화 면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또한 성공매체는 대부분 여전히 잘 기능하고 있 다. 그럼에도 시각적 동영상은 물론이고 전자기장에 기반한 촉각매체까지 도 포괄하는 디지털 멀티 전자매체의 등장은 여러 성공매체의 기능에 차별 화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다음 장에서는 전자매체의 발전이 성공매 체에 미치고 있는 영향을 추적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는 루만 사후에 한 단 계 발전된 전자매체의 효과도 반영될 것이다.

3. 디지털 멀티 전자매체와 성공매체 사이의 긴장

1) 전자매체의 공감각화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확산매체와 성공매체 사이의 긴장을 살펴보기 전

45) GdG p.309; 사사 365면.

46) GdG p.309; 사사 365면.

(28)

에 우선 루만이 마지막으로 매체를 연구했던 시기인 1990년대 이후에 전자 매체에서 일어난 기술적 발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1세기에 들어 사진은 물론이고 영화, 텔레비전 등 모든 동영상 매체는 컴퓨터와 결합되어 디지털화되었다. 필름에 의존했던 동영상과 달리 디지 털 동영상에서는 어떤 시각적 이미지도 갖지 않는 점들의 비가시적 심층으 로부터 입체적인 표층이 떠오른다. 플루서는 “추상 게임”이 시공간의 4차원 세계로부터 시간 없는 입체의 세계(3차원), 깊이 없는 평면의 세계(2차원), 평면 없는 선의 세계(1차원, 텍스트), 그리고 선 없는 점들의 세계(0차원, 컴 퓨터화)로 이어졌음을 지적한다.47)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디지털 가상”

은 0차원에서 3차원 혹은 4차원의 세계가 곧바로 떠오르는 것이다.

문자의 1차원에서 최소한도로 남아있던 시각성은 0차원의 디지털 데이 터에서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표층에 떠오른 이미지와 심층의 매체 기반 사이에서 최소한의 유사성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놀라운 해상도와 색 감에 입체화 기술까지 보태진 연속 이미지와 그에 결합된 디지털 음향 기 술은 지각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새로운 지각 현실을 창조한다.

그리고 최근 대중적으로 보급되고 있는 터치패드는 촉감까지도 포괄하는 디지털 동영상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

컴퓨터는 전세계로 뻗어나간 인터넷과 결합되면서 도대체 그 원천을 알 수 없는 검색 결과들을 조합된 문자들과 이미지로 제공한지 이미 이십년 가까이 되었다. 키틀러(Friedrich Kittler)가 1999년 베를린 강의에서 예견했 던 광섬유를 통한 HDTV48)는 이미 실현되었다. 이제 HD 화질 전송은 무선 망을 통해서도 쉽게 이루어진다.

최근의 가장 주목할 만한 기술은 통신 기능을 갖춘 이동식 소형 컴퓨터

47) 빌렘 플루서, 뺷피상성 예찬뺸, 김성재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13, 2면.

48) 프리드리히 키틀러, 뺷광학적 미디어: 1999년 베를린 강의뺸, 윤원화 옮김, 현실문화, 2013, 339~34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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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눈부신 발전일 것이다. 스마트폰, 태블릿 등으로 불리는 이 컴퓨터는 고 정된 자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손쉽게 대용량 통신을 가능하게 한다. 게 다가 HD 화질에 터치패드까지 갖추고 있어서 손 안에서 구어 커뮤니케이 션, 문자 커뮤니케이션, 동영상 커뮤니케이션 등을 모두 가능하게 한다. 비 록 촉감 커뮤니케이션은 불가능하지만, 키보드와 마우스 클릭을 대체하는 터치패드의 확산은 전자매체와 촉감의 결합이 일상화되고 있음을 보여준 다. 맥루언이 꿈꾸었던 공감각적 문화가 실현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2) 동영상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한 사랑의 내면 서사

지극히 비개연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수용 가능성을 높임으로써 기능체계 들의 독립분화를 이끌어낸 성공매체는 인쇄의 시대에 생겨났다. 성공매체 중에서 전자매체의 등장과 함께 가장 빠르게 그 성격이 변해왔고 이제는 도대체 그 미래를 장담하기조차 어려운 것들을 꼽자면 사랑과 예술작품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의 변화에 관한 논의는 고도의 전문적 식견을 요구 하는 것이기에 이 글에서 다루지 않겠다. 여기서는 동영상의 등장이 사랑의 의미론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 후, 최근의 전자매체 발전이 추가적으로 일으 킬 변화를 짚어보고자 한다.

루만은 이미 1982년 저작인 뺷열정으로서의 사랑뺸의 말미에서 20세기에 낭만적 사랑이 처하게 된 ‘문제’에 관해 언급하였다. 루만이 말하는 ‘문제’란 19세기의 낭만주의 소설에서는 은폐되었던 의문, 즉 “친밀관계를 위한 파 트너를 찾아 그를 묶어둘 수 있는가”49)라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것 은 역설의 코드화를 통해 전인격적이고 밀도 높은 상호침투 관계를 가능하 게 했던 매체인 사랑의 비개연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음을 뜻한다. 나는 이 미 이 문제화를 1990년대 이후 한국의 대중음악, 영화, 소설, 보고문헌 등을

49) Niklas Luhmann, Liebe als Passion, Frankfurt / M. : Suhrkamp, 1982, p.197; 정성훈 외 옮김, 뺷열정으로서의 사랑뺸, 새물결, 2009, 2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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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 살펴보았다.50)그런데 나의 선행 연구는 사랑의 문제화가 확산매체의 변화와 맺고 있는 관련성을 충분히 밝히지 못했기에 여기서 보완하겠다.

쓰라린 수난과 능동적 집착을 동시에 담아내는 단어인 ‘열정(passion)’이 정당화되면서51)드러난 사랑의 역설은 18세기에 ‘사랑한다/아직 사랑하지 않는다’ 또는 ‘사랑한다/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로 코드화된다. 이 시기의 연애소설은 인쇄를 통해 도서시장에서 팔릴 것을 염두에 두고 씌어졌다. 열 정적 사랑의 초기 대표작인 17세기의 <클레브 공작부인>만 해도 필사본이 훗날 인쇄되었던 것인 반면, 18세기 중후반의 <파멜라>, <클라리사>, <신 엘로이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은 작가들이 출판을 염두에 두고 쓴 것들이다.

18세기 연애소설들은 이전 시기의 소설들보다 훨씬 분량이 많다. 게다가 사건 전개의 시공간적 범위가 좁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늘날 우리에게는 쓸 데 없이 길다는 느낌을 준다. 이렇게 긴 소설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인쇄 기술이 이러한 분량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둘째, 대중 의 독서 욕구가 매우 높아졌다는 것이다. 당시의 연애소설들에서 많은 분량 을 차지하는 것은 인물의 내면적 변화를 매우 섬세하게 드러내는 편지나 그 내면적 변화에 관한 저자의 상세한 묘사이다. 독자의 상상적 시공간 구 성을 위한 풍경의 묘사도 긴데, 이 묘사는 대개 인물의 내면적 변화에 조응 한다. 그래서 독자는 철저하게 주인공의 내면과 그의 관점에서 보는 주변세 계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소설의 눈은 “인격적인 초점화자”의 것이다.52) 그래서 독자가 소설에 빠져든다는 것은 인간 주체의 내면적 정서를 그대로

50) 정성훈, 「매체와 코드로서의 사랑, 그리고 사랑 이후의 도시」, 인제대학교 인간환경미 래연구소, 뺷인간․환경․미래뺸, 2014.

51) 열정의 의미 변화에 관해서는 Ibid., pp.73~75; 같은 책, 96~98면.

52) 소설의 시점과 영화의 시점을 비교 연구한 나병철은 소설의 눈이 “인격적인 초점화자”

임에 반해 카메라의 눈은 인격적 주체의 선행 단계로서 순수 지각 쪽에 자리한 “기계의 눈”이라고 말한다. 나병철, 뺷영화와 소설의 시점과 이미지뺸, 소명출판, 2009, 293~29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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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의 화자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의 외모, 그리고 ‘화려하 다’고 말하는 풍경을 독자는 순수 지각 이미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 름의 상상적 이미지로 떠올린다. 따라서 그런 외모를 갖고 있지 않으며 그 런 풍경과 매우 무관한 곳에 사는 평범한 독자들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소설의 인물들에게 감정이입할 수 있다. 또한 독자들은 주인공 주변의 다른 이성 인물들의 외모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주인공이 오직 한 명의 파트너에 게만 몰입하는 것을 비현실적으로 느끼지 않는다.

18세기에 이미 신분이 낮은 경우가 많았던 소설의 주인공들은 19세기에 접어들어 신분이 낮을 뿐 아니라 별로 아름답지 않은 여성이나 건강하지 않은 남성으로까지 그 허용 범위가 넓어진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브론테 자 매의 소설들이 있다. 그런데 다수의 평범한 독자들은 이러한 변화에 실망하 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소설 속의 인물들, 예를 들어 에어, 로체스 터, 히드클리프 등과 더욱 쉽게 동일시하게 된다.

이렇게 인쇄된 책을 통해 사랑이라는 성공매체의 사용법을 배우던 시대에 는 모든 내면적 고뇌가 오직 한 사람에게로만 향하는 사랑의 영원성, 그리고 사랑을 통한 자아의 성숙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누구나 사랑에 대한 진정성만 있다면 사랑할 수 있다는 일종의 평등주의가 확산된다. 사랑을 위해서는 오직 사랑만 필요할 뿐 신분도 돈도 외모도 중요하지 않다는 낭만주 의가 강화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이것이 아무리 환상으로 드러난다 할지라도 개인들은 짝사랑이나 상상적 사랑을 통해 자아의 성장을 경험한다.

낭만적 사랑에 대한 의문 혹은 회의가 시작된 20세기는 영화가 등장한 시대이기도 하다. 초기의 연애영화는 대부분 소설을 각색한 것이기 때문에 낭만적 사랑의 공식을 따랐다. 예를 들어, 로버트 스티븐슨 감독의 1944년 작 <제인 에어>의 경우 다소의 생략은 있지만 원작의 시간 순서를 그대로 따른다. 더구나 첫 화면에서 책 표지를 보여주고 영화 중간 중간에 소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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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를 그대로 화면에 보여줌으로써 이 영화가 소설을 그대로 재현한다 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에어 역을 맡은 배우 조안 폰테인은 소설 속에 묘사된 에어에 비해 너무 아름답고 건강 상태가 좋다.

점차 영화가 소설의 판매고를 좌우하게 됨에 따라 소설은 창작 단계에서 이미 영화화를 염두에 두기 시작한다. 영화화를 겨냥한 소설은 그 분량이 줄어들고 내면 서사의 비중이 약화된다. 사랑의 좌절을 다룬 1970년대 한국 의 대표 작가들인 최인호, 조선작 등의 소설은 신문 연재, 단행본 출간, 영 화화의 경로를 거친다. 이 소설들에서는 상황 변화가 자주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파멜라>, <신 엘로이즈> 등에서 흔히 발견되는 10여 페이지가 넘 는 편지 같은 건 절대 삽입되지 않는다.

1970년대 한국 영화의 주인공들은 주로 하층 출신이며 내적인 이유가 아 니라 외적인 이유로 사랑의 좌절을 겪는다. 그래서 이 영화들은 사랑에서의 평등주의 지향을 부추긴다. 하지만 그 배우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 난 미모를 갖고 있었다. 관객이 자신을 <별들의 고향>의 안인숙이나 <영 자의 전성시대>의 염복순과 동일시하는 것은 조금씩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영화가 흑백 혹은 거친 색감의 컬러와 낮은 해상도의 화질로 제작되었을 때는 배우의 외모에만 초점을 맞춘 영화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한국에서 1990년대부터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지 않는 연애영화, 즉 애초 에 동영상을 염두에 둔 연애영화가 늘어난다. 그런 영화들에서는 주인공의 내면서사가 거의 사라지고 그의 외적 행태, 즉 신체적 행태 혹은 사회적 행 태만이 부각된다. 관객의 감정이입을 차단하는 “카메라의 눈”이 강화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홍상수 감독은 인물 시점을 좀처럼 사용하지 않으며 얼 굴 클로즈업 대신 사물 클로즈업을 사용한다. 그는 “대상(혹은 인물)의 내 면과 깊이(정서와 심리)를 드러내는 대신 표면만을 찍어내는” 기법인 ‘고정 된 카메라 기법’을 통해 관객이 자신을 주인공과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행태에 대한 관찰자가 되게 만든다.53) 그리고 고화질 기술의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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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 2000년에 나온 여균동 감독의 <미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별 대사나 스토리 없이 주연 배우들의 표정, 몸매, 움직임만을 집요하게 카메라로 쫓 아가는 영화를 가능하게 했다.

영화는 책보다 훨씬 빠른 시간 전개를 가능하게 하며 시간의 비약에 대 한 수신자의 저항감을 적게 한다. 책에서는 몇 년이 지난 후를 이야기할 때 수많은 배경 설명을 추가해야 하고 이것이 자주 일어나면 독자들의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동영상에 익숙해진 세대는 점차 이것에 익숙해지고 그 래서 점차 소설을 변화시키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영화는 노화(老化)를 상 징하는 외모 변화, 시대적 소품의 변화 등으로 별 다른 배경 설명 없이 바로 수십 년 뒤로 넘어갈 수 있다.

2006년 BBC 제작 드라마 <제인 에어>에는 어린 시절이나 로체스터와의 행복했던 시절을 에어가 회상하는 장면들이 수시로 삽입된다. 2011년 캐리 후쿠나가 감독의 영화 <제인 에어>는 아예 첫 장면부터 에어가 성인이며 어린 시절은 회상으로 처리된다. 그래도 이것들은 원작에 얽매여 있기 때문 에 에어와 로체스터의 재결합에서 영화가 끝난다.

그에 반해 애초부터 시간적 비약과 잦은 장면 전환을 염두에 두고 제작 되는 영화적 영화는 낭만주의 소설에 기초한 영화와 달리, 이별, 재회, 양다 리, 배신, 이혼 등 변화무쌍한 사랑의 진행과정을 손쉽게 묘사한다. 이런 기 술적 가능성이 20세기를 통해 강화된 개인주의 및 세속주의와 결합되면서 낭만적 사랑의 의미론은 쉽게 조롱받을 수 있게 된다. 1990년대 이후 우리 는 수많은 한국 영화에서 영원한 사랑의 허구성이 폭로되는 장면들을 보았 고 결혼은 미친 짓이라는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인쇄를 기초로 삼지 않는 철저히 동영상적인 영화들은 이렇게 사랑이라는 성공매체의 기능을 약화시켜왔다. 하지만 익명적 대중사회에서 역할들을 통 해서만 커뮤니케이션하는 현대인들에게 전인격적이고 밀도 깊은 친밀관계

53) 같은 책, 295~2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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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욕구는 예전보다 잠정적이고 변덕스럽다 하더라도 여전히 강력하 다. 청춘의 강한 욕구인 섹슈얼리티로의 접근을 위한 문명적 방식들 중 사랑 만큼 매력적인 것은 아직 없다. 비록 사랑을 대체할 만한 것들이 계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랑만큼 보편적인 정당성을 보장받기는 어렵다. 그 래서 아직도 연애는 대중매체에서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주제이다.

그런데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입체적 이미지와 음향을 제공하고 그 조작 에 있어 촉감의 사용을 자극하고 있는 컴퓨터의 등장과 컴퓨터를 내장한 초대형 화면의 HDTV의 등장은 앞으로의 기술 발전에 따라 촉감까지 포섭 할지도 모른다. 화면에 보이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해주거나 3D 프린 터로 화면의 사물을 거의 그대로 제작해내는 기술적 발전은 그리 멀지 않 은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이 처음 보급된 시기와 결혼에 상당한 경력과 고 비용이 요구되기 시작한 시기가 서로 맞물렸던 일본과 한국에서는 이미 친 밀관계에 대한 욕구를 디지털 가상으로 대체하는 청춘이 늘어나기 시작했 다. 현실적 인간과의 연애를 포기하지 않은 청춘의 경우에도 전자게임과 TV 오락 프로그램의 영향을 받아 연애를 섹슈얼리티를 위한 선택 게임 정 도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이 늘어나고 있다. 사랑의 코드화, 즉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의 구별을 거부하는 용어로 유행하고 있는 ‘썸’54)은 이런 상황을 반영한 신조어이다.

그래서 앞으로 일어날 디지털 멀티 전자매체의 발전은 친밀관계를 컴퓨 터 기반 인공지능과의 관계로 대체하면서 사랑이라는 상징적으로 일반화 된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무력화시킬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에 더해 인간과 구별되지 않는 신체까지 갖춘 로봇이 나오는 영화 <엑스 마키나>는 너무 먼 미래일지 모르나 영화 <her>의 상황은 애플과 구글이 지금 제공하고 있

54) ‘썸’이라는 유행어에 관해 가장 널리 통용되는 정의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노래 가사일 것이다.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 니꺼인 듯 니꺼 아닌 니꺼 같은 나 이게 무슨 사이인 건지 사실 헷갈려” - 민연재 작사, 김도훈 작곡, 정기고 & 소유 노래, <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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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음성 서비스에 이미 그 단초가 있다.

물론 앞서 여러 차례 강조해왔듯이 사랑이라는 성공매체는, 그리고 기능적 으로 분화된 사회구조는 확산매체의 전환이 초래하는 영향에 저항할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의 변화가 전자매체에 의한 일방적 영향은 아닐 것이고 성공매 체와의 긴장 속에서 새로운 종류의 성공매체 형성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3) 디지털화와 글로벌화를 주도한 화폐의 미래

인쇄에서 전자매체로의 전환이 성공매체에 미치는 영향은 각 매체마다 다르다. 특히 숫자로 표현되기 쉬운 매체, 코드화를 뒷받침하는 굳건한 의 미론이 필요 없는 매체의 경우 인쇄의 종말이 오히려 그 매체가 더욱 잘 기능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플루서가 이미 “숫자는 알파벳․숫자 코드에서 이물질”55)이라고 지적한 바 있듯이, 숫자 표현은 인쇄와 타자기에 의해 억압되어왔다. 횡과 종의 방 향을 모두 사용해야 하는 수학 계산식과 회계 장부는 횡적 연쇄를 강제하 는 확산매체와 친화성을 갖기 어렵다. 그런데 문장과 계산식을 모두 이진법 으로 추상하는 디지털 전자매체에서 숫자는 문자와 같은 지위를 보장받는 다. 컴퓨터는 타자기처럼 1차원적인 횡적 연쇄를 중심으로 하는 워드프로 세서뿐 아니라 엑셀처럼 2차원적 표현을 쉽게 해주는 데이터베이스 프로그 램들도 제공한다.

소유와 비소유의 구별을 기본 코드로, 그리고 지불과 비지불이라는 두 가 지 항으로 이차 코드화된 화폐는 지불이라는 긍정적인 값을 선택하도록 하 는 심리적 동기유발에 있어 부담스러운 언어적 의미론의 도움을 거의 필요 로 하지 않는다. 이별이 아닌 사랑의 선택은 그 선택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서사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하나의 예술작품이 뛰어난가의 여부는 그것 의 아름다움 혹은 혁신성을 평가하는 예술비평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즉

55) 빌렘 플루서, 앞의 책, 1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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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한 규모의 문자 커뮤니케이션을 동반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화폐를 지 불하는 선택의 동기유발은 라디오와 TV의 짧은 광고만으로도 가능하다.

경제 커뮤니케이션은 동영상을 보고 컴퓨터로 클릭하면 되기 때문에 인쇄 의존성에서 벗어나 전자매체 중심으로 이동하기가 용이한 것이다.

20세기 말에는 컴퓨터에 인터넷이 연결됨으로써 화폐 지불은 세계사회 의 실시간적 동시성을 획득하게 된다. 물론 지불에 이어지는 사물 소유의 이동을 위해서는 여전히 물리화학적 에너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비사물적 소유의 이동에 걸리는 시간은 거의 0이 된다. 현대 사회가 하나의 세계사회 라는 루만의 주장, 즉 기능적 분화가 분절적 분화를 압도하여 국가, 지방 등의 공간적 차별화가 기능체계들에 종속된다는 주장은 이제 세계경제에 있어서만큼은 거의 완벽한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더구나 화폐는 세계 공통의 아라비아 숫자로 표현되며 다른 매체를 사용 하는 커뮤니케이션에 비해 문자화된 언어에 대한 의존성이 낮다. 글로벌화 에 대한 언어적 장벽이 낮은 것이다. 구매와 판매를 위해, 그리고 광고를 위해 외국어의 습득이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그것은 학술적 비판이나 문예 비평을 위한 외국어 공부에 비하면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달성된다. 그래서 1960년대에 맥루언이 전자매체에 의해 실현되리라 예견했던 지구촌은 적 어도 화폐경제에서는 달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디지털 전자매체와 상호 상승 관계를 맺어온 화폐가 앞 으로의 확산매체 기술 발전과도 잘 조응할 수 있을까? 수많은 이들의 우려 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에 금태환이 종료된 이후에도 화폐는 사물에의 종 속성을 벗어나 순수한 사회적 상징임을 입증해왔다. 그래서 화폐는 디지털 시대에 들어와서도 지금까지 굳건히 기능해왔다. 그런데 화폐는 과연 향후 의 기술적 발전과도 양립할 수 있을까? 모든 미래 전망은 오류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기서는 앞으로 화폐가 확산매체 기술의 발전에 의해 처할 수 있는 위기 두 가지만 조심스레 지적하고자 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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