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칼럼] 한국의 불탑(5) - 옛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 석탑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1

Share "[칼럼] 한국의 불탑(5) - 옛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 석탑"

Copied!
3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KIC News, Volume 18, No. 5, 2015 61

강 병 희 강사 (한양대학교)

요즘 통일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과연 통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여야 할까? 이와 관련하여 고려시대 조성된 지방적 특색을 보이는 석탑들의 존재는 통일이 민족적 환상 속에서 진행되어서는 안 되며 그 염원을 현실화하기 위한 정치한 과정을 통해서만 완전하게 자리 잡을 수 있음을 시사해 준다.

우리 민족은 역사상 3번 통일 국가를 이루었다. 통일신라, 고려, 조선이 그것이다. 신라의 통일은 민족적 통일 을 이루었다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영토적으로 대동강 이북이 제외되었다. 이후 신문왕이 통일 왕국의 통 치를 위해 충주로 수도를 옮기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전국에 9주 5소경을 두어 지방을 통치하였는데 중앙집 권이 약화되는 9세기 말에는 경주 이외의 지역에서는 왕명이 먹히지 않을 정도로 지방 세력이 성장하였다. 이 시기 세워진 불탑의 분포를 보면 경주와 경상남북도를 벗어나 조성된 탑은 그 수가 극히 적다. 특히 통일신라 말 지방 세력의 성장과 함께 선종의 전래로 새롭게 자리 잡은 사찰의 탑을 제외하면 중추 탑평리 7층 석탑, 구례 화엄사 4사자석탑 등이 손꼽힐 뿐이다.

이는 통일 후 일정 지역에 경제와 문화가 집중되었음을 보여 주며 그것을 유지하는 세력이 약해졌을 때 다시 분열이 일어나게 됨을 보여 준다. 이후 각 지역에서 성장한 호족세력들은 각 지방의 옛 정체성을 중심으로 후고 구려, 후백제 등으로 나누어져 이른바 후삼국시대를 열게 된다.

이들 호족들과 왕건이 연합하여 세운 나라가 고려이다. 고려 왕건은 이 과정에서 각 호족들의 딸들과 혼인하 여 25명의 왕비를 두었으며 그가 죽은 이후 11세기 초까지 왕권과 중앙집권화를 위한 숙청이 이어졌다. <고려사>

에 의하면 정종, 광종, 경종 연간에 죽임을 당한 중앙 귀족들이 300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따라서 고려는 군현 제가 현종 9년(1018년)에 실시되어 지방에 대한 본격적인 통제가 시작되고 있으나 대체로 지방 분권적인 성격이 강했던 시대였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이러한 고려시대 석탑은 크게 3가지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불교의 대중화, 샤머니즘화로 전국 곳곳에 탑이 세워졌다. 지금도 해남의 끝자락, 제주도 등에서 고려시대 석탑을 볼 수 있으며 제주도의 경우 현무암으로 탑을 세우기도 했다. 둘째, 각 지방마다 그 지방적인 특성이 탑에 보이며 특히 옛 고구려 지역인 한강 이북 지역 에서는 옛 고구려 양식이, 옛 백제 지역에서는 옛 백제탑 양식이 계승되어 조성되었다. 셋째, 고려 후기 원나라 침입 이후 라마탑의 영향이 반영되었다. 이 중 두 번째의 양상은 오늘날과 같은 남북 분단의 시대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익산 왕궁리 5층 석탑(그림 1)은 백제 멸망 이후 옛 백제 양식으로 조성된 첫 예이다. 통일신라 말, 고려 초인 10세기 초 이전에 세워진 탑으로 단층기단과 넓은 지붕돌, 탑신과 옥개석을 여러 개의 돌로 조성하고 있는 점 등의 세부 형태와 그 모습이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그림 2)과 정림사지 5층 석탑(그림 3)을 빼닮았다. 심지어 지 붕돌의 쌓인 모습과 형태도 거의 같아 처음 이 탑을 대면하였을 때 ‘이 탑이 왜 백제탑이 아니지?’하고 한참 고 민할 정도였다.

이러한 백제계 양식 석탑은 고려 초 비인 5층 석탑(그림 4), 중기 이후 부여 장하리 3층 석탑(그림 5), 정읍 은선리 3층 석탑(그림 6) 등 10여 기로 고려 시대에 옛 백제 땅에 조성되고 있는 복고적 양식의 탑들이다.

KIC News, Volume 18, No. 5, 2015

칼럼: 한국의 불탑(5) - 옛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 석탑

(2)

http://www.ksiec.or.kr

62 공업화학 전망, 제18권 제5호, 2015 그림 1 익산 왕궁리 5층 석탑, 10세기 초

그림 2 익산 미륵사지 석탑, 7세기 초

그림 3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7세기

그림 4 비인 5층 석탑, 고려 초

그림 5 부여 장하리 3층 석탑, 고려 중기

그림 6 정읍 은선리 3층 석탑, 고려 중기

한편 고구려의 옛 영역인 한강 이북 지역에는 고구려 탑의 8각 평면을 계승한 고려시대 탑들이 남아 있어 백 제계 탑들과 더불어 주목된다. 고구려는 주로 8각 다층 목탑을 조성하였는데 목탑인 관계로 지금은 그 터만 남 겨져 있다. 현재 확인되고 있는 5개의 절터 중 조성 연대가 알려진 예인 평양특별시 대성구역 금강사지(일명 청 암리사지)의 탑 터(그림 7)는 8각 한 변의 길이가 10.2 m-10.4 m로 그 규모도 크다. 특히 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 지역에 영명사지 5층 석탑(그림 8)을 포함한 다수의 8각 석탑들이 남아 있고 남한에는 한강 이북 지역인 오대산의 월정사 8각 9층 석탑(그림 9)이 옛 고구려 양식계로 분류되고 있다. 물론 고려시대의 8각 탑에는 이후 의 또 다른 영향이 겹쳐져 있기는 하나 일단의 회고적인 배경은 역시 고구려와 공유된다.

(3)

KIC News, Volume 18, No. 5, 2015

KIC News, Volume 18, No. 5, 2015 63

그림 7 평양 금강사지 탑 터 초석 세부, 고구려 498년

그림 8 평양 영명사지 5층 석탑, 고려 초

그림 9 평창 오대산 월정사 8각 9층 석탑, 고려 초

앞 편에서 언급하였듯이 우리나라 석탑은 신라가 통일한 직후인 7세기 말에 ‘전형양식’이 창안되었으며 독특 한 우리만의 양식으로 이후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분권적 상황이 강했던 고려시대에 다시 옛 지역의 복고적 양 식이 표출되고 계승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는 우리 민족 속에 어우러지는 다양한 특성으로서 융화 되어 발현된 것일까? 혹 옛 국가에 대한 그리움을 바탕으로 정치적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문화적 부흥의 일환 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러한 분파의 존재를 알려 주는 유적으로 해석해야 하나? 많은 석탑은 본 절터의 역 사를 잃고 홀로 아무 기록도 없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정확하게 그 배경을 밝힐 수는 없지만 확실한 사실은, 어쨌든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의 민족, 혈육이라는 환상만으로 통일을 바라보면 안 된다. 현재 우리 사회 안에서도 지 역적 다양함이 풍요로움으로만 작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통일의 과정, 혹은 통일 후에 각 지역의 역사, 경험적 특성이 계열로 작동되지 않게 이를 끊임없이 통합하고 완화시켜 진정한 화학적 합일을 이루어낼 수 있는 합리적인 길을 마련해야 하며 이를 위해 인내와 용기를 내어야 할 것이다.

수치

그림  7  평양  금강사지  탑  터  초석  세부,  고구려  498년     그림  8  평양  영명사지 5층  석탑,  고려  초     그림  9  평창  오대산  월정사 8각  9층  석탑,  고려  초     앞 편에서 언급하였듯이 우리나라 석탑은 신라가 통일한 직후인 7세기 말에 ‘전형양식’이 창안되었으며 독특 한 우리만의 양식으로 이후 자리 잡았다

참조

관련 문서

와 같이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곧이어 승려는 그 상황을 ‘지옥’이라고 호명함으로써 상황에 대한 판단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 서비스는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주변 증 거들을 가지고 서비스를 보여 주어야 하며, 이 증거들을 척 도로 하여

-전국이라는 이름이 보여 주듯 전쟁에 의한 소모를 반복하면서 중국사회는 발 전해 갔는데 , 이는 중국의 문화가 점점 이민족들 사이로 침투해 들어가고 중

향상진화(계통적 진화): 하나의 가계내에서 연속적인 변화를 보여 줌.. 긴 시간동안 상대적으로 적은

집단 규모가 집단 성과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 준다.. 응집성 있는

페르소나(persona)는 사용자를 상세히 묘사한 것으로 사용자 유형 프로필을 보여 준다. 제품 혹은 서비스를 사용할 만한 목표 인구 집단 안에 있는 다양 한

목회의 개념과 기능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가장 체계적으로 보여 주는 문서.. 둘째, Gregory의 목회적 방법론은 지나치게 기계적이고 규정적임. • 이는

일반적으로 소맥의 교역량이 증가하면 소맥분의 수출량이 줄어들고, 반대로 소맥의 교역량이 감 소하면 소맥분의 수출량이 증가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한편 시리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