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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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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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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쇼몽>의 영화적 변용과 윤리 주제 연구:

상대성의 지옥’에서 인간으로 남기

장경욱*

Ⅰ. 들어가며

Ⅱ. 재판정 목격담을 둘러싼 인식적 갈등

Ⅲ. 버려진 아기를 둘러싼 윤리적 갈등

Ⅳ. 나가며

◁ 목차 ▷

* 동양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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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the Ethical Themes in Kurosawa Akira’s Film Version of Rashomon

Jang, Kyongook

This study, explicating the characteristics of the conflict in Akira Kurosawa’s film Rashomon, seeks to clarify the ethical aspects of the narrative of the movie. As the popular terminology ‘Rashomon effect’

shows, studies on Rashomon have mainly focused on the epistemological aspect of the story it develops. However, considering the peculiarities of the conflicts which the director adopted and created from its original short stories, Rashomon’s two main conflicts are set up for endeavoring to solve the ethical dilemma of human beings. Through the conflicts among his film-creative characters such as a woodcutter, a priest, and a common person, Kurosa cast a question to the audience about how to behave rightly in a world where every evil act is justified by its relative validity. The ending shows the director’s message that everyone can help others and keep his/her human being status through repenting his/her evil doings.

Key words

Akira Kurosawa, Rashomon, Rashomon effect, relative validity, the ethical dilemma of human beings

I. 들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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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쇼몽>의 주제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어느 쪽에 방점을 찍는 가에 따라 두 개의 다른 갈래를 보인다. 첫째는 영화를 진실에 접근하는 인간의 인식적 한계에 대한 이야기로 읽는 방식이다. “영화 <라쇼몽>에 서 ‘진실의 상대성’이라는 주제를 드러내는 것은 이야기를 구성하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다중적인 서술 구조”라는 장우진의 주장(2003: 124), “덤 불에 가려진 진리의 햇살은 덤불 속 인간들의 사건에 음영을 드리운다.

그리하여 인간은 온전한 진실을 알 수 없다. 개별 인간은 오직 부분적인 진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라는 김영옥(2017: 49)의 해석이 이에 해당한 다.

“이 작품은 사실의 상대성이라는 관념만 우리에게 주는 데 불과하다”

는 가라타니 코오징의 오래 전 주장이나(174 김용안, 2010: 34에서 재인 용). <라쇼몽>을 차용한 뮤지컬 <씨왓아이워너씨>에 대해 “뮤지컬은 절 대적 진실은 무엇이며, 과연 진실은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는 송민숙의 평론을 보면(2008: 53), 이 작품을 진실의 상대성이라는 주 제로 보는 관점이 시대와 나라를 막론하고 얼마나 대중적으로 퍼져 있는 지를 보여준다.

영화 <라쇼몽>의 주제에 대한 또 하나의 연구 경향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작가의 비관적 탐구로 읽는 방식이다. 이는 ‘진실의 상대성’에 대한 이야기로 읽는 앞선 연구 경향과 딱히 양립하지는 않으나, 작품의 주제 를 인간의 인식적 한계보다는 그러한 한계를 초래한 인간의 이기심에 더 초점을 맞추어 읽는다. 대표적으로는 “천민은 인간을 이기적이고 자기중 심적이므로 신뢰할 수 없다고 하는 성악적 (性惡的) 본성으로 보는 아쿠 타가와 류노스케의 대변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본성은 본 영화작품의 소 설 작자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염세적 허무주의 인간관'에서 표출하 고 있다”는 권해주의 주장이 이에 해당한다(2011: 53). “「라쇼몽」은, 패 전 후 일본의 사회의식을 반영하여, 따라서 그 근본적인 입장은 이념의 상실과 환멸, 한 마디로 말하면 니힐리즘”이라는 신하경(2010: 197)의 해 석, 그리고 “구로사와는 『덤불숲』의 주제를 비교적 주제가 명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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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몬』의 ‘에고이즘’쪽으로—어느 정도의 의지를 가지고 했는지에 대 한 여부를 떠나서—각색하였던 것”이라는 이시준도 동일한 관점을 견지 한다(2005: 247-248) 앞서 소개한 장우진 역시 “영화 <라쇼몽>의 다중적 서술 구조는 결과적으로는 ‘진실은 상대적이다’ 또는 ‘인간은 이기적이어 서 진실을 말할 수 없다’라는 명제가 입증된다”(135)고 할 때, <라쇼몽>

을 인간 본성에 대한 회의를 드러내는 이야기로 읽는 점에서는 동일하 다.1)

이렇듯 영화 <라쇼몽>을 진실의 상대성, 혹은 인간의 본성적 이기심 에 관한 이야기로 읽는 비평적 흐름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원작을 영화적으로 변용하면서 창조한 영화적 성취에 인색하게 주목하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영화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 두 편 을 원작으로 삼지만 그것을 기계적으로 결합한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각 색과 변화를 가했다. 이 변용은 영화가 원작자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세계와는 구별되는 감독의 독자적인 관심사에서 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소설 「덤불 속」의 주제로 ‘진실의 상대성’이, 소설 「라쇼몽」의 주제 로 ‘인간의 본성에 대한 회의’가 자주 거론되고 있고, 실제로 그것들이 영화 <라쇼몽>에서도 중요한 모티프로 구현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 만 영화의 성취를 원작의 그것들과는 구분 짓는 차원의 주제 의식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2). 구로사와 아키라의 회고를 보면 아쿠타가 1) 이밖에 중요한 비평적 선례로, 영화와 연극, 소설 버전의 차이를 비교한 민병 진(2017)의 논문, 프로이트와 라깡을 빌어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시도한 김철 권, 임진수(2019), 들뢰즈의 ‘거짓의 역량’ 개념으로 해석한 김성규(2015), 2차 대전 이후 패배한 일본 사회의 사회적 집단 심리를 반영한다고 보는 신하경 (2010)을 들 수 있다. 한편 ‘라쇼몽 이펙트’라는 단어가 문학, 영화 이외의 분 야에서 다양하게 사용되는 사례로는 조형학에서 라쇼몽 효과의 개념을 적용하 여 공간 분석을 한 이찬, 이다솔(2013)과 스포츠 의학에서 의사별 진단 해석의 차이에 차용한 Bruce Reider(2012)가 있다.

2) 원작의 영화적 변용에 대한 선행연구로는 김영옥(2017)과 안영순(2008)이 있 다. 안영순은 영화적 변용에서 서사와 시점의 역할에 주목하면서, 영화가 “두 원작 소설의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를 넘어서서, 각색을 통해서 미래에 대한 희 망과 인간에 대한 신뢰에 기반한 휴머니즘을 제시하기 위해 아기를 창작해 낸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 이 결론은 타당하지만, 영화가 휴머니즘이라는 결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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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류노스케의 원작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 과정에는 최소한 두 번의 창조적 변용이 개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건 이타미 만사쿠 감독 밑에서 사사하는 하시모토라는 사람이 아쿠 타가와 류노스케의 「덤불 속」을 각색한 것이었다. (중략) 동시에 ‘그래.

「덤불 속」은 세 개의 이야기로 되어 있으니까, 거기에 한 가지를 더 창 작해서 넣으면 영화로 적절한 길이가 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거기다 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 「라쇼몽」도 생각났다. 그것도 「덤불 속」과 마찬가지로 헤이안 시대의 이야기였다. 영화 <라쇼몽>은 이렇게 서서히 내 머릿속에서 자라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구로사와 아키라, 1982: 309-10)

회고록에 따르면 원작에 대한 최초의 변화는 작가 하시모토가 「덤 불 속」을 시나리오로 각색을 하면서 생긴 것이고, 그 다음엔 구로사 와 아키라가 「덤불 속」의 세 이야기에 나무꾼의 이야기를 추가함 으로써 한 번 더 변화가 일어난다. 소설 「라쇼몽」을 시나리오에 결 합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인 것으로 드러난다.

실제로 영화에는 원작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요소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 첫째는 등장인물의 변화다. 영화에는 원작에는 없던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하고(버려진 아기, 비를 피해 라쇼몽 누각에 찾 아든 행인), 원작에 있던 인물이 사라지기도 한다(살해당한 무사의 장모, 머리털을 뽑던 노파). 또한 원작 소설과는 비중이 전혀 다르게

이르기까지의 영화적 갈등이 더 규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또한 아기를 둘러싼 갈등에서 쟁점이 되는 인간 행동의 윤리적 측면을 분석하지는 않았다.

김영옥은 영화화 과정에서의 주제적 변화보다는 논증 구조와 문체무늬에 집중 한 분석으로 고전적 연설의 형식과 관련지어 분석하였다, 이시준(2005)도 일찍 이 영화화 과정에서의 변용에 주목하였는데, 그는 영화로 각색되면서 「덤불 속」이 주제가 약화되고 소설 「라쇼몽」의 에고이즘이 강화된다고 봄으로써 소설 「라쇼몽」과 영화 <라쇼몽> 사이에 존재하는 윤리적 주제 의식의 차이 에는 상대적으로 주목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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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치되고 성격도 분명하게 부여받는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나무꾼과 승려, 그리고 행인이다. 승려와 나무꾼은 원 작 「덤불 속」에는 살인 사건 전과 후의 목격자로서만 등장하지만 영화에서는 살인 현장의 목격자인 동시에 재판정에서의 경험을 두고 서로 갈등하고 고민하는 인물로 부상하며, 또한 새로 등장한 행인 역 시 원작에는 없는 인물로서 이들과 함께 재판정의 이야기에 반응하 면서 영화적 서사를 이끌어 간다.

영화 <라쇼몽>이 보여주는 또 다른 변화는 원작에 없는 극적 갈 등의 형성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재창조된 세 인물 크게 두 번의 갈등을 서로 공유한다. 첫 번째는 재판정의 증인들이 서로 엇갈리는 것을 보고 사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갈등이다. 이것은 소 설에는 원래 없는 부분으로서 사실상 영화의 내러티브 대부분을 이 끌어가는 뼈대를 형성한다. 그것은 ‘누구의 말도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등장인물이 보여주는 갈등이고 영화 <라쇼몽>이 제시하는 새로운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영화가 보여주는 두 번째 갈등은 누각에 버려진 아기에 대해 어 떻게 처신할 것인가의 갈등이다. 원작 「라쇼몽」이 시체의 머리카락 을 뽑는 행동을 중심에 놓고 노파와 하인이 갈등하는 반면, 영화에는 버려진 아기를 앞에 두고 어떻게 대응할까에 관해 세 명의 인물이 갈등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이들의 갈등은 앞서 본 재판정 목격담의 이야기와 이어지기 때문에, 소설에는 없던 새로운 특징을 띄게 된다.

그것은 ‘누구의 말도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관한 갈등이다. 첫 번째 그들끼리의 갈등이 인간 삶에 대한 ’해석‘에 관한 것이었다면, 아기를 둘러싼 이 갈등은 인간 의 윤리적 실천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부분, 인간의 윤리적 실천과 기준에 대한 갈등은 원작을 영화화하면서 확연하게 달라지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상대성‘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연구들에 의해 충분히 조망되지 못한 면이 있다.

본 논문에서는 기존의 비평이 영화 <라쇼몽>을 진실의 상대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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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인간 인식의 한계 주제, 혹은 이기심이라는 인간 본성적 한계에 대한 이야기로 읽으면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적 원작의 시선에서 읽 었다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그것을 영화적으로 변용시키면서 새 로 부각한 인간의 윤리적 선택의 문제와 갈등 구조를 분석해 보고 한다. 이를 위해 본문에서는 영화적으로 새로 창조된 세 명의 인물이 각각 상황을 해석하는 방식 차이를 분석하고, 그들의 해석적 갈등이 어떻게 다른 행동의 선택으로 이어지는지를 분석할 것이며, 최종적으 로 비관적인 원작의 세계와 달라지는 영화의 독자적 메시지를 찾아 보려고 한다.

II. 재판정 목격담을 둘러싼 인식적 갈등: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는 상황을 어떻게 수용할까 ?

나무꾼, 승려, 행인이 재판정의 목격담을 둘러싸고 보이는 갈등은 그들이 형성하는 첫 번째 갈등이자 영화 서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누각의 아기를 발견하는 장면 이전까지에 해당하는 영화 대부분은 이들 세 사람이 재판정의 목격담 혼란에 대해 각자 어떻게 다른 반 응을 보여주는지와 그들의 태도 간에 생기는 갈등을 중심으로 채워 져 있다. 재판정의 증인 진술이 엇갈린다는 상황은 원작 「덤불 속」

과 상통하지만, 영화가 재판정에 대해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세 인물을 내세워서 갈등하게 하는 점은 영화적으로 창조된 설정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이들 세 인물은 소설 「덤불 속」에 대해 서로 다 른 반응을 보이는 독자들의 대표라고도 할 수 있다. 나무꾼과 승려는 살인사건의 목격자로 재판에 참여한 점에서는 극중 인물이지만, 재판 의 엇갈리는 증언들 때문에 혼란에 빠지며 사건의 실체에 대해 알고 자 한다는 점에서는「덤불 속」의 독자들과 같은 위치에 있다. 행인 역시「덤불 속」의 독자들처럼 살인범이 누구인지, 혹은 증언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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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말을 신뢰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모르는 상태에서 출발한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영화를 통해 인간의 증언이 엇갈리는 재판정의 현상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시하는 한편, 「덤불 속」

을 읽은 독자들이 서로 다른 해석을 함으로써 겪을 수 있는 해석적 갈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세 인물은 각각 재판 정 현상을 해석-수용함에 있어 어떻게 다른 태도를 보이는지 살펴보 자.

1. 나무꾼 : 모든 것에 대한 의심

나무꾼은 세 명의 인물 중 재판정의 엇갈린 증언에 대해 가장 혼 란을 겪는 인물이다. 그는 라쇼몽 누각 아래에서 “모르겠어. 전혀 모 르겠어”라는 대사를 중얼거리며 등장하는데, 이 대사는 첫 장면에서 두 번 반복되며, 이후 영화 내내 나무꾼에 의해 변형된 형식으로도 자주 등장한다. 가령 재판정의 이야기를 행인에게 처음 전할 때에도 그는 “들려줄 테니 진실을 말해 줘. 난 도무지 모르겠으니”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는 남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도 설명하려는 목적이 아 니라 ‘진실을 알고 싶어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나무꾼의 이런 혼란감은 역설적이다. 사건을 전혀 모르는 행인은 별로 궁금하거나 혼란스러워하지도 않은데 반해, 살인사건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진 나무꾼이 오히려 아무 것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아이러니 이기 때문이다.

나무꾼의 반응은 승려와도 차이가 있다. 혼란에 빠진 점에서는 승 려도 비슷한 처지이지만, 승려는 재판정의 사건에 대해 그저 ‘모르겠 다’는 수준을 넘어 ‘무서운 일이오’라거나 ‘끔찍한 일은 처음 보았소’

와 같이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곧이어 승려는 그 상황을 ‘지옥’이라고 호명함으로써 상황에 대한 판단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나무꾼은 승려와는 달리 ‘모르겠어’라는 말만 반복함으로써 불 가해한 상황에 압도되어 있는 인물이며, 그는 어떤 면에서는「덤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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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을 읽은 후에 ‘뭐가 뭔지 모르겠어’ 정도의 혼란에 빠진 독자들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나무꾼이 자주 반복하는 또 다른 대사는 ‘모두 거짓말이야’라는 표 현이다. 영화가 시작될 무렵의 나무꾼이 ‘모르겠어’라는 말을 자주 반 복하는 반면, 영화가 전개되면서 그는 ‘다 거짓이야’라는 말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한다. 살인 사건의 증언이 하나씩 소개될 때마다 나무꾼 은 그 증언이 거짓이라고 논평한다.

(1) “거짓이야. 다 거짓이야. 다조마루도, 여자도 다 거짓이야.”

(2) “거짓말이야. 그 남자 얘기도 거짓이야”

(3) 그건 거짓이야. 그 남자 가슴에 단도는 꽂혀 있지 않았어. 그 남잔 장 도에 찔려 죽었다. (구로사와 아키라, 1950)

위 (1)은 다조마루의 증언 직후의 발언이다. 다조마루가 여자를 충 동적으로 겁탈했으며, 무사와는 영웅적으로 결투를 했다고 허세를 부 리자 나무꾼은 일말의 주저 없이 ‘거짓’이라고 단정한다. 또한 아직 소개되지 않은 여자의 증언도 ‘거짓’이라고 말한다. (2)는 여자의 증언 이 끝난 시점에 나무꾼의 말인데, 여기서도 여자의 증언과 이어질 죽 은 남자의 증언이 거짓이라고 말한다. (3)은 죽은 남자의 증언에 이 어진 나무꾼의 말이다. 이미 주장한 ‘거짓’을 다시 한번 확인할 뿐 아 니라 “그 남자 가슴에 단도는 꽂혀 있지 않았”다며 증언의 허구성에 대해 구체적인 근거도 제시한다. 세 인물 중에서 나무꾼은 가장 많은 사실을 목격했고, 그만큼 ‘거짓이야’를 강하게 반복한다. 관객은 앞선 그의 혼란이 영화가 전개되면서 점점 더 부정적인 방향으로 깊어짐 을 알 수 있다. 나무꾼의 불신은 훔친 단도로 인해 자기 자신의 증언 까지도 거짓임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 이름으로써 절정에 달하게 된다.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모르겠다’는 나무꾼의 말은 세상에 대한 전면적인 회의, 자기 자신까지도 불신해야 하는 그의 회의를 대변하 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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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꾼이 처한 강력한 회의는 그를 어떤 인간으로 이끌어갈까? 아 마도 그는 승려처럼 세상은 지옥이라는 완전한 비관주의로 빠질 수 도 있고, 아니면 행인처럼 ‘세상이 원래 그렇다’면서 아무런 고민 없 이 먹고 살아갈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무꾼이 영화의 시작 에서 보여주는 회의와 혼란의 끝이 무엇일지, 그가 승려와 행인의 어 떤 쪽으로 자기 태도를 정할 것인지를 물음으로 제기하면서, 감독은 그를 누각 위에 버려진 아기와 마주하게 한다.

2. 승려: 최악의 상황이라는 절망

승려는 살인사건의 증인이며 재판정에 다녀온 점에서 그는 나무꾼 과 상황적으로 유사하다. 그러나 그는 재판정의 경험에 혼란스러워하 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매우 부정적이고 무서운 사건이라고 해 석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3) 재판정의 경험에 대해 승려는 나무꾼과 달리 ‘무서운 일이오’라거나 ‘끔찍한 일’이라는 표현을 자주 반복한다.

그는 “벌레만도 못한 비참한 주검은 나 역시 수도 없이 봤”지만 “오 늘처럼 무서운 일은 처음”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심지어 그것은 “도 적떼나 전염병... 기근, 화재, 전란보다 더 무서운 일”이라고 단정하기 도 한다. 이처럼 상황을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승려의 태도는 일반 독 자의 관점에서 보면 순간적인 과장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의 공포 스런 표현은 영화가 진행되면서도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행인이 나무 꾼에게 단도의 소재와 관련한 진술을 요구하자 승려는 “이렇게 끔찍 한 얘긴 더는 듣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며, 나무꾼의 두 번째 진술이 끝난 뒤에는 “인간이 인간을 못 믿다니... 이게 바로 지옥이야”라고 외친다. 이렇듯 사람들의 주장이 엇갈리는 상황을 놓고 ‘지옥’에 비견

3) 승려의 반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무서운 일’이라는 표현이다. 나무꾼이

‘모르겠어’라거나 ‘거짓이야’라는 판단에 기초하여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면, 그 모든 상황에 대해 승려는 ‘무서운 일’이라는 식의 다른 가치 판단을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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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거나 단언코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라고 명명하는 승려의 태도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승려를 도덕적으로 매우 예민한 사람, 혹은 승려의 신분이기 때문 에 뻔한 종교적인 프레임으로 상황을 과장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 나 ‘전란, 지진, 태풍,... 화재, 기근, 역병’과 같이 세상에 내리는 재앙 의 상황들을 목격해왔”고 “벌레만도 못한 비참한 주검은 나 역시 수 도 없이 봤”다는 승려의 경험을 생각하면, 그가 심약한 사람이어서 상황을 과장한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그렇게 수많은 재앙의 현장을 경험한 인물이 재판정의 상황을 “도적떼나 전염병... 기근, 화재, 전란 보다 더 무서운 일”이라고 단정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수사적 표현으 로 치부할 수 없는 실체적 근거를 가진 것으로 보아야 할 부분도 충 분히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승려는 상황을 대하는 행인과 대척점 에 있는 인물이다. 행인은 세상사에 그런 일은 흔하다며 대수롭지 않 게 여기는 반면, 승려는 그것이 세상의 어떤 재난보다 무섭고 끔찍한 일이라고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승려와 행인이 보여주는 극단적으로 상반된 태도를 통해 전반부의 갈등구조를 만들어낸다.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그게 지옥’이라며 두려워하는 승려와 ‘그건 인간사에 당연하니 궁금해 할 것도 없다’는 행인의 상반된 태도가 팽팽하게 대립하는 것이다. 행인이 소설 「덤 불 속」을 대하는 일반적인 독자를 대변한다면, 승려는 도덕적으로 예민한 소수의 관객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가 전개되면서 관 객은 과연 승려와 행인 중 누가 더 정당한 반응을 보여주었는지, 승 려가 과민한지 행인이 무딘 것인지에 대해 긍금증을 갖게 되며, 감독 은 누구의 판단에 손을 들어줄지 지켜보게 된다.

3. 행인: 신비를 잃은 인간의 냉소

승려와 나무꾼이 「덤불 속」으로부터 영화적으로 이입된 인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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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에 반해 행인은 원작 소설 「라쇼몽」의 하인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원작 「라쇼몽」의 하인이 주인에게서 쫓겨난 후 어떤 선택을 할까 고민하는 인물이라면, 영화의 행인은 동기가 밝혀지지 않은 채 그저 비를 피해 라쇼몽 누각으로 온 것으로 그려진다4). 영화 가 시작할 때에 그는 원작의 하인과 달리 생존을 위한 어떤 선택의 고민에 빠져 있지는 않은 것이다. 오히려 그는 세상살이와 행동선택 에 대해 자신만의 명확한 기준을 이미 확고하게 갖고 있다. 재판정의 이야기를 처음 듣자마자 그는 망설임 없이 ‘누구나 알고 있는 흔한 이야기’라고 치부한다5). 또한 살인 사건에 관한 것이라는 말을 들었 을 때에도 그는 눈도 꿈쩍 않은 채 “난 또 뭐라고. 겨우 그런 일 갖 고...이 문을 올려다보쇼. 늘 시체 한 두 구는 데굴거릴 테니”라고 말 한다. 행인의 무심하고 시큰둥한 태도는 이야기가 전개된 후에도 변 함이 없다. 다조마루의 증언이 끝나자 그는 “인간들이란 게 다 그렇 지 뭐.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진실을 인정하지 않잖소?”라며 조소 하듯 말한다. 사람들의 말이 엇갈리는 일은 그에게는 신비도 아니고 풀어야 할 의문도 아니다. 그는 인간이란 원래 그렇다는 확고한 세계 관을 갖고 있다. 죽은 남자의 증언에 대해서도 “그야 스님 생각이지 정직한 인간이 어디 있소? 자신만 그런 줄 아는 거지”라고 반박한다.

행인은 이미 세상에 대해 확고한 가치판단을 내리고 있고 그것을 수 정할 의향은 없는 사람인 것이다.

행인은 누가 범인인지, 단도는 어디로 갔는지 등등의 디테일에 사 소한 관심은 기울이지만, 그는 놀람이나 절망, 혹은 열정적인 호기심 등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시종 나무꾼과 승려에게 냉소적인

4) 영화가 시작할 때에 그는 원작의 하인과 달리 생존을 위한 어떤 선택의 고민 에 빠져 있지 않다.

5) 행인이 나무꾼의 이야기에 보여주는 관심과 태도는 일반적인 관객의 것과 유 사하다. 인간 세상에서 살인사건이 지진이나 전쟁만큼 희귀하게 듣는 이야기 도 아니며, 사람마다 증언이 엇갈리는 것도 새삼스럽게 듣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래서 그 정도를 가지고 세상 고민을 다 지고 있는 것처럼 앉아 있는 승려와 나무꾼은 어쩌면 호들갑을 떠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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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을 보이고 사건에 대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사람이 자 기 이익에 따라 서로 다른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그에게는 놀랍고 새로운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깨달은 자,’ ‘통달한 자’의 위치에 스님이 아니라 범속한 행인이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일말의 회의도 없이 세상 사를 다 아는 체 하는 그의 냉소는 사실 허세와 비열함으로 가득 한 인간들이 보여주는 무관심의 다른 이름이다. 그는 제 맘대로 세상을 살며 남을 등쳐먹어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범속한 인간의 표본이며, 「덤불 속」을 보면서도 인간 존재의 불가해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대중적인 부류의 독자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무심하고 냉소적인 행인이 적극적으로 자기 관심을 드러내고 열정적 으로 자기 생각을 피력하는 경우는 언제일까? 그것은 자기의 이익과 관계되는 사건, 곧 누각에서 아기가 발견된 장면에서야 드러난다.

III. 버려진 아기를 둘러싼 윤리적 갈등:

진실이 상대적인 세상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

영화의 두 번째 갈등은 누각 위의 아기를 발견하는 장면부터 시 작된다. 나무꾼의 증언까지 진실성이 의심되고 누구의 말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시점, 그들은 누각 위에 버려진 아기를 발견하 게 된다. 그대로 두면 아기는 추위와 허기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버려진 아기에 대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세 인물 간의 갈등은 이 제 새로운 종류로 바뀌게 된다. 지금까지 그들이 ‘누구의 말이 진실인 지 알 수 없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문제를 중심으 로 갈등했다면, 이제 그들의 갈등은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세 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으로 옮겨진다. 그 리고 구로사와 아키라의 인물들은 지금까지 그들이 재판정의 상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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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왔던 태도에 따라 각자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게 된다.

1. 행인: 이기적 행동을 비난할 윤리는 없다

아기를 보고 취한 행인의 첫 행동은 포대기를 벗겨 이익을 취하는 것이다. 그 행동에 행인은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아기의 생존 의 여부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죽어가는 아기를 보면서도 그의 관심은 죽어갈 아기로부터 포대기를 벗겨서는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다. 이러한 행인의 행동은 지금까지 그가 재판정의 상황에 대해 보여주었던 태도의 연장선에서 나온다.

재판정의 엇갈린 증언에 대해 그는 세상에 절대적으로 신뢰할 진 실은 없고, 인간이 자의 이기심에 따라 거짓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는 태도를 보여왔다. 인간의 거짓말과 이기심에 대해 그는 나무 꾼처럼 의문을 품지도 않았고 승려처럼 인간에 대한 믿음을 찾으려 는 노력을 하지도 않았다. 그는 양쪽의 태도에 모두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 채 그저 인간이 원래 그러니 자기 이익을 취하는 것이 당연하 다는 태도를 보여 왔던 것이다. 그러한 세계관을 가진 행인에게 버려 진 아기의 포대기를 훔쳐가는 것은 죄의식을 가질 행동이 아니다. 오 히려 그것은 다른 인간의 이기심을 통해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

“이런 끔찍한 짓을 하다니...”라는 나무꾼의 항변에 그는 “왜? 내가 안 가져가도 누군가 가져갈 거야”라고 반박한다. 그리고 “악마 같은 놈!”이라는 비난에는 “지들 좋아서 만들어 놓고 버리는 부모는 뭐냐!”

고 반박한다.

이와 같은 행인의 윤리는 절대적인 선과 악의 기준이 지배하는 윤 리는 아니다. 행인은 자기 행동이 ‘끔찍한 짓’이며 ‘악마 같은’ 행동으 로 불릴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다만 그는 타인의 행동에 비추어 자기 행동이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아기의 포대기는

‘내가 안 가져가도 누군가 가져갈’ 것이며, ‘지들 좋아서 만들어 놓고 버리는 부모’가 더 나쁜 놈이기 때문에 자기를 비난할 수 없다는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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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다. 절대적 기준은 없이 타인의 이기적 악행에 의해 상대적으로 자 기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상대적 논리를 내세워 자기를 정당화하는 행인의 논리는 자신을 꾸짖는 나무꾼에게 반박할 때에 가 장 강력해진다. 행인은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그런 당신은 달라? 웃 기는군. 위증을 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잖아! 그 여자의 단도는 어쨌 소? ... 당신 아니면 누가 훔쳐가? 어때? 내 말 맞지? 진짜 이기적인 건 바로 너야! 내게 더 할 말 있나? 없으면 이만 가보지.”

절대적 선과 절대적 진실이 파악 불가능한 세상에서 인간이 각자 이기적인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 비난 받을 수 있을까? 자신에게 ‘악 행’이라고 비난하는 인간의 ‘악행’을 고발하면 언제든 면죄부는 주어 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행인은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자신 의 악행을 정당하며 살아가는 범속한 인간 모두를 대변한다. 그에게 는 절대적 윤리나 정당성은 필요 없다. 오로지 타인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고, 타인의 ‘악행’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이 확보될 수 있다고 믿는 상대적 세계가 그를 지배한다. 행인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만들어낸 상대적 진실의 세계를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이며, 그 평범 한 인물의 행동들은 영화적 ‘지옥’을 만들어내는 주체로서 그 세계를 구성한다. 진실과 ‘옳음’에 대한 절대적 기준을 잃어버린 사회에서, 그 옳음에 대한 고민도 없이 살아가는 인간은 누구든지 마음껏 악행을 하면서도 당당할 수 있다는 것, 행인을 통해 감독은 인간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악마’가 될 수 있는 모습을 구현한다.

2. 나무꾼 : 수치심을 아는 인간

아기를 둘러싼 갈등 장면에서 나무꾼은 원작 소설「라쇼몽」의 하 인에 대응한다. 소설에서 시체의 머리털을 뽑는 노파가 영화의 행인 에 해당된다면, 그 노파에 맞서 따지는 영화의 인물은 나무꾼이다. 그 러나 구로사와 아키라는 그를 원작의 행인과는 매우 다르게 그린다.

첫째, 원작의 하인과 반대로 나무꾼은 아기 포대기를 강탈하는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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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의 논박에서 패배한다.

“물론 말이지,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뽑는 것은 좋다고 할 수는 없 다. 하지만 여기 있는 시체들은 모두 그만한 것은 당해도 싼 사람들이 야. 방금 내가 머리카락을 뽑은 계집으로 말하자면, 뱀을 네 치쯤으로 토막내서 말린 것을 마른 생선이라고 하면서 다테와키의 진으로 팔러 다닌 거야.... 나는 이 여자가 한 일은 나쁘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굶어 죽게 생겼으니 어떻게 안 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지 금 내가 한 일도 나쁜 일로는 생각지 않는단 말이다. 이 노릇도 안 하면 굶어 죽게 생겼으니 어쩌란 말이냐.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러는 것을 이 여자도 잘 알 테니 아마 내가 하는 짓을 너그럽게 보아줄 거야.” (아쿠 타가와 류노스케, 2000: 15-16)

소설의 노파는 영화의 행인과 유사하게 세 단계의 논리로 자기 악 행을 정당화한다. 첫째, 머리털을 뽑는 그 여자도 살았을 때 남을 속 여 건어물을 팔았기에 “그만한 것은 당해도 싼 사람”이다. 둘째, 건어 물을 팔았던 여인도 ‘굶어죽지 않기 위해’ 한 행동이기 때문에 나쁜 것은 아니다. 셋째, 지금 노파 자신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굶어 죽게 생겼으니 어떻게 안 할 수 있겠느냐.” 이런 노파의 논리는 악행을 근 거로 상대적으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점, 그리고 인간이 생존을 위해 행하는 이기적 행동이 불가피한 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논 리구조에서 영화 속 행인의 주장과 상통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대적 정당화의 논리에 원작의 하인과 영화의 나무꾼이 대응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원작의 하인은 “그러면 내가 네년이 가진 것을 모두 가져가도 원망은 않겠지? 나 역시 이러지 않 으면 굶어죽을 몸이니까”(16)라고 말하고는 노파의 옷을 뺏고 걷어찬 다. 하인은 노파의 논리를 되받아서 노파를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하 며, 그럼으로써 원작의 하인은 노파와 똑같은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 으로 변신한다. 반면 구로사와 아키라는 영화를 통해 하인과는 반대 되는 종류의 인간, 행인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움츠러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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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꾼을 제시한다. 심지어 나무꾼은 행인에게 뺨을 맞아도 아무런 반박도 못한 채 물러선다. 영화 <라쇼몽>은 원작 소설에 나오는 ‘맞 대응하는 인간’ 대신 ‘꿈쩍 못한 채 자기가 잘못했음을 인정하는 인 간’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가 원작으로부터 만들어 낸 가장 큰 변화다. 그리고 그 변화는 구로사와 아키라가 관객을 위 해 준비한 ‘수치심을 아는 인간,’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의 존재 증명 이다.

영화는 나무꾼이 행인에게 대응하지 못한 채 물러서는 장면을 이 유는 나쁜 짓을 했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과 연계해서 제시한다. 그가 행인에게 뺨을 맞으면서도 견딜 수밖에 없는 것은 살인의 현장에서 먹고 살기 위해 단도를 훔쳤다는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다. 나 무꾼의 수치심, 그가 느끼는 죄책감은 행인의 공격에서 그를 패배하 도록 만드는 이유가 된다. 이기적으로 챙기는 자가 당당한 세상에서 나무꾼처럼 부끄러움을 느끼는 인간이 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 “내게 더 할 말 있나? 없으면 이만 가보지.”라고 당당하게 떠나는 행인에게 나무꾼은 패배자다. 그러나 영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곧이어 영화는 아이를 안고 집에 데려가 키우려는 나무꾼의 변화 를 보여준다. “집에 돌아가면 아이가 여섯이나 있소. 하지만 여섯을 키우나 일곱을 키우나 힘들긴 마찬가지”라고 나무꾼은 말한다. 영화 의 시작에서 가난이 나무꾼에게 단도를 훔치는 행위의 근거였다면, 그는 이제 아이 일곱을 키워서 더 힘들지라도 아이를 돌보아야겠다 는 결단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감독은 행인 앞에서 나무꾼이 무기력 하게 패배하도록 만든 수치심이 그가 이타적인 행동을 선택하고 인 간에 대한 신뢰를 보여줄 변화의 근거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암울한 세계와 결별한다. 아쿠타가와의 소설 세계에는 어디에도 수치심을 느끼는 인 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소설 「라쇼몽」이건 「덤불 속」이건 어디에 서도 죄책감을 느끼는 인물은 없다. 반면, 영화는 나무꾼이라는 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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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을 아는 인간, 자기가 한 짓이 나쁜 것이라는 죄책감을 느끼는 인 간으로 등장시킴으로써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암울한 인간세계와는 다른 전망을 찾아낸다. 영화는 이기적인 인간-행인이 승리하도록 내 버려둠으로써 원작의 세계관을 인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행 동에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 나무꾼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다. 인간이 각자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비난할 수 없는 세상에서 이 기심을 좇지 않고 이타적인 윤리를 실천할 이유는 존재하는가? 참회 하는 인간-나무꾼을 통해 윤리적 선택의 이유를 증명하고 있으며, 그 를 통해 원작의 비관적인 인간들과 결별한다.

3. 승려: ‘상대성의 지옥’에서 희망 찾기

아기를 둘러싼 갈등에서 가장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는 인물은 승 려다. 나무꾼과 행인이 서로 격렬하게 논쟁할 때 승려는 어떠한 주장 도 하지 못한 채 둘의 다툼을 지켜본다. 사실 누구의 말도 ‘옳다’고 믿을 수 없는 상황을 앞에 두고 승려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인간에 대한 불신을 고려하면, ‘옳음’에 대한 그의 흔들림이 ‘옳은 일을 실천 해야 할 당위’의 상실로 귀결된다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 타인을 위해 ‘옳은’

행동을 해야 한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옳음’의 절대적 정당성 을 상실한 승려로서는 아기의 포대기를 빼앗아 가는 행인을 반박할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승려가 나무꾼과 행인의 갈등을 공포에 질린 채 지켜보며 행인의 논리가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것을 방치하는 것 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한편, 아기를 중심에 둔 갈등 장면은 세상사에 통달한 승려가 왜 재판정 상황에 대해 ‘지옥’이니 ‘끔찍한 일’이니 무서워했는지를 설명 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행인이 큰소리치는 그 장면은 ‘상대적 정당화’

가 통용되는 세상에서는 어떠한 악행도 제어할 수 없는 현실을 여실 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 <라쇼몽>에는 악행을 더 나쁜 악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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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로 정당화하는 행인을 막을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기심이 찬양받고 이기심에 근거한 악행이 용서받을 수 있는 사회의 해악은 얼마나 클까? 제2차 세계 대전이 몇 천 만 명의 목숨을 희생시켰고, 흑사병은 당대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을 사망케 했다고 전해진다. 19 세기 중국의 흉년으로 수천만 명이 아사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영 화 <라쇼몽>과 같이 인간이 살기 위해 나쁜 짓을 해도 비난할 수 없 는 사회, 악행을 통제할 공통의 윤리적 기준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수 백 개의 전쟁, 수십 번의 홀로코스트가 반복되어도 그걸 제어할 길은 없을 것이다. ‘저들이 더 나쁜 짓을 했으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라는 논리는 무수한 인간의 희생을 얼마든지 반복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 기 때문이다.

영화는 아기 포대기를 둘러싼 장면을 통해 재판정의 현실을 ‘지옥’

이라고 평가했던 승려의 절망이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 상대성 의 논리가 통용되는 사회는 인간이 맞이할 수 있는 최악의 지옥이 펼쳐진다는 감독의 고뇌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어쩌면 전후 모든 가치관이 붕괴된 일본 사회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을 담아내 는 것이며, 그런 면에서 승려는 ‘상대성의 지옥’이 된 사회에서 절망 한 감독을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무꾼이 아기를 안고 집으로 향하는 엔딩은 ‘상대성의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한 감독 의 마지막 희망이 담겨 있다. 모두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결단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승려는 나무꾼의 변화에서 그 희망을 찾는다. 나무꾼은 이기적으로 사는 것을 비난할 수 없는 영화의 세상에서 이타적인 행동을 취하는 인물이고, 자기 자신의 변화를 만들어 낸 인간이다. 그 행동이 어떠한 현실적 이익을 주지 않지만 그러나 그 행동을 통해 나무꾼은 패배자 가 아니라 인간성을 가진 인간으로 재탄생한다. 승리하는 자, 이익을 취한 자는 행인이지만 이 세계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지키는 자 는 나무꾼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승려가 그동안 헤어나지 못하던 인간 에 대한 완전한 불신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것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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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이며, 그 순간에 승려 역시 ‘부끄러운 것은 바로 나요’라는 고백 을 쏟아낸다.

나무꾼과 승려, 두 사람이 행인의 논리를 반박할 수 있는 새로운 윤리적 기준을 찾아낸 것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나도 내 맘을 모 르겠소”라고 나무꾼이 고백하듯, 그의 이타적인 행동에는 어떠한 윤 리적 근거나 논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 사람에게서 대화는

‘내 맘을 모르’는 인간이 ‘부끄러운’ 행동에 대해 사죄를 하는, 다분히 정념적이고 통속적인 방식으로 주어지고 있을 뿐이다. 상대적 정당화 가 압도하는 세계에서 영화 <라쇼몽>은 절대적 윤리를 제시하지 않 는다. 오히려 영화는 상대적 정당화 밖에 없고 절대적 진실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도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존재적 지위를 지킬 수 있는 가를 묻고 있다. 그리고 그 계기는 나무꾼과 승려 모두가 보여주는

‘부끄러움에 대한 고백’을 통해서 주어진다. 영화의 결말부는 ‘부끄러 움’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찾은 두 인물을 보여주는데, 비가 그친 라 쇼몽을 뒤로 하고 떠나는 나무꾼을 지켜보는 승려는 곧 ‘지옥’에서 희 망을 찾아낸 감독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6)

IV. 결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덤불 속」과 「라쇼몽」을 영화로 재현 하면서 주력한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진리의 상대성’이

6) 영화가 보여주는 휴머니즘의 측면은 기존에 더러 주목받았다. 구로사와 감독 이“나무꾼의 역할을 강화시키고 아기를 새롭게 창조함으로써 원작 소설의 허 무주의와 냉소주의를 넘어서서, 미래에 대한 희망과 인간에 대한 신뢰에 기반 한 휴머니즘을 제시했다”는 안영순의 분석(92), “영화의 결말부는 흔히 ‘단순한 휴머니즘’으로 언급되곤 하는 메시지를 코드화시킨다”는 장우진의 해석이 이 에 해당한다(142). 하지만 기존의 연구는 대개 영화의 휴머니즘이 윤리적 실천 의 모색이라는 주제적 차원보다는 원작을 대중적인 입맛에 맞추기 위한 감독 의 배려로 보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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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인식의 왜곡’ 그 자체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그는 ‘인간의 기억 은 왜곡될 수 있다’거나 ‘인간은 이기적이어서 누구도 진실을 알 수는 없다’는 식의 주제를 반복하는 듯 보이지만, 영화적 변용의 과정에서 구로사와 아키라가 모색하는 것은 바로 그 너머의 인간의 윤리적 실 천의 가능성이다.

승려와 나무꾼, 행인의 갈등을 통해 감독이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은

‘진실을 알 수 없는 세상을 인간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그는 승려, 나무꾼, 행인이라는 인물을 통해 각각 비관하는 자, 질문하는 자, 냉소하는 자를 대비시킨다. 그리고 버려진 아기를 둘러싼 그들 간의 갈등을 통해 감독은 ‘진실을 알 수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 이기심을 버리고 행동할 윤리적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을 던진다. 아기의 포대기를 태연하게 훔쳐가는 행인을 통해 감독은 결국 냉소적이며 이기적인 인간이 승리하는 현실의 비정함을 그려내 지만, 곧이어 나무꾼의 참회와 이타적 행동을 통해 승려가 인간에 대 한 믿음을 회복하는 장면을 더하면서 감독은 결국 ‘모든 것이 상대적 으로만 정당화되는 세상에서 인간은 여전히 이타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존재’라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소설에서 보여주 는 비관적 인간관 자체를 부정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영화는 「덤불 속」이 보여주는 이기심과 거짓말, 허세 등으로 가득 찬 세상을 인정 하며, 또한 소설 「라쇼몽」에서 인간이 비정한 이기심에 따라 행동 하는 세상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어떠한 행동의 근거, 절 대선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이 없이 살아가야 하는 전후의 일본 사회 에서 인간은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로서 윤리적인 실천을 행하고, 상 호 간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가 찾아내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통속적이거나 값싼 휴머니즘에 불과하다는 비판은 따로 고찰해야 할 부분이겠지만, 분명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 찾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인식적 한계의 문제 만이 아니다. 그의 주제는 오히려 절망적인 세상에서 인간이 이기적인 행동을 넘어서야 할 가능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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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한 것이다.

주요어

아키라 쿠로사와, <라쇼몽>, 라쇼몽 효과, 상대적 유효성, 인간의 윤리적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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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일 2019/11/15 심사일 2019/12/12 게재확정일 2019/12/23

Name Jang, Kyongook

Belong Dept. of Liberal Arts, Dongyang University E-mail

kojang73@hanmail.net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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