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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의미의 논리」에 나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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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의미의 논리」에 나타난

‘반-효과화’로서의 교육

*

16)

김 영 철 충북대학교 교육학과

《요 약》

이 글은 객관적, 선험적, 경험적 사유를 전개한 들뢰즈의 저서 「의미의 논리」에 나타난 교육 이미지를 탐색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 글에서 교육은 반-사회화, 들뢰 즈의 용어로는 ‘반-효과화’로 규정된다. 더불어 반-효과화로서의 교육은 아이러니, 익살, 역설이라는 단계적 교육 행위에 의해 성취된다. 아이러니가 사변적 체계에서 마음으로 방향을 돌리게 하는 교육적 조치라면, 역설은 마음을 해체하게 하는 것이 고, 익살은 형이상학적 표면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교육 행위 의 훌륭한 사례로서 선불교의 선문답을 언급한다. 이 글에서는 「무문관」이라는 공 안집에서 선택된 몇 가지 선문답을 교육 행위의 사례로 예시한다.

반-효과화는 효과화(사회화)를 무효화하거나 그것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효과화에 맞대응하는 행위자의 효과화를 말한다.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에 따르 면, 그의 경험론적 측면에서 볼 때, ‘형이상학적 표면’이 발생의 잠재력을 가지고 주 체를 형성하는 측면으로서의 효과화를 거슬러 주체가 형이상학적 표면과 합일하는 것, 그리고 그의 선험론적 측면에서 볼 때, 주체가 초월적 담론에 빠지지 아니하고 형이상학적 표면에 머물면서 능동적으로 형이상학적 표면을, 그 사건의 계열화의 장 을 이해하고 원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주요어 : 의미의 논리, 사건, 계열, 선문답, 반-효과화

* 이 논문은 2007년도 충북대학교 학술연구지원사업의 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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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이 글이 가정하고 있는 교육의 이미지는 ‘구조와 발생’ 사이에 있지 아니하고 ‘발생과 반-발생’ 사이에 있다. 내 소견으로는, 교육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교육학 일반의 논의에서 도 교육인류학이라는 특이한 관점을 형성하는 것 같다. 최초로 이러한 논의를 시도했던 연 구로서 조용환(1997)의 연구를 들 수 있다. 그는, 사회화는 교육의 토대이면서 질곡이요, 교육은 사회화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면서도 그 한계를 극복하는 역설적 힘이 있다고 보 고, 교육과 사회화의 관련을 ‘구체적인 부족사회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 밝히’고자 한다(조 용환, 1997, p. 7). 나는 그의 교육과 사회화의 관련에 관한 이론적 견해에 대체적으로 동의 하면서, 다만 보다 이론적 맥락에 치중하여 그 의미를 추구하고자 한다.

함린(Hamlyn, 1978/1990)은 지식을 가진 주체의 발생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인식론적 문제에 관하여 세 가지 견해를 검토하고 자신의 대안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함린은 그 세 가지 견해를, 피아제(J. Piaget)의 용어를 빌어, ‘구조없는 발생(경험주의)’과 ‘발생없는 구조 (합리주의)’ 그리고 ‘구조있는 발생(피아제의 견해)’이라 부른다.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를 비 판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정립하고자 한 피아제는, 주체가 요행에 의하여 우연히 발생한다 는 경험주의적 견해와 주체가 지식을 완성된 형태로 타고 난다는 합리주의적 견해와는 달 리, 정신구조를 형식적으로 타고 난 주체는 정신구조의 내용으로서의 환경과 상호작용에 의해 발달적으로 발생한다고 본다. 함린은 피아제에게 학습이론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칸트(Kant)적인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이것을 ‘칸트주의적 설명(p. 28)’이라고 부른다. 함린의 관심사는 지식을 가진 주체는 어떻게 발생하는가라는 질문을 사실적인 것 이 아니라 논리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데에 있다. 그가 보기에 이 부분이 철학이 개입할 수 있는 정당하고도 올바른 영역이다. 그리하여 그는 피아제의 발생적 인식론의 학습이론적 기초를 칸트에게서 발견한다. 그런데 그는 피아제와 더불어 그 이론적 기초로서의 칸트의 견해가 ‘개인이 환경을 대면하고 있는 상황(p. 28)’을 가정하는 허구적 이론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그 이유는 한 아이가 태어날 때, 그 아이는 세계를 고독하게 대면하는 개인으로 태어난다기보다는 ‘삶의 공동체(community of life)’ 속에서 태어나며(p. 159), 대상으로서의 타인 속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료주체(co-subject)’ 속에서 양육되기 때문이다(p. 29).

요컨대 그는 칸트의 인식론이 고독한 탐구자의 주관적 정신구조를 주체발생의 기초로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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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사회의 객관적 정신구조를 주체발생의 기초로 제시 한다.

만일 칸트의 선험적 형식이라는 주관성의 구조를 사회적 맥락으로 확장한 학자가 뒤르 껨(Durkheim)이라는 말이 온당하다면(Hanson, 1975, p. 22), 함린이 말한 삶의 공동체는 바 로 뒤르껨의 ‘집합의식(collective or common conscience, Durkheim, 1893/1933, p. 79)’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의 정의를 논하면서 뒤르껨이 칸트를 비판했던 초점 은 칸트가 보편적인 교육을 주장했다는 점에 있다(Durkheim, 1911/1978, pp. 59-60). 소위

‘특수사회화’라는 분업적 직업세계로의 입문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뒤르껨에게 칸트의 교육 의 정의는 공허하게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의 정의와 관련하여 뒤르껨의 칸트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아마도 주체형성의 선험적 조건이 인식의 주관성에 있지 아니하고 사회의 객관성에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함린은 뒤르껨과 일맥상통한다.

구조와 발생의 관련문제는 이제 ‘구조냐, 발생이냐’의 양자택일의 문제로 되는 것이 아 니라 주관적 정신구조로부터 주체가 발생하는가 아니면 객관적 사회구조로부터 주체가 발 생하는가 하는 문제로 된다. 이 글의 전반부(2. 사건의 존재론)는 후자의 관점을 취하고 있 다. 그런데 객관적 사회구조가 주체를 발생시킨다고 하는 견해는 교육의 이미지와 관련하 여 얼마나 만족스러운 것일까? 예컨대 뒤르껨이 말하는 교육, 즉 ‘사회화’는 일방향적이고 결정론적이며 결국 순치된 주체를 상정하는 것은 아닌가? 교육은 주체발생을 넘어서는 곳 에 그 낙처가 있는 것은 아닐까? 교육은 사회적 구조의 주체발생을 폐기하지 않으면서, 바 로 그 주체발생을 거스르는, 머릿결을 거슬러 빗질하듯 거스르는 데에 진면목이 있지 않을 까? 이런 점에서 뒤르껨이 칸트를 비판한 것, 또는 함린이 피아제를 비판한 것은 성급한 처사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뒤르껨과 함린이 주목한 바가 사회적 구조가 주체를 생산하 는 측면이었다고 하면, 피아제와 칸트가 주목한 바는 주체가 사회를 구성하는 측면이었다 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과 관련하여 ‘주체발생’과 ‘반(counter)-주체발 생’의 절합(節合, articulation)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이러한 절합의 가능성은 들뢰즈(Deleuze)의 저서 「의미의 논리」에서 발견된다. ‘효과 화(actualization)’와 ‘반-효과화(counter-actualization)’라는 용어로 지칭되는 주체발생과 반 -주체발생은 의미의 논리의 핵심적 아이디어에 해당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구조는 물체의 표면에서 사건이 계열화된 것이다. 이 계열화된 사건으로서의 구조는 고유한 에너지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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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발생적 운동을 전개한다. 사건이 의미로 되고, 이 사건/의미가 개체, 인칭, 개념 등을 발생시키며, 지시작용, 현시작용, 기호작용의 언표 또는 명제로 표현되는 과정의 탐구가 이 저서의 한 축을 이룬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또는 결정론적으로 보이는 구조적 발생의 과 정, 즉 효과화의 과정은 반-효과화라는, 행위자 주체의 반결정론적 삶의 태도에 부딪힌다.

마치 신에 대항하는 프로메테우스처럼, 행위자 주체는 운명에 맞서서 사건을 기다리고 원 한다. 교육이 주체발생의 국면을 넘어서는 지점에서 본격적으로 사유되어야 한다면, 이 효 과화와 반-효과화가 교차하는 지점이 교육을 사유할 곳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효과화는 행위자가 사건을 효과화하는 방식을 말한다(<의>, p. 262).1) 들뢰즈에게 있어 ‘효과화’라는 것은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그는 이 자연적 경 로를 거슬러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하는 행위자 주체의 효과화를 특별히 ‘반-효과화’라고 부른다. 이 반-효과화는 효과화를 무효화하거나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효과화를 적극 적으로 견인하고 전유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여 반-효과화는 행위자가 효과화를 이해 하면서 스스로 새로운 효과화를 실행하는 것이다. 부동심을 가지고 운명을 수용하는 것, 그리하여 영원의 관점을 가지고 순간을 사는 자가 반-효과화의 행위자이다.

예컨대 부스케(Bousquet)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상처는 나 이전에 존재했으며, 나 는 그것을 구현하려고 태어났다(<의>, p. 259에서 재인용).” 우리가 만일 교통사고로 큰 상 처를 입었다고 하자. 이 현실적 재앙에 대하여 부스케처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즉 내가 상처를 입은 것은 나에게 상처를 입힌 사건이 나를 통해 현실로 된 것 뿐이므로 나는 그 운명에 대하여 어떠한 원한도 원망도 품지 않는다. 아니, 거기에 더 나아가 나에 게 일어날 사건을 그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바라고 원할 수 있을까? 예컨대 죽음은 어떠한가? 우리는 죽음을 바라고 기다리고 원할 수 있을까? 죽는 순간에 내가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죽음이라는 사건이 내게 일어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다시 부스케는 “나 는 의지의 좌절인 죽음에 대한 내 취향을 의지의 신격화인 죽음에의 바람으로 대체할 것 이다.”라고 말한다(<의>, pp. 260-261에서 재인용). 이러한 죽음은 블랑쇼(Blanchot)의 용 어로 ‘비인칭적 죽음(<의>, p. 264)’이요 형이상학적 죽음으로서, ‘인칭적 죽음’이나 현상학 적 죽음과 대비된다(이정우, 2004, p. 276). 고대 헬레니즘 시대의 스토아적 현자는 이러한

1) 이하 「의미의 논리」는 <의>라고 줄여 쓰고, 이정우의 번역본(1999)의 면수를 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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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를 ‘운명애(amor fati, <의>, p. 261)’라 부르고 그 경지를 ‘아파테이아(apatheia, 이정우, 2003, p. 425)’라고 불렀다 하거니와,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의미의 논리」라는 저서에 관해 간단히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969년에 파리 에서 간행된 의미의 논리는 「차이와 반복」(1968), 「앙띠-오이디푸스」(1972), 「천 개의 고원」(1980)과 더불어 들뢰즈의 주저서 4권에 포함된다(<의>, p. 558).2) 국가 박사학위 주 논문으로 제출되었던 차이와 반복 이후, 들뢰즈의 본격적인 저술활동은 이 「의미의 논 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천 개의 고원」이라는 책이 장 별 분 할과 통합이 아닌, 고원 별 연결과 배치를 가지고 있는 것과 유사하게, 34개의 계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계열들 간의 연결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암시적으로 내장되어 있 다. 각 계열은 6-18쪽의 짧은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장은 현란하나 간결하고 강밀하 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계열’은 후에 「천 개의 고원」에서 ‘배치’라고 불리게 된다(김 영철, 2007). 그러나 배치가 공간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면, 계열은 시간적 함의를 가지고 있어서, 「의미의 논리」에서는 계열과 그 계열을 구성하는 사건, 그리고 그 사건에 부대 하는 것으로서의 시간이 중요한 주제로 된다. 그래서 이 책은, 「천 개의 고원」이라는 책 의 제목과 견주어, ‘천 개의 강물’이라고 제목을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전자에서는 배치가 고원이라는 비유로서 장(章)을 대신하고 있는 반면, 후자에서는 계열의 비유가 따 로 존재하지 않는다.

「의미의 논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사건’을 다루고 있다. “나의 모든 책에서 내가 연 구하려고 했던 것은 사건이었다.”, “나는 내 모든 시간을 이 사건의 개념에 대해 쓰면서 통 과했다(Deleuze, 1990; 이진경, 2002, p. 222 각주30에서 재인용).”고 들뢰즈 스스로 말 하듯 이, 그의 전 저작에 걸쳐 사건은 사유의 핵으로 작동한다. 그렇기는 해도 특별히 「의미의 논리」는 사건을 직접, 빈번히, 심도있게 다룬 독보적 저술이라 할 수 있다. 동일성의 존재 론을 차이의 존재론으로 맞대응 시키고자 했던 들뢰즈에게 사건은 전가의 보도 같은 것이 었을 것이다. 물론 사건의 개념을 들뢰즈가 처음으로 창안한 것은 아니다. 「의미의 논 리」에서 그가 공들여 천착하고 있는 스토아 학파의 사유가 이미 사건의 비물체적 존재성

2) 「앙띠-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은 들뢰즈가 피뢰침이라면 마치 번개와도 같았던 가타 리(Guattari)와 공동으로 집필한 저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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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그 위치를 창안했던 것이다. 스토아 학파는 ‘물체(somata)’와 ‘비물체(asomata)’의 경계 선을 획정하고 사건을 비물체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혁명적 사유를, 그리스 자연철학자와 플라톤주의의 전통 속에서 이루어냈다. 이처럼 사유의 역사는 연속성과 불연속성 또는 전 통의 계승과 반전통의 전통이 교차하면서 면면히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루어진다. 우선 2장에서는 「의미의 논리」에 개진된 사건의 존재론을 사건의 위치, 성격, 구성이라는 측면에서 논한다. 이 장의 논의는 사건이 주체를 생성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이러한 논의는 3장의 사건의 교육론을 논 하는 데에 배경적 장을 제공한다. 3장에서는 주체가 사건을 다루는 능동적 방식으로서의 반-효과화를 교육 목적으로 보고, 그 교육 행위로서 아이러니, 역설, 익살 등을 논의한다.

들뢰즈는 반-효과화의 인물들의 예로서, 스토아적 현자뿐만이 아니라 선사(禪師)를 언급하 고 있다(<의>, pp. 241-244, p. 256). 들뢰즈가 그랬듯이, 나는 이 선불교가 교육의 도드라 진 사례가 된다고 보고, 그 깨달음의 논리를 시론적으로 탐색해 보겠다. 그리고 4장 결론 부분에서 ‘선험적 경험론’으로 요약되는 들뢰즈의 사유의 위상을 교육학 논의와 관련하여 재론한다.

2. 사건의 존재론

이 장에서는 플라톤주의와 대결한 스토아 학파를 통하여 들뢰즈가 복권시키고자 한 사 건이 물체의 표면에서 순수하고 비물체적으로 존속/내속한다는 점을 설명하고, 계열적 구 조의 구성을 복계열성, 특이점, 우발점의 특징들을 중심으로 논의한 뒤, 계열적 구조의 발 생잠재력을 논한다. 여기서는 주체가 구조에 의한 효과라는 점과 더불어 주체를 형성하는 구조는 자연도 아니고 문화도 아닌, 이 두 영역이 절합된 발생적 접면이라는 논지가 전개 된다. 이로부터 사회화의 성격과 자연과 문화 사이의 교육적 지점이 드러난다.

2.1. 위치: 표면

삼라만상을 정지된 존재의 세계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유전하는 생성의 세계로 보는 것, 정지된 이법을 중심으로 보지 않고 타오르는 불길을 중심으로 보는 것, 요컨대 동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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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사유와 차이의 사유, 이 두 사유는 날카롭게 대립한다. 그렇지만 그 대립은, 수천 년을 독주해 온 동일성의 사유 이외에 차이의 사유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만 알려진다. 스토아 학파는 에피쿠로스 학파, 신플라톤 학파, 회의주의 학파, 기독교 사상 등과 더불어 헬레니즘 시대를 풍미한 일군의 철학자들을 지칭한다. 들뢰즈가 보기에 그들 은 사건을 새로 발견했다기 보다는 파면되었던 사건을 복권시켰다. 사건의 복권이 무슨 의 미인가 하는 것은 스토아 학파가 플라톤 철학과 어떤 지점에서 대결하였는가 하는 것에서 부터 설명되어야 한다.

들뢰즈는 플라톤의 이원론의 비밀스러운 참모습은 소위 ‘가시계’[감각적인 것들의 세계 또는 복사본들의 세계] 내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달리 말하여 플라톤의 내밀한 의도, 즉

‘선별하려는 의지(<의>, p. 405)’는, 원본(이데아, 형상)과 복사본(에이돌론) 또는 가지계와 가시계를 구분하는 데에 있지 아니하고, 진짜 복사본(에이콘)과 가짜 복사본(시뮬라크르)을 구분하여 가짜 복사본을 추방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가짜 복사본들에 대한 진짜 복사본의 승리를 확보하는 것(<의>, p. 412)’을 철학적 사명으로 삼았다. 왜 플라톤은 시뮬라크르를 ‘가짜’라 부르며 추방하고자 했을까? 왜 그것을 악마적인 것으로 보고자 했 을까?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플라톤이 한 질문처럼, “털이나 때, 진흙 같은 것들에까지 형상이 존재할까? 아니면 끝내 형상을 거부하는 무엇이 존재하는 것일까?(<의>, p. 55)”

‘시뮬라크르’는 플라톤의 고유의 개념인 ‘이데아’에 포섭되지 않는 것들이다. 그것은 오 직 유사한 것만이 다르다는 동일성의 모델을 벗어나는 것이다(<의>, p. 416). 이에 반하여 오직 차이나는 것들만이 유사하다는 차이의 모델은 수천 년 동안 억압되고 배제되었던 시 뮬라크르를 복권시키려고 한다. 이것이 들뢰즈가 스토아 학파에 기대어 플라톤을 전복시키 려는 의도이다. 마치 투사처럼 들뢰즈는 외친다. “시뮬라크르들을 기어오르게 하라. 그리고 도상들과 복사본들 사이에서의 그들의 권리를 긍정하라(<의>, p. 417).”

들뢰즈는 스토아 학파가 플라톤의 전복을 최초로 시도하였다고 보며(<의>, p. 55), 이 스토아 학파에 의지하여 심층에서 기어오르는 시뮬라크르를 물체의 표면 또는 비물체적 표면에 위치시키면서 그것을 물체의 효과로 취급한다. 스토아 학파는 사물을 ‘물체’와 ‘비물 체’라는 두 종류로 나누며, 각각에 ‘원인’과 ‘준원인(quasi-cause)’이라는 새로운 인과관계를 설정한다.3) 비물체는 시간, 장소, 공허, 렉톤(lekton, 언어로만 표현되는 것) 등 네 가지인 데, 들뢰즈는 이것들을 ‘사물이나 사태’가 아니라 ‘사건’이라고 부른다(<의>, p. 50). 이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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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에 실존하는 것은 물체들일 뿐이고 사건은 실존하는 것은 아니지만, 잠재적으로 존속하 거나 명제 속에 내속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사건의 비실존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생은 사건의 연속이고, 우리 삶에서 사건보다 중요한 것은 없을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 삶의 오 묘함과 다채로움을 담고 있는 사건이 물체의 표면에 존속/내속하는 것인 한, 그것은 참으 로 심오한 것일 수 있다. 발레리(Valery)의 말처럼, “가장 심오한 것은 피부이다(<의>, p.

59에서 재인용).”

들뢰즈에 따르면, 플라톤 철학이 ‘날개’를 달고 하늘로 올라가 천상의 신에게 ‘개종 (conversion)(<의>, p. 232)’했고, 자연철학자들이 ‘망치(hammer-blow)’를 가지고 세계를

‘전복(subversion)(<의>, p. 232)’시키고자 했다면, 이제 스토아 철학은 ‘방망이(staff-blow)’

를 가지고 ‘탈주(perversion)(<의>, p. 238)’의 사건을 원한다고 한다.4) 이제 플라톤 철학자, 자연철학자 그리고 스토아 철학자라는 세 가지 철학자의 이미지가 드러난다. 들뢰즈의 표 현대로, ‘저 높은 곳(천상)의 아폴론, 바닥(지옥)의 디오니소스, 그리고 표면(대지)의 헤라클 레스(<의>, pp. 236-237)’, 또는 ‘플라톤의 날개, 엠페도클레스의 납으로 된 신발, 그리고 안티스테네스와 디오게네스의 이중외투(<의>, p. 238)’가 그것들이다. 들뢰즈는 이데아는 말할 것도 없고, 물질로도 환원되지 않으면서, “발생하는 모든 것, 말해지는 모든 것은 표 면에서 발생하고 말해진다(<의>, p. 237).”고 하는 스토아 철학에 깊이 공감한다. 이에 비 해 천상으로 날아오르려는 ‘플라톤적 날갯짓’과 동굴보다 더 깊은 곳을 파헤치는 ‘자연철학 자의 망치’, 즉 그 ‘높이와 깊이’에는 고유한 질병이 있다고 본다(<의>, p. 232). 들뢰즈는 높이의 철학인 플라톤 철학이 ‘편집-우울증적(manic-depressive)’인 병을 앓고 있으며(

<의>, p. 231), 깊이의 철학인 그리스 자연철학은 ‘분열증(schizophrenia)’을 앓고 있다고 본

3) 사건의 ‘비물체적 원인’ 또는 ‘준원인’의 특징을 들뢰즈는 ‘이중인과(double causality)’라고 부른 다. “하나는 사건의 원인인 물체들의 조합이고, 다른 하나는 사건의 준원인인 다른 사건이다(

<의>, p. 181).” 준원인은 물체적인 원인과는 달리, 비물체적 원인이며, 물체의 능동과 수동에 따 른 원인-결과를 ‘은유적인 방식(<의>, p. 180 각주1)’으로만 닮은 원인이다. 사건의 비물체성은

‘연약성(<의>, p. 180)’, 즉 부서지기 쉬운 성질을 띠고 있는데, 이 말은 사건이 물체적 인과에 비해 가변적 인과관계를 갖고 있으며, 때로 물체적 인과관계로 흡수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 다.

4) 들뢰즈는 덕산 선사의 방망이질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나의 판단에 따라 ‘회심’은 개 종으로, ‘일탈’은 탈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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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의>, p. 233).5) 새로운 유형의 철학자로서의 스토아 철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이데아들을 파면시키는 것이고, 비물체적인 것이 높은 곳에 있지 않고 표면에 있다는 것, 비물체적인 것은 가장 높은 원인이 아니라 다름 아닌 물체의 표면효과라는 것, 그것은 본질이 아니라 사건이라는 것(<의>, p. 234)”이다. 플라톤 철학은 현실의 사건, 즉 시뮬라 크르를 침묵시키고 천상의 이데아를 내세웠지만, 여기에서는 어떤 일자(一者)의 폭력과 ‘일 종의 신비화(<의>, p. 233 주1)’의 기도가 감지된다. 한편 자연철학자들은 심층에서의 ‘소름 끼치는 혼합물(<의>, p. 236)’만을 인정하여 식인풍습이나 근친상간을 추악하다고 보지 않 는다. 여기에는 어떤 야수적 잔혹성, 섬뜩함이 있지만, 그 진솔성을 높이 살 수 있다. 들뢰 즈는 스토아 학파가 플라톤 철학의 이데아를 물체의 표면효과로 끌어내리면서, 동시에 ‘자 연철학적 세계관을 총체적으로 재평가(<의>, p. 237)’하였다고 말한다. 스토아 학파에 의하 여 플라톤 철학은 총체적 재정향을 겪으면서 이데아의 추락을 겪지만, 자연철학은 비물체 적 표면의 밑바닥에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된다.

2.2. 성격: 순수

비록 물체와 동일한 방식으로 실존하지는 않으나, 마치 표면장력이 작용하는 물의 표면 처럼, 물체의 표면에 존재하는 사건의 성격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여기 유리컵이 하나 있 다. 그 컵이 떨어져 깨졌다고 하자. 깨진 컵이라는 사물의 상태가 우선 존재한다. 다음으로 설거지를 하다가 바닥에 컵이 떨어져 깨졌다고 하면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깨 진 컵이라는 사물의 상태와 컵이 깨졌다는 사실에 머무를 뿐, 그 이상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라는 사건적 질문의 답이 될만한 의미를 묻게 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나라에서

5) 분열증은 니체(Nietzsche)와 고호(van Gogh) 그리고 아르토(Artaud)와 같은 천재들이 앓았던 정 신병이다. 들뢰즈는 ‘신체의 심층에서 마름질되는 아르토의 언어’를 ‘표면에서 발출되는 캐럴의 언어’와 대비시키지만(<의>, p. 167), 아르토의 심층적 언어를 캐럴(Carroll)의 표면적 언어보다 높이 평가하는 것 같다. “우리는 캐럴의 모든 저작들과 아르토의 한 페이지를 바꾸지 않을 것이 다(<의>, p. 179).” 한편, ‘편집-우울증’으로 번역된 플라톤 철학의 특징적 정신병은, 편집증 (paranoia)이라기보다는, 광증(mania)과 우울증(melancholia)의 조합일 것이다. 라캉(Lacan)의 용 법으로 광증은 결여를 모르는 과도한 나르시즘을 가진 경우이고, 우울증은 결여를 채울 것을 갖 지 못한, 상상계적 공허에 빠진 경우이다(김영철, 2005, p.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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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결혼식 때, 신랑과 신부가 합환주를 마시고 그 잔을 바닥에 던져 깨뜨리는 풍습이 있다 고 하거니와, 바로 이 지점에서 사건이 개입하며, “컵이 왜 깨졌는가, 또는 그것을 왜 깨뜨 렸는가?”라는, 다만 국외자의 관점에서 제기될법한 사건적 질문이 성립한다. 사건은 사물의 표면효과 또는 효과화이기는 하지만, 사물로 환원되지 않는 관념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 서의 사건은 ‘순수사건(ideal event, <의>, p. 121)’이라 불린다. 이때 ‘순수’는 탈물질적이면 서 이념적인 사건의 특성을 지칭하는 것이다.6)

사건은 그 자체로 비물체적인 순수사건을 말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물체와 더불어 효과 화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현실화된 사건(현실사건)과 잠재적이고 순수한 사건(잠재사건)을 구분할 수 있다. 이 두 사건의 존재방식은 다르다. 현실사건은 물체를 동반하여 현실에 ‘실 존한다(exist)’면, 잠재사건은 현실사건의 이면에, 물체의 표면에 ‘존속한다(subsist)’.

물체와 관련해서는 ‘현실사건-잠재사건’이 구분되지만, 명제 또는 언표와 관련해서는

‘현실사건-언표사건’이 구분된다. 현실화하거나 발생하지 않아도 현실화하고 발생할 잠재적 역량을 가진 것으로서의 ‘잠재사건’과는 달리, 현실사건이 명제 또는 언표를 동반하게 되면, 이때 명제 또는 언표 속에 ‘내속하는(insist)’ 사건을 ‘언표사건’이라 부를 수 있다. 여기에서 순수사건, 잠재사건, 언표사건의 차이를 적시할 수 있다. 즉, 사건은 잠재적으로 존속할 때 에는 잠재사건으로, 언표 속에 내속할 때에는 언표사건으로 부를 수 있으며, 순수사건은 잠재사건과 언표사건을 통칭한다.

언표사건과 잠재사건의 구분과 관련이 중요한 것은 ‘의미’는 ‘무의미’와 표리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 있다.7) 들뢰즈는 “사건을 한 사태에서의 그것의 시공간적 현실화와 혼동하지 않는 한에서 의미가 사건이 되는 것(<의>, p. 78)”이라고 한다. 즉, 의미로서의 언표사건, 그리고 무의미로서의 잠재사건은 현실사건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언표사건은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 사건이다. 한편 잠재사건은 어떠한 의미로도 파악될 수 있는, 복수 의 잠재적 의미들을 가진 무의미적 사건이다. 어떤 의미든 다양한 의미가 잠재적으로 공존 하는 무의미의 장으로부터 발생한다고 할 때, 이때 의미는 언표사건으로, 무의미는 잠재사 건으로 바꾸어 쓸 수 있다. 그런데 이때 ‘무의미’는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6) 동일한 불어의 ‘idḗal’을 이정우는 ‘탈물질적’으로 번역하고(<의>, p. 121), 이진경은 ‘이념적’으로 번역한다(이진경, 2002a, p. 343 주16). 다 일리가 있다. 이 글에서는 ‘비물체적’으로 쓴다.

7) 그 중요성은 사건의 구조(2.3.1.)에서 논의될 ‘특이점’과 ‘우발점’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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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의미는 무의미에서 솟아오른다. 무의미는 텅 빈 것, 공허, 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 은 의미가 바글바글 대는 잠재적 의미들의 층위이다(이정우, 2003, p. 136 주14).”

그런데 의미는 명제 그 자체와는 달리 “명제로 표현된 것 또는 표현 가능한 것이며, 동 시에 사태의 부대물이다(<의>, p. 78).” 여기에서 명제로 표현된 것 또는 명제로 표현 가능 한 것은 언표사건이고, 사태의 부대물은 잠재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면, 결국 ‘의미는 명제 사건이면서 잠재사건이고 나아가 의미는 무의미이다’라는 역설적 결론에 이르게 된다. 언 표사건과 잠재사건이 ‘공현존(共現存, co-present, <의>, p. 149)’하며, ‘무의미는 의미의 안 감(이정우, 2003, p. 272)’인 것이다.

2.3. 구성: 구조와 발생

2.3.1. 구조: 계열, 특이점, 우발점

사건은 비물체적 표면에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되,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 건 간의 준원인적 ‘계열(series)’ 속에 존재한다. 계열은 순수사건으로서의 ‘특이점(singular point)’이 계기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A-B-C라는 계열과 D-E-F라는 계열이 있다고 하면, 각 알파벳 A, B, C, D, E, F는 사건의 자리이며, 그 계열은 순수사건이 연결된 어떤 직선 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들뢰즈에 따르면 계열의 현실적 구조는 다음 세 가지 요소를 필수 적으로 요청한다(<의>, pp. 118-119). (1) 적어도 두 개의 소계열, (2) 반복하면서 의미를 주는 특이점[특이성의 사건, 명제사건], (3) 차이를 만들면서 무의미로 기능하는 우발점[우 발성의 사건, 잠재사건, 역설적 요소, 빈 칸이자 과잉인 심급-x].

계열이 현실화되려면 왜 항상 두 개 이상의 소계열이 있어야 하는가? 계열의 현실화에 관해서 들뢰즈는, “적어도 두 계열의 동시성 내에서만 필연적으로 현실화된다(<의>, p.

99).”고 말한다. 여기에서 ‘적어도 두 계열’이라는 것은, 모든 현실화된 계열로서의 계열화 는 ‘복계열적(multi-serial, <의>, p. 99)’이라는 뜻이다. 또한 ‘동시성’이란 소계열들이 합언 (연결접속, connection), 연언(통접, conjunction), 선언(이접, disjunction) 등의 연결방식에 의해 관련된다(<의>, 계열7 참조)는 뜻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현실화된다’는 것은 계열 화로 인한 준인과관계가 설정된다는 것이다. 계열화에 대한 생각을 전개함에 있어서 들뢰 즈는 스토아 학파 보다는 라이프니츠(Leibniz)의 사유에 의존한다. 그 이유는 스토아 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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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사건에 대한 이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사건들 간의 관계를 물리적 인과관계로 환원시키 고자 하는 충동과 더불어 사건들 간의 양립불가능성을 개념적, 논리적 모순으로 취급하려 는 충동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 있다. 들뢰즈가 보기에 라이프니츠는 사건을 물질로 환원 시키지 않으면서 개체, 주체(인칭) 그리고 개념 이전의 수준에서 순수사건의 계열화를 사 유한 최초의 철학자였다(<의>, p. 292).

라이프니츠는 ‘세계(Umwelt)’가 계열들의 수렴에 의한 체계라고 정의한다(<의>, p.

205). 즉 세계는 둘 이상의 계열이 만날 때 형성된다. 예컨대, ‘종이개구리의 세계’는 ‘종이 개구리가 되기 위해 접혀질 한 장의 종이의 잠재적 선이라는 모나드’와 ‘종이개구리를 접 기 위해 따라야 할 손의 잠재적 동작이라는 모나드’가 수렴할 때 형성된다. 접히는 종이개 구리 모나드와 그것을 접는 손 모나드가 만나 종이개구리의 세계가 형성되고, 이 세계로부 터 종이개구리라는 개체가 탄생한다. 이처럼 세계는 모나드들과 개체를 매개한다. 실낙원 (失樂園) 또는 아담이 죄를 짓는 세계는 아담이라는 모나드와 하와라는 모나드, 무화과라 는 모나드, 뱀이라는 모나드 등이 수렴할 때 성립하며, 죄를 지은 아담이라는 개체는 이 세계의 산물이다. 요컨대 모나드는 계열이자 설계도요, 세계는 모나드들의 수렴이며, 개체 는 이 수렴의 결과이다.

라이프니츠는 “모나드가 세계를 표현한다(<의>, p. 207).”라고 말하는데, 이는 하나의 모나드가 다른 모나드와의 수렴까지도 잠재적으로 품고 있다는 뜻 같다. 마치 모나드 하나 하나는 거울처럼 다른 모나드를 비추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하나의 모나드가 세계 로, 나아가 개체로 표현되는 데에는 ‘수렴’이라는 종합규칙이 요청된다. 하나의 종이는 종이 개구리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지만, 꼭 종이개구리라는 세계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구겨 버려질 수도 있고 종이학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나드와 세계, 즉 잠재성과 수렴은 엄연히 구분된다.8)

8) 그래서 “신은 아담이라는 죄인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아담이 죄를 짓게 되는 세계를 창조한 것 이다(<의>, p. 207 주1).”라는 말이 의미를 갖게 된다. 즉, 신은 아담이 죄인이 되도록 창조한 것 이 아니라,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담이 죄를 지은 세계와 아담이 죄를 짓지 않은 세계라는 모순된 두 세계는 모두 가능한 세계 이지만, 라이프니츠의 개념으로서의 ‘공가능성(compossibility, <의>, p. 208)’이 없다. 다 가능한 세계이나 함께 가능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아담이라는 모나드가 죄를 짓는 세계를 표현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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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계열을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특이점’을, 그 특이점과 분리불가능한 내재적 요소로 서의 ‘우발점(aleatory point)’과 더불어 설명해보겠다. 특이점은 보편적인 것이나 일반적인 것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고 보통의 것이나 규칙적인 것에 반대되는 것이다(이정우, 2003, p. 187). 특이점은 급격히 변하여 질적 변화를 이루는 점을 말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특이 점은 그 점의 ‘충분히 작은 주변’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진 점으로서 그 특이점의 이웃에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면 그 점은 보통점에 불과하다(이정우, 2003, p. 194). 여기서 ‘충 분히 작은 주변’이라는 수식어는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다. 백분의 일 축척지도에서 구불 구불한 도로는 백만분의 일 축척지도에서는 거의 직선으로 보일 수 있지만, 백만분의 일 축척지도에서도 꺾여진 점이 있다면 그것은 특이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극단 적으로 정확성을 기한다면 수학적으로 무한대분의 일 축척지도를 상상해 볼 수도 있을 것 이다. 예컨대, 종이개구리의 경우에 그 접히는 선이 특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선에서 색종이는 종이학, 종이백합이 아닌 종이개구리로 된다. 또 빙점 강하든 비등점 상승이든 섭씨 0도에서 얼거나 녹고 섭씨 100도에서 기화되거나 액화되는 물의 특이점이 있다. 살인 사건이든 자살사건이든 거기에는 항상 ‘죽이는 자-죽는 자-관계자’라는 특이점들이 있다.

누군가 죽는 사건은 어찌 보면 흔한 일이고, 또 사건은 구조적으로 반복된다. 이런 점에서 특이성은 반복되는 언표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반복성으로 말미암아 사건에 대한 개 념적이고 일반적 논의가 가능하게 된다.

한편 우발점은 어떤 것일까? 이것은 ‘빈 칸’과 ‘과잉’의 뜻을 동시에 함축하는 역설적 요소이다(<의>, p. 540 이하). 빈 칸은 특이성의 장에서의 어떤 위치에 고정되어 있지 않 고 떠돈다는 뜻을, 과잉은 어떠한 사건도 발생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남아도 는 대상으로서의 뜻을 갖는다. 이것은 비어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 단, 머물 지 않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발점은 잠재사건으로 불릴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 을 찾는 곳에 존재하지 않으며, 역으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발견된다(<의>, pp.

541-542).”

그 모나드가 그 방향으로 ‘신체와 조합되는 명료한 특이성(<의>, p. 208)’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이다. 마치 우리가 바닷가에서 모든 물분자, 모래분자의 서걱거림을 온몸으로 느끼지만 명료하게 지각하는 것은 파도소리일 뿐인 것과 같이, 아담이라는 모나드에게는 무화과를 먹는 잠재적 사 건이 명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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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계열의 현실적 구조를 식별하게 하는 구조의 ‘구멍 뚫린 장소(<의>, p. 547)’, 즉 우발점의 예를 무수히 든다. 그 중에서 우발점으로서의 ‘심급-x’라는 것은 예컨대 포 (Poe)의 단편소설 잃어버린 편지에서의 ‘편지’에 해당한다.9) 들뢰즈는 “심급-x에 관하여, 그것이 우리가 찾는 곳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역으로 그것이 있는 곳에서는 찾지 못 한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의>, p. 105).”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왕과 경감과 같이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시선의 인물들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닌가? 아니다. 편 지를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했던 여왕은 장관에게 편지를 도난당하고, 편지를 소유했다고 생각하자마자 장관도 뒤팽에게 편지를 도난당한다. 뒤팽은 돈을 받고 경감에게 편지를 넘 긴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동안, 그 누구도 편지를 소유하지 못한다. 도대체 아무도 갖지 못 하는 이 환영과 같은 편지는 무엇인가? 누구나 소유하고자 욕망하지만 아무도 갖지 못하 는 것, 과잉과 결핍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 편지, 즉 심급-x의 특성이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운동하는 ‘과잉’의 충만한 대상이면서, 자리 없이 존재함으로써 모두의 욕망을 추동하는 ‘빈 칸’의 결핍된 대상인 것이다(<의>, p. 105).

이 우발점으로서의 편지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계열 사이를 끊임없 이 순환하면서 그 계열들의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의>, p. 104). 잃어버린 편지에 드러난 두 계열, 즉 여왕-왕-장관 계열과 장관-경감-뒤팽 계열은 동일하지 않다. 앞 계열이 ‘권력 암투 계열’이라면, 뒷 계열은 ‘복수극(復讐劇) 계열’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장관이 여왕의 편지를 훔친 것은 여왕의 권력을 장관이 시기해서였다면, 뒤팽이 그 편지를 다시 훔친 것

9) 라캉의 논문모음집인 에끄리의 첫 논문은 포의 잃어버린 편지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연구물이다 (Lacan, 1966/1972/1994, pp. 96-134). 나는 이 논문과 이에 대한 들뢰즈의 논의(<의>, p. 101 이 하)를 함께 참고 하였다. 포의 잃어버린 편지의 요약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여왕은 왕이 알면 안 되는 편지를 받는데, 그 때 왕이 들어온다. 그녀는 편지를 그냥 탁자 위에 드러내놓는 방식으 로 숨긴다. 그러나 그 방식을 아는 장관은 그것이 중요한 편지임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호주머니 에 있던 편지를 꺼내 몰래 바꿔친다. 여왕은 경감에게 편지를 찾아달라고 호소하고 경감은 장관 이 없는 사이 집안의 숨길만한 곳을 샅샅이 뒤진다. 그러나 그 편지를 찾지 못한 경감은 탐정 뒤팽에게 의뢰하고 그 때까지의 얘기를 들은 뒤팽은 장관이, 여왕이 한 것처럼 편지를 드러내놓 는 방식으로 숨겨 놓았을 것을 알기에 장관이 훔치는 방식으로 편지를 훔친다. 그는 돈을 받고 그 편지를 경감에게 건넨다. 편지의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 내용은 무엇이어도 상관없으 며, 또한 무엇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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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단지 돈 때문이 아니다. 두 계열은 동형적 반복인 듯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두 계열 은 비평형적인 것이어서 “동시적인 두 계열을 지배하는 법칙은 다르다(<의>, p. 100).” 뒤 팽은 장관에게서 편지를 훔친 뒤에 바꿔 놓아둔 편지에 자신의 필적으로 이렇게 써놓았다.

“이런 무참한 계획은 아트레에게는 적당치 않을지 몰라도 디에스트에게는 어울릴 것이다 .”10) 뒤팽은 한때 장관에게 당한 모욕을 이번 편지 도난 사건을 계기로 설치(雪恥)한 것이 다. 권력암투 계열과 복수극 계열은 여왕의 편지가 순환하면서 서로 소통된다. 우발점으로 서의 잠재사건은 다양한 계열화(의미화) 잠재성을 띤 사건이다. 정확히는 소계열들의 합언 적, 연언적, 선언적 종합을 이루는 지점으로서, 수렴되는 계열들의 접점이다. 계열들이 어디 에서 어떻게 언제 만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므로 우발점은 그 위치가 지정될 수 (assignable) 없으나, 이러한 우발점이 존재하지 않는 특이성의 장은 없다. 아니, 오히려 우 발점이 특이성의 장을 특징짓는다(<의>, p. 104).

2.3.2. 발생

들뢰즈의 라이프니츠 해석에 따르면, 잠재성으로서의 ‘세계’가 ‘개체’(실물 종이개구리, 죄를 지은 아담)로 표현 또는 효과화되고 나면, 그 위에 두 번째 층위로서의 ‘주체’와 ‘인 칭’이 정초되고 발전된다. 이를 요약하여 이정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의>, p. 211 주

**).

주체는 주체이기 이전에 개체이다. 그리고 개체는 객관적 선험의 장 안에서 형성 된다. 개체는 객관적 선험을 구성하는 특이성들의 수렴에 의해 형성되며, 이 개체가 주체로 되는 것은 그렇게 형성된 개체들의 세계(Umwelt)를 이루는 계열들을 가로지 르면서 또 다른 독자적 개체성을 형성할 때이다. 철수는 특이성들의 일정한 계열화를 통해 형성된다. 그리고 철수는 이렇게 형성된 세계를 가로지르면서, 즉 또 하나의 세 계(Welt)를 형성함으로써 주체가 된다.

10) 크레비용의 아트레에 나오는 구절이다. 아트레 왕은 왕비가 그녀의 연인이며 자신의 형인 디에 스트에게 쓴 편지를 훔친다. 그 편지에는 아트레 왕의 아들 프리스테네가 사실은 형 디에스트 의 아들이라는 내용이 써 있다. 아트레는 왕비를 유혹하여 형 디에스트에게 프리스테네를 요리 하여 대접한다(Lacan, 1966/1972/1994, p.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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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주체는 우리의 유한한 인식한계로 인하여 애매모호하다. 들뢰즈는 이 애매함 과 모호함을 불사하고 인식하고자 하는 주체를 ‘인칭’이라고 부른다(<의>, p. 214). 이 인칭 의 질서 안에서 다시 ‘속성들과 집합’으로서의 개념군이 정초된다(<의>, p. 215). 에덴동산 에 있던 무화과라는 집합은 무화과 아닌 과일, 에덴동산에 없는 과일과도 구분될 수 있다.

나라는 인칭은 너나 그와는 다른 속성과 집합이며, 우리라는 인칭은 너희나 그들과는 다른 속성과 집합이다.

이제까지 들뢰즈가 라이프니츠에 의지하여 설명한 것은 계열들로 이루어진 전개체적, 비인칭적, 전개념적 장이 개체, 인칭, 개념들을 발생시킨다는 점이었다. 이 단계의 발생을 들뢰즈는 ‘정적 발생의 존재론(<의>, 계열16)’이라 부르며, 그 이후에 기호작용, 지시작용, 현시작용으로 드러나는 명제적 표현의 발생을 ‘정적 발생의 논리학(<의>, 계열17)’이라고 부른다.11) 그러나 계열들의 선험적 장은 물체의 ‘효과’에 불과한 것, 수동적인 것, 발생된 것이었는데 어떻게 이러한 수동적 효과에 불과한 것이 개체, 인칭, 개념, 그리고 여러 표현 작용을 능동적으로 ‘발생’시킬 수 있는가? 후설(Husserl)에게도 제기되었던 이 질문이 들뢰 즈에게 다시 심각하게 제기된다.

비물체적인 것으로서의 계열은 ‘연약성(fragility, <의>, p. 180)’, 즉 상대적으로 부서지 기 쉬운 성질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체에 대하여 ‘자율성(autonomy, <의>, p. 181)’

을 갖는다. 들뢰즈는 계열의 자율성이 가지고 있는, ‘비생산성과 발생’ 또는 ‘논리적 원리와 선험적 원리’라는 두 모순된 측면의 화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의>, pp. 183-184). 이 자 율성은, 계열이, 아래로는 사태들, 물체들로부터 자율성을 띤 준원인들의 관계의 성격과 더 불어, 위로는 언표(명제)들에게 중성적이라는 뜻을 동시에 갖는다. 요컨대 계열의 자율성은 사태와 관련하여 ‘되돌릴 수 없음(impassibility, <의>, p. 182)’, 언표와 관련하여 ‘중성 (neutrality, <의>, p. 183)’이라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지는 바, 이를 한 마디로 ‘비생산성 (sterility, <의>, p. 185)’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계열에는, 자율성의 한 측 면으로서의 수동적인 비생산성과 모순되어 보이는 능동적인 발생이라는 다른 측면이 있다.

소위 ‘발생의 잠재력(power of genesis, <의>, p. 183)’은 준원인으로서 사태와 관련되는 힘 (세계를 창조-개체, 인칭, 개념을 형성-하는 힘: 정적 발생의 존재론)과 언표를 발생시키는

11) 후에 ‘동적 발생(<의>, 계열27 이하)’이라는 이름으로 설명되는 것은 물체로부터 효과(사건/의 미)의 발생 문제를 탐색하는 것이다. 본 논문에서 이 부분은 언급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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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지시, 현시, 기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힘: 정적 발생의 논리학) 모두를 뜻한다. 아마도 들뢰즈적 사유의 힘은 계열들의 장이 물체로부터 수동적으로 발생하면서 동시에 의미와 언표의 능동적 발생을 야기한다는 역설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을 것이다.

3. 사건의 교육론

이 장에서는 계열화의 장이 주체에 대하여 가지는 능동적 발생의 잠재력 내지는 그 효 과화와는 방향을 반대로 하여, 스토아적 현자들이 사건을 이해하고 스스로 사건이 되는 반 -효과화를 설명한다. 효과화는 구조가 주체를 형성하는 방향을 띠는 반면, 반-효과화는 주 체가 구조에 맞대응하는 방향을 띤다. 특히 여기서는 반-효과화를 교육 목적으로, 아이러 니, 역설, 익살을 교육 행위로, 그리고 선문답을 교육의 사례로 취급할 가능성을 탐색한다.

여기서는 주체가 구조에 대항하는 교육적 행위와 단계들을 논한다. 들뢰즈에 있어서 교육 적 행위는 언어를 실체화하거나 사물화하지 않으면서, 존재의 감옥으로서의 언어를 극복해 가는 행위자의 주체성을 드러낸다고 해석될 수 있으며, 그 행위의 의미와 단계들은 선불교 의 사례에서 전형적 형태로 발견될 수 있다.

3.1. 교육 목적: 반-효과화

스토아 학파에게 삶과 교육의 문제, 즉 도덕은 자연철학과 논리학(인식론) 사이에, 물질 의 차원과 언어의 차원, 또는 자연의 차원과 문화의 차원 사이의 경계면에 위치한다. 결국 스토아 학파가 보는 도덕의 문제는 사건의 계열화의 장, 들뢰즈의 용어로 ‘형이상학적 표 면(metaphysical surface, <의>, p. 228)’ 또는 ‘객관적 선험의 장(real transcendental field,

<의>, p. 204)’에서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 장이 물체의 표면효과이면서 동시에 발생의 힘 을 가지고 있는 한, 이 발생의 잠재력에 주체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교육학 적으로 제기된다. 스토아 학파에게 있어서의 도덕은 “발생하는 것으로서의 사건을 그것이 발생하는 한에서 원하는 데 있다(<의>, p. 251).” 발생하는 것에 따라 살기 위해서는 무엇 이 발생할 것인가를 예측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대에 와서는 과학에 의해 많이 대체되었지 만, 고대의 점(占)의 기능 중에서 중요한 부분이 신성한 의식으로서의 ‘예견(divination)’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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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예견은 ‘표면들 및 거기에 나타나는 선분들과 특이점들의 기법(<의>, p. 252)’으로서, 순수사건의 계열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계열화를 주체적으로 이해함으로써 현존의 효과화로서 발생하는 사건을 받아들이는 것이 스토아적 도덕이다.12) 이처럼 들뢰즈는 스토 아 학파가 순수사건과 합일되는 것을 현자(賢者)의 이상으로 삼았다는 측면에 주목한다.

들뢰즈의 말을 인용해 보자:

현자는 표면에서 무엇을 찾는가? 순수사건들을 찾는다. 그 영원한 진리에 있어, 즉 사태 내에서의 그 시공간적 효과화에 독립적으로 그들을 받쳐주는 실체에 있어 포착 된 순수사건들, 또는 같은 말이 되겠지만, 순수 특이성들을, 그들을 구현하거나 효과 화하는 개체들과 인칭들에 독립적으로 그 우발적 요소에 있어 포착된 특이성들의 유 출을 찾았다(<의>, pp. 241-242).

스토아적 현자는 자신을 준원인으로서의 순수사건과 동일시하는데(<의>, p. 256), 이 측면이 스토아 학파의 ‘논리학적 방법’이고, 들뢰즈가 강조하는 스토아적 도덕이다.

들뢰즈는 사건에는 두 가지 현실화 방식, 즉 두 가지 ‘효과화’가 있다(<의>, p. 262)고 본다. 그 하나는 ‘행위자의 효과화’이고, 다른 하나는 ‘사물 속에서의 효과화’이다. 부스케나 스토아의 현자처럼 순수사건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자신을 준원인의 위치에 놓는 행위가 전자의 예라면, 배아가 세포분열하는 사건이나 아이가 모국어를 학습하는 사건은 후자의 예이다. 전자의 경우, 순수사건이 현실적 사건으로 되는 효과화와는 거꾸로의 방향을 취해 서, 현실 행위자의 인칭적 차원으로부터 순수사건으로 합일해 들어가고자 한다는 점에서, 들뢰즈는 이를 ‘반-효과화( <의>, p. 263)’라고 부른다.

12) 이를 들뢰즈는 ‘논리학적 방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예견은 ‘우주적 현재로부터 아직 효과화되지 않은 사건으로 가게 되’는, 다시 말하여 ‘사건을 그 물체적 원인들과 그들의 물리적 통일성[섭리적 인과, providentia=fatum]에 결부([ ]는 필자)’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 를 들뢰즈는 ‘자연철학적 방법’이라고 부른다. 논리학적 방법은 ‘생산성과 효과성’에, 자연철학 적 방법은 ‘되돌릴 수 없음과 무차이’와 관련된다. 이것은 이중인과의 역설이자 질적 발생의 두 특성들과 상응한다. 들뢰즈는 스토아적 도덕이 이처럼 순수사건에 강조점을 두는 논리학적 방 법과 물체에 강조점을 두는 자연철학적 방법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한다는 골드슈미트 (Goldschmidt)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논리학적 방법을 택한다(<의>, pp. 25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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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런 경지는 어떤 단계를 거쳐 달성되는가? 여기에는 ‘사건이해’와 ‘사건실행’이 라는 두 단계가 있는데, 전자는 ‘표상’에서 순수사건의 ‘표현’을 읽어내는 것이고, 후자는 자 신이 순수사건의 실현 장소로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 두 단계를 스토아 학파에서는 ‘표 상의 선용(use of representation, <의>, p. 258)’이라고 한다.

스스로 순수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사건을 이해해야 하고, 그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건을 표상해야 한다. 그러나 사건은 원래 ‘표상’되지 않고 ‘표현’될 수 있을 뿐 이다. 예컨대 눈이 내리는 사건은 표상되지 않으며 다만 눈의 물체적 운동만이 표상되는 것이다. 사건은 항상 이미 지나간 것이거나 아직 오지 않은 역설적이고 순간적인 것이어서 표상할 수 없다. 그런데도 표상에서 순수사건의 표현을 읽어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토아 학파에 따르면, 표상에는 ‘자연이 보장하는 조화(principia naturalia, <의>, p. 254, 역주*)’가 있다. 즉 표상과 그것의 수용 간에는 어떤 ‘운명적’ 끈이 있어서, 영혼에 ‘각인’되 는 안정적 표상이 있다. 이것을 스토아 학파의 시조 키티움의 제논13)은 ‘포착적 표상 (comprehensive phantasia, <의>, p. 255)’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영혼의 상상이나 의지가 개입될 여지가 없는, 자연이 수용자를 수동적 수용의 상태로 강제하는 표상이다. 그런데

“표상은 그것이 표상하지 못하는, 그러나 그것 없이는 그 자체 ‘포착적’이 되지 못하는, 우 연적으로만 또는 바깥으로부터만 진리에 속하게 되는 하나의 표현을 포함(<의>, p. 255)”

하게 된다. 다시 말하여 사건/의미가 표상 가능한 대상이 아니라고 해도, 분명 그것은 표상 에 개입하는 것이다. 이처럼 표상에서 사건/의미를 읽어내는 것을 스토아 학파는 ‘사건을 기다’리는 것, ‘사건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한다(<의>, p. 257). 예컨대, 달마가 동쪽으로 온 사건, 부처가 깨달은 사건 또는 그 사건들의 의미는 표상될 수 없다. “부처는 마음이다.”라 고 말해 보아야 다시 “마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부딪힐 뿐이며, 이 마음은 표상되는 마음과 표상하는 마음으로 쪼개져서 온전히 표상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렇기는 해도 달 마나 부처에 대한 표상에는 그의 ‘서래의(西來意)’나 ‘깨달음’이라는 사건/의미가 개입되어 있다.

스토아의 현자는 표상에 표현된 사건/의미를 찾아낸 뒤, 자신의 삶을 그것과 합일시키 려고 한다. 이를 질문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어떻게 순수사건을 원하고 실행하여, 그

13) ‘제논의 파라독스’로 유명한 제논은 엘레아 학파에 속한다(이정우, 2003, p.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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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순수사건의 실현 장소로 되게 할 것인가? 그리하여 어떻게 우리는 “우리에게 발생 하는 것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의>, p. 261)”로 될 수 있는가? 예컨대 우리 모두에게 언젠가 오고야말 ‘인칭적 죽음’을 어떻게 ‘비인칭적 죽음’으로 대체할 수 있는가? 여기에서 문제는 ‘사건의 이중적 구조(<의>, p. 263)’, 즉 현실사건과 순수사건에 있어서의 관점의 이 동, ‘의지의 변화(<의>, p. 261)’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영원을 보는 것 이 아니라, 나를 영원의 관점에서 보는 것, 나의 의지를 영원의 의지로 바꾸는 것이 문제 이다. 내 몸이 아플 때, <그것>의 관점에서, ‘이것이 아파하는군. 이제 사대(四大)로 돌아갈 때가 되었는가 보다.’ 또는 내 마음이 아플 때, <그것>의 관점에서, ‘이것이 아파하는군. 그 렇지만 원래 본래 성품자리는 아프지 않아.’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여기에서 ‘<그것>’은, 들뢰즈에 따르면, 현재 뿐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도 현재로 볼 수 있는 크로노스(chronos)적 신이 아니라, 현재를 무한히 과거와 미래로 갈라 쳐내는 아 이온(aion)적 ‘반-신(反-神, anti-god)’, 즉 ‘행위자’ 자신이다(<의>, p. 262). 달리 말하여

<그것>은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한 신이 아니라, 결코 현재에 효과화되지 못하는, 순간적 사건을 사는 행위자 자신이며, 이 순간적 사건을 사는 것이 반-효과화이다. 우리는 현재를 살면서 과거와 미래를 다만 사유할 뿐이다. 그러면서 과거와 미래를 현재적으로 사는 신적 존재를 흉내내고 꿈꾼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행위자로서 과거와 미래로 갈라질 뿐 ‘현재 (now)’는 존재하지 않는 ‘순간(instant)’을 살고 있다. 끊임없이 미래와 과거로 분할되는 이 비인칭적 순간이 ‘사건의 시간’이며, 아이온의 시간이다. “누군가가 죽는다고 해도 결코 죽 기에 성공할 수 없다.”는 블랑쇼의 말(<의>, p. 264에서 재인용)처럼, 이 영원의 시간 속에 서 우리는 죽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음 그 자체가 됨으로써 죽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누구나 죽듯이 나도 죽는다는 식의 효과화와는 사뭇 다르다.

반-효과화를 매순간 실행하며 사는 스토아적 현자는 마치 연극배우처럼 자신의 역할을 산다. 이 연극배우는 과거의 회상과 미래의 기대에 끄달리는 ‘표상적 존재’이기보다는, 이 표상을 선용하여 사건/의미를 이해하는 ‘사건이해적 존재’이다. 더 나아가 이 현자는 순수 사건을 사는 사람, 자신을 순수사건이 실현되는 장소로 되기를 원하는 사람, 즉 ‘비물체적 효과를 물체화하기를 원(<의>, p. 257)’하는 ‘사건실행적 존재’이다. 이 말이 아마도 스토아 적 현자는 자신 스스로 우발점에 자리 잡는다는 말의 뜻일 것이다(<의>, p. 256). 이 현자 는 의도적으로 과녁을 응시하고 자신의 활로 과녁을 맞추려는 사수(射手)라기보다는,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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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과녁과 일체가 된 사수이다. “…순간을 그만큼 더 강도 높고 긴장되게, 그것이 한계 지어지지 않은 미래와 과거를 표현하는 만큼 더 순간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표상 의 선용이(<의>, p. 258)”자 ‘반-효과화’이다. 이처럼 순수사건과 합일되기 위해 순간을 강 도 높고 긴장되게 사는 사람과 그의 삶의 방식을 들뢰즈는 ‘무언극 배우’와 ‘무언극의 윤리 학’이라고 부른다(<의>, p. 258).

3.2. 교육 행위: 아이러니, 역설, 익살

3.2.1. 아이러니: 사변적 체계에서 마음으로 방향 돌리기

현실사건으로부터 순수사건을 이해하고 실행하는 반-효과화의 첫 시도는 ‘아이러니’이 다. 아이러니는 지식이 주체의 외부에 체계로서 겉돌지 아니하고 인칭적인 것으로 되게 하 는 것이다. 세계의 일부분으로서의 자아가 세계를 맞대면 하여 사변적 체계를 세우려는 사 변적 기도는, 마치 나무를 베어낼 수 없는 납으로 만든 도끼와 같으며, 배고프지 않은 사 람이 ‘밥’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서 자신의 내면에 관심을 돌리지 못한다. 사변적 기도는 사랑하는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이를 차갑게 거절하는 냉혹한 아이러니에 의하여 붕괴되지 않는 한 공허한 사상누각에 머무를 뿐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플라톤은 ‘말하는 것을 물체화하는(<의>, p. 239)’ 자연철학자와는 달 리, ‘언어를 실체화(<의>, p. 240)’하는 우를 범하였다. 또한 플라톤은 “예들을 열거하는 사 람들, 본질에 도달하기 보다는 단순히 가리키고 지시하는 사람들을 비웃었다(<의>, p.

240).”고 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플라톤이 주로 사용한 문답 기법을 들뢰즈는 “상승의 기 법으로서의 아이러니(<의>, p. 241)”라고 한다. 이것이 천상으로 비상하려는 ‘플라톤의 날 개짓’의 교육 행위적 측면이다. 이 방법은 헤겔 또는 키에르케고르식 용어로 표현하면 ‘무 한한 절대적 부정(임병덕, 1992, p. 21)’이다. 그러나 플라톤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적 해석이 소크라테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이 의문은 헤겔식 소크라테스 해 석으로부터 자신만의 소크라테스 해석을 내 놓는 키에르케고르의 경우에 두드러진다. 키에 르케고르의 저서 아이러니의 개념에 대한 주석에서 만하이머(Manheimer)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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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의 개념에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가 긍정적 결과 를 얻는 데에 회상이론을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아이러니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 플라톤적 해석에 의하면,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풍부 한 잠재적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나중에 현실적인 지식으로 된다. 그러나 소 크라테스에서는 그 방향이 반대로 되어서 현실적인 지식 전체가 아이러니로 말미암 아 점차 부정의 대상이 된다(Manheimer, 1977/2003, p. 69).

이렇게 보면 플라톤적 해석 또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헤겔적 해석과는 달리, 키에르케고 르가 보는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는 “한층 더 높은 인간적 진리, 즉 ‘실존한다’는 것이 무 엇을 뜻하는가에 관한 지식을 드러낸다(Manheimer, 1977/2003, p. 79).” 이 아이러니의 의 도는 무엇인가? 거기에는 배움을 갈망하는 젊은이들에 대한 ‘유혹’의 요소와 그 젊은이들 이 의존하려고 하는 마음을 매정하게 뿌리치는 ‘무화(無化)’의 요소가 공존하고 있다(임병 덕, 1992, pp. 24-25). 제자는 스승이 하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뇌인다. 이때 스승은 자신의 가르침이 교조화되는 꼴을 지켜보면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가? 우선적으로 취할 수 있는 스승의 태도는 제자가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돌아보도록 추동하는 것이다. 여기에 동원되는 교육적 조치가 아이러니이다.

들뢰즈는 “모든 형태의 아이러니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점은 그들이 특이성을 개체나 인칭의 테두리에 가둔다는 점이다(<의>, p. 246).”라고 말한다. 이것이 아이러니의 한계에 대한 들뢰즈의 관점이다. 그는 말하는 존재를 ‘개체’라고 부르는 담론을 ‘고전적 담론’이라 하고, 말하는 존재를 ‘인칭’이라고 부르는 담론을 ‘낭만적 담론’이라고 부르는데, 소크라테스 의 아이러니는 고전적 담론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나, 여전히 ‘개인’이 말하는 자가 된다고 하는 담론이라는 점에서 고전적 담론의 예비적 성격을 띤다고 본다(<의>, p. 244). 그러면 서 들뢰즈에게 있어서 말하는 주체는 개체나 인칭 이전에 존재하는 특이성의 장, ‘객관적 선험의 장’, ‘형이상학적 표면’, ‘4인칭 단수(fourth person singular, <의>, p. 249)’라고 한 다. 그러나 확신컨대, 개체나 인칭 이전의 장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개체나 인칭을 통과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아이러니는 사변적 체계를 벗어나기 위하여 개체나 인 칭으로 돌아가는 교육적 처방이다. 그러나 그 개체나 인칭은 아직 도정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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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역설: 마음을 해체하기

역설(paradox)이란 ‘두 방향을 동시에 긍정(<의>, p. 44)’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 가지 방향만 알고 있는 ‘양식(bon sens=doxa)’과 대비된다. 그런데 우리는 역설이 양식과 다른 방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두 방향을 동시에 취한다는 점에 주의하여야 한다(<의>, p.

158). 요컨대 역설은 반대, 저항, 일탈, 파적(破寂) 등이 아니다. 오히려 거기에는 거대한 빙 산의 폭발 잠재성이 있는 것이다. ‘paradox’에서 접두사 ‘para’는 차원을 달리 한다는 뜻이 있다. 진리를 경험적 수준에서의 언어로 말할 때 역설은 어쩔 수 없이 사용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역설은 차원을 달리하는 모순, 풀어 말하여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을 동일 한 차원에서 취급할 때 봉착하는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의미의 논리는 첫 계열 첫 문단부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역설적 얘기가 나온다 (<의>, p. 43). ‘앨리스가 커진다’라는 말을 할 때, 앨리스는 과거의 앨리스보다 더 크고 (she is larger now) 또한 동시에 앨리스는 지금보다는 과거에 더 작았다(she was smaller before). 더 크기도 하고 더 작기도 한 앨리스에 대한 이 두 진술은 모두 긍정된다. 이 말 은 예컨대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른다는 양식적 시간관념을 넘어, 시간은 과거로도 흐를 수 있다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생성의 동시성’이라는 역설이다.

“생성(devenir, becoming)은 역설의 본질에 속한다(<의>, p. 43).” 생성은 현재, 과거, 미래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한때 작았던 소녀가 이제 큰 소녀로 될 때 ‘커지는 소녀’는 어 디에 위치하는가? 순간순간 커지는 소녀는 작은 소녀라는 과거에도 큰 소녀라는 미래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면 현재? 현재는 앨리스의 한때의 스틸사진처럼 빛의 지속적 노출에 의한 정지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결코 움직이는 생성의 자리가 아니다. 차라리 커지는 소녀는 현재를 부단히 과거의 ‘더 작은 앨리스’와 미래의 ‘더 큰 앨리스’로 무한히 갈라쳐 나누고 분할하는 도정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생성이 사건과 완전히 동일한 것 은 아니지만, 그 역설적 성격만은 동일하다.

역설은 논리 차원에서의 모순을 넘어서려는 것이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키에르케 고르도 강조하고 있듯이, 역설은 “논리의 차원에 속하는 모순의 개념이 개인의 삶이라는 차원[실존]에서 표현된 것(임병덕, 1992, p. 64)”이다. 예컨대, 서로 사랑하는 두 남녀가 있 다고 해보자. 남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사랑이 진정한 것인지 아닌지 시험해보고자 한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라는 말로 된 질문은 이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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