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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초전통회화의변모와근대화20채용신안중식이도영을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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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기 초 전통회화의 변모와 근대화 20

채용신안중식이도영을 중심으로

- ․ ․ -

李 泰 浩

시작하면서 .

전통화풍의 계승과 동도서기의 실패 .

서양화풍의 절충적 도입 .

1. 石芝 蔡龍臣

2. 心田 安中植

근대적 리얼리즘 형식의 의 시사만화

. 發芽 貫齋 李道榮:

Ⅳ 맺음말 .

시작하면서 .

세기말까지 이어 온 봉건시대의 전통은 응당 붕괴해야 할 대상이었다 년 강화도조약에

19 . 1876

따른 개항,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농민전쟁 이후의 갑오경장,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와 근대국가로의 전환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런 세기말이 내세운 시대적 가치는 봉건성 극복과 근. 19 대성 획득 그리고 외세의 침략에 대한 민족자주성의 고양이었다 때문에 반봉건과 반외세의 기치, . 를 내세운 갑오농민전쟁이 우리식 근대 민족민중운동의 시발로 평가받는 것이다 그 개혁이 실패로. 끝남으로써 우리 역사 속에서 근대정신의 지향이 좌절되고, 1905년 을사조약에 이어 1910년 한 일합방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지배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봉건사회의 악습은 악습대로 전면적으로 타파되지 못하였다 모든 분야의 자생력이. 약한데다가 올바른 민족문화의 건설은 물론 근대성의 방향조차 제대로 가늠하기 힘든 형편이었다.

예컨대 근대적 민주제도를 도입코자 했던 개화파는 일본 제국주의의 야욕과 결합했고 외세 침략으, 로부터 민족을 지키고자 했던 위정척사파의 이념은 봉건체제를 유지하는데 두었던 모순으로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반외세를 주장하는 민족주의가 봉건사회 유지를 지향하고 근대적인 민주사회에 대. , 한 건설이념을 표방했던 사람들이 외세를 끌어들이면서 친일화하는 이런 갈등과 대립 혹은 혼돈은, 근대적인 사회로의 방향에 대한 정확한 지향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것이 현재 지금의 시. 대상황이나 문화현실과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이후 초기의 사회 흐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제국주의의.

(2)

폭력적 지배에 대한 대응으로 민족해방을 위한 항쟁을 해야 한다는 입장과 근대적인 사회로의 전환 에 따라 외래문명의 수용으로 사회발전을 이룩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민족해방과. 근대화의 두 가지 과제는 서로 통합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갑오농민전쟁에 이은 항일의병투쟁과. 3 운동 같은 민중항쟁이 좌절당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는 더욱 강화되었다 우리의 세

1 , . 20

기는 그렇게 상처가 깊어갔다.

문화예술면에서도 근대적 방향을 바르게 세우고 발전을 이룩하기는 힘들었다 조선후기에 실학. 의 성장과 문예의 사실정신이 꽃피웠듯이 봉건적 사회구조나 예술사조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지 만 자체적인 근대문화로의 전환의지가 선명치 못했다, .1) 또 개화기 전통형식의 계승과 새로 유입 된 서구회화 형식의 거름과 소화를 통한 우리식 근대문화의 민족양식을 창출해 내기에는 그 기반이 너무도 미약했다 근대미술의 시점 잡기나 성격 규정이 어려운 것은 그 때문이다 어쨌든. . 20세기 초는 세계사의 흐름에 편승하고 새로운 문명의 수용에 따라 계몽주의적 성향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 다 따라서 전통회화의 변모를 자극한 서구화법의 수용을 찾는 일은 우리 근대회화사의 시발로서.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여기서는 세기 초 회화에서 전통형식과 서구화법의 절충에 나타난 성공. 20 적 근대성을 재검토하는 데 초점을 맞추겠다 그리고 당대의 사회상을 담은 이도영의 시사만화를. 통해 우리 근대미술의 시대정신을 찾아보겠다.

전통화풍의 계승과 동도서기의 실패 .

우리의 20세기는 19세기 말 서구 열강의 개방압력에 이어 1905년 을사보호조약의 체결로 일 본 제국주의의 조선지배가 확립되면서 그 문을 열었다 외부로부터 갑작스레 밀려든 신문명의 충격. 이 확산되면서, 金允植 李商在 申采浩, , 등의 東道西器論을 내세운 계몽주의적 주장이 형성되었 다.2) 문화적으로 우리와 유사한 처지에서 서세동점의 구도 아래 서구문명을 받아들인 중국이나 일 본과 같이 자기 전통의 장점을 기반으로 한, 中體西用이나和魂洋才와 같은 이념이 없지 않았던 것 이다.

세기 말 세기 초 의 근대적 공예론 의 개화파 참여

19 ~20 張志淵(1864 1921)~ , 心田 安中植 , 과 의 ‘ ’(1906) 창립회원 참여 근대적 시사만화의 효시인, 의 ‘

安中植 李道榮 大韓自强會 李道榮 大韓

교육부원 활동 기미독립선언서의 서명에 참여한 이

’(1907) , (1864 1953)

協會 吳世昌 ~ 書畵史

를 정리해서 모은฀槿域畵彙฀ ฀, 槿域書彙฀등의 작업과 활자본 근역서화징฀ ฀(1928)의 발간 등을

1) 이태호, 조선후기 회화의 사실정신,학고재, 1996.

2) 임형택 한국문화에 대한 역사적 인식논리 동아시아전통과 근대세계와의 관련에서, - 」 ฀, 실사구시의 한국학,창작 과 비평사, 2000.

(3)

통해서도 미술계의 근대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또 세기 초 화단을 돌아볼 때. 20 蔡龍臣의 <郭東元 이나 의 에서와 같이 동도서기의 모범적 사례를 찾을 수도 있으나 이들의

> < > ,

像 安中植 白岳春曉圖

작업이 시대적 대세를 형성시키지는 못하였다. 安中植이나 蔡龍臣의 경우에도 대부분의 작품 성향 은 진부한 봉건적인 것을 고수하는 데 치중한 편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동도서기 이념이 회화사의. 변화를 자극하지 못한 채 일본제국주의의 지배아래 바른 중심을 잡아내지 못한 탓이다. 19세기 말 에서 세기 초 거대한 문화지형의 변동기에 제시된 동도서기론은 새로운 회화운동을 창출하지 못20 했고 근대회화를 세우는 데 실패한 셈이다, .

이처럼 변화의 물결이 밀려왔음에도 전반적인 화단은 조선시대 말기 문인화류의 유산에 안주하 였으며 봉건적 형식에 머물렀다, . 夢人 丁學敎 怪石 吳慶錫 墨梅圖 小湖 金應元 墨蘭 閔泳의 , 의 , 의 ,

의 과 , 의 등 의 같은 전통을 이은 사대부 문인 취미

翊 墨蘭 墨竹 海岡 金圭鎭 墨竹 石坡 李昰應 墨蘭圖

의 개성적인 사군자류 그림이 유행하였다 그리고, . 金應元을 비롯하여 차후‘朝鮮書畵美術會’의 교 수진으로 참여하는又香 丁大有 菁雲 姜璡熙 胃士 姜弼周 貫齋 李道榮, , , 등도 별반 다름이 없었다. 선배들의 전통을 이은四君子 怪石 器皿折枝 山水, , , 등 봉건적 형식의 고수에 따라 회화성의 퇴락 을 보여줄 뿐이었다 그만큼 당대 사회의 봉건적 문화양상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다. . 조선시대 도화서의 전통은吾園 張承業에서安中植 趙錫晋과 으로 계승되었다 필묵의 기량을 토. 대로 정통 수묵화풍를 유지하면서도 두 화가는, 1881년 중국사절단의 일행으로 천진에서 년 동1 안 서구문물이 유입된 중국을 익혔다 특히 이들의 개화파적 성향은. 尹永基(1833~ ?), 李完用 등 친일관료의 후원으로 개설되는 의 창립으로 이어졌 (1858 1926)~ ‘京城書畵美術院’(1911)

다 이는 조선시대 도화서를 염두에 둔 화가를 배출하기 위한 근대적 미술학교인 셈이다 서예가로. . 도 일가를 이루었던 李完用은 1911 9 ‘년 월 京城書畵美術院’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이 단체를 교 육기관의 성격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 때. 安中植은 교수로 발탁되었고 다음해 월 황실과 총독, 6 부의 후원으로‘朝鮮書畵美術會’(1912)를 창립하게 된다.

조선서화미술회 에는 외에도

‘ ’ 趙錫晋 又香 丁大有(1852 1927),~ 菁雲 姜璡熙(1851~ 등의 서화가가 교수진으로 참여 1919), 小湖 金應元(1855 1921),~ 胃士 姜弼周 貫齋 李道榮,

하였다 학비는 무료로. 書科 畵科와 두 학과를 두었고 교육 기간은 년이었다, 3 . 1914년 첫 졸업생 으로 靜齋 吳一英과 墨鷺 李用雨(1902 1953), 1915~ 년 以堂 金殷鎬, 1916년 深香 朴勝武

(1893 1980), 1918~ 靑田 李象範 心汕 盧壽鉉, (1899 1978),~ 鼎齋 崔禹錫(1899~ 등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65) .

비록 근대적 미술교육기관이라는 긍정적 평가가 주어졌지만 조선서화미술회 는 도제식 교육형, ‘ ’ 태도 그러하려니와 여건상 새로운 서화방향을 제시하지 못했다. ฀개자원화전 등 중국화보를 중심฀ 으로 회화수업이 이루어지는 등 고루한 전통을 답습하는 장으로 머물고 말았다 그러나 다소 편차. 는 있지만 이들의 작품활동이 세기 전통회화 분야에서 중심축을 이루었음은 주지할 만하다 그20 . 시발로 1918 ‘년 민족미술의 구현을 목적 으로 초대회장’ 安中植을 내세워 13명이 꾸린 ‘書畵協會’

(4)

를 들 수 있다 전통회화를 계승한 화가와 새로이 유화를 다룬 화가들이 모여서. 1918 6 ‘書畵년 월 를 구성한 것이다 는 동 서 미술의 연구 후진양성을 목적으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 . ‘ ’ ,

協會 書畵協會 ㆍ

근대적 미술단체이다.3) 1921년 첫 창립전을 연 조선인 최초의 미술단체전인 서화협회 전은 규모‘ ’ 도 컸지만 관람객도 많아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꿈 속에 있는 조선 서화계의 깨우는 첫소리…침쇠하기 거의 극한에 이르렀다 할 우리의 서화계 로부터 다시 일어나는 첫 금을 그으려 하는 이 새 운동이 과연 어떠한 성적을 보일는지 이 전람, . 회의 성공과 실패는 조선 서화계에 대하여 중대한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4)

서화협회 전은 년까지 총 회를 개최하고 중단되었다 비록 민족미술을 추구하였지만 뚜

‘ ’ 1936 15 .

렷한 이념제시가 없는 채 내부 결속력이 약했고 외적 압력에 따라 지속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 이. 후 작가들의 활동은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朝鮮美術展覽會’ (1922)에 편입되었다 그럼으로써 당. 대회화는 왜색화로 치달았고 작가들은 대부분 친일부역에 빠져들었다, .5)

또한 조선 말기에서 세기초로 넘어오는 시기에 새롭게 전개되는 미술계의 양상으로는 지방화20 단의 성립을 들 수 있다.6) 秋史 金正喜(1786 1856)~ 의 제자인 小痴 許鍊(1809 1892)~ 이 진도에 정착하면서 아들 米山 許瀅(1861 1938)~ 등 지방화가를 배출했던 호남화파를 필두로, 평양의 石然 楊基薰(1843~ ?)과 一齋 金允輔(1886 1936)~ 등에 의해 지방화파가 형성된 것 이다 중앙에만 편중되어 온 문예활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근대적 변화를 감지할 수 있겠다 이런. . 전통을 이어서 金允輔를 주축으로 한 ‘平壤書畵美術會’(1914), 徐丙五(1862 1935)~ 를 주축으 로 하는 대구‘嶠南詩書畵硏究會’(1922), 許瀅의 제자인 許百鍊이 주축이 된 ‘鍊眞會’(1938) 등이 조직되었다 중앙화단과 다른 지역의 문화층을 두텁게 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이들 역. . 시 전통화법을 고수한데 머물렀으며 시대의 변화와 감성을 수용하지 못함으로써 남화부흥운동같은, 보수적 감상층의 테두리에서 머물고 만 한계를 지니고 있다.

서양화풍의 절충적 도입 .

세기초의 전통회화는 전반적으로 전통형식이 고수되는 한편 서양화식 입체화법과 원근법의 20

부분적인 수용에 따른 어색한 변화를 감수해야 했다 수묵화의. 心田 安中植 小琳 趙錫晋과 , 초상화 3) 조정육 근대 미술사에서 서화협회의 성과와 한계, 」 ฀, 근대한국미술논총, 1992.

4) 동아일보, 1921.4.2.

5) 이태호, 1940 년대 초반 친일미술의 군국주의적 경향성」 ฀, 근대한국미술논총, 학고재, 1992.

6) 유홍준 개화기 구한말 서화계의 보수성과 근대성, 」 ฀, 구한말의 그림, 학고재, 1989.

(5)

의石芝 蔡龍臣이 그런 변모를 부분적으로 보여주는 작가이다 다만 조선 말 봉건왕조의 도화서 출. 신인安中植 趙錫晋과 이 개화파에 가담했거나 그런 정치적 성향을 짙게 띤 반면에 어진 제작을 통, 해 초상화가로 등단하여 서양 입체화법을 적극 수용한蔡龍臣은 위정척사파의 보수적 이념을 표방 했던 점이 흥미롭다.

1.

1.

1.

1. 石芝 蔡龍臣石芝 蔡龍臣石芝 蔡龍臣石芝 蔡龍臣

세기 초반 전통적 형식의 계승과 변모를 쉽게 찾을 수 있는 모티브는 초상화이다 대표적인

20 .

화가로는 石芝 蔡龍臣(1850 1941)~ 을 들 수 있다. 蔡龍臣은 조선시대 초상화 형식을 토대로 얼 굴과 의습에 선묘보다 음영의 입체감 표현을 가미하였다 새로 도입된 사진술을 활용한 사례도 있. 으며 인물상을 돋보이게 배경을 칠하고 채색을 두텁게 올려 적극적으로 서양화기법을 수용하였다, . 전통 초상화에 나타난 가는 철선묘의 옷주름 선을 없애고 음영을 가하는 서양화의 입체화법을 구사 하면서 얼굴이나 자세 포착은 조선시대 초상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蔡龍臣의 초상화들이 대부분 정면상인 점은 인물의 입체감을 살리는 자신감인 듯 하다.

은 출신으로 를 지냈다 초상화를 잘 그린 것으로 알려져. 1900년 황실에

蔡龍臣 武科 定山郡守

불려가 趙錫晋과 나란히 그 기량을 겨루며 태조 어진부터 역대 임금들의 초상에서 고종의 초상까, 지 그렸던 초상화가로 유명해진 화가이다.7)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관직을 그만두고 京城 을 떠나 호남지방에 낙향해서 전주 익산 정읍 등을 중심으로 주로 항일의병장과 유생들을 그렸고, , , 말년에는 부유층이나 일본귀족의 의뢰에 응해서 초상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호남지방의 의병활동을. 이끌었던 勉菴 崔益鉉(1833 1906)~ 과 松沙 奇宇萬, 일제 침략에 자결로 저항한 梅泉 黃玹

등의 초상화를 여러 본 제작하였다

(1855 1910)~ .

년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은 털모자를 쓴 모습의 반신상으로 지사의 풍모를 1905 <崔益鉉像>( )

잘 드러내었고 관복 차림의, 崔益鉉초상화를 다수 그렸다. 金圭鎭의 사진을 토대로 절명 직후 그린 은 돋보기 쓴 안면 표현의 잔 붓질의 얕은 입체감을 낸 이 돋보이는 초상화

<黃玹像>(1911) 肉理紋

이다 한일합방에 반대하여 군산교도소에서 절명한. <金永相像>(1910)과 일경에 잡혀가던 도중 만 경강에 뛰어든 모습을 담은<金永相透水圖>(1922)같은 작품은 당대 민족의 아픔을 담은 기록화 로 주목된다.8) 이들 외에도 艮齋 田愚 등 지방유생의 그림이 전하며 부부를 함께 그리는 사례들, 중 女人초상화들에 좋은 작품이 많다.

이러한 초상화를 남긴蔡龍臣이 요즘에 들어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림이 대. 체로 전통적 형식에 서양화의 입체화법을 가미함으로써 전통양식의 형식적인 퇴락이 심하게 눈에 띈다 위엄 있고 당찼던 조선시대 초상화와 비교할 때 그 격조를 잃고 무기력해진 형식미에 서양화. ,

7) 채용신의 회화나 연구성과는 국립현대미술관, 石芝 蔡龍臣(삶과 꿈, 2001)참조. 8) 이태호 채용신의 항일지사 김영상투수도, 」 ฀, 가나아트, 1992.3 4.

(6)

의 입체화법이 가미되니까 좀 어정쩡해진 모습도 없지 않다.9)

한편蔡龍臣은 마음먹고 그리기만 하면 최고의 걸작을 탄생시키기도 하는 저력을 갖고 있는 화가 다. <郭東元像>(1918)이 그 좋은 예이다 만경강 일대에 사는 만석꾼의 초상이다 이 집에 초상화. . 를 조사하러 갔다가郭東元의 손주할머니한테 들으니 200섬을 주고 이 그림의 제작을 의뢰했고 6 개월간 이 집에 기거하면서 완성했다고 한다.10) 그에 비해勉菴 崔益鉉 黃玹, 과 같은 항일지사의 그림은 사례를 받지 않고도 그냥 그려 주었다 하니 우국지사의 초상을 돈 받고 그릴 수 없다는 입, 장에서였던 것 같다. <郭東元像>은蔡龍臣의 초상 그림 중에서는 물론이려니와 나아가 세기초의20 대표작으로 꼽을 만하다.

에는 전통적 형식의 잔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화면 바탕에 돗자리를 깔고 정면상을

<郭東元像> .

배치한 모습이 그러한데 손에 지물로 부채와 안경을 들고 있는 모습은 새롭게 변화된 형식이다 정, . 면의 앉은 자세와 뒤에 엷은 먹으로 배경을 깔아 인물을 부각시키는 방식은 입체화법과 함께 서양 화기법을 차용한 결과로 보인다 만약. 蔡龍臣의 회화적 기량을 이 그림 한 점으로 본다면 조선시대 어느 초상화가보다도 훨씬 기량이 뛰어난 최고의 거장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눈코입과 피부결의 굴곡에 따라 음영을 표현하는 것까지는 우리 초상화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눈동자의 정밀한 색조와 안구표현에 입체감을 내기 위해 하얀색으로 하, 이라이트를 준 점이다 이는 조선시대 초상화에서는 볼 수 없는 표현이다 마치 렘브란트나 서양의. . 고전주의 화가들의 그림에 보이는 눈동자와 같이 흰점을 찍은 수정체의 입체감이 생생하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작품은 우리가 서양화법을 받아들여 더욱 더 생동감 나는 우리 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형식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심도 있는 서양화법의 탐색과 전통기법의 접목으로 이른바.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혁신 의 조화미를 이룩했다고 볼 수 있겠다

‘ ’ .

의 세기 초 서양화법에 대한 이해는 조선 후기 중국을 통해 간접수용된 양상과는 사뭇20 蔡龍臣

다르다.11) 구한말부터 휴버트 보스 레미옹 등 서양인 화가의, 來朝와 일본인 양화가의 미술교습소 개설 등으로 서양화법의 장점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가 충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가. 그랬던 만큼 전통형식과 새 화법과의 조화는 여전히 미숙했고, 蔡龍臣화법은 당시 화단에 중심으로 부상하지 못하였다 그 바람에 동도서기에 따른 동서화풍의 결합은 회화적 수준을 충분히 높이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절충 형식이 시대성과 현실내용을 담아내기 위한 시도였던 것 또한 아니었다. . 하지만<郭東元像>이 보여준 전통초상화 형식에 입체화법을 가미한 절충 방식은 동도서기의 형식미 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로 꼽을 만하다.

9) 이태호 조선시대의 초상화, 」 ฀, 미술사 연구 제 호 미술사연구회 12 , , 1998.

10) 이태호 앞의 글, .

11) 이성미, 조선시대 그림속의 서양화법,대원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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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2. 心田 安中植心田 安中植心田 安中植心田 安中植

외에도 이 시기에는 전통 수묵산수화와 인물화에도 서양화풍을 가미한 새로운 변모가 없 蔡龍臣

지 않았다 조선말기의 화원. 吾園 張承業(1843 1897)~ 의 전통을 이은 心田 安中植(1861~ 과 의 산수화풍에 나타난 원근개념의 도입과 입체감 표현 그

1919) 小琳 趙錫晋(1853 1920)~ ,

리고 금강산이나 서울 풍경의 사생화에 잘 드러나 있다 허나 이들의 작업은 새로운 화풍을 수용하. 는 데 소극적이었다.

과 이 으로부터 그림을 배우면서 조선말기 고종 때의 마지막 心田 安中植 小琳 趙錫晋 吾園 張承業

화원화가로 20세기를 맞이하게 된다 두 사람은. 1881년 領選使 金允植(1835 1922)~ 의 일행 으로 천진에 파견되어 년 동안 천진기기창에서 연수생으로 서양식 기계의 도면을 그리는 훈련을1 했다. 安中植은 신문명에 자극 받아 구한말 개화파에 합류하였다. 1891년과 1899년 두 차례 중 국 여행을 더 했고 일본에도 건너가서 근대적 안목을 넓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가의 작품은, . 당시 중국과 일본화풍의 영향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으며, 19세기 화단의 누습을 크게 벗지 못했다. 安中植은 <桃源問津圖>(1913) 같은 그림이나 기명절지도 등 봉건시대의 소재와 전통적 형식에 머물렀다.12) 그러나 蔡龍臣이 전통 초상화법에 입체법을 가미했듯이 근대적 방식을 채용, 해서 서양의 원근개념과 입체화법이 갖는 속성들을 우리식 산수화로 변환시켜 내려 노력한 작품을 남기고 있어 주목된다.

의< >(1915)가 그 대표작이다 경복궁과 그 뒷산인 백악산을 배치한 전통적인. 安中植 白岳春曉圖

수직적 구성 그리고 백악산의 표현에 미점을 사용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입체감을 살려내었다 정확, . 하게 작도한 듯이 건물을 배치한 경복궁과 해태상이 있는 광화문 앞거리의 원근 표현 백악산과 북한, 산이 보이는 실경 풍경을 보다 근대적 방식으로 전환시킨 사생화법을 보여준다 이처럼 세기 초반. 20 서양의 원근법과 입체화법은 전통적인 형식을 변화시키는 역할과 방향을 제시하였다고 생각된다.

근대적 리얼리즘 형식의 의 시사만화

. 發芽 貫齋 李道榮 :

전통회화가 형식면에서 부분적으로 근대적 변모를 보이면서도 내용면에서는 시대정신을 표출시 키지 못한 반면, 貫齋 李道榮(1884 1934)~ 같은 화가가 시사만화를 통하여 당대를 풍자한 점은 괄목할 만하다 물론 이도영의 기명절지도나 산수도의 수묵화는 전통적인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형식적으로는 다소 미숙하더라도 수묵화 모필의 맛을 살린 만화풍을 세운 점과.

12) 이구열 전통의 계승 근대한국화의 개창, , 」 ฀, 한국근대회화선집 한국화- 1 , 금성출판사, 1990.

(8)

미술사의 보편적 근대성을 상징하는 비판적 리얼리즘의 싹을 보여준다는 데서 커다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의 제자였고 당시 개화파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은 1909년부터 1910년까지

心田 安中植 李道榮

이 주도한 대한민보에 풍자화를 발표하였다 우리나라 시사만화의 효시로 꼽히는. 의 풍

吳世昌 李道榮

자화들에는 모두 부끄러운 우리 민족의 군상과 침략자 일본인에 대한 비판과 경고가 포함되어 있다.

년 월 월 대한민보에 실린 몇 개의 만화가 주목된다 남의 숭내 월 일 명색 1909 6 ~7 . < >(6 7 ), <

없이 왜 깎어>(6 9 ), <월 일 고만 자고 어서 깨라>(6 10 ), <월 일 문명적 진군>(6 24 ), <월 일 취하면 총을 함부로 쏘나 딱하군>(6 29 )월 일 등이 대표작이다.13)

의 남의 숭내 는 서양 연미복을 입고 서양 모자를 쓴 원숭이들을 그린 것이다 당시< > . 20 李道榮

세기가 시작되면서 남의 흉내에 빠진 일부 지식인과 주체성을 잃은 개화파에 대한 비판적 풍자였 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세기 말기의 풍자그림에서도 그대로 연결되어서 나타나는 것이 현재 우. 20 리가 처한 문화적 현실이기도 하다.

특히 李道榮은 그와 같은 세기가 시작되기 직전 봉건적인 우리 역사 속에서 세기 말 사회20 19 에 대한 새로운 변혁의지들이 집약된 작품들을 제작하였다는 데서 또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잠자. 고 있는 한복의 남자를 양복 입은 사람이 막대기로 건들면서 손가락을 위로 가리키는 고만 자고<

어서 깨라 는 봉건 선비를 향해 근대의식을 깨치라는 고함인 것이다 붓을 들고 진군하고 있는 지> . 식인들의 모습을 마치 병사들이 행진하는 것처럼 표현한 문명적 진군 을 통해서는 봉건성의 극복< >

과 근대화를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상대적으로 남의 숭내 는 일부 몰주체적인 개화파 인사. < >

들에 대한 비판과 시대적 풍자들을 덧붙인 사례이다.

삭발령이 내리자 양복 입고 단발한 사람이 상투를 자르려는 모습의 명색 없이 왜 깎어 에는 전< >

통의 강제적 파괴에 대한 저항정신이 담겨 있다. 20세기 초반의 조선 봉건시대로부터 근대로 넘어 오는 시점의 혼돈된 모습을 시사한 것이다 봉건적인 것을 극복해야 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 의 강제에 의해 시행되어서야 되겠는가 하는 주장을 담고 있다 문명화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봉건적인 복장의 상징인 상투 머리를 깎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가 하는, 문제제기가 표출된 작품이다.

한편 일본 제국주의의 간섭과 지배가 이루어지면서李道榮은 그에 대한 풍자만화도 빼놓지 않았 다 당시 일본군인들이 술에 취해 조선인들을 향해 총을 쏴서 죽인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그 사건. . 을 취하면 총을 함부로 쏘나 딱하군 하는 정도의 풍자로 만화화한 것이다 일본이 과연 우리를 지< > . 배할 것인가 하는 의혹 속에서 일본 군인들이 주둔하면서 우리의 생활에 깊숙이 관여하는 것에 대, 한 풍자화이다. 1909년의 급박한 정황 일본 군인들이 서울에 주둔해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이런, 폭력과 만행으로 일그러진 현실을 보여주었다 어쩌면 우리 시대 주한미군이 한국인에게 행하는 범. 죄행위와도 별반 다름없는 듯하다.

13) 구체적 내용은 최석태 이도영 예술의 근대성, 」 ฀( 근대 한국미술논총, 학고재, 1992)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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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본 제국주의의 야욕이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뱀에 먹힌 두꺼비 가 제작되었다 이 작품< > . 은 상하 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단은 뱀이 두꺼비를 잡아먹으려는 형상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2 . 침략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고 그 아래엔 역으로 뱀의 살을 뜯어먹는 새끼 두꺼비들의 좋은, ‘ 결과(善結果)’를 담아 식민지에 대한 민족의 저항과 항일운동의 승리에 대한 확신을 묘사했다 뱀에. 게 먹힌 두꺼비가 뱀의 속에서 부화해서 두꺼비 새끼들이 뱀을 다 뜯어먹고 탈출하는 모습을 통해, 자주적 삶을 이뤄 내는 방법에 대한 통쾌한 해답을 제시한 것이다 일제의 조선 지배야욕을 풍자하. 면서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우리는 살아나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세기는 일제의 식민지로 그 출발부터가 이미 불행했고 그런 가운데 근대사회로의 전환을 꾀하 20

다 보니 자본주의적인 성격의 사회로 바뀌었다 그래서. 李道榮은 근대문명의 수용과 함께 일제 침 략의 틈바구니에서 돈을 버는 사람들 즉 부르조아를 공격하였다 전차와, . 神社를 배치한 화면에‘高 이라 써넣었는데 자를 달러 로 적었다 배부른 부르조아의 사회적 불안감을 표출해

’ , ‘ ’ ‘ ’ .

腹弗安 不 弗

내는 수준의 자본주의에 대한 풍자이다.

이와 같이李道榮은 한일합방(1910)이 되기 직전 민족계몽을 위한 풍자화로 당대 현실의 전모 를 드러내었다 이런 유형의 시사만화들이. 1909년에 등장했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다 또한 이도영이 표현한 중심내용들이. 1920년대 동아일보나 언론매체 등의 만화만평으로 일부 계승되었으나 시대를 내려오면서 일제의 강압에 밀려 변절되거나 개선되지 못하였다 이런 근대적, . 리얼리즘의 회화적 수용은 1980년대 민중미술운동에 그 맥락이 닿아 있다 특히 이도영 시대의. 상황이 지금 현재 우리에게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현실을 보면 이 만화들이 첫 시사만화라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문화사적인 맥락에서 諷刺畵家 李道榮을 재평가하여야 할 일이다.

맺음말 .

조선사회가 무너지는 시기 봉건의식의 고수 신문명의 충격 식민지로의 전락에 따라, , , 19세기 말에서 세기 초 이른바 개화기 회화는 혼돈 속에서 바른 향방을 세우지 못한 듯하다 그런 가운20 . 데 채용신과 안중식의 일부 작품 그리고 이도영의 시사만화는 지금 시점에서 되짚어 보기에 충분, 한 동도서기의 성공사례로 꼽고 싶다 특히 세기 전반 일제 강점기 식민화된 회화의 경향성으로. 20 미루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채용신의 인물초상화법은. 以堂 金殷鎬(1892 1979)~ 등의 호분을 쓰는 일본화풍으로 안중식의 산수화풍 역시, 靑田 李象範(1897 1972)~ 등의 스산한 일본 남화 풍으로 그 회화적 성과가 감추어져 버렸다 또한 이도영의 시사만화에 나타난 근대적 현실 비판은. 일반 회화로 전이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개화기의 화단에서 동도서기의 실패와 조선말기 전통화풍의 답보적인 유지가 만연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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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그만큼 봉건문화의 기세가 강력한 데 있었다고 여겨진다 예컨대 고종시절 경복궁의 복원이나. , 궁중기록화의 장엄 전통을 보면 비록 몰락 직전이지만 조선왕조의 힘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 다.14) 또한 사회 전반으로도 봉건적 의식이 쉽게 깨지지 않았기에 신문화의 충격도 기존의 회화, 적 내용과 형식을 깨고 변화시키기 어려웠던 듯 하다 그런데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은 우리 근대회화의 방향성을 바르게 세우기 힘들게 만들었다.15) 거대한 문화지형의 변동이 요구되는 속에서 현실비판이나 리얼리즘 회화의 성장을 가로막은 것이다. 20세기 내내 우리 미술 계에 나타난 정체성 찾기 곧 전통형식의 근대화나 새 화풍의 소화가 모두 진부한, 時體를 형성하였 을 뿐 근대적 시대정신이 미약했던 이유는 세기의 시작이 그러했기 때문일 것이다, 20 .

14) 이태호 조선시대의 다큐멘터리 정신, 」 ฀, 월간미술, 2001.7.

15) 김윤수, 한국현대회화사, 한국일보사, 197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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