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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시대 읍치와 관아

조선시대 지방행정조직은 태종 13년(1413) 전국을 8도(道)로 나누고, 도 관할하 에 대도호부(大都護府), 목(牧),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을 두도록 정비하고, 전국의 모든 군현 330여 개소에 지방관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여 중앙집권체계를 갖추었다. 이렇게 전국 모든 군현에 중앙관료를 파견하여 직접적인 통치를 실현한 것은 조선 태종때에 역사상 처음으로 이뤄진 것이다. 이때 정비된 행정조직의 틀은 1894년 전국을 모두 군으로 개편하는 고종대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된다. 인천은 조선 태종대에는 부평도호부 관할 군으로 배속되었는데, 세조대에 소헌왕후의 외가 고을로서 승격되어 인천도호부가 되었다. 그 이후로 지금의 인천 지역에는 인천도 호부와 부평도호부, 강화도호부가 설치되고 3명의 도호부사(都護府使)가 파견되어 고을의 행정을 총괄하였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가 머물며 업무를 보는 공간을 통상 관아(官衙) 또는 관서 (官署)·공해(公廨) 등으로 불렀고, 여러 고을(邑) 중에서도 관아가 설치되는 고을 을 읍치(邑治)라고 하였다. 관아는 흔히 좁은 의미로 고을 수령이 업무를 보는 장소 와 그 부속 기관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보다 원론적으로는 행정, 군무 등 일체의 관용(官用) 시설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에는 수도 한양을 기준으로 전국의 읍치에 관아건축의 체계가 나타나는 데, 우선 왕권을 상징하는 건축물인 객사가 가장 위계가 높은 곳에 자리하고 그 인 근에 고을 수령의 집무실인 동헌과 거처 즉 관사인 내아가 자리한다. 동헌의 주변 에는 관영 교육기관인 향교와 농본국가를 상징하는 사직단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 한 배치는 한양의 경복궁과 종묘, 사직, 성균관 등의 배치와 유사한 것으로 조선 개 국 초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교적 예제를 기반으로 읍 성의 주요시설을 획일적으로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객사와 동헌, 사직과 향교외에 도 마을의 입구 쪽에 고을의 토지와 마을을 지키는 서낭신(서낭神 =성황신 城隍神) 을 모신 서낭단(서낭壇 =성황단 城隍堂)이, 마을의 북쪽에는 떠돌아다니는 혼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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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귀(厲鬼)를 위로하기 위한 여단(厲壇)이 대부분의 읍치에 공통적으로 설치되었 다. (그림 1)

객사는 객관(客館)이라고도 하는 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와 궐패(闕牌)를 안치하여 중앙에서 떨 어진 지방에서도 왕실의 권위가 작 동하고, 국가의 정책을 충실히 시행 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줌과 동시에 실제 주요 정령을 선포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객사의 형태를 보면 공 통적으로 남향을 하고, 중앙에는 패를 모신 정청(正廳)이라 부르는 높은 지붕의 건물 을 두고, 그 좌우에 사신이나 상급기관의 관리가 방문하였을 때 머무는 지붕이 낮고 온돌방으로 꾸며진 익사(翼舍) 또는 이방(耳房), 상방(上房)으로 불리는 건물을 붙인 모습을 하고 있다. 좌우의 익사는 동서헌(東西軒)이라고도 하였는데, 고려시대 지방 에 중앙관료의 업무처가 완비되지 않았을 때 객사의 동서헌에서 업무를 보았다. 여 기서 수령의 업무처를 뜻하는 동헌(東軒)의 명칭이 유래하였다고 한다.2)

2) 백소훈, 「지방관아 건축 “동헌(東軒)”명칭의 유래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논문집』 v.33, n.7, 대한건축학회, 2017.

(그림 1) 《비변사인방안지도-나주목》부분 객사와 동헌, 사직, 여단이 표기되어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그림 2) 인천도호부의 재현된 객사

객사의 동쪽 방의 이름에서 유래한 동헌은 조선시대에 들어 행정조직정비와 함께 별도의 건축물로 세워지기 시작한다. 동헌은 크게 수령과 아전의 업무시설인 외아 (外衙)와 수령의 생활공간인 내아(內衙)로 구성된다. 외아는 공적인 업무공간임과 동시에 수령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축이기에 홍살문(紅살門=紅箭門, 紅門)과 내외 삼문(內外三門) 등을 설치하여 건축공간에 위계를 표현하였다. 일반적으로 외삼문 안쪽에 아전 등 향리의 업무처를 두고 내삼문 안쪽에 공해(公廨, 동헌 등 읍치의 운 영을 관리하는 아전의 업무공간)와 정당(正堂, 수령의 집무실이 마련된 건물)3)이 자 리하였다. 수령과 식솔이 생활하는 내아는 정당 옆이나 뒤쪽에 마련되었는데 당시 상류주택의 모습을 따라 지어졌다. 외아는 권위적인 공간이기에 일정한 격식이 있 었지만, 내아는 살림집이라는 성격을 반영하여 특정한 격식이나 형식보다는 고을의 형편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2) 문헌과 기록으로 본 인천의 내아 모습

내아는 관아건축이라는 공공재이면서도 수령의 살림집이라는 사생활 영역이어서 읍지 등 관찬사료에서는 간략히 몇 칸의 내아가 있다는 정도로 언급할 뿐, 그 모습 을 세세히 기록하지는 않고 있다. 조선후기 지리지에 기록된 인천도호부와 부평도 호부의 동헌의 모습을 보면 아래 표와 같다.

3) 동헌이란 말은 넓은 의미로는 외아와 내아 모두를 아우르는 전체를 뜻하기도 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수령의 집무실인 정당을 지칭하기

구분 1842년 읍지 1871년 편찬 8도 도지 1899년 편찬 읍지

인천

公廨

客舎 二十間 三門 三間 東軒 十間 內東軒 三十三間 ...

公廨

客舎 二十間 三門 三間 東軒 十間

內東軒 三十三間頽廢今無 ...

公廨

客舎 二十間 三門 三間 東軒 十間 內東軒 三十三間 ...

(표 1) 인천도호부와 부평도호부의 조선후기 읍지 공해조(公廨條)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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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廨

客舎 亥坐巳向 衙舎 亥坐巳向 ...

公廨

客舎 甓大廳七間半 東軒 七間 西軒 七間 挾房 二間 中門 二間 大門 三間 衙舎 近民堂 七間 使無軒 九間 內衙 二十一間 ...

公廨

客舎 甓大廳七間半 東軒 七間 西軒 七間 中門 三間 大門 三間 衙舎 近民堂 十六間 內三門 三間 左右翼廊 八間 外三門 六間 左右翼廊 六間 東冊房 九間 西冊房 七間半 內衙 二十二間半 ...

위 기록을 보면 인천도호부의 경우 19세기에 10칸의 정당과 내아(내동헌 內東軒) 33칸이 설치된 것을 볼 수 있다. 1871년 읍지에서는 내동헌이 낡고 황폐하여 지금 은 남아 있지 않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 전후로는 이 같은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1842년과 1871년 사이에 내아가 낡아 무너졌거나 아니면 어떠한 다른 이유 로 없어졌다가 이후 1899년 전에 재건되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부평도호부는 1842년 읍지에 규모는 언급 없이 방위만 해좌사향 즉 남남동쪽을 바라보고 있다고 만 기록되어 있지만, 1871년 읍지와 1899년 읍지의 기록에서는 정당과 내아의 규 모가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두 읍지에 규모가 각기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그 사이 에 중건이 이뤄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근민당’ 이라 편액한 정당은 7칸에서 16 칸으로 커졌고, 내아도 21칸에서 22.5칸으로 늘어났다.

위의 기록에서 인천도호부와 부평도호부 모두 작지 않은 규모의 내아가 운영된 것은 볼 수 있지만, 정확한 위치나 실의 구성 등과 같은 자세한 모습을 알 수는 없 다. 인천도호부의 경우 1879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화도진도(花島鎭圖)》 첩 의 1면 지도4) (그림 3)와 일제강점기 사진자료(그림 4)로 객사를 포함한 관아의 모 습을 볼 수 있지만, 내아는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4) 화도진 설치이후 작성된 회화식 지도이다. 앞뒤로 별도의 정장이 되어 있고, 내부에 2장의 지도가 수록되어 있어 일종의 지도첩으로 볼 수 있다. 그림의 수준이나 정장의 형태로 보아 화도진 설치 이후 준공보고를 위한 어람용 지도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 물관에 조선총독부 문서로 소장되어 있다.

다소 근거가 미흡하기는 하지만, 《화도진도》에서 내아를 추정해보면 두 가지 가 능성이 있다. 하나는 동헌의 정당 우측에 협문을 통해 연결되는 일련의 건축물이 고, 다른 하나는 누문 형태의 외삼문 앞쪽에 담장으로 둘러싸인 ㄷ자형 건축물이 다. 전자는 정당과 인접해 있어 수령의 출입이 용이하고 산비탈 가장 높은 곳에 위 치하여 수령의 사적인 영역으로서 적당한 입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담장 없이 개 방된 배치라는 점과 다른 향청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주변에 같이 있다는 점에서 내 아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 후자는 외삼문 앞쪽 민가 인근에 자리하는데 주변에 다 른 향청 건물이 없다는 점과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사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는 점에서 내아일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림 3) 《화도진도》첩 중 1면의 인천도호부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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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화도진도》 첩 2면과 《숙천제아도》로 본 내아

인천의 두 도호부 관련 자료에서 내아의 모습을 명확히 볼 수는 없었지만, 《화도 진도》첩 2면의 지도와 조선후기 문인 한필교(1807~1878)가 자신의 관직을 역임 했던 읍치를 그림으로 기록한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에서 조선후기 내아의 모 습을 살펴볼 수 있다. 《화도진도》 첩의 2매의 지도 중 2면은 화도진만 좀 더 자세히 기록한 것인데 개별 건물마다 이름과 규모를 명시하여 정확한 구성을 파악할 수 있 다.(그림 5)

그림으로 표현된 화도진의 모습을 보면 크게 3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익랑 과 솟을대문으로 구성된 삼문 구역과 7.5칸 규모의 정당과 육모정의 외사구역, 외사 구역에서 일각문으로 연결된 내사구역으로 구분된다. (그림 6) 내사의 모습을 보면 ㄱ자 평면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모두 12칸이고 초가 2칸이 같이 있다고 마당 에 글로 표기하였다. 여기서 초가는 내사 전면 문간채 오른쪽에 연속된 건물을 지칭 한 것으로 보인다. 문간채는 글로 규모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림으로는 정면 4칸 에 측간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보인다. 그 왼쪽에는 측간 1칸이 자리하고 있다. 이 러한 내아의 모습에서 다른 건물에 비해 단일 지붕에 넓은 평면을 가지고 있다는 특 징을 찾을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 들어 온돌과 대청이 발달하면서 한 지붕 아래 복 합적인 평면이 구성되는 사대부 살림집의 경향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그림 5)《화도진도》첩 중 2면 국립중앙도서관

화도진의 내아에서 보이는 살림집과 같은 모습은 《숙천제아도》에 표현된 다른 여 러 읍치의 내아에서도 같게 나타난다. 《숙천제아도》에는 모두 15곳의 근무처가 그 림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읍치는 평안도 영유현, 황해도 재령군, 황해도 서흥부, 전라도 장성부, 경기도 김포군, 황해도 신천군 등 6곳이 그려져 있다. 6개 읍치 중 전라도 장성부를 제외한 5곳에 모두 내아가 표기되어 있는데, 장성부의 경 우 내아가 표기되지 않았지만, 정당의 오른편에 그려진 초가 2채와 청연당이라 당 호를 걸은 책실(冊室)을 내아로 추측할 수 있다. 각 읍치의 내아 모습은 동헌과의 위치 관계나 구성, 규모 등이 모두 달라 특별히 정해진 규칙에 따라 설치되었다고 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김포군을 제외한 나머지 읍치의 내아는 모두 ㅁ자 또는 ㄷ자의 평면으로 표현되어 있어, 화도진의 내아와 같이 복합평면의 살림집 모습으 로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영유현과 신천군에서는 내아에 속한 신당(神 堂, 사당)이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서 수령이 부임할 때 집안의 신위를 같이 모시고 가 제사를 받드는 조선시대 사대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그림 6) 《화도진도》첩 중 2면 화도진 군청 부분 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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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영유현 황해도 재령군

황해도 서흥부 전라도 장성부

경기도 김포군 황해도 신천군

(표 2) 《숙천제아도》에 표현 된 조선시대 각 지역의 읍치와 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