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근대의 시작, 도시 개발과 종교, 문화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2

Share "근대의 시작, 도시 개발과 종교, 문화"

Copied!
87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학술대회

근대의 시작,

도시 개발과 종교, 문화

일시: 2015년 05월 15일 13:00~18:00 장소: 전주대학교 지역혁신관 513호 주최: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주관: 전북사학회

후원: 한국연구재단

(2)

이 발표논문집은 2014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으로 한국연구재단지원 (대학중점연구소지원 사업)을 받아 발간되었습니다.

과제번호: 2014S1A5B8063617

(3)

모시는 글

신록이 짙어가는 5월입니다.

언제나 가내 두루 평안하시며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는 2011년 설립된 이후, 협동번역사업과 자료조사사업을 진행 해 왔습니다. 그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2014년 12월부터 한국연구재단의 ‘대학중점연구소 지원사업’을 통해 연구팀을 구성하여 “근현대 지역공동체변화와 이데올로기”라는 주제 로 연구를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본 연구의 아젠다는 근현대 변혁기를 보다 새로운 시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데서 출발했 습니다. 즉, 전통적 정주공간으로서 ‘지역’과 ‘지역공동체’의 변화에 주목하고, 그러한 변화의 기조에 담겨있는 유교의 기능을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근대의 시작, 도시 개발과 종교, 문화”라는 제목으로 개항기부터 일제강 점기 초기까지의 시기를 중심으로 연구한 성과를 발표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하고자 합니다.

바쁘시더라도 부디 참석하시어 함께 자리를 빛내주시기를 바랍니다.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장 변주승 올림

(4)

일정

사회 : 김건우(전주대)

시간 발표자 제목 토론자

13:00~13:20 등록 및 접수

13:20~13:30 환영사: 박균철 (전주대 인문대학 학장)

1부

13:30~14:30 원재연 (전주대)

1890년대 호남 유림(湖南儒林) 및 천주교회의 동학(東 學) 인식

강효숙 (원광대) 서종태

(전주대)

개항~대한제국기 전북 지역 천주교회와 지역사회 -갈등과 그 해소를 중심으로-

전병구 (전주대) 휴식시간

2부

14:40~16:10 김경남 (전주대)

일제의 식민지 도시개발과 전통도시 전주의 로컬 리티 변용

원도연 (원광대) 이정욱

(전주대) 일본인 유곽형성과 군산지역 유곽문화의 정착 황미연 (임실고) 정승진

(성균관대)

실패한 식민지 ‘개발’ 프로젝트: 익산 황등제의 사례

이규수 (고려대) 휴식시간

3부

16:20~17:20 종합토론 좌장: 홍성덕(전주대)

(5)

차례

1890년대 호남 유림(湖南儒林) 및 천주교회의 동학(東學) 인식 ∙ 원재연

···

7

개항~대한제국기 전북 지역 천주교회와 지역사회 ∙ 서종태

···

21

일제의 식민지 도시개발과 전통도시 전주의 로컬리티 변용 ∙ 김경남

···

31

일본인 유곽형성과 군산지역 유곽문화의 정착 ∙ 이정욱

···

55

실패한 식민지‘개발’ 프로젝트 ∙ 정승진

···

71

(6)
(7)

1890년대 호남 유림(湖南儒林) 및 천주교회의 동학(東學) 인식

원재연 (전주대학교 고전학연구소)

<목차>

1. 머리말 - 갑오개혁 전후 호남 유림의 척사위정과 동학 인식 - 2. 교조신원운동~농민전쟁기 동학에 대한 조정의 인식

3. 유림의 동학 인식과 척사위정 4. 천주교회의 동학 인식과 신자보호

5. 맺음말 - 동학, 서학의 도전과 호남 유학의 근대적 변화 -

 Ⅰ.머리말

- 갑오개혁 전후 호남 유림의 척사위정과 동학 인식 -

조선의 성리학은 18세기 이후 자기보위적(自己保衛的) 특성을 부각시키면서 천주교를 비롯하여, 불 교, 도교, 감결 등을 사학(邪學)이자 이단(異端)으로 규정하고, 정학(正學)인 성리학을 진흥시켜 나가 는 동시에, 이들 사학을 금지하고 배격하는 척사위정운동(斥邪衛正運動)을 펼쳐나갔다.1) 이후 서세동 점(西勢東漸)의 경향성이 강화되면서,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물결이 조선으로 밀려들어오는 개항 전후기에 조선 왕조는 천주교 등 기존의 이른바 사학(邪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규모와 영향력으로 전국을 휩쓸면서 봉건적 수탈에 신음하던 조선 민중의 뇌리를 파고들어 성리학적 지배질 서를 위협하는 ‘동학(東學)’이라는 중대한 도전세력에 직면하였다. 동학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철저 히 관철하려는 성리학과는 달리 핍박받는 민중들의 편에 서서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새로운 메시지 를 던져주는 민중종교의 하나로서2), 부패하고 무능한 지배세력의 폭정과 외세의 침략을 타도하고 민 족의 자립과 민중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이상사회를 지향했다. 한편 조선 정부는 개항 이후 본격적 으로 밀려온 일본과 서구 열강의 자본주의, 제국주의적 침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면서 균세론(均勢 論)에 입각한 자주적 외교와 산업의 근대화를 추진하였으나, 정통과 이단을 엄격히 구분하고 사대부 양반(士族) 중심의 차등적 수직적 신분질서를 골간으로 하는 성리학의 지배이념(支配理念)만을 여전 히 고수함으로써 아래로부터 끌어 오르던 민중들의 근대화 에너지를 충분히 수렴하지 못했다.3) 특히 경제적 균분과 사회적 평등을 꿈꾸며 몰려오는 동학과 서학 등 민중종교를 ‘사악한 가르침(학문)’

(邪敎, 邪學)으로 규정하여 금지하면서 민중들의 대대적인 반발과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1890년대의 동학은 민중들의 대대적인 호응 속에서 성리학 이데올로기에 대한 기존의 소극적 포용의 자세에서 벗어나 사회 변혁을 위한 좀더 과감하고 적극적인 비판의 공세적 태도를 표방해야만 했다.

이러한 동학의 등장에 조정의 관료를 비롯한 사대부 지배세력의 대부분은 일단 당황하면서도 여전히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구태에서 탈피하지 못했기에 동학에 편승한 민중의 큰 흐름과 맞부딪혀 수많은 갈등과 소모적 충돌을 겪어야만 했다. 한말의 우국지사였던 매천 황현은, “역사상 호남은 인재가 많

1) 조 광,『조선후기 사상계의 전환기적 특징』(경인문화사, 2010), 6-7쪽.

2) 김진소, 「동학과 민중의식의 성장」 『천주교 전주교구사1』(도서출판 빅벨, 1998), 505쪽.

3) 신용하는 민중종교로서의 동학의 주도세력을 사회적으로는 상승하는 양반층, 경제적으로는 빈민과 소작농이라고 파악했다(신용하,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일조각, 1996), 61-117쪽.).

(8)

고 절개와 의리를 숭상한다”고 호남의 역사성을 강조했는데4), 이는 동학농민전쟁이 최초로 일어난 지역이 호남의 고부지역이고, 동학농민군의 3대 지도자(전봉준, 김개남, 손화중)가 모두 호남 출신이 며, 농민전쟁의 결과로 한때나마 농민들이 제기했던 일부 폐단을 혁파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구축 해갔던 집강소(執綱所)가 설치된 지역도 또한 호남의 53개 군현이었다는 점에서, 적어도 동학농민운 동사는 호남을 그 중심으로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호남은 개항 이후 한 동안 전국 에서 가장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산곡에 은신하여 활발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곳이라는 점에 서5) 농민전쟁을 전후한 시점에 동학교도는 향촌사회의 오랜 지배세력이었던 사대부(유림)와는 물론 이고 천주교도들과도 여러 차례 충돌하면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지 않을 수 없었다.

본고는 갑오개혁을 전후한 시점의 조선사회에서 발생한 당시의 지배이념인 유교(성리학)와 민중종 교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냈던 동학 및 서학과의 이념적 충돌을 사상사적 측면에서 해명하는 것을 목 표로 하면서, 호남 지역 유림의 위정척사 의식의 논리적 구조를 분석해보았다. 그러나 이 분야에 대 한 필자의 연구가 일천하여, 향토사의 그간 성과와 유학 및 동학사상에 대한 다양하고 심도 깊은 논 의를 본 연구에 충실히 반영하지 못한 한계점을 가진다.

Ⅱ. 교조신원운동~농민전쟁기 동학에 대한 조정의 인식

1864년 3월 10일 조정은 동학의 초대 교주인 최제우(崔濟愚, 1824~1864, 水雲)를 대구 감영에서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처형했다. 이후 동학은 경상도와 강원도 산간지대에서 기반을 다 지고 활동하다가 1871년 영해에서 동학교도 이필제(李弼濟, 1825~1871)가 교조신원을 핑계로 난을 일 으켰다가 실패했다. 호남지역은 최제우가 살아있을 때부터 순회하여 일찍부터 이곳에 신자가 있었는 데, 이를 이어 제2대 교주 최시형도 1880~1890년대에 이 지역을 순회하여 포교에 힘썼다.6)

동학은 스스로를 ‘도유(道儒)’라고 불렀는데7), 이는 ‘수도(修道)하는 유학자(儒學者)’란 뜻이며 도(道)의 출자와 신도들의 신원의식을 규정하는 매우 중요한 용어로서, 초대 교조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할 때부터 유교를 동학의 근원으로 삼았던 사실과 깊은 상관관계를 가진다. 그래서 동학의 교의 는 유학의 덕목인 성(誠), 경(敬), 신(信)과 이를 실행하기 위한 수심정기(修心正氣)와 포덕광제(布德廣 濟)로 요약될 수 있겠다.8) 동학 교리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처형된 교조 최제우의 신 원(伸寃, 명예회복)을 위해 1893년 2월 11일, 서울의 대궐 앞에 동학교도가 모여서 복합상소(伏閤上 疏)를 올린 가운데 잘 드러난다.

각 도의 유학(幼學) 신 박광호(朴光浩) 등은 황공하옵게도 거듭 머리를 조아려 삼가 목욕재계하고 백번 절하 며 … 주상전하께 말씀을 올립니다. … 지금 전하는 신 등의 천지부모(天地父母)이고, 신 등도 전하가 기르는 어린애입니다. … 이처럼 매우 원통한 처지를 천지부모에게 호소하지 못한다면 하늘과 땅 사이에 다시 어디로 돌아갈 곳을 정하겠습니까? … 원만하고 흠이 없는 이 대도(大道)가 남에게 날조를 당해서 이처럼 만고에 처

4) 황현, 『오하기문(梧下記聞)』「수필(首筆)」

5) 김진소, 앞의 책, 388쪽.

6) 「천도교 연보」『동학혁명100주년기념논총』(태광문화사, 1994), 710-729쪽.

7) 1891년 10월 대신사 최시형이 동학교도에게 내린 통유10조에는, “아 !, 너희 도유(道儒)는 이 10조에 마음과 힘을 전일하게 하여 언 제나 힘써 받들고 삼가 좇아서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 권11, 77쪽.『동학도종역사(東學道 宗歷史)』). 또 같은 책 99쪽에는 “도유(道儒)는 부모를 효로서 공경하고, 내외간에 온화와 순종을 위주로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 한편 평시에 동학교도들은 스스로를 ‘도인(道人)’이라고도 흔히 불렀다(황현,『오하기문(梧下記文)』「수필(首筆)」). ; 무릇 ‘도 인’이라고 스스로 이름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배운 것을 ‘도’라고 하였으며 그 무리들을 포(布)라고 하였으며, 포가 모인 것을 접(接)이라고 하였다.

8) 같은 책(11권), 14쪽 ; 제세주(濟世主, 초대교조 최제우)는 성(誠)․ 경(敬)․ 신(信)으로서 도를 수립하는 요체로 삼았고, 수심(修心)과 정 기(正氣)를 도를 수련하는 요점으로 삼았으며, 덕을 펴고 대중을 널리 구제하는 것(布德廣濟)을 도를 행하는 연장으로 삼았다.

(9)

음 있는 횡액을 겪게 하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인의예지(仁義禮智)와 효제충신(孝悌忠信) 및 삼강오 륜(三綱五倫)의 도리(道理)에 비추어도 그렇게 되어서는 아니할 것이며, 만약 조금이라도 어그러지는 일이 있 다면 감히 도학(道學) 두 글자로 의논에 참여하지 못할 것입니다. … 그 글은 시(詩), 서(書), 역(易), 춘추(春秋) 이고 그 법은 예약(禮樂)과 형정(刑政)이며, 그 도는 온화, 양순, 공손, 검소, 효도, 형제간의 우애, 친족 및 외 척들과 화목, 친구간의 믿음과 구휼, 인(仁), 성(誠), 의(義), 충(忠), 화(和)로 그 기질을 변화시킬 뿐입니다. … 인의예지는 옛 성인의 가르침이고 수심정기(修心正氣)는 우리가 다시 정한 것입니다. … 성, 경, 신의 세 가지 단서로 하늘과 땅을 공경해서 받들고 … 유(儒), 불(佛), 도(道)를 통일하는 이치입니다. …9)

이어서 ‘동학’(東學)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또한 동학(東學)이라고 한 것은 그 학명(學名)이 본래 동학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늘에서 나와 동쪽에서 만 들었고, 당시의 사람이 서학(西學)으로 잘못 배척해서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선사인 신 최제우가 제자에게 말 하기를, ‘도가 비록 하늘의 도이지만 학문은 동학입니다. 더욱이 땅이 동과 서로 나뉘었는데, 서를 어찌 동이 라고 하고 동을 어찌 서라고 하겠습니까? 공자가 노(魯)에서 태어나 추(鄒)에서 성행하여 노와 추의 풍조가 이 세상에 전해졌고, 우리 도는 이곳에서 받아 여기서 포교하는데 어찌 서(西)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서학이라고 그것을 배척하는 것도 부당하고, 또한 동학이라 해서 배제하는 것도 마땅하지 않습니다. … 전하 께서는 교화(敎化) 중의 이 어린애를 불쌍히 여기시고, 신(박광호)의 스승의 억울함을 시원스레 풀어주시고, 이 전에 유배된 도인(道人)들을 빨리 용서하여 임금의 덕스런 말씀을 널리 펴서 온화한 기운을 이끌어 맞이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10)

이에 고종 임금은 2월 13일 사알(司謁)을 통해 구두로 비답을 내려 각자 집에 돌아가 생업을 편안히 하면 바라는 대로 시행할 것이라고 했다. 이보다 앞서 동학교인들은 서울의 서양 각국 외교관의 공 관으로 서학(西學)을 배척하는 격문을 발송하고 동학이 외세를 배척함을 분명히 했다.

서학(西學) 종교의 두령(頭領)들은 우리가 타이르는 일을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할 것이다. … 관문을 설치하 고 종교를 전파하는 일은 조약 중에 너희들 두령에게 허용하지 않은 것인데도 제멋대로 몰려와서 명목상 상 제(上帝)를 공경해서 기도를 글로 만들어 야소(耶蘇)를 믿는다고 한다. 그러나 다만 예수를 찬미하는 법으로 삼는 바른 마음과 성실한 뜻의 배움은 전혀 없다. 또한 말을 실천하고 행실을 돈독하게 하는 실제도 없다. 부 모에게 효도하고 공경한다고 하면서도 부모가 살아서는 공양하고 순종하는 도가 없고 죽어서는 곡읍(哭泣)과 분상(奔喪)하는 절차가 없으니 이것을 어찌 떳떳한 인륜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너희는 구걸하는 부류로 너희 교회에서 관례적으로 정한 돈과 밥을 지나치게 탐하고 훌륭한 거처와 음식에 마음을 쓴다. 처음에는 영 어 교리를 가르치다가 한문으로 양가의 자손을 꾀어 끝내는 너희들의 교회 속으로 압박해서 들게 한다. … 이 렇다면 너희는 반드시 영원히 고생하는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두렵지 않은가? … 속히 짐을 꾸려 본국으로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병사와 인자하고 의로운 방패로 죄를 성토하고 토벌할 것이다.11)

이상과 같은 동학교도의 주장에 대해서 당대의 온건 개화관료인 김윤식(金允植, 雲養, 1835~1922) 은, “동학당이 전라감영으로 보낸 동학당의(東學黨議)를 보니, 충효열(忠孝熱)을 세 가지 어려움[三 難]으로 삼고 일본과 서양을 물리치는 것을 대의로 삼는다고 한다.”12)라고 하면서 별도의 비판없이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다수의 관료들은 동학을 서학과 함께 싸잡아 비판했다.13) 1894년 들어서 고부 봉기를 기치로 하여 동학교도들이 지도하는 농민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중앙과 마

9) 위의 책, 116-117쪽.

10) 위의 책, 117-118쪽.

11) 위의 책, 119-120쪽.

12) 앞의 국역총서 제10권, 15쪽. 『면양행견일기(沔陽行遣日記)』 1893년 3월 8일 경인.

13) 위의 책 16쪽. 『면양행견일기(沔陽行遣日記)』 1893년 3월 9일 신묘.

(10)

찬가지로 지방의 민인들도 의견이 나뉘었다. 일부 동학교도가 사대부를 능욕하고 가옥을 부수는 등 의 행태에 대해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14), 일부는 오히려 동학군대가 민간에 폐를 입히지 않 음은 물론이고 선행까지 하여 일반 백성들의 인심을 얻으려 한다는 사실을 대단히 긍정적으로 평가 하기도 했다.

동학군들이 각 부에 명령을 내렸는데, … 적을 대적할 때 언제나 군사는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기는 것을 최고로 삼는다. 비록 부득이하게 싸우더라도 절대로 생명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행 진하여 지나는 곳에서 사람과 물건에 해를 입히지 말라. 효제충신(孝悌忠信)하는 사람이 사는 마을의 10리 안 에는 주둔하지 말라. 또 12조의 경계령을 두었는데, 항복한 자는 대우를 받는다.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탐오 하는 자는 추방한다. … 달아나는 자는 추격하지 않는다. 굶주린 자는 음식을 준다. … 가난한 자는 진휼한다.

… 병자에게는 약을 준다. 우리들(동학군)이 학행의 근본이 되어 만약 이러한 명령을 어기는 자는 지옥(地獄) 에 가둔다.15)

이같은 동학군 자체의 통솔 강령이 많은 민인들에게 인심을 얻고 호감을 샀음은 물론이다. 전봉 준, 김개남 등 동학의 지도자들은 나름대로 이같은 규율을 자체적으로 실시하려고 노력했으나 역부 족이었다.16) 동학군 내의 기강해이로 인한 부분적 일탈 현상은 이미 전주화약(全州和約)으로 성립된 동학농민군의 집강소(執綱所) 자치기(自治期)(1894년 6~8월)부터 시작되어, 9월 제2차 봉기이후 11월 공주 우금치에서의 전투를 계기로 농민군이 패배하여 관군과 일본군에 쫓겨 다니던 시기에는 더욱 두드러진 경향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동학군에 적대적이었던 사족(士族)은 물론이고 많은 민인들도 동학군을 외면하고 수괴를 체포하여 관가에 끌고 가는 등 동학을 반대하는 일들이 비일비 재하게 나타났다. 동학군 지도자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이 각각 순창, 고부, 태인의 사민(士民)들 에게 체포되었다는 사실은 저간에 변화된 민심의 향배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동학군이 거의 진압되는 시기에는 동학군의 윤리적 부도덕(不道德)뿐만 아니라 동학의 교의(敎義)에 대한 비판도 관 리들로부터 나타났다.

친군장위영부영관 겸 죽산진토포사 이(李)가 여러 동학도들에게 깨우쳐 알리노라. … 너희는 도법(道法)을 거짓으로 훔쳐 아랫사람을 잡도리하지 못하고 선량한 이들에게 해악을 끼쳤고 … 도(道)는 본래 인도하여 돕 고 함양(涵養)하고 교화시키되, 자연스럽게 이루도록 맡기는 것이다. 그럼에도 남을 속이고 억눌러 협박하며 백성들에게 강요하여 죄과(罪科)에 빠졌으며 … 평등을 거짓으로 일컬어 명분(名分)을 훼손시켰으며 … 인의 (仁義)를 주장하면서 내심으로는 속임수와 욕심을 부렸고 … 길흉화복의 운수[氣數]를 망령되이 말하여 스스로 반역죄를 범했다. … 너희들이 말하는 도(道)와 덕(德)에 대해서도 따져 묻는다. 너희가 일컫는 도와 덕은 경천 (敬天)이라 말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고 말한다. 이는 다 우리 유교[吾道]에서 훔쳐간 지류(支流)로서 따로 하나의 깃발을 세운 것이다. … 다만 ‘경천’ 두 글자를 들어 말한다면, 과연 하늘의 형체를 얻을 수 있을 까? 하지만 갖가지 물건마다 하늘이 형체를 나누어주지 않은 것이 없다. … 삼강오륜과 팔조구법(八條九法)이 하늘의 자취를 본받아 그것을 따라 수양하지 않음이 없다. 도교와 불교에서 찾아보면 대도(大道)는 무상(無相) 하므로 안으로는 항상 진성(眞性)이 무위(無爲)하고 밖으로는 그 마음을 나타내지 않는다고 한다. … 이러한 이야기들은 억지로 문자를 세우고 무리하게 이야기를 지어내서 그렇게 말한 것뿐이다. 지금 너희들의 행동과 말을 관찰하여 비교해보면 말은 허황되고 행동은 비적(匪賊)의 무리이다. 이는 하늘을 업신여기는 일이요, 하 늘을 공경하는 태도가 아니다. 공부한 것이 올바르지 못하여 바른 길로 입문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 유도(儒道)를 거짓 존숭하면서 실은 그 도맥(道脈)을 어지럽게 하였고 불교를 거짓 배척하면서도 가치없는

14) 위의 책, 103쪽.『면양행견일기(沔陽行遣日記)』 1894년 4월 9일 을묘.

15) 위의 책, 111쪽.『면양행견일기(沔陽行遣日記)』 1894년 5월 2일 무인.

16) 박찬승, 「1894년 농민전쟁기 호남지방 농민군의 동향 -남원지방 김개남 세력을 중심으로-」『동학농민혁명의 지역적 전개와 사회 변동』(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1995) ; 앞의 책(제3권) 58-60쪽. 부안 유생 김방선(金邦善, 1843~1901)이 기록한 『임하유고(林下遺 稿)』 1894년 7월 6일자 일기에 의하면 전봉준은 혁명을 도모하여 동학군의 불법과 탐학을 중지시키려고 했으나, 동학의 다른 두목 들은 모두 가렴주구(苛斂誅求)만을 일삼았고 그중에서 김개남이 가장 심했다고 한다.

(11)

것들을 가져다 썼다. 하나의 단(壇)을 제멋대로 세워 온 나라를 요사하게 유혹하고 병기를 동원하여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렸다. 이러한 것을 그냥 두고 주벌(誅罰)하지 않는다면 임금의 위엄이 어디에 있겠는가?17)

그러면서도 조정의 지휘를 받은 순무영은 동학도들을 신중히 다루고18) 몇 가지 부류로 분류하 여19) 일신상의 이유나 가문의 보존 등의 이유로 불가피하게 동학당에 입교한 일반 민중들을 본 고장 에 편안히 정착시키는데 특히 주력하였다.

흩어져서 숨은 동도(東徒)에게 전령을 보내 말하기를, ‘너희들은 원래 양민(良民)으로 사설(邪說)을 즐겨 듣 거나 위협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억지로 그들을 따라가서 자신의 본업을 포기하고 그들의 지시에 따라서 성과 집을 불태우고 사람을 죽이며 재물을 약탈하였다.’ … 경(經, 서경)에서 말하기를 ‘그 거괴는 죽이고 위협에 따른 자들은 다스리지 말라’ 하였으니 … 각자 네 집에 돌아가서 네 생업을 지켜라. 옛날의 더러움을 씻어버리고 … 다시 교화가 된 땅의 백성이 되라.20)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조정에서 파견된 순무사, 토포사, 감사 등은 생존적 본능에 의해 불 가피하게 동학농민군에 편성된 백성들을 효유하여 본 고장에 정착시켜 본업(농업)에 힘쓰게 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동학도들을 설득해왔고 기본적으로는 아래에서 설명할 유림들과 마찬가지로 정통 유 교(성리학) 이념으로 복귀하여 이단 사설인 동학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했음을 알 수 있다.

Ⅲ. 유림(儒林)의 동학 인식(東學認識)과 척사위정(斥邪衛正)

호남을 비롯한 전국의 동학도에 대해서 그 발생부터 사상적, 사회적 배경을 자세히 고찰하고 자신 이 전해들은 모든 견문 사실들에 대해서 가장 자세한 기록을 남긴 이는 호남에서도 구례 땅에 살았 던 유학자 매천 황현(黃玹, 1855~1910)이었다. 그는 동학이 비록 서학을 비판하지만 서학을 바꾸어 부른 데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이같은 사학(邪學)이 횡행하게 된 것은 붕당(朋黨)의 폐해로 유림 (儒林)이 쇠퇴하고 정치가 문난해져 민생이 도탄에 빠진 데에 그 근본 원인이 있다고 진단했다.21) 황 현이 동학을 이론적으로 비판한 부분만을 필자가 그 조목을 만들어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a] 동학(東學)은 천주학(天主學)이다 : … 철종 말기에 장김(장동 김씨)은 더욱더 그 학정을 더해갔 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이를 원망하였다. 이때 경주에 사는 최제우 라는 사람이 스스로 “하느님이 재난을 내린다.”고 하면서, 문서를 만들고 유언비어를 퍼트리며 부적과 주문을 횡행케 하였다. 그 학문 역시 ‘천주’를 받드는 것인데도 서학(西學)과 구분하고자 동학(東學)이라고 고쳐 불렀다.

17) 앞의 책(권7), 30-34쪽. 『兩湖右先鋒日記』1894년 10월 13일 曉諭文.

18) 상당수의 동학군 가담자들을 증거불충분으로 석방시켜주었다(앞의 책(권12), 174-179쪽.).

19) 황해도의 동학당을 분류한 것에 따르면 제1종 진정 동학당, 제2종 일시 동학당, 제3종 가짜 동학당 등으로 나누었다(앞 책(권12)

『東學黨征討記』326-327쪽.). 이중에서 제2종의 경우 동학의 가르침을 믿지 않으면서도 위협을 당하거나 생명, 재산의 보호를 위해 서 동학당에 가입한 경우인데 이 경우에는 각지 순무사들이 거의 대부분 석방시켜 농토에 안집하도록 했다. 황현은 전라도의 동학 도들의 예를 들어 동학에 들어간 지 오래된 사람을 구도(舊道), 최근에 새로 들어오는 사람을 신도(新道)라고 하였으며, 평민을 가 리켜 속인(俗人)이라 하였는데 속인 가운데 동학을 비방하는 사람은 이들을 협박해서라도 반드시 동학에 들어오게 하였으니 이들을

‘늑도(勒道)’라고 하였다(황현,『오하기문(梧下記文)』「수필(首筆)」).

20) 앞의 책(권7), 197쪽. 『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

21) 『오하기문』「수필」 ; 金昌洙, 「『甲午平匪策』에 대하여 -梅泉 黃玹의 東學認識-」 『藍史 鄭在覺博士 古稀紀念 東洋學論叢』

(동양학논총 편찬위원회, 1984) ; 金容燮, 「黃玹(1855-1910)의 農民戰爭 收拾策」 『歷史와 人間의 對應 (高柄翊先生 回甲紀念 史學 論叢)』(고병익선생 회갑기념 사학논총 간행위원회, 1984) ; 金昌洙, 「黃玹의 『東匪紀略』 草藁에 대하여 -『梧下記聞』乙未 4月以 前 記事의 檢討-」 『千寬宇先生 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정음문화사, 1985) ; 李離和, 「黃玹의 『梧下記聞』에 대한 內容檢討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기술을 중심으로-」 『서지학보』 4(한국서지학회, 1991) ; 박맹수, 「매천 황현의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에 대한 인식」 『매천 황현과 역사서술』(디자인흐름, 2011.1) 등.

(12)

[b] 동학은 정감록을 빌미로 왕조교체를 예언하여 사회적 혼란을 부추켰다. : 최제우는 지례(知禮), 김산(金山)과 호남의 진산(珍山), 금산(錦山)의 산골짜기를 오가며 양민을 속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계(戒)를 받게 하고는, “장차 이씨는 망하고 정씨가 일어나는데, 앞으로 큰 난이 일어나 동학을 믿 는 사람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 우리들은 가만히 앉아서 천주를 암송하면서 참된 주인을 보좌 하면 장차 태평한 복을 누릴 것이다.”고 속였다.

[c] 서학과 다를 바 없고 서학(천주학)의 부스러기를 주워 모은 것이다. : … 동학은 서학과 다르다 는 것을 애써 주장하였다. 즉 서학은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으나, 동학은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낸다 하였고, 서학은 재물과 여색을 탐하나, 동학은 재물과 여색을 탐하지 않는 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그 무리들은 이것을 믿고 마치 참다운 도학인 듯 여겼지만 실상은 상스럽고 얄팍한 천주학의 부스러기를 주워모은 것에 불과했다.

[d] 부적과 주문으로 백성을 우롱하다 : 지난 날 최시형은 우매한 백성들을 유혹할 때 단지 부적을 지니고 주문을 외우면 물에도 빠지지 않고 불에도 타지 않으며 비를 맞아도 옷이 젖지 않고, 화살과 돌, 탄환 같은 것이 몸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이 그것을 믿고 추종하 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 보은에 모였을 때 하늘에서 큰비가 내려 밖에 서 있던 무리들은 그 의관이 모두 젖었다. 그리하여 그 무리들이 차츰 의심하기 시작했다. … 어윤중이 먼저 대포를 발사하여 위 협하였다. 포탄을 맞은 사람은 금방 죽어버리자 그 무리들은 깜짝 놀라 서로 돌아보면서 아무 말도 못하였다.

[e] 최시형의 혹세무민은 지식인에게 통하지 않는다. : 애초에 최시형은 자신이 글을 지어 다른 사 람들과 주고받았다. … 그 문장이 지극히 천박하여 문리조차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했다. 그 「강신 주(降神呪)」에는 “하느님을 모시며 자연의 조화를 따르며 영원토록 잊지 않으면 세상의 이치를 알 수 있다.[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라고 하였고, 「강령주(降靈呪)」에는 “지극한 기운이 마침 내 오늘에 이르렀으니 원컨대 크게 내려주십시오[至氣今至 願爲大降]”이라고 하였다. 이 두 주문 21 자로 된 한편의 강령을 만들었다. 어리석고 미련하여 글자를 모르는 자들도 이것을 몇 번 외우면 살 이 떨리고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중에 어떤 사람은 앉은 자리에서 몸이 위로 조금씩 떠오르기 도 하였는데(空中浮揚), 이런 현상을 가리켜 신이 내렸다고 했으며 이 단계를 지나면 잡념이 없는 경 지에 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글을 읽어 사리를 깨친 사람은 천 번을 외워도 신이 내리지 않았 기 때문에 매우 어리석거나 무식한 자들이 아니면 배우려 하지 않았다.

[f] 귀천을 섞어놓고 천한 이들과 원망을 가진 이들을 모아 부자와 양반을 괴롭혔다. : 법을 정할 때 이미 귀천을 뒤섞어 놓았다. … 한번 그 무리에 들어가면 못하는 짓이 없었다. 심한 경우에는 다 른 사람의 무덤을 파헤치면서까지 사적인 빚을 받아내는가 하면, 부자들을 위협하고 양반을 모욕하 였으며 관리를 꾸짖고 욕하며 구실아치와 군교들을 결박하는 등 번개가 치고 바람이 몰아치듯 기세 를 올리며 쌓이고 쌓인 원한과 굴욕을 마음껏 풀었다.

[g] 유전무죄(有錢無罪)와 형벌을 이용한 토색질 : 비록 큰 죄를 진 경우에도 죽이지는 않고 주리 를 틀어 겁을 주면서 도인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저들의 숨은 뜻은 엄한 형벌로 겁을 주어 재물을 빼앗는 데 있었으므로 만약 바로 죽여버린다면 재물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비록 죄악이 드러나 모든 사람이 죽여야 된다고 하는 사람도 돈만 많으면 풀려나왔다.

… 자신들의 동료 중에 부자가 있으면 또한 주리를 틀었으므로 한달 남짓 사이에 50여개 고을의 백 성들 중에서 성 밖에 200이랑 정도의 땅과 100금 정도의 재물을 가진 사람은 모두 주리를 당하였다.

… 전봉준 등이 비록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고는 하나 민간에서 는 ‘주리만 풍년이다’고 하였으니, 본래의 뜻이 이처럼 형편없이 어긋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13)

이상에서 논한 [a]~[g]의 내용들은 크게 볼 때 교의(敎義)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 부분(a, b, c, d, e)과 신자들의 부도덕한 행실(f, g)을 비판한 부분 등으로 대별된다. 이러한 비판에서는 엘리트 지식인 중심의 가치관이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으며, 오랜 기간 신분제의 질곡에 눌렸던 민중의 평등 지향의 원의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평가 절하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황현의 친구로서 황현과 같은 구례 고을에 살았던 이기(李沂, 1848~1909, 海鶴)도 또한 동학을 비 판하였는데, 의병 활동에 소극적이었던 황현과는 달리 그 자신이 구례읍성을 동학도의 침범으로부터 지킨 의병장이 되어22) 단순히 논리적으로만 동학을 비판하는데 그치지 않고 향촌사회에 동학교도들 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이른바 위정척사(衛正斥邪)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었다. 이기는 한편으로 실 학에 그 뿌리를 둔 개화운동을 추진한 인물이기도 했다. 을사늑약(1905년)의 부당함을 공개적으로 비 판했고, 한성사범학교 교관, 대한자강회 활동 등 애국계몽활동을 추진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의병 맹주로서 작성한 격문에도 동학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외부의 사학(邪學, 서학)이 넘봄으로 인하여 동학(東學)이 몰래 치성(熾盛)해지게 되었습니다. 처음 에는 부수(符水, 符籙을 태운 물)로 병을 치료하였으므로 그들은 장각(張角)과 장도릉(張道陵)의 등속인가 의심 하였는데, 끝내는 황지(潢池, 반란의 장소)에서 무기를 휘둘러 문득 방훈(龐勛)과 방납(方臘)의 일을 일으켰습 니다. 열군(列郡)과 웅번(雄藩)에 이르기까지 온갖 소란을 겪고 있습니다.23)

이기는 동학을 처음에는 주술로 병을 치료하는 민중종교 정도로 생각했으나 나중에는 국가에 변 란을 초래하는 역적 도당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고 했다. 좀더 구체적인 자료를 더 찾아서 이기의 동학에 대한 인식을 보충해야겠지만, 일단 농민전쟁 전후기까지 그의 동학과 민중종교에 대한 인식 은 계급적 이해에 입각한 것으로 보이는 부정 일변도였다.

황현과 이기 외에도 호남의 많은 유학자들이 동학농민전쟁을 거치면서 동학의 교의에 대한 논리 적 비판, 동학군들의 행실에 대한 윤리적 비판 등을 쏟아내었다. 그러나 대체로 동학 교의에 대한 논 리적 비판은 드물고, 대부분의 논자들이 동학군의 언행불일치(言行不一致), 백성에게서 탐욕과 불법 적 수탈을 도모하는 부도덕한 집단이라는 점에 대해서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원 유생 김재홍(金在洪)은 1892년부터 1895년까지 자신의 경험과 견문을 바탕으로 동학을 호남 지 방의 다른 여타 이단의 학문들 중의 한 부류로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 지금 세상에 사특한 학설이 제멋대로 유행하여 이른바 오방지학(五方之學)이 있으니, 동학(東學), 서학(西 學), 북학(北學), 중학(中學), 남학(南學)이다. 예전에 내가 연재 선생님께 들으니, 서학은 불문(佛文, 불교)의 반 졸(反卒, 배반한 졸개)이고, 동학은 서학의 반졸이고, 남학은 기도를 위주로 삼고, 중학과 북학은 유도(儒道)를 추종하는 듯하지만 그 실제는 바름을 해치고 참 모습을 상실했다고 하니, 심하도다.24)

김재홍은 불교에서 천주교(서학)가 나왔고, 또 그 서학에서 동학이 나왔다고 하면서, 천주교와 동 학은 각각 그 모태를 배반한 졸개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또한 유학을 추종하는 듯한 북학과 중학도 결국은 바름을 상실한 이단이라고 규정했다.

부안의 유생 김방선(金邦善, 1843~1901)은 동학을 일종의 민중종교 내지 술법(術法)으로 보았다.

22) 앞의 책(12권) 346쪽에 있는 동학농민군 진압관련 자료인 『갑오군공록』에는 구례유학(求禮幼學) 이기(李沂)가 군대를 모아 성을 지키고 비도의 괴수를 염탐하여 붙잡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앞의 책(7권) 146-147쪽에는 이기가 백성의 추대로 맹주가 되어 민 병 수백명을 모집하여 적을 토벌하고 구례성을 지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양호우선봉일기』1894년 12월 6일.).

23) 앞의 책(제8권), 123-124쪽. 『선봉진정보첩(先鋒陣呈報牒)』.

24) 앞의 책(제5권), 『영상일기(嶺上日記)』 「1894년 11월 3일」.

(14)

동학술(東學術)은 지난 경신년(1860년)에 경상도 경주 사람 최제우가 만든 것으로 주문을 외우고 부적을 사 르면 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면할 수 있다고 속여 중민(衆民)을 유혹하였는데 국법(國法)으로 금하여 벌을 받아 죽었다. 그 도는 귀천의 구별이 없고, 도에 들어간 사람들을 접장(接長), 도를 전하는 사람을 접주(接主)라고 하였다. 도를 전한 사람으로 많은 사람은 1만여 명이나 되고, 적은 사람은 1,000~2,000명이 되었으며, 무리를 모으는 것만 오로지 일삼았으니 연읍(沿邑)이 더욱 심하였다. 전라도는 서장옥(徐璋玉)이 우두머리가 되었고, 충청도는 최시형(崔時亨)이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모두 최제우의 제자들이다. 전명숙이 손화중에게 가서 동학 의 무리 5,000~6,000명을 불러 모아 무장의 인천(人川)에서 왔는데 깃발 위에는 ‘보국안민창의(輔國安民倡 義)’라는 6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동학도는 양식을 사지도 않고 길을 떠나서 백성들의 곡식에 의지하기도 하고,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기도 하였다. 연이어 무장, 고창, 흥덕, 고부, 정읍, 태인 등의 읍을 함락시켰으며 군기(軍器)를 빼앗고 관장(官長)을 능멸하기도 했다. … 전봉준은 수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금구 원평에 웅거하 면서 전라우도를 호령하였으며, 김개남은 수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남원성(南原城)에 웅거하면서 전라좌도를 통할하였다. 그 나머지 김덕명, 손화중, 최경선 등은 각각 어느 한 곳에 웅거하였는데 그들의 탐학과 불법은 김개남이 가장 심하였다. 전봉준은 동도(東徒)에 의지하여 혁명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거괴들은 각자 스스로 대장이라 칭하면서 가렴주구(苛斂誅求)만을 일삼았을 뿐 약속대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봉준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태로 7, 8월에 이르렀지만 저들의 불법이 갈수록 더욱 거세져서 부호들은 거의 모 두 흩어졌다. 아울러 천민들은 모두 날뛰면서 재물을 토색질할 뿐만 아니라 묵은 원한을 갚으려 하였다. 그리 하여 호남 일대는 혼란한 세상이 되었다.25)

김방선에 의하면 동학은 한갓 병을 치료하는 부적과 같은 민간요법으로 출발했으나 수천, 수만명 의 무리를 모아 일종의 무장폭도가 되었고, ‘보국안민’을 내걸지만 실제로는 백성의 재물을 약탈 하고 묵은 원한을 갚으려는 불평분자들의 소굴이 되었다고 보았다.

장흥유생 김한섭(金漢燮, 1838-1894)은 같은 고장 출신 동학접주 이방언에게 보낸 경고장에서 동학 의 무리가 누구나 마음대로 죽여도 상관없는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되었는데 이는 동학 그 자체가 바로 사악한 이야기[邪說]요 정도(正道)를 해치는 말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26) 김한섭은 동학을 ‘사 학(邪學)’이 아니라 ‘사설(邪說)’로 보아 학문적 체계가 없는 주장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흥덕, 고창의 의병과 관련된 『취의록(聚義錄)』의 저자는 동학은 학문[學]이 아니라 난동[亂]이라 고 했다. 그가 동학을 일종의 난동으로 본 4가지 이유는 첫째, 서로 모여들어 도적질을 하고 완부(完 府, 전주감영)를 침범하였기 때문이며, 둘째, 사족과 양반까지도 그 무리에 강제로 넣어 동학의 큰 무리는 성읍을 공격하고 작은 무리는 향리를 노략질하였기 때문이며, 셋째 무덤을 파헤치고 사람의 집을 부수어 원한을 갚았기 때문이며, 넷째 부녀자들과 재물을 금수처럼 겁탈하고 사대부들의 의관 을 똥무더기에 빠트리며 명분을 문란케 하여 공과 사를 헛되이 무너뜨리고 사람의 도리가 남아있지 않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취의록』의 저자는 동학도의 도덕적 문란과 신분질서 파 괴, 재산 약탈 등을 이유로 동학을 ‘배움[學]’이 아닌 ‘난리, 난동[亂]’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동학의 교의에 대한 호남 유림들의 논리적 비판을 선별적으로 정리하 여 도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25) 앞의 책(제5권), 『임하유고(林下遺稿)』「1894년 1월 일」.

26) 앞의 책(제5권), 『오남집(吾南集)』「警示賊徒文」.

거주지

(출신) 저자 책/논문 동학 교의에 대한 논리적 비판 전거

구례 黃鉉 梧下記聞

東學은 天主學으로 西學과 같다. 동학은 鄭鑑錄을 빌미로 왕조교체의 예 언으로 혼란을 부추켰다. 西學의 부스러기다. 부적과 주문으로 백성을 우 롱한다. 지식인들에게 惑世誣民은 통하지 않는다.

구례 李沂 先鋒陣呈報牒 동학은 외부의 邪學인 西學의 영향을 받아 번성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민

간 치료요법으로 대중을 미혹했으나 차츰 군대를 일으켜 국가에 반란을 총서8권

<표 1> 동학농민전쟁을 전후한 시기 호남 유림의 동학에 대한 논리적 비판 일람

(15)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학농민전쟁을 경험한 호남 유림들의 동학 비판을 종합해보면 다음 과 같다.

첫째, 동학은 교의적 측면에서 서학과 다를 바 없는 천주를 섬기는 천주학이며, 굳이 명칭을 서학 과 다른 동학이라고 억지로 붙였다.

둘째, 동학은 정학인 유학을 해치는 양가나 묵가와 같은 이단 사설이며, 제대로 된 학문의 체계를 갖추지 못한 난동이다.

셋째, 동학은 빈천과 상하의 구분을 없앰으로써 사대부의 명분을 무너뜨린 무질서한 주장이다.

넷째, 동학은 어리석은 백성을 미혹시키는 주술과 같은 민간신앙에서 출발하여 폭력으로 국가질서 를 전복시키려는 반역의 논리이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동학은 조선왕조의 체제와 신분질서의 명분(근간)을 뒤흔들고 위협하는 이단이므로, 유학(성리학)과 이를 이념으로 하는 조선왕조를 지키기 위해, 왕조의 질서를 그르치는 사악한 주장(가르침)을 배척해야 한다”[衛正斥邪]는 것이 1894년 농민전쟁시기 호남 유림들의 동학 에 대한 인식의 요체였다.

Ⅳ. 천주교회의 동학 인식과 신자보호

1890년대 호남에는 동학 외에도 사대부들의 입장에서 볼 때 다양한 이단 학문들이 발생하고 있었 는데, 향촌사회의 유림들은 특히 동학의 후신인 남학과 동학의 모태로 여기던 서학의 교세확장에 대 해 우려를 표하였다.

전라감사 이도재가 도내를 순시하다가 진안현에 이르러 불학(佛學)의 간사한 무리 10여 명을 체포하여 전주 로 이송하여 가두어 두었다가 목을 베었다. 불학은 또 ‘남학(南學)’이라고도 하는데, 몇 년 전에 처음 생겼 으나, 그 주창자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동학과 더불어 함께 일어났으나 배움이 달랐다. 그러나 그 법회를 할 때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고 어지럽게 춤을 추며 껑충껑충 뛰면서 주문을 외우는 것은 서로 다르지 않았다.

… 동학에서 빠져나온 자들이 점점 남학으로 몰려들었다. 땅을 생업의 터전으로 여기며 장차 신선이 되고자 하는 것이 마치 동학이 처음 일어났을 때와 같았는데, 대저 이들 또한 동학과 같은 종류였다. 바야흐로 사로 잡혀 죽임을 당하였는데 남학에 들어가는 자들이 계속 이어졌다. … 이때 전라우도(全羅右道) 일대에는 서학 이 크게 번졌다. 서양 선교사가 몸소 다니며 우매한 백성들에게 권유하였는데 바람에 쓸려가듯 추종하였다.

그것을 성교(聖敎)라고 불렀다. 그런데 대개 동학, 남학은 엄금하였지만 서학은 누구도 금할 수 없었다. 한번 성교에 입교하면 비록 죄를 지어도 수령들이 서양 선교사를 겁내어 법으로 다스리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서 학에 물드는 자들이 날로 늘어났다.27)

이처럼 호남의 유림들은 좌도(左道)요 사학(邪學)인 동학(東學)과 남학(南學) 등에 대해서 관장들의

27) 황현,『梧下記聞』「三筆」

도모했다.

남원 金在洪 嶺上日記 동학, 서학 모두 楊墨과 같은 異端 邪道로 佛老보다 혹심하다. 동학은 서

학을 배반한 졸개[反卒]이다. 서학은 불교를 배반한 졸개이다. 총서5권 부안 金邦善 林下遺稿 동학은 貴賤 구별이 없고 무리를 모으는 것을 일삼는다. 총서5권

장흥 金漢燮 梧南集 邪惡하고 正道를 해치는 亂臣賊子의 邪說 총서5권

흥덕,

고창 聚義錄 4가지 이유로 동학은 學이 아니고 亂이다. 동학은 명분을 무너뜨린다. 총서5권

(16)

힘을 빌려 금단(禁斷)의 철퇴를 내리칠 수 있었으나, 천주교, 개신교 등 이른바 ‘서구에서 온 이단 종교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공적 박해를 가하기가 어려웠다. 1886년 한불조약으로 프랑스 선교 사들은 묵시적으로 선교활동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며, 지방관들은 신자들의 권익을 보호하 려는 프랑스인 선교사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1890년대 초반 당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는 주로 불법적인 폭력을 행사하던 동학교도들로 부터 비롯되었다. 당시 호남의 다수 천주교 신자들은 농민전쟁을 전후하여 동학교도들로부터 천주교 를 포기하고 동학당에 가입하라는 협박을 수차례씩 받았지만 실제로 이러한 협박에 넘어가 동학을 추종한 경우는 신자들의 0.1%에도 미치지 못하였다.28) 전라도 흥덕의 천주교 신자 이씨는 동학교도 들로부터 무섭게 구타당한 후에 배교를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동학교도들은 그를 장 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화형(火刑)시켜 버리겠다고 협박했으며, 마침내 불타는 장적더미 위에 올려진 그의 옷이 불에 탔는데, 이를 보다 못한 다소 인정 있는 동학군 한 명이 그를 장적더미 속에서 끌어 내려 겨우 목숨만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천주교 신자는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했지만 신앙심만은 굳게 보존할 수 있었다.29)

1890년대 초반 호남의 천주교회는 전국에서 가장 천주교우의 숫자도 많고 신앙이 활성화되어 있 었기 때문에, 유림들은 물론 동학교도들에게도 결코 정신적으로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는 조선 의 천주교도들이 이미 18세기 후반부터 약 100년간 조정의 공식적인 천주교 금압조처 속에서 늘상 박해를 생활 속의 일부로 경험하면서 신앙생활을 영위해 왔기 때문에 왠만한 박해에는 흔들리지 않 게 된 때문이기도 했다.

1893년 서울에서는 동학교도의 복합상소를 통한 교조신원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호남에서는 동학농민전쟁이 준비되고 있었던 시점에 당시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동학(東學)을 『역경(易經)』

에 바탕을 둔 신비적인 사상과 천주교에서 빌려간 몇 가지 단편적 진리, 그밖의 마술과 축문, 짧은 기도 등으로 구성되었다고 파악하였다.

이 교파(=동학)의 교의(敎義)에 대한 개념을 믿기는 꽤 어려운 일이며, 이 교파에서 발행한 책을 내(=뮈텔 주 교)가 장만할 수 있었으나 아주 모호합니다. 이 교파의 두목 중 한 사람은 예전에 천주교인들과 관계를 맺었 던 모양입니다. 그 책들 중 하나에서 그가 이야기 하는 것을 들으면, 1861년에 천주교를 믿어야 할지 어떨지 몰라서 고민을 하고 있는데 꿈을 꾸었답니다. 신령이 그에게 나타나서 진리에 도달하려고 하는 그의 소원을 칭찬하면서 서양에서 온 사람들이 가르치는 대로의 천주교는 취하지 말고 자기가 진리를 직접 가르쳐 주겠다 고 했답니다. 그리고 그가 받아서 전파할 책임을 진 교리는 ‘동학’(東學)이라고 부르라고 했답니다. 거기에 환상가의 공상 아닌 다른 것이 들어 있다고 해도 이 예언자에게 말한 천사가 빛의 천사가 아님은 아주 명백 합니다. 천주라는 이름과 천주교에서 빌려간 몇 가지 단편적인 진리에, 대개는 『역경(易經)』에서 끌어온 도 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사상과 이 책에 대한 제멋대로의 해석들이 섞여 있습니다. 마술의 축문과 몇 가지 짧 은 기도문도 들어 있습니다. 하기는 동학을 따르는 사람 대부분이 그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교리를 절대로 모르고 다만 그 이름만이 그들의 가담의 표가 됩니다.30)

뮈텔 주교는 이처럼 다분히 신비주의적이고 주술적인 전통종교의 하나로 파악하던 동학이 왕조 교체설에 편승한 대규모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았다.

밀로(Milo)의 명의 주교이고 조선 교구장인 뮈텔 주교는 파리 신학교 지도자들에게 1893년 10월 1일자로 다

28) 원재연, 「서세동점과 동학의 창도」『중원문화연구』제21집(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2013.12)

29)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뮈텔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1895년도 보고서」『서울교구연보(1) 1873~1903』(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175쪽.

30)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뮈텔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1893년도 보고서」『서울교구연보(1) 1873~1903』(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17)

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다. “동학(東學)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서 생겨나서 그 전파로 정부를 불안케 하는 것 같은 이상한 교파에 대해서는 작년에도 말했습니다. 올해도 과연 서울과 8도가 이 공론가(空論家)들의 음 모로 불안에 싸였는데, 이들은 무엇보다도 대중적 반도(叛徒)들입니다. 오래 전부터 전국에 돌아다니는 소위 예언(도참, 비기, 정감록…?)이라는 것들이 현 왕조(王朝)가 500년이라는 숙명적인 날짜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 고 예고했습니다. 그런데 이 날짜가 1892년으로 기한이 끝났던 것입니다. 이 시기에 예언의 실현을 재촉하기 위해서 운명의 수레바퀴를 기꺼이 도와줄,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자들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불만을 다시 일으키는 불평분자들과 새 왕조의 출현을 예측해서 미리 기대를 하는 관직 없는 양반들과 끝으로 혼란을 틈타 쉽게 이득을 취하려는 할 일 없는 사람들(이런 사람의 수가 조선에는 너무나 많 습니다)은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이 모두 요술에 걸린 것처럼 모였고, 또 여기서는 반 란자가 되거나 그런 사람으로 간주되는 것이 위험하므로, 자기들의 정체를 더 쉽게 감추기 위해 어떤 교의적 (敎義的)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이상에서 뮈텔 주교는 동학의 교리가 천주교의 교리를 부분적으로도 수용하여, 유교의 경전인

『역경』의 신비주의와 주술적인 기도가 가미된 것으로 파악했다. 그는 동학의 교의보다는 그 신도 들의 현실적인 활동들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동학교도들이야말로 왕조교체설과 같은 예언사상을 바 탕으로 일종의 정치적 반란을 도모하는 집단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뮈텔 주교는 호 남 지방을 비롯한 전국에서 천주교 신자들에게 가한 동학교도들의 사적인 박해에 대해서 우려를 표 시했다. 특히 외세를 배척하는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서울의 프랑스 공사관 앞으로 조선에서 철수하라는 공갈과 협박문서를 보내온 것에 한때나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 남에서는 1893년 음력 2월 용담의 관장에게, 서양과 맞서 싸우는데 힘을 합치자고 동학교도들이 제 안했었다.31) 전주 본당의 보두네 신부 등 호남지역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이러한 호남 동학교도들의 제안이 선교 활동에 상당한 불안감을 끼쳐 주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당시 프랑스 선교 사들과 동학교도들은 각자 호남 지역민 속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었으므로 일종의 경쟁자 관 계에 서게 되면서, 천주교 신자들과 그들의 공동체(교우촌, 공소, 본당 등)가 동학교도들에 의해서 핍 박을 당하여 와해 또는 이산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Ⅴ. 맺음말

- 동학, 서학의 도전과 호남 유학의 근대적 변화 -

호남과 호서에서 18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동학교도들의 교조신원운동과 이를 계승하여 일어난 농민전쟁의 영향은 컸다. 조정에서는 문제가 된 지방관들을 교체하고 중앙에서 새로운 감사와 함께 초토사를 파견하였고, 그것도 모자라서 청군에 농민군의 진압을 요청하기까지 하였다. 그 결과는 원 치 않던 일본군의 한반도 출병과 이에 따른 청일전쟁으로 전통적으로 청국에 속방을 표방하던 조선 의 대외관계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고, 물론 동학농민전쟁은 미완의 혁명으로 일단 종결되고 말 았다. 각지에서 농민군이 봉기하자 조정에서는 농민군의 조직을 이끌고 있던 동학의 접주들에 대해 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하루바삐 농민군을 진압하고 정국의 혼란을 수습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흥선대원군은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들과 협상하여 청과 일본의 세력을 구축하고자 비 밀리에 접촉을 시도했으나 가장 큰 세력을 형성했던 전봉준과 김개남의 협조체제는 원활하지 못했고 농민군은 전술과 무기체계가 우수한 일본군의 공격에 거듭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절의를 생명 처럼 지키고 애국충군을 강조하던 호남의 유림들은 수성장과 의병을 조직하여 농민군에 대항했다.

1894년 연말 동학농민군이 공주와 청주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한 후 흩어져 후퇴하게 되면서, 전 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동학농민군의 주요 지도자들은 순창, 고부, 태인 등지의 사족(양반)이 이끄

31)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1)』(천주교 전주교구, 1998), 521-522쪽.

(18)

는 민병대에 체포되면서 동학농민전쟁은 실질적으로 종결되는 계기가 이루어졌다. 한편 이러한 과정 을 거치면서 호남의 유림들은 농민전쟁기간 중에 자신들을 적대적으로 대하면서 향촌사회에 큰 혼란 을 가져온 동학농민군들을 이끈 지도이념인 동학사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나름대로 동학의 종교적, 윤리적 측면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게 되었다. 그 결과 동학은 단순한 이단사설(異端邪說)이 아니라 도참설 등을 배경으로 왕조의 전복을 도모하는 위험한 사유체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무엇 보다도 동학은 서학과 마찬가지로 ‘만민평등(萬民平等)’을 외치면서 사대부 중심의 기존 지배질서 를 붕괴시키는 큰 에너지가 잠재해 있음도 느꼈다. 때마침 갑오개혁으로 사민평등이 법제화된 시대 적 분위기 속에서도 사대부 유림들은 자신의 신분적 기득권에 집착하여 일상생활에서의 평등한 삶에 대해서는 매우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이었다. 구례의 유학자 황현과 이기, 그밖의 호남 각 지역에서 동 학의 교리와 동학교도의 행태를 비판했던 유림들은 하나같이 이 평등의 원리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 었으나, 무시하거나 평가절하 하는 기술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이들이 혹시라도 민중의 에너지를 결 집시켜 외세의 침입을 막고 자율적 근대화의 길로 매진할 수 있게 해줄 ‘국민통합’ 및 이를 위해 동학교도들이 집강소 자치기간 중에 시범을 보여준 ‘평등한 삶’의 분위기에 조금이라도 적응하려 는 노력을 보여주었더라면 동학의 민중종교적인 측면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을 것이다.

한편 동학교도들은 자신들의 출자와 신원을 유교 성리학에서 찾는 데 골몰하여 서구문물의 부강함에 개안함이 느렸다. 유학자로부터 이단이라 배척당한 동학교도들은 서교도(천주교도)들을 또하나의 이 단으로 소외시켜 버렸다. 따라서 같은 민중종교적 속성을 갖고 있으면서 만민평등과 균분의 근대지 향점을 공유하고 있던 동학과 서학은 서로 평행선을 내달리며 긍정적 교류의 장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1890년대의 천주교회와 호남의 천주교 공동체들은 동학교도와의 물리적 충돌을 피하는데 급급하였을 뿐인데, 이는 동학의 겉모습에 대한 표피적 인식에 그친 뮈텔 주교의 보고서를 통해서도 확인되는 점이다. 예수회 선교사가 천주교를 중국사회에 정착시키기 위해 쏟았던 노력으로 한국사회 에 변혁의 큰 계기를 마련해주었던 1894년의 농민운동을 지도한 동학사상의 그 이념에 대해서 조금 만 더 심도깊게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본고를 통해서 필자는 서 세동점의 세계사적 파고가 더욱 급속하게 삶의 전면에 다가오고 있던 19세기 말 호남의 유림들이 시 대적 적응(생존)을 위한 어떤 사상적 변신의 노력들을 기울였는지에 대해서는 이제부터 하나씩 구체 적인 천착이 필요함을 느낀다.

(19)

<참고문헌>

사료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편,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제1~12권(2010)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뮈텔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1895년도 보고서」『서울교구연보(1) 1873~1903』(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황현,『오하기문(梧下記聞)』「수필(首筆)」

논저

김용섭, 「黃玹(1855-1910)의 農民戰爭 收拾策」 『歷史와 人間의 對應 (高柄翊先生 回甲紀念 史學論 叢)』(고병익선생 회갑기념 사학논총 간행위원회, 1984)

김진소, 「동학과 민중의식의 성장」 『천주교 전주교구사1』(도서출판 빅벨, 1998)

김창수, 「『甲午平匪策』에 대하여 - 梅泉 黃玹의 東學認識-」 『藍史 鄭在覺博士 古稀紀念 東洋學 論叢』(동양학논총 편찬위원회, 1984)

김창수, 「黃玹의 『東匪紀略』 草藁에 대하여 - 『梧下記聞』乙未 4月以前 記事의 檢討-」 『千寬 宇先生 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정음문화사, 1985)

박맹수, 「매천 황현의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에 대한 인식」 『매천 황현과 역사서술』(디자인흐름, 2011.1)

박찬승, 「1894년 농민전쟁기 호남지방 농민군의 동향 -남원지방 김개남 세력을 중심으로-」『동학 농민혁명의 지역적 전개와 사회변동』(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1995)

신용하,『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일조각, 1996)

원재연, 「서세동점과 동학의 창도」『중원문화연구』제21집(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2013.12)

이이화, 「黃玹의 『梧下記聞』에 대한 內容檢討 -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기술을 중심으로-」 『 서지학보』 4(한국서지학회, 1991)

조 광,『조선후기 사상계의 전환기적 특징』(경인문화사, 2010)

(20)
(21)

개항~대한제국기 전북 지역 천주교회와 지역사회 – 갈등과 그 해소를 중심으로-

서종태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목차>

Ⅰ. 머리말

Ⅱ. 천주교회와 지역사회의 갈등

Ⅲ. 갈등의 해소를 위한 천주교회의 노력

Ⅳ. 맺음말

Ⅰ. 머리말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은 깊은 산속에서 담배 농사를 짓거나 옹기를 굽는 일을 하면서 사회와 격리되어 생활했기 때문에 지방 행정권이나 주민과 분쟁이 발생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1886년 조 불조약이 체결된 이후 천주교가 드러내놓고 활동하고, 신도들이 이 나라 백성의 일원으로 사회와 접 척하며 생활하면서 여러 가지 갈등이 발생하였다.

이렇게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천주교 측과 지방관, 지방 지배세력, 지방 주민 사 이에 발생된 분쟁을 외교 문제로 취급하여 해결된 사안을 敎案이라고 한다. 이 교안은 1886년 조불 조약이 체결된 이후부터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당할 때까지 발생한 사건인데, 일제 의 보호정치가 진행되고 있던 대한제국까지는 계속되었다. 따라서 교안은 개항부터 대한제국까지의 천주교회와 지역사회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전북 지역 교안 자료를 이용하여 개항부터 대한제국까지의 전북 지역 천주교 회와 지역사회의 관계를 갈등과 그 해소를 중심으로 연구하고자 한다.1) 우선 전북 지역의 교안을 분 석하여 천주교회와 지역사회의 갈등을 알아보고, 다음으로 천주교회가 갈등 해소를 위해 어떠한 노 력을 했는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Ⅱ. 전북 지역 천주교회와 지역사회의 갈등

전국적으로 보면 교안은 1886년 이후 발생하여 주로 1890년대 전반기에 빈발하다가, 1890년대 중 반기에는 줄어들고, 1890년대 후반으로부터 1900년대 초까지의 시기에 와서 교안이 집중적으로 발생 하고, 1904년 이후로는 교안이 거의 종식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기적 특징을 고려하여 대체로 교안의 시기를 세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2)

그런데 〈표1〉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전북지역의 교안은 1888년부터 1892년까지 11건, 1895년

1) 전북지역 교안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의 연구가 유일하다. 김진소, 「제4장 선교활동과 지역사회와의 갈등」, 『전주교구사』(도서출 판 빅벨, 1998). 그러나 김진소의 연구는 전북 지역의 교안을 敎案과 敎弊로 구분하여 시대 순으로 서술한 것으로, 전북 지역 교안 전체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거나 갈등 해소를 위한 천주교회의 노력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2) 박찬식, 『한국 근대 천주교회와 향촌사회』(한국교회사연구소, 2007), 55쪽.

(22)

부터 1902년까지 14건, 2005년 7건 모두 32건이 기록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시기별 특징은 전국적인 기시별 특징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 같다.

전북지역 교안 32건의 사안을 대립구도, 교안의 원인, 교안의 전개 양상으로 구분하여 정리하면

〈표1〉과 같다. 전북지역 교안의 유형을 우선 대립구도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교회 측과 지방관의 대립이 16건(48%), 토호층과의 대립이 6건(16%), 일반 민인층과의 대립이 22건(67%)으로 나타나고 있 다. 전국적인 기준으로, 교회 측과 지방관의 대립이 24%, 토호층과의 대립이 16%, 일반 민인층과의 대립이 60%로 나타나는 것3)과 비교하여, 교회 측과 지방관의 대립이 두 배나 높은 특징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교안의 원인을 기준으로 그 유형을 살펴보면, 우선 서양인·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18건 (51%)으로 가장 많고, 조세·지대 문제, 채무·금전 문제, 토지 문제 등을 포함한 경제적인 문제가 6 건(17%), 지방 관리의 수탈이 6건(17%), 의례 및 종교 문제가 3건(9%), 산송이 1건(3%), 신부나 신자의 월권이 1건(3%)이다. 전국적인 기준으로, 조세·지대 문제, 채무·금전 문제, 토지 문제 등을 포함한 경제적인 문제가 41%로 가장 높고, 서양인·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29%, 산송이 11%, 신부나 신자의 월권·발포가 9%, 의례 및 종교 문제가 2%, 기타가 8%로 나타나는 것4)과 비교하여 많은 차이가 난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교안의 전개 양상을 가지고 살펴보면, 1888~1892년까지의 시기에는 교회의 관·민 공격 사례가 3건(19%), 관·민의 교회 공격이 15건(35%)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1895~1902년까지 시기 에는 교회의 관·민 공격 사례가 12건(75%), 관·민의 교회 공격이 18건(42%)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 한 1903년 이후의 시기에는 교회의 관·민 공격 사례가 1건(6%), 관·민의 교회 공격이 10건(23%)으 로 나타나고 있다. 전국적인 기준으로, 1887~1896년까지의 시기에는 교회의 관·민 공격 사례가 12%, 관·민의 교회 공격이 88%으로 나타나고, 1897~1903년까지의 시기에는 교회의 관·민 공격 사례가 46%, 관·민의 교회 공격이 42%으로 나타나고, 1904년 이후의 시기에는 12%으로 나타나는 것5)과 비 교하여 역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3) 박찬식, 앞의 책, 61쪽.

4) 박찬식, 앞의 책, 65쪽.

5) 박찬식, 앞의 책, 66쪽.

번호 연도 지역과 사건

대립구도 교안의 원인 교안의 전개 양상

교회 지방 관리

교회 향반 토호

교회 민인

서양인

· 천주교

대한 반감

신부

· 신자

월권

· 발포

의례 종교 문제

산송

· 재산 문제

채무 금전 문제

조세 지대 문제

지방 관리 수탈

교회 비교회

·

신부 개입

민인

· 관장 私刑

신자 체포

· 처벌

신자 공격

신부 공격

1 1888 진안 어은동 공소 침탈 ○ ○

2 1888 라푸르카드 신부 담당 공소 수탈

3 1890 고산 석장리 교우 축출

4 1890 소양면 약바우 교우 침탈 ○ ○

5 1890 용안 군수의 수탈

6 1890 장성 탑정리 연선암 교우 추방 ○ ○

7 1891 전주 학방 설립기금 배상요구 ○ ○ ○

8 1891 순창 복흥면 주민들의 교우 침학

9 1891 부안 무내미 공소 교우 폭행

<표 1> 교안의 구도와 원인 및 전개 양상

참조

관련 문서

도시 골격 갖추기 시작...

참고 ) 문화상징을 효과적으로 구사한 시인은 종교적인 상징을 개성적 으로 창출한 한용운 , 서정주 , 김현수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생산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며 자본이 더 이상 인간을 기만하고 거짓된

트란스페린 수용체(transferri n receptor,TfR)는 95kD의 단량체가 이황화결합에 의 해 연결된 당 단백질이다.트란스페린에 의해 운반된 철이 세포내로

이 높은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자동차 산업의 경우 高연비의 경₩소형급 수출이 이미 호조를 나타내고 있 다. 조선 산업의 경우 에너지 관련 선박의 발주 증가

로써 정치를 쇄신하고 국민의 의혹과 원한을 없애도록 하는 일 5. 한편, 김동환은 지금까지 나철에 대한 연구는 주로 독립운동사 측면에 서만 다루어졌고 그의

ASDAL( Advanced Ship Design Automation Laboratory) (http://asdal.snu.ac.kr) Ship design, Overview of Shipbuilding Industries, 2008.3. 선박의

개항 이후 도입되어 지금까지 인천에 남아 있는 근대식 금고는 현재 중앙동 1가에 있는 구일본제일은행지점(舊日本第一銀行支店) 부속 금고와 중앙동 2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