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I. 1920년대 문화통치와 민족운동
(1) 1920년대 일제의 문화통치
일본은 한반도를 강점한 후 문화의식이 오히려 높은 조선민족을 지배하기 위해 무단통치 방법 을 택했다. 그러나 그 가혹한 통치체제 아래서도 불과 10년이 못 되어 3․ 1운동과 같은 거족 적인 항쟁이 일어났다. 이에 당황한 일본이 강력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탄압하는 데 일단 성공 했으나, 무단통치 방법만으로 조선민족을 지배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정책을 바꾸었다.
겉으로 유화정책을 쓰면서 그것을 통해 민족해방운동전선을 분열시키고 약화시키는 정책으로 전환한 것이다.
1) 경찰기구의 강화
무단통치(武斷統治)를 문화통치(文化統治)로 바꾼 가장 두드러진 증거가 헌병경찰제도를 폐지 하고 보통경찰제도를 채택한 데 있다. 그러나 실제는 무단통치기의 헌병이 ‘문화통치’의 경찰 로 옮겨 앉았고 군대와 경찰의 병력도 훨씬 증가하였다.
일제는 ‘문화통치’를 표방했으면서도 반일운동(反日運動)과 사회주의운동(社會主義運動)을 탄 압하기 위해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1925)을 만들었다.
헌병경찰제도(憲兵警察制度)를 폐지하여 유화(柔化정)책을 쓰는 체하면서도 보통경찰(普通警 察)을 대폭 증가(增加)시켜 식민통치체제를 한층 더 강화하였다. 또한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을 제정하여 사상통제와 사회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점에 ‘문화통치’의 기만 성(欺瞞性이) 있다.
2) 친일파의 양성
3․ 1운동 후의 ‘문화통치’가 기도한 일제 식민정책의 목표는 민족분열정책(民族分裂政策)으로 표현할 수 있다. 전(全) 민족적인 저항 운동인 3․ 1운동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일제는 자신들 의 원활한 식민 통치를 위하여 우리 민족을 분열시켜야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일제 식민 지 지배당국에 의한 친일파(親日派) 양성(養成) 정책은 이러한 민족분열정책의 일환(一環)이였 다. 이를 위하여 조선총독부는 사회주의노선과 소작농민 및 노동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 다. 한편 지주와 자산가 계급을 보호하여 그들을 개량주의자 혹은 친일파로 만들면서 민족해 방운동의 전선(戰線)을 분열시키고 약화시켜 갔던 것이다. 일제 이들 친일파를 이용하여 친일 여론의 조성, 친일단체의 조직, 독립운동가의 적발과 정보수집, 독립운동에 대한 파괴활동, 대 외선전, 독립운동가의 포섭과 변절 설득 등에 광범위하게 이용하였다.
3) 참정권과 ‘지방자치’
조선총독부는 민족분열정책을 더욱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민족자본가 세력의 일부를 물 산장려운동(物産獎勵運動)․ 문화운동(文化運動)․ 자치운동(自治運動) 등 개량주의운동(改良主義 運動)으로 이끌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보다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한국인에게도 참정 권(參政權)이나 자치권(自治權)을 허용할 것처럼 선전하였다.
일제는 지방행정의 자문기관(諮問機關)을 두어 참정권 부여를 선전하고, 그것을 통해 친일파 의 폭을 넓혀 갔다. 그러나 일제가 이러한 것들을 하는 목적은 완전독립(完全獨立)․ 절대독립
(絶對獨立) 노선을 고수(固守)하는 민족해방운동전선을 혼란시키는 데 있었다.
결국 한국인의 참정권을 내세우고 ‘자치제에 대한 훈련’이라 선전한 것이 ‘문화통치’시기의
‘자치제(自治制’)였다. 하지만 사실은 친일파 양성책 내지 민족분열정책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 던 것이다.
4) 문화운동과 자치론
민족해방운동전선을 약화시키고 민족분열을 획책하기 위해 구상된 ‘문화통치’의 또 하나의 책 략은 3․ 1운동으로 높아진 민족해방운동의 열기를 문화운동 쪽으로 유도하는 것이었다. 이러 한 문화운동의 목적은 절대독립론(絶對獨立論․) 독립전쟁론(獨立戰爭論적) 분위기를 약화(弱化) 시키는 일이었다.
이러한 일제의 기만적인 문화통치 아래에서 적극적 독립운동노선에서 한 걸음 물러선 일부 우 파(右派) 민족주의자들이 나아갈 길은 타협주의와 더 나아가서 친일적 노선이 될 수밖에 없었 다. 이들의 타협주의는 문화통치․ 문화운동과 논리를 같이하는 ‘민족성 개량’․ ‘실력양성’․ ‘자 치주의’로 나아가게 되었다.
(2) 1920년대 민족운동의 발전과 분화
1919년 3․ 1운동 이후 국내외의 민족운동세력은 정치사상적 측면에서 다양한 분화양상을 보 였다. 즉 어떠한 세계관에 입각해서 민족운동을 전개할 것인가, 그리고 독립 이후 어떤 정치 체제를 지향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부르주아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으로 분화하였던 것이다.
1) 부르주아 민족운동
이 가운데 부르주아민족주의 운동은 부르주아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독 립 이후에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체제의 근대국가를 수립하고자 한 운동이었다.
부르주아민족주의 운동은 다시 그 내부에서 구체적인 항일운동의 방법론, 자본주의적 근대화 의 주체와 노선 등을 둘러싸고 좌․ 우파의 분화를 보였다.
‘우파(右派) 부르주아 민족운동’은 실력양성운동을 계승하여 일제와 타협(妥協)하면서 실력을 양성하자는 부류였다. 이들은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과 자치론(自治論)을 들고 나와 우리 민 족의 좋지 않은 민족성을 개조하여 민족산업을 키우고 근대 서구적인 시민이 될 것을 역설하 였다. 나아가 지방행정에 적극 참여할 것을 주장하였다. 국내에서의 부르주아민족주의 우파(동 아일보그룹, 천도교신파, 수양동우회)의 경우 실력양성론의 입장에서 1920, 30년대 ‘문화운동’
을 전개하였으며, 1920년대 후반에는 보다 타협적인 ‘자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한편 국 외의 부르주아민족주의 우파(안창호의 흥사단, 이승만의 동지회)는 실력양성론과 외교운동론의 입장에서 운동을 전개하였다.
‘좌파(左派) 부르주아 민족운동’은 일제에 대한 타협을 거부하면서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전개 하려는 부류이다. 국내의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조선일보그룹, 천도교구파)는 우파의 타협적 인 자치운동에 반대하면서 대중의 계몽과 비타협적인 정치투쟁론에 입각하여 신간회(新幹會) 운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1920년대 외교운동노선에 주로 의지해 오던 운동세 력들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독립당(조소앙), 한국국민당(김구) 등을 결성하여 민주사회
주의적인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정치이념으로 채택하고, 1941년에는 이를 임시정부의 ‘건국 강령’으로까지 발전시킴으로써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의 한 줄기를 형성하였다.
2) 사회주의(社會主義) 운동
사회주의 운동이란 사유재산제도(私有財産制度)를 기반으로 자본주의(資本主義) 사회를 개혁 하고, 생산수단(生産手段)의 공유(共有)를 기초로 하는 평등(平等)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운 동을 말한다.
일제의 식민 통치 아래에서 한국 사회주의운동은 국내는 물론이고 러시아, 중국 관내, 만주, 일본을 무대로 삼아 복잡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다. 사회주의 세력은 민족 해방을 위해 투쟁한 중요한 정치세력의 하나였다. 또한 계급적(階級的) 착취(搾取)의 근절을 목표로 하는 국제(國 際) 노동계급(勞動階級) 운동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계급 없는 사회의 실현이라는 최종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3․ 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사회주의 사상이 한국 민족해방운동 내부에 수용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20년대에는 사회주의 세력이 부르주아민족주의 세력과 더불어 민족해방운동의 주요 담당자로 등장했다.
①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기원
한국에서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이 발생한 원인에 대하여 학계의 의견은 둘로 나뉘어 있다.
첫째는 국외로부터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견해이고, 둘째는 한국 민족해방운동의 내적 조건의 필연성에 주목하는 견해이다.
첫째 견해는 한국 사회주의운동을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 하에서 외부(外部)로부터 이식(移 植)되어 온 것으로서 한국 민족해방운동의 전통과는 이질적(異質的)인 것이라고 파악한다.
둘째 견해는 러시아 10월혁명이 준 영향력을 인정하면서도, 그와 더불어 외교독립운동(外交獨 立運動)의 좌절과 이에 따른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에 대한 실망(失望), 부르주아민족주 의의 개량화(改良化), 노동자․ 농민운동의 발전 등의 요인이 사회주의운동을 급격히 확대시키 는 여건(與件)을 조성(造成)했다는 것이다.
② 사회주의 세력의 분류
사회주의 세력을 분류하면 크게 다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가 민족해방혁명(民族解放 革命)이 선행(先行)된 뒤에 그것이 사회주의혁명(社會主義革命)으로 성장(成長)․ 전화(轉化)한 다는 입장에 서 있는 세력이다. 이들은 민족혁명단체(民族革命團體)에 대한 통일전선(統一戰 線) 정책을 취한다. 그렇기에 이들은 민족해방을 위해 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인 방편적(方便 的) 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중도(中道) 좌익(左翼) 노선으로 분류된다.
둘째가 조선혁명(朝鮮革命)의 성격(性格)을 사회주의혁명(社會主義革命)으로 간주(看做)하는 입 장을 취하는 세력이다. 이들은 조선의 부르주아지 세력을 조선 프롤레타리아의 적대자로 간주 한다. 그러므로 민족해방을 위해 부르주아민족주의 세력과의 연합을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이 들은 순수(純粹)한 사회주의자로서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라고 일컫고, 극좌(極左) 노선으로 분류한다.
③ 노동자․ 농민운동
1920년대에는 일제(日帝)의 가혹한 착취(搾取)에 반발(反撥)하여 노동자(勞動者)․ 농민(農民)의 단체들이 조직(組織)되고 사회주의자들의 지도 아래 노동자․ 농민들의 집단적인 저항(抵抗)이 일어났다.
노동자 운동은 주로 일본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賃金) 인상(引上) 요구와 8시간 노 동제(勞動制)의 요구가 원인이 되어 일어났다.
농민운동은 소작인조합(小作人組合)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주로 50% 이상의 고율(高率) 소 작료(小作料) 인하(引下)와 소작권(小作權) 이동(移動) 반대(反對)가 주요 목적이었다. 1927년 조선농민총동맹(朝鮮農民總同盟)이 결성(結成)되어 농민운동은 더욱 반일적(反日的 ) 성격을 띠게 되었다.
(3) 6·10만세운동, 신간회운동, 광주학생운동
1) 6․ 10만세운동1)
6․ 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순종(純宗) 융희(隆熙) 황제(皇帝) 인산일(因山日)을 기해 일어난 만세시위였다. 이 운동의 주체들은 4월 26일 융희황제의 승하를 당하여 즉각 3․ 1운동 때처럼 전 민족적 만세시위를 계획․ 추진해 갔지만, 거사 직전인 6월 7일 사전 발각으로 만세 시위가 크게 일어나지 못하였다.
6․ 10만세운동은 기본적으로 방법과 형태면에서 3․ 1운동의 전통과 방식을 계승하고 있었다.
6․ 10만세운동을 계획하였던 천도교와 조선공산당은 전국적 만세시위를 기대하면서 운동을 구 상하고 추진했다. 권오설을 중심으로 설치된 투쟁지도부인 ‘6․ 10투쟁특별위원회’는 서울뿐 아 니라 지방확산에도 역점을 두고 있었다. 융희황제의 인산일을 거사일로 삼은 이들은 운동의 시발점인 서울에서는 학생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일으키고, 지방에서는 대중들을 결집하 여 항일적 만세운동으로 전환시켜간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계획은 3․ 1운동의 경험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2) 6․ 10만세운동은 3․ 1운동의 경험 위에서 계획 추진된 ‘제2의 만세운동’이었다.
그러나 6․ 10만세운동은 3․ 1운동과는 운동의 추진 배경이나 주체, 이념, 성격 등에서 차별성 이 있었다. 그것은 3․ 1운동 때와는 다른 조건에 기인하였다. 6․ 10만세운동은 제국주의적 지배질서가 공고해진 상황에서 계획된 것이었다. 이것은 3․ 1운동이 1차대전 후 민족자결주의 와 인도주의 등 세계 개조의 분위기가 무르익던 상황에서 계획된 것과는 달랐다.3) 또한 3․ 1 운동 때의 지도이념과 주체는 자유주의 사상과 자유주의자였다. 이에 비해 6․ 10만세운동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이 결합 또는 연합되면서 자유주의자와 더불어 사회주의자가 전면에 나서는 새로운 양상을 보였다.
한편 6․ 10만세운동이 3․ 1운동과 같이 전 민족적 운동으로 발전되지 못한 원인에는 다음과 같다. 첫째, 6․ 10만세운동 때에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상대적으로 안정 기조를 띠고 있었 다는 것이다. 이는 만세운동만으로는 민족해방을 이루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음을 의미한다. 둘째, ‘문화정치’에 의한 개량화가 촉진되면서 민족세력이 분열되고 있었다. 민족의
1) 장석흥, 2003, <6․ 10만세운동의 역사적 성격>,<<한국민족운동사연구>>,나남출판, 참조.
2) 6․ 10만세운동 때 배포할 계획으로 작성된 <격고문>에서 만세운동의 시원(始原)을 3․ 1운동에 두고 있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장석흥, <<앞의 책>> 참조.
3) 조동걸, 1989, <3․ 1운동의 이념과 사상>,<<한국민족주의의 성립과 독립운동사연구>>, 지식산업사.
역량을 하나로 결집시키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셋째, 3․ 1운동 때에는 향촌사회(鄕村社會) 의 전통적 질서가 유지되고 있었지만, 6․ 10만세운동 시기에는 일제의 지방 행정치체제 개편 으로 전통적 질서가 이미 해체되고 있었다. 넷째, 3․ 1운동으로 충격을 받았던 일제는 융희황 제 국상에 당해서는 철저한 경계와 탄압으로 일관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6․ 10만세운동은 3․ 1운동과 같은 거족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 10만세운동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6․ 10만세운동은 3․
1운동 이후 꾸준히 발전되고 성숙되어 온 민족적 역량을 바탕으로 발생한 것이었다. 특히 자 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연대하여 민족통일전선을 이루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6․ 10만 세운동은 사회․ 정치적 이념을 초월하여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민족해방운동의 이론적․ 실천적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6․ 10만세운동은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뒷날의 민족유일당운동과 신간회 성립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또한 6․ 10만세운동은 학생운동의 발전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학생운동 조직이 전국 각처에 생겨나면서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과 같은 전국적 민족운동으 로 발전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2) 신간회 운동
신간회(新幹會)는 한국민족의 정치적 의식이 발전함에 따라 민족적 중심세력의 단결을 요망하 는 국민적 기대를 바탕으로 성립하였다.4) 신간회 운동은 1927년 1월 신간회 강령(綱領) 발표 로 구체화었다. 같은 해 2월에는 신간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이는 ‘민족 유일당 민족협동 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 계통의 제휴로 이루어졌다. 주로 일제에 비타 협적이었던 부르주아민족우의 좌파와 중도 좌파의 연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간회는 합법적 인 결사와 비타협적 항쟁을 목표로 한 일제강점하 유일한 범국민적 성격을 띤 독립운동 단체 였다.5)
신간회의 정강정책(政綱政策)은 첫째 조선민족의 정치적․경제적 해방의 실현, 둘째 전민족의 현실적 공동이익을 위하여 투쟁함, 셋째, 모든 기회주의의 부인 등이었다. 그들의 강령은, 一,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覺醒)을 촉진함. 一, 우리는 단결(團結)을 공고히 함. 一, 우리는 기회주의(機會主義)를 일체 부인함 등이었다.
초대 정․ 부회장에 이상재와 권동진이 각각 추대되었다. 35명의 간사와 하부조직으로 총무․ 재 무․ 출판․ 정치문화․ 조사연구․ 조직․ 선전 등 7개 부서를 두었다. 1930년에는 전국에 140여 개의 지회와 3만 9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일본에까지 조직된 각 지회를 중심 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신간회의 세력이 이렇게 성장하자, 일제의 탄압이 거세져서 대규모 집회를 열 수 없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일제에 대해 학생운 동의 탄압을 엄중 항의했다. 또한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을 지향한 민중대회를 열 것을 계획했 다. 하지만 이것이 빌미가 되어 조병옥(趙炳玉)․ 이관용(李灌鎔)․ 이원혁(李源赫) 등 주요 인사 44명이 체포되었고, 이들 가운데 조병옥 등 6명은 실형을 받았다. 이로 인해 신간회는 흔들리 게 되었다.
4) 신간회 운동에 대해서는 이균영, 1994, <<신간회연구>>, 역사비평사, 참조.
5) 신간회의 성격을 일본의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는 배일선인(排日鮮人) 가운데 저명한 인물은 거의 여기에 가입하였고…이들이 집회 등에서 하는 언동으로 보아 이 운동의 도달점은 조선의 독립에 있음을 알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좌우익 세력이 합작하여 만든 단체였지만, 민족주의 진영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데 대해 사회주의 진영의 불만이 높았다. 이들은 신간회의 주요 간부들이 투옥된 사이를 이용하 여 해산운동을 벌였으며, 1931년 5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대의원 77명이 참석한 가운 데 해산을 결의함으로써 발족한 지 4년만에 해산되었다.
결과적으로 신간회운동은 4년여 만에 중단되었다. 하지만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간의 민족 협동전선운동의 첫 시작으로서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극우(極右)와 극좌(極左) 세력을 모두 배격하면서 좌우의 중간적(中間的) 노선을 창출하려고 노력한 것은 새로운 시도로서 중 대한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추세는 1930년대 들어 더욱 가속화되면서 해방 이후 중도정당과 좌우합작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6)
3) 광주학생운동(1929)
1920년대 민족해방운동의 절정을 이룬 것이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10월 30일 광주로 통학하는 나주(羅州) 지역의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 사이의 충돌로 시작되었다.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경 광주에서 통학생을 실은 하행(下行) 통학열차가 나주 역에 도착하였다. 통학생들이 개찰구를 나갈 때 일본인 광주중학생 후쿠다 슈우조오(福田修三) 가 한국인 여학생들을 희롱하자 광주고보 2학년생 박준채가 일본인 학생을 혼내준 데서 발단 되었다. 7)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 대규모 충돌이 일어났다. 11월 3 일에는 광주의 학생들이 총궐기하였고, 그 후 전국으로 확산되어 다음해 3월까지 지속되었다.
도민들도 이에 호응하여 시위군중은 3만 명이라고 당시 언론의 보도 있다. 이 학생독립운동은 만주 지역의 한인 거주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이 운동은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를 요구하였다.
또한 식민지 교육제도의 철폐와 한국인 위주의 교육제도 확립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신간회(新幹會)의 지도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8) 당시 신간회는 이 광주학생 시위운동을 전국적 항일독립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12월 10일 권동진, 허헌, 동아일보사장 송진우, 조선일보 부사 장 안재홍, 조병옥, 홍명희, 한용운, 주요한 등이 대책회의를 가졌다. 12월 13일에 광주학생사건 진 상발표회를 갖고, 이어 곧바로 군중을 선동하여 시위 운동을 시작하고, 지방지회에도 동일한 행동 을 하도록 지시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그러나 일본경찰이 이를 탐지하여 12월 13일 아침 6시 신 간회 주요간부 30여 명을 예비 검속하여 서울의 진상발표회는 열리지 못했다. 하지만 지방지회에 보내는 지시문은 이미 전달되어 이후 전국 각 지역에서 1930년 3월초까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항일 시위 만세운동이 계속되었다. 광주학생운동은 3․ 1 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으로는 첫째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들 수 있다. 당시 사회 는 사회주의사상이 풍미했었는데, 학생들이 외친 구호를 보면 ‘약소민족해방(弱小民族解放)’,
‘제국주의(帝國主義) 타도(打倒)’, ‘무산계급혁명(無産階級革命)’ 등으로 나타나 사회주의 사상 이 학생계에도 상당히 파급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일제총독부 또한 광주학생운동을 사회주 의적 운동으로 취급하여 다루었다. 둘째로 일본의 우민화(愚民化) 정책과 억압을 들 수 있다.
일제는 한국인들을 우민화하기 위해 고등교육(高等敎育) 제한하였다. 직업교육(職業敎育)과 일 본어(日本語)· 일본역사(日本歷史)를 중심으로 교육하였다. 또한 학생들의 자유로운 토론(討論)
6) 한영우, <<앞의 책>>, 146쪽 참조.
7) 이 사건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년생인 박기옥․ 이광춘․ 이금자 등을 일본인 학생인 후쿠다가 '센징鮮 人'이라 조롱하며 박기옥의 댕기머리를 잡으며 희롱하자 이를 본 박기옥의 사촌동생인 박준채가 후쿠다 를 때린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최근 연구를 통해 당시 현장에는 이광춘과 이금자 자매만이 있 었고, 박기옥은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8) 한영우, <<앞의 책>>, 147쪽 참조.
과 비판(批判), 자치(自治) 활동을 금지시켰다. 결국 한국인 학생들은 일본인 교육자들의 억압 과 무시 그리고 우민화정책 속에서 강한 항일의식(抗日意識)을 갖게 되었다. 셋째로 학생들의 비밀결사를 들 수 있다. 학생들의 비밀결사는 1920년대 전국 각지에서 조직되었다. 특히 광주 고보, 광주농업학교, 광주사범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성진회9)와 그 후신인 독서 회, 그리고 광주여고보 학생들의 소녀회 등은 다른 어느 지방의 학생비밀결사보다 탄탄한 조 직이었. 이러한 비밀결사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조건을 들 수 있다. 광주에는 교육에 있어서 호남을 대표하던 2개의 중등교육기관이 존재했었는데 그 것은 한국인 학생의 광주고등보통학교와 일본인 학생의 광주중학교였다. 이들 두 학교는 모두 3․ 1운동 이후 설립된 호남의 교육기관 중 한국인과 일본인의 상징적 존재였다. 광주중학교는 일본인 학교라는 정복자로서 위세를 부렸고, 광주고등보통학교는 호남지방의 한국인 준재 들 이 모여 든 곳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러한 두 학교의 민족적, 감정적 대립으로 충돌은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광주학생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광주학생운동은 단순한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민족의 독립을 갈망한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 이었으며, 사회를 개혁하고자 한 사회․ 문화운동이었고 할 수 있다. 둘째, 학생들이 꾸준하게 전개하였던 조직적(組織的)이고 계 획적(計劃的)인 항일독립운동이었다는 것이다. 셋째, 학생층이 민족해방운동의 중추 세력의 하나 임을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넷째, 1920년대 말 신간회운동과 노동자․ 농민운동 등이 침체되어가던 분위기 속에서 전체 민족해방운동을 다시 한 번 고양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6․ 10만세기념사업회, <<6․ 10독립만세운동>>.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작과 비평사.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8- 3․ 1운동 이후의 민족운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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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성진회는 조직 5개월 만인 3월 자진해산하고 각기 학교단위의 비밀조직을 통한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1929년 6월 중순경 독서회 중앙부를 결성하여 광주학생계의 통제적지도 기능으로 강화․ 확대되었다.
이러한 성진회․ 독서회의 조직은 한국인 학생들의 민족운동을 위한 행동화에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되 었다. 그리하여 광주학생운동의 전초전으로 각 학교의 학생들은 우선 학원내의 문제해결을 위한 동 맹휴교를 일으켜 이를 민족운동으로 확산시켜 갔다. ; <성진회 강령> 1. 일제의 기반에서 한국의 독 립을 쟁취한다. 2. 일제의 식민지 노예교육을 절대 반대한다. 3.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를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