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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글쓰기 대회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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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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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0년 8월

단국대학교 자유교양대학 죽전캠퍼스 글쓰기센터

우수 글쓰기 대회 수상작

2020 대학혁신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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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대학혁신지원사업

목 차

1. 한국은 중국의 동북공정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 김 선 / 1

: 역사적인 관점에서의 접근

2. 동로마 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원인 분석 ··· 김영신 / 5 3. SNS 마케팅 전략 및 방법과 그에 따른 효과 ··· 박예린 / 17 : 인스타그램 마케팅을 중심으로

4. 또 다른 ‘칼라스’에 대한 경계와 다시 생각하는 ‘관용’ ··· 배희진 / 25 5. 집단 사고의 분석과 ‘반대(Opposition)’의 가치 ··· 선형탁 / 29 6. 이젠 현실로 다가온 자율주행 자동차라는 꿈, ··· 양예린 / 33 어떻게 통제해야 할까?

7. e북, 득이 되는 독서 생활 ··· 유승주 / 35 8. 규칙을 어기는 것은 바람직하다 ··· 이지호 / 41 9. 윤리적 판단이 자율주행차 보험에 적용되어야 하는 이유와 ··· 정호연 / 45 제조사의 책임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부분

10. 카페 업계 1위의 비결 ··· 최승현 / 49 : 스타벅스의 마케팅을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자유교양대학 죽전캠퍼스 글쓰기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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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중국의 동북공정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 역사적인 관점에서의 접근

김 선(사범대학 특수교육과)

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을 우리는 해석학이라 부른다.1) 역사는 과거의 것으로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당시의 정확한 역사를 알 수 없다. 따라서 역사에 관한 연구에는 현재의 시각이 반영되며 동일한 과거의 사건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한 해석의 다양성은 역사 연구를 풍요롭게 하는 동시에 국가 간 분쟁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안타깝게도 후자에 해당한다.

2002년 3월 중국이 이른바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선포하였다. 동북공정은 중국 동북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연구 프로젝트로 고구려와 발해 등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 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동북공정은 언론 매체를 통 해 한국에 그 존재와 실체가 널리 알려지면서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으나 중국학계의 논리적 근거나 인식체계들을 학술적 또는 정책적 차원에서 분석하기보다는 대중의 정서 에 호소하는 것에 그쳤다.2) 이러한 한국의 허술한 대응은 해외의 유명 지도회사, 백과사 전, 언론사, 관광 사이트들이 중국의 만리장성을 한반도 평양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잘못 표기하게 하는 등 왜곡된 역사 지식을 전 세계로 전파했다.3) 이에 본고에서는 동북공정 의 추진 배경과 내용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중국의 동북공정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자 한다.

첫째, 중국의 동북공정은 고구려사와 관련된 오류들을 포함하고 있다. 중국은 고구려 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기 위해 역대 중국왕조와 고구려 사이에서 전개된 조공과 책봉 관계를 하나의 근거로 내세운다. 하지만 중국이 종속관계라고 주장하는 조공도 중 국과 주변국이 공존하기 위한 외교수단이었다는 점, 중국 역사서는 실제 대등한 관계의 나라에 대해서도 조공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상대를 낮추고 자신의 위상을 높여 기술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는 점, 고구려가 중국으로 사신을 보낸 것은 어디까지나 의례적인 외교 수단이었을 뿐 고구려가 자주권과 정체성을 잃은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중국의 주장을 쉽게 반박할 수 있다.4)

동북공정을 인정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역사 왜곡은 단순히 과거 사실에 대한 왜곡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역사를 왜곡한다는 것은 한 국가의 정체 성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의 연장선에서 바라보았을 때 역사 왜곡은 국가의 장래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은 한국의 뿌리를

1) 양지영, 「동북공정에 대한 한국학계의 대응」, 동국대학교 석사논문, 2008, p.5.

2) 양지영. 위의 논문, 같은 쪽.

3) 왕길환, 「'평양까지 뻗은 만리장성' 中 동북공정이 왜곡한 세계지도」, 연합뉴스, 2018. 4. 23.

(https://www.yna.co.kr/view/AKR20180423066000371)

4) 문성숙,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실체와 한국의 정책방안」, 강릉대학교 석사논문, 2007,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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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흔들고 나아가 한국의 장래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둘째, 중국의 동북공정은 한・중 양국관계의 전면적 발전을 방해하는 ‘갈등의 촉매 제’로서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고 나아가 중・미 관계의 보이지 않는 분쟁을 야기한 다. 중국의 고구려와 발해 역사에 관한 왜곡은 자국 위주의 주장과 논쟁을 불러일으켜 이른바 한국과의 ‘역사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역사 전쟁’의 영향으로 중 국에서는 한국에 대한 혐오 여론이 조성되었으며 이는 한・중의 경제 관계 악화에 영향 을 미쳤다.

센카쿠 열도 분쟁, 독도 영유권 분쟁, 일본의 역사 왜곡 문제와 같이 현재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은 복잡한 이해관계로 둘러싸여 있다. 역사와 영토로 인한 갈등을 겪고 있 는 상황에서 중국의 동북공정까지 더해진다면 3국의 갈등의 골은 더욱더 깊어질 것이며 이는 서로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 분명하다.

또한 중국의 동북공정은 중・미간의 보이지 않는 분쟁을 야기한다. 이는 동북아의 중 심국가로서 교두보를 확보하여 중국의 주도하에 세계 질서를 구축하고자 하는 중국의 이면을 눈치챈 미국과 중국 사이의 글로벌 패권 경쟁이 될 것이다. 각국의 현 정권인 트럼프 정부와 시진핑 정부는 이미 서로 다른 리더십으로 인한 대립을 보였다. 각국은 자국의 실리 추구를 최우선으로 간주하고 있기에 동아시아 국가들은 안보 딜레마 상황 에 직면하게 되었다.5)

셋째, 중국은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완료된 2007년 이후에도 동북공정의 왜곡된 논리 를 구체화하기 위한 작업을 꾸준히 수행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2007년부터 2015년까지 나온 중국 학계의 고구려사 관련 연구논저는 512편에 달하며 동북 3성 지역에는 고구려 를 비롯한 한국 고대사 관련 연구소가 신설되거나 기존의 것이 확대 개편되면서 동북공 정 기간 못지않게 관련된 후속 연구들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6)

이에 관해 혹자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이은 후속 작업의 수행은 학술적 차원에서 이루 어지는 방어적 대책일 뿐 공격적 의도나 정치적 목적은 없고, 있더라도 약하기 때문에 이를 우려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한 것처럼 동북공정을 단순히 학 술적 성격을 띠는 프로젝트로만 볼 수 없다. 중국의 동북공정 추진 이면에는 동북아의 질서, 나아가 세계의 질서를 중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중국의 현실적이 고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북한 정권의 붕괴 시 한반도 지역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노리 며 동아시아의 패권자가 되려는 은밀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동아시아의 종주국이 되기 위해 주변 민족의 역사를 변방의 역사로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중국은 동북아에 서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영향력을 제고시키는 것이 국제적 지위를 강화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7)

5) 박창건, 「동북공정을 둘러싼 中・美의 보이지 않은 분쟁」, 경북일보, 2018. 9. 17.

(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38141)

6) 김현숙, 「동북공정 종료 후 중국의 고구려사 연구동향과 전망」, 東北亞歷史論叢 53, 동북아역사재단, 2016, pp.33~35.

7) 양지영, 앞의 논문, pp.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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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동북공정은 중국의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의도를 바탕으로 기존의 역사를 왜곡 하고 동아시아의 평화에 위협을 가한다. 동북공정의 저변에는 중화 패권주의가 깔려 있 기 때문에 주변국과의 갈등은 필연적인 셈이다. 지금까지의 한국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대중들의 정서에 호소하는 방식을 취해 왔다. 하지만 철저하지 못한 대응은 중국의 잇 따른 역사 왜곡으로 이어졌다. 이에 중국의 동북공정에 반박하기 위한 논리적 근거들을 동북공정의 추진 배경과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본고의 내용은 개인적 차원의 관심과 발상으로 전문성을 갖추지 못하고 다소 보완해 야 할 점들이 많다. 하지만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가는 역사 문제를 다룸으로써 역 사 문제를 다시금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러한 개인적 차원 의 관심이 지속해서 모일 수 있다면 한 국가에 대응할 힘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상, 이 글이 중국과의 역사 분쟁 해결을 위한 하나의 작은 시발점이 되기를 바라며 글 을 마무리한다.

참고 문헌 1. 논문, 저서

김현숙, 「동북공정 종료 후 중국의 고구려사 연구동향과 전망」, 東北亞歷史論叢 53, 동북아역사재단, 2016.

문성숙,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실체와 한국의 정책방안」, 강릉대학교 석사논문, 2007.

양지영, 「동북공정에 대한 한국학계의 대응」, 동국대학교 석사논문, 2008.

2. 인터넷 기사, 사이트, 블로그

박창건, 「동북공정을 둘러싼 中・美의 보이지 않은 분쟁」, 경북일보, 2018. 9. 17.

(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38141)

왕길환, 「'평양까지 뻗은 만리장성' 中 동북공정이 왜곡한 세계지도」, 연합뉴스, 2018.

4. 23.(https://www.yna.co.kr/view/AKR20180423066000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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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Ⅰ. 서론

Ⅱ. 동로마 제국의 계승국의 부재

1. 동로마 제국의 다원화된 사회적 면모

2. 동로마 제국 후기의 분열로 인한 계승 의식의 약화 3.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민족주의 역사 인식의 확대

Ⅲ.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간의 대립

1. 로마 계승 의식을 둘러싼 서방 세계와의 경쟁 2.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두 세계 간 적대감 형성

Ⅳ. 결론

동로마 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원인 분석

김영신(사학과)

1. 서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로마 제국은 기원 후 476년에 멈출 것이다. 왜냐하면 476년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쪽에 천 년 동안 지속된 로마인들의 제 국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은 깜짝 놀랄 것이다. 이 동쪽의 제국은

‘비잔티움(Byzantium) 제국’이라고도 불리는 ‘동로마 제국(330~1453)’이다. 사실 이 명칭도 후대에 붙여진 것이다. 동로마인들이 자신들을 ‘로마인’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의 나라는 로마 제국으로 인식되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의 제국이 이러한 명칭으로 불렸는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명칭은 수도가 그 리스 식민도시인 비잔티온1)에 세워졌기 때문에 만들어진 명칭이다. 그러나 ‘비잔티 움’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2)로 결코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더불어 동로마 제 국을 그리스 지역에 한정시킴으로써 그들을 폄하하려는 의도까지 내포하고 있다. 그러 나 동로마 제국을 그리스 지역에 한정시켜 버린다면 그 실제 모습을 간과하게 되는 것

1) 비잔티온은 현재의 이스탄불에 위치했던 도시로 메가라인 비자스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비잔티움은 바로 비자 스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명칭이다.

2)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서유럽인들은 동로마 제국의 배신 때문에 십자군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였다. 이 러한 이유로 동로마인들은 음흉하고 부정직한 사람들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비잔티움스럽다.”라는 말은 신뢰할 수 없는 것들을 가리키는 비속어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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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동로마 제국은 옛 로마 제국의 영토를 수복하려는 행동을 취하면서 로마 계승 의 식을 분명히 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지가 반영된 명칭이 바로 ‘동로마 제 국’이다. 이를 유념하여 본고에서는 ‘동로마 제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것이다.

동로마 제국의 명칭 문제에서 알 수 있듯이 동로마 제국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당대의 저명한 지식인이었던 볼테르와 몽태스키외는 “동로마 제국사를 반란과 폭동으로 점철된 치욕스러운 역사”라고 표현하였다.3)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의 연장 선상4)이라 인식했던 애드워드 기번조차도 동로마 제국을 쇠락의 역사 로만 바라보았다. “타락하고 무기력한 제국”은 에드워드 기번이 표현한 동로마 제국 이 모습이다. 에드워드 기번(1737~1794년)이 로마 제국 쇠망사라는 명저를 서술한 로 마사 연구자임을 고려한다면 동로마 제국에 대한 당시의 보편적인 인식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타락, 무기력 그리고 비열함이라는 단어가 지난날의 동로마 제국에 대 한 이미지를 지배해왔다. 특히 “비잔티움스럽다”라는 표현은 유럽에서 비아냥의 의미 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이를 잘 나타낸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은 결코 무기력하게 멸망을 기다리기만 한 것과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동로마 사회는 역동적이고 다원적인 사회였다.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외국인들 로 북적이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모습은 다원화된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수도에서 동방정교의 교회와 모스크가 공존했던 풍경은 배타적인 중세 사회에서는 파격적인 것이 었다. 더불어 동로마 제국의 역사적 의미는 상당한 것이었다. 혹자는 프랑크 왕국이 이 슬람 세력을 방어한 사실5)을 강조하지만 동로마 제국의 역할도 그에 못지않게 컸다. 또 한 고대 문화를 보존하여 서양에 전달해줌으로써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서양 중세사 개설서들에서 동로마 제국은 간략하게 다루어질 뿐이었 다.6) 하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점을 개선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의 역사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외국에서의 동로마 연구자의 증가와 관련 서적의 증가가 이를 증명한 다. 그렇다면 동로마 제국이 긴 시간 동안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말처럼 역사의 평가는 시대에 따라 변화됐다. 그러 므로 천년의 시간 속에서 그 이유를 찾는 동시에 시대에 따른 평가의 변화 과정도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동로마 제국의 여러 측면과 역사 인식의 형성과 정을 살펴봄으로써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Ⅱ. 동로마 제국의 계승국의 부재

동로마 제국이 저평가를 받는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계승국이 없었다는 것이다.

계승국이 없다는 것은 동로마 제국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

3) 김차규, 「비잔티움 세계와 서유럽-시각의 차」, 인문과학연구논총 제29호, 명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8. 12, p.32.

4) 당시의 보편적인 인식은 동로마 제국이 그리스계 국가라는 것이었다.

5) 투르-푸아티에 전투는 732년애 벌어진 프랑크 왕국과 후우마이야 왕조와의 전투이다.

6) 김차규, 앞의 논문,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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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의 모자이크/548년7)

[그림 2] 콘스탄티노플 상상도8)

다. 역사는 역사가의 선택으로 만들어진다는 E. H. 카의 말처럼 역서 서술에 있어 역사 가의 역할은 중요하다. 만약 편견이 있는 역사가들이 한 나라의 역사를 다룬다면 그들 의 이익과 관련된 관점만이 반영될 것이다. 동로마 제국사도 이러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동로마 제국사를 다루었던 서유럽의 역사가들이 편견 을 가지고 동로마의 역사를 대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동로마 제국을 대변하는 연구자와 연구가 존재하지 않아 서유럽 중심의 관점에서만 연구가 이루어졌다. 즉 서유럽 중심의 편향된 관점에서 동로마 제국은 자신의 역사를 변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은 동로마 제국의 다원적인 특성과 후기 역사에서의 분열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1. 동로마 제국의 다원화된 사회적 면모

동로마 제국 문화의 특징은 다원화9)된 문화이다. 아시아와 유럽이 교차하는 위치에 있던 동로마 제국은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었고 다원화된 사회를 형성할 수 있었다.

동로마 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는 그리스-헬레니즘 문화였다. 헬레니즘 문화를 기 반으로 로마, 기독교 그리고 중동 문화가 어우러져 동로마 문화가 형성되었기 때문이 다.10) 즉 어떤 하나로 특정할 수 없는 문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서유럽 사람들이 동로마 제국을 타자화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한 예로 1204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 던 십자군들의 기록에 따르면 수도에는 교회와 함께 모스크가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11) 배타적이었던 중세 유럽에서 이러한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반면에 동로마

7) 작가 미상,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막시미아누스 주교의 입장>, 산 비탈레 성당, 547년경.(모자이크) © Wikimedia Commons (산 비탈레 성당은 이탈리아 라벤나에 위치)

이 사진은 동로마 제국의 환관 나르세스(478/480~566/573)를 묘사하였다, 동로마 제국에서는 환관이 황제 의 직무 수행을 도울 뿐 아니라 군사, 재정 부분에서도 중책을 맡았다. 즉 동로마에서 환관은 정치적 엘리트 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8) “reconstruction of the hippodrome of constantinople by antoine helber”, 접속일: 2020. 7. 2.

(http://www.antoine-helbert.com/fr/portfolio/annexe-work/byzance-architecture.html)

콘스탄티노플은 현재의 이스탄불에 위치하였다. 그림에서 도시가 위치한 곳이 유럽 지역이고 반대편이 아시 아이다.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보스포로스 해협을 해상 무역이 번성하였다.

9) 다원화란 사물을 형성하는 근원이 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0) 김차규, 앞의 논문, pp.21~37.

11) 로저 크롤리, 우태영 역, 500년 무역 대국-부의 도시 베네치아, 다른세상, 2012, pp.143~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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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이슬람 세계와 빈번하게 접촉하여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특히 동로마 황궁에 시행되었던 예법의 많은 부분이 이러한 과정에서 형성되었다.12) 이렇듯 동로마 문화는 복합적인 양상을 띠고 있어 한 국가가 계승의식을 형성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었다.

2. 동로마 제국 후기의 분열로 인한 계승 의식의 약화

두 번째로 후기 동로마 제국의 분열도 계승국가 형성에 큰 걸림돌이었다. 임페라토르 혹은 바실레오스라 불리는 황제의 지위는 동로마 계승 의식의 중요 부분이었다. 이것은 동로마 사람들의 정체성을 구성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국가와 자신들을 로마 제국과 연 관지어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1204년 4차 십자군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 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수도가 함락된 동로마 제국은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동로마의 귀 족들은 십자군을 피해 각 지역으로 피신하여 세 개의 국가들을 세웠다. 그리스의 아르 타를 중심으로 세워진 에페이로스 군주국, 니케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니케아 제국 그리 고 트리브존을 중심으로 한 트라베주스 제국이 동로마 귀족들에 의해 세워졌다. 이는 황제가 동시에 세 명이 존재하는 것을 의미했다. 더구나 십자군들이 정복지에 라틴 제 국을 세우고 보두앵 1세를 황제로 세우면서 로마 황제가 가지는 의미는 약화되었다.

1261년 니케아 제국의 미카일 8세는 라틴 제국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였다.

이후 미카일 8세가 동로마 부활을 선포하면서 동로마 제국은 1453년까지 존속하게 된 다. 하지만 4차 십자군이 남긴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인구가 수십만에 달했던 콘스탄 티노플은 황폐화되었고 멸망할 때까지 1204년 이전의 국력을 회복할 수 없었다.13) 국력 이 감소하면서 제국을 통합하는 일도 어려워지게 되어 일부의 지역만을 통합하는 수준 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동로마 제국이 분열된 상태로 유지되었다는 것은 제국 의 완전한 회복이 어려웠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새롭게 부상한 튀르크족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14) 결국 1453년에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지속된 분열은 동로마 제국의 계승 의식을 약화시켰다. 동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오스만 제국, 모스크바 대공국 등이 제국의 상속자임을 자처하 였으나 대부분 이름뿐인 허울에 불과하였다.15) 이러한 한계점 때문에 두 나라의 계승은 다른 국가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발칸 반도 역시 동로마 제국 계승 의식을 가지 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동로마 연구자인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는 동로마 제 국이 세르비아나 불가리아와 같은 슬라브 민족에 미친 영향을 강조하였다.16) 하지만 세 르비아와 불가리아는 동로마의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음에도 동로마 제국과 경쟁한

12) 황제를 접견할 때에 몸을 낮추어 다가가는 행동이나 환관의 존재는 서유럽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이었 다.

13) 이전 시대와 확연한 차이를 보여 이 시기부터 동로마 제국 후기로 구분한다.

14) 튀르크족의 침입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소아시아를 상실하게 되어 원동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소아시아의 물적, 인적 자원은 동로마 제국의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15) 오스만 제국은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족을 모스크바 대공국에서는 슬라브족을 자신들의 기원으로 여겼기 때문 이다.

16)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한정숙·김경연 역, 비잔티움 제국사 324~1453, 까치, 2010, pp.394~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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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적인 국가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동로마 제국은 다양한 국가들에 영향을 주었 지만 정작 자신을 대표할 직접적인 계승국가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동로마 계승 의식은 후기의 분열 상황으로 인해 약화되어 소멸해간 것이다.

3.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의 민족주의 역사 인식의 확대

동로마 제국의 계승국가를 가지지 못한 세 번째 이유는 민족주의의 발흥과 깊은 관련 이 있다. 앞서 말한 동로마 제국의 다원적인 특징에서 볼 수 있듯 동로마 제국은 한 민 족의 영역으로 특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민족주의의 확산으로 각 지역에서 민 족주의적인 역사 인식이 확대됨에 따라 이는 더욱 심화되었다. 민족주의적 역사 인식은 자신이 속한 국가나 민족을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보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과 관련된 내 용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동로마 제국에 대한 관점은 각 지역마다 다른 양상을 보였 다.17) 대표적으로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와 같은 슬라브계 국가들, 그리스 그리고 중동 지 역으로 나눌 수 있다. 각 지역의 민족주의가 다른 방향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각자의 방향성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8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발칸 반도의 각 지역에는 민족주의 운 동이 확산되었다. 세르비아에서는 대세르비아주의18)가 확대되어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대세르비아주의는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응하기 위한 측면이 강하 였다. 세르비아 민족주의는 자주성과 슬라브 민족을 강조하여 세르비아에 영향력을 확 대하려는 두 제국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세르비아 제국19)과 세르비아 왕국 의 역사를 강조하게 되었다. 세르비아 왕국과 제국의 역사에서 동로마 제국은 경쟁자이 자 적으로 존재하였다. 이 때문에 세르비아에서는 동로마 제국에 대해 부정적인 관점이 형성되었다. 특히 외세와 대적하였던 저항정신을 강조하면서 1389년의 코소보 전투20)를 신화화하였다. 하지만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가 동로마 제국의 요새 도시에서 기원하였듯이 동로마 제국의 영향은 불가분한 것이었다. 또한 종교와 문화 영역에서도 많은 문화적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세르비아 민족주의로 인해 세르비아 와 대립 관계에 있었던 동로마 제국의 역사는 주목받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 동로마 제국은 발칸 반도, 중동 지역 그리고 크림 반도와 같은 넓은 지역을 다스렸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18) 대세르비아주의는 19세기에 세르비아가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독립한 이후로 확대된 세르비아의 민족주의 운동이다. 대세르비아주의는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발칸 반도의 남슬라브족을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남슬라브계 민족이 거주하는 보스니아 지역을 차지하자 양국 간에 큰 갈등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이는 결국 1914년에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는 계기가 되어 1차 세계 대전의 발발 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 세르비아 역사상 최고 전성기로 세르비아의 왕인 스테판 두샨은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여 많은 영토를 정복 하였다.

20) 코소보 전투는 세르비아와 오스만 제국 간 1389년 6월 16일에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세르비아 왕 을 비롯한 세르비아 군대는 큰 피해를 입고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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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세르비아 제국(1346년~1371년)의 영역21)

[그림 4] 코소보의 소녀/우로시 프레디치/1919년22)

동로마 문화의 중요 요소인 그리스 문화의 본고장인 그리스도 한계를 가지긴 마찬가 지였다. 그리스의 민족주의는 1821년 오스만에 대한 봉기로 시작되었다.23) 그리스 민족 주의는 모든 그리스인의 거주지역을 합치자는 대그리스주의로 확대되었다. 위대한 이상 이라고도 불리는 대그리스주의는 궁극적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국가를 건설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팽창주의는 그리스와 터키 간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 러한 인식은 그리스와 터키인들을 나누는 기준이 불분명하여 큰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 다. 동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던 아나톨리아 반도에서는 동로마와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겪으며 문화융합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민족을 나누는 기준을 종교로 설정하였다.24) 그 결과 언어나 거주지와는 상관없이 민족이 나누어졌다. 결국 대그리스주의는 전쟁의 패배와 인구 이동이라는 결과를 남기고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이와 같은 민족주의적 인 식은 다원적인 동로마 사회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으며 오히려 동로마 시대부터 내려오던 전통들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대그리스주의로 인한 전쟁으로 그리스 와 터키에서의 문화 공존의 전통이 크게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회복하자는 대그리스주의가 좌절되자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주목받기 시작하면 서 그리스에서 동로마 제국사에 대한 관심도도 줄어들었다.

21) 고대 발칸 국가의 역사, 베오그라드 대학교, 1922. © Wikimedia Commons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ap_of_the_Serbian_Empire,_University_of_Belgrade,_1922.jpg) 22) 우로시 프레디치(Uroš Predić), <코소보의 소녀>, 베오그라드 시립 박물관, 1919.(캔버스에 유채) ©

Wikimedia Commons

위 그림은 코소보 전투 이후의 상황을 묘사한 그림이다. 세르비아의 저항정신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23) 그리스인들은 도나우 공국과 펠로폰네소스 등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개입으로 독립하게 된다.

24) 이슬람교를 믿으면 터키인으로 그리스 정교를 믿으면 그리스인으로 분리하였다.

25) 테오도로스 브리자키스(Theodoros Vryzakis), <The Bishop of Old Patras Germanos Blesses the Flag of Revolution>, 아테네 국립 미술관. 1865.(캔버스에 유채) © Wikimedia Commons

그리스인들의 봉기를 묘사하는 그림이다. 그리스인들의 복장과 무기에서 터키문화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이 것은 당시 그리스인들과 터키인들의 문화적 교류를 보여주는 것이다.

26) <Current History 1919>. New York Times, 1919. © Wikimedia Commons

이 지도는 오스만 제국이 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하자 파리 회의에서 논의된 영토 분할 계획 지도이다. 대그리 스주의에 입각하여 고대 그리스인들의 거주지를 모두 포함시켰다. 하지만 그리스가 터키 독립전쟁에서 패배하 고 그리스-터키 간의 인구 교환이 이루어지면서 대그리스주의는 점차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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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그리스 독립전쟁(1821년~1829년)25) [그림 6] 대그리스주의가 반영된 지도26)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중동 지역에서는 동로마 제국이 타자화되었다. 중동 지역의 이슬람 제국에 정복되어 이슬람화되었기 때문이다. 중동 지역의 동로마 제국에 대한 타 자화는 정복 이전 지역들의 적대감과 이슬람 제국의 정복 정신 때문이었다. 이슬람의 정복 이전 이집트와 시리아 등지에서는 수도와 다른 신앙 개념인 단성론27)을 신봉하였 다. 동로마 정부는 정통 이념과는 달랐던 단성론을 이단으로 여기고 탄압하였다. 현지 주민들은 이러한 탄압 정책에 크게 반발하였고 동로마 정부에 대하여 큰 적대감을 가지 게 되었다. 이러한 적대감은 동로마 제국의 적들이 이 지역들을 손쉽게 점령하는 요인 으로 작용하였다.28) 현지 주민들은 동로마 제국보다 이슬람 제국을 더 선호하여 이슬람 제국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실제로 극소수의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은 저 항하지 않고 항복하였다. 이슬람 제국은 정복지의 협조 덕분에 세력을 급속히 확대할 수 있었다. 또한 무슬림들은 선지자 무함마드가 콘스탄티노플을 이슬람 세력이 차지할 것이라는 예언을 믿으며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정복의식을 키워갔다. 물론 동로마 제국 과 이슬람 세계가 활발히 교류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립의 역사도 길었다. 즉 이슬 람 세계에서는 동로마 정복의식을 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동로마에 대한 목표의식은 튀르크족의 소아시아 정복 과정에서 가지 정신29)으로 크게 두드러진다. 소 아시아의 튀르크족은 이러한 가지 정신을 바탕으로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여 세력을 확 대하여 마침내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켰다. 이러한 이슬람의 동로마에 대한 정복 정신은 동로마 제국을 타자화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Ⅲ.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간의 대립

동로마 제국이 부정적 평가를 받게 된 주요 요소 중 가장 큰 이유를 차지하는 것은 서유럽 세계와의 갈등이다. 갈등의 이유에는 종교적⦁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각기 다른 이유가 있지만 동로마 제국이 서유럽 세계와 대립적 관계에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27) 기독교의 정통교리에서는 예수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진다고 정의하였다. 하지만 단성론은 신성과 인성 둘 중 하나만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동로마 제국에서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집트 등지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

28) 김차규, 「비잔티움에 대한 이슬람의 공격(7세기~8세기 초): 초기공격의 성공 원인에 대한 분석」, 한국서양 중세사학회 연구발표회 52권, 한국서양중세사학회, 2008, pp.1~13.

29) 가지 정신이란 이교도에 대한 성전의식을 가리키는 말로 소아시아에 진출한 튀르크족의 정복 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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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동로마 제국의 황녀가 혼인한 우호적인 교류도 적지 않았 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가톨릭과 동방정교 간의 분열30),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동방진 출 등을 겪으며 동로마 제국은 경제, 종교, 군사적 압박뿐만 아니라 정체성까지 서유럽 세계의 압박을 받았다. 이러한 갈등은 동로마인들에게 반서방 혹은 반라틴 정서를 가지 게 하였다. 그들의 눈에는 동로마 제국에서 면세와 같은 혜택을 받으며 제국을 압박하 는 서방 사람들이31) 좋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적대감은 콘스탄티노플에서 1182년에 서유럽인들에 대한 폭동과 학살이 일어났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호 간의 적대감은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론 적으로 서유럽과 동로마 제국의 갈등은 편파적인 역사 서술을 낳아 비잔틴주의32)가 탄 생하는 배경이 되었다는 점에서 동로마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초래하였다.

1. 로마 계승의식을 둘러싼 서방 세계와의 경쟁

동로마 제국의 정체성 중 가장 큰 부분은 로마 계승 의식이다. 동로마인들은 자신들 을 로마인이라 칭하고 외교문서에서도 이러한 점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800년 12월 25 일에 샤를마뉴가 서로마황제의 관을 받은 이후 로마 계승 의식에 대한 동로마와 서유럽 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자신들을 로마 제국의 유일한 계승국이라 여기던 동로마인들 은 이에 강력한 불만을 품었다. 샤를마뉴가 동로마 제국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동로마 여황제 이리니에게 청혼하자 동로마인들은 이리니를 몰아내었다.33) 더불어 로마 정체성 에 대한 서로마의 도전을 무시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마 교황은 동 로마 제국의 간섭을 피하고자 프랑크 왕국을 적극 지지하였다. 샤를마뉴에게 서로마 황 제의 관을 씌어주기도 하였지만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라는 위조 문서를 만들어 동로 마 제국의 권위를 실추시켰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로마 황제인 콘스탄티누스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면서 로마시와 서방 제국의 권리를 교황에게 넘겼다는 내용 을 담은 문서이다. 이는 교황이 서방 황제를 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동 로마 황제의 우위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는 우월한 지위를 내세워 이탈리아 에 개입하는 동로마 황제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것이었다. 샤를마뉴가 서로마 황제 의 관을 받은 이후 서유럽에서는 동로마인들을 그리스 제국이라 표현하며 자신들의 정 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사실 이러한 인식은 고대 로마 제국 시대부터 기원 한 것으로 라틴 문화와 그리스 문화의 차이점이 인식되고 있었다. 즉 고대부터 시작된

30) 1054년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로마 교황의 사절단이 서로 상대를 파문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기독교 가 동방정교와 로마가톨릭교가 분리되는 사건으로 여겨진다.

31) 당시 지중해에서는 제노바나 베네치아와 같은 도시국가들이 무역로를 장악하기 위한 각축장이 되었다. 특히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로였던 동로마 제국은 무역을 위해 꼭 차지해야 하는 지정학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두 도시국가는 무력사용도 불사하고 동로마 제국과의 무역을 독점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동로마를 압박하여 면세 혜택을 얻어내었을 뿐만 아니라 수도 근처에서 두 도시국가 간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 로마인들은 경제적 불이익뿐만 아니라 제국의 안전도 위협받게 되었다.

32) 비잔틴주의는 앞서 말한 서유럽에서의 동로마 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말한다.

33) 이리니(752~803)는 동로마 제국의 여제이다. 이리니는 서방과의 굴욕적인 외교와 아들의 폐위 문제로 대중 의 지지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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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과 동방의 지역주의는 샤를마뉴의 대관식을 거치며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되었 다. 이러한 갈등은 군사적인 행동으로 이어져 동로마의 니케포로스 황제는 807년에 베 네치아와 달마티아에 원정대를 파견하였다. 비록 이 공격은 실패하지만 서방과의 군사 적 충돌이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갈등 상황은 종교적인 범위로까 지 확대되어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와 로마 교황의 사절단 간에 서로 파문을 내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종교적⦁정치적 갈등은 동로마 제국과 서방 세계와의 적대 감을 심화시켰다.

2.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두 세계 간의 적대감 형성

1204년에 성전(聖戰)을 위한 군대가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콘스탄티노플 을 점령하여 약탈하였다. 신앙을 위한 군대가 같은 뿌리인 기독교 도시를 공격한 모순 적인 상황은 서방과 동로마 제국 간의 이해관계와 적대감이 빚어낸 결과였다. 4차 십자 군 전쟁이 있기 약 100여 년 전 십자군 운동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알렉시우스 1세의 군사 원조 요청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소아시아에서의 외교 실패로 영토 를 대거 상실하고 수도까지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다. 알렉시우스 1세는 동로마 제국의 힘만으로는 소아시아를 수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위기를 극복하고자 서방에 도움 을 청하였다. 하지만 동로마군과 함께 싸울 정규군 부대를 기대하던 황제의 예상은 크 게 빗나갔다. 동방의 도움 요청이 서방에서 큰 관심을 끌면서 무질서한 민중십자군이 등장하는가 하면 서방 영주들의 십자군은 독자적으로 행동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십자군과 동로마 제국 간에는 많은 의견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동로마 제국은 십자군들에게 물자를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지역민들을 보호 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였다. 당시의 십자군은 일반적인 군대와는 다른 복잡한 속성을 지닌 집단이었다. 신앙을 위해 움직이는 영주도 있었고 개인적인 야망을 위해 참가한 영주도 있었기 때문이다. 동로마 제국과 십자군 간의 관계는 십자군이 안티오크를 포위 할 때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거리 문제34) 때문에 동로마의 지원 물자가 늦어지고 알렉 시우스 1세가 내부 문제로 지원군 파견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십자군은 이를 계기로 동 로마 제국과 황제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서방의 동로마 제국에 대한 이 미지를 악화시켰다. 특히 십자군을 이끌었던 보에몬드는 교황에게 알렉시우스 1세에 대 한 날조된 보고서를 제출하여 동로마 제국에 대한 적개심을 일으켰다. 또한 보에몬드는 동로마 제국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황의 동의를 얻어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 였다. 비록 그의 공격은 대실패로 끝나지만 십자군이 언제든 동로마 제국을 공격할 수 있음을 암시하였다. 이후 2차 십자군이 실패로 끝나면서 동로마 제국과 황제에 대한 비 판론은 점점 힘을 얻게 되었다. 십자군이 실패한 이유는 모두 동로마 제국 때문이라는

34) 1차 십자군은 그림 7처럼 내륙 안쪽으로 진군하였다. 이는 식량 수송이 수월한 해안선보다 보급이 어려워짐 을 의미하였다. 더불어 십자군이 안티오크에 도달하였을 시기는 수확철이 지난 뒤여서 동로마 제국은 식량을 모으는데 시간이 더 걸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십자군으로의 식량 수송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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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1차 십자군의 진격로35) [그림 8] 타란토의 보에몬드36)

것이었다. 그 증거로 십자군의 행적에 관해 다룬 「프랑크인의 연대기」 등의 기록에서는 알렉시우스 1세와 동로마 제국을 매우 부정적으로 서술하였다. 그 후 알렉시우스 1세와 후대 황제들에 대한 인신공격들이 계속 이루어졌으며 동로마 정벌론이 대두되었다. 즉 4차 십자군은 특정한 요건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이전부터 계속 이어진 갈등의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십자군 전쟁은 동로마 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형성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인이 된 것이다.

Ⅳ. 결론

비잔틴주의는 앞서 말한 서유럽에서의 동로마 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말한다.

특히 알렉시우스 1세와 후대 황제들은 서방의 기록에서 심심찮게 인신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평가가 과연 정당한지에 대한 물음에는 앞서 말한 요인들로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동로마 제국사의 특수성이나 역사적 상황 때문에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플 함락일인 1453년 5월 29일을 끝으로 자신을 변호할 수 없었다. 따라서 동로마 제국의 특성뿐만 아니라 역사적 관점이 형성되어가는 과정도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요 인들을 고려했을 때 동로마 제국에 대한 인식은 다소 왜곡됐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구자들은 역사 연구에 있어서 과거의 상황은 물론 현재 상황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의 동로마 연구자들의 과제는 이러한 점들을 극복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동로마 제국사 연구는 매우 한정적이지만 동로마 제국의 역사의 편파적 서

35) 1차 십자군의 진격로 © Wikimedia Commons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yzantium_after_the_First_crusade.PNG)

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것에 대한 지원을 받는 대신 탈환하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동로마 제 국에 반환하기로 약속하였다. 실제로 안티오크에서 갈등이 벌어지기 전까지 많은 영토가 동로마 제국에게로 돌아갔다. 지도의 진한 보라색이 동로마 제국이 수복한 영토이다.

36) 메리 조제프 블롱델(Merry-Joseph Blondel), <보에몬드 1세의 초상>, 베르사유 궁전, 1843.(캔버스에 유채)

© Wikimedia Commons

보에몬드와 그의 아버지 로베르 기스카르 동로마 황제인 알렉시우스 1세의 숙적이었다. 부자는 동로마 제국 을 차지하기 위해 알렉시우스 1세와 전쟁을 벌였다. 십자군에 참가한 보에몬드는 니케아, 드릴라이움, 안티오 크에서 많은 공을 세운다. 이후 동로마 제국과의 약속을 어기고 안티오크를 차지한다.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 을 위해 교황에게 날조된 보고서를 보내는 등의 행동으로 동로마 제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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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의 사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중립적인 태도의 중요성은 모든 분야의 연구자들에게도 교훈이 될 것이다.

참고 문헌 1. 논문, 저서

김차규, 「비잔틴 시대에 나타난 동·서 지역주의」, EU연구 제11호, 한국외국어대학 교 EU연구소, 2002.

______, 「비잔티움에 대한 이슬람의 공격(7세기~8세기 초): 초기공격의 성공 원인에 대 한 분석」, 한국서양중세사학회 연구발표회 52권, 한국서양중세사학회, 2008a.

______, 「비잔티움 세계와 서유럽-시각의 차」, 인문과학연구논총 29집, 명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8b.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한정숙·김경연 역, 비잔티움 제국사 324~1453, 까치, 2010.

로저 크롤리, 우태영 역, 500년 무역 대국-부의 도시 베네치아, 다른세상, 2012.

피터 프랭코판, 이종언 역, 동방의 부름, 책과함께,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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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 서론

2. 본론

2.1. SNS 마케팅 전략과 방법 2.1.1. SNS 마케팅의 종류와 특징

2.1.2. SNS를 사용한 마케팅의 주 전략 – 인스타그램 마케팅을 중심으로 2.2. SNS 마케팅의 강점과 약점

2.2.1. SNS 마케팅의 강점 및 효과 2.2.2 SNS 마케팅의 약점

2.3. SNS 마케팅 수용 시 주의할 점 3. 결론

SNS 마케팅 전략 및 방법과 그에 따른 효과 -인스타그램 마케팅을 중심으로-

박예린(국어국문학과)

1. 서론

SNS란 유사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 관계망이나 관계를 구축해 주고 보여주는 온라인 서비스 혹은 플랫폼1)이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인구가 증가하자 SNS의 사용도 자연스럽게 따라 증가하게 되었다. 2019년 12월, 국내 빅데이터 전문기업 아이지에이웍 스는 국내 사용자가 많은 앱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이 조사에 따르면 네이버밴드 (1754만 명), 인스타그램(1157만 명), 페이스북(1104만 명), 카카오스토리(1092만 명) 순으 로 이용자가 많았고, 이것들은 모두 SNS 앱에 해당한다.2) 이렇게 SNS는 많은 수의 사용 자를 기반으로 하여 현재 10대에서부터 40대까지 어울러 현대인들의 일상에서 상당히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거대한 플랫폼으로 성장한 SNS는 일상의 변화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분야, 그 중에서도 ‘마케팅’ 분야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마케팅은 상품이나 서비스를 소비자에게 유통하는 데 관련된 경영 활동을 일컫는 말 로, SNS 마케팅이라 함은 곧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등의 SNS를 통한 경영 활동을 말하

1) SNS 네이버 지식 백과 검색 결과. 검색일: 2020. 6. 5.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526243&cid=42171&categoryId=42180) 2) 윤희은, 「작년 최다 이용 앱은 카톡, 국민 10명 중 7명이 사용」, 한국경제, 2020.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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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다. 마케팅의 성공 유무는 해당 상품과 서비스의 판매유통에 있어 성공, 실패와 직결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마케팅이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고, 상품을 사고파는 데 있어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SNS 중 ‘인스타그램’을 기반으로 하여 SNS 마케팅 에 대해 분석해보고자 한다.

2. 본론

2.1. SNS 마케팅 전략과 방법 2.1.1. SNS 마케팅의 종류와 특징

우선, SNS가 마케팅의 새로운 도구로 급부상하게 된 이유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SNS 활용 이전에 사용하던 마케팅 방식과 SNS 마케팅의 차이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SNS를 마케팅의 도구로 사용하기 이전에는 텔레비전의 방송을 활용하는 방식이나 신문이나 잡 지 등에 지면 광고를 싣는 방식이 가장 보편적이었다.3) 한편, 현대 사회에서 SNS 마케 팅은 스마트폰 앱 내의 작은 광고 배너부터 SNS 이벤트 참여형 광고 마케팅, SNS 영상 광고 등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앱과 SNS의 종류에 따라 그 특징에 맞추어 마케팅을 진 행하기 때문에 종류와 형태가 매우 다양한 편이다.

텔레비전과 신문, 잡지를 통한 마케팅의 경우 소비자에게 광고를 일방적으로 주입시 키는 경향이 강했다. 이러한 마케팅 방식의 경우 소비자는 일차적으로 광고를 본 후, 상 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두 단계만 거치면 된다. 반면, SNS 마케팅의 경우는 인터넷, 네트워크 서비스가 가지는‘양방향적 소통’이라는 특징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소비 자가 마케팅을 받아들인 후에 그것을 재생산하고, 공유하는 등 직접적인 참여 과정이 추가되어 커뮤니케이션의 형태가 더해진 것이다.

2.1.2. SNS를 사용한 마케팅의 주 전략 – 인스타그램 마케팅을 중심으로

마케팅의 도구가 되는 다양한 SNS 앱들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것이 바로 ‘인스타 그램’이다. 인스타그램 마케팅 전략 중 ‘해시태그(#, hash tags)4)’를 활용한 마케팅 이 가장 보편적이다. 해시태그는 주로 인스타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내에서 유저가 지 명 혹은 특정 단어와 문구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다. 현재는 SNS만이 가지는 이러한 기능을 마케팅에 적극 활용하고 있는데, 이벤트와 마케팅에 참여한 사람들이 해시태그 를 통해 특정한 단어를 전파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낸다.

해시태그 마케팅 방식을 활용한 사례를 살펴보자. 위에 제시한 그림은 음악 플랫폼인

3) 김상훈·안대천, 「SNS유형별 광고속성 평가 및 태도에 관한 연구: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유튜브의 비교」,

광고학연구, 제23권 3호, 한국광고학회, 2012, p.57.

4) 해시태그(#, hash tags)란 단어나 여백 없는 구절 앞에 해시 기호 ‘#’을 붙이는 형태의 표시 방법을 이야기한 다.(해시태그 네이버 지식 백과 검색 결과. 검색일: 2020. 6. 5.)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9481&cid=59088&categoryId=59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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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플로와 유라이크의 고객참여형 이벤트

[사진 2] ‘Ulike-FLO’필터로 촬영한 사진을

‘#태연앨범필터’라는 지정 해시태그와 함께 게시해 이벤트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

‘플로(FLO)’와 카메라 어플인 ‘유라이크(Ulike)’의 마케팅 방법의 일면이다. 플로는 2020년 3월 1일까지 뷰티 카메라 어플인 유라이크를 통해 ‘Ulike-FLO’ 필터를 제작한 후 고객 참여형 이벤트를 진행했다.5) 유라이크 어플 사용자가 ‘Ulike-FLO’ 필터로 사 진을 촬영한 후에 그것을 필수 해시태그와 함께 인스타그램에 게시하는 형식이었다. 해 시태그를 통해 사진을 업로드한 사람들에게 추첨을 통해 경품을 증정하는 동시에 이벤 트 페이지를 방문하기만 해도 플로를 1개월 동안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혜택을 제공하 였다. 이러한 마케팅을 통해 이벤트 참여율을 높인 유라이크는 단기간에 어플 다운로더 를 늘리는 데에 성공했다. 또한, 플로는 유라이크 필터 사용자와 신규 다운로더들의 음 악 플랫폼 체험을 자연스럽게 유도하여 자사 서비스를 홍보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또 다른 마케팅 전략으로는 ‘사용 후기’를 활용하는 전략이 있다. 사용 후기를 활용 하는 전략은 말 그대로 어떠한 제품의 사용 후기를 SNS에 노출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 지는 마케팅 방식이다. SNS 마케팅이 아닌 텔레비전 광고나 신문의 지면 광고의 경우, 제품과 서비스를 설명하고, 장점 혹은 효과에 대해 광고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 다. 그러나 이 전략에서는 제품을 직접 구매해 사용해 본 사람들의 사용 과정과 그 후기 를 사진 또는 영상으로 게시하여 소비자에게 신뢰감을 안겨주고, 소비를 촉진한다. 화장 품이나 다이어트 식품의 판매 효과를 보기 위해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다이어트 식품을 판매하는 ‘티트리트’는 자사의 제품인 ‘여우티’의 마케팅 전략 으로 위의 전략을 사용하였다. 티트리트는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 고객 후기를 모아 놓은 공간을 따로 마련하여 제품의 실질적인 구매 후기 게시물들을 모아 놓았다. 또, 인 기 걸그룹 ‘여자친구’의 멤버인 소원의 사용 후기 영상을 인스타그램에 게시하고, 인 용하여 제품을 홍보하였다. 그 결과 1년 만에 여우티 134만 세트를 판매 완료했고, 제품 의 이미지를 소비자에게 각인시키는 효과를 보았다.

5) 홍은기, 「플로, 유라이크를 통해 ‘Ulike-FLO’ 필터 공개」, PRESS9, 2020.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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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여우티 구매 및 복용 후기를 이야기하는 여자친구 소원

[사진 4] 티트리트 공식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게시되어 있는 고객 후기

[사진 5] 2019년 3월 21일 매일우유 공식 페이스북에 게시된 매일우유 #우유속에

어쩌구 해시태그 챌린지 관련 공지

[사진 6] 매일우유 해시태그 챌린지 이벤트 참여 예시

SNS상에서 챌린지(challenge)를 진행하는 방식 또한 최근 새롭게 떠오르는 전략 중 하 나이다. 지난 2014년 루게릭병 환자를 돕기 위한 ‘아이스버킷 챌린지’에 국내외 다양 한 유명 인사가 참여했다. 쉽고, 간단한 방식과 유명 인사의 참여라는 두 조건이 맞물려 크게 유행하게 되었고, 엄청난 속도로 기부금을 모을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누구나 따 라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면서도 재미있는 챌린지는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도서 판매, 노래 홍보, 상품 광고 등의 마케팅 분야로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2020년에 들어 가수 지코의 ‘아무노래 챌린지’가 크게 성공하게 되어 영상 조 회 수 1억 뷰를 달성하고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화제성은 곧장 음원 수익으로 이어졌고, 아무노래 챌린지 이후 현재 SNS 챌린지는 고객참여형 마케팅 전략에 필수적 인 것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챌린지를 활용한 마케팅 중 대표적인 사례로 ‘매일우유 #우유속에 어쩌구 해시태그 챌린지’가 있다. 지코의 아무노래 챌린지 이전에 등장했던 챌린지 중 하나로, 매일우유 상품을 홍보하고, 판매를 촉진하기 위한 챌린지이다. 우유갑에 인쇄된 글자를 조합하여 단어나 문장을 만들고, 해시태그를 걸어 인스타그램에 게시하는 방식이다. 참여 방법이 매우 간단하고,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던 이 챌린지는 시작한 지 6일 만에 1만 4,000여 개의 해시태그를 생성했다.6) 2018년 시작된 이 챌린지는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는 매일우유 제품을 소비자들에게 알리는 데에 그치지 않고, 실제 구매까지 연 결한 성공적인 마케팅 사례라고 볼 수 있다.

6) 소셜마케팅코리아, 「지코와 우유 속에, 챌린지 마케팅의 시작」, 소셜마케팅코리아블로그. 검색일: 2020.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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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SNS 마케팅의 강점과 약점 2.2.1. SNS 마케팅의 강점 및 효과

SNS 마케팅은 특히 지금과 같은 현대 사회에서 강점을 지니는 마케팅 방식이다. 현재 는 누구나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SNS를 이용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SNS 마케팅은 잡지와 신문, 텔레비전보다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이, 더 자주 노출된다. 광고나 홍보 게시물이 자주 노출될수록 해당 상품과 서비스에 사람들은 익숙해질 것이고, 익숙함은 유대감, 신 뢰감, 친밀감까지 이어질 수 있다. 또한, SNS 마케팅은 이전의 마케팅이 가지는 시공간 적인 한계에서 탈피했을 뿐만 아니라 특유의 참신함과 재미를 통해 사람들의 흥미를 자 극하고, 호감을 일으킬 수 있다.7) 특히, 앞서 이야기한 다양한 챌린지와 같은 이벤트성 마케팅은 수용자의 이목을 끌기 쉽다. 또, 이와 동시에 수용자들에게 참여를 요구하여 하나의 유행으로 만들어내 ‘이 상품을 구매하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상 품과 서비스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효과가 있다.

2.2.2. SNS 마케팅의 약점

그러나 모든 것에 이면은 존재하듯이, SNS 마케팅 역시 무조건 성공하는 마케팅 방식 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SNS 마케팅은 대중에게 쉽게 노출되기 때문에 강점을 지니 는 동시에 약점을 지닌다. 현대인들은 다양한 포털 사이트와 인터넷 기사, SNS로부터 하루에도 몇백 가지의 정보를 접하게 된다. 다양한 정보를 쉽게 접하게 된 만큼 사람들 은 유행에 민감해지고, 어떠한 이슈에 대해 금방 흥미를 잃게 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단 순 정보를 접할 때 외에도 광고를 볼 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유행이란 것은 말 그대 로 한철에 불과하고, 한때 크게 사랑을 받다가 잊히는 것이 부지기수이다. SNS 광고와 상품 홍보 배너들이 쏟아져 나오는 현시점에서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지 못하는 마케팅 은 수익으로 이어지지 않고, 곧 마케팅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의 유희성과 중독성을 지니거나 새로 운 방식과 소재의 사용으로 그것이 사람들의 인상에 남아야만 효과를 볼 수 있고, 이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2.3. SNS 마케팅 수용 시 주의할 점

SNS 마케팅에서 정보를 수용하고, 소비하는 입장에 놓인 사람들에게는 주의해야 할 부분이 존재한다. 우선, 모든 광고를 받아들일 때와 마찬가지로 정보를 적절하게 판단해 선별적으로 수용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SNS 마케팅 역시 일반적인 마케팅과 마찬가지로 과장 광고, 왜곡된 정보 등을 포함할 수 있기 때문이다. SNS 마케팅 방식 중 소비자의

7) 허재강·이상헌·엄금철, 「SNS 이용자에게 지각된 광고의 속성이 구매의도에 미치는 영향 : SNS이용동기의 조 절효과를 중심으로」, 마케팅논집 제27집 제2호, 한국전략마케팅학회, 2019. 6,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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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를 요구하는 형식의 이벤트는 그 양상이 과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벤트에 지 나치게 몰입하거나 자신의 신체적 능력과 금전적인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상태로 마케 팅 이벤트에 참여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SNS 마케팅 이벤트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는 무엇보다 개인정보의 철저한 관리와 보호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텔레비 전 광고나 신문, 잡지의 지면 광고와 다르게 SNS 광고나 이벤트는 다른 사람들의 참여 내역을 살펴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보가 노출되는 형태의 이벤트에 참여할 경우 개인 정보 유출에 대해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또한, SNS 마케팅 중 일부는 배너를 통해 웹 사이트로 이동하는 형식도 존재하기 때문에 링크의 주소가 유효한 것인지, 스팸은 아닌지 거듭 확인해 보아야 한다.

3. 결론

지금까지 SNS 마케팅의 특징과 전략에 대해 알아보고, 사례를 통해 그 효과에 대해 알아보았다. SNS의 특징과 장점을 적절히 경영에 활용하여 경제적인 이익을 얻고, 여기 서 그치지 않고 사람들에게 유쾌함을 선사하기도 한다. 또한, 일부 SNS 마케팅은 세계 적인 트렌드로 자리 잡아 기대 이상의 긍정적인 효과를 보고 있다. SNS 마케팅은 앞으 로도 이러한 긍정적인 면모를 유지해 나가야 한다. 마케팅을 기획할 때에는 SNS의 특징 을 제대로 이해하고, 마케팅의 경제적 효과를 끌어올리는 데에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해 야 한다. 또, 일상의 특별한 이벤트로 소비자에게 재미를 주는 동시에 신뢰를 주어 유희 성과 정확성 사이 균형을 이루며 마케팅을 진행해야 한다. 한편, 소비자들은 SNS 광고 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만을 선별하여 수용하고, 알맞은 방법으로 이벤트에 참여함 으로써 올바른 소비문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참고 문헌 1. 논문, 저서

김상훈·안대천, 「SNS유형별 광고속성 평가 및 태도에 관한 연구: 블로그, 트위터, 페 이스북, 유튜브의 비교」, 광고학연구, 제23권 3호, 한국광고학회, 2012, pp.53~84.

허재강·이상헌·엄금철, 「SNS 이용자에게 지각된 광고의 속성이 구매의도에 미치는 영향 : SNS이용동기의 조절효과를 중심으로」, 마케팅논집 제27집 제2호, 한 국전략마케팅학회, 2019. 6, pp.40~54.

2. 인터넷 기사, 사이트, 블로그

(25)

네이버 지식 백과사전

소셜마케팅코리아, 「지코와 우유 속에, 챌린지 마케팅의 시작」, 소셜마케팅코리아블 로그, 2020. 6. 3.(https://blog.socialmkt.co.kr/561?category=530484)

윤희은, 「작년 최다 이용 앱은 카톡, 국민 10명 중 7명이 사용」, 한국경제, 2020. 1.

13.

홍은기, 「플로, 유라이크를 통해 ‘Ulike-FLO’ 필터 공개」, PRESS9, 2020. 2. 17.

(26)
(27)

또 다른 ‘칼라스’에 대한 경계와 다시 생각하는 ‘관용’

배희진(경영경제대학 경영학부)

내가 이 글을 쓰는 동안 누군가는 자고, 누군가는 술을 마시고, 누군가는 싸우고 죽이 며,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내가 바라는 세상을 다른 누군가도 함 께 꿈꾸고 있을 것이라는 착각이 허용되지 않는다. 현재 세계는 코로나바이러스라는 하 나의 사태를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가치관과 생활방식에 따른 대응으로 우 리는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우리는 불과 다섯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바이러스 때문에 전 지구가 국가 혹은 도시 단위로 빗장을 걸게 되리라 예측하지 못했던 것을 생 각해야 한다. 확실함과 모호함, 화합과 대립이 하나의 장으로 공존하는 시대에서 우리는 같으면서도 다른 서로의 타자를 어떤 표정으로 마주해야 하는가?

1762년 프랑스 툴루즈의 개신교 가정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아들이 집안에서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이에 가톨릭 신자로 구성된 군중은 68세의 신교도 아버지와 다른 가족 들이 아들을 죽였다는 광적인 주장으로, 합리적 의심이나 사실 규명 없이 아버지 ‘칼 라스’를 재판하도록 하여 사형에 처하였다. 이 사건에 관해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 (1694~1778)는 가톨릭 신자들의 종교적 만행에 격분하여 칼라스 사건의 재심을 주장하였 고, 3년간의 노력 끝에 칼라스가 무죄를 선고받게 하였다. 이후 볼테르는 이 사건을 토 대로 ‘관용론’을 저술한다.1)

볼테르는 무지와 불안에서 오는 맹목적인 두려움과 혐오가 다른 사람과 자신의 온전 한 삶을 해친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세상을 합리적이고 과학 적인 이성으로 파악하여 지식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사태를 파악해야 한다고 했으며, 자유와 평등을 기초로 한 사회에서 ‘관용’의 덕목을 갖춘 사람들을 진정한 시민으로 생각했다.2)

시간과 장소는 다르지만 유사한 혐오가 현대에도 나타나고 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지침이 발표되면서, 모여 있는 사람들의 풍경이 혐오의 대상 이 되었고, 외국인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코로나바이러스 전파자라는 시선을 감내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최근 한국에서는 해외에서 입국한 사람들이 기피 대상이 되었고,

‘신천지’라는 종교 단체는 그 구성원들의 실체와 무관하게 사회적 악으로 지탄받고 있다. 또한 공공장소에서는 잔기침하는 것조차 사람들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이러한 현 상은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무지와 불안에서 비롯한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처음 한국에 상륙했을 때, WHO와 한국의 보건복지부는 증상이 없 는 경우 전염은 발생하지 않으며 마스크를 쓰는 것으로 충분히 예방 가능하다고 발표하 였다. 그 결과 하나에 600원~2,500원 사이의 가격에서 거래되던 KF94 마스크가 인터넷

1) 김응종, 관용의 역사, 푸른역사, 2015, pp.372~384.

2) 볼테르, 사이에 역, 불온한 철학 사전, 민음사, 2015, pp.102~1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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