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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교과서 현대사 기술에 대한 분석-국학(국사)의 관점에서-신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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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Ⅰ. 들어가는 말

Ⅱ. 국학의 개념의 두 가지 흐름과 선교

Ⅲ. 국학사관의 전범: 󰡔규원사화󰡕

1. 주체성⋅정체성의 확립 2. 보성(保性)의 중요성

3. 동족상전(同族相戰)에 대한 철저한 반성 4. 진보의 가치에 대한 확신

5. 국제관계의 다변성과 평화공존의 모색

Ⅳ. 현대사 기술 분석과 그 문제점

1. 주체성⋅정체성의 확립 2. 보성(保性)의 중요성

3. 동족상전(同族相戰)에 대한 철저한 반성 4. 진보(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한 확신 5. 국제관계의 다변성과 평화공존의 모색

Ⅴ. 맺음말

-〔국학의 관점에서 본 역사교육〕(2014.6.14, 홍역학회 흥사단 4층)발표문5

한국사 교과서 현대사 기술에 대한 분석

-국학(국사)의 관점에서-

신운용19)

*

* 안중근평화연구원 책임연구원

(2)

【국문요약】

이 글은 국학의 관점에서 『고등학교 한국사』 중 현대사 부분 기술 을 분석하고 그 문제점을 살펴보는데 목적을 두었다.

국학이란 “단군시대에 형성된 한민족의 정체성 즉 ‘홍익인간’의 구 현’”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행 『고등학교 한국사』 중 현대사 부분을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 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사 교과서는 주체성을 기반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다. 특히 1945년의 국권회복과 6.25전쟁을 외인론에 치우쳐 기술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국학의 관점에서 보면 국권회복은 주체성의 확립이 라는 근대정신의 산물이었다. 또한 6.25전쟁의 경우도 민족내부의 모 순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음을 기술할 필요가 있 다. 무엇보다도 6.25 전쟁은 각국의 시각에 따라 다른 용어를 사용하 고 있으나 국학사관으로 보면 이는 ‘한민족파괴전쟁’이었다. 결국 6.25 전쟁의 성격은 남북한 정권이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민족전체를 희생시킨 ‘한민족파괴전쟁‘이었다고 규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시각은 어느 교과서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민족반역자 청산문제에 대한 현행교과서의 미묘한 시각 차이는 역설적으로 이 문제를 완전 히 극복하지 못하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아울러 군사정권에 대한 평가도 교과서마다 조금씩 다르다. 이는 교과 서 집필자의 사관과 관련된 문제이지만, 교과서 집필자들이 정치세력을 배경으로 교과서를 집필한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집필자의 사관에 따라 대외관계에 대한 서술이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지나친 자기중심적 서술은 국제사회에서 한민족의 위치를 정확하 게 파악하는데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특히 베트남전쟁에 대한 서술 은 평화와 인권이라는 국학의 기본 방향에서 보면 대단히 문제성이 있다. 진실로 이는 국학의 핵심인 홍익인간의 구현과 동떨어진 인식

(3)

임에 불명하다. 또한 분단구조를 극복하기 위한 한국현대사 기술에 집중하는 문제는 앞으로 해결해야할 과제이다.

주제어 :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홍익인간, 국권회복, 6.25전쟁, 북애, 규원사화, 주체성

Ⅰ . 들어가는 말

역사단계별로 한민족은 한 시대를 정리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시대별로 국사를 정리하였다. 고대의 대표적인 사서로 고구려 에는 󰡔유기(留記)󰡕⋅이문진(李文眞)의 󰡔신집(新集)󰡕 등이 있었다. 백 제에는 고응(高興)의 󰡔서기(書記)󰡕 등이 있었다. 신라에도 거칠부(居柒 夫)의 󰡔국사(國史)󰡕, 김대문의 󰡔고승전(高僧傳)󰡕⋅󰡔화랑세기(花郞世記)󰡕⋅

󰡔낙본(樂本)󰡕⋅󰡔한산기(漢山記)󰡕⋅󰡔계림잡전(鷄林雜傳)󰡕, 최치원의 󰡔제왕 년대역(帝王年代歷)󰡕 등이 있었다고 한다. 한국고대의 역사서는 이외에 도 상당히 많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체로 유교사관보다는 단군 을 민족의 기원으로 시작하는, 세조신록에서 보이는 100여종의 선가 계통의 사서류였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에 일연의 󰡔삼국유사󰡕와 김부식의 󰡔삼국사기󰡕⋅이승휴 의 󰡔제왕운기(帝王韻紀)󰡕⋅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 등이 있었 다. 전자는 불가의 사관을 중심으로 단군에 대한 중요성을 기술한 반 면, 후자는 춘추사관에 따라 우리의 역사를 조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권근의 󰡔동국사략󰡕 등의 사서가 있었으나 대체로 춘추사관에 따라 기술된 것이었다.

주목되는 것은 조선 초에 선가계열의 사서가 널리 퍼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선교(仙敎)의 시각에서 쓰인 선사(仙史)가 조선 초기에

(4)

많이 읽혔다는 의미이다.

1)

여기에서 조선초에는 선교세력이 광범위 하게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조선은 성리학 일원론 사회를 지향하였고 그 여파로 선사와 선교는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북애 가 진역유기를 바탕으로 󰡔규원사화󰡕(숙종 2년)를 남겼고 이는 근대로 이어졌다. 북애의 사관은 신채호 등 근대 민족주의사관의 전사가 되 었다.

2)

이 점에서 북애의 시각은 현대에 들어와 세인의 큰 관심을 끌 었다.

국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근대에 들어와 대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그 대표적인 사서로 김교헌의 󰡔신단민사󰡕, 대종교 (선교)의 경전으로 󰡔삼일신고󰡕 등을 들 수 있다.

3)

1930년대에 들어와 서는 일제의 식민화 정책에 대한 저항수단으로 ‘우리 것’에 대한 연 구가 일어났다. 이를 당시에는 조선학이라고 하였다.

4)

1) 󰡔세조실록󰡕 7권, 세조 3년(1457년) 5월 26일(戊子)자 조. 조선 건국이후 세조 대까지 만들어진 사서는 󰡔동국사략󰡕

⋅󰡔국조실록󰡕⋅󰡔고려사󰡕⋅󰡔고력사절요󰡕⋅

󰡔동국병감󰡕⋅󰡔국조보감󰡕 등 약 6종이 있었을 뿐이다. 이에 비해 선사는 100 여종이 있었다. 이는 조선 초기의 사서는 선사계통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 한영우,

「17세기 반존화적 도가사학의 성장-북애의 규원사화에 대하여-」,

󰡔한국학보󰡕1, 1975, 53쪽.

3) 이에 대해서는 김동환,

단조사고에 대하여

」, 󰡔단조사고󰡕, ᄒ ᆞᆫ뿌리, 2006 참조.

4) 1930년대 조선학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이 참고 된다. 최재목,

「1930년대 조

선학(朝鮮學) 운동과 ‘실학자(實學者) 정다산(丁茶山)’의 재발견」, 󰡔다산과 현 대󰡕4⋅5,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012; 박성순,

「文一平 近代史學

本領, 朝鮮學運動」, 󰡔동양고전연구󰡕 50, 동양고전학회, 2013; 류시현, 「

1930년대 안재홍의 ‘조선학운동’과 민족사 서술」, 󰡔아시아문화연구󰡕 22, 경원 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2011; 신주백,

「‘조선학운동’에 관한 연구동향과 새

로운 시론적 탐색」,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7,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1; 배 연숙,

「위당 정인보의 조선학 성립배경에 관한 연구」, 󰡔哲學論叢

󰡕59, 새한철 학회, 2010; 이황직,

위당 조선학의 개념과 의미에 관한 연구

」, 󰡔현상과 인식󰡕

34, 한국인문사회과학회, 2010; 백승철,

「1930년대 ‘朝鮮學運動’의 전개와 民族

認識⋅近代觀」, 󰡔역사와 실학󰡕 36, 역사실학회2008; 류시현, 「1920년대 최남선

의 ‘조선학’ 연구와 민족성 논의」, 󰡔역사문제연구󰡕 17, 역사문제연구소, 2007.

(5)

1980년대부터는 국학은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연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국학에 대한 정확한 개념의 합의는 아직 이루어져 있지 않은 것 같다. 대체로 국학은 “단군시대에 형성된 한민족의 정체성”을 의 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국학사관은 국수주의로 몰리고, 특히 상고 사의 경우 식민사학으로 대체되는 경향마저 보였다. 대체적으로 현 대사 기술은 서양사의 그것을 모방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로는 다음 시대 준비를 위한 사서로써는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 이다. 또한 분단구조 속에서 한민족의 역사를 ‘한국사’라고 한다면, 이는 발해사를 버린 고려의 김부식과 조선의 유가 사학과 다르지 않 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글쓴이는 국학의 관점에서 현행 한국사 교과서의 기술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그런데 현행 ‘한국사’ 교과서 중 에 국학의 관점으로 기술된 교과서는 과연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 자면 여전히 한민족을 중심으로 한 한민족사를 다루고 있지 않고, 국 권회복을 외세가 가져다주었다는 식의 현대사 기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는 여전히 한민족의 역사가 외세에 좌우된다는 시각에서 벗 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향할 사관은 무엇인가, 그 해답은 북애의 󰡔규 원사화󰡕에서 찾을 수 있다. 북애의 서술은 민족주의 역사관과 일맥 상통하지만 세계사의 변화 속에서 한민족의 본성을 확인하면서 한민 족이 역사단계별로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었고 그 흥망성쇠의 원인 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짚고 있다. “본성을 지킨 때는 역사의 발전을 이루어냈고, 그 본성을 잃은 시기는 역사의 후퇴를 초래하였다”는 것 이 그의 사관이다. 이러한 관점을 글쓴이는 ‘국학(선교)사관’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물론 국학사관은 근대 민족주의사관의 연장선에 있지 만 그 한계성을 극복하면서 민족의 미래를 담보하기 위한 사관이다.

(6)

이러한 국학사관의 관점에 따라 글쓴이는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문제점을 분석하였다. 이를 위해서 우선 국학의 개념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글쓴이는 국학의 개념은 북애의 규원사화에 잘 드러나 있다고 본다. 더불어 북애의 사관에 따라 “선교에 뿌리를 둔 모든 학문 을 국학”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북애의 󰡔규원사화󰡕에서 이론화할 수 있는 국학사관의 구체적인 기준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현행 한 국사 교과서의 현대사 기술 문제점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에서는 교과서 논쟁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 다른 관점에서 기 술된 교학사와 금성출판사 󰡔고등학교 한국사󰡕(2013년 8월 30일 검정) 중 현대사 부분을 주된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작업이 새로 운 사관을 만드는데 기여하고 한민족사의 올바른 기술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Ⅱ . 국학의 개념의 두 가지 흐름과 선교

국학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대체로 두 가지 방면에 초점이 두어진다. 하나는 한민족이 어디에서 출발하였는가 하는 ‘민족기원과 그 전개의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다 른 민족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한민족 고유의 사상체계를 담은 ‘민족철 학과 그 발현의 문제’이다. 전자는 주로 역사학에서, 후자는 철학에서 연구되고 있다. 전자는 문헌학과 고고학이 뒷받침하고, 후자는 언어 학적인 방법과 문헌학적인 방식이 동원된다.

그런데 한국 근현대사의 국학개념은 크게 두 가지 흐름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유교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선교(仙敎)개념이 다. 전자는 정인보에 의해 처음으로 주창되었다. 정인보는 조선학의 계보가 유형원⋅이익⋅정약용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면서 다산을

(7)

중시하였다.

5)

결국 정인보는 실학자들의 주체의식에서 국학의 연원 을 찾으려 한 것이다.

이러한 정인보의 개념은 황원구로 그대로 이어졌다. 황원구는 “광 의로는 한국의 고전에 관한 모든 학문을 가리키지만, 협의로는 조선 후기의 실학파 학자들의 문헌적 방법에 의한 한국연구-특히 문화사 적인 입장에서 학문과 이에 수반되어 발달되어온 자주적인 사상체계 를 말한다. 또한 중국의존 내지 중국주의 사고의 한계 안에서만의 학 문의 인식이 아니라 한국화된 유교적인 시야에서 현실에 직결된 학 문요, 사상체계이었다.”

6)

라고 국학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는 정인 보의 그것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이만열도 황원구의 국학정의에 대체로 동의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7)

종합하면 정인보⋅황원구⋅ 이만열 등은 국학의 연원은 실학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일정한 한계가 있는 것도 분명하다. 실학이 국학이 될 수 있으면 다시 말해 외부에서 들어온 사상체계가 한국화 되면 모두 국학이라고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국학이 아닌 것이 없다는 뜻과 상통하는 것이다. 이는 정통이라는 개념에서도 엿 볼 수 있다. 전통이란 그 민족 본래의 모습으로 다른 민족과 구분되 는 그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외래문화가 그 본래의 문화와 섞 여 새로운 형태의 문화가 만들어졌다고 하여 전통이라고 하면 전통 은 무한대로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무정통(無傳統)과 같 은 의미이다. 전통은 그 민족의 불변 요소이자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국은 중국 국학의 핵심을 유교에 두고 있으며, 일본은 일본 국학의 핵심을 신도(神道)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중 국에서나 일본에서 불교를 국학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

5) 정인보, 󰡔담원정인보전집󰡕 2,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3쪽.

6) 황구원,

국학의 발달

」, 󰡔한국사󰡕 14, 국사편찬위원회, 1975, 310쪽.

7) 이만열,

국학의 성립 발전과 그 과제

」, 󰡔동방학지󰡕 100, 연세대학교 국학연

구원, 1988, 4-5쪽.

(8)

다. 따라서 한민족 국학의 핵심은 선교(仙敎, 仙道)가 됨은 당연한 귀 결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민족의 국학은 선교에 바탕을 둔 일체의 사상체계와 행동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러한 측면에서 국 학사관을 기반으로 기술된 국사(남⋅북의 역사를 포함한다)는 선교 에 뿌리를 둔 사상⋅사회구조⋅생활방식 등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갔는가 하는 문제를 시대별로 정리하고 한민족의 본성을 구현하면서 다음 시대를 준비하는 ‘이정표’이라고 할 수 있다.

문헌 상에서 보건대, 이러한 국학에 대한 개념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이는 최치원이었다. 그는 「낭랑비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나라에 풍류라는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다. 이 교(풍류)를 세운 역사는 선사(仙史)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 실체는 삼교를 아우르면서도 무리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을 가르쳐 사람답게 살도록 하는 데 있는 것이다. 이 깊 고 오묘한 도에는 “들어와서는 집에서 효도를 다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 성을 다하라”는 노사구(魯司寇(글쓴지; 공자)의 가르침, “무슨 일을 하든 인 위적으로 하지 말라”는 것과 어떤 일을 할 때는 말없이 하라”는 주주사(周 柱史)(글쓴이: 노자)의 가르침,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 하라”는 축건태자(竺乾太子)(글쓴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이미 들어 있는 것이다.

8)

여기서 국학의 개념과 관련하여 두 가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풍류’라는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한민족의 기원과 철학을 담 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 역사를 선사(仙史)라고 했다는 점이다. 필시 풍류는 종교철학을, 선사는 한민족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유불 도의 내용을 모두 담고 있는 풍류의 핵심을 접화군생(接化羣生)이라

8)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37년조. “崔致遠鸞郞碑序曰,

國有玄妙 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羣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

作, 諸善奉行, 竺乾大子之化也.”

(9)

고 덧붙여 설명되어 있다.

9)

이점에서 국학은 역사로 말하면 선사이고, 종교철학으로 말하면 풍류 즉 선교(仙敎)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국학의 한 분야인 한민족 사(국사)는 선사의 흐름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천하였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기술될 때 한민족사로써 정당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최치원의 국학 개념은 광개토대왕비에서도 엿볼 수 있다. 동명성 왕이 유언으로 남긴 ‘이도흥치(以道興治)’에서 도(道)는 신채호의 지 적대로 선교(풍류)라고 할 수 있다.

10)

이러한 맥락에서 동명성왕이 아들 유류왕(儒留王)에게 “고구려의 정치원리가 곧 선교임을 잊지말 라.”는 유언을 남긴 이유가 설명된다. 동명성왕은 단군시대에 정착된 선교를 흥치의 핵심으로 보았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이처럼 동명성왕과 최치원의 도는 선교였고 역사는 선사였다. 삼 국시대의 선사의 일부가 일연의 󰡔삼국유사󰡕⋅이승휴의 󰡔제왕운기󰡕⋅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일연 과 이승휴는 선교의 핵심을 ‘홍익인간’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최치 원의 접화군생과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하지만 일연이나 이승휴는 불가와 유가의 입장에서 몽고침략이라는 시대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단군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지 선교의 전통에서 선사를 언 급한 것은 아니었다. 같은 이유로 이규보의 󰡔동명왕편󰡕도 유가의 입 장에서 주체성을 드러낸 것이다.

이들의 단군관계 기술은 이후 불가와 유가의 한국사 기술에 큰 영 향을 미쳤다. 대체로 조선의 사서는 유가들의 주장을 답습하거나 시 9) 최치원의 사상의 종착점과 풍류의 의미는 신운용,

최치원 사상의 종착점과

‘풍류’의 발현」, 󰡔선도문화󰡕 14,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출판부, 2013 참조.

10) 광개토대왕비에 보이는 핵심철학은 “不樂世位”라고 할 수 있다. 이 불락세 위는 현실의 욕망에서 벗어나 보다 고차원적인 세계를 추구한다는 의미이 다. 그것은 바로 선교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삼국유사󰡕 「

동명왕조에 동명성왕은 “단군의 아들이다”이라는 기록에서도 고구려는 고조선의 선교를 잇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

대가 내려감에 따라 선사의 내용을 부정하는 경향성을 보였다.

그러나 여말선초의 선교 사가들은 세조가 거둬드리라고 명한 100 여종 이상의 사서의 목록에서 보듯이, 불가⋅유가와 전혀 다른 맥락 에서 선사를 서술하였음이 분명하다.

11)

그리고 무엇보다 목자득국론 (木子得國論)에서 확인되듯 단군교세력으로 불리는 이들 선교계통의 영향도 조선 건국의 배경이 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2)

이러한 선사는 조선이 성리학 일변도의 사회로 치달음에 따라 점 차 지하로 숨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선사의 일단이 󰡔조대기󰡕를 저본으로 한 󰡔진역유기󰡕가 북애의 손에 들어가 다시 󰡔규원사화󰡕라는 선사로 숙종대에 되살아났다. 이로써 조선 선교와 선사의 도통은 북 애가 대표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북애의 주장은 사무난적(斯文亂賊) 취급을 받아 조선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여말과 같은 상황이 조선말에 연출되자, 다시 선교는 역사의 전면 에 등장하였다. 이를 역사학으로 증명한 이는 바로 신채호였고, 종교 학으로 증명한 이는 나철이었다. 특히 신채호는 선사의 사관으로 상 고사와 고대사 체계를 본질적으로 변화시켜 놓았다. 나철은 한국 종 교사상을 격변시켰다.

11) 세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선사는 다음과 같다.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 게 다음과 같이 유시(諭示)하였다.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 (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

󰡔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로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도증기 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 (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 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 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 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 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 된다.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 상(進上)을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 다. 그러므로 그런 내용을 관청⋅민간

⋅사사(寺社)에 널리 알려라.”(󰡔세조실

록󰡕 7권, 세조 3년(1457년) 5월 26일(戊子)자 조).

12) 이에 대해서는 신운용,

조선건국의 사상적 배경에 관한 시론

」, 󰡔한국사의

단군인식과 단군운동󰡕, 국제평화대학원대학교출판부, 2006, 참조.

(11)

신채호는 「동국고대선교고(東國古代仙敎考)」에서 선교는 우리의 고유한 것으로 불교 유입 이전에 있었다고 강조하면서 “崔孤雲鸞郞 碑序에 曰 「國有玄妙之道仙敎是已라하고」 又曰設敎之源備詳션史라

니”라고 하여 풍류를 선교라고 못 박았다.

13)

따라서 그의 사관은

‘선교사관’이라고 단정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신채호의 주장은 대종교의 중광과 대단히 밀접한 관 계가 있다. 대종교는 고대선교의 근대적 부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종교의 중광과 더불어 국학(선교)의 근대적인 개념이 수립되었다 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대종교의 모든 행위는 국학(선교)의 부활을 위한 것이고, 이는 독립이라는 구조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대종 교인들은 국권회복 전쟁에 몰두해야만 했다. 아울러 독립운동의 이 론적 근거는 바로 이들 대종교인들이 제공하였다. 이는 임시정부의 상층부와 1920년대 만주의 독립전쟁의 중추를 대종교인들이 담당하 였다

14)

는 데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근대역사학을 주도한 신채호⋅박은식⋅김교헌 등 대개의 역사학자들은 반드시 국사의 출발점을 단군으로 잡고 시 공간에 따라 단군의 역사가 어떻게 확장 축소되었는지를 밝히는 데 주력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신채호라고 할 수 있다.

15)

1910년대 후반에 집필된 것으로 보이는 󰡔조선상고문화사󰡕에서 신채호는

夫餘

馬韓 等 十餘國의 이름을, 그 沿革을 찾으면 다 壇君 때부터 있 던 稱號라. 後世에 國學이 끊어져 그 根源을 찾지 않고 다만 그 자취를 따 라 이 이름은 이때에 나고, 저 이름은 저 때에 났다고 해 왔다.

16)

13) 󰡔大韓每日申報󰡕 1910년 3월 11일자,

「東國古代仙敎考」.

14) 현규환, 󰡔한국유이민사󰡕 상, 삼화출판사, 1976, 571쪽.

15) 신채호,

「조선상고사」(󰡔단재신채호전집󰡕 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 228-229쪽).

16) 신채호,

조선상고문화사

」, 󰡔丹齋申采浩全集(上)󰡕(改訂版), 단재신채호선생기

념사업회, 1987, 359쪽.

(12)

라고 주장하였으며, 1916년 발표된 󰡔꿈하늘󰡕에서 신채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國學에는 비록 도움이 없지만 일방의 교문에 통달하여 朝鮮의 빛을 보 탠 佛學의 元曉⋅義湘, 儒學의 晦齋⋅退溪

…. 17)

여기에서 신채호의 국학개념을 알 수 있다. 그는 단군 시대에 형성 된 민족정통 즉 선교가 국학의 핵심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선교만 이 국학이라는 의미이다.

한편, 안재홍은 조선학을 광의적으로 온갖 방면으로 조선을 연구 탐색하는 것으로, 협의적으로 조선의 고유한 것⋅조선문화의 특색⋅

조선의 독자적인 전통을 천명하여 학문적으로 체계화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18)

안재홍에게 조선학은 협의적인 개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19)

안재홍의 신민족주의와 연동되어 있는 조선학이라는 개 념은 식민사학에 대한 대응차원에서 일어난 것이다. 물론 이는 이병 도 등이 주축이 된 친일성향의 진단학회와 전혀 성격이 달랐다.

20)

그 는 󰡔조선일보󰡕 1935년 6월 「민세필답 세계로부터 조선」에서 “자국적 또는 민족적 충동 각성 및 염원이 도리어 진보적 약진적 그리고 세 계적으로 되는 것.”이라고 하여 막스주의 사학자들의 반동적 보수주 의⋅감상적 복고주의⋅배타주의라는 공격에 대응하였다. 결국 안재 홍의 조선학은 ‘조선적인 것의 세계화’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정열모는 국학의 범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國學이라 하면 얼른 국어 국사를 연구하는 것으로 알지마는 실상은 국 어 국사는 국학연구의 기초가 되고 入門이 되는 것이지 국어 국사가 국학 17) 신채호,

꿈하늘

」, 앞의 책, 213-215쪽.

18) 안재홍,

「조선학의 문제」, 󰡔新朝鮮

󰡕 12월호, 1934.

19) 한영우,

안재홍의 신민족주의와 사학

」,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 독립기념

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7, 263쪽.

20) 한영우, 위의 논문, 264쪽.

(13)

의 전체는 아니다. 정치 문화 공예 심지어 의복 음식까지 모두 민족사상의 발로이기 때문에 그 모두가 국학연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중략)…국학 을 연구하는 것은 다만 옛 것을 찾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옛 것을 알아서 새 길을 찾고 아름다이 하려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21)

이는 민족사상(선교)이 반영된 모든 것이 국학의 대상이 됨을 의미 하는 것이다.

최근의 국학논의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연구자는 김동환과 김광린 이다. 특히 김동환은 국학 개념의 이론화를 본격적으로 시도하였 다.

22)

그는 국학을 “우리 민족 정체성의 논리요 외국에 대한 국력이 론이며, 원심론(세계화론)을 위한 구심론(민족이론)”

23)

라고 정의하였 다. 또한 김광린은 “국학의 기원은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 단군왕검 의 고조선 및 그 이전의 시대인 상고의 역사, 그리고 한민족 고유의 선도 문화에서 찾아야 한다.”

24)

라고 국학을 규정하였다.

결국, 국학이란 “한민족사 속에서 전개되어 온 선교의 본질과 의 미를 국어학⋅국문학⋅국사학 민족학⋅사회학⋅정치학⋅경제학 등 모든 학문적 방법을 동원하여 한민족의 본질(선교)을 규명하는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국사는 선교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 울러 선교를 주로 하고, 그 이외의 것을 객으로 하여 주와 객의 상호 관계를 미래 지향적으로 기술한 책을 국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역 사란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고 정의한 신채호 사학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학의 관점에서 ‘진정한’ 국사는 국학(선교)의 관 점에서 기술된 사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한민족의 근대 국사로는 1908년 신채호의 󰡔독사신

21)

鄭烈模, 「國學이란 무엇인가」, 󰡔國學

󰡕 1, 1946, 3쪽.

22) 김동환, 󰡔국학이란 무엇인가󰡕, ᄒ ᆞᆫ뿌리, 2011.

23) 위의 책, 11쪽.

24) 김광린,

「국학과 민세 안재홍의 정치사상」, 󰡔선도문화󰡕 13권, 2012, 455-456쪽.

(14)

론(독사신론)󰡕을, 1910년대에는 계연수의 󰡔환단고기󰡕, 대종교에서 발 간된 󰡔단기고사󰡕, 󰡔단조사고󰡕, 김교헌의 󰡔신단민사󰡕⋅󰡔신단실기󰡕, 박 은식의 󰡔몽배금태조󰡕 등을 들 수 있다. 1920년대의 국사로는 장도빈 의 󰡔조선사요령󰡕, 안확의 󰡔조선문명사󰡕, 권덕규의 󰡔조선유기󰡕 등이 출간되었다. 1930년대에는 신채호의 󰡔조선사󰡕⋅󰡔조선상고󰡕, 정인보 의 󰡔오천년간 조선의 얼󰡕 등이, 1940년대에는 정인보의 󰡔조선사연구󰡕

등을 국사로 볼 수 있다. 1945년 일제의 퇴패 이후 국학사관에 따라 서 서술된 대표적인 사서는 안호상의 󰡔국학의 기본학󰡕

25)

이다.

그런데 현재의 한국사는 어느 시점까지는 국사로 불려왔지만 2009 개정 교육과정 때부터 한국사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여기에서 보듯 선교 사관 즉, 현행 󰡔고등학교 한국사󰡕는 국학의 관점에서 기술되었 다고 할 수는 없다.

Ⅲ . 국학사관의 전범: 󰡔규원사화󰡕

국학의 관점에서 보면 북애의 󰡔규원사화󰡕는 현존하는 최고(最古) 의 국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북애가 규원사화에서 내세웠던 사관 을 역사 서술의 기준으로 삼다면 이는 ‘국사’라는 개념에 가장 잘 부 합할 것이다. 조판기⋅태시기⋅단군기⋅만설로 구성되어 있는 󰡔규원 사화󰡕는 전체적으로 한민족이 문화단위로 출발하면서부터 한민족 본 성(本性)의 발현과 그 성쇠를 시공간에 따라 그리고 있다.

무엇보다 한민족의 본성은 위에서 보았듯이 접화군생⋅홍익인간

25) 안호상, 󰡔국학의 기본학󰡕, 배달출판사, 1977. 안호상은 “이 순수한 의미에서 한국사상은 이것의 기본(基本)과 가능제약(可能制約)인 단군 한배검의 종교, 철학, 도의원리, 사상, 역사 등이요, 또 이 기본에 관한 앎과 학이 기본학으 로서 국학의 기본학이다.”라고 하여 국학을 단군에 대한 앎과 학이라고 정 의하였다(안호상, 위의 책, 3-4쪽).

(15)

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이 규원사화에서도 확인된다.

“(단군께서)우선 여러 신에게 제사를 드린 후 무리들에게 “하늘의 법 도(天範)는 오직 하나로 그 문이 둘이 아니므로 네가 오로지 마음이 깨끗하고 정성스러워야 조천할 것이다. 하늘의 법도는 오직 하나이 고 인심 또한 같으니 자신의 마음을 잡아 인심에 미치고 인심이 감 화하면 또한 하늘의 법도와 한 데 합하여 만방을 거느릴 것이다(중 략)소와 말도 그 먹이를 나누는 것처럼 너희들도 서로 사양하여 빼앗 지 말고 서로 훔치지 말아야 나라가 융성할 것이다.”

26)

이라는 말로 북애는 선교의 핵심을 일깨워주었다. 또한 이는 부루에게 남긴 “하늘 의 도(天道)가 밟아 내 마음에 내려와 있으니 오직 네 마음을 잡고 모든 백성을 사랑하는 일에 지성을 다하라”

27)

라는 단군의 유언에 그 대로 남아 있다.

더 나아가 북애는

옛날 신시씨가 이미 만가지의 실마리를 열어 모든 무리에게 모범을 보이 고 하늘의 도를 체험을 통해 얻고 만물의 성질을 다스리더니 단검 때에 이 르러서는 다시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으며 땅을 나누어 제후들이 다스 리게 하므로 나라는 완전히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 하늘의 법을 지키며 천 심을 인심에 미치게 하였으며 만가지 선을 돕고 악을 없애니 백성이 화합 하여 천하가 편안하였다.

28)

라고 하여 신시씨(환웅)와 단군 시대에 선교의 이상세계가 완성되 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환웅⋅단군의 가르침인 선교의 부활 에 한민족의 미래가 있다는 것이 북애의 생각이었다.

북애가 믿는 선교는 바로 정치의 이상이고 역사의 발전법칙이라고

26) 북애 저 / 고동영 역, 󰡔규원사화󰡕, ᄒ ᆞᆫ뿌리, 1986, 69쪽.

27) 위의 책, 69쪽.

28) 위의 책, 98쪽.

(16)

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한민족사의 서술에서도 접화군생⋅홍익인 간 정신이 시공간에 따라 어떻게 변천되었으며 그 발전을 위해 진력 한 세력을 역사의 주체로 놓고 기술된 것이 바로 국학 속의 국사라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규원사화에서 확인되는 국학의 핵심 요 소는 접합군생⋅홍익인간이다. 북애는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한 예와 그렇지 못 한 경우를 자세하게 언급하면서 「만설」에서 그 실현방안 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1. 주체성⋅정체성의 확립

규원사화에서 북애가 주장하고 있는 핵심은 바로 주체성⋅정체성 의 확립이다. 북애는 “한민족으로 살아야지 한족(漢族)으로 살지 말 라”고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우리나라는 옛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는 여러 번 병화를 입어 흩어지고 없어졌다. 그러다가 후세에 소견이 좁고 생각이 얕은 자들이 중국 책에 빠 져서 주(周) 나라를 높이는 사대주의만이 옳은 것이라고 하고, 먼저 근본을 세울 줄 모르고 내 나라를 빛낼 줄 몰았다. 이는 등나무나 칡넝쿨이 곧게 뻗 어갈 줄은 모르고 얽어매기만 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천하다 하지 않으랴.

29)

소중화(小中華)라고 스스로를 자랑하면서 만주는 인정하고 친하게 지내 고자 하였으나 저들은 여진을 오랑캐라고 배척한다. 그러니 어떻게 만주의 꾸짖음을 이상하게 여기겠는가.

30)

이처럼 북애는 유교에 빠진 자들을 등나무나 칡넝클에 비유하여

29) 위의 책, 7쪽.

30) 위의 책, 112쪽.

(17)

유가사관을 삐뚤어진 사교(邪敎)라고 맹공하고 있다. 그는 선교가 대 나무처럼 쭉 뻗어나가야 하는데 외래종교 사상에 빠진 유가들로 인 해 한민족의 삶이 등나무처럼 삐틀어졌다고 사대주의로 싱징 되는 춘추사관을 비판하였다. 결국 북애는 주체성⋅정체성의 확립만이 조 선의 살길이라고 주장하였고, 그 역사적 철학적 근거를 바로 선교에 서 찾았던 것이다.

2. 보성(保性)의 중요성

북애는 사자 등 여러 동물들을 예로 들며 “조물주의 뜻은 한쪽으 로 치우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온 세상의 생물을 다 몰아서 홀로 사 자의 욕심만 채우게 하는 모진 이치는 없다.”

31)

라고 하면서 보성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꼭 배워야 할 것만 배워야 하는데 내가 단정 지을 수 없지만 지난날의 훌륭한 것을 버리면 무엇이 남겠는가. 배우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다만 끝에 가서는 병폐만을 얻게 된다.

32)

이는 선교로 형성된 우리의 본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역시 우주삼라만상이 자신의 본성에 따라 자신을 지키며 살듯이 한민족은 자 신의 본성인 접화군생⋅홍익인간이라는 선교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북위(효문제)

33)

처럼 멸망할 것이고 그 본 성을 잘 지키면 여진족의 청과 같이 번성할 것이라는 혜안을 제시하였다.

31) 위의 책, 103쪽 32) 위의 책, 110쪽.

33) 위의 책, 110쪽.

(18)

3. 동족상전(同族相戰)에 대한 철저한 반성

북애는 신라가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같은 동족인 고구려⋅백 제를 멸망시킨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날개가 꺾이면 새가 나르는 힘을 잃으며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추위를 이기기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신라가 다른 나라를 끌어들여 동족을 치고 조종(祖宗)이 넘겨 준 땅을 버리므로 쉽게 회복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안 으로는 어버이를 원수로 생각하고 밖으로는 원수와 친하니 고독해지고 약 하여져서 천하 사람들이 역행하게 되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34)

이처럼 북애는 신라의 행위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이는 한민족 몰락의 책임이 신라에 있음을 명백히 한 것이다. 이러한 북애의 생각 은 동족상전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동족상전의 역사적 의미를 드러 낸 것으로 평가된다.

35)

34) 위의 책, 117쪽.

35) 이에 대해 신채호와 안재홍은 거의 같은 견해를 밝혔다. 신채호는 외세를 끌어들인 신라의 고구려⋅백제 멸망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신채호,

독사신론

」, 󰡔단재신채호전집󰡕 3, 독립

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46쪽). 안재홍도 “金庚信

太宗 武烈王

을 도

統三

을 이루엇다 하지마는 당시의

記錄

平壤

이 오히려

茂草

悲 嘆하엿고 關北의 地 太半 荒廢하엿슴을 전하엿다. 하물며 唐의 誥命을 빌고

그의 節度에 應하는 등 外力을 이용하는 後世 所謂 事大政策은 이때부터 大

이나

作俑

이 만타

라고 하였다(안재홍,

한양조 5백년 총평」, 󰡔개벽󰡕

71, 1926, 47쪽).. 또한 이광수도” 그러나 그 平壤은 1200여년 前 羅唐聯合軍 의 손에 쑥밭이 되어 버렷습니다. 고구려의 精膸分子 380,000人은 포로가 되

으로 잡혀갓습니다.

漢族

은 대대로 큰

怨讎

인 고구려로 하여곰

再起

力이 없도록 根絶을 시킬 결심이엿습니다. 그런데 그 앞잡이를 신라인이 하

엿습니다. 신라인은

三國 中에 가장 노예적 근성을 많이 가진 무리. 玉으로

부서진 고구려의 문화와

血統

이 끊어지고 구차한 안전을 도모하는 신라의 혈통과 정신만이 남은 것이 지나간 1,000년의 불행이엇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광수, 「단군릉

」, 󰡔삼천리󰡕 8-4, 1936). 이처럼 근대 지식인들의 신라인식은

대체로 신채호와 같은 인식선 상에 있었다.

(19)

4. 진보의 가치에 대한 확신

북애는 환웅 단군시대의 선교만을 고집한 것이 아니었다. 선교의 내용도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하였다.

어리석은 사람은 옛법을 지키기 만하고 상황에 따라 변화시키는 것을 알 지 못하여 결국 그 보수적인 생각이 나라와 집안을 망하게 한다.

36)

그는 변한다는 것 그 자체를 진보로 보았던 것이다. 이는 선교를 교조주의적으로 해석하거나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5. 국제관계의 다변성과 평화공존의 모색

북애는 국제질서의 다변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우리나라의 선비가 비록 밤낮으로 남한산성의 부끄러움 때문에 이를 갈 면서 임진왜란 때에 신통치 못하게 도와준 정의 때문에 명나라에게 보답하려 하지만 백년 안에는 이런 일이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것을 내가 맹세한다.

37)

이는 민족의식이 결여된 종적(縱的) 국제관계를 경계한 것으로 해 석된다. 국제관계는 우리의 시각에 따라 조정해 나가야 한다는 의미 로 파악된다.

한편, 북애는 한민족의 본성을 ‘평화’라고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를 군자의 나라라 하였는데 그 풍속은 의관을 하고 칼을 차고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며 싸우지 않는다.

38)

36) 위의 책, 107쪽.

37) 위의 책, 112-113쪽.

(20)

허신(許愼)의 설문(說文)에 말하기를 “오로지 동이(東夷)는 대(代)를 좇으 니 대인(大人)인데 동이의 풍속이 어질므로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가 있다고 하니 공자 같은 성인도 뗏목을 타고 가려고 했다”

고 하였다. 동방삭(東方朔)이 지은 신이경(神異經)에서는 “태평하게 앉아 서 로를 침범하지 않으며 서로 기리고 서로 헐뜯지 않으며 사람에게 근심이 있는 것을 보면 죽기를 무릅쓰고 구해주니 선한 사람들이다.”

39)

이처럼 북애는 용맹스럽지만 결코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 평화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이웃을 배척 하지 말아야 하며 이웃이 어려움에 빠지면 반드시 구해주어야 한다 는 선교의 가르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평화는 인권⋅복지가 실현된 상태라고도 정의할 수 있다.

북애는 다음과 같이 인권과 복지의 실현을 선교가 지향할 목표라고 하면서 무력이 아닌 예와 이치로 환웅⋅단군의 시절처럼 사회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신손(神孫)이 뒤를 이어 1천 2백년이 지나도록 나라에 죽이고 뺏는 변이 없으며 백성이 짓밟히거나 병드는 일이 없었다.

40)

곽박(郭璞)이 칭찬하여 일컫기를 “동방의 어진 나라에 군자의 훈훈한 덕 이 있어 예절로 사양하는 것을 좋아하며 예는 이치로 따진다.”

41)

이상에서 보았듯이 국학을 다른 말로 선교라 한다면 그 선교의 구 체적인 내용은 접합군생⋅홍익인간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국사는 이 러한 선교의 기준에 따라 기술하면 되는 것이다.

38) 위의 책, 99-100쪽.

39) 위의 책, 100쪽.

40) 위의 책, 99쪽.

41) 위의 책, 99-100쪽.

(21)

Ⅳ . 현대사 기술 분석과 그 문제점

현행 󰡔고둥학교 한국사󰡕 교과서 현대사 부분

42)

은 2011년 12월 30 일에 확정된 「2009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 교육과정 적용을 위한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

43)

에 따라 󰡔대한민국의 발전 과 현대세계의 변화󰡕라는 제목으로 집필하도록 되어 있다.

현행 교과서의 구체적인 집필기준은 다음과 같다. 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 질서가 형성되는 가운데, 8.15 광복 이후 전개된 대 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을 파악한다. ② 6.25 전쟁의 원인과 과정 및 그 참상과 영향을 살펴보고, 분단과 전쟁을 겪은 다른 나라의 사례를 찾아본다. ③ 4.19 혁명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자유민주주의의 발 전 과정과 남겨진 과제를 살펴본다. ④ 산업화를 통해 이룩한 경제 발전의 성과와 과제, 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변화를 이해한다. ⑤ 북한사회의 변화와 오늘날의 실상을 살펴보고, 남북한 사이에서 전 개된 화해와 협력을 위한 노력을 파악한다. ⑥ 독도를 비롯한 동북아

42) 현대사 서술과 관련하여 다음의 논문이 참고 된다.

양승태,

역사의식과 국가이성 : 한국 근⋅현대사 해석 논쟁에 대한 정치철 학적 진단 서설

」, 󰡔한국정치학회보󰡕 48-1, 한국정치학회, 2014; 이성호, 「‘한

국사 교과서 논란’ 관련 일지」, 󰡔역사와교육󰡕 9, 역사교육연구소, 2014; 홍석 률,

냉전적 역사 서술과 상처받은 자유주의 :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현대사 서술 비판」, 󰡔역사비평󰡕 105, 역사비평사, 2013; 신주백,

「󰡔한국사󰡕 교과서에

서 동아시아의 역사와 역사교육 : 한국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한일관계사 연구󰡕 40, 한일관계사학회, 2011;허동현,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어떻게 쓸 것인가?」, 󰡔철학과 현실󰡕 90, 철학문화연구소, 2011; 박태균,

「2009 개정 교육

과정 한국사 교과서 현대사 부분 분석

」, 󰡔역사교육󰡕 116, 역사교육연구회,

2010; 박진동,

해방후 현대사 교육 내용 기준의 변천과 국사교과서 서술

」, 󰡔

역사학보󰡕 205, 역사학회,2010; 지수걸,

「“한국 근현대사 논쟁”과 10학년 󰡔역

사󰡕교과서 편찬

」, 󰡔역사교육󰡕 109, 역사교육연구회, 2009; 김한종, 「<한국근⋅

현대사> 교과서 파동의 전말과 쟁점」, 󰡔역사와 세계󰡕 35, 효원사학회, 2009.

43) 교육과학기술부, 󰡔2009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 교육과정 적용을 위한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 2011.

(22)

시아의 영토 문제, 역사 갈등, 과거사 문제 등을 탐구하여 올바른 역 사관과 주권의식을 확립한다. ⑦ 세계화가 진전되는 가운데 국제사 회에서 높아진 대한민국의 위상을 알아보고, 국제 사회에 공헌하는 방안을 탐색한다.

결국,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긍정적 입장에서 기술하라는 지침인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의 향상을 기술 함으로써 피교육자에게 “역사에 대한 자긍심과 올바른 역사관을 고 취시킬 것.”이라는 것이 교육과학기술부의 시각이다.

44)

그런데 이러한 집필기준만으로 교육과학기술부의 목적이 달성될 지 의문이다. 역사에서 자긍심을 찾으려면 우선 한민족의 정체성(한 민족의 한민족 됨)을 확인하는 데부터 시작해야 한다. 상고대사에서 한민족의 기원⋅문화⋅사상 등을 기술하지 않거나 한민족의 출발이 세계사의 발전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음을 서술하지 않고서는 자부심 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한민족이 어떠한 과정을 겪어 현대까지 이 르게 되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바로 교육과학기술부가 말하는 ‘한 국사’인 것이다.

현대사의 경우, 상고시대에 출발한 우리 민족이 고대⋅중세⋅근대 를 거치면서 민족의 위기⋅사대주의(자기모멸) 등을 어떻게 극복하 였는지 보여주면서 특히 여말의 단군세력이 조선건국의 배경이 되었 으며, 근대의 항일전쟁의 사상적 기반인 상고대에 형성된 선교를 재 해석하고 발전시킨 대종교세력을 중심으로 한 단군민족주의에서 찾 아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대한민국의 출발배경이 바로 근대 단군민 족주의임을 적기(摘記)할 때만이 피교육자의 자긍심을 되살릴 수 있 고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민족의 교과서로써 국사의 저술이 요구되는 현

44) 교육과학기술부,

보도자료-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 교육과정 적용 을 위한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 확정

발표-한국사⋅세계사

동아 시아사-」, 2011년 12월 30일자.

(23)

시점에서 현대사의 기술기준은 한민족의 역사를 정확하게 서술할 수 있는 국학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 기준은 이미 다음과 같이 북애가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사는 아래와 같은 국학사관으로 기술한다면 피교육자의 자긍심과 올바른 역사관을 고취할 수 있을 것이다.

1. 주체성⋅정체성의 확립

국학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한민족의 한민족 됨을 나타낼 수 있는 현대사의 주체성⋅정체성문제는 ① 분단의 원인과 외세의 의 미, ② 대한민국 출발의 사상적 배경, ③ 민족반역자 청산으로 나누 어 살펴볼 수 있다.

1) 분단의 원인과 외세의 의미

분단의 원인을 현행 한국사 교과서는 대체로 냉전체제의 구축과 좌우의 대립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냉전구조라는 시대 상황 속에서 형성된 좌우대립의 원인과 그 성찰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있 다. 분단의 1차적인 원인은 냉전구조에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민족 내부의 사상대립도 심각한 문제였다. 사실 한민족은 항일전쟁기 동 안 한민족을 일치단결시킬 가장 큰 결속력으로 작동되었던 단군을 중심으로 항일전쟁을 온전히 전개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세계사의 조류에 말려들어가 자본주의 세력(이승만)과 공산주의 세력(김일성) 의 이익을 위해 민족전체를 희생시키고 말았다. 이는 본성을 잃은 데 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고, 그 결과 외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 하였던 것이다.

국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신라의 고구려⋅백제 멸망에 대한 북애의 비판과 같은 선상에서 미소를 추종한 사대주의 정치세력이 민족의

(24)

분단을 초래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자기성찰 내용을 교과서 에 기술해야만 했다. 하지만 다원론적 관점과 사대적 식민사관에 따 른 숙명론과 외인론은 여전히 견고하고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다. 따라서 현행 한국사 교과서는 국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대단히 문 제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국학사관의 특징은 사대주의를 철저히 배격하는 데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소의 한민족 분할 지배는 일제의 그것과 그 성격을 결코 달리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사 교과서 현대사 부분에 이 대목을 분명 하게 기술해야 이후 전개된 한국 현대사의 궤적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교과서에는 미소군을 ‘해방군’ 또는 ‘점령군’이라는 상반된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미군을 해방군으로 인식하는 대표적 인 교과서는 교학사 교과서

45)

이다. 이 교과서는 「소련의 아시아 공 산화와 미국의 저지」에서 “미국은 일본과 대한민국을 공산주의로부 터 지켜주었다.”

46)

라고 하였으며, 「소련군과 미군의 한반도 주둔」에 서는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의 무장 해제와 치안 유지를 위하여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남북에 주둔하게 되었다”

47)

라고 기술하고 있 다. 이처럼 교학사는 미소의 한민족 점령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라는 외세를 마치 ‘구세주’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는 사대주의를 철저히 배격하는 국학사관과는 너무나 거리 가 먼 주장이다.

반면, 미군을 점령군으로 본 대표적인 교과서는 금성출판사의 한 국사이다. 이 교과서는 「미소의 한반도 분할점령」에서 미소의 한민 족 분할지배에 대해 ‘점령’이라는 명확한 표현을 쓰고 있다.

48)

하지만 45) 교학사 교과서의 기본적인 시각은 이명희⋅강규형,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

」, 󰡔사회과교육󰡕 48-1, 2009 참조.

46) 교학사,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302쪽.

47) 위의 책, 303쪽.

(25)

금성출판사도 분할점령의 의미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있 다. 미소의 한반도 지배가 왜 점령인지 설명이 부족한 이유는 명확한 사관이 서 있지 않은 데서 찾을 수 있다.

49)

2) 대한민국 수립의 사상적 배경

조선의 건국은 단군세력이 큰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50)

이점에 서 성리학 세력만을 조선건국의 배경으로 설명하는 것은 이제는 지 양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출발도 마찬가지이다. 대한민국의 출발은 역사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잇고 있다. 그 임시정부의 주축 세력은 단군민족주의 계열이 담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조선후기에 출현한 단군민족주의 세력(국학세력)의 역량 결집이 대한민국 출발의 주요 배경이 되었다. 역사는 결코 “이 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친미사대주의자들의 ‘노력’만으로 대한민국이 건국된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건국 배경을 2차 세계대전의 종결에 따른 결과로만 기술하는 것은 대단히 문제가 있다.

이 점에서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의 의미를 국학의 관점에서 정 확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수립은 분단 구조 속에서 한반 도의 남쪽을 ‘점령’

51)

한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 세력을 중심으로 48) 금성출판사,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2014. 302쪽.

49) 이외 비상교육 「광복과 국토분단」(346쪽), 천재교육 「8.15 광복과 미⋅소 양 군의 진주」 (304쪽), 두산동아 「한반도에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오다」(267쪽), 미래엔

미소군정이 실시되다

」(309쪽) 등의 소제목에서 보듯이, 전체적으로

교과서들은 미소의 한반도 점령 의미를 애매하게 그리고 있다.

50) 신운용,

조선건국의 사상적 배경에 관한 시론

」, 참조.

51) 미국은 한반도를 해방시킨 것이 아니라 점령했다는 사실은 “태평양 방면 미 국 육군 부대 총사령관인 나(맥아더)에게 부여된 권한에 의해 나는 이에 북 위 38도선 이남의 조선과 조선주민에 대하여 군사적 관리를 하고자 다음과 같이 점령 조건을 발표한다.”라고 한 맥아더 포고령 포고 1호(1945년 9월 9 일)에서 확인할 수 있다(밑줄: 글쓴이). 물론 소련의 북한 점령도 여기에서

(26)

이루어졌다. 김일성은 소련군의 점령과 지원 아래 조선 민주주의 인 민 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교과서들은 유엔의 결의에 의해 성립된 유일 한 합법정부가 대한민국이라고 하여 대한민국에 정통성이 있음을 강 조하고 있다. 하지만 국학의 관점에서 보면 민족전체를 희생시킨 이 승만과 김일성의 분단세력이 주도한 권력의 출발은 정통성

52)

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반민족적’이고 ‘반인륜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1945년 8월 15일 국권회복은 민족독립운동가들이 흘린 피의 대가 였지만 현실에서는 이들이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한 민족의 유일한 구심체였던, 같은 단군의 자손이라는 의식으로 형성 된 단군민족주의가 대한민국 수립의 사상적 배경이었다는 사실도 간 과해서는 안 된다. 이 점도 모든 교과서에서 외면하고 있다. 이는 현 행 교과서가 다원론적 관점과 자유민주주의 사관에 의해 기술된 결 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서 제헌의회의 헌법 제1조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9년 12월 31일 법률 제86호로 제정⋅공포된 교육법 제1조에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

벗어날 수 없다.

52) 굳이 정통성을 주장하려면 3.1투쟁의 결과로 성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그 정통성을 찾아야 한다. 최근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무시하며 대한민국이 출발한 1948년 8월 1일을 ‘건국절’로 하자는 주장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훼 손한 미국과 소련의 입장을 따른 사대주의적 시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 다. 건국절 교학사 교과서 편찬의 배경이었던 ‘교과서포럼’⋅뉴라이트계열 기독교의 한기총 등 이승만을 추종하는 ‘사대주의적’성향을 보이는 단체들 (http://www.k815.co.kr)이 앞장서서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 된다. 이동복,

「8월 15일은 대한민국의 ‘건국절’이자 ‘독립기념일’이다」,

󰡔

北韓

󰡕 488, 2012; 「광복절과 건국절 : 보수권력의 역사인식과 식민주의 극 복의 과제 <對談> / 白基玩,

金明仁

대담

」, 󰡔황해문화󰡕 68, 새얼문화재단,

2010; 이완범, 「건국 기점 논쟁 : 1919년설과 1948년설의 양립」, 󰡔현상과 인식󰡕

33, 한국인문사회과학회, 2009; 辛珠柏,

정부수립과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광

⋅건국의 연속과 단절」, 󰡔한국근현대사연구󰡕 48, 한국근현대사학회, 2009.

(27)

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공유하게 하여, 민주국 가 발전에 봉사하며 인류공영의 이상 실현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 로 한다.”라고 하여 교육의 근본이념을 홍익인간이라고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홍익인간 정신으로 세운 나라이 다”라는 문구가 들어갔어야만 했다. 제헌의회의 헌법 1조는 “대한민 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정치이념이 들어가는 헌법 은 거의 없다고 한다. 물론 이는 분단구조라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지 만 국학의 관점에서 보면 사대모미(事大慕美)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는 어느 교과서도 단군민족주의가 대한민국 출발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는 점을 주목하지 못하였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더욱이, 외세와 국제정세라는 사대사관에 따라 정통성이 결여된 남 북 권력의 출현 배경을 기술하고 있을 따름이다.

3) 민족반역자 청산의 문제

대체로 ‘민족반역자’ 청산의 문제에 대해 현행 교과서들은 크게 두 가지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하나는 정부 운영을 위해 친일파 등용은 어쩔 수 없었다는 ‘현실론’과, 민족정기를 위해 민족반역자를 처리해 야 한다는 ‘당위론’으로 나눠볼 수 있다.

현실론을 대표하는 교과서는 교학사의 한국사이다. 이 교과서 집 필자는 “미군정은 일본인 관료를 대체할 인력을 확보하지 못하여 치 안 공백이 우려되자, 총독부에서 근무하였던 관료와 경찰을 그대로 재고용하였다.”

53)

라고 설명하였다. 이는 미국의 책임을 회피하면서 민족반역자 미청산이 불가항력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54)

53) 교학사, 위의 책, 307쪽.

54) 위와 같음. 미군정 귀속재산 불하는 미군에 우호적이라는 표현을 넘어 친미 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대종교 등 민족세력은 귀속재산 불하에서 소외되었고 그 물적 기반을 잃고 말았다. 이에 반하여 귀속재산을 받은 민족반역자들은 이후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는 물적 기반을 조성하였다. 물론 이는 미군정과 이승만의 협조로 가능하였던 것이다. 국학

(28)

특히 민족반역자 설명이 다른 교과서에 비해 자세하지 않다는 점도 이 교과서의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다.

반면, 당위론에서 이 문제를 다룬 교과서는 금성출판사의 한국사 교과서이다. 이 책의 집필자는 「반민족 행위자 처벌을 위한 노력」이 라는 소제목으로 “친일파 청산이 일제의 잔재를 씻기 위한 핵심이 다.”라고 기술하면서, 그 책임이 “조선총독부 행정 체계를 유지하여 친일 관리들을 기용한 미군정과 반공을 내세운 이승만 정권에 있다.”

55)

고 강조하였다. 이 출판사의 교과서는 적극적으로 민족반역자 문제 를 다루었다는 면에서 교학사의 그것과 비교된다.

이러한 인식은 미래엔의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확인된다. 미래엔 한국사 교과서 현대사 부분 저자는 “민족반역자를 청산하는 것은 민 족정기를 바로 잡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56)

라고 하면서 그 원 인이 “미군정의 민족반역자 비호와 반공을 앞세운 이승만의 민족반 역자 처벌 무력화에 있다.”

57)

고 주장하였다. 특히 미래엔은 이러한 민족정기 회복문제가 ‘일제 강점하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에 대한 특 별법’으로 반민족행위를 법적으로 명확히 정의하였다고 하여 노무현 정권의 민족반역자 처벌의지를 높이 평가하였다.

58)

이외의 교과서는 위 두 교과서의 적극적인 서술과는 달리 그 강도 면에서 완화된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비상교육 교과서 집필자는 민 족반역자 문제를 독립된 소제목으로 다루지 않았다. 다만 본문에 “일 제에 협력한 인사들을 ‘친일 민족반역자’라고 정의하면서 이승만 정

의 관점에서 보면 반민족적 행위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양정원, 󰡔歸屬財

産拂下

를 통한 1950년대 韓國産業資本家의 형성에 관한 연구 :

綿紡織 工業

을 중심으로󰡕, 이화대학교대학원 학위논문, 1996 참조).

55) 금성출판사, 위의 책, 372쪽.

56) 미래엔,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314쪽.

57) 위와 같음.

58) 위와 같음.

(29)

부의 방해로 친일파 청산이 좌절되었다”

59)

라고 기술하였다.

두산동아 교과서 현대사 집필자는 「친일파 청산이 흐지부지되다」 에서 광복 직후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민족반역자 문제를 들면서 이 를 청산하지 못한 원인으로 이승만의 공공연한 반민특위활동 무력화 를 들었다.

60)

지학사는 「친일파 천상하려고 노력하다」 소제목 아래 민족반역자 문제를 다루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의 민족반역자 처 단 방해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반민특위 의 활동을 방해했다.”라고만 단순하게 기술하고 있다.

61)

천재교육 교과서 집필자는 반민족문제를 「새로 출발한 대한민국 정부의 과제」에서 다루었지만 ‘반민족행위자’ 또는 ‘친일파’라는 용어 를 소제목에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본문에서는 “이승만 정권이 반민 특위 활동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냈다.”

62)

라고만 하여 이승만부의 책 임에 대한 구체적인 적시를 회피하는 경향을 보였다.

국학의 관점에서 민족반역자는 조선시대 성리학을 추구한 사대주 의자들과 같은 의미이다. 근대국가로 가기 위해서는 사대성이 농후 한 춘추사관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조선의 과제였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민족반역자 처단은 국학의 이념(홍익인간)을 그대로 실 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행 교과서의 필자들은 민족반역자를 반 드시 청산해야만 하는 이유를 적극적으로 기술하지 못하였다. 이 점 에서 현행 역사교과서는 갈 길이 멀다고 평할 수 있다.

59) 비상교육,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352쪽.

60) 두산동아,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274쪽.

61) 지학사,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350쪽.

62) 천재교육,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310쪽. 그리고 북한의 민족반역자 청 산에 대해 두산동아 한국사 교과서 현대사 필자는 “이 위원회(임시 인민 위 원회: 필자)에서는 사실상 정부구실을 하여 ‘무상 몰수⋅무상 분배의 토지개 혁을 단행하고, 산업을 국유화하였으며 친일파를 처벌하였다(273쪽).”라고 기술하여 이승만 정권의 민족반역자 처리상황과 비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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