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68 신흥동 옛 시장관사

(그림 1) 인천거류지지도, 1898

(그림 2) 묘지 이전 원서 첨부 일본 공동 묘지 개관, 1902

70 신흥동 옛 시장관사

1902년 제작된 <인천항시가전도>에는 이미 시가지화되어 동본원사와 사찰들, 그 리고 일본인 학교가 들어선 사정 일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같은 해 작 성된 <묘지 이전 원서 첨부 일본 공동 묘지 개관> 첨부 지도를 통해서 사정의 주변 은 조선인 마을과 전, 답으로 현재 신흥동 옛 시장관사가 위치한 화정 1정목 일대는 전, 답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흥동 동쪽과 선화동에는 일제강점기 앞의 시가지가 조성되기 이전부터 술 집, 유곽이 존재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부도정(敷島町), 화정(花町)으로 일본식으로 불렸던 지역인데, 부도정은 부도유곽이 있는 동네로 부도정이라 했다. 부도유곽은 원래 거주 중심인 일본조계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 계획되었으나, 거주지의 확장 으로 유곽이 거주지와 거리가 가까워진 것이다. 화정은 그 전에는 화개동(花開洞) 으로 불리어 일찍이 조선인과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술집과 유곽이 자리잡고 있 었다.

(그림 5) 일본공원내에 1890년 낙성한 인천신사

『皇太子殿下韓國御渡航紀念寫眞帖』, 1907

(그림 6) 1895년 현재의 송도중학교 부지에 본당을 지은 묘각사

『仁川開港25年史』, 1908 (그림 3) 1898년 신흥동 1가로 이전한 인천공립심상소학교

사진 속 건물은 1928년 3월 신축한 본관 일제강점기 사진엽서, 인천광역시립박물관

(그림 4) 1889년 육군묘지 내로 이전, 낙성한 본원사(本願寺) 『仁川港之卷』

1907년의 조선정 대화재의 화재복구를 위해 시작된 일본인 거류지 시구개정사업 은 조계 외곽의 부도정 일대와 조선정 일대를 연결하는 도로개착작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06년 호리 리키타로(堀力太郞)를 비롯한 일본인 거류민들은 거류 민단에 사정해서 화정(花町)을 지나 부도정(敷島町)으로 향하는 도로개통을 청원하

(그림 7) 인천항시가전도, 1902 (그림 8) 그림 7의 상세

(그림 9) 인천항평면도, 1908 (그림 10) 그림 9의 상세

*신흥동 옛 시장관사의 위치

72 신흥동 옛 시장관사

였고, 도로개통을 위해 자신들이 소유한 도로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기로 하였다.

도로의 개착에는 약 5,000원의 사업비가 소요되었는데, 사업비는 도로 주변의 지주 들과 유곽 경영주가 비용을 각출하되 부족한 2,000원은 호리 리키타로를 중심으로 헌금을 모집해 충당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헌금 모집이 쉽지 않자, 거류민단에서 1,000원을 보조금을 제공하여 사업 을 완성하였다. 1908년 <인천항평면도>에서는 당시 새로 개척된 부도정 방면의 도 로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도로는 지역 유지들의 기부로 1916년 이후 8칸(약 14.5m) 폭으로 확장되었다. 또한 1925년에도 지역유지들의 기부로 화정에서 부천 방향의 도로 개수를 신청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29년의 지도에서는 이 도로가 3등급 도로 로 표시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림 12) 『부산일보』 1925년 11월 22일 기사

<인천 화정[花町]의 유지가 도로 수리>

(그림 11) 『매일신보』 1916년 6월 17일 기사

<인천: 花町도로확장>

南村市街의 極盛

光武 67년경까지는 지금 寺町이라는 畓洞으로부터 東으로 京城通路는 그만 두고라도 一小山에 불과하든 日本 公園地帶에도 겨우 東本願寺, 소학교, 居留民役所의 役舍, 第一 銀行 舍宅이 건축되얏슬 뿐임으로 純 日本市街는 아조 滿目蕭條하든 것이 意外 행운을 맛난 그네들이라 혹은 官力 혹은 富力으로 日進月盛 鮮人의 遊興村이든 花開洞 全幅을 점령하기 시작하야 現今의 海岸町, 濱町, 萬石町의 埋立市街를 縱橫擴大하야 온 이래 順 調的인 발전의 경로는 着着 築港이 완성되고 海運이 왕성하야 電氣會社, 燐寸會社, 醬油 會社, 精米工場공장 등의 一時 勃興함을 따라서 金融機關 及 大商店이 逐日 증가하야 이 러케 所向無敵 內外商戰의 勝勢 장차 어느 정도까지 强進할는지 알 수 업슬 뿐이다.

(「仁川아 너는 엇더한 都市?(一)」, 『개벽』 제48호, 1924년 06월 01일)

1924년 『개벽』 48호에 실린 「인천(仁川)아 너는 엇더한 도시(都市)?」 에는 이 일대 의 풍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글에서는 20세기 초 동본원사, 소학교, 거류민단역소 역사, 제일은행 사택이 있었을 뿐인 이 지역에는 점차 매립지가 늘어나고 축항사업 이 완성(1918년)됨에 따라 전기회사, 성냥회사, 간장회사, 정미공장 등이 빠른 속 도로 들어섬에 따라 금융기관 및 상점들도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1918년과 1929년의 지도를 비교해보면 해안가쪽으로 매립이 진행된 것을 알 수 있으며, 매립지인 화정 3정목 일대에는 가토 정미소, 오쿠다 정미소 등의 대규모 정미소가 자리잡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13) 인천시가도, 1918 (그림 14) 그림 13의 상세

74 신흥동 옛 시장관사

(그림 17) 『부산일보』 1928년 10월 10일 기사

<인천 화정[花町] 경찰관 파출소 낙성식 거행>

(그림 15) 인천항평면도, 1929 (그림 16) 그림 15의 상세

1928년에는 인천 화정에 경찰서가 새롭게 개설되었 으며, 1929년 지도에는 우편국이 위치하고 있음을 확인 해볼 수 있다. 이처럼 1920년대 후반 화정을 비롯한 이 일대에는 다양한 시설들이 들어섰다.

2) 1930년대 문화주택촌의 형성

1930년대 들어서면서 제2축항 계획과 함께 화정 일대에서는 공유수면 매립과 산 업도로 부설 등 대대적인 도시 변화가 일어났다. 1934년 4월 기공한 화정 매립 사 업은 1937년 4월 준공하였고, 당시 매립 사업의 대상지는 1934년 작성된 <공유수 면매립공사준공의건-인천부(경기도인천부화정지선)>에 첨부된 도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림 18) 『조선신문』 1931년 4월 24일 기사

<京畿道, 仁川花町通り道路改修の必要, 市民間に要望の聲高く府でも適當の措置>

(그림 19) 『조선신문』 1932년 10월 08일 기사

<京畿道, 仁川産業道路愈愈工事に着手, 花町海岸に表仁川出 現, 今後の殷賑を豫想>

(그림 20) 공유수면매립공사준공의건-인천부(경기도인천부화정지선)(도면첨부), 1934 국가기록원

76 신흥동 옛 시장관사

1936년을 전후하여서는 이 일대에 주택 신축이 이루어졌다. 『조선일보』 1935년 7월 25일 기사 및 『매일신보』 1936년 12월 20일 기사에서는 다마키 세이이치(玉置 精一)를 비롯한 화정의 지주들이 주택지 개발을 위해 기존의 거주민들에게 퇴거를 요구한 내용들이 실려 있는데, 『조선신문』 1936년 2월 12일 기사를 통해 이 일대에 기존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대부분 조선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곳에 새로 생긴 주택들의 분양 광고 역시 신문에 실린 것을 확인할 수 있 다. 『조선신문』 1936년 6월 29일 기사에는 화정 주택지를 푸른 바다가 한 눈에 바 라보이는 주택지라 설명하며, 싼 값에 분양한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당시 분양 주 체가 다마키임을 알 수 있다.

(그림 21) 『조선중앙일보』 1934년 7월 25일 기사

<仁川花町海面 埋立地起工式>

(그림 23) 『조선일보』 1935년 7월 25일 기사

<百餘戶住民(백여호주민)에게 一齊撤去(일제철거)를强要(강요)>

(그림 22) 『조선일보』 1937년 4월 1일 기사

<인천 화정 매립지 준공식 거행>

(그림 24) 『매일신보』 1936년 12월 20일 기사

<仁川에 또 家屋騷動 花町에도 撤去令>

1936년의 『대경성부대관』에서는 현재의 율목공원 아래 주택들이 가득 찬 화정 1 정목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1920년대 후반 이후 경성을 비롯한 식민지 조선의 도 시들에는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주택지 개발이 이어졌는데, 1930년대 중반에는 인 천에서도 송학동 3가 및 신흥동 일대에 주택지 개발이 이루어졌다. 당시 지어진 주택 지들은 대부분 서구식 생활을 지향하는 문화주택들로 이루어진 문화주택촌이었다.

(그림 25) 『조선신문』 1936년 2월 12일 기사

<仁川花町の火災, 塲所がら大混雜>

(그림 27) 『대경성부대관(1936)』 의 인천편

(그림 26) 『조선신문』 1936년 6월 29일 기사

<碧瑠璃の海を一眸に仁川花町住宅地, 豪華境を格安分讓>

(그림 28) 그림 27의 상세도(확대)

78 신흥동 옛 시장관사

1937년에는 원래 송학동에 있던 도립 인천병원이 화정 2정목으로 이전해오기로 결정하고, 1938년 2,500원을 들여 서양식 병원을 건축하였다. 1938년에는 화정에 위치한 인보원에서 인천가정부학교가 개설되기도 하였다. 문화주택들이 다수 건축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천의 주택난은 여전하였으며, 새로운 주택들이 건축됨에 따 라 기존의 빈민들은 갈 곳이 없어지는 상황도 생겨났음을 신문기사 등을 통해 확인 해볼 수 있다.

(그림 29) 『조선신문』 1937년 1월 23일 기사

<道立仁川醫院花町移轉に决定, 坪當より 二十圓で二千五百坪買收, 十三萬圓で洋風建築> 

(그림 31) 『동아일보』 1937년 6월 19일 기사

<인천율목리빈민들 갈데없어대곤난>

(그림 32) 『조선일보』 1939년 11월 07일 기사

<차가인의 실정조사>

(그림 30) 『조선일보』 1938년 6월 11일 기사

<인천가정부학교 이십일부터 개시>

3) 해방 이후 신흥동 옛 시장관사 주변의 변화

해방 이후 일본인 소유의 주택 및 토지들은 귀속재산(미군정에 접수되었다가 1948년 9월 11일에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 정부 간에 체결된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 제5조의 규정에 의하여 대한민국 정부에 이양된 일체의 재산)으로 처리되 어, 국유 또는 공유재산, 국영 또는 공영기업체로 지정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한 민국의 국민 또는 법인에게 불하되었다

.

1)사정에는 인천신사와 동본원사, 서본원사,

1) 귀속재산처리법, 1949년 12월 19일 https://www.law.go.kr/법령/귀속재산처리법/(00074,19491219)

묘각사 등 일본인 종교시설들이 다수 있었기에 해방과 함께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인천신사가 있던 자리에는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가 들어섰으며, 서본원사와 묘 각사 등이 있던 일대에는 송도중학교가 들어섰다. 동본원사 부지에는 현재 로얄답 동맨션이 있다. 유일하게 남은 사찰은 해광사로 현재도 사찰로 유지 중이다.

한편 신흥동 일대의 주택들 역시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국유, 공유재산 혹은 개 인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는데 신흥동 19-7번지 주택이 시장관사로 사용되며 이 일대는 관사마을이라 불렸다. 특히 몇몇 신문기사에서는 이 곳에 주소지를 둔 이들이 공무원 2) 이어서 19-7번지 외 주택들도 관사로 사용했을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일본인 묘지와 화장장이 있던 율목동 244번지 일대는 1944년 율목공원으로 지정 되었고, 해방 후인 1946년에는 율목공원 남측으로 인천시립도서관(현재의 율목도 서관)이 이전해왔다. 인천시립도서관은 1962년 신관을 증축했으며, 율목공원 내에 는 1970년대에 수영장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1952년에는 율목도서관 서측에 인천 기독병원이 설립되었다.

이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7년 ~1971년)에 따라 1934년 착수 이후 오 랫동안 중지되어온 인천항 해면매립사업 및 제2선거 확장사업을 1967년부터 본격 적으로 착공하였다. 1973년 4월에는 인천항과 서울 영등포를 잇는 경인고속도로가 개통하였고 1974년 제2선거가 완공하면서 신흥동 일대에 조성된 매립지에는 인천 종합어시장 등이 들어섰다. 1970년대 후반에는 삼익아파트와 삼익백화점 등이 들

2) 『조선일보』 1958년 9월 4일 기사 <인천시청 수도과장도 구속>에 따르면 인천시장 수도과장은 인천시 신흥동 1가 18번지에, 『경향신문』

1967년 6월 24일 기사 <복지밀수2명 구속 봐준 인천세관원도>에 따르면 인천 세관감시과 직원은 인천 신흥동 1가 19번지를 주소지로

(그림 33) 『조선일보』 1961년 11월 01일 기사 <인천도서관확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