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분석
참된 믿음은 모두 앎인가?
도박꾼이 주사위놀이를 하고 있다. 그는 지금 두 개의 주사위를 던지면 둘다 6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 둘다 6이 나왔다. 그는 “내가 그럴 줄 알았어!”라고 의기양양하게 소 리친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진짜로 아는 것이 아니며 단지 짐작이 용케 맞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가 진짜로 아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두 개의 주사위를 던지면 둘 다 6이 나올 것이라고 믿었고, 이 믿음이 참임에도 말이다. 그의 참된 믿음이 앎이 되기에는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빠진 요소: 증거
부족한 것은증거다. 두 주사위 모두 6이 나올 것을 안다고 하려면 그렇게 믿을 좋은 근거(good reason) 가 있어야 한다. 좋은 근거가 있으면 그것은 짐작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당신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비행기에서 휘어진 지구 표면을 보았고, 당신 자신이 지구 주위를 선회해 보았으며, 그 전에 수많은 책과 잡지에서 이 사실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믿을 만한 좋은 근거를 제공한다.“안다”라는 말의 일상적 용례
우리가 “안다”는 말을 실제로 어떻게 사용하는 지 몇 가지 사례를 검토해 보도록 하자. 1. 운전 중에 탁탁거리는 익숙한 소리가 들리자 “타이어가 펑크 났군”이라고 혼잣말을 한다. 자동차에서 내려 살펴보니 좌후방 타이어가 펑크나서 바람이 빠졌다. 자동차에서 내리기 전에는 타이어가 펑크났다고믿을 만한 강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므로 나는 펑크났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 이것이 안다는 말을 사용하는 일상적이고 표준적인 방식이다.“안다”라는 말의 일상적 용례 (계속)
2. “당신은 책상과 책들이 자기 사무실에 여전히 있다는 것을 아는가?” “물론 안다. 나는 불과 5분 전에 그 사무실에서 나왔는데 책상과 책들이 모두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 5분 안에 이삿짐 운송업자가 사무실에 들어와서 모든 물건을 빼내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내가 바로 옆 방에 있었기 때문에 무언가 삐걱거리는 소리 등을 분명히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주위에서 이삿짐 운송업자를 보지도 못했고 아주 조용했다. 아무튼 그 일을 어떻게 5분 안에 할 수 있겠 는가?” (다음 슬라이드에 계속)“안다”라는 말의 일상적 용례 (계속)
(앞 슬라이드에서 계속) “책상과 책들을 5분 안에 소리없이 밖으로 옮기는 조건으로 누군가가 백만 달러를 받는다고 해도 그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말인가? 그것에 당신의 목숨을 걸 수 있겠는가?” “글쎄 목숨을 걸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안다.”강한 의미의 앎과 약한 의미의 앎
철학자들은 때로 “안다”라는 말의 강한 의미와 약한 의미를 구별하기도 했다. 강한 의미로 p를 알기 위해서는 결정적 증거가 필요하다. p에 관해 더 이상 의심할만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나를 비롯해서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때 그 증거는 결정적이다. 모든 증거를 입수해야 하며, 증거가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다. 이런 의미로 봤을 때, 앞의 사례들에서 나는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난 것도, 책상과 책들이 사무실에 있다는 것도 몰랐다. 약한 의미, 즉 “일상생활”에서의 의미로 p를 알기 위해서는 p에 유리한 증거가 우세하고 p에 불리한 증거를 찾아낼 수 없어야 한다. 이 의미로는 나는 위에 언급한 명제들을 알고 있었다.강한 의미의 앎과 약한 의미의 앎 (계속)
우리는 어떤 경우에 피의자가 유죄라는 것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 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은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 없는 유죄가 아니라 어떠한 의심도 할 수 없는 유죄이다. 피의자 가 자백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유죄를 입증하지 못한다. 허위 자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살해하는 것을 누군가 보았다고 증언을 해도 여전히 내가 그것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많은 목격자들이 위증하기 때문이다.회의주의(Skepticism)
회의주의란 앎이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입장이다. 다음 논변을 생각해 보자: P1. 내가 지구에 살고 있으려면 나는 지구처럼 느껴지는 가상현실 속에 있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P2. 나는 내가 지구처럼 느껴지는 가상현실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P3. 모든 명제 p와 q에 대해, 만일 p가 q를 논리적으로 함축한다면, p를 안다면 q도 알아야 한다. C. 나는 내가 지구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런 종류의 논증을 통해 많은 명제들에 대해 그것에 대한 앎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불가능해지는 것은 강한 의미의 앎인가, 아니면 약한 의미의 앎인가?앎의 두 가지 근원들: 이성과 경험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앎을 얻는가? 주로 두 가지 근원이 언급되는데, 바로 이성과 경험이다. 먼저 경험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나무를 보고 만질 수 있기 때문에 저 바깥에 나무가 있다는 것을 안다. 말하자면 감각 경험을 통해서 그 사실을 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생각해 냈다, 순전히 추리하여 알아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그 반 학생들이 모두 소풍을 갔는데, 앨리스가 그 반 학생이었다면, 앨리스 역시 소풍을 갔다. 산수, 대수, 삼각법, 미적분에서 우리는 “관찰하지” 않는다. 우리는 추리하고 생각해 낸다.파르메니데스: 다자의 불가능성
고대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515–440 B.C.)는 오로지 이성에 의해서만 무엇이 옳은지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성에 따르면 우주에 다자(여러 대상들)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P1. 여러 대상들이 존재한다면, 어떤 x와 y 는 구별되어야 한다. P2. x 와 y 가 구별되려면, x 와 y 사이에 무(텅빈 공간)가 존재하여야 한다. P3. 무(비존재)는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 C. 따라서 여러 대상들이 존재할 수 없다.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일자이다. 따라서 파르메니데스는 다자의 존재가 일종의 환상이라고 믿었다.애매성의 오류?
위 논증의 결론은 직관적으로 틀렸다. 그렇다면 파르메니데스는 어떤 추론 상의 실수를 저지른 것일까 ? 그것은 아마도 그가 논증에서 “무”라는 낱말을 애매하게 썼다는 점일 것이다. 영어로 쓰여진 다음 논증을 생각해 보자:
P1. Nothing is better than wisdom.
P2. Dry bread is better than nothing.
C. Therefore, dry bread is better than wisdom. 언뜻 보면 그럴 듯한 추론같이 보이지만, 이 논증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P1에서 “nothing”은 “아무 것도 . . . 하지 않다”라는 뜻으로 쓰였지만, P2에서 “nothing”은 아무 음식도 가지지 못한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쓰였다. 마찬가지로 파르메니데스의 논증에서 P1에서 “무”는 텅빈 공간의 뜻으로 쓰였지만, P2에서 " 무”는 비존재의 뜻으로 쓰였다. 이처럼 한 낱말이 다양한 뜻으로 쓰여서 생기는오류를 흔히 “애매성의 오류”라고 부른다.
논리학: 논변, 타당성, 건전성
누군가가 이런 방식으로 추리한다고 해보자. P1. 모든 암소는 푸르다. P2. 나는암소다. C. 그러므로 나는푸르다. 어떤 사람은 “이 명제들은 옳지 않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이 추리는 완전히 타당하다”고 말한다. 둘다 맞다. 첫 번째 사람은 P1, P2, C가 각각 거짓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고, 두번째 사람은 C가 P1과 P2로부터 논리적으로 따라나온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주어진 논증의 결론이 전제들로부터 따라나올 때 그 논증을 “타당”하다고 말하고, 더하여 그 논증의 전제들이 모두 참일 때 그논증을 “건전”하다고 말한다. 논리학은 이 둘 가운데 타당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논증형식
논증은 내용 (content)과 상관없이 형식(form) 때문에 타당하거나 부당하다. 전제가 무엇인가는 논증의 타당성 여부를 따지는데 있어서는 중요하지 않다. 예를 들어, 다음 형식의 논증들은 모두 타당한논증이 된다: P1. 모든 A는 B이다 P2. 모든 B는 C 이다. C. 그러므로 모든 A는 C 이다.타당한
논증형식의 예
타당한논증형식의 예들을 생각해 보자: 1. 어떤 A도 B가 아니다; 따라서, 어떤 B도 A가 아니다. (예: 어떤 개도 고양이가 아니다; 따라서, 어떤 고양이도 개가 아니다.) 2. 어떤 A가 B이다; 따라서 어떤 B는 A다. (예: 어떤 개는 흰 동물이다; 따라서, 어떤 흰 동물은 개이다.).부당한
논증형식의 예
이번에는 부당한 논증형식의 예들을 생각해 보자. 1. 모든 A가 B다; 따라서, 모든 B는 A다. (예: 모든 개는 포유동물이다; 따라서, 모든 포유동물은 개다.) 2. 어떤 A는 B가 아니다; 따라서, 어떤 B는 A가 아니다. (예: 어떤 시계는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지 못한다; 따라서,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는 어떤 것은 시계가 아니다.) 3. p이면 q이다; q이면 r 이다; 따라서, r 이면 q이다. (예: 이것이 정사각형이라면 그것은 직사각형이다; 그것이 직사각형이라면 그것은 평행사변형이다; 따라서, 이것이 평행사변형이라면, 그것은 정사각형이다.)전제에 대한 이성적 앎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논리학을 통해 우리는 만일 어떤 논증의 전제들이 참이라면 그 결론도 역시 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논리학은 전제들 자체의 참을 알려주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전제들이 옳은지는 어떻게 아는가? 대부분의 명제들—“눈은 희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있다”—의 참거짓은 경험에 의해 알려진다. 하지만, 어떤 명제들은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도, 또 논증을 통해서 다른 전제들로부터 추론되지 않고도, 그것들의 참이 알려질 수 있다. 그 중 한 가지 부류는 수학적 명제들인데, 예를 들어 1+1=2라는 앎은 너무나 확실해서 추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다.논리적 참: 동일률, 무모순율, 배중율
또 다른 예들은 이른바논리적으로 참인 명제들(logical truths)에 대한 앎이다. 다음 세 가지 형태의 명제들을 생각해 보자: 동일률: A는 A다. 무모순율: 어떤 것도 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닌 것일 수 없다. 배중률: 어떤 것이든 A이거나 A가 아니거나 둘 중 하나다. 이 세 가지 형태의 명제들은 경험하지 않고도, 심지어 추론하지 않고도 당연히 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동일률
위 명제들을 부정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 지 생각해 보자. 누군가가 동일률을 부정한다고 상상해 보라: A. 나는 A가 A라는 것을 부정한다. B. 알았어. 그런데 당신이 방금 제시한 부정문은 부정문 맞나? A. 물론이지. B. 그렇다면 당신은 방금 (A가 A라는 것에 대한 부정문) 은 (A가 A라는 것에 대한 부정문)이 맞다고 긍정했다. 반면 당신의 원칙에 의하면 (A가 A라는 것에 대한 부정문)은 (A가 A라는 것에 대한 부정문)이라는 것을 부정하여야 한다. 따라서 당신은 방금 무모순율을 위배했다. 이와 더불어서, 동일율을 가정하지 않고서 어떤 것이든 생각조차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당신이 어떤 물건 A 가 의자라고 말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그것이 A라는 점은 계속 긍정해야 A에 대해서 의자라는 점을 말하거나 생각할 수 있지 않겠는가?무모순율
동일률을 부정하는 이에게너는 그러면 무모순율도 부정하게 된다고 말해도, 선선 무모순율까지 버리겠다고 나선다면 대응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과연 무모순율을 부정하면 어떤 생각이든 가능할까? A. 이것은 식탁이면서 또한 식탁이 아니다. B. 하지만 그것은 모순이다. A. 그렇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가? B. 모순된 주장은 이해불가능하다. 어떤 주장이든 사물에 대해서 그것이 어떠하다 또는 어떠하지 않 다는 내용들 중 하나를 담기 마련이고, 우리는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언급한 대상 x 가 식탁이라고 말하면서 또 식탁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당신의 주장은 x가 식탁이라는 내용도, x가 식탁이 아니라는 내용도 제대로 담지 못하게 된다.배중율
배중률은 가장 비판을 많이 받는 법칙이다. 배중률은 A와 A가 아닌 것 사이에 어떠한 중간 지대도 없다고—무엇이 됐건 그것은 A 이거나 A가 아닌 것이거나 둘 중 하나라고—주장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A라는 속성과 B라는 반대 속성 사이에 중간지대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배중률을 비판하고는 한다. 그들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어떤 것이 뜨겁거나 차갑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액체는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미지근할 수 있다. 자동차가 빠르거나 느리거나 둘 중 하나로 가야 하는 것은아니다. 그 자동차는 빨리 가지도 않고 천천히 가지도 않고 적당한 속도로 갈 수 있다.배중율 (계속)
하지만 이 반론은 부정(negative)과 반대(opposite)를 혼동한데서 기인한 잘못된 반론이다. 반대되는 속성들 (예를 들어 뜨거움과 차가움) 사이에는 물론 중간 지대가 있다. 하지만 배중률은 반대 속성들 사이에 중간 지대가 없다는 논리법칙이 아니라, 어떤 속성과 그 부정 (뜨거움과 뜨겁지 않음) 사이에 중간 지대가 없다는 법칙이다. 따라서 반대속성들 사이의 중간지대를 인용해봤자, 배중률에 대한 반례가 되지 못한다.경험
이제 지식의 주요 근원 중 하나인 경험에 대해 고찰해 보자. “경험” (experience)이라는 말은 다소 모호해서 대체 무엇이 경험에 포함되고무엇은 그렇지 않은지 뚜렷하지 않다. 따라서 소위 경험을 유형별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1. 감각지각: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세계를 인식하는 것. 2. 내성: 스스로의 심적 상태를 인식하는 것. 3. 기억: 과거에 없은 정보를 떠올려서 인식하는 것. 4. 증언: 다른 사람의 말에 의존해서 어떤 정보를 인식하는 것.감각지각
“당신 앞에 식탁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내 감각기관을 통 해서 식탁을 보고 만진다. 당신이 원하면 식탁을 촬영할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식탁을 보고 만질 수 있다. 더 이상 무엇을 원하는가?”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당연시하고 거의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로 아주 단순하고 명백한 지식 주장이다. 우리는 물리적 세계가 있다고 믿으며, 우리 감각기관 을 통해 물리적 세계를 지각할 수 있다고 믿는다.감각지각 (계속)
하지만 우리의 감각 기관은 우리를 때로 오도한다. 우리는 어떤 대상이 갖지 않은 성질을 그 대상이 가진 것처럼 지각하거나(착각; illusion) 전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지각하기도 한다(환상; hallucination). 감각 기관은 우리 정신을 완전히 오도하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우리가 항상 꿈을 꾸고 있어서지각할 물리적 대상이 아예 없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누군가가 실제로 지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지각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어떤 사람이 지난 밤 공중을 비행하는 우주선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녀는 밤하늘에서 어떤 발광체를 보았는데 (그녀가 실제로 본 것은 그것뿐이다), 그녀는 그 발광체의 경험을 자신이 우주선을 본 것이라고 해석한다.내성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의 사고와 감정에 대한지식을 갖기도 한다. 나는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안다. 나는 내가 지금 치통을 앓는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가 졸리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이런 사실들을 내가 지금 책상에 앉아 있다거나 책을 읽는다는 것만큼 확신할 수 있지 않을까?내성 (계속)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정확히 어떠한 심리상태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아 그때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좀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예를 들어, 누군가 당신에게 지금 “행복한가?”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당신은 자기에게 현재 치통이 있는지 아닌지는 알지만, 당신이 행복한지 아닌지는 모를 수 있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당신은 모태신앙을 가지고 시골 마을에서 독실한 신앙인으로 자랐지만, 대도시로 가서 대학교육을 받으면서 서서히 신앙을 잃을 수 있다. 그 과정의 어느 시점에서, 이미 신앙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기억
I “이 사람을 전에 만났다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I “나는 그것을 기억한다.” I “어린시절 부모와 함께 진양호에 간 것을 당신은어떻게 아는가?” I “나는 그것이 어제 일인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우리는 안다고 주장할 때 끊임없이 기억을 이용한다. 어떤 사건을 기억하는 것은 지금 당장 일어난 사건을 보는 것 과마찬가지가아닐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잘못 기억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당신은 지난 화요일에 만찬을 위해 데니의 집에 갔다고 “기억”하는 데 갑자기 수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바뀔 수도 있다—화요일에는 출장을 갔었다.기억 (계속)
기억에 고유한 한 가지 인식론적 문제는, 나의 기억이 신뢰할만한 인식수단인지 기억 자체에 의존하지 않고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I “나의 기억은 신뢰할만하다.” I “어떻게 그 사실을 아는가?” I “내가 t1에 p1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나중에 그 사실을 기억했는데, 실제로 p1이었다.” I “내가 t2에 p2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나중에 그 사실을 기억했는데, 실제로 p2이었다.” I ... I “내가 tn에 pn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나중에 그 사실을 기억했는데, 실제로 pn이었다.” 문제는, 밑줄친 사실들을 어떻게 지금 아느냐 하는 것이다. 결국 그런지식 역시 기억에 의해서 현재의 나에게 전달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기억의 신뢰성에 대한 옹호는 기억에 의존하여 이뤄질 수 밖에 없다는 문제점이 발생한다.증언
우리 대부분은 I 이순신 장군께서 전라좌수사였다는 것, I 박정희 전대통령이 김재규에게 총맞고 죽었다는 것, I 물체가 빛의 속도에 가깝게 움직이면 그 물체에게 있어서는 시간이 느리게 지나간다는 것 등을약한 의미로라도 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우리 자신이직접 본 적도 없고 기억하지도 못한다. 우리가 이런 사실들을안다면, 오직 다른 이들의 증언에 의존해서 알 뿐이다. 하증언 (계속)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증언이
1. 고의적인 거짓말도,
2. 또 고의는 아니더라도, 오류에 의한 판단의 거짓된 결론도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요약
I 모든 참된 믿음이 앎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앎은 참과 믿음에 더해, 증거라는 조건이 더해져야 성립한다. I “안다”라는 낱말이 일상적으로 쓰일 때에는, 참되게 믿어지는 명제에 대해서 유리한 증거가 있고 불리한 증거를 찾을 수 없으면 그만이다. I 이런 의미에서 앎이 성립하기 위해서, 그 대상이 되는 명제가 거짓일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이 다 배제될 필요는 없다. I 철학자들은 때때로 강한 의미의 앎과 약한 의미의 앎을 구별한다. I 강한 의미로 p를 알기 위해서는 결정적 증거가 필요하다. p에 관해 더 이상 의심할만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나를 비롯해 누구나 인정할 때 p에 대한 증거는 결정적이다. I 약한 의미로 p를 알기 위해서는 p에 유리한 증거가 있고 p에 불리한증거를 찾아낼 수 없으면 그만이다. I “앎”에 대한 회의주의는 강한 의미의 앎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일 수도, 약한 의미의 앎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일 수도 있다.요약 (계속)
I 자주 언급되는 앎의 두 가지 근원들은 이성과 경험이다. I 파르메니데스는 이성만이 진정한 지식의 근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I 특히 그는 다자의 불가능성을 다음의 순수히 이성적인 논변으로 확립하려 했다: P1. 여러 대상들이 존재한다면, 어떤 x 와 y 는 구별되어야 한다; P2. x 와 y 가 구별되려면 x 와 y 사이에 무가 있어야 한다; P3. 무는 없다; C. 그러므로, 여러 대상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I 위 논변의 한 가지 잠재적 문제점은 P2에 포함된 “무”와 P3에 포함된 “무”가 다른 뜻인 듯하다는 점이다. I 이것은 이성을 통해 철학적 결론을 이끌어내는데 있어서 논리학의 중요성을 강조해 주는 좋은 예이다.요약 (계속)
I 논증의 평가기준은 타당성(결론이 전제들로부터 따라나오는가?)과 건전성(논증이 타당하고 전제들이 참인가?) 두 가지인데, 논리학은 이 가운데 논증의 타당성만 따지는 학문이다. I 논증은 내용과 상관없이 형식 때문에 타당하거나 부당하다. I 논증형식은 말 그대로 논증의 형태를 도식화한 것이다. 논증형식 자체는 논증이 아니지만 논증들을 예로 가질 수 있다. I 타당한 논증형식은 모든 예가 타당한 논증형식이다. 부당한 논증형식은 부당한 어떤 예를 가지는 논증형식이다. (주의: 부당한 논증형식은 타당한 예를 가질 수 있다.) I 논리학을 공부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전제들이 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I 그러나 어떤 전제들은 논리적으로 혹은, 더 넓게, 이성적으로 확립할 수 있다고 흔히 주장된다. 한 가지 예는 수학 이론(예: 기하학)의 공리들이고, 또 한 가지 예는 논리적으로 참인 법칙들(예: 동일률, 무모순율, 배중율)이다.요약 (계속)
I 논리적으로 참인 법칙들의 대표적 예로는 동일율, 무모순율, 배중율을 들 수 있다.
I 동일율은 A는 A라는 법칙이다. 이것을 부정하면 (A는 A라는 것)은 (A는 A라는 것)을 부정하면서 긍정하게 되어 무모순율 역시 위배된다고 우리 책의 저자는 주장한다. I 무모순율을 부정하게 되면, A라고 주장하면서 A가 아니라고 주장하게 되는데, 이 경우 A라는 주장도, A가 아니라는 내용도 전달하지 못하게 되어 듣는 이가 이해할 수 없게 된다고 우리 책의 저자는 지적한다. I 배중율에 대해서 A와 그 반대인 B사이에 중간지대가 있을 수 있다는 반론이 제기되는데, 이는 반대와 부정을 혼동한데서 나온 반론이다. 배중율은 A와 A의 부정 사이에 중간지대가 없다는 법칙이지, A와 그 반대인 B사이에 중간지대가 없다는 법칙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