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이경부 · 이원숙 부부의 살림 이원숙 부부의 살림 이원숙 부부의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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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이경부·이원숙 부부의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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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동 옛 시장관사는 지하 1층, 지상 2층의 연회색 단독주택으로 인천광역시 중구 답동 로 12번길 10(신흥동1가 19-7)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특히 12번길 주변에는 시장관사와 비슷하게 생긴 2층 구조의 집들이 있는데, 이러한 양식의 주택들을 ‘문화주택’이라고 부릅 니다. 이 주택들은 일제강점기 당시 신흥동 일대에 건립된 것으로, 일본의 전통적인 2층 구 조의 목조 주택에 서구식 근대 건축 요소를 도입한 점이 특징입니다.

해방 후 이 주택은 일본인들이 남기고 떠난 적산가옥에서 정부의 귀속재산 처리 과정을 통해 민간인에게 매각된 이후 ‘시장관사’로 사용됩니다. 1954년~1966년간, 제6대 김정렬 (金正烈) 시장부터 제12대 윤갑로(尹甲老) 시장에 이르기까지 6명의 시장이 관사로 사용하 였기에 주변 주민들은 ‘신흥동 시장관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시장관사를 송학동으로 옮긴 이후, 이 건물은 다시 민간인에게 귀속되었습니다. 마지막 으로 이 건물을 소유했던 사람은 귀금속 상점 ‘형제사’를 운영하던 이경부 가족이었습니다.

1977년 이경부 가족은 이 주택을 매입하여 개축, 살림집으로 사용하다가 지난 2020년 여 름 인천광역시에 매각하였습니다.

이번 인천광역시 문화유산과 시사연구팀에서 발간하는 기록화보고서『신흥동 옛 시장관 사』는 신흥동 시장관사 리모델링 사업의 한 부분입니다. 인천시 등록문화재 지정을 위한 기초자료를 확보하고, 시장관사의 올바른 리모델링과 향후 활용 방향을 설정한다는 목표 로 2020년 10월부터 발간을 준비하였습니다.

이 보고서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첫 번째로 시장관사에 대한 건축학적 분석, 두 번째로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인천 관아의 변천, 세 번째로 신흥동의 형성에 대 한 역사적 고찰, 네 번째로 이경부님의 삶과 집에 대한 기억을 돌아보는 구술채록, 마지막 으로 건축도면과 리모델링 전 시장관사 내부 풍경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시장관사를 비롯한 신흥동의 단독주택들은 일제강점기 당시 도시 중산층들을 위한 주택 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주택문화는 달라졌습니다. 신흥동 일대에는 세련된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선 반면 낡고 초라해진 문화주택들은, 사람들이 선망했던 ‘좋은 집’이 라는 영광을 뒤로한 채 대부분 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보고서가 신흥동 일대 의 역사·문화적 변천양상과 과거 주택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자료로 남았으면 합니다.

덧붙여, 신흥동 시장관사에 관심을 갖고 보고서 발간에 도움을 주신 손장원·도윤수·이 연경 교수님, 구술채록에 참여해주신 이정기·이정록 두 자제분과 인천시립박물관, 사진 촬영에 참여해주신 홍승훈 사진작가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발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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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1. 이 보고서에 수록된 신흥동 관사의 내 · 외부 촬영 사진은 집필자가 직접 촬영· 편집한 사진입니다.

2. 그 외 수록된 자료, 이미지의 출처는 본문· 주석· 캡션· 참고문헌에 표기하였습니다.

손장원(인천재능대학교 실내건축과 교수) 도윤수(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연구초빙교수)

이연경(인천대학교 지역인문정보융합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

홍승훈(씨스튜디오 대표)

국가기록원 국립중앙도서관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이정기 · 이정록

(주)미래환경건축사사무소 (주)합 건설방재기술단

자 료 협 조

신흥동 옛 시장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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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흥동 시장관사의 건축적 분석 | 손장원(인천재능대학교) 07

2. 조선시대 관아의 내아와 근현대기 관사건축 |도윤수(동국대학교) 47 - 인천 지역을 중심으로 -

3. 신흥동의 형성과정과 시장관사 | 이연경(인천대학교) 67

4. 이경부·이원숙 부부의 살림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 103

5. 신흥동 시장관사 구조도면 | (주)미래환경건축사사무소 129

6. 사진작가가 촬영한 신흥동 시장관사 | 홍승훈(씨스튜디오) 139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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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신흥동 옛 시장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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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장원(인천재능대학교)

신흥동

시장관사의

건축적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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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신흥동 옛 시장관사

1. 건축현황

1) 위치와 주변현황

신흥동은 신흥동 1가, 2가, 3가로 구성된 마을이다. 1, 2, 3가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일제강점기 화정 1정목, 2정목, 3정목을 신흥동 1, 2, 3가로 바꿨기 때문이 다. 신흥동 1, 2가는 대략 서해대로 449번길을 기준으로 윗부분인 북동쪽은 육지, 그 아래인 남서쪽은 바다를 매립해 형성된 지역이다. 신흥동 3가는 전 지역이 바다 였던 매립지이다.

서해대로 449번길은 개항장에서 인천구읍으로 가는 길로 숭의동 독갑다리가 있 던 곳까지는 과거의 형태가 상당부분 현존한다.

신흥동

시장관사의 건축적 분석

손장원 (인천재능대학교)

(그림 1) 신흥동 관사와 주변 모습(1936년) 김용하 제공 · 집필자 편집

ⓐ 신흥동 관사 위치 ⓑ 화엄사(해광사) ⓒ 호리(堀) 임대건물 ⓓ 호리(堀) 별장 ⓔ 묘각사

ⓕ 인천공립심상고등소학교 ⓖ 동본원사 ⓗ 답동성당 ⓘ 부천군청 ⓙ 리키다케(力武) 별장 ⓚ 일본인 공동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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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은 옛 인천시장 신흥동 관사(이하 ‘신흥동 관사’)가 세워지기 직전 시장관 사 부지와 주변 환경의 모습이다. 시장관사 터(ⓐ)와 일본인 공동묘지(ⓚ) 사이에 위치한 언덕(ⓙ) 일대는 모두 리키다케(力武) 별장 터이다. 『인천 한 세기』(신태범, 1983)에는 그 규모가 3000여 평으로 기술되어 있다. 리키다케(力武) 별장 터와 그 앞에 위치한 녹지(ⓐ와 ⓙ 사이)는 이하영(李夏榮)의 소유였던 땅을 중국인 오례당 (吳禮堂)이 구입했다가 리키다케에게 매각한 땅이다. 1914년 토지조사부에는 오례 당의 소유로 기재되어 있다. 이하영은 외교관이자 정치인으로 일제강점 후에는 기 업인으로 변신해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은 사람이다.

ⓒ는 호리(堀) 소유의 임대용 건물로 일본식 건물이었고 그 건너편에는 호리(堀) 의 별장이 위치하고 있었다. 호리(堀)의 별장 터는 2018년까지 남아있었으나, 현 재 이 일대에는 도시형 생활주택이 들어서 과거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

ⓔ, ⓖ는 모두 일본 불교계 사찰로 건물과 대지의 모습은 변형되어 과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화엄사는 해방 후 해광사로 바뀌어 대지와 옹벽은 과거의 모습을 거의 유지한다. 주 진입로는 바뀌었으나, 원래의 진입로도 많이 현존한다. 일본식 전통양식으로 세워졌던 본전은 철거되고 현재는 우리나라 전통양식의 건물이 들 어서 있다.

율목도서관 북측경사면은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던 자리이다. 패망 후 공동묘지를 그대로 둔 채 떠났던 일본인들이 1965년 6월 22일에 조인된 한일협정에 따라 국교 가 재개된 다음 일본으로 이장해갔다. 이후 율목풀장을 거쳐 현재는 율목공원이다.

(그림 2) 신흥동 답동일대(1924년~ 26년 경) 집필자 소장

좌측부터 능선을 따라 동본원사, 리키다케(力武) 별장이 보인다. 리키다케 별장 터는 현재 성산교회, 율목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리키다케 별장 아래 경사지가 나중에 신흥동 시장관사가 들어서는 마을이다. 사진엽서에 날인된 개항 50주년(1933 년) 기념인 때문에 촬영시기에 혼돈이 생길 수 있으나, 이 사진은 그보다 훨씬 전인 1924년에서 26년 사이에 촬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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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신흥동 옛 시장관사

성산교회와 율목도서관이 들어선 자리는 정미업으로 부를 축적한 리키다케(力武)의 별장이 있던 곳이다. 대지는 율목도서관이 위치한 언덕의 남측경사면을 따라 형성 된 고급주거단지 안에 위치한다.

주택단지는 전면 도로인 제물량로, 좌측 도로인 답동로(긴담모퉁이길), 우측 도로 인 제물량로 108번길, 후면도로인 답동로 24번길로 둘러싸인 장소이다. 답동로 24 번길을 기준으로 북측은 율목동이다. 단지로의 진출입은 단지 전면도로와 접속된 제물량로 116번길, 답동로 12번길, 제물량로 108번길을 통해 주로 이뤄진다. 답동 로(긴담모퉁이길)는 북측에서 남측으로만 통행가능한 일방통행로이다. 개항로(싸 리재)와 연결된다.

신흥동 1, 2가를 가로질러 지나는 제물량로에 의해 남북이 분리되어 있다. 남쪽 은 낮은 경사와 평지인 반면 북쪽은 전 지역이 경사지로 이동은 불편하나 인천 앞바 다 조망이 가능한 장소였다. 바다조망은 정미소와 창고를 철거하고 세운 고층아파 트로 가려져 있다.

2) 입지와 대지조성

신흥동 시장관사의 위치는 인천광역시 중구 답동로 12번길 10(신흥동 1가 19-7) 이다. 신흥동 동쪽에는 선화동과 유동이 위치하며, 서쪽에는 답동과 신생동이, 남 쪽은 인천 내항지역으로 항동 7가에 속한다. 북쪽에는 율목동과 경동이다.

신흥동은 조선시대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에 속했던 지역으로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아 특별히 주목할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개항 이후에도 중구청 일대에 형성된 조계지와 떨어진 지역으로 일본인 공동묘지, 피병원 등 소외시설이 입지하는 장소 였다. 개항 이후 일거리를 찾아 타지에서 인천으로 이주한 조선인이 증가하면서 형 성된 조선인 살림집이 1930년대 중반까지 주요 경관을 형성했던 지역이다.

『대경성부대관(1936)』에 첨부된 인천지역의 그림지도를 살펴보면 이 일대는 모두 초가집 밀집지역이다. 이 그림지도는 항공사진을 바탕으로 제작된 그림지도라는 점 에서 대략 1934~5년 무렵의 인천 상황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다. 따라서 신흥동 일대에 형성된 일본인 고급주택단지는 1936년 이후에 건설되었다고 봐야한다. 본 보고서의 조사 대상 건축물인 인천시장관사 바로 옆집(중구 답동로 12번길 18)에서 발견된 상량문의 기록에 따르면 건축연도가 1938년 5월이다. 자연마을 형태의 땅 에 도로를 새로 개설하고 택지로 개발한 지역이나 도로 구조와 가구 구성 등이 토지 구획정리사업을 통해 형성된 주택단지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주택단지의 형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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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방법 등을 밝히기 위해서는 이에 필요한 자료 확보가 우선되어야 한다.

토지조사부와 지적도에 기록된 화정 1정목 20번지는 도모나가 후지사와(友永藤 市) 소유로 면적은 1,412평이다. 1914년 당시 도모나가, 무라타니(村谷吉藏), 프랑 스인 테네(거주지 寺町), 경인기업주식회사(소재지 경성부 남문통 4정목)가 이 일대 토지 전부를 소유하고 있었다. 토지조사부가 완성되는 1914년 무렵 지목은 대지이 나 내부도로 구획, 대지분할 등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이다.

과거 이 주택단지로의 진출입은 신포동, 동인천역 일대를 지나 싸리재를 거치는 통행량이 많아 긴담모퉁이길과 연결된 길을 통해 이뤄졌다. 그러나 현재는 일방통 행로라서 이 길을 통해 단지로 진입하는 동선은 적다. 주 동선은 단지 아래에 위치 한 제물량로와 접속된 도로를 통해 이뤄진다.

긴담모퉁이길에서 경사로를 따라 올라오면 좌측에는 주택이, 우측에는 옹벽이 위 치한다. 긴담모퉁이길과 만나는 단지 초입에서 약 40m 떨어진 지점에 삼거리가 있 고 그 삼거리에 면한 대지에 신흥동 시장관사가 입지해있다. 삼거리에서 대지를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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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신흥동 옛 시장관사

라보는 방향에서 우측 길은 하향경사로이고, 좌측 길은 표고차 없이 연속한다. 단 지 내 다른 대지는 내부도로와 한 면만 만나도록(모서리필지 제외) 획지가 이뤄졌으 나, 이 대지는 단지 내 도로와 3면이 접하며, 필지규모도 다른 필지보다 크다.

도모나가 후지사와(友永藤市)가 토지를 소유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각사등 록』의 기록에 명확하다.『각사등록』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1900년 당시『각사등록』은 이 일대의 지명을 신흥동(新興洞)으로 표기했다. 해방 후 이러 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해 지명을 신흥동으로 정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동안 신 흥동은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의 일부로 1903년 화개동(花開洞)이란 지명을 갖게 되 었고, 1910년대 행정구역 개편으로 화개동 일부, 신창동, 와정동 일부를 합쳐 화정 1, 2, 3정목이 되었다. 해방 후 일제식 지명인 화정(花町)을 새롭게 흥하라는 의미 로 신흥동으로 정했다는 정도였다.『각사등록』의 기록이 1900년 1월 16일자이므

(그림 4) 신흥동 1가 토지소유자(1914년 토지대장) 국가기록원 지적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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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1903년 화개동이란 지명으로 바뀌기 전까지 이 일대의 지명은 신흥동이었다.

신흥동 관사가 위치한 땅은 원래 이원영(李源永)의 소유로 1897년 전당포를 운영 하던 박영진(朴永鎭)이 매수한다. 이 땅에는 조선인들이 매달 2전의 임대료(지세)를 내고 집을 지어 살던 곳이다. 박영진은 주민들이 지세를 납부하지 않고 버티자 여 러 차례 지세납부를 독촉했다. 그래도 임대료를 내는 사람이 없어 일본인 도모나가 후지사와(友永藤市)에게 1,700여원에 전매한다. 땅이 일본인에게 넘어가자 조선인 들은 자신의 집이 철거될 것을 염려해 인천감리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기에 이른다.

인천감리 하상기는 민원을 들어 조사한 결과 이미 매도된 땅을 원상복구하기 어렵 다는 판단 아래 외부(外部)1)에 처리방법을 물었다. 또한 박영진도 외부에 자신의 입 장을 설명하는 공칭(供稱)을 올린다. 외부는 인천감리 하상기에게 원만하게 처리할 것을 주문한다.

이에 따라 하상기는 토지소유주 일본인 도모나가 후지사와(友永藤市)와 해당 동 민이 만나 해결방법을 논의하도록 조치한다. 도모나가 후지사와와 동민은 매달 매 칸 12문을 임대료로 납부하고, 조선인 가옥을 철거할 때에는 시가에 상응하는 금액 을 치른 다음 철거하기로 계약한다.

도모나가 후지사와(友永藤市)는 인천 개항 다음 해인 1884년에 인천으로 이주한 나가사키 현 출신의 금전대부업자이다.2) 총 20개 구역으로 구성된 인천시내 위생조 합 중 18번 구역에 속해, 1908년 9월 부조합장으로 재선되었다.3) 일본은 1900년 3 월 오물소제법을 제정하고, 일본 국내는 물론 외국에 위치한 거류지에 거주하는 일 본인에게도 이를 적용했다. 인천 일본영사관은 1906년 6월 10일 위생조합규칙을 제정하고, 각 호를 조합원으로 총 20개 위생조합구역으로 구성하고, 구역별로 위 원을 선출하였다. 조합위원은 담당구역을 순찰하여 종두실시, 전염병예방, 하수도, 청소 등을 감독했다.

1)현재의외교부에해당하는중앙부처로개항장을관할하던감리서는외부소속지방관서였다.

2)『조선신보』1907년10월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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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신흥동 옛 시장관사

[국역]

光武四年一月十六日

서명 仁川報牒 各司謄錄 6 문서발신자 인천항감리 河相驥 문서수신자 외부대신 朴齊純 생성일 1900-01-16

상위자료 仁川報牒 2, 各司謄錄 6

1900년 1월 16일 보고서 제4호

인천항 신흥동(新興洞) 거민 왕제명 등이 1월 14일에 가지고 온 외부의 지령내 용에 ‘그들이 조사를 간절하게 원한 즉 저절로 밝혀질 수 있을 것인데 남에게 책임 을 전가하니 부당하여 이렇게 날씨가 찬대도 와서 호소하니 그 정상을 깊이 살펴봄

(그림 5) 『각사등록』(1900년 1월 16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 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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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딱하기 그지없더라. 그 박가를 끌어와 대질케 하여 일을 바로잡고 그 땅의 형태 를 속히 알려줄 것’ 등이었습니다. 이를 조사해보니 해당 지역은 원래 이원영(李源 永)의 소유였던 것을 박영진(朴永鎭)에게 전매한지 3년이 지났는데 그 땅에 살고 있 는 사람이 일체 소작료를 내지 않았기에 작년 봄에 박가가 원래 가격대로 반환하겠 다고 누차 언급하여도 살고 있는 사람이 끝내 듣지를 않았기에 박가가 어쩔 수 없이 일본인 도모나가 후지사와(友永藤市)에게 1,700여원에 전매한 사실은 대질 장소에 서 명확하게 밝혀졌습니다. 그에 따라 그들이 처음 지세를 내지 않고 끝내 상환하 지 않고 있다가 다른 이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후에 이를 호소한 것이니 실제로 행하 기 어려운 바일 뿐더러 장차 원래 가격이 600원이라 1,700여원의 땅값으로 돌려주 고 싶어도 일본인이라 필시 양도할 리가 없고, 그들이 신흥동 관사를 부술까 걱정 하여 이렇게 괴로움을 호소하니 그 정황을 되돌아 보건데 역시 불쌍하고 가엾지만, 일본 영사의 서면 협의가 날이 갈수록 번거로워지니 답답함을 감출 수 없습니다.

박영진이 꾀를 내어 숨어 다니고 있기 때문에 잡아오기가 어려운 일이지만, 도면을 손에 넣었거니와 해당 안의 선후지책이 차질 없이 실시되었기에 보고하오니 살펴 보시와 지령의 처리를 결재하심을 엎드려 바라옵니다.

1900년 1월 16일

인천감리 하상기(河相驥) 의정부찬정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각하

지령 제8호

올린 뜻을 살펴본 즉 민습(民習)이 놀랄 만하나 해당 토지를 이미 원래 가격대로 양도하려 했다가 어쩔 수 없이 타인에게 전매했다 하니 박가가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었는지를 묻고 꾀를 내어 피하지 않겠다고 했다하니 와서 보이기를 기다려 다시 조사를 행하여 일을 바로잡도록 하여 해당 민 등으로 뒷말이 없도록 할 것

1월 20일

(18)

16 신흥동 옛 시장관사

[국역]

光武四年四月九日

서명 仁川指訓 各司謄錄 6 문서발신자 외부대신 朴齊純 문서수신자 인천감리 河相驥 생성일 1900-04-09

상위자료 仁川訓令 5, 各司謄錄 6

1900년 4월 9일 기안 주임, 통상국 과장 ㊞ 대신, 협판 ㊞, 비서과장 훈령 제17호

(그림 6)『각사등록』(1900년 4월 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 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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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항에 살고 있는 박영진의 공칭(控稱)에 의거하면, “본인이 4 ~5년 전에 인천 항 신흥동에 와서 전당포를 업으로 하여 살고 있었는데 신흥동의 땅이 일본인 히구 치(樋口)에게 매매되었기에 본인이 지난 정유년(1897년)에 비싼 값에 매수하여 지세 를 매달마다 엽전 2전으로 정하여 몇 달을 받아왔는데 그 후로는 이 핑계 저 핑계로 일체 지세를 내지 않았기에 작년 봄에 본인이 원래 가격대로 다시 양도하겠다고 누 차 동민에게 언급했었지만 동민 등이 끝내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어쩔 수 없이 일본인 도모나가 후지사와(友永藤市)에게 전매(典賣)하였는데 전매 기한이 이 미 지났기에 독촉하였습니다. 따라서 원래가격 800원에 작년 10월 원가와 이자를 합한 가격 1,793원이어서 해당 토지계약을 그 가격으로 체결하였습니다. 해당 동민 이 당초에 원래 가격대로 거래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고, 다른 이에게 땅을 넘긴 후 에 600원으로 1,300여원의 물건을 취하려 한 것으로 나라 전체에 송사를 일으키니 근거 없이 일이 커진 것입니다. 본인도 우리나라의 국민으로 장차 우리나라 토지가 외국인 소유로 되는 것이 어찌 좋은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인천항 재판소로 누 차 대질조사를 받고 누가 옳고 그른지를 분별하기 어려운지라 해당 동민 등이 방책 을 세우기를 희망하여 외부에 상소하였습니다. 감리서 보고 지령 내용에 옳고 그름 이 이미 드러났기 때문에 해당 동민이 서로 말하기를 나는 옳고 상대는 잘못되었다 하고, 무리를 이뤄 크게 이야기하니 언행이 망령됨이 자못 심하여 세상이 어찌 헛됨 무리의 속 마음과 같이 되겠습니까? 또 일본인 도모나가가 다시 계약을 해달라고 독 촉하니 곤경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상세히 통촉하신 후 감리서에 특별 히 훈령을 내리셔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일을 바로 잡아주옵시되, 그동안 내지 않 은 세전을 모두 추급해주시고 토지계약을 문서대로 하게 해주셔서 혈혈단신 남은 목 숨을 보존케 해주시기를 엎드려 비옵니다.” 라고 하여 조사에 의거하여 전에 보고한 내용 중 동민의 근거 없는 설명은 잘못을 밝혀내고, 소유권 계약의 문서는 이쪽의 옳 음을 밝히는 것으로 삼아 마땅히 제발(題發)을 거쳐야 하는 것인데도 어찌 일을 바로 잡지 못하여 이렇게 소송까지 오게 된 것인가? 신속히 판결을 집행하고, 아울러 계 약을 바꾸어 다시 번잡하고 시끄럽지 않게 함이 옳을 것이다.

1900년 4월 9일

의정부 찬정 외부대신 박제순 인천항감리 하상기 좌하

(20)

18 신흥동 옛 시장관사

[국역]

光武四年五月八日

서명 仁川指訓 各司謄錄 6 문서발신자 인천감리 河相驥 문서수신자 외부대신 朴齊純 생성일 1900-05-08

상위자료 仁川報牒 2, 各司謄錄 6,

1900년 5월 8일 보고서 제19호

인천항 상민 박영진의 공칭(供稱)을 근거로 보내신 외부 제17호 훈령을 봉진하온 즉, 내용에 전에 보고서 중 “동민의 근거 없는 설명은 잘못을 밝혀내고, 소유권 계 약의 문서는 이쪽의 옳음을 밝히는 것으로 삼아 마땅히 제발(題發)을 거쳐야 하는 것인데도 어찌 일을 바로 잡지 못하여 이렇게 소송까지 오게 된 것인가? 신속히 판

(그림 7) 『각사등록』(1900년 5월 8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 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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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을 집행하고, 아울러 계약을 바꾸어 다시 번잡하고 시끄럽지 않게 함이 옳을 것 이다.” 라고 하셨음에 해당 동민들에게 좋은 말로 타일렀는데 해당 동민들이 청원 하기를 매수업주에게 계약하되, 소유 건물을 매달 매 칸의 세전을 12문으로 정하고 철거의 비용은 논하지 않고 해당 토지에 대해서는 시가에 준하여 셈을 치른 후에 철 거하기로 모두 모여 약속하여 계약을 다시 맺기로 타결하였습니다. 등의 말에 근거 하여 일본인 도모나가 후지사와(友永藤市)와 해당 동민이 회동하여 계약한 뒤, 토 지계약을 바꾸었음을 보고하오니 사정을 살펴주시기를 엎드려 바라옵나이다.

1900년 5월 8일

인천항감리 하상기 의정부찬정 외부대신 박제순 각하

지령 제25호

모든 사람이 타당한 방법으로 계약을 체결함에 따라 송사가 끝날 것이니 역시 다 행이다. 보고와 같이 시행할 것.

5월 11일

3) 매입과 개축

가. 개요

매입과 개축과정을 기술한 이 단원은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이 이경부 선생의 자제 인 이정기, 이경록씨와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나. 매입과정

직전 소유주인 이경부 선생은 송림동 73번지에 살다가 1954년 무렵 송림동 210 번지로 옮겼으며, 1971년 신흥동 시장관사 아랫집으로 이사했다. 이 집에서 7년을 생활한 뒤 1977년 비로소 매입을 마치고 개축공사를 거쳐 1978년 7월에 입주했다.

시장관사를 매입하려 했으나, 저당권이 설정되어 있어 이를 해결하고 매입했다. 인 천시장관사를 송학동으로 옮긴 뒤 남은 건물은 민간에 불하되어 대한제분을 포함해 3 ~4곳이 저당을 설정한 상태였다. 저당권을 모두 해결한 다음 이경부 선생의 생 일인 1977년 9월 15일 부터 개축공사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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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신흥동 옛 시장관사

2. 건축적 분석

1) 입면구성과 양식

가. 외벽 마감

신흥동 관사 내외부 마감의 특징은 백색 본타일 도장이다. 본타일은 도료를 몰탈 건에 넣어 뿌려 도포하는 방식으로 1980 ~ 90년대 많은 건축물에 시공되었다. 본 타일 도장은 건축물 내외부 벽면에 도료를 뿌려 요철무늬를 만들어 입체감을 준다.

도장대상 표면에 색깔을 입히는 일반적인 도장방식과 달리 입체감을 주며, 건물의 방수, 방습기능도 높인다. 도료는 백시멘트, 석분, 조개가루 등이 주재료로 성분과 희석제에 따라 수성 본타일, 아크릴 본타일, 에폭시 본타일, 탄성 본타일이 있다.

수성 본타일은 실내공간(내벽, 계단, 복도)에 시공하고, 외부에는 아크릴 본타일, 에폭시 본타일을 바른다. 도장 후 2시간 이내에 표면을 희석제(석유, 시너)로 바르 며 고무롤러나 플라스틱을 이용해 눌러 튀어나온 부분 일부를 평평하게 만드는 누 름기법과 도장면 돌출부의 둥근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는 방법이 있다. 옛 인천시장 관사에는 누름기법이 적용되었다. 본타일의 색상은 백색이 많으나, 안료를 섞으면 여러 가지 색상이 가능하다.

본타일을 시공할 표면은 함수율 6%이하로 말라야하며, 무늬 크기는 스프레이 압 력, 희석점도, 노즐구경 등에 따라서 차이가 생긴다. 흡수성이 적어 물청소가 가능 해 청소가 용이하나 요철부위에 먼지가 올라앉을 수 있고, 누수가 발생하면 도장면 이 떨어진다.

외벽 4면 중 우측 벽(정원에서 건물을 보는 방향으로)만 본타일로 마감하고 다른 벽체 3면은 판석으로 마감했다.

석재는 인류가 오래 전부터 사용한 건축자재로 목재만큼이나 역사가 깊다. 강도 가 크고 불에 타거나 썩지 않는 건축자재로 기념비적 건축물이나 조형물을 제작하

(그림 8) 본타일 표면처리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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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담장 빗물 배출구

하부는 토기관으로 건축당시에 설치한 우수 배출구로 보이며, 상부는 PVC관으로 보수공사 시 설치한 우수 배출구이다.

는 주요 재료였다. 그러나 채취와 가공에 많은 비용과 공력이 들어가기 때문에 일 반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자재였다. 살림집 건축에 쓰기에는 어려움이 많아 사용범 위가 기단, 계단, 섬돌과 같이 제한적이었다.

1970년대 무렵부터 석재의 채취가공 기계 발달로 석재를 손쉽게 다룰 수 있게 되 어 일반 건축물에 널리 사용된다. 공급되는 제품은 판석으로 마감재로 쓰인다. 과 거에는 벽체를 구성하는 구조재로 쓰이던 석재가 마감재로 바뀐 것이다. 판석을 시 멘트 몰탈을 이용해 벽체에 부착하는 방식으로 시공이 이뤄졌다.

신흥동 관사에서는 일본식 흙벽 외부에 바탕목을 설치하여 단열재를 넣고 그 위 에 판재를 대고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정원에서 주택을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우측 벽은 본타일로 마감하고 다른 벽 3면은 판석으로 마감했다. 보수공사 시 벽체 외부에 단열재로 유리섬유를 넣었을 것으로 본 이유는 단열보강이 필요하지 않은 2 층 엔가와 바닥을 뜯어보니, 하부에 위치한 눈썹지붕 위에서 유리섬유가 발견되었 기 때문이다. 외벽을 보강하면서 벽체두께 증가로 기존의 선홈통을 제거하고 새로 설치했다. 외벽의 PVC 우수관과 토기관이 우수 배수방법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 려준다. 지붕에서 선홈통을 타고 내려온 빗물이 땅속에 묻힌 토기관을 통해 배출되 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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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신흥동 옛 시장관사

나. 정면

일본식 주택 정면은 엔가와(緣側)를 두른 유리문이 전체적인 모양을 형성한다. 신 흥동 관사에서도 정원에 면한 정면은 유리문이 외관을 만든 주요 건축요소이다. 보 수공사로 일본식 유리문 대신 1층은 스테인리스로 문틀과 문짝으로 2층은 알루미 늄 새시 틀을 만들고 유리는 페어글라스를 넣어 단열성을 높였다. 1층 모두 개폐가 불가능한 고정창인 반면 2층은 좌우 일부에 들창(Awning)을 달아 환기를 고려했 다. 그러나 2층 전면벽을 통해 들어오는 태양열로 데워지는 2층을 식히기에는 부족 했을 것이다. 2층은 여름철 무더위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석재 마감은 벽체 하부는 넓은 판석을 둘러 기단처럼 보이도록 하고, 벽체는 판석 을 가로방향으로 부착했다. 벽체 모서리와 안방 창문 주위에는 긴 판석을 수직으로 세워 마치 판석이 아니라 각형 석재로 시공한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1층 엔가와 앞 에 테라스를 달고 실내에서 바로 정원을 출입할 수 있도록 출입문도 설치했다.

정면의 전체적인 입면구성은 페어글라스와 문틀이 전반적인 외관을 형성하며 기 단부과 안방 외벽에 두른 석재가 부 요소로 작용한다. 아울러 1층, 2층 게야(下屋) 와 서까래, 2층 엔게타(緣桁)가 일본전통가옥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2) 평면구성과 구조

가. 개요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1920년대에 일본의 국가 경제력이 향상되자 일본인들 은 서양문물을 과거에 비해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적으로 소비하기 시작한다.

‘문화’라는 이름이 붙은 서양문화는 일본인들의 일상생활 깊숙이 들어가 주거문화 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서양의 주생활 방식을 받아들인 소위 ‘문화주택’이 빠른 속 도로 퍼져나갔고, 우리나라에도 들어온다.

옛 인천시장관사(신흥동)가 들어선 주택단지에 세워진 주택의 상당수도 문화주택 에 해당하나 이 집은 일본 전통 목조건축 양식에 충실하게 지어졌다. 문화주택에는 오오카베(大壁)가 주로 적용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평벽(平壁)이라 한다.

오오카베는 서양문화의 영향을 받은 양식으로 벽의 마감면을 기둥보다 바깥에 두어 기둥이 드러나지 않는다.

일본 전통 벽체로 인식하는 신카베(眞壁)는 우리나라에서는 심벽(心壁)이라 한다.

오오카베는 서양식 주택, 신카베는 일본 전통 주택으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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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시장관사(신흥동)는 보수공사로 외벽을 판석과 본타일로 마감해 외벽에서 는 오오카베인지 신카베인지 판별하기 어렵다. 1층 전체를 미장합판으로 둘러 1층 내부에서도 판별이 어려우나, 1, 2층을 연결하는 계단벽에서 신카베집이라는 사실 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다. 또한 지붕 속으로 노출된 벽체 상부에서 대나무를 쪼 개 신카베를 만든 흔적이 보인다.

한국에 사는 일본인에게 방한(防寒)문제는 경제문제인 동시에 위생과 직결된 문 제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했다. 일본 전통주택에서 사용하는 흙벽으로 만든 신 카베는 방한을 해결할 수 없었다. 방한 상 가장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부위는 흙벽 과 기둥이 만나는 곳의 틈새였다. 이 틈새를 통해 들어오는 한반도 겨울 추위는 조 선에 사는 일본인에게는 엄청난 고역이었다. 흙벽 대신 벽돌이나 블록을 이용한 오 오카베는 방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으로 많은 주택에서 이를 채용했 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반도에서 벽돌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발행된 건축전문잡지인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에 실린 건축재료 관련 기사에서 벽돌을 다룬 내용이 가장 많다. 그러나 옛 인천시장관사(신흥동)는 그러 한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다. 1932년경에 세워진 이케마쯔 상점(현 인천광역시건축 사회관)은 목조 흙벽의 신카베이다. 한반도의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일본 전통 목구 조 건물을 세운 건축주의 면면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2층 주택에서 1층은 가족이 어울리는 공간인 거실, 식당과 외부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을 배치한다. 이러한 평면구성은 일본 주택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 1층에는 부엌, 식당, 차노마(茶の間)를 두고 2층은 다다미방을 여러 개 두어 침실로 쓴다. 신 흥동 관사는 그러한 평면구성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1층에 침실을 배치하고 2층은 전체를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인 자시키(座敷), 차노마를 두었다. 2층에서 침실로 사 용되었을 만한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 1층에서도 주택의 크기에 비해 침실로 사용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공간은 안방과 거실방 2개 정도에 불과하다. 이러한 방식은 일반적인 주택에서는 드문 사례이다. 평면구성은 보수공사로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원래의 난방방식 또한 보수공사로 바뀌어 확인이 어렵다. 일본과 달리 추위가 심 한 한반도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난방장치가 필요했다. 개항 초기에는 난방을 고 려하지 않은 주택도 지어졌지만, 신흥동 관사가 지어질 시기인 1930년대 후반에는 일본식 주택에서도 온돌을 채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시기는 서양식 주택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화양절충식 문화주택이 유행하던 시기로 신흥동 관사도 그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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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신흥동 옛 시장관사

영향 하에 있었기 때문에 서양건축요소가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림 10, 11) 그러나 이 주택의 전체적인 평면구성이나 구법은 문화주택 등장 이전에 많이 지 어졌던 일본 중류층 생활주택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신흥동 관사의 평면은 일본전 통건축을 기반으로 서양건축요소를 수용한 방식이다. 원형은 직전 집주인이 실시한 대규모 보수공사로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다만, 가사도우미 방으로 사용되는 공간에서 벽을 경사지게 처리하고 데마도(出窓)를 설치한 것은 서양건축 요소이다.

신흥동 관사의 난방은 증축한 지하실에 설치한 기름보일러에서 공급되는 온수를 이용한 난방이다. 거실, 욕실 등에는 라디에이터 난방이, 안방을 비롯한 침실은 바 닥에 온수파이프를 깐 온수파이프 난방이다. 2층 자시키에는 별도의 난방시설이 보 이지 않는다.

여름철 냉방은 필요한 공간에만 에어컨을 설치해 열기를 낮췄고, 2층에는 에어컨 이 없다.

거실과 서재는 플로어링 블록과 미장합판, 장식목재로 상당히 고급스럽게 꾸몄으 나, 부엌, 침실 등 가족 구성원 중심 공간의 마감은 저가 재료로 시공했다. 침실 바 닥은 한식종이장판 문양의 모노륨을 깔았고, 부엌 바닥도 모노륨이다. 벽에는 종이 벽지로 도배해 고급주택이라는 이미지를 반감한다.

(그림 10) 코마고메센다이쵸(駒込千駄木)의 집 (그림 11) 住宅誌 競技設計 1등 당선작(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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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 정면

(그림 13) 공간별 바닥마감재의 종류

3) 1층 평면구성

가. 현관

대문을 거쳐 석재 판석을 깐 마당을 지나면 현 관포치와 만난다. 현관포치 크기는 2700×1600㎜

로 지름 200㎜ 석조 원형 기둥 2개가 상부 슬래브 를 지지한다. 석조원형 기둥 하부는 사각형(300×

300㎜)이며 상부에는 연꽃을 양각한 주두가 있다.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면 바닥을 석판 으로 마감한 안목치수는 1900×1800㎜의 공간에 도달한다. 이곳은 일본 전통가옥의 도마(土間)로 우리나라의 봉당(封堂)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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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체는 징두리벽과 상부벽으로 구성되며, 징두리벽은 벽돌모양의 판재마감, 상부 벽체는 본타일 마감이다. 현관에는 석재 사용이 두드러진다. 바닥마감 판석, 현관문 문설주, 상방, 계단이 돌이다. 신발장(750×1420㎜) 상부에는 분전반을 두었다.

상부 벽체와 천장이 만나는 곳은 몰딩으로 장식했다. 이 몰딩은 석고몰딩 위에 벽 체와 같이 본타일을 도포한 것으로 보인다. 현관문은 문 상부에 인방을 대고 그 위에 채광효과를 높이기 위해 고창을 설치했다.

1층 바닥은 현관에서 석재 계단(式台, 시키다이) 2단(첫 단 높이 220㎜, 둘째 단 165㎜)을 오른 곳에 위치한다. 현관 바닥에서의 바닥높이는 385㎜이다. 현관을 오르 면 정면과 우측에 벽이 있고, 좌측에는 복도가 있다. 징두리벽 높이는 760㎜이다.

나. 복도

현관에서 계단 2단을 오른 높이에 위치한 공간으로 바닥에는 플로어링 블록(300

×300㎜)을 깔았다. 이 공간의 크기는 1900×3150㎜로 넓은 편이나, 진출입 외 특 별한 용도가 없어 공간규모에 비해 기능은 작다. 거울이 달린 우측 벽은 원래 이곳 에서 안방으로 사용하는 공간을 출입하는 문이 달렸던 곳으로 크기는 폭 1700㎜, 높이 2400㎜이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몸을 틀면 1층 거실로 연결되는 복도 시작점(폭 850㎜, 깊이 940㎜)에 해당하는 공간이 있다. 이곳은 크기에 비해 가장 많은 동선이 겹치는 공 간으로 크기에 비해 쓸모가 과도하다. 이곳을 통과하는 동선은 현관 진출입, 거실 진출입, 2층 진출입 계단, 화장실 진출입 4개이다. 신축 당시부터 여러 동선이 겹치 는 공간에 안방으로 통하는 출입문을 막아 안방 출입동선까지 이곳을 거쳐 거실을 지나가도록 해 동선이 더욱 복잡해졌다.

(그림 15) 현관 각부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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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택을 시민에게 개방할 경우 이 공간에서 이뤄지는 동선 처리를 효율적으로 분배하지 않으면 단체관람객 방문으로 여러 사람이 움직일 경우 문제 발생 가능성 이 있다.

다. 화장실

화장실 출입문은 미닫이문으로 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세면기와 소변기가 설치되 어 있고, 그 안쪽에 위치한 대변기는 별도의 문을 분리했다. 대변기 외벽에는 하부, 중간, 고창까지 창문 3개를 달아 환기를 고려했다. 고창에는 현대식 문양의 투각이 부착되어있다.

라. 거실과 서재

현관과 이어진 복도와 거실 사이에는 상부를 반원 아치로 꾸민 알루미늄제 중문을 달았다. 중문은 거실 이 아늑한 분위기 형성에 기여하며, 냉난방 효과를 높이는 요소이다.

거실과 서재로 썼던 공간은 후스마 칸막이가 설치 된 다다미방 3개를 배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재 와 엔가와가 면한 벽 상부에 남아 있는 란마(欄間)가 이를 반증한다. 거실과 연결된 엔가와에는 란마의 흔 적이 보이지 않는다. 거실에서 가장 높은 부분의 천 정 고는 2940㎜이다.

거실은 원래 복도, 다다미방, 엔가와였던 공간을 하 나로 묶어 만든 공간이다. (그림 17) 좌측 벽 앞은 복도, 좌측부(천정 모양이 다른 부 분)는 엔가와였고, 그 사이에는 장지문이 달린 다다미방이 있었을 것이다.

신흥동 관사에는 2종의 투각장식이 있다. 하나는 란마에 사용된 투각이고, 다른 하나는 집 주인이 일 본에서 구입해와 라디에이 터 덮개, 화장실에 설치한 투각장식이다.

(그림 16) 입구부

정면은 거실 출입문, 좌측은 화장실 출입문, 우측은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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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출입문 상부 란마는 서재를 만들면서 원래의 것을 잘라 설치한 것으로 보이 며, 현재 크기는 높이 380㎜, 폭 1250㎜이다.

거실벽은 미장합판으로 마감하고 하부에는 걸레받이, 천정과 만나는 부분에는 몰 딩을 두었다. 천정은 쪽매널을 낮은 기울기를 갖는 경사로 마감하고 중앙부에는 샹 들리에를 달았다.

거실에는 크기가 다른 기둥 3종이 있다. 엔가와 측에는 크기 90×90㎜의 기둥과 유리문틀 110×110㎜이 단일부재처럼 붙은 기둥, 엔가와와 거실 사이의 기둥과 현 관 복도와 거실 사이의 기둥은 기둥 주위를 미장합판으로 둘러 기둥 크기를 확인하 기 어렵다. 미장합판으로 마감한 상태에서의 크기는 각각 155×280㎜, 140×160

㎜이다. 서재 천정 고는 2770㎜이다.

이경부 선생 자제의 증언에 따르면 1층과 2층 바닥 사이에 공간이 있어 다락방처럼 사용하던 공간을 1977년 개축공사 시에 철거하고 현재와 같이 천장을 높였다 한다.

마. 안방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2단의 돌계단을 오르면 안방으로 연결되는 전실로 진입하 도록 배치된 평면을 보수공사 시 바꿨다. 현재는 중문을 지나 거실을 거쳐 출입하 는 동선이다. 현재 출입문은 엔가와가 있던 곳에 설치한 문이다. 방문 바로 앞에는 정원으로 나갈 수 있는 출입문을 달았다. 이곳에서도 정원 진출입 동선과 안방 진 출입 동선이 교차한다.

안방은 안방, 피팅룸, 욕실 3개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집주인의 프라이버시를 철 저히 보장하도록 구성했다. 남향벽(정원측)과 서향벽에 창문을 두어 하루 종일 해 가 드는 채광효과도 뛰어난 방이다. 2층 진출입이 이뤄지는 계단 하부공간에는 오

(그림 19) 엔가와 측 기둥과 유리문틀 집필자 작도

(그림 18) 1층 엔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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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레와 금고를 두었다. 금고는 집주인이 운영하던 금은방 형제사에서 거래하던 중요 물품을 보관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바닥은 한식장판 문양의 모노륨 을 깔았고 벽에는 종이벽지를 도배했다. 계단 하부에 설치된 오시이레만으로는 수 납이 충분하지 않아 자개장롱과 반닫이를 두었고, 화장대도 있다.

안방과 욕실사이에 설치된 피팅룸은 원래 현관과 연결된 공간으로 안방 전실로 세워진 공간이며, 천정 고는 2440㎜이다.

일본주택의 일반적인 평면구성에서 서재는 다른 공간을 경유하지 않고 현관에서 바로 출입하도록 배치한다. 따라서 안방의 원래 용도는 서재 또는 응접실로 지어졌 을 가능성이 많다.

바. 거실방

북측 외벽에 면한 방으로 단열성능에 따라 웃풍이 많이 발생할 수 있는 공간이다.

천정 고는 2515㎜이며 특별한 내용은 발견하지 못했다. 바닥은 모노륨, 벽은 종이 벽지 마감이다.

사. 지하실

지하실로의 진출입은 서재를 지나도록 동선이 이뤄지며 정원으로 나가는 문도 달 려있다. 지하실은 엔가와 하부공간과 거실 하부공간 2개로 나눠져 있으며, 구조는 철근콘크리트 슬래브조로 보인다. 벽체는 시멘트 몰탈 위에 수성페인트로 마감했으 며, 하부 징두리벽은 회색, 상부벽은 흰색이다. 계단 단 높이는 250㎜, 270㎜, 300

㎜로 불규칙적이다. 정원방향으로 창문을 달아 환기와 채광을 고려했으며, 수도를

(그림 20) 안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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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실 증축공사는 의문이다. 가족의 말에 따르면 매입 후 증축공사를 실시해 현 재와 같은 형태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상부 구조물을 안전 하게 지지할 수 있는 장치를 설치한 다음에 땅을 파내고 지하에 철근콘크리트 구조 물을 구축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상부 구조물의 안전에 영향이 발생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공사 난이도가 높고, 건축비도 신축보다 많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가지 위험과 높은 공사비를 안고 진행한 지하실 구축공사이 다. 엔가와 하부공간은 1층 바닥보다 1890㎜ 낮고, 거실 하부공간은 2420㎜가 낮 다. 엔가와 하부 천정고는 1810㎜, 거실하부 천정 고는 1984㎜이다.

이경부 선생의 두 자제는 이 집의 지하공간은 1977년 개축공사 시 조성했다고 증 언한다. 그리고 2006년 당시 필자가 이경부 선생을 만났을 때 같은 말을 했다. 기 존의 목조건물 하부에 지하공간을 굴착하는 공사는 난이도가 높은 작업으로 쉽사리 이해하기 어렵지만, 거주자의 증언을 기록한다.

아. 가사 도우미방

서재를 경유해 진출입한다. 본채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공간으로 썬큰(sunken) 양식의 창문이 있어 채광효과가 좋다. 벽을 경사지게 처리하여 썬큰을 설치하는 수 법은 요코하마, 고베 등지에 일본 개항장에 세워진 서양인 주택인 이진칸(異人館) 을 통해 일본에 전래된 방식이다.

보통 서양식 주택에서 썬큰 룸은 식당으로 사용하기 위해 설치하므로 건립 당시 에는 비슷한 용도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 원래 다다미방이었을 서재와 복도를 통

(그림 21) 지하실 공간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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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바로 진출입이 가능하고, 부엌과 인접한 공간이라는 점이 그럴 가능성을 높인 다. 보수공사를 거치면서 부엌에 식탁을 두고, 부엌과 인접한 방의 특성을 고려하 여 가사 도우미방으로 전용한 것으로 보인다.

자. 부엌

현대식 키친 시스템 부엌으로 키친 주변 벽체는 타일로 마감했고, 다른 벽면은 비닐 페인트(상부 흰색, 하부 회색)를 도장했다. 천정은 벽지를 발 랐고 바닥은 모노륨 마감이다. 복도부분은 플로 어링 블록이고, 하부에는 저장 공간을 두었다. 천 정 고는 2650㎜이다.

부엌에는 외부와 연결된 출입문이 있다. 이 출 입문은 주부현관·부현관으로 불리는 문으로 외 부에서 들여온 조리용 식자재를 바로 부엌으로 반입하도록 설치한 문이다.

차. 욕실

부엌에서 계단 3단을 내려가도록 해서 부엌바닥보다 550㎜ 낮다. 공간 전체를 타 일로 마감한 타일공간이다. 바닥은 브라운색, 벽은 백색 타일을 시공했고, 천정(높 이 1867㎜)은 하늘색 모자이크 타일이다. 욕실이나 샤워기, 욕조는 없고 수도시설 만 갖춘 상태로 간단한 샤워가 가능한 정도이다. 증축공사로 생긴 공간으로 사다리 꼴 모양이며, 욕실로는 규모가 큰 편이다. 김장, 잔치 등 조리해야 할 음식량이 많 을 경우 다듬질, 세척 등의 용도로 전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림 22) 가사 도우미방 창틀 중간대 디테일 (그림 23) 창틀 중간대 형태와 크기 집필자 작도

(그림 24)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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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층 평면구성

가. 개요

2층 평면은 도코노마와 오시이레가 설치된 자시키(座敷), 엔가와, 창고, 계단이 전부로 1층에 비해 평면구조가 단순하다. 원형으로 추정되는 도코노마가 남아있고, 오시이레와 엔가와 측 유리문은 재질만 교체된 정도이다. 디럭스 타일로 마감된 바 닥이 일본식 공간이라는 분위기를 반감하지만, 란마와 쯔케쇼인 등 건축요소가 형 성하는 공간적 특성이 남아 있어 1층과 달리 일본식 주택이라는 느낌이 크다. 크기 나 형태는 원래의 모습을 유지한다. 전반적으로 1층에 비해 원형이 많이 남아 있다.

1층은 벽체를 미장합판, 벽지로 마감해 심벽(신카베, 眞壁), 평벽(오오카베, 大壁) 을 판별하기 어렵다. 벽지로 마감한 벽에서 기둥의 요철흔적이 보이지 않아 평벽일 가능성이 크나, 판재를 설치하고 도배했을 가능성도 있다. 2층은 1층과 달리 기둥이 뚜렷하게 보이는 심벽이다. 기둥 사이 벽은 흰색 본 타일 누름마감으로 처리했다.

현관, 선반, 후스마, 도코노마, 차노마 등을 갖춘 전형적인 쇼인즈쿠리(書院造り) 카. 조리실

욕실 동측공간에 위치한다. 일반적인 요리는 부엌에서 진행하고 이곳에는 아궁이 를 만들고 가마솥을 걸어 오랫동안 끓여야 하는 음식을 만드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타. 창고와 지하실

조리실을 지나면 창고가 있다. 창고는 집안에서 사용하는 여러 가지 연장, 잡동사 니를 보관하던 공간이다. 창고 지하에는 보일러실과 기름 탱크 보관실이 있다.

(그림 25) 욕실 (그림 26) 조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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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의 주택이다. 자시키와 엔가와를 구분하는 쇼오지(장지문, 障子)는 1층에서는 단일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철거했고, 2층에서는 유리문으로 교체된 상태이다.

나. 계단

2층 진출입은 현관복도와 연결된 계단에서 이뤄진 다. 곳곳에 설치된 여러 계단 중 유일한 목조계단으 로 건립 당시에 만들어진 계단으로 보인다. 계단은 폭 940㎜, 디딤판 220㎜, 챌판(단 높이) 200㎜, 계단코 50㎜, 난간높이 660㎜로 구성되어 있다. 계단실 벽체 는 심벽으로 표면은 본타일 누름마감이다. 일반적으로 1층 계단 상부는 2층 바닥과 연결하여 창고나 오시이 레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신흥동 관사에서는 그 대로 두어 개방감이 크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 머리를 부딪칠 염려가 없다.

다. 자시키(座敷)

자시키는 일본주택의 접객공간으로 쇼인즈쿠리(書院造り)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 다. 바닥에는 다다미를 깔고 기둥 사이에는 쇼오지(장지문, 障子)와 후스마(襖)를 설치하고, 오시이레와 엔가와를 둔다. 엔가와 외부에는 아마도(비덧문, 雨戶)와 아 마도를 보관하는 토부쿠로(戸袋)가 달린다. 신흥동 관사에서는 우측(도코노마를 바 라보는 방향에서)에 벽체 전체에 걸쳐 엔가와가 있고, 좌측에 오시이레가 위치한 다. 엔가와가 위치한 곳은 정원에 면한 남향이다. 엔가와 창문을 철거하고 현재와 같은 알루미늄 새시 창을 설치해 아마도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알루미늄 새시 창 좌우에서 토부쿠로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부위가 있어 아마도와 토부쿠 로가 설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림 29의 연두색 점선부)

2층 외벽 배면은 자시키 좌측벽 전체를 차지하는 오시이레와 계단실, 창고를 배 치한 결과 2층 배면부에는 창문이 없다.

현재는 단일공간이나 원래는 2개로 나눴을 가능성이 크다. 도코노마를 장식하는 도코바시라(床柱) 2개가 보인다. 하나는 원형을 간직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도코노 마에, 다른 하나는 오시이레 사이에 있다. 공간은 후스마로 나눠 상황에 따라 전체 를 하나의 공간으로 평상시에는 2개의 공간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을 고려할 수 있으

(그림 27)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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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신흥동 옛 시장관사

(그림 28) 자시키(座敷) 좌측은 오시이레 우측은 엔가와이다.

(그림 29) 토부쿠로(戸袋)의 흔적으로 보이는 곳

나,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는 정확한 조사가 필요하다. 2개의 공간으로 나눠 사용했 다면 작은 공간은 차노마(茶の間)로 썼을 가능성이 크다. 엔가와와 오히로마(大廣 間) 사이에는 유리문을 달아 구분했다. 현재의 유리문은 보수공사 시 교체한 문으 로 재질은 나왕이다. 유리문 상부 고카베(小壁)에는 개폐 가능한 란마(670×370㎜) 를 2짝씩 총 4짝을 두었다.

오시이레도 원래의 모습이 아니다. 내부는 미장합판으로 마감했고, 오시이레 문 짝은 원래의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어렵다. 기둥과 문틀은 그대로 두고 문짝만 교 체했을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겠다. 천정은 건축당시의 것으로 보이나, 실측조사 시 보다 면밀한 조사와 검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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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도코노마(床の間)

도코노마는 일본식 주택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 공간으로 그 집의 부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일본식 주택에서 불단(佛壇, ぶつだん)은 불상을 안치하여 부처를 섬기 면서 세상을 뜬 가족의 위패를 모셔 선조를 공양하는 제단이고, 도코노마는 집과 관련된 신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도코바시라(床柱)는 장식기둥을 기준으로 쇼인즈쿠리(書院造り) 양식에 따라 엔 가와(복도) 측에 도코노마를 두고 그 반대편은 도코와키다나(床脇棚)를 둔다. 도코 노마는 다다미방보다 약간 높게 바닥을 만들어 꽃꽂이로 장식하고, 벽에는 족자를 걸었다. 도코와키다나(床脇棚)는 2단의 선반을 단 찌가이다나(違い棚)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대식 일본주택에도 일반적으로 도코노마를 두나, 실용적 가치는 부족한 상징적 공간으로 도코노마가 없는 주택도 많이 지어진다.

이는 신흥동 관사에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판단이 가능한 건축요소이다. 도 코노마가 갖춰야할 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고, 쯔케쇼인(付け書院)도 원래의 것으로 보인다. 신흥동 관사 쯔케쇼인(付け書院)의 크기는 폭 1820㎜, 높이 1890㎜이다.

상부 붙박이창은 두께 3㎜ 판재를 45°경사로 짠 격자 30개를 이용해 만들었다. 하 부 네 짝 미서기창은 격자를 기반으로 문양을 만들었다. 창문틀은 상부틀 25㎜, 하 부틀 43㎜, 설주 23㎜로 만들고 그 안에 격자를 두었다. 격자는 두께 3㎜ 판재를 가 로 21㎜, 세로 15㎜로 짜서 만들었다.

해방 후 일본식 가옥을 구입한 우리나라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도코노마는 쓸모없 는 공간이라는 인식 아래 철거한다. 형태는 그대로 두더라도 앞에 문을 달아 붙박이 장으로 전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도코노마의 원형이 그대로 유지되는 사례는 많지 않다. 신흥동 관사 도코노마는 인천에서 원형을 유지한 유일 사례로 추정된다.

(그림 30) 도코노마의 각부 명칭과 신흥동 관사 도코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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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신흥동 옛 시장관사

마. 불단(佛壇)

일본 전통가옥에서 불단은 가문 조상의 위패와 사망한 사람의 영정이나 사진을 안치하는 공간이 다. 종교에 관계없이 대부분의 집에 불단이 있다.

집에서 생활하는 가족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향 을 피우고 인사하며, 다른 곳에 사는 가족이나 친 족이 집을 방문하면 우선 불단에 향을 피워 조상 에 예를 표한다. 불단의 설치방식은 불단을 건축 화하여 건축물의 일부로 조성하는 경우와 시중에 서 판매하는 불단을 구입해서 사용하는 경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오시이레 옆 ¼칸 규모의 공간이 불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반적으로 불단은 오시이레 옆에 위치하며, 규모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바. 엔가와(緣側)

1층에는 엔가와의 흔적만 남아 있으나, 2층에는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일본 전 통건축에서 엔가와는 그 형태에 따라 가이엔(外緣, がいえん), 이리가와엔(入側緣, いりかわえん), 나이엔(內緣, ないえん)으로 나뉜다. 가이엔은 우리나라의 툇마루 와 같이 건물 외부에 마루를 둔 방식이다. 이와 달리 이리가와엔과 나이엔은 마루 끝자락에 문을 설치하는 방식이다. 이리가와엔과 나이엔의 차이는 내부공간과 만나 는 곳에 문을 설치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즉, 엔가와와 실 사이에 문을 두지 않고 넓게 사용하는 경우는 이리가와엔, 문을 설치해 나눠 사용하는 경우는 나이엔이다.

이리가와엔은 히로엔(広緣, ひろえん)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림 32) 불단 추정위치 (그림 31) 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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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엔가와 바닥에 까는 마룻널의 방향에 따라 키레메엔(切れ目緣)과 쿠레엔(く れ緣)으로 나뉜다. 키레메엔(切れ目緣)은 엔가와의 단변방향으로 마룻널을 까는 방 식으로 제재기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과거에 주로 사용했던 방식이고, 쿠레엔(くれ 緣)은 엔가와의 장변방향으로 마룻널을 까는 방식이다.

전 인천시장관사 2층의 엔가와는 이리가와엔에 해당하며, 바닥에 시공된 플로어링 은 보수 공사 시 원래 설치되었던 마룻널을 걷어내고 새로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엔가와의 지붕 끝자락을 지지하는 도리를 ‘엔게타(緣桁)’라 한다. 엔게타 위에 서 까래와를 올려 엔가와 지붕을 구성한다. 사각형 각재를 사용하기도 하나 대부분은 원형도리를 사용한다. 원형도리는 마루타노엔게타(丸太の緣桁)라고 부른다. 재질 은 일반적으로 일본 삼나무이다. 이 집의 엔게타는 1, 2층 모두 마루타노엔게타로 시공되어 있다.

(그림 33) 내연과 입측연

(그림 34) 엔가와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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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신흥동 옛 시장관사

엔가와는 본채와 분리된 별도의 지붕을 설치하는 경우가 많다. 일종의 차양으로 우리나라에서 눈썹지붕이라 부른다. 일본 전통주택의 중류이상에서는 엔가와 상부 천정은 치장천정으로 구성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 집에서도 엔가와 천정부분을 고급스럽게 치장했다. 엔가와 천정은 우리나라 주택의 개념과 상당히 차이가 있는 곳으로 명칭부터 생소한 점이 많아 (그림 37)에 각 구성 부재별 명칭을 표기했다.

(그림 35) 엔가와 마룻널 설치방식

(그림 36) 전 인천시장관사 2층 엔가와

우측은 엔가와 쪽으로 튀어나온 쯔케쇼인 모습이며, 바닥에는 플로어링을 깔아 원래의 모습을 확인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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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7) 엔가와 상부 천정의 구성 부재별 명칭

부호 한자표기 일본식명칭

天井 てんじょう

鴨居 かもい

長押 なげし

欄間 らんま

小壁 こかべ

化粧野地板 けしょうのじいた

化粧小舞 けしょうこまい

化粧垂木 けしょうたるき

緣桁 えんげた

はし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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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8) 2층 창고 외관 2층 박공부에 위치한 살창이 창고에 설치한 창문이다.

(그림 39) 2층 창고

이 창고는 계단실 옆에 위치한다. 좌측 창문은 외부에서 보이는 지붕 박공부에 위치한 창문이다.

우측 판문은 계단실과 연결된 출입문이고, 창고 안쪽에 별도의 창고를 두어 창고 2개가 있는 셈이다.

사. 창고

계단을 사이에 두고 차노마(茶の間) 건너편에 창고가 있다. 출입문은 판문미닫이 문이고, 바닥에는 플로어링 블록을 깔았다. 내부벽은 미장합판으로 마감했다. 창고 에 설치된 창문이 도로에서 대문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우측벽 2층 박공부에 위치한 창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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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0) 1층 엔가와 지붕(좌측)과 안방 상부 지붕(우측)

아. 창호

신흥동 관사의 창호는 보수공사 시 교체되어 원래의 창호는 찾기 힘들다. 현관문 과 거실과 현관 사이에 설치된 중문은 알루미늄 재질이다. 방문은 목제문이고, 1층 엔가와 문틀은 스테인리스제, 2층 엔가와 창문틀은 알루미늄으로 제작했다. 이 주 택 창호의 특징은 화장실 창문에 있다. 대변기가 설치된 외벽에 창문 3개를 달아 환 기효과를 높였다. 환기효과는 높으나 계절의 영향을 많이 받아 사용자는 더위와 추 위에 노출되었다.

자. 지붕부

일본식 합각지붕인 이리모야야네(入母屋屋根)를 기반으로 건물 곳곳에 게야(下 屋)을 설치해 입체감을 살리고 다양한 변화를 구현했다. 가사도우미방 지붕부에는 도리 95×170㎜, 추녀 80×90㎜, 타루키(서까래, 垂木)는 48×48㎜ 부재를 330㎜

간격으로 배치하고 지붕에 사용된 기와는 300×280㎜, 두께 20㎜ 점토기와이다. 1 층 엔가와 상부 지붕은 동판마감이다.

엔가와 지붕부에는 지름 60㎜의 원형 화장서까래(丸形化粧垂木)를 370㎜ 간격으 로 배치하고, 이에 수직방향으로 목소무(木小舞, 15×15㎜ 격자)를 대고 그 위는 판재(化粧野地板)로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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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신흥동 옛 시장관사

지하층, 1층, 2층 평면도는 구조안전진단업체인 (주)합 건설방재기술단이 작성 한 건축물 안전진단을 위해 작성한 도면을 바탕으로 재작성했다. 지하층 평면도는 본관 지하층과 증축부(창고) 지하층 2개를 별도로 작성했다. 1층 평면도는 한 도 면에 본관과 증축부를 표기하고 직전 주인이 사용하던 용도를 중심으로 실 명칭을 기재했다. 2층은 과거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어 일본식 전통 양식의 공간명칭으로 표기했다.

2층 지붕구조에서 지붕내부에 단열재를 설치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보수공사 시 지붕은 거의 손을 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붕틀을 형성하는 부재는 전반적 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누수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꺽쇠 등 철물도 곳곳에 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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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보존활용방안

가) 보존방안

1) 현 상태 유지

1930년대 후반에 세워져 일본인 주택, 시장관사, 민간기업 소유 주택을 거쳐 직 전 거주자까지 신흥동 관사를 거쳐 간 사용자가 남긴 삶의 흔적을 유지한다는 차원 에서 긍정적이다. 또한 과거의 모습을 정확하게 파악할 만한 자료가 없다는 점에서 현 상태를 유지하여 보수공사나 재현공사로 원형을 잃을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한다 는 장점이 있다.

일본식 주택의 흔적 일부가 현존하므로 일본인 주택으로서의 흔적은 남아 있으 나, 직전 거주자의 대대적인 보수작업으로 이전 사용자의 흔적은 거의 사라진 상태 이다. 아울러 건물 정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스테인리스와 알루미늄 새시 창문틀 의 모습을 그대로 존치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다.

2) 1층 현 상태 유지, 2층 재현

변형이 심한 1층은 현 상태를 유지하고 일본식 건축요소가 1층에 비해 상대적으 로 많이 남은 2층만 일본식 주택공간을 재현하는 방법이다. 동시에 정면의 스테인 리스와 알루미늄 새시 창문을 일본식 창문으로 교체하는 범위까지 검토한다. 한국 인의 생활방식에 맞게 바꾼 1층은 현 상태를 유지하여 건축물에 쌓인 사용자의 흔 적을 보존한다는 점이 긍정적이다. 반면 정확한 자료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 반적인 일본식 주택의 모습으로 재현함으로써 건축 특성을 잃어버릴 수 있다.

3) 건물전체 재현

건물 내 외부 전체를 일본식 가옥으로 보수하는 방식이다. 제법 과거의 모습을 갖 춘 일본식 주택 한 채가 생긴다는 사실과 재현시점 설정을 놓고 논란이 일어난다.

원래의 모습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평범한 일본주택을 재현함으로써, 건축물에 쌓인 역사를 지운다는 점에서 비판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나) 활용방안

1) 인천광역시 시사연구팀 사무실/전시관

2) (마을)박물관 : 신흥동 역사, 신흥동 주택, 조선인의 삶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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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단행본

동인천탐험단 외, 『신흥동 일곱주택』, 건축재생공방 옹노 · 복숭아꽃, 2020.

서울역사박물관, 『대경성부대관』, 서울역사박물관, 2015.

손장원, 『손장원의 다시 쓰는 인천 근대 건축』, 간향미디어랩, 2006.

신태범, 『인천 한세기』, 홍성사, 1983.

인천부, 『仁川府史』, 인천부, 1933.

최재용, 『미추홀은 물골이다』 (사)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 인천사랑운동센터, 2020.

2. 인터넷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www.history.go.kr 빅카인즈 www.bigkinds.or.kr

46 옛 신흥동 시장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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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수 (동국대학교)

조선시대

관아의 내아와 근현대기

관사건축

- 인천 지역을 중심으로 -

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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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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