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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독일의 남성성 담론과 동성애 - 남성동맹과 에른스트 룀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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碩 士 學 位 論 文

나치독일의 남성성 담론과 동성애 - 남성동맹과 에른스트 룀을 중심으로

조 일 구

漢 陽 大 學 校 大 學 院

2004年 2月

(2)

碩 士 學 位 論 文

나치독일의 남성성 담론과 동성애 - 남성동맹과 에른스트 룀을 중심으로

指導敎授 林 志 弦

이 論文을 文學碩士 學位論文으로 提出합니다.

2004年 2月

漢 陽 大 學 校 大 學 院

史學科

조 일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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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論文을 조일구의 碩士學位 論文으로 認准함

2004年 2月

審査委員長 김 현 식 (인) 審 査 委 員 나 인 호 (인) 審 査 委 員 임 지 현 (인)

漢 陽 大 學 校 大 學 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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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 국문초록

Ⅰ. 머리말 ··· 1

Ⅱ. 남성동맹 : 군사적 남성성과 동성애의 결합 ··· 10

Ⅲ. 룀의 숙청 : 남성성과 동성애의 분리 ··· 41

Ⅳ. 형법 제175조 : 동성애 탄압과 새로운 남성성 ··· 124

Ⅴ. 맺음말 ··· 155

◇. 참 고 문 헌 ··· 160

◇ ABSTRACT ···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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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초록

나치 독일의 남성성 담론과 동성애 -남성동맹과 에른스트 룀을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조일구

본 연구의 목적은 ‘남성적 동성애자’인 나치 돌격대 총수 에른스트 룀을 통 해 나치시대 남성성과 동성애의 관계를 밝힘으로써 나치시대 동성애자 탄압이 남성성의 확립을 위해 진행된 것임을 규명하고자 한 것이었다. 나치시대 동성 애자 탄압은 국민국가이념에 부합하는 남성의 양성을 위한 전국가적 기획이었 다.

나치시대에는 독일의 특수한 남성동맹 이념을 중심으로 남성성을 강화하였 다. 19세기에 등장한 남성동맹 이념은 ‘자아 중심적’ 열정을 버리고 ‘공동체의 이익’에 헌신할 것을 강조하였다. 남성동맹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전우애 의 이상’을 중심으로 한 ‘전투동맹’의 형태로 거듭났다. 대표적인 전투동맹이 바로 룀이 주도했던 나치 돌격대였다.

나치 돌격대는 용기, 명예, 정직, 순종, 동료애 등의 ‘군사적인 남성성’을 강 조하였다. ‘군사적인 남성성’은 전후 극우 보수주의의 흐름 속에서 절대적인 가 치였다. 남성들의 전우애는 조국에 대한 열정에 다름 아니었다. 남성동맹은 청 년들에게 학교 교육보다 군사 훈련을 강조하였다. 또한 남성들의 끈끈한 형제 애 및 신체의 강인함도 강조하였다. 여기서 청년들은 성적 열정을 이겨낸 ‘참 된 사나이’로 거듭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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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돌격대는 남성들이 공적영역을 지배하는 강력한 국가질서를 확립하고 자 하였다. 이러한 극단적인 남성성의 추구는 동성에로티시즘이 남성 형제들 사이에서 조성되는 분위기를 제공했다. 남성 형제들은 가족생활보다 형제들의 병영에서 더 큰 안락감을 느꼈다. 돌격대에서는 남성형제들을 위협하는 것은 모두가 적이요, 남성형제들을 돕는 것은 모두가 동지였다. 돌격대는 남성 형제 들을 위협하는 민주주의, 볼셰비즘, 부르주아 등 여성성의 수로에 대해 가차 없는 폭력을 행사하였다.

나치 돌격대의 동성애 성향은 돌격대 총수 룀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났다.

나치 제일의 정적인 사민당은 룀의 동성애 성향을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결국 룀 스스로가 자신을 동성애자로 밝히는 편지들을 출판함으로써 그것을 공론화 하였다. 이후 제국의회 제1당이 된 나치당이 룀을 숙청하였다. 그 목적은 비대 해진 돌격대 조직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나치에 대한 정치적 반대여론이 조성되는 빌미가 된 나치즘과 관련된 동성애적 이미지를 제거하고 자 한 것이었다.

나치는 국가체제의 성립과 함께 ‘문화적인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남성성의 재건을 이루어야만 했다. 즉 나치즘의 정치적 목표가 정치투쟁에서 정권유지로 바뀐 것이었다. 이로써 나치독일은 동성애자들을 테러가 아닌 법과 경찰력과 같은 합법적인 수단으로 탄압하였다. 나치독일은 동성애 금지법인 제175조를 개정하여 남성 동성애자의 처벌을 ‘노동봉사’에서 ‘감옥형’으로 확대하였다. 동 시에 나치 비밀경찰 조직을 통해 독일 전역에 걸쳐 동성애자들을 색출하였다.

매년 약 8천명에 이르는 남성 동성애자들의 법적 처벌이 이루어졌다.

나치독일은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동성에로티시즘을 제거하기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나치경찰들은 동성애가 범람하는 매춘굴과 동성애 술집에 대한 통 제를 단행하였다. 또한 남성의 누드사진을 게재한 포르노그라피 출판물도 철저 히 규제하였다. 성적 열정이 내재된 관능적인 미술, 문학 작품들에 대한 금지 조치도 이와 함께 이루어졌다. 이러한 동성애에 대한 정치, 문화적인 탄압은 대중들로 하여금 남성의 ‘정상성’ 기준을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치체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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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적인 측면을 용인케 하는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었다.

결국 나치즘의 새로운 남성성은 아리안의 강인함과 순백미마저 묻어나는 남성의 신체로 표상되었다. 특히 남성 누드 조각상은 동성에로티시즘이 완전히 제거된 것으로써 참된 남성의 아름다움과 역동적인 근대의 패러다임을 내재하 고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남성의 이미지는 민족적 감성을 고취시켜 ‘독일의 파라다이스’를 되찾게끔 하는 원동력 그 자체였다. 나치독일이 남성 동성애자 의 탄압을 통해 추구하고자 한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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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1934년 6월 30일, 나치는 뮌헨근교에서 휴가 중이던 돌격대 총수 에른스트 룀과 그 휘하 장교들을 살해하였다. 이른바 “룀의 숙청(Röhm Putsch)” 혹은

“장검의 밤(Night of Long Knives)”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동성애자 집단살 상의 신호탄으로 평가된다. 어째서일까. 그것은 룀의 숙청구실이 동성애였을 뿐 아니라 이 사실이 대중에게 낱낱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치가 동 성애 하위문화를 일시에 잠재우고 약 5만 명의 동성애자들을 감금하는 극적인 전환점이 바로 ‘룀의 숙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동성애자 탄압’은 어디에서부터 연유한 것일까. 이는 무엇 보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급격히 확산된 독일 민족 담론에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는 독일 민족 담론의 갱신을 요구하였 고, 그 속에서 새로운 독일 민족을 규정하는 지표가 되었던 것은 ‘정상’과 ‘비 정상’의 이분법적 구도에 입각하여 남성을 독일 민족에 적합한 인간형으로 재 편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전후 민족담론은 독일인들이 왜 전쟁터로 나가야 하는지, 왜 적들에 맞서 조국을 지켜야 하는지, 그리고 왜 적들의 진지로 돌진 해야하는지를 정당화하고, 이에 부합하는 인간형을 ‘정상’으로 규정하였다. 반 대로 이에 저해되는 동성애자를 비롯한 유대인, 집시, 장애인 등의 ‘반사회적 (asocial)’ 인간형을 ‘비정상’의 전형으로 묶어내며 한층 더 강하게 낙인찍고 배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적인’ 동성에로티시즘만큼은 독일 민족국가의 건설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지 모세(George Mosse)에 따르면, 1871년 통일이후 민족담론이 급격히 팽창한 독일에서는 그리스 미학과 중세 영웅주의에 표현된 동성에로티시즘을 차용하였고, 전후 독일에서도 나치즘을 중심으로 이러한 동성에로티시즘을 선택적으로 수용하였다.1) 이를테면 누드주

1) Goerge Mosse, Nationalism and Sexuality, (Wisconsin, 1985). 이 외에 제1차 세계대전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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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운동, 소년의 나체 조각상과 그림, 남성들만의 ‘거친(rough)’ 우정, 참호에 서의 끈끈한 전우애, 근육질의 남성이 그려진 나치 엠블렘 등이 바로 그 증거 들이다. 즉 이 같은 동성에로티시즘은 남성들 간의 연대감을 배가시켜주고 독 일 남성의 이상형을 제시해주었기에 차용된 것이었다. 요컨대 제1차 대전 이후 의 독일 민족 담론은 동성애를 배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동성애적 요소를 수 용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룀의 숙청은 넓게는 독일의 민족 담론과 동성애의 관계, 좁게 는 나치와 동성애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다음 과 같은 구체적인 질문을 할 수 있다. 동성애자 룀이 어떻게 나치 돌격대 총수 가 될 수 있었을까. 나치즘의 남성동맹과 동성애 사이에는 어떠한 접합점이 존 재했던 것일까. 가령 존재했다면, 양자는 어떠한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었을까.

반대로 접합점이 없었다면, 동성애자임이 밝혀졌던 룀이 어떻게 4년이란 긴 시 간동안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보호하며 생활할 수 있었을까. 나아가 당시 사민 당과 나치당의 동성애에 대한 인식은 어떠하였을까. 또 양당의 동성애에 대한 보편적인 편견 및 과학적 지식은 어떠하였을까. 그리고 나치당이 집권이후 룀 을 비롯한 동성애자들을 탄압한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기존의 연구들은 이런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변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나치시대의 남성성과 동성애의 관계를 주목한 연구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이는 동성애를 연구의 주제로 삼는 것을 극도로 금기시해 온 독일 사회의 분위기에서 비롯되었다. 즉 서독에서는 1969년과 1973년에 이르 러서야 단계적으로 동성애 금지법이 삭제되었고 동독에서는 1968년 형법에 대 한 개혁과정의 일환으로 동성애자 조항이 완전 폐지되었다. 동성애법 개혁 조 치에도 불구하고 공적 담론 영역에서 동성애에 관한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여 전히 금기시되는 분위기였다.

이 때문에 독일의 경우, 이 주제에 대한 연구는 소장학자들을 중심으로 나

사를 섹슈얼리티의 측면에서 접근한 연구서로는 Eric, J. Leed, No Man's Land, (Cambridge, 1979), Margaret R. Higonnet, ed., Behind the Line, (Yale, 1987); 빌헬름 라이히, 오세철, 문형구역, 『파시즘의 대중심리』, (현상과 인식, 198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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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시대 동성애들의 탄압 근거와 그 정도를 모색하는 정도에 그쳤을 뿐이다.2) 이들 연구 대부분은 히틀러 집권을 계기로 동성애자들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 이 있었다는 원론적인 주장을 되풀이하는 데 머물고 있다. 그 속에서 나치의 동성애자 탄압은 유대인들에 대한 홀로코스트처럼, 나치즘의 우생학 프로그램 에 따른 조치임을 일면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동성애 혐오 관념 과 동성애와 관련된 다양한 외적 관념들을 소홀히 다룸으로써, 동성애 탄압의 근거를 보수우익의 정치권력, 즉 나치즘의 현상으로만 국한시킬 우려가 있다.3)

독일 외부의 연구들도 거의가 나치시대 동성애자들의 피해사실 그 자체에 만 집중하고 있는 실정이다.4) 그러나 이러한 일방적이고 편중된 시각을 비판 하며 나치시대의 동성애 문제를 남성성의 영역으로 확장한 연구들도 있다.5) 동성애와 남성성의 관계를 의학사적인 측면에서 분석하는 오스터휴이스(Harry Oosterhuis)와 섹슈얼러티의 측면에서 모색하는 핸콕(Eleanor Hancock)의 연

2) Hans-Georg Stümke and Rudi Finkler, Rosa Winkel, Rosa Listen, Homosexuelle und 'Gesundes Volksempfinden' von Auschwitz bis heute, (Reinbek, 1981); Hans-Georg Stümke, Homosexuelle in Deutschland, (Müchen, 1989); Günter Grau, Hidden Holocaust?

Gay and Lesbian Persecution in Germany 1933-45, (Cassell, 1995); Burkhard Jellonnek, Homosexuele unter dem Hakenkreuz, (Paderborn, 1990); Manfred Herzer, "Communists, Social Democrats, and the Homosexual Movement in Weimar Republic" in Gert Hekma ed., Gay Men and Sexual History of the Political Left, (Harrington, 1995). 이들의 연구는 나치즘의 인종정책에 주목하는 일부 의학사 연구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Robert J. Lifton, The Nazi Doctors, (New York, 1986); Robert N. Proctor, Racial Hygiene, (Cambridge, 1988);

Paul, Weindling, Health, Race and German Politics between National Unification and Nazism, 1870-1945, (Cambridge, 1989). 등을 참고.

3)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는 Harry Oosterhuis, "Medicine, Male Bonding and Homosexuality in Nazi Germany",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32, No 2; London, 1997), pp.

187-205 참고.

4) James Steakley, Homosexual Emancipation Movement in Nazi Germany, (Dimension, 1975); John Lauritsen and David Thorstad, The Early Homosexual Rights Movement, (Thorstad, 1974); Geoffrey Giles, "The Institutionalization of Homosexual Panic in the Third Reich" in Robert Gellately and Nathan Stoltzfus, eds., Social Outsider in Nazi Germany, (Princeton Univ. Press, 2001),

5) Harry Oosterhuis, "Medicine, Male Bonding and Homosexuality in Nazi Germany", in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32, No 2; London, 1997), Harry Oosterhuis, "Male Bonding and the Presecution of Homosexual Men in Nazi Germany" in Amsterdams Sociologish Tijdschrift (Vol. 17, 1991); Eleanor Hancock, "Ernst Röhm and the Experience of World War I, " in Journal of Military History, (Vol. 60,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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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가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연구 역시 남성성과 동성애의 관계 를 기존 연구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보완하는 수준에서만 다루고 있다는 한 계를 가진다. 즉 동성애와 남성성의 관계를 민족 담론의 연결선상으로까지 확 장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나치독일의 동성애 배제 및 통제의 근본적인 원 인, 그리고 그것을 통해 노린 효과 및 과정의 다양한 국면에 대한 부분은 여전 히 미개척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화 연구가인 시드윅(Eve K. Sedwick)의 연구는 많은 시사 점을 던져준다.6) 시드윅은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남성성에 기초한 민족 담론 체계가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었는지를 주로 문학작품들을 통해 고찰하였 다. 그는 이 과정에서 ‘이성애적’ 남성성이 특권적 개념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음 을 밝히면서 남성 동성애자의 배제논리가 곧 이성애적 남성성의 권력을 강화 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다시 말해 근대 서구에서는 동성애와 연결된 ‘공공연 한 비밀’이 남성 중심의 지배체제를 구조화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드윅의 연 구 역시 그 내용의 개론적 성격 때문에 룀과 나치시대의 동성애에 대한 구체 적인 내용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체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나치독일에 관한 역사학적 맥락에서 동성애를 통한 남성성의 구 조화를 어떻게 규정하고, 룀이라는 구체적인 사례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다 시 말해 나치시대의 동성애자 탄압방식을 어떻게 설명해야 나치즘의 남성 구 조를 드러낼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답하는 것은 본 논문이 갖는 또 하나의 과제이다.

6) Eve K. Sedwick, Between Men, (New York, 1985); Eve K. Sedwick, Epistemology of the Closet, (Berkeley, 1990). 이와 관련하여 문학적 입장에서 남성성과 동성애를 다룬 연구서로는 Klaus Thewelweit, Male Fantasies, (Minnesota, 1989); Andrew Hewitt, Political Inversion, (Stanford, 1996)이 있고, 교육학의 입장에서 남성성과 동성애를 다룬 연구로는 R. W. Connell, Masculinities, (California, 1995); R. W. Connell, Gender and Power, (Stanford, 1987),이 있다. 코넬은 “헤게모니적 남성성”이란 용어를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에서 빌려와 사용하였 다. 그에 따르면, 사회에는 확연한 지위구분들과 함께 남성들 간에도 구분배열이 존재한다는 것 이다. 예컨대 동성애 남성이 지배하는 이성애 남성, 남성 개개인을 지배하는 남성 군대집단, 남 성 하급자를 지배하는 남성 상급자 등이 그것이다. 지배우위에 있는 남성들은 항상 많은 대가를 받는다. 게다가 이러한 요인들은 지속적이며 이에 대한 정당화 기제도 제공했다. 약함을 지배하 는 강함, 감정을 지배하는 이성, 수동을 지배하는 능동 등이 그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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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동성애에 대한 배제의 논리는 비단 나치즘만의 현상이 아니 다. 나치시대에나 지금이나 남성 동성애는 여전히 남성들의 관계를 훼손하는 전염성 있는 질병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제는 동성애 혐오가 보편적인 현재의 정세를 타파하기 위해서라도, 기존의 연구를 넘어 남성성과 민족담론의 관계망 속에서 나치시대의 동성애 배제논리를 분석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필자는 제2장에서 전후 독일의 남성동맹 성립과정과 그 특성을 룀의 사료를 통해 구명한 다음, 남성성과 동성애의 관계가 확대, 강화되어 가는 과 정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러한 과정은 룀과 같은 동성애자들이 나치즘에 헌 신하고 지지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다음으로 제3장에서는 룀 의 동성애를 둘러싼 사민당과 나치당의 정치적 대응관계를 살핌으로써 1920-30년대 독일에서 있었던 동성애에 대한 보편적인 편견을 구명해보기로 하였다. 양당의 동성애에 대한 정치적인 논쟁 이면에는 대중들의 반(反)동성애 감정이 폭넓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처럼 대중의 감정과 상반됨으로써 이루어져 야만 했던 남성성과 동성애가 분리가 결국은 ‘룀의 숙청’을 단행하도록 자극시 킨 한 요인이었음이 밝혀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제4장에서 동성애 금지법, 형법 제175조의 개정을 계기 로 진행된 동성애자들에 대한 일련의 탄압방식과 실상을 살펴보고, 이것이 결 국은 남성동맹을 보호하고 새로운 남성중심의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나치 즘의 정책적인 산물이었음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나치즘의 동성애자 탄압이 단 지 나치 위생학 정치에 근거하여 진행된 것으로만 파악하는 기존의 통설은 물 론, 수많은 동성애자들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재의 인식론적 편견도 함께 변화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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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남성동맹 : 군사적 남성성과 동성애의 결합

나치즘의 남성동맹(Männerbund)7)은 19세기 남성들 간의 우정을 바탕으로 하는 전통적인 동맹문화의 산물이었다. 동맹문화는 대개 동료애를 중시하고 민 족에 대한 헌신을 그 주된 목표로 삼았던 바, 이를 위해 그 구성원들에게 ‘자 아 중심적’ 열정을 버리고 ‘공동의 이익(Gemeinnutz)’에 전념할 것을 항상 강 조하였다. 이러한 남성동맹은 1871년 통일 이후 스파르타 전사문화와 중세 기 사도 정신을 적극 고취함으로써, 독일청년운동(German Youth Movement)과 같은 한층 견고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8)

그리고 남성동맹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전투동맹(Kampfbund)’의 형태 로 거듭났다. 당시 전투동맹은 1918-1919년 동안 자치 방위군, 임시 지원군, 지역 방위군 등의 이름으로 독일 전역에 급격히 퍼져있었다. 그 구성원들은 주 로 제대군인과 청년들이었으며 그 인원은 20-40만을 헤아렸다. 또 그 지도층 이 보수적인 융커계급의 제국군 장교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그 성격은 대개 극 우 이데올로기와 반(反)볼셰비즘 감정을 표방하였다.9) 이에 의거해서 볼 때, 남성동맹은 빌헬름 시대의 사회 가치와 참전세대의 보편적인 우익성향을 반영 하는 것이었다.

에른스트 룀(Ernst Röhm)은 이 같은 남성동맹의 바로 그 중심에 있었다.

역사가들은 룀을 자신의 전쟁경험을 전후 대중정치영역으로 연장하려 했던 전 선군인의 전형으로 평가한다.10) 특히 돌격대 기관지 《돌격대Der SA-Mann》 7) 남성동맹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Volker and von Weick, eds., Männerbande Männerbünde:

Zum Rolle des Mannes im Kulturvergleich, vol. 1, (Rautenstarauch-Joset-Museum Köln, 1990); George, Mosse, The Image of Man: The Creation of Modern Masculinit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pp.165-175.참고,

8) Harry Oosterhuis, op. cit., p. 197; George Mosse, Nationalism and Sexuality, (Wisconsin, 1985)., pp. 114-128.

9) James Diehl, Paramilitary Politics in Weimar Germany, (Indiana Univ. Press, 1978), p.

29.

10) Konard Heiden, Der Führer: Hitler's Rise to Power (London, 1944), p. 28; Pe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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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를 강렬한 전우애로 충만한 “최고의 군인”으로 선전하는 데, 용기, 명예, 정직, 순종, 동료애 등으로 점철된 그의 ‘군사적인 남성성’이 이러한 평가의 근 거였다.11) 룀 스스로도 자서전에서 “나는 군인이다. 의식적인 측면에서...군인 이었고, 정치 활동에 있어서도 군인으로 남고자 한다”라며 군인으로서의 자아 를 강조한다.12) 룀의 군사적인 남성성은 전후 바이마르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러운 것이자, 남성들이 성취해야하는 진정한 특성이었다.

따라서 룀의 ‘군사적인 남성성’은 남성동맹 내부에서도 도전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인 가치일 수 있었다. 히틀러가 랑게마르크(Langemarck) 전투에 참가했 음을 자랑하며, 그 전투의 기억과 표상들을 정치 기제로 적극 활용했던 사실에 서 드러나듯, 룀의 ‘군사적인 남성성’은 군대와 전쟁을 경험한 남성들의 세계에 서 강력한 호소력을 갖는 것이었다.13) 왜냐하면 그는 제1급 철십자 훈장과 ‘영 광스런’ 전쟁의 상처를 지닌 참전용사이자, 바이에른 최고 군사훈장의 후보자 로 거명되었던 전쟁영웅이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세계대전 당시 전선의 참호에 서 사병들과 동고동락했던 제국군 대위출신이었기 때문이다.

1922년, 룀은 바이에른 주 제국군 연락장교로서 히틀러의 나치운동을 정책 적으로 도왔음은 물론, 돌격대를 창설하고 조직하는 데 깊이 개입하였다.14) 이 로써 그는 몸소 체득했던 ‘군사적인 남성성’을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었다. 특 히 그는 히틀러 아래 재조직되는 국가를 피력하며 17세에서 23세로 구성된 돌

Longerich, Die braunen Bataillone: Geschichte der SA (Müchen, 1989), pp.15-22; Ian Kershaw, Hitler 1889-1936 Hubris, (New York: W.W Norton & Company, 1999) pp.

500-505.

11) "Der Stabschef Besichtigt Frankens S.A.," Der S.A.-Mann, (1934. 5. 26); "Ernst Röhm Der Stabschef der Braunen Armee",Der S.A.-Mann, (1933. 4. 1); "Der Treuhänder der deutschen Revolution: Stabschef Ernst Röhm. Worte, dem Stabschef zum Gruss zur seinem 46. Geburtstag," Der S.A-Mann, (1933. 11. 25); "Stabschef Ernst Röhm 'Der S.A.

Mann ist die Fleishwerdung einer heroischen Geisteshaltung'" Der S.A.-Mann (1934. 1.

20),

12) Ernst Röhm, Die Geschichte eines Hochverräters, (Müchen, 1928), p. 9.

13) Bernd Hüppauf, "Langemarck, Verdun and the Myth of a New Man in Germany after the First World War", War & Society (Vol 6, No 2, 1998), pp. 82-83.

14) Ernst Röhm, op. cit., pp. 104-110.

(15)

격대 대원들에게 “남성훈육(Männerzucht)”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남성훈육은 19세기의 군대식 교육에 기원을 둔 것으로 불안한 사회의 경향을 제거하고 전 도유망한 청년들을 길러내는 수단이었을 뿐 아니라 청년들에게 지도자에 대한 믿음과 순종을 가르치는 일종의 정치교육 기제로 기능하였다.15)

이 점은 나치 이데올로그인 보이믈러(Alfred Bäumler)에 의해서도 지적되 었다. 즉 보이믈러는 “남성들의 동료애 없이 조국이 있을 수 없고, 조국 없이 남성들의 동료애는 있을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그가 볼 때, 전후 독일의 상 황은 여성이 남성의 고유한 영역을 차지함으로써 “남성들의 관계가 시들해지 고 있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남성들이 뭉쳐...함께 나아가 청년들끼리 혹은 청년과 지도자가 함께하는” 유기체적인 체제 성립을 위해 돌격대와 같은 남성 동맹이 청년들의 교육을 도맡아야 한다고 강변하였다.16) 룀이 돌격대를 통해 일관하여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고 소위 사나이다운 전사 길러내고자 했 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룀은 청년들의 군사적인 교육을 통해 나치즘의 이상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 였다. 즉 룀은 ‘군사적인 남성공동체’를 조직함으로써 여성성이 지배하는 나약 한 “민주주의”를 막고 남성들이 공적영역에서 군림하는 “전선 사회주의(Front Socialism)”를 설립하고자 하였다.17) 전선사회주의는 남성 병사들이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허울과 위선을 벗어버리고 하나가 되었던 전선에서의 참호전 경 험과 같은 것이었다. 부언하자면 남성 병사들은 “갈증과 배고픔, 비와 안개, 난 세와 위험, 부상과 죽음”으로 가득한 참호전의 상황에서 끈끈한 전우애로 무장 했고, 융커와 농노의 계급구분을 버린 채 지휘관의 권위에만 순종해야 했다.

이러한 참호에서의 “전선사회주의”는 개인이 공동의 이익에 기여함으로써 자 신의 복지를 보장받는, 복지국가의 축소형에 다름 아니었다.18) 룀과 히틀러에

15) "Die S. A. im enuen Staat Von Reichsminister Stabschef Ernest Röhm," Der SA-Mann, (1933. 12. 16)

16) Alfred Bäumler, Männerbund und Wissenschaft, (Berlin 1934), 39-40. quoted in Harry Oosterhuis, op. cit., p. 199.

17) Eric Leed, op. cit. p. 26, 161,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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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전선에서의 참호전 경험은 그들 삶의 최고의 스승이었다.”19)

이러한 전쟁 경험은 1920년대 우파지식인의 전쟁소설을 통해 ‘신화’의 형 태로 고양되었다. 전쟁소설 속에서의 전쟁터는 “네가 진정 남자냐?”라는 질문 에 용기, 용맹, 성숙함 등으로 답변하는 시험장이자, 문명의 인위성을 제거해낸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곳이었다. 또한 그곳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강인한 남성 을 만들어내는 장소였다. 이에 ‘참된 사나이’로서 거듭난 제대군인들은 전쟁의 공포를 지워내며 전쟁에 대한 향수어린 열정에 사로잡혔다. 또한 전쟁을 그리 워한 청년들은 민족 사명감으로 가득 찬 ‘참된 사나이’가 되고자 했다. 이는 전 후 제대군인과 청년들 사이에서 쉴러(Friedrich Schiller)의 노래 “군인만이 자 유롭다(Only the Solider is Free)”가 애창되고 전쟁의 환상을 담은 뉴스릴과 사진들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사실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20)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바이마르 공화국은 영웅적이고 명예로운 전우애의 가 치가 사라지고 평화주의와 경제적인 이익만이 우선시되고 있는 ‘나약한’ 국가 였다.21) 룀은 이러한 제대군인들과 청년들의 정서를 잘 대변하고 있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비수 신화(Dolchstosslegende)’22)를 빌어 바이마르 공화국의 나 약함을 비판하였다. 즉 그는 “패전은 우리 군인들과 무관한 일이다. 이는 국내 의 무능한 지도자들이 통제권을 상실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우리 군인들 은 나약해지지도 고개 숙이지도 않은 채 전쟁터를 굳건히 지켰다”고 하였다.

18) George Mosse, op. cit., p. 126.

19) Heinz Wulff, "Die Zehnte des Bayerischen Königsregiments und ihr Feldhauptmann Röhm," Der S.A-Mann, (1933. 6. 30); Ernst Röhm, op. cit,, pp. 37-43, pp. 43-49. 룀의 전선경험은 1914년에서 1916년 8월까지로 짧지만 험난했다. 그는 베르덩(Verdun)의 참호에서 약 1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고, 이 시기를 독일의 최고점이자, 자신의 삶의 최고점으로 여겼다.

자서전에서 이에 대한 설명은 약 6페이지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

20) George Mosse, op. cit., pp. 114-116.

21) Eric Leed, op. cit.,, p. 258, 318. "Die S. A. im enuen Staat Von Reichsminister Stabschef Ernest Röhm," Der SA-Mann, (1933. 12. 16)

22) 보수주의자들은 독일패전의 책임을 군사적인 패배가 아닌, 국내 사회주의 혁명세력의 음모로 탓으로 돌렸다. 이것은 지그프리드 신화를 차용한 것으로 국내전선의 사회주의자들이 전선군인 들의 등 뒤편에서 칼을 찔렀다는 의미로 ‘비수 신화’라고 한다. Sebastian Haffner, Failure of a Revolution: Germany, 1918-1919, (London 1973), pp. 19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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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군인들이 우대받지 못하는 국가는 평화를 유지할 수도, 전쟁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하면서, “남성군인들”이 국가 권력 장악을 위해 바이마르 공화국 과 항상 싸워야 함을 피력하였다.23) 이러한 룀의 ‘비수 신화’에 대한 설명은 당시 제대군인들과 우파들의 사고체계가 반영된 보편적인 해석방식이었다. ‘비 수 신화’가 1928년 이후 나치당 및 우파 정당의 선거 선전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점이 그 증거이다.

이처럼 전쟁신화에 대한 과장된 설명방식은 바이마르 시기의 현실정치를 왜곡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것은 제대군인들로 하여금 바이마르의 경제 이익우선주의를 대신해 나치즘의 공동체이익 우선주의를 무조건적으로 선택하 게 만들었다. 재차 강조하거니와 전쟁의 환영을 통해 “양성된 남성(cultivated man)"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부르주아적 경제풍토와 무미건조한 생활을 멸시 하게 되었고, 이에 그들은 나치즘의 ‘군사적인 공동체’에 정서적인 동의를 보냈 던 것이다.24)

다른 한편 제대군인들은 나치즘의 ‘군사적인 공동체’를 통해 참전의 정당한 대가를 제공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에는 “제대군인들이 전선에서 피를 흘리며 싸웠으나 장사꾼인 유대인들이 그 부당한 이익을 갈취했다”는 사 고가 팽배해 있었다.25) 이러한 보편적인 정서는 제대군인들로 하여금 분노하 게 만들었다. 이를 간파했던 나치즘은 “독일의 제대군인들을 위해 싸우며 이들 과 함께 정권을 획득하여 이들이 공유했던 정신과 이상이 정치영역에서 우선 하도록 하는 것”26)을 정치투쟁의 과제로 삼았다. 이러한 문구들이 제대군인들 의 이상적인 전우애를 재차 부추겼던 것이다. 룀은 “사취(詐取)하고 비열한 장 사꾼”과 “편협한 프티부르주아지”들을 대비시키면서 바람직한 군인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23) Ernst Röhm, op. cit,, p. 70.

24) Harry Oosterhuis, op. cit., p.198.

25) Ernst Röhm, op. cit,, p. 284.

26) Ibid., p.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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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의 역량은 계급, 지위, 정치철학 등 이 모든 차이들을 초월하여 도달하 는 곳이다. 끈끈한 피로 뭉쳐진 전우애는 한 동안 이완될 수는 있을지언정, 가슴 속에서 결코 사라지지는 않는 것이다...‘나치즘’은 이것을 잘 알고 있 다. 이에 나는 잠들어 있는 이 모든 사람들의 기상나팔이고자 하는 것이 다... 전쟁터로 나가 싸우고자하는 독일의 전사들에게 호소하고자 하는 것 이다. 이들만이 진정한 자유를 쟁취하고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우 리는 민족(Volk) 공동체를 위해 도덕적 뼈대를 갖춘 정신적 융통성과 신체 적 강인함을 철저히 배양해야 할 것이다.27)

이러한 군사적인 남성성은 1920-30년대 우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보편적이 었던 남녀이분구도의 한 축으로써 ‘부르주아적 여성성’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 다.28) 이 논리를 간략히 분석하면, 한편에는 사나이들의 전우애와 영웅적 지도 자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여성스러운 나약함과 혼란이 있을 따 름이었다. 나치즘의 입장에서 후자는 극복해야만 하는 제일의 과제였다.

그러므로 나치즘은 이러한 남녀 이분구도를 일상생활의 영역으로 끊임없이 확장하고자 하였다. 히틀러는 “가령 전쟁 상황에서 어떤 여성이 전쟁터에 나간 다면, 나는 독일인으로서 부끄러울 것이다. 여성에게는 그들만의 전투가 있다.

세계로 나아갈 아이들을 기르는 일, 이것이 바로 민족을 위한 여성의 전투이 다. 남성은 민중(Volk)을 여성은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 하였고, 로젠베르크는 오직 남자만이 판사, 군인, 정치가가 되어야하며, 공적영역에서는 여성들이 자 리할 곳은 없다고 했다.29) 이처럼 나치즘은 남성이 공적영역을 주도하고, 사적 27) Ibid., pp. 365-367

28) Klaus Theweleit , Male Fantasies, vol 2 (Reinbek, 1993); pp. 143-270. 니콜라우스 좀바 르트, 「남성동맹과 정치 문화」, 토마스 퀴네 엮음, 조경식, 박은주 역, ꡔ남성의 역사ꡕ, (서울:

솔), 2002. pp. 201-234. 좀바르트는 대표적 보수주의자인 슈미트(Carl Schmitt)와 융거(Ernst Jünger)의 사고구도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남성 남성동맹 형제애 국가 병사 군영 금욕/

전투 정신 에로스 영웅적 악마적 여성 민주주의 여성에

의한 지배 도시(파리) 시민/

민간인살롱 탐닉/

평화 물질주의 성생활 도시적 행복주의적 29) George Mosse, Nazi Culture, (Schocken Books, 1966), pp. 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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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에 여성이 자리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였다.

1920년대 들어 활발해진 여성의 사회진출은 마치 문화적, 도덕적 가치 몰 락의 징후처럼 여겨졌다. 그 주된 요인은 낮아지는 출산율과 낙태의 증가였는 데, 이는 보수주의자들로 하여금 전통적인 성적 역할, 결혼, 도덕성의 결핍 등 을 우려하게 만들었다. 이에 보수주의자들은 중산층의 ‘신여성’을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성적 무정부주의자로 평가하기까지 했다.30) 이 때문에 여성들은 어 머니의 역할에 충실히 임할 때에만 ‘국가의 중요한 시민’으로 간주될 수 있었 다. 가령 여성들이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생활한다면, 이들에게는 ‘예외 없이’

부정적인 수식어가 수반되었다. 예컨대 정치, 언론, 법조계의 전문직 여성과 점 원, 사무원, 배우, 무용수 등의 독신여성에게는 ‘계집년(slut)’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특히 이들이 유대인이거나 사회주의자라면 그 비난의 정도는 더욱 강한 것이었다.31)

룀은 이러한 ‘여성성’에 대한 반감을 더욱 강렬하게 표출하였다. 그는 남녀 이분구도를 통해 ‘동지와 적’의 정치적 이분구도로 정교하게 나누었다. 그는 바 이마르 공화국을 나약한 여성스러운 사회의 전형으로 파악하였다. 예컨대 그는

“나에게 여성스러움은 분명 혁명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는...반동적으로 보 일 뿐이다”고 하였다. 또한 공공장소에서 흡연하거나 화장하고 다니는 여성들 을 강력하게 비난하며, 돌격대와 친위대 대원들에게 이를 저지하는 강력한 혁 명전사가 될 것을 촉구하였다.32) 또한 그는 “볼셰비즘의 흐름”이 독일사회를 비겁, 타협, 위선, 속물근성 등으로 가득하도록 했기 때문에 사회가 혼란해진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는 ‘1918년 독일혁명’을 열등한 자들의 반동적인 혁 명이자 형제들의 증오를 가중시킨 ‘나쁜 혁명’으로 논하고, 반면에 ‘1923년 히 틀러 폭동’과 같은 우파혁명은 규율화된 질서와 군사적인 권위가 있는 ‘좋은 혁명’으로 평가하였다.33)

30) Robert Gellately, Backing Hilter,(Oxford Univ, 2001), p. 10.

31) Claudia Koonz, Mothers in the Fatherland, (St. Martin's Press, 1986), pp. 249-252.

32) Ernst Röhm, op. cit., p. 236.

33) "Die S. A. im enuen Staat Von Reichsminister Stabschef Ernest Röhm," Der SA-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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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돌격대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볼셰비즘 등 ‘여성성의 수로’에 가차 없는 폭력을 행사하였다. 1927년부터 거리에서의 정치 폭력은 독일 전역 에 걸쳐 매일같이 발생했다. 특히 ‘1929년 대공황’에 따른 국가파탄 상황 속에 서 돌격대의 폭력은 다반사로 발생했다. 그 목적은 주로 나치당을 보호하고 상 대 정당의 집회를 파괴하며 정적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돌격대는 1932년 7월 제국의회 선거를 앞둔 열흘 동안 프로이센 주에서만 24명의 사망자와 284명 의 부상자를 발생시켰다.34) 비록 모든 사람들이 나치즘을 지지했던 것은 아니 지만, 대부분은 바이마르 시기의 잦은 선거, 거리의 시위, 복지시설 앞에 늘어 선 긴 행렬 등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대공항’의 타격으로 깊은 절망감에 빠져들어 있었다. 1932년 한해 독일의 자살율이 영국의 4배, 미국의 2배를 넘어섰던 사실은 그 상황을 짐작 가능케 한다.35) 따라서 나치즘의 입장 에서 보면 돌격대의 폭력은 이러한 혼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혁명 적’ 투쟁이었다.

그렇다면 돌격대의 폭력을 가능케 했던 결정적인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이 는 바로 법과 도덕 질서를 초월한 성적 열정, 즉 동성에로티시즘에 있었다. 당 시의 우파 사상가인 블뤼허(Hans Blüher)에 따르면, “승화(昇華)한 동성애 감 정”은 종교제의, 반더포겔(Wandervogel) 청년정신, 군대의 에토스 등에 이르 기까지 폭넓게 번져있던 정서였다.36) 그리고 이러한 동성에로티시즘을 가장 첨예하게 보여주는 조직이 바로 돌격대였다. 이것은 돌격대 총수 룀이 다음과 같이 동성애적 감정을 강조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사회의 허위, 기만, 위선에 대한 ‘투쟁’은 삶의 근본인 성(性)적 열정으로부 터 출발해야한다. 즉 성적 열정만이 모든 인류의 삶을 성공적으로 창출해낼

(1933. 12. 16)

34) Richard Bessel, Political Violence and the Rise of Nazism,(Yale Univ. Press, 1999), pp.

75-76.

35) Robert Gellately, op, cit., (Oxford Univ, 2001), p. 10.

36) Harry Oosterhuis, op. cit.,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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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것이다. 사회영역에서의 ‘투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을 때, 사람 들은 인류의 사회적․법적 질서가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의 환영들을 낱낱이 찢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37)

따라서 돌격대의 폭력은 성적 열정에 근거한 남성 형제들의 정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에 블뤼허의 사상이 무척이나 대중적이었듯이,38) 돌격대 의 형제애는 나치즘의 입장에서도 적극 수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돌격대 의 ‘형제애 정치(fratriarchy)’는 나치의 권력집권 과정에서 ‘가부장제 정치 (patriarchy)’보다 효율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돌격대의 형제들은 17세에서 23세의 청년들로서 민족을 위해 죽음마저 두려워않는 역동적인 남성으로 교육 받았을 뿐 아니라, 이들은 부인과 자녀가 없었던 만큼, 민족을 위해 모든 관심 과 열정을 쏟고 지도자에게 순종하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돌격대 의 형제애는 참된 남성성의 상징이자, 사회의 질서와 안정에 기여하는 본질적 인 요소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돌격대는 동성에로티시즘과 동성애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돌격 대가 남성들의 공동체인 남성동맹의 존속을 위해 “성적 열정”을 과도하게 강 화함으로써 동성에로티시즘과 동성애가 일부 혼용되었던 것이다. 그리스의 소 년애가 남성의 특권을 전수받는 아테네 시민의 미덕이었듯이, 룀의 돌격대는 동성에로티시즘을 통해 ‘군사적인 남성성’을 교육하였고, 이 과정에서의 과도한 남성성의 강조는 일부분이나마 동성애로 젖어들게 하는 분위기를 마련했던 것 이다. 돌격대 총수 룀과 그의 측근들은 이에 대한 명확한 증거라 할 수 있었 다.

37) Ernst Röhm, op. cit., pp. 237-38.

38) 룀은 블리허의 책 《남성사회에서 성애의 역할Die Rolle Erotik in der Männlichen Gesellschaft》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고, 히믈러는 뮌헨에서의 학창시절 중에 이 책을 읽고 그 일부 내용에 공감했던 사실을 자신의 일기장에 적고 있다. Burkhard Jellonnek, op. cit,, (Paderborn, 1990), pp. 23-24.

(22)

Ⅲ ‘룀의 숙청’ : 남성성과 동성애의 분리

동성애 운동가 힐러(Kurt Hiller)는 1922년 당시 남성 동성애자의 75% 이 상이 나치즘과 같은 우파정치운동을 지지한다고 주장하였다.39) 특히 라드츄바 이트(Friedrich Radszuweit)가 중심이 된 ‘인권동맹(Bund für Menschenrecht)’은 4만 8천명의 회원을 가진 당대 최고의 동성애 단체로써 이러한 주장을 가장 잘 뒷받침해 준다. 라드츄바이트는 나치당에 대해 “강렬한 목표를 두고 쌓인 동료들 간의 사랑과 지도자와 하급자 사이의 두터운 동료애 가 널리 퍼져있는” 정당으로 평가하였다.40) 즉 다수의 동성애자들은 신체의 강인함과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나치즘의 ‘남성적인 동성애’ 미학에 매력을 느 꼈던 것이다.

그러나 유대계 ‘성과학자’ 히르쉬펠트(Magnus Hirschfeld)의 ‘과학적 인도 주의 위원회(Wissenschaftlich-humanitiäres Komitee, 이하 인도주의 위원 회)’는 사민당에서 동성애 해방의 가능성을 찾았다. 이는 무엇보다 사민당이 1871년 제정된 형법 제175조의 폐지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제175조의 내용은 “두 남성들 사이의 혹은 동물과의 성교는 ‘자연스럽지 못한 악행(Widernatüliche Unzucht)’이므로, 투옥되고 처벌받으며 그 평결은 시민권 의 상실까지이다”는 것이었다.41) 1903년 사민당의 대표급 인사인 베벨, 카우 츠키, 베른슈타인, 힐퍼딩 등이 동성애 관련 형법 제175조의 개정 서명운동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1929년에는 뮬러(H. Müller)를 비롯한 사민당의원들이 제175조의 처벌범위를 축소하는 등 동성애자들을 위해 실질적으로 일조하였기

39) Mark Blasius and Shane Phelan eds.,We Are Everywher Historical Sourcebook of Gay and Lesbian Politics, (Routledge, 1997), pp. 170-174. 힐러(1885-1972)는 유대계 성과학자 히르쉬펠트와 함께 동성애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으나, 주로 독립적으로 우파의 성향을 띠는 정 치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동성애 금지법의 폐지를 위해 동성애 운동단체들의 통합을 시도하였 다.

40) Burkhard. Jellonnek, op. cit., p. 78.

41) Mark Blasius and Shane Phelan eds., op. cit., p.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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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었다.

히르쉬펠트는 이성에 대한 호소, 즉 “과학을 통한 정당화Per scientiam ad justitiam”를 통해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불식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그는 《성적 중간자Jahrbuch für sexuelle Zwischenstufen》를 통해 동성애 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를 매년 발간하고 홍보하였다. 여기서 그는 동성애자를 정신적, 신체적인 이상에 의해 발생하는 남성과 여성의 중간자적 형태, 즉 “제 3의 성”으로 설명하였다. 또한 그는 동성애자를 남성구유자(androgynes), 자 웅동체(hermaphrodities), 그리고 성도착자(transvestites)와는 철저하게 구분 하였다. 따라서 그는 동성애를 “자연적인 성장과정에서 발생하는 자그마한 장 애” 정도로 평가하였다.42)

그렇다면 이처럼 히르쉬펠트가 과학적인 연구를 경주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무엇보다 유대인과 연결된 동성애의 이미지를 깨어내기 위함이었다. 당시 유대인 남성은 여성적인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었고, 특히 이러한 여성적 이미 지는 동성애를 유발하는 주된 요인으로 여겨졌다. 다시 말해 아리안 남성이 정 상으로 여겨지는 가운데 유대인 남성의 이미지는 비정상으로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 남성은 신체적으로 “엉덩이가 넓고 어깨가 좁으며” 정신적으로 는 “부드럽고 나약한” 여성의 특질을 지녔다는 담론이 바로 그 실례이다.43) 따라서 유대인들이 성적으로 타락한 동성애자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타락한’ 성의 모델과 연결되는 유대인의 이미지는 19세기말 이래 너무도 많았다. 유대인들은 할례로 인한 ‘특이한’ 성기 모양으로 인해 과도한 성적 특성을 갖는 것처럼 비쳐졌다. 유대인들의 긴 코’, ‘갈색 피부’, ‘검은 안 색’ 등은 과도한 성적 상징이었다. 당시의 의사들은 “성기의 이상(異狀)이 항상

42) Harry Oosterhuis, "Homosexual Emancipation in Germany Before 1933" in Harry Oosterhuis, Hubert Kennedy eds., Homosexuality and Male Bonding in Pre-Nazi Germany: the Youth Movement, the Gay Movement and Male Bonding before Hitler's Rise, (New York: Harrington Park Press, 1991), pp. 1-2.

43) 샌더 질먼,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성과학자들: 유대인의 이미지와 프로이트 구성이론”, 로이포 터, 미쿨라시 테이흐 엮음, 이현정, 우종민 옮김, 『섹슈얼러티와 과학의 대화』, (한울, 2001), pp. 404-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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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상을 수반하므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근 친혼’ 풍습 역시 문제였다. 독일 법학 담론에서 근친상간(Blutschande)은 혈통 의 손상을 야기하는 성적 통제력 상실의 근거로 다뤄졌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희대의 강간범 ‘살인마 잭(Jack the Ripper)’이 질병, 불구, 괴이한 성기모양과 연결된 유대인의 이미지로 독일의 반유대주의 신문에 흔히 등장했던 것이 다.44)

다른 한편 인권동맹의 동성애자들은 유대인의 이미지로 덧씌워진 타락한

‘여성적’ 동성애를 자신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겼다. 이들은 동성애적 삶과 사 랑의 정상성을 끊임없이 강조하였다. 특히 이들은 ‘정신적’ 동성애와 ‘육체적’

동성애와의 차이를 거듭 강조하였는데, 전자는 신체적 접촉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가령 신체적 접촉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도된 행동이 아니라 순수한 남성 우정이 발현된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정신적’ 동성애는 니체와 바그너(Richard Wagner) 같은 위대한 예 술가들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징후로써, 보통사람들보다 지적 능력에서뿐만 아 니라 감성적인 부분이 풍부하게 표출되게끔 하는 기반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인권동맹은 인도주의 위원회의 동성애를 퇴폐적이고 나약한 ‘여성적인’ 동성애 로 평가했던가 하면, 자신들의 동성애는 남성 우정의 결과물로 ‘참된 남성성’과 전혀 배치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였다.45)

이에서 알 수 있듯, 바이마르 시대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계기로 동성애는 공식적인 사회 담론의 일부가 되었다. 동성애 잡지들은 독일을 가리켜 “동성애 자들이 성적 열정을 대중 앞에 자연스레 보여주는 곳”으로 기술했다. 예컨대 베를린에서는 누드사진이 더해진 동성애 잡지를 거리가판대에서 쉽게 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1914년 40여개였던 동성애 술집이 80여개로 증가했고, 심 지어 레즈비언 술집까지 등장하였다. 또 베를린의 매춘 여행코스에는 이런 술 44) Ibid.

45) 인권동맹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Andreas Sternweiler and Hans Gerhard Hannesen, eds., “Goodbye to Berlin? 100 Jahre Schmulenbewegung: Eine Ausstellung des Schwulen Museums und der Akademie der Künste, 17. Mai bis 17. August 1997, (Berlin, 1997).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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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들을 방문하는 것이 포함되었을 정도였다.46) 이런 사회 분위기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제175조를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강력하게 집행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치당의 공식적인 입장은 사민당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나치당 은 반유대주의적인 담론에 입각하여 잠재된 유대인 동성애자들의 위협을 철저 히 제거하고자 하였다. 프릭(Wilhelm Frick)은 제국의회 연설에서 동성애를 비 겁하게 굽실거리는 유대인의 악행으로 설명하였고, 로젠베르크는 동성애를 가 리켜 독일인을 타락시키고 결국에는 국가파탄의 상황을 야기할 수 있는 “유대 인의 흑사병”임으로 그것의 부작용을 애초에 차단해야한다고 주장했다.47) 이 에 나치 반유대주의 신문인 《민중의 감시자 Völkischer Beobachter》는 히 르쉬펠트에게 “유대인의 영혼에서 기인한 사악한 욕정”이 동성애인 만큼 “우 리가 권력을 잡는 그날, 이렇게 약해빠진 제175조를 유지할 것으로 기대하지 마시오”하며 교수형과 같은 엄중한 방법으로 처단할 것임을 경고하였다.48)

룀의 동성애는 이런 점에서 ‘흥미있는 변종(variation)’이었다. 그의 동성애 는 역동적이고 능동적인 ‘남성성’과 많은 부분 뒤얽혀 있었다. 이러한 ‘남성적 인’ 동성애는 나약함이나 타락의 징후이기는 커녕, 남성의 강인한 에너지와 신 체적인 규율마저 내재한 것으로 나치 돌격대의 대원들이 도달해야 하는 최고 의 지점이었다.

룀의 ‘남성적인’ 동성애가 설사 이런 것이었다 할지라도, 적어도 사민당을 위시한 좌파 정당의 입장에서 그것은 폭력과 파괴를 야기하는 과격함의 원천 일 따름이었다. 이에 사민당은 룀이 1931년 1월 돌격대 총수로 되면서부터 돌 격대 내부의 ‘동성애 성향’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사민당 일간지《뮌쉐너 포스

46) George Mosse. Nationalism and Sexuality, (Wisconsin, 1985). p. 132. 히르쉬펠트는 1920 년대 독일의 동성애 출판물이 320 여종에 달했다고 주장한다.

47) Burkhard. Jellonnek, op. cit., pp. 52-60.

48) Hans-Georg Stümke, "From the 'Pepple's Consciousness of Right and Wrong to 'the Healthy Instincts of the Nation' : The Persecution of Homosexuals in Nazi Homosexuals in Nazi Germany" in Michael Bureligh ed., Confronting the Nazi Past, (St. Martin Press, 1996), p.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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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Müchener Post》4월 4일자는 “룀, 하이네스(Edmud Heines), 젠트너(Karl Zentner) 이상 3명이 제175조에 의거해 처벌받아야 할 동성애자”라면서 돌격 대 내부의 동성애 성향을 문제 삼았다. 또한 4월 30일자는 나치를 일컬어 “동 성애 인종의 배양자”, “신성 룀’만(Röhman) 제국의 열정적 찬양자”라 비방하 며 그것을 나치당 전반의 문제로 확장하였다.49) 이후 6월까지 계속된 《뮌쉐 너 포스터》의 비방논조는 대개 앞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즉 “룀 과 돌격대가 순수한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있으며, 나치당이 이런 분위기를 고 조시키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었다.50)

이러한 동성애 공세는 사민당 의원 클로츠(Helmut Klotz)가 1932년 4월

《룀 사건Der Fall Röhm》을 출간함으로 인해 극단으로 치달았다. 이 책은 룀이 ‘자아(自我) 공동체(Gemeinschaft der Eigenen)’계열의 동성애 의사인 하임소트(Karl-Günter Heimsoth)51)와 2년 동안 나눴던 편지들을 엮은 것으로 그의 동성애 성향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예컨대 “저는 1924년 동성애 자임을 확신했고...이를 내적으로 자랑스러워합니다...저는 수많은 여성들과 관계를 가졌지만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특히 세 차례 성병에 걸 린 이후로는 이성애를 ‘자연법에 어긋나는 것’으로 여깁니다”라는 것이 그 대 표적인 내용이었다.52) 클로츠가 1932년 7월 제국의회 선거를 겨냥하고 제시 한 이 책의 출판 의도는 다음과 같다.

49) “(동성애) 인종의 배양자 (Rassenhochzücher)”은 나치당이 주장했던 “인종 범죄 (Rassenverrat)”를, 그리고 “신성 룀만 제국(Holy Röhman Empire)”은 “신성 로마 제국(Holy Roman Empire)”을 패러디 한 것이다. Manfred Herzer, "Communists, Social Democrats, and the Homosexual Movement" in the Weimar Republic" in Gert Hekma, Harry Oosterhuis, Jaems Steakley eds., Gay Men and the Sexual Hisoty of the Political Left, (Haworth Press, 1995), pp. 209-211.

50) "Das Braune Haus der Homosexuallen," Müchener Post,(1931. 6. 24); "Warme Bruderschaft im Braunen Haus," Müchener Post, (1931. 6. 22).

51) 하임소드는 남성 동성애를 병리학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던 의사이다. 그는 1925년부터

《자아》에 글을 기고하였던 우파계열 독일 동성애 운동의 대표자이다. 정치적으로 그는 슈트라 서(Otto Strasser)를 지지했으나, 1931년부터는 슈트라서와 갈라섰다. Burkhard Jellonneck, op. cit., pp. 60-68.

52) Helmut Klotz, Der Fall Röhm, (Berlin-Tempellof, 1932), pp.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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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룀은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버젓이 밝히고 있다. 이는 지도자로서 필히 갖 추어야 할 도덕적 자질이 그에게 부족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또한 룀이

“나치 단체들은 나의 동성애에 익숙해지고 있다”며 말하도록 그를 인정해 준 히틀러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 이런 도덕적 타락이 나아간 종착점이 바 로 고대 로마의 운명이었다...물고기가 머리에서부터 부패하는 것처럼, 나 치당 수뇌부에는 타락의 근원인 동성애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53)

요컨대 클로츠는 룀의 동성애를 통해 나치당의 정치에 도덕적 오점을 남기 고자 하였다. 사민당은 제175조의 폐지를 지지했던 유일거대정당이었음에도 정치적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만큼은 룀의 동성애를 주저 없이 공격하였 다.54) 이러한 주장들은 사민당의 선거 홍보물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하였다. 예 컨대 “코를 막아라, 코를 막아라, 부패한 룀이 오늘 노이쾰른에서 연설을 하니 코를 막아라”라는 사민당의 선전문구가 그것이다.55) 그러나 룀이 이에 대해 공식적인 대응을 한 흔적들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제175조가 엄연히 존재 하는 분위기 속에서 어디까지나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룀은 1931년부터 2년에 걸친 5차례의 법정 재판을 수용해야만 했다. 그러나 제175조의 미비한 처벌 기준 때문에 법적으로 자유로운 동성애 자일 수 있었다. 상술하자면 당시 제175조의 처벌기준이 이성애적 성관계 (beischlafähnlich)에 비견되는 항문성교였다. 오럴성교나 상호 자위행위는, 지역적인 편차가 있긴 했지만, 제175조의 처벌기준을 벗어나는 안전한 동성애 행위였다.56) 사실상 검사들이 두 남성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관계를 증 명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53) Ibid, pp. 2-3.

54) Hekma, Oosterhuis, and Steakley, eds. op, cit., pp. 200-232.

55) Eleanor Hancock, "Ernst Röhm, Masculinity, and Male Homosexuality" in Journal of History of Sexuality, (Vol 8. No. 4: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8) p. 629.

56) Geoffrey. Giles, "The Institutionalization of Homosexual Panic in the Third Reich" in Social Outsider in Nazi Germany, (Princeton Univ. Press, 2001), pp. 24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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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달리, 룀은 돌격대 내부에서 동성애 상대를 구하지 는 않았다. 그는 대개 허물없는 동료인 그란닌거(Peter Granninger)와 에카르 트(Carl leon du Moulin Eckart)의 주선을 통해 이들의 플랫에서 밀회를 즐겼 다.57) 이에 그는 법정에서 자신을 양성애자로 밝혔음에도 남성과의 항문성교 만큼은 철저하게 부인할 수 있었다.58) 따라서 그는 제175조의 법적 처벌을 모 면했던 것이다.

나치선전물들은 룀의 동성애를 극구 부인하며 ‘돌격대 총수’를 보호하고자 하였다. 《돌격대》는 룀의 동성애자라는 주장을 무명(無名)인의 허위 주장으 로 일축하고 “왜곡된 정치공세”로 오도(誤導)해갔다.59) 또한 《돌격대》는 동 성애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지 않은 채 “룀은 공적영역에서 탁월한 업적을 세 운 만큼 사적영역을 자유롭게 영위할만한 권리가 있다”며 돌격대 총수를 적극 옹호하였다.60) 오히려 나치선전물들은 동성애에 관한 한 WhK의 동성애 운동 을 도왔던 사민당의 태도를 문제 삼았다.

사실 룀의 동성애에 대한 비난 여론은 나치당 내부에서도 확산되고 있었다.

이에 주도적이었던 ‘나치당 조사, 중재 위원회(Uschla: Utersuchungs und Schlichtungs Ausschusse)’의장 부흐(Walter Buch)는 동성애 스캔들로 인해 나치당의 지지도가 하락할 것을 염려하여 히틀러에게 룀의 돌격대 총수직 해 임을 제안하였다. 히틀러가 이 제안을 단호히 거절함으로써, 부쉬는 자신의 정 보요원들을 통해 룀을 비롯한 에카르트, 율(Julius Uhl), 벨(Geroge Bell), 이 4명에 대해 암살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암살 정보요원 중 한 명이 이 사실을

57) 최근 새로운 연구들은 룀의 동성애 상대가 직업적인 매춘남성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상대 자들의 나이에 대해서는 일부 의견차가 있다. 옐로넥은 이들이 주로 20대였다고 하는 한편, 핸 콕 주로 16세에서 20세였다고 주장한다. Burkhard Jellonnek, op, cit., pp. 85-86. Eleanor Hancock, op. cit., p. 632.

58) 동성애자들은 바이마르 독일의 자유로운 성(性)적 분위기 속에서 정상성의 기준을 넘나드는 것 이 가능했다. 1871-1924년 사이에는 매년 300-700명이, 1925-1933년 사이에는 매년 800-1100명이 제 175조에 의해 유죄선고를 받았을 뿐이다. 이에 대한 처벌은 대부분 5년 이하 의 노동봉사로 한정되었다. Hans-Georg Stümke, op. cit.,, p. 155.

59) "Dem Kampfer Ernst Röhm," Der S.A.-Mann (1933. 4. 29).

60) “Ernst Röhm: Der Stabschef der Braunen Armee" Der S.A.-Mann, (1933.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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룀과 에카르트에게 통보함으로써 부쉬의 암살계획은 실패하게 되었다. 뮌헨 경 찰은 외부로 드러나지 않게끔 정보요원들을 체포하고 배후 조정자인 부쉬를 조사하지 않는 선에서 이 사건을 조용히 매듭지었다.61)

이러한 비난 여론에 대해 히틀러는 “룀과 함께 일어서고, 함께 쓰러진다”하 며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62) 히틀러는 룀이 신중함을 기하는 한 동성애를 문 제 삼지 않았다. 히틀러는 룀의 동성애가 험난한 전쟁경험과 볼리비아 생활 때 문에 유발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히틀러는 다른 동성애자들처 럼 룀의 동성애를 가혹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히틀러의 태도가 동성애 그 자체를 용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히틀러의 입장에서 룀의 동성애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었다. 룀이 지휘하는 돌격대는 품위 있는 신사, 숙녀를 양성하는 도덕 교육기관이 아니라 ‘호전적인 나치 전사’를 길러내는 군사훈련기관일 따름이었다. 히틀러가 룀을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으로 칭하며 그가 동성애자란 사실을 묵인한 이유는 뢰덱케와의 담화내용에서 한층 분명하게 드러난다.

“제가 과연 동지들의 사적인 생활을 고려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저는 (민 족의) 사명을 수행하는 동지들의 공헌도를 중시합니다. 중대국면의 시국인 지금 어느 누가 동성애를 이유로 핵심요직의 인물을 교체할 수 있을까요.

터무니없는 얘기지요. 저는 바그너의 음악을 사랑합니다. 그렇다면 바그너 가 남색(男色)자라서 제가 그의 음악을 듣는 것일까요?”63)

이에서 증명되듯 히틀러가 보호하고자 했던 것은 ‘동성애자 룀’이 아닌 ‘돌 격대 총수 룀’이었다. 룀은 사실상 돌격대 총수 취임과 함께 지역적으로 분산 된 돌격대의 지휘체계를 나치당 산하로 일거에 통합해낸 장본인이었다. 뿐만

61) Andreas Dornheim, Röhms Mann fürs Ausland. Politik und Ermordung des Sa-Agenten Georg Bell (Münster, 1998).

62) Burkhard Jellonnek, op. cit., p. 69.

63) Kurt Lüdecke, I Know Hitler: The Story of a Nazi The Escaped the Blood Purge, (Jarrold Publisher, 1937), pp. 428-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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