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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원론 7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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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원론 7강

2013년 5월 2일 목요일 오후 1:03

발제는 최소한의 공유입니다.

이렇게 되는 경우에는 이 시간에 와서 그러지 말고, 대책이 없으니 나나 조교에게 이야기해서 나머지를 어떻게 할 수 있도록- 요약도 그래. 발제는… 이런 건 아니죠. 원고를 안 봐도, 책에 있는 이야기다 아니면 생각을 덧붙이는구나. 들으면서 충분히 알 수 있잖아요. 그런데 책에 있는 얘기를 요약… 보다는 부분 발췌지. 상기의 계기도 되겠지만- 자기 방식으로의 내용파악이니까.

지극히 미진해도 자기 나름의 시도인데. 이건 절대시간의 부족으로 가지 못한 부분이지만- 다른 멤버들도 독서보고서를 작성했으니 다 읽었겠지. 대표로 하는 것인데-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강 조하겠습니다.

자. 그- 지난 시간에-

끝부분이 덜 다뤄진 부분부터 해야겠지만, 그건 이따가 하고요. 비록 발제는 반만 하고 멈춘 상태지만, 발제자만 책을 읽은 것은 아니고- 그래서 독서보고서 작업을 요구한 거니까- 이런 때 지금 발제서 다뤄지지 않은 3, 4부서도 그렇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된 것처럼 생각하고, 한스 바이핑거- as if의 철학-처럼, 다 한 것처럼 하도록 합시다.

그런데-

Als ob은 지난 시간 나오던가? 그거 하자면 또 봐야하지만. 하여간, 살펴봅시다.

자-

지난 시간에, 목차 전체를 놓고 체계적인 리딩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야기를 했죠? 그리고 작 은 논문과 학위 논문의 방법으로 생각할 기회를 가졌는데- 그 틀에서 보면, 종교의 본질의 제목.

아직 주무르지 않고 뒀습니다. 2부 A의 제목. 종교적 주체. B가 대상이니까. A 안의 작은 1부, 체험과 작용이라고 할 때- 일상적인 분류틀 안에서 행위로 바꿨어요. 결국 종교적 주체의 구조로 바꿔서 풀었고요. 그리고 작은 부제로 또 붙였다면- 주체와 대상.

시각적으로도 대비가 되겠어요. 그러면 뒤는 사건과 현상을 이야기해야 해. 사건이 저기서 벌 어져. 그리고 이것이 이쪽 주체에게 다가오고 드러나는 사건의 차원을 현상이라고 불러. 사건은 사건인데- 그냥 달에서 사건이 폭발한다. 달 뿐이야? 지구 안에서도 우리가 모르는 사건들이 벌 어져. 그러나 주체- 체험 또는 인식의 주체-에게 다가오는 방법의 형식이 현상이라고. 그 현상이 라는 말은 플라톤에서(형이상학) 훗설(현상학)까지 다 공유하지만 다른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 고, 바로 그 위치입니다. 일련의 궤적에서, 플라톤에게도 칸트에게도 훗설에게도 그 위치에요. 고 중세현대를 꿰뚫는 위상이라는 거야. 사건과 경험 사이에서. 다만, 플라톤에게서는 어때요. 체험 이라는 것이, 그 도식을 플라톤에게 적용한다면, 가장 고단위 형식의 인식을 말할 것이야. 헤센은 종교적인 체험을 말하려니 중간에 신앙이 들어갔어. 하지만 일상적으로 말하면 신앙은 괄호치고, 결국 체험 위에 인식이겠지. 인식은 조작할 수 있어. 그래서 저편의 신에 대한 존재도 담보가 될 수 없어. 하지만 체험의 피동성은 그 존재를 가리켜줘. 인식은 조작할 수도 있어! A인데 B로 볼 수 있어. 없는데 있다고 볼 수도, 알 수도 있어. 인식은 그렇게 될 수 있어. 하지만 체험은 아니 야. 그 말에 대한 동의는 또 다르지만, 하여간 이 사람 논리는 그래. 저 체험 바깥의 무엇이, 나 로 하여금 체험하게 만들어. 체험의 피동성에 호소하고 있어요.

(2)

여러분의 이야기를 촉발하기 위해 접겠습니다. 접다가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되지만. 어쨌거나, 현상이지, 현상. 목차 다시 구성하기 작업입니다. 그랬을 때- 이 부분에 사건 과 현상이 자리 잡는데, 하던 이야기 간략하게 마무리할께요. B는 사건과 현상을 배치해야 해.

그러면 뭐가 사건이야. 뭐가 현상이고. 좀 추려보세요. 여러분이. 그렇게 해쳐모여하면, A는 적절 하게 되는데, B는 어떤 것은 위와 아래, 각각 다르게 들어갈 수도 있어요. 그게 목차를 읽는 능 력이야. 그래야 해. B에서 사건 ...

플라톤에게 현상 다음이 체험인데- 그것의 가장 탁월한 형식이 인식이야. 그리고 온갖 체험과 긴장 관계를 가져요. 하지만 칸트에게서는 어때. 사건 현상 경험 행위 이렇다고 하면. 현상과 경 험이- 사실 체험이라는 말은 일러요. 칸트에게는. 경험은 앎이고 체험은 삶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칸트에게 현상과 경험이- 플라톤에게 현상과 경험- 현상과 관련해서 인간이 행하는 방식의 최고 등급으로서 인식 사이에 엄청난 거리가 있어. 그래서 그런 이름의 저널도 있어. 하여간. 엄청난 거리가 있지만- 칸트에게 현상과 경험은- 인식의 첫 단계에요. 그래서 플라톤보다는, 근대인이 현대인보다 더 가까워요. 당연하죠. 칸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분절의 결정적인 선언이 펼쳐 졌잖아요. 당연히 경험이 시작이지. 그러나 경험에서 끝나지 않고 주무르는 과정이 있겠지? 플라 톤에게는 그렇게 먼 것이, 칸트에게는 경험이 현상을 싸잡아. 그래서 경험과 현상이 일치해. 객 주의 스팩트럼으로 두지만- 형이상학자 인식론 반형이상학자의 여러 사람들에 따라 이 네 개의 축은 한없이 늘어나기도 하고, 하나로 겹치기도 해요. 현상이 하나의 경험의 영역이야. 같은 말의 동전의 양면이야. 객으로 보면 현상이고 주로 보면 경험이야. 그러면 훗설은? 그 중간의 두 개- 주와 객이 맞는 지점이잖아요. 현상과 경험. 현상과 인식. 그쵸? 다가와서 들어오니까 현상이고, 겪어서 새긴다- 그러면 경험이라고 할 것이고, 겪어진다고 하면 체험이고, 대가리에 들어서 알려 지면 인식이라고 해요. 근데 훗설은 층위를 나눠요. 체험을 제일 밑에다 두고. 하여간. 앞뒤. 좌 우는 입장에 따라 벌어지고. 그러면 현상학에 따르면 어떨까- 현상학의 현상은 뭐죠? 간단히 얘 기해서- 플라톤에게 현상은 그림자에요. 심하게 말하자면 가짜야. 비춰진 거야. 원래 것은 있는 데, 잠시 드러나서 나타났어. 그림자로서 현상이 할 일은, 내 원래 일이 저거였다는 것을 상기시 켜야 해. 근데 상기만 하면 뭐하냐. 모방해야 해. 그게 그림자가 할 사명이야. 상기와 모방. 원래 이데아에 있었으니, 닮으려고 발악을 해. 인간의 이데아로부터 우리가 온 것이야. 그래서 원형 본 질을 기억해야 해. 그리고 닮으려고 발악을 해야 해. 그런 운명이야. 그리고 그걸 사랑해야 해.

그런데- 칸트는 어떻습니까? 칸트에게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현상뿐이야. 저 새까만 선배가 한 말은 시나락 까먹는 소리야. 상기는 있을 수가 없어. 이 현상이 다야. 저쪽이 없다는 게 아니 라, 알 수 있는 게 이쪽일 뿐이야. 현상의 위치가 엄청 부상된 거야. 플라톤과 칸트의 차이는 앎 의 한계에 대한 의식여부야. 인식론이 그걸 깨우쳐줬지. 그래서 앎의 한계를 칸트는 현상이라고 불렀어. 그러면 훗설은 당연히 이거에요. 그런데 칸트처럼, 저편 너머- 현상 너머, 그 물자체를 모른다고 치부하지 않고! 현상 안에서, 본질을 찾아드려가려고 몸부림치는 거에요. 플라톤에게는 현상 너머, 진짜 본질이 있었고. 칸트에게는 알 길이 없지만, 훗설에게는 현상 안에 본질이 있어.

그러면 훗설에게 현상과 본질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져요. 그러니 태초에 해석이 있었다는 것이 나오는 거야. 완벽하게 같은 것은 아니니까. 지난번에 해석의 범위를 묶었잖아. 하여간 그런 거 야. 해석학에서 사건과 현상이 좁아들여져. 사건이 해석을 만든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 대책 없 는 소박한 관념론으로 빠지지는 않아요. 자. 그러면 여러분, 현상과 사건. 섹션 B가 그걸 말해야 하는데- 제목을 바꾸면 종교 대상의 구조: 사건과 현상 이야. 그러면 어떤 것이 어떤 것일까.

종교적 근본 범주들이 나오네? 한번 배치를 해봐요. 그리고 신 이념과 해석은 뭘 또 하겠지.

옛날이야기를 훑어줬어요. 이런 것들을 했는데- 하고 개진하잖아요. 그리고 2절에서, 역사의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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름에서, 종적인 축을 횡적인 축에 넣어. 그리고 양항 사이의 의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점에 따 라 저런 것을 이야기해. 그리고 3절에 따라 또 이야기가 나와. 그러다가 변신론이 나와. 이게 뭐 야 갑자기. 그러면 제목만 보고는 느낌이 어떻습니까? 느낌이 들어요? 안 들을 수도 있어요. 3절 의 네 개의 항목을 보면 예견이 되죠. 변신론의 문제가 안 나올 수가 없겠죠. 창조 계시 구원 완 성을 보면- 근데 본문을 읽었으니, 변신론이 어디에 위치할까요? 이 섹션 B 안에서, 종교적 대상 의 구조, 사건과 현상 안에서는 작은 위치를 차지할텐데- 변신론이 붙을 곳이 어디에요? 이율배 반이잖아. 1. 단순함과 풍요로움. 하나와 여럿이야. 뭔 얘기야. 신의 뭐? 신의 뭐에 관해서 그런 거야. (본질과 현존) 그렇지. 그러면 두 번째는? 본질과 현존. 그게 이율배반인가요? (신에서는 이 율배반 아님) 좋은 얘기인데- Dasein. 고전신학과 현대신학에 따르면, 실존이라고 말해야 더 맞 는데. 스콜라에서는 그냥 실존이야. 그리고 스콜라 신학에서는 본질 안에서 실존이야. 그래서 대 립이 아니야. 다만, 헤센은 중세 사람이 아니지. 현대적인 사상의 맥락 속에서 문장을 고려해서 표현했지만, 앞에 단순성과 다수성. 283쪽. 단순과 다수를 대립하기 위해, 무한한 풍요로움을 말 해요. 그것에 대한 보조적인 설명이에요. 본질과 실존 사이에. 그래서 두 번째 이율배반은 무한성 과 인격성을 말할 수 있죠. 세 번째가 최고 실재와 최고선 사이. 네 번째가 초월과 내재 사이.

그러니 변신론은 세 번째 이율배반에 관한 말이에요. 자체는 중요한 이야기지만, 여기서는 보 조적인 구조에요. 그러면 어디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오늘 가장 중요한 것은 뭐야?

진호) 신이념 아닌가요?

자 또.

#) 신이념에서 모순적인 부분 때문에, 이율배반이 중요한 것 같아요.

다 신이념 안에 들어가네요.

$) 헤센의 생각이- 306쪽을 보면, 맹아적 이성이 나오는데- 결국에 가서는 초월만이 아니라 내재가 필요하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면서, 그런데 그 안에 발견되는 이성이 맹아적이다. 그러나 온전한 이성- 우리가 발견하는 이성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다. 그래서 포괄주의로 결론을 내리 지 않나.

그러면 질문을 바꿔보죠. 익숙하지 않은 것으로, 가장 자극이 된 것, 일깨움을 준 것이 있나 요?

범서) 주지주의에 대해서.

광우) 교수님 수업 많이 들어서… 주지주의 빠지면 안 된다… 그렇게 가는 것 같아서요...ㅎㅎ 정우) 체험과 개념의 해석이 가장 큰 축이고, 따라오는 요소라고 보고, 결국 신체험과 개념적 해석 같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개념 해석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신체험 과 개념적 해석으로 생각했습니다.

*) 올바른, 올바로 이해된 이 계속 들어가더라고요. 과거에도 신체험이 있는데, 신이념으로 가 는 한계점을 말하며 주지주의로 가는 것을 말하며, 올바로 라는 말이 이해되는데- 긍정적이면서 도 위험하잖아요. 그거를 이야기한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정우) 그래서 상징이 중요한 것 같아요. 직관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 상징.

교) 예…

다 중요한 이야기인데-

그러면 좀- 논의의 효과를 위해, 이렇게 한번 생각해봅시다. 늘 그렇듯이, 꼭 저의 방법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섹션 B에서 1장. 개념적 해석이라고 했어요. 이거는 뒷이야기를 위 한- 그래서 종교적 대상의 구조라고 했어. 그리고 사건과 현상이야. 그걸 아까 찾아보자고 했습 니다. 그러면 개념적 해석은 뭐겠어. 섹션 A의 이야기를 B로 넘기기 위한 bridge야. 체험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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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열심히 했어. 촉발되는 행위 작용도 했고. B에서 대상 얘기를 해. 사건과 현상의 이야기를 할 것이야. 여기 1장은 개념적 해석이라고 했어요. 자. 가치 체험은 아까 했고, 개념적 해석이 새 로운데- 철학 사전적 어휘를 정확하게 들어가면 힘든 어휘입니다. 그것의 철학적인 장르, 시대적 인 배경까지 고려하게 되면, 적이라는 접속어로 결합된 것, 정말 제대로 된 충실한 의미를 지니 는지 생각하려면 힘들 꺼야. 그러면 지나치게 쓸떼 없는 고민이야. 쓰는 사람은 별 뜻 없이 막 쓰거든. 그냥 그 뜻풀이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을 해석이라고 하고, 그걸 있어보이게 해석학적이 라고 말하는 언어습관이 이 동네에서는 난무하거든. 그래도 중요한 것은, 의미적으로, 앞이야기를 뒤로 가기 위해 개념적으로 추려내는 작업을 인류가 할 것이고. 그냥 체험만 하고 헬렐레 할 수 는 없으니까-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거야. 가교 위치에서, 그 체험을 추려내는 작업 정도로 생각 하면 돼요. 그 정도로 보자고. 254쪽. "모든 고등 종교는 계시에 근거해 있다." 신론 종교의 제국 주의적인 횡포죠? "… 논리적인 전개와 설명" 개념적인 설명과 맞아 떨어질 거예요. "인간 본성의 불가피한 욕구다"이게 이 장의 위치겠고요. 2절 구체적 전개. 최고 완전자. 존재 자체. 순수 현실 태, 자립적 존재, 자기 근거, 자기 원인. 일련의 표현들은 플라톤을 원조로 하지만, 열거된 표현 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더 다듬은 거예요. 인간은 옛날부터 했고, 그래서 개념적으로 그래왔다.

최고 실재, 완전자라고 했고, 그 말도 모자라서 존재 자체. 있음 자체. 없었던 적도 없고, 있기만 하고, 없어질 가능성도 없는 있음 자체. 그것에 비해서-있음 자체에 비해 나머지는 없었던 적도 있고, 없어질 것이고, 있는 것도 없어질 가능성(무화)도 있어. 쫙 깔고 나오잖아요. 저 뒤- 아까 저 뒤… 단순성과 다수성… 본질과 현존할 때, 근거적인 설명이 여기 262페이지에 있어요. 여기 현존재가 나오잖아. 존재 본질 실존이 스콜라에서는 동위근원적으로 묶여. 그래서 얘를 끌고 가 지고, 뒤에서 할 얘기를 앞에서 깔아주잖아. 흠.. 261-2에 걸쳐서, 전율과 매혹의 내용이 정의와 사랑이야.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이- 261, 마지막 줄. 서술 방식의 변화는 저 가치 변화가 속 성의 이름으로서가 아니고 본질의 이름으로서 기능하는데 있다. 이게 뭘 말해줘요? 가치 체험에 대해 개념적인 해석을 하는데- 그게 속성에 머물고 말면- 아직도 체험 영역에 있는 거야. 종교적 체험의 영역이야. 하지만 본질이라고 하면, 속성과 잘 맞는 것은 본질이야. 속성이 귀속되는 본체 는 실체야. 그러면 저쪽이 있어. 그래서 본질이 있다고 하는 거야. 에센티야가 아니고. 그래서 쌍 나누기로 봐야해요. 언제나 그것과 대조적인 개념어들, 개념적인 쌍관어휘라고 해요. 대립의 틀에 서 봐야해. 그래서 잘 드는 예가, 화이트헤드의 책에서 나오는 존재구조분석이야. 그래서 자신이 존재를 보니, 잊어먹었대. 존재의 반대말이 다 존재 안에 들어있던 풍부한 역동적인 개념인데, 반 대말이 다 빠져나가서 낙잡해졌다는 거야. 무, 존재 개념 안에 있는 거야. Sein 안에 Nicht가 있 어. 헤겔이 말한 werden도 그런 거예요. 존재도 무도 없어. 모두 생성이야. Reality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와 무가 있지, 결합이야. 결합도 오도야. 꿍작꿍작해서 만드는 것 같은데, 아니야. 정과 반이 있어서 합이 아니야. 어떤 경우도 변증법이 그런 거 아니야. 어느 경우에도 합이야. 아무리 단순한 것도. 그래서 그게- 깔끔한 게 아니라, 합의 정체를 보니 정과 반이 각축을 벌이고 있어.

그게 도식적으로 정의된 논리의 요체라고. 따로 있는 것이 붙은 것이 아니라, 원래 생겨 먹은 것 이 그래야. 있는 건 합이야. 이쁘게 말해서 합이지. Syn이니까 합이지- 이름이 우리를 오도해.

합. 잘 봉합됐어- 모순이 지양- 그런데 그 지양은 어느 순간에 봉합되고 멈추지 않아. 세계사의 종말에 가서나 멈춰. 그러니 우리의 삶의 현실은 다 합이야. 다만 합의 단계가 상승해. 원래 출 발점을 향해서. 그래서 헤겔 안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다 있지. 원래 겉으로 나와서 외화되었 다가 다시 돌아가. 올라가는 것이 모순의 진행이야. 모두 werden이야. 과학적으로 되고 있잖아.

원자가 가장 작은 줄 아는데, 안에 우주가 있어. 안에서 빙글 빙글 전자가 돌면서 유지하고 있 어. 0을 두고 + -가 끝없이 각축을 벌여. 그러니 - 없는 +가, +없는 -가 있을 수 없어. 물리적

(5)

으로 입증되고 있어. 논리적, 형이상학적 통찰이죠. 얘기가 어쩌다 여기까지 갔나. 저는 여러분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하기 위해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체험에서 주물러져 나온 개념이라고 하기에… 속성이라고 하면, 술어의 자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어에 해당 돼. 실체기 때문에 주어야. 실체기 때문에 주어다. 실체에 속한 속성으로 본질이야. 그래서 신은 정의를 가지고 있다가 아니라, 정의다 에요. 그냥 전율적 신비에서 가치 체험이 뭐냐… 정의야. 그래서 속성이고 말면, 정의를 갖고 계신 신으로 끝나. 그런데 이러면? 주 어는 술어 없이도 존재해야 해. 정의 없이도 신은 신으로 있어야 해. 철수는 학교에 간다, 철수 는 똥을 싼다. 잘 싸야 돼. 삼박자 축복이 따로 있나. 그런데 그- 술어가 아니어도 철수는 철수 잖아요. 밥 안 먹어도 철수여야지. 물론, 영원히 밥 안 먹은 철수는 없어지겠지. 영원히 영원 자 체뿐인 것은 존재 자체 뿐이지. 하여간. 속성, 술어는 한 개야. 9개 없어도 실체는 성립해요. 그 게 실체 개념이에요. 정의 없이도 신이냐? 그러면 술어가 아니라 주어의 위치여야 해. 신이 정의 다는 동어 반복이 돼야 해. 나중에 술어가 따로- 그러면 속성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미 사랑 을 말한 것이에요. 그러면 진짜로- 이…. 뜻이, 이런 논조가, 논법이 타당할까? 를 물어야 해.

광우) 실체가 필연적인 겁니까? Theos가 원래 형용사라고 하네요. 337년 이후 명사였는데, 바 다가 테우스다 라고 말하는 게 통용되었데요. 그 전에는. 그렇게 실체로 가는 것이 필연적인가 요?

교) 내가 말한 것이 그거잖아. 대답해봐요. 생각한 사람이 대답도 갖고 있겠지.

광우) 전달을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교) 과연 그거뿐인가? 욕구를 그리 작게 보면 안 될 것 같은데.

광우) 자기 확장 시키려는 거겠죠. 욕구 그 위에 그게 있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넓히면, 내가 되는 거니까, 내가 넓어지고, 종교를 통한 안정 욕구를….

교) 결국 내가 기다리는 말이 나오네. 욕구잖아. 자네가 대답하였어. 생각할 것이 많어. 생각할 거리는 많았어. 1장에서 이걸 던지고 싶고요.

그 다음 가봐. 뭘 생각해야 하는지 알아? 감 잡았어요?

범서) 헤센이 교리, 주지주의 얘기하면서요- 두 개의 층, 합리적 층과 종교적 층 말하잖아요.

종교적 층이 신적 측면인데. 술어가 주어를 대체할 수 있느냐- 헤센의 관점에서는 그것도 주지주 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정의한다는 것 자체가. 주지주의적인 의도가 아닌가.

내가 답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말해보세요. 그러면 마중물 효과가 나와요.

정우) 신에게는 가치론과 존재론적 요소가 같이 나와야 한다고 하거든요. 신에게는 두 가지 요 소가 나와야 한다고, 그래서 고민하는 것이 이렇게 나오고, 그래서 인격적 계기가 결국은 신을 그렇게 상정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그래서 가치와 존재가 하나가 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헤센은 말하는 것 같습니다.

#) 욕구를 너무 지적 충동으로만 표현한 것 같아요. 약간 호교론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었어요.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실용주의적인 관점 때문에 욕구를 그렇게만 표현한 것. 존재론적으로 접근 할 수밖에 없다. 그 관점을 관철하기 위해, 존재가 최고 존재여야 하고, 존재 개념을 그냥 실재 가 아니라 가치 실재여야 의미가 있다는 것.

교) 진선미는 가치이기만 해도 좋은데, 성은 존재를 가져야 해.

광우) 실용주의라고 했지만, 이해가 되는 것은- 아까 테우스 이야기했잖아요. 그 이전에는 sect로만 공유가 되었는데, 세대가 흘러가면서 망각되고 흐려질 수 있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보 면,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본 거에요. 욕구만이 아니라- 내거를 확장하려는 것을 전수하고 보존하 려고 하고, 체계가 잡혀지는 거지요. 그게 존재론적으로 가게 되고.

(6)

교) 고 맥락에서- theos 가지고 얘기했지만- 종교적이라는 형용사가 먼저 했잖아. 스미스 책에 서. 근데 앞에서는 원초적 단계에 첫사람들이 있었고- 제도와 문화로 형성되고 계승되고, 그 과 정에서 형용사가 명사가 되었다. 종교적과 종교에 대해서 스미스도 물상화 한참 이야기했어요.

테우스 이야기와 똑같애. 그런 이야기에 대한 의문은- 그 옛날 사람들은 체험을 하고, 뒷사람들 은 못 하냐? 체험의 특권인가? 우리는 화석화된 것만 체험하는 건가?

광우) 저도 그거 고민 중이에요. 졸업 논문 주제인데요. 성서 정경화 과정도 이단 방어로 나타 났는데, 필연적이지만 또 깨져야 한다고 봐요. 그런데 그 계기는 일상어로 어떻게, 역동성은 어떻 게 해석적인 틀거리가 교리로 재현되는데, 원초적 타자가 확 깨뜨리냐, 아니면 우리의 삶에서 나 올 수 있냐. 질문을 말하고 싶어요.

정우) 목적이 전제된 필연 같아요. 필연의 과정으로 보기 때문에, 인간의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일, 목적에 추동된 필연- 개념화의 과정이 필연이라고 하셨는데. 특정 목적에 의한 목적이라고 하는 것 같아요. 근데 그 목적이 전제된 것 같아요.

광우) 저는 당연하다고 봐요. 개념적 해석이 교리 교의 이전도 말하는데- 그러면 체험을 어디 에다 반추하다고 봐요-

#) 저는 그 이전을 놓치고 있다고 해요. 종교적인 욕망만 말하는 것 같아요. 이미 있는 종교를 유지한다고 볼 때는 맞지만- 지적 충동의 욕망 말고도 있다는 거죠. 전달하기 위해서 말고도- 삶 에 봉사하기 위해서라고도 하죠. 좋은 뜻에서 설정해도, 실제로 일어나는 삶에서 봉사만 하고 끝 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 것 같아요.

광우) 아까 제 말도 그 질문이거든요. 갱신의 질문을 위해서

교) 자꾸 필연 이라고 하는데, 정우도 그런 말일지도 모르지만- 필연이 목적을 가진 것이다, 의도적인 기획이다라는 말인가?

정우) 예.

교) 그러면 필연과 의도는 달라보여.

정우) 그래서 필연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지. 그래서 안 할 수도 있는 거야.

광우) 의도는 전제라고 할까요.

교) 불가피는 아니네.

필연이라는 말은- 일상어는 그렇게 쓸 수도 있는데, 논리적 필연성- 과 함께 불가피성도 있어 요. Logische Notwendigkeit. 그리고 현실적 불가피성. 달리 가려고 했는데 결국 가는 것. 필 연성은 당연히 기계적으로 그렇게 돼. 불가피성은 경험적 공통성의 원리야. 그러면 불가피성이 지? 근데 정우는 불가피성조차도- 의도와 목적 때문에 벌어진 결과인데, 그러면 목적도 선택 가 능한 건가?

정우) 윤리라고 빼는데- 결국 헤센의 논의에 따르면…

교) 의도 외에 다른 것은 없어? 의도할 수는 없어?

광우) 의도되어지는 거죠.

정우) 개념화 작업이죠. 체험은 수동적이지만- 의도가 상관없겠지만, 체험의 표현에서는 개념적 표현이고, 의도의 산물이지, 신적 산물이 아니라는 거죠.

광우) 동서방 기독교 용어 다른 것이 의도한 것이 아니잖아요. 처해진 의도가 아니잖아요. 내 가 알고 되어진 것에 의해 되어진 것이죠.

정우) 그건 기독교에만 있는 거죠.

광우) 사회문화적인 것도 있죠.

범서) 249. 충동이라는 말을 쓰거든요. 의도, 필연보다-

(7)

교) 그것조차도, 욕구나 충동이라는 말은- 여전히 큰 범위에서 묶여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욕구나 충동은 내 안에서 쥐고 흔들어. 의도는 내가 하지만, 욕구는 무의식적이야. 언어도 마찬가 지고.

자. 그 정도로 합시다. 시간관계상. 지금 던져야 할 질문- 그리고 쉴 것인데. 한 초점을 맞춰서 너무 많이 들어갔고. 옮겨가면서 할 것인데- 신은 정의롭다. 신은 정의를 갖는다가 아니라- 속성 이 아니라 실체를 일컫는 것이어서, 그래서 따라서 신을 말했을 때, 이미 정의다. 라고 읊어대는 데- Feuerbach가 바로 공격해.

진호)

교) 그냥 사랑이면 되지, 신이어야 할 이유가 뭐야. 투사의 구체적인 메커니즘이- 주어와 술어 를 결합하면서 헤센은 그렇게 설명했지만- 그래서 이런 명제가 성립한다고 했지만- 그런 형성구 조 안의 작동원리가 뭐냐? 신은 정의다라는 명제 속에서, 정의는 인간이 종교적인 저 대상과 관 련해서, 아무리 주체 안에서 일어난 체험, 가치체험의 내용을 파들어가서 개념적으로 해석해서 정의, 사랑이라고 해? 근데 이게 그냥 속성이면 안 되겠어, 그래서 실체까지 등극해야겠어! 실체 여야 한다는 말까지 가는 과정에서- 속성, 즉 가치체험의 내용은 분명히 체험자에게서 벌어진 일 이야. 저쪽이 읽어준 일이지. 이 안에서 일어난 거야. 인간 안에서 일어난 거야. 그걸 실체화시켰 어. 이걸 술어의 신격화. 속성의 실체화야. 주어의 의인화야. 의인화는 불가피하다고까지 말해요.

그리고 실마리가 뭐야. 어떤 각도에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신이 인간을 신과 닮도록 만들 었어. 우리의 이미지대로 인간을 만들지. 그래서 우리-

광우) 틸리히는 인간의 한계라고 말하지 않나요?

교) 물론이지~ 신의 인격성. 신의 한쪽이잖아. 그런데- 무한성 인격성이라는 또 다른 이율배반 은 미뤄놓고, 이 맥락에서 보자고. 신격화와 인격화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가고 있어. 그게 투 사의 구조에요. 하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술어를 신격화하는 것이, 주어의 의인화가 돼. 실체와 속성의 관계에서, 속성에만 머무르면- 그 속성 없이도 주어는 하니까 맹점에 봉착한단 말이야.

그래서 술어를 실체로 만들어. 속성을 실체로… 그… 등극이라고 할까요? 격상이라고 할까요? 그 걸 퍼이어바하는 신격화, 의인화라고 하는데, 헤센은 창조의 틀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 데. 설득력을 지니려면- 창조 신앙 바깥의 테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어요.

뭘까요. 창조신앙 밖에서 들어보라고. 잠시 독실한 창조 신앙을 새겨봐요. 그러면 무엇이- 점프가 있잖아. 상당히 큰 빈공간이 있어요.

정우) 순환론적 설명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같은데- 신에 대해서 신을 가지고 말하니까- 전제 자체를 부정하면…

교) 설명 불가네.

정우) 아예 받아들일 필요도 없는….

광우) 창조신앙은 누군가의 존재 기반 위해 서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은데.

교) 그거뿐인가…

#) 악의 문제. 가치와 비가치의 문제…. 가치문제를 가장…

정우) 의인화가 인간 빼고 가능해요. 저절로 인간이 소멸될 수 있다고도 가능해요. 신'로 신을 이야기하는 것도 가능해요.

진호) 그 가치여야 하는가?

정우) 유한과 초월의 관계에서 보면, 논리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 같은데.

교) 잠시 좀 쉴 터인데-

이 논의의 맥락에서 생각해볼 것이- 이율배반이 나오잖아요. 다른 것은 쭉 정리하면 좋을 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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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이율배반에 대하여, 헤센이 취하는 입장. 그리고 또- 한 자락으로 변신론의 주장들은 좀…

신학계에서의 일반적인 논의와 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질문… 할 수 있는 내용들이 있을 텐데, 그렇게 이야기해봅시다. 좀 쉽시다.

(휴식)

작은 화두라도 바꿔봅시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율배반. … 이율배반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적어 도 기독교 신학, 전통신학이든 현대신학이든- 신학적 입장에서 취하는 태도들 중에 여러분들이 특별히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들을 떠올려보고요. 헤센은 어떠한 입장을 그에 대해 취하는지 보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맥락에서 변신론, 신정론을 볼 수 있는 것 같은데.

자, 이번에는 또 어떤 식으로 불을 지필까.

단수와 다수, 무한과 인격, 최고실재와 최고선, 초월과 내재.

각 이율배반의 대립항들의 쌍들 사이의 관계가 논리적으로 쫘악 A대 not A 대 B 대 not B…

같은 맥락인지, 논리적으로 일관되었는지, 혹 이율배반의 층위가 서로 다르지는 않은지, 다르면 어떻게 다른지, 같으면 어떤 근거로 같은지. 어찌 이율배반이 네 개밖에 없겠습니까. 예시죠. 하 여간. 같은지 다른지. 생각해보지요. 헤센이 친절히 다 말하지는 않았어. 하지만 맥락 속에서는 나왔어.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결국 이것으로 헤센의 주장은 뭐에요. 그걸로 변신론이 나올 것입니 다.

자, 그렇게 한번 또 얘기를 풀어가봅시다. 오늘은 칼 5시에 끝날 것입니다. 아니다. 5시 10분 까지. 5시까지 생각하세요, 그러면 10분이 되겠지ㅋㅋ

너무 갑자기 큰 질문했나요? 그러면 간단히 가요. 단순성과 다수성.

모순과 이율배반은 어떻게 다르죠? 모순은 둘 중 하나는 틀려야 해. 하지만 이율배반은 둘 중 하나도 버릴 수 없어. 둘 다 감싸안아야 해 하면 역설이야. 이율배반은 모순과 역설 사이에 있 어. 이율배반을 다루는 것은 여러 방법이 있어. 역설도 가능하죠. 그 탁월한 사례가 쿠자누스. 대 립의 일치. 자, 어떤 식으로 그러면- 이율배반을 관리하는 방식, 접근하고 풀어가는 방식. 역사적 인 전거로써 대립의 일치를 말할 수 있는데- 이율배반을 아까 말한 변증법. 역설도 하나의 방법 이지. 해결을 이율배반에 적용하면 오도할 수 있어. 대립 양항 사이의 긴장으로 읽혀질 수 있어.

하지만 어떤 경우도 그런 긴장이 해소되지 않아. 긴장은 그대로 있어. 다만 하나를 취하고 하나 를 버리지 않아. 대립의 일치가 중세의 유산이라면 변증법은 근대의 유산이고. 실존으로 바꿔서 실존변증법도 나와요. 그래서 키에르케고르가 중요한 형식적 특성이라면 역설인데. 표현이 굉장 히 헤겔식으로 되어있지만- 무한과 유한의 연합- 하지만 역설적인 연합이에요. Paradoxical 연 합.

광우) 교호적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많음과 하나. 세 개는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해석 학적인 순환에서 개체를 통해 전체가 알려지는 것처럼, 단수성을 통해 다수성을 이해하는… 초월 과 내재도 하나와 다수로 할 수 없지만- 꼭 응어리 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교) 헤센은 뭐라고 하고 있어?

자, 뭐 광우 혼자서만 할 것이 아니라 다 대답해보세요.

#) 헤센은 대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술어들의 긴장감을 더 강조하는 것 같고요, 긴 장감의 관계를 무너뜨려야 한다. 서로 안에서 섞이고, 무한이 한정된 것 안에 들어와서, 신자가 하나님 안에. 누멘과 인격적인 것의 긴장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범서) 가치실재. 존재와 가치가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 이율배반의 개념이 상보적이라고 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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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이율배반이라는 개념 자체가 신을 더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것으로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나.

더 부각시킬 수 있는 용어가 아닌가 싶어요.

정우) 284쪽. 술어 차원에서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데, 신에게는 가능한 것이 이율배반으로 중 요한 것 같습니다.

$) 이율배반이 인간 안에 있는 건가요?

정우) 그런 것 같아요.

광우) 293쪽. 다르게 대답되기 때문에. 헤센은 다 싸잡으려니 이율배반이 나왔고.

범서) 그러니 악의 문제가 나오고, 그래서 변신론이 거기서 나오는 건데- 그렇다면 아까부터 계속 말했지만 변신론의 문제는 주지주의적으로 잘 드러내기 위한 불가피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신은 그걸 원치 않는다고 말하거든요? 그래서 종말론으로 대체한다고 했는데. 그래서 출애굽기 32장의 사건이 생각나더라고요. 모세가 시내산에 들어가서 안 나오니까 아론한테 신을 만들어달 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아론은 잘 만들거든요. 오늘날 현실적으로- 아론은 제사장이거든요. 결국 한국의 현실에서는 목사인데, 목사가 성도들이 얘기하는 신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논리적인 필 연성과 현실적인 불가피성이 거기 있지 않는가. 헤센의 논리에 딱 들어맞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신은 가만히 있으면 안 나타나다가, 만들면 그때 나와요. 그래서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난다는 생 각이 들어요.

교) 가만히 있을 때 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상이 아니어서 못 보는 거지.

정우) 누멘. 이율배반적인 속성 때문에-

광우) 교호적으로 본 이유는- 293페이지 대답하는 사람… 느끼는 사람의 하나님. 교호적인 것 은 함께 대화하면서- 지평확대 하는 것처럼, 점점 알아가는. 교호적인 것은 자기를 비워야 하거 든요. 그래서 우상화의 위험이 좀 더 줄어들지 않을까 합니다.

교) 신정론 해결. 변신론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광우) 변신론 자체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보내는 것 같아서요. 사건과 현상을 말할 때, 체 험에 대해서 개념화하려던 것을- 삶으로서의 반격에 대해 말하는 것이- 변신론으로, 주지주의적 으로 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아요.

태진) 327 이론 인식에 대하여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하고, 종교적 의식에서는 변호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요. 나중에는 스스로 변호한다고 해요. 저한테는 건너뛴 느낌이에요. 인간이 정당화는 못하고, 신이 스스로 정당화하니까- 그거는 신정론이 아니라, 종말론의 관점으로만 볼 수 있다는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저도 이 부분에서는 신정론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에 가깝지만, 말하 지 않고 넘어갈 수 있나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라요. 헤센의 접근 방식이 저에게는 좀 새로웠는 데. 앞에서 넘어가는 것이 좀 그래서 연결고리를 찾고 싶었습니다.

광우) 그의 구원 사업에 있다고 하는데, 그걸 좀 더 말해야 하고. 종말론으로만 볼 수 있냐도 생각해요. 현재적인 종말론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미래로 상정하기 때문에- 함께 얘기하 는 것 없이 신이 해결해줄 것이다고 거칠게 표현한다는 것은….

정우) 저는 그것보다, 주체의 문제 같아요. 구원의 인간경험- 신이라고 말하는 하나님이잖아요.

객체가 아닌 주체로 되돌리는 것 같아요. 인간의 궁극적 완성으로 종말론을 보면, 결국 주체는 주체로 돌리자고 하는 것 같아요. 과연 구원의 주체는 누구냐, 신의 속성의 주체는 누구냐. 술어 의 주어로서 주어를 끄집어내자.

광우) 사실 저는 그게 불만스러워요. 그러면 우리가 뭐냐는 거예요.

$) 선교학에서 보면, Missio Dei가 있잖습니까. 하나님이 주체적으로 행하신다는 차원이잖습 니까. 기독교의 범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념을 통해서 그것에 합당한 사람들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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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하셔서 구원사업을 이루시잖아요. 하나님의 구원사업에 참여하는 인간으로 얼마든지 함께할 수 있죠.

%) 김영수라고 하고요. 석사과정으로 논문 쓰고 있습니다. 모르시는 분도 많으신 것 같아서요.

저는- 들었던 생각이- 종교적 체험은 이성 이전의 작업인데 개념적으로 해석하잖아요. 해석의 결 과로 신 이념이 나오고, 해석된 사건으로 생각했는데. 속성을 실재화하는 것- 합리적인 사유 안 에 들어있는 것. 신의 본질을 보니 이율배반적이라는 것. 그래서 속성을 실체화하는 우를 범할 수 있지만, 이성으로만 하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고. 하지만 그 이념이 이율배반적인 것이라는 게 다른 사람들하고 달라요. 종교가 삶이니까 그래요. 종교의 한계와 의미가 여기에 다 있어요.

사건이란 해석된 결과로서 신 이념이고, 현상은 자기 드러냄으로써 범주가 아닌가 싶어요. 근 데 이 범주는 칸트 이후로 현상과 경험이 하나니까 현상적인 경험이고.

교) 섹션 배치는 그렇게 볼 수 있을 거예요. 다만 내용으로 들어가면, 장절의 제목을 기준으로 한 거고. 내용으로 들어가면- 어…. 뭐 여러 가지로 다 말할 수 있고. 종교의 근본범주 해서 네 가지 나오잖아. 창조 계시 구원 완성. 사건 현상 체험 경험 행위의 축에 비췄을 때. 창조 구원 완성- 구원 뒤 완성도 붙였는데. 이 셋과 계시하고 구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내용의 차원에 서 창조 구원 완성은 컨텐츠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범주도 의문이 들어. 범주는 형식적인 용 어거든. 그리고 계시는 따로 나와야 해. 계시의 내용이 나머지 셋이지. 계시 빼고 구원 창조 있 어? 계시는 형식 서술어야. 계시에 무엇이 담길 것이냐. 그래서- 앞의 1장, 가치체험의 개념적 해석은 설명했고. 해석의 산물로서 이념- 도 그거에요. 그러니까. 1 2 3장이 다른 말이 아니라, 그 컨텐츠로 가기 위해 밟아가는 것이고. 거기에 먼저- 신 이념의 성격. 상징을 안 다뤘는데, 중 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시간이 없어서 안 다뤘고. 이율배반을 말할 수밖에 없는- 징검다리지.

개념적 해석이라고 했는데- 상징 설명할 때, 개념과 실재와 연관해서 설명하잖아요. 개념으로 잘 끌고 가면, 이율배반 나오면 안 됩니다. 한쪽으로 정의가 되어야 해. 인간의 신체험의 한 내용이 야. 근데 정의와 사랑이 양립불가능하잖아요. 그것뿐이야? Love power justice. 그래서 삼각관 계야. 주거니 받거니 얼마나 바쁜데. 이상적인 것은 정의가 힘을 갖고 사랑까지- 그게 신 그림이 야. 하지만 체험의 영역에서- 존재자체가 힘이라는 말이죠. 힘을 고상하게 말하는 거예요. 우리는 힘없이 유한하게 없어지지만, 힘 중의 힘은 있음이잖아요. 이렇게 정의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정의와 사랑, 사랑과 정의. 겪어지는 체험에서 그래. 체험에서는 전율과 매혹이라고 했고, 객적으 로는 정의 사랑이라고 했어. 이율배반이 현상에 해당하는 거예요. 아까 내가 섹션 B를 해쳐모여 하고 다시 작업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것이 이런 건데. 체험에서는 전율과 매혹, 이쪽으로 가면 정의와 사랑. 전율과 매혹은 여전히 내용이고, 형식은 이율배반이야. 가치체험의 상반적인- 앞에 서 하잖아. 가치체험에서. 이게 현상이고요. 근본 뿌리로서 근본사건은 계시지. 그 구체적인 내용 으로 창조 구원 완성이야. 그렇게 섹션 B는 묶이고, 섹션 A와 연결돼. 그래서 사건과 현상으로 그렇게 묶으면, 이렇게 하면 낫겠죠. 사건은 창조 구원 완성은 계시로 묶이고, 그게 형식으로 오 면

이율배반에 열심히 주목해서 말하는 이유. 섹션 A에서 예고했어요. 이율배반을 이율배반으로 두자고 했어. 그 맥락에서 변신론을 조진 거야. 변신론은 또 하나의 우상 제조에요. 처음 쓴 책 티끌에서 얼마나 신정론을 까냐. 웃기지도 않은 짓이다. 신념일지언정 난 포기할 수 없는데- 그 건 근본적인 Category mistake이야. 플라톤의 신정론은 계속 그대로 복사 돼. 거기에 성미선진 같이 다 나와요. 미선진은 모르겠는데, 성은 반드시 존재한다. 이건 실재해- 이런 도그마틱한 주 장이 왜 성립하냐, 그거 물어야 해. 왜 미는? 틀렸다는 게 아니고. 다른 가치는 가치로만 있고, 그거로만 가능하고, 성만은 실재도 있어야 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뭐냐고? 그게 굉장히 중요하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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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요. 미 가지고도 전율해요. 미술품 갖고- 나는 그게 좀 둔해서 잘 안 되지만, 음악으로는 뻑 가거든. 선, 지고의 선. 맞부딪히면, 우리 전율이 안 느껴지겠어? 예를 들면 그래. 신정론 이야기 로 빠졌지만. 하여간, 성에서 이거 안 존재하고 못 뻐긴다는 거야. 플라톤은 그렇지 않아요. 성미 선진이 다 존재해. 그리고 다 결합되어있어. 그리고 기독교 신관이 그렇지. 신정론 맥락에서 중요 한 것은 선이에요. 성과 선이 한 곳에 있어. 성이 지금 ens 성. Ens 실재 지고의 완전성. 직고의 선. 얘기 자세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신정론.

고전적인 신정론도 근세적인 신정론도(대표적으로 라이프니츠, Theodizee).

고전에서는 좋은 가치는 진짜 있고, 나쁜 것은 없어. 그래서 악은 없어. 형이상학적으로 없어.

형이상학적으로 있는 것이 진짜 있고, 가치가 있어. 그래서 악은 없어. 감각의 세계, 가짜 세계에 서는 악이 있어도, 형이상학 세계, 진짜 세계에는 없어. 선의 결여로서 악이야. 그래서 고전적인 신정론이야.

근세로 넘어와서 라이프니치로 존재하는 신정론은? 현실의 악- 플라톤처럼 부정하지 않아. 가 짜의 세계에서… 그거 아니야. 그 악은 더 큰 악을 막기 위해서야.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해서야.

역사적으로 증명은 안 되는데. 츠나미로 많이 죽었지만, 그거 없었으면 지구가 폭발했을 꺼야. 작 은 마이너스보다 훨씬 큰 선을 이루었어. 슬쩍 보면 악이지만- 그걸로 엄청 날라가도, 큰 선을 이루기 위해서야. 그래서 예정 속에서 조화로워. 인정은 해. 신정론은 그런 거잖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체험에 열심히 호소한 것은- 신비, 신비를 어떻게든 의미 있게 자리 잡 게 하고 싶은 의도가 있어. 체험의 영역에서는 신비고, 저쪽으로 가면 이율배반이야. 이성으로 납 득이 안 돼. 이해될 수 없어. 이율배반과 관련할 수 있는 방식은 신비 밖에 없어요. 주체의 신비 와 대상의 이율배반이 같이 지향하는 것은 무엇일까. 변신론을 깨는데서 이런 것 말하고 싶구나.

딱 나는 그렇게 읽었는데. 신비, 이율배반. 저쪽에서 이쪽에서 가리키고 있잖아. 체험의 주체에서 가리키고, 계시의 모습이 이율배반으로 다가와. 공통적으로 가리켜. 이율배반의 탁월한 사례로서 세 번째를 가지고 와서 변신론을 가지고 와. 그리고 그걸 깨.

신비와 이율배반은- 특히 이율배반은 잘 보여줘서 신비인데- 그게 우상 만들지 말아라야. 우 상. 신비가 벗겨지면 우상이 돼. 이율배반. 어느 한쪽 손을 들어주면 우상이 돼. 신은 100% 인 격신이야. 그러면 어떻게 돼? 무한만 강조하면? 역사상 얼마나 많은 우상 이미지가 신관에서 나 왔어. 한쪽을 짓눌러서 아주 잘 사용되었지. 종교사 신학사 교회사에서 다 좋은 증거를 봐. 변신 론 부정이 좋은 증거야. 변신론은 이론적으로 불가하고, 종교적으로는 부당하다. 나는 이런 통찰 을 열 받아서 아우구스티누스 칼뱅 이 새끼들 하면서 질러댔는데. 이런 체계를 가지고, 유들유들 하게(분위기는) 질러주는 것이 이런 의미를 갖지 않나. 저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변신론 깨는데서 나는 봤어. 신정론을 우상숭배로 봤는데. 그렇게 생각했어.

범서) 헤센이 변신론 깨면서 욥 이야기를 하잖아요. 어떤 신에 대한 변론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욥 친구들이 하나님 변호하잖아요. 하나님은 창조 이야기만 할 뿐이지. 그리고 욥은 회개하 는데- 그래서 이율배반이 지향하는 것은 창조가 아닐까. 창조와 완성이 결국 사건이고, 계시와 구원이 현상이 아닐까. 여기서 신의 사건은 완성에서 종결된다. 구원은 새로운 세계의 창조의 시 작이다. 오히려 구원이 아니라 완성이 창조의 시작이다(헤센의 논리적 맥락에서). 그래서 사건은 결국 완성, 창조는 완성하고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교) 구원과 달리 완성은 어떤 위치인가요?

범서) 그게 좀 애매한데요- 고통스러운 인간들. 그걸 구원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들. 결국 몇 명 안 되는 사람만 구원을 받고, 얼마는 배제된다. 구원에 따른 고통 때문에- 결국 완성을 넣을 수밖에 없는 구조죠. 완성을 집어넣어야 해결이 되는 문제인데- 결국 완성이라는 것이 뭘까.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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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과 어떤 관계인지 애매하게 끝내서 아쉬운데.

^) 칸트의 이야기하면서 피안의 개념을 이야기하면서 완성의 차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저는 더 궁금한 것이- 이율배반을 열어놔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우월성. 306쪽. 온 전한 이성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나타난다는 논리 자체가 좀…

교) 얘기를 받아서 좀 이야기를 하시지요. 내가 할 것이 아니잖아.

아까 창조와 완성이 사건이고 구원과 계시가 현상이고. 이유가 뭐지?

범서) 이유…

교) 창조가 완성 구원이 현상. 창조, 옛 사건. 나한테 다가올 수가 없어. 구원은 이제 받는…

범서) 종교 주체 객체 말하면서, 창조는 객체, 구원은 주체로 봐야죠.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구원 개념 자체가 신에 의해 되는 것이니까-

교) 구원 하는 것은 신이니까. 창조와 구원은 왜 달라지냐고.

범서) 성경에 흐르는 창조신학과 구원신학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봐요. 창12장부 터 갈라진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하나의 맥락으로 본다면, 창조가 먼저고 구원이 다 음이 아닐까. 물론 거꾸로 볼 수도 있겠죠.

교) 그렇지…

정우) 창조와 완성을, 목적을 신 그 자체, 사건 그 자체로 보는 것 같거든요. 근데 창조와 완성 은 자기 자신이 목적인 것 같고요. 구원과 계시는 인간에게. 그래서 창조는 사건, 구원은 대상이 인간이라는 점에서 현상이라는 점에서 가능한 것 같아요.

교) 좋습니다. 어떻게 해도 타당하기만 하면 돼. 그러면 축을 나놔서 이을 수가 있잖아요. 그래 서 신비와 이율배반을 묶어서 레이저빔을 한 쪽으로 쐈잖아요. 우상 파괴의 좋은 예로 변신론을 한 것 아니야.

자. 5시 10분에 끝낸다고 했지만 이렇게 됐네.

그리고 창조사건도 구원사건 아니야? 어둠에 빛을 던졌지. 창조는 구원으로 되었어. 창조의 방 식이 아주 구원적이라고.

혼돈에서 질서로. 억압의 상황에서 질서의 구원이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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