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한국 근대 문학에 있어서 ‘유계’라는 사후 공간에 대한 번역이 최초로 등장했던 것은 언제일까. 보다 상세한 논의의 여지가 없지 않으나 셰익스피 어가 16세기에 쓴 뺷햄릿(The Tragedy of Hamlet, Prince of Denmark)뺸 을 현철이 1921년 최초로 잡지 뺷개벽뺸에 번역했던 것에 그 최초의 용례가 등장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14)
14) 윤민주, 「현철의 <하믈레트> 번역과 그 의의」, 뺷한국극예술연구뺸, 46, 한국극예술학회, 2014, 15~55면.
호레. 그러면 우리들이 걸타 안저서 「빠아나아드어」씨의 이악이를 들어볼가요.
빠아. 때는 이미 정 밤중이나 되엇습니다. 북두성이 西으로 기울어저 저긔 … 저 별이 꼭 지금과 가티 저긔 머물어 찬란한 광채로 천공에 퍼질 때 「마아세라쓰」
와 한가지 이 곳을 지키고 잇더니 멀리서 은은히 들리는 한 時를 報하는 쇠북소 리 …
마아. 씨이! 가만이 보시요. 저긔 나타난 것이! (先王 하믈레트의 망령이 출현) 빠아. 崩御하신 선왕의 옥체 그대로.
마아. 「호레에시오」씨 당신은 학자시니 말을 좀 하여보시요.
빠아. 선왕과 족음도 다름이 업지요? 말을 좀 하여보시요.
호레. 꼭 가튼걸, 異怪도 하고 劫도 나서 몸에는 솔음이 나는걸.
빠아. 무슨 말을 할 것 가태 보이는데.
마아. 무슨 말이던지 무러보시요. 「호레에시오」씨
호레. 네가 원래 어떠한 것이건대 幽界를 떠나 이가튼 심야에 橫行을 하느 냐? 그 뿐만 아니라 崩御하신 「덴마아크」 선왕폐하의 장엄한 군복을 僭着하고 무슨일로 現出하엿나. 네게 명하노니 속히 말을 하라.
마아. 귀에 거슬리는 것 가튼데.
빠아. 점점 저쪽으로 가는 걸!15)
위 인용된 부분은 번역된 「하믈레트」의 도입 부분인 1장에 해당하는 것으 로 호레이쇼에게 선대의 햄릿왕의 망령이 등장하는 부분이다. 호레이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는 햄릿왕의 망령에게 다름 아니라 죽음의 세계인
‘유계’를 떠나 어찌하여 현실 세계로 왔는가 묻고 있다. 햄릿왕은 바로 자신 의 원한을 풀기 위하여 자신의 세계인 유계를 떠나 현실세계로 도래하였으 며, 이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는 햄릿의 운명적 모험이 시작되 는 것이다. 이 작품 햄릿을 「하믈레트」라는 제목으로 번역한 현철은 다름 아니라 선대의 햄릿 왕의 망령이 떠나온 죽음의 세계를 지칭하기 위해 ‘유계’
라는 번역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현철이 번역한 「하믈레트」의 저본이
15) 쉑스피아 원작, 玄哲 譯述, 「하믈레트」 1회, 뺷개벽뺸, 1921.5, 139면, 밑줄 및 강조 인용자.
되는 쓰보우치 쇼요의 번역본16)을 살펴보면, 그곳에는 ‘유계’와 같은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해당 부분에서 쓰보우치는 위 인용의 밑줄로 강조된 부분 을 “너는 본래 누구이기에, 돌아가신 덴마크 대왕의 강하고 장엄한 군장을 착용하고, 그 모양으로 심야에 횡행하느냐? 감히 너에게 명하노니, 말하라.”
라고만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17)현철은 이와 같은 번역으로는 망령이라는 존재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한 듯, 여기에 원작에는 없는
‘유계’라는 단어를 덧붙였던 것이다.
여기에서는 물론 현철이 지금까지 조선 이래의 유교적 전통에서는 그다지 적극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던 ‘유계’라는 개념을 어디에서 끌어온 것인가 하 는 것이 의문시될 수 있으나 그보다 먼저 지적해두어야 할 것은 현철이 쓰고 있는 ‘유계’의 개념이 앞서 서정주가 김소월 시에 나타난 사후 세계에 대한 공간적 소통을 지칭하기 위해 쓴 유계의 개념과 미묘한 차이를 갖는다는 사실일 것이다. 현철이 번역한 「하믈레트」 속 ‘유계’는 물론 망령이라는 존재 가 영적 세계로부터 도래할 수 있는 죽음의 세계를 지칭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현실계의 확고한 삶의 공간성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여전히 저승의 공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망령은 바로 저승에 해당하는 유계로부 터 도래한 것이되, 그것은 저쪽의 세계, 즉 죽음의 공간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현철은 바로 그러한 죽음의 세계를 직접 지칭하기 위하여 자신이 참조한 번역본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유계’를 덧붙여 번역하였던 것이다.
1911년부터 일본을 유학하여 세이소쿠 영어 학교와 메이지 법학부를 거쳐 시마무라 호케쓰가 주재하는 예술좌에 들어가 쓰보우치 쇼요의 제자 격인
16) 김병철은 현철의 이 「하믈레트」가 1909년 쓰보우치 쇼요(坪内逍遙) 번역하여 출판한 뺷ハムレット뺸(早稲田大學出版部刊, 1909)의 중역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김병철, 뺷韓國近代飜譯文學史硏究뺸, 을유문화사, 1975, 426~428면).
17) シエークスピア, 뺷ハムレット뺸, 坪内逍遙譯, 早稲田大學出版部刊, 1909, 5면, “汝本 來何者なれば、故のデンマーク大君の武しく莊嚴しい御軍裝を僣り奉つて、此樣な 深夜には橫行のするぞ? 敢て汝に命ずるわい、語れ。”
나카무라 키치조로부터 연극을 배웠던18)현철은 쓰보우치 쇼요가 번역했던
「하믈레트」를 통해 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19) ‘유계’에 대한 개념 을 획득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후 뺷개벽뺸에서 ‘一集生’이라는 사람이 쓴 「K兄에게」라는 글 속에도 역시 ‘유계(幽界)’라는 개념이 등장하 고 있어 흥미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데,20)일반적으로 자주 등장하지 않는 저승의 개념인 ‘유계’라는 단어가 같은 지면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당시 뺷개벽뺸의 문예부장이 다름 아니라 현철이었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즉 이러한 정황을 통해 당시 현철이 번역한 「하믈레트」 속에 조선 이래의 한국에서는 퍽 낯선 저승의 개념이었던 ‘유계’가 도입된 것이 다름 아니라 진작부터 유계에 대한 구체적인 사유구조를 갖고 있던 일본의 영향 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유계’의 의미 변화와 영향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논의의 폭을 넓혀보면, 이 ‘유계’는 일본 메이지 시대 천황제의 확립 과정에서 통합 적 구심점으로서 일본 내부에서 신사(神社)와 관련된 종교 이론을 정비하 는 과정에서 심령연구의 영역과 관련된 영역 속에서 대두된 개념으로 등장 하였다는 사실이 발견된다.21)당시 이 유계라는 개념은 주로 현계(顯界)라
18) 박태규, 「현철의 문예론과 일본 - 희곡론을 중심으로」, 뺷인문연구뺸 52, 영남대학교 인 문과학연구소, 2007, 192~199면.
19) 박태규, 「쓰보우치 쇼요(坪内逍遙)와 현철-연극 활동과 연극론을 중심으로 한 비교문 학적 접근」, 뺷일본문화학보뺸 32, 한국일본문화학회, 2007, 341~351면.
20) 一集生, 「K兄에게」, 뺷개벽뺸 24, 1922.6, “K형! 이 세상은 어느 때나 平靜하겟습니까?
참 산다는 듯이 살게 되겟나이까? 만일 업다하면 일즉이 生의 國을 이별하고 寂寞의 幽界를 向하는 것이 낫겟지요. 死는 不合理의 生을 超越한 것입니다, 眞理의 일 부를 表現한 것이니까?生이 尊貴한 것이지 그러치 안흐면 무엇이 尊貴합니까? 무엇 이 맛잇습니까? 무엇이 아까웁니까? 하니까 無意生은 아니합니다. 有意의 死를 하지 오! 이러케 또 生이니 死이니하면 아까 말한 것과는 다시 反復이 되는 듯합니다. 容恕 하십시요!”
21) 田中初夫, 「顕界と幽界-神道に於ける神の分類とその世界」, 뺷東京家政学院大学 紀要뺸 5, 東京家政学院大学, 1965, 23~35면.
는 개념과 쌍을 이루어 제시된 바 있었는데,22)예를 들어 1925년에 출판된 모즈메 타카미(物集高見, 1847~1928)의 책 뺷인간계의 기이와 신계의 유사 (人界の奇異と神界の幽事)뺸의 한 부분에서는 유계와 현계의 의미적 차이 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현계(顯界)라는 것은, 인간의 눈과 귀가 닿을 수 있는 곳을 말하며, 유계(幽界) 라는 것은, 인간의 눈과 귀가 닿을 수 없는 곳을 말하는데, 예를 들어 사람이 몸을 가지고 있으며, 육체는 눈과 귀로 닿을 수 있으므로 현계에 속하고, 육체 가운데 머물러 있는 신혼(神魂)은, 눈과 귀로 닿을 수 없는 것이어서, 유계에 속하는 것이 나, 유계는 인간의 견문과 지각이 미치지 않는 곳을 의미하기에 따로 정해진 장소 가 있는 것 같다고 해도, 정해진 장소가 있는 것은 아니며, 가까이는 현계와 접하여, 눈앞에 있으나, 그 경계가 다른 까닭에, 서로 접촉하는 일은 불가능하다.23)
즉 이 현계와 유계라는 대립항은, 전통적인 관점에 있어서 ‘유명(幽明)’
의 존재로 대표되는 이승과 저승의 공간적 대립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특히 감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세계를 현계로 규정하고, 감각적으로 접근 할 수 없는 영혼의 영역을 유계로 규정하는 방식은 유교의 영향 아래 존재 하고 있던 우리에게도 퍽 낯익은 관념이다. 물론 위의 모즈메의 결론은 결 국 현계의 영역을 천황의 임무로 두고, 유계의 영역을 신사에서 모시는 신 의 영역으로 두고자 하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를 내포하는 것이었지만, 어두 운 세계를 의미하는 유계가 바로 밝은 세계인 현계와 대비되는 것으로 개 념적으로 배태된 시초를 알려주고 있다. 특히 유교적 전통 하의 삶과 죽음 의 경계를 가리켰던 ‘유명’이라는 개념과는 달리, 유계와 현계를 각각의 독 자적인 세계로 보는 관점을 고수했다는 사실은 일본 신도가 유교의 종교적 영향에서 벗어나 보다 구체적인 사생관을 확보하면서 구체적인 교리를 갖
22) 安原清輔, 뺷神社と宗教뺸, 弘道館, 1919, 346~348면.
23) 物集高見, 뺷人界の奇異と神界の幽事뺸, 嵩山房, 1925, 10~11면.
추어나갔으며 이를 통해 천황제의 전통에 복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 내에서 이러한 ‘유계’의 전통적인 의미 가 서구 문학의 번역 과정을 통하여 단지 현계와의 대비에서 확정되는 의미 영역을 벗어나 다양하게 분화해가는 양상이 드러났다는 사실일 것이다. 1900 년대 초기 일본에서 주로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을 번역하여 셰익스피어에 대한 전집을 내기도 했던 아사노 와사부로(浅野和三郎, 1874~1937)는 이후 심령과 영혼 등의 문제에 천착하여 심령과학연구회(心靈科學硏究會)를 만 들고 잡지 뺷심령과 인생(心靈と人生)뺸을 내는 등, 말년에는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였던 인물인데, 이 아사노는 프리메이슨과 밀교주의 (Esotericism)를 표방했던 영국 작가인 존 세바스티앙 말로우 워드(John Sebastian Marlowe Ward, 1885~1949)의 책 Gone West : Three Narratives
of After-Death Experiences Communicated Through the Mediumship of J. S. M. Ward (London : W. Rider & Son, 1917)를 번역하여 뺷사후의 세계(死
後の世界)뺸(嵩山房, 1925)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고, 1931년에는 그 속편격 인 A Subaltern In Spirit-Land. A Sequel To “Gone West” (London : W.Rider & Son, 1919)을 번역하여 뺷유계행각(幽界行脚)뺸(嵩山房, 1931)이라 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던 것이다. 워드의 앞선 책은 이미 죽어 저승에 있는 자신의 숙부, H. J. L.와 펼치는 대화를 통해 죽음 이후의 세계의 존재 구조를 해명하였고, 뒤의 책은 동생과의 대화를 통하여 마찬가지로 죽음 이후의 세계 에 대해 형상화하려는 시도를 드러내었다.
문제는 이 책의 번역자였던 아사노가 기존 일본에서 전래되던 전통적인 유계의 개념, 즉 현계와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그러한 개념이 아니라 더 정 교한 방식으로 정의하고자 시도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워드가 제시하고 있는 죽음 이후의 7개의 세계 가운데 하나를 유계로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