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역사, 제 2학기 - 제 4주차
외세하의 외세하의 유고슬라비아 유고슬라비아
- - 오스만 오스만 터키 터키 하 하 종교 종교 , , 문화와 문화와 경제 경제 - -
제 제
33항 항
. .오스만 오스만 터키하 터키하 종교 종교
((정교 정교
))역할과 역할과 문화 문화
오스만 터키 지배하 종교(* 세르비아 정교의 역할)
: 피지배 기독교인들은 밀레트 제도하에서 자신들의 종교와 문화 를 계속 유지.
: 오흐리드 교구로 편입되었던 세르비아 정교가 소콜로비치의 지 원 아래 페치 대교구의 독립 지위 획득(1557; 1766 폐지)
-> 폐지 전까지 민족 정체성 유지에 중요 역할(* Fruška Gora)
오스만 터키 지배하 문화(* 세르비아 민족의 구전문학)
:오스만 터키하의 아픈 역사와 현실을 소재로 한 구전문학이 발전 : 구전문학의 주요 소재
- 과거 중세 세르비아의 융성시기
- 코소보 전투의 전설 및 영웅 이야기(Marko Kraljević…) - Hajduk와 Uskok 이야기
- 18-19세기 세르비아인들의 독립을 향한 저항 이야기
구전문학의 특징과 의미
- 터키에 저항하고, 미래의 독립된 민족-국가 수립에 대한 이상 을 확신시켜주는 역할.
- 외세의 폭압과 두려움을 이겨내려는 공동체적 의식 확대.
- 민족과 국가의 위기 때마다 민족의 단결과 민족주의 의식 고취.
Uskok의 전설과 대형선박을 쫓는 삽화
제 제
44항 항
. .오스만 오스만 터키 터키 경제 경제
: 티마르와:티마르와 치프틀리크 치프틀리크
오스만 터키 경제의 특징
: 제국 초기 경제적 특징 – 약탈경제 체제
(정복사업이 활발하였던 14-17세기에 가장 절정)
: 18세기 이후로도 기존 체제 답습 –새로운 경제개혁 시도 못함 : 지배 지역의 풍부한 산림, 광산 자원 개발 미추진
: 서유럽에 비해 상업과 무역분야 소홀
: 이슬람 터키인들은 주로 사원 건설과 공공관리 책임자에 주력.
서유럽과 경제격차 심화(산업혁명/중상주의/ 신대륙 개발…)
=> 정치적 후진화와 함께 서유럽과의 군사력 격차로 이어짐
오스만 터키 제국의 국가적 위기에 봉착
티마르(Timar) 제도의 특징과 티마를리(Timarli) : 16세기 당시, 제국내 인구의 90%가 농촌에 거주
–> 토지는 존립 기반이자 부의 상징을 의미
=> but) 제국내 모든 토지는 술탄만이 주인인 공적 토지 개념 인 티마르 제도
: 티마르 제도하에서 농민은 영구 임대 방식으로 토지 사용, 소유 (세금과 이익 외 잉여 농산물은 중앙, 지방의 군대 유지에 활용)
티마르 봉토 소유자인 티마를리의 탄생
: 초기 대다수는 기병대인 스파히로 이루어짐
But) 16, 17세기 이후 야니차르 세력이 다수를 이룸
초기 티마를 리- 스파히
티마르 제도의 위기 1. (일리티잠(ilitizam) 제도로의 변화) :17세기 이후 영토 정복 사업 중단과 제국의 쇠퇴
-> 수혜 봉토의 부족
-> 직접 봉급을 주는 정규군 양성 제도로 변화(일리티잠 제도) 술탄에 대한 충성심 약화/ 농민 수탈 심화
18세기말 이후 대규모 농민반란 확대
19세기 이후 민족주의(문화적 민족주의)와 결합
=> Nation-State 수립 운동으로 발전
티마르 제도의 위기 2.
: 영토 확장 중단
- 술탄의 봉신 부여 토지 확대의 중단 : 개인 소유 토지 확대
- 공신에게 부여한 토지 중 첫째 아들에 한해 1치프트(çift) (지역에 따라 4-35에이커)에 한해 개인 경작지 상속 인정
티마르 제도의 위기 3.
: 빈농의 증대와 곡물 증대 계획 실패
- 16세기, 영토의 확대로 급격한 인구 증대
(16세기말까진 곡물 생산량이 인구 증가를 충분히 지탱) -> 영토 확장 중단과 인구증가에 따른 계속된 농지분할
-> 소규모 경작지와 빈농의 증대
-> 관개수로 시설 확대 미진과 곡물증대 계획 실패
터키식 커피를 즐기고 있는 터키 농민들 (19세기)
: 빈민의 확대와 농민 봉기 증대
- 농민들의 도시 유입증대와 실업자 확대
-> 해외로의 곡물 수출 중단 등 위기 탈출 노력 실패 -> 귀족 및 지주들의 사병 증대
-> 봉급과 식량 조달에 대한 부담이 농민에게 더 가중됨 -> 사병들의 농촌 약탈과 식량 탈취 가속화
-> 대규모 농민 봉기
터키 도시민들의 모습 (19세기)
17, 18세기 오스만 터키 상황과 치프틀리크 (çiftlik)제도의 도입 :영토 확장 중단에 따른 토지 부족
+ 레판토 해전(1571) 패배로 인한 지중해 해상권 상실
=> 사회, 경제적 위기에 봉착 : 공적 토지제도(티마르)
=> 토지 세습화가 인정되는 사적 토지제도 (치프틀리크)
: 중앙으로 보낼 세수 조달 권한이 지방 지주 및 관료들에게 부여
=> 농민수탈 증대와 농민 봉기 급증
:야니차르들의 가혹한 농민 수탈 및 권한 남용
=> 봉건적 농노로의 전락
/ 무슬림 지주들에 대한 저항(Hajduk/ Uskok)
=> 중앙 정부의 대처 미흡
: 제국 지배 초기 서유럽 농노에 비해 적었던 세금
-> 세수 체계 부패와 잦은 전쟁으로 인해 착취 증대 -> 증대되는 특별세에 대한 부담금 확대
19세기, 민족주의와 결합하며 남슬라브족들의 독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