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직업교육훈련 100년사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1

Share "직업교육훈련 100년사"

Copied!
1242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職 業 敎 育 訓 練 1 0 0 年 史

1998 . 12

(2)

우리 나라 근대 직업교육훈련은 1899년 상공학교의 설립을 시작으로 하여, 내년 이면 뜻깊은 100년의 역사를 지니게 됩니다. 직업교육훈련 실시 100주년을 맞아 과 거를 되돌아보면서 나름대로의 성과를 평가하고 다가오는 21세기를 대비하는 것은 우리에게 더욱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1999년에 우리 나라에서 개 최하는 직업교육훈련 100주년 기념행사에 즈음하여 직업교육훈련의 역사를 정리 발 간하여 보급하는 것은, 직업교육훈련의 의의를 살리고 국민들의 인식을 제고하기 위해 중요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나라는 직업교육훈련을 통하여 산업사회에 가장 중요한 인력을 공급해 줌으로써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숭문주의적 국민정서의 영향으로, 그 끼친 공적에 비해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 입니다. 직업교육훈련 체제를 보더라도, 우리 나름대로의 고유한 특색이 반영된 직 업교육훈련을 하기보다는 외국제도를 답습하거나 일시적인 편의를 추구하는 정책과 체제 속에서 이루어져 왔다고 볼 수 있으며, 이로 인해 많은 문제점이 노정되어 왔 습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점은 우리 스스로 직업교육훈련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중요한 장애요인이 되었으며, 국제사회 속에서 경쟁력 있는 인력을 육성하지 못한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생각되는 바입니다. 한편, 우리의 직업교육훈련은 정보화・세계화・지구촌화 속에서 국가의 발전을 이끌고 미래를 주도해 갈 능력있는 직업・기술인을 양성하기 위해 새롭게 변화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직업교육훈련은 사람다운 사람을 기르는 교육 , 지식・정보화・지구촌화 사회를 선도하는 교육 , 수요자 중심의 열린 평생교육 을 기본목표로 진행되고 있는 교육개혁의 달성을 위해서도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 있 습니다. 뿐만 아니라, 최근의 국가적 경제 위기와 사회구조적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서는 보다 적극적인 역할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보다 발전적인 교육체계를 수립하 기 위해서는, 우리 직업교육훈련의 한 세기에 걸친 노정을 정리하여 역사 속에서 발휘되었던 그 역량을 돌이켜보고, 현상을 객관적으로 재정리할 필요가 있다 하겠 습니다. 아울러 직업교육훈련의 미래지향적인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기여하고자 『직 업교육훈련 100년사』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3)

『직업교육훈련 100년사』의 발간은 직업교육훈련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의 숙 원 사업으로 특히, 직업교육훈련의 전 분야에 걸친 역사서를 발간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직업교육훈련 100년사』에서는 100년 전 근대적인 직업교육훈련이 시작된 이후 오늘날까지 수많은 시련과 개혁을 거치면서 거듭해 온 변화, 발전을 시대적인 흐름 과 관련하여 개괄적으로 회고하였습니다. 또, 지금까지 교육영역에서 추진해온 변화 와 그 결과들을 총론, 농업교육, 공업교육, 상업교육, 수산・해운교육, 가사・실업교 육, 직업훈련, 실업・가정교육(초등학교 실과교육, 중등학교 기술과 교육, 가정교육, 실업교육) 등 8편으로 크게 분류하여 정리, 평가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직업교육 훈련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과제와 전망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아무쪼록 이번에 발간한 『직업교육훈련 100년사』가 미래 사회에 필요한 당면 과제들을 효율적으로 해결하고 미래지향적인 체계를 수립하는데 매우 유용한 자료 로 활용되기를 바라며, 교육관계자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이 책이 널리 활용되 어 우리의 직업교육훈련을 이해하는데 길잡이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 동안 『직업교육훈련 100년사』가 발간되기까지는 한국농업교육학회, 공업교 육학회, 한국상업교육학회, 한국수산해양교육학회, 한국가정과교육학회, 한국직업교 육학회 등 우리 나라 직업교육훈련 관련 학회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음을 지면을 통하여 우선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각 관련 학회에서 선정되어 집필을 하 여 주신 집필위원 여러분과 바쁘신 가운데에서도 검토를 해 주신 검토위원 여러분 께도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끝으로 이 책을 편찬하여 주신 편찬위원께도 다시 한 번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1998년 12월

한 국 직 업 능 력 개 발 원

원 장

(4)

발간사

1編 총론

1

2編 농업교육

97

3編 공업교육

301

4編 상업교육

497

5編 수산・해양교육

667

6編 가사・실업교육

791

7編 직업훈련

881

8編 실업・가정교육

1015

8- 1. 실과 교육

1017

8- 2. 기술과 교육

1081

8- 3. 가정과 교육

1139

8- 4. 실업과 교육

1269

부록 1. 연표

1265

부록 2. 교육부 직업교육담당 직제 변천

1287

(5)
(6)

Ⅰ. 서 론 11 Ⅱ. 전통시대의 직업과 직업교육훈련 13 Ⅲ. 개화기의 직업교육훈련 28 1. 개화기의 정치・사회적인 변화 28 2. 개화기 교육정책의 변천 33 Ⅳ. 일제시대의 교육과 직업교육훈련 42 1. 일제하 식민지 지배정책의 변화와 조선의 상황 42 2. 일제하 식민지 교육정책의 변화 50 3. 직업훈련교육의 내용과 실태 56 Ⅴ. 광복 이후의 사회와 직업교육 훈련의 재정비 62 1. 1940・1950년대 한국사회의 전개 62 2. 교육정책의 변화와 직업교육훈련 66 Ⅵ. 경제성장과 직업교육훈련의 발전 71 1. 1960・1970년대 한국사회의 전개 71 2. 교육정책의 변화와 직업교육훈련 75 Ⅶ. 교육이념의 다변화와 직업교육훈련의 전환 80 1. 1980・1990년대 전반 한국사회의 전개 80 2. 교육정책의 변화와 직업교육훈련 82 Ⅷ 직업교육훈련의 전망과 역사적 의의 90 1. 직업교육훈련의 역사적 의의 90 2. 직업교육훈련의 전망 91 참 고 문 헌 94

(7)

< 표 Ⅱ- 1> 고려의 기술직 종류와 선발과목 16 < 표 Ⅱ- 2> 조선시대 잡학의 교육 내용 20 < 표 Ⅳ- 1> 실업계 학교 일람 57 < 표 Ⅴ- 1> 미국이 제공한 각 원조의 품목별 내용 (1945~1961) 65 < 표 Ⅵ- 1>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실적 71 < 표 Ⅵ- 2>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실적 72 < 표 Ⅵ- 3> 중화학공업 비중의 증가 74 < 표 Ⅶ- 1> 연도별 수입자유화 예시계획 81 < 표 Ⅶ- 2> 고등학교 직업기술교육체제 개편사업의 주요 추진 실적 84

(8)

Ⅰ . 서 론

직업기술교육・훈련이라는 용어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리고 관장하는 기관 및 교육기관에 따라 각각 다르게 정의되어 왔다. 1960년대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의 시작과 함께 1970년대까지는 실업교육 또는 산업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산업인력, 특히 중화학 공업에 필요한 기능인력 양성에 주력하였다. 1980년대부터는 학교교육 체제를 통한 직업교육의 개념이, 특히 경제발전에 필요한 공업인력의 양성이라는 의미로 널리 통용되었다. 1996년 교육개혁위원회에서는 평생교육의 차원에서 학생 중심의 직업교육과 근로 자 중심의 직업훈련을 통합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직업교육 혹은 직업교육훈련이라 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결국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실업교육・산업교육 → 직업기술 교육 → 직업교육・직업교육훈련으로 용어의 변천이 이루어져 왔다1). 직업교육훈련은 넓은 의미로는 교육의 직업적 측면, 즉 개인이 자신의 적성・흥 미・능력에 맞는 일을 선택하고, 그 일에 필요한 지식・기능・태도・이해 및 판단 력과 일에 대한 습관 등을 개발하는 총체적 교육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 에서 교사・의사・변호사・컴퓨터프로그래머・농업・제조업 근로자 등의 직업인을 양성하는 교육이 모두 직업교육 혹은 직업교육훈련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는 전문대학 이하의 학력을 요구하는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데 필요 한 지식과 기능을 습득시킬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실업교육・기능기술교육・직업교 육・직업훈련 등을 지칭한다. 본고에서는, 우리 나라에서의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전통 문화의 계승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직업교육훈련의 노정을 시대적 상황 변화와 관련하여 고찰해 보 고자 한다. 먼저 전통시대의 기술・기능 전수 과정이 법제적 체제를 근거로 이루어 지기보다는 사적 혹은 소집단 단위로 나름대로의 조직과 전수 통로를 열어 놓고 있 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각 산업분야의 공장(工匠)의 존재 형태를 위주로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 나라에서 직업교육훈련이 법적 근거에 기초한 교육 기관을 통해 시행된 것 은 1899년의 상공학교 설립을 그 효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근대교육의 도입은 우 리 나라가 1961년 이후 단기간에 선진수출국으로 도약, 발전하는 데 있어서 보이지 않게 바탕이 되었다. 따라서 이시기 실업교육기관에 대한 검토는 직업기술교육・훈 련의 발달과정을 역사적 사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해하고자하는 목적에서 출발한 것이며, 궁극적으로 직업교육훈련을 통한 국제경쟁력 제고와 지속적인 산업발전이 라는 현재의 시대적 요구를 수행해 감에 있어서 성찰의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생 1) 교육부, 교육50년사, p. 542.

(9)

각한다. 1910년 한일합방부터 1945년 광복까지 일제식민지 통치하에서의 직업교육훈련은, 외관상으로는 법적 근거에 기초한 실업교육에 주력하여 양적으로 큰 증가 추세를 보였으나, 그 실상에 있어서는 식민지로부터의 식량 조달과 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 기지로서의 기능에 목적을 둔 교육이었다. 따라서 질적인 실체와는 무관하게 단순 히 양적인 성장만을 추구한 이시기의 교육 내용을 정상적인 의미에서의 직업훈련 교육이라고 볼 수는 없다. 우리 나라의 경우 전통적으로 직업교육훈련을 인문교육과 구별하여 실업교육이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적합한 기능교육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 결과, 직업교육 혹은 직업교육훈련은 일반교양교육과 대비되는 특수교육 혹은 계속 교육과 대비되는 종국교육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정보화와 세계화를 추구하는 현 사회에서는 그 본질적인 성격이 변화되었고, 또 직업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현재 는 평생교육 또는 진로교육의 관점에서의 직업교육훈련의 필요성이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2). 한편 직업교육훈련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구별할 수 있는데3 ), 첫째는 모든 학생들에게 직업에 관한 교육을 실시하여 직업적 교양을 개발하는 것이다. 즉, 생활인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함양시키기 위한 교육이며, 교양교육으로서의 직업교 육훈련이라고 한다. 둘째, 직업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직업을 위한 교육을 제공하 여 필요한 직무능력을 개발하게 함으로써 유능한 직업인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하 는 것으로, 직업교육훈련의 본질적인 목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직 업교육훈련은 개인의 자아실현을 최대화하고 국가와 사회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한 다는 측면에서 국가발전과 창조적인 사회의 달성에 크게 기여한다는 목적을 가진 다. 광복 이후의 직업교육훈련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주안점을 달리하면서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복 후 직업기술교육체제의 재정비에 착수한 우리 의 직업기술교육은, 1970년대 초반까지는 노동집약형 인력양성을 위한 직업기술교 육을 강조하였고, 1980년대까지는 기술집약형 직업기술교육이 강조되었다. 1990년대 에 들어서는 우리사회의 정보화・세계화 추세에 따라 직업교육훈련의 내용과 지향 도 다양화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고 새로운 개념의 정립 및 활성화를 통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2)『교육학대백과사전』, 서울대학교 교육연구소, 하우동설, 1998, pp. 2678- 2479. 3) 서울대학교 교육연구소, 교육학대백과사전, pp. 2678- 2479.

(10)

Ⅱ. 전통시대의 직업과 직업교육훈련

우리 나라는 고대로부터 농업이 사회적 생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으며, 수공업 생산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모든 산업분야의 분업화가 이루어왔고, 농업, 목축업, 방직업, 도기제조, 청동기 및 철기 등 금속기의 제작은 특수한 기술이며, 이는 특정 장인 집단이 생산을 담당하였을 것이며, 특히 금속기 제작은 해당 사회와 국가의 대외적 위상 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우리 나라 농경의 시작은 청동기시대이며, 조・ 기장・밀・보리・콩・쌀 등의 작물을 굴봉・뇌사・석도 등의 농기구를 사용하여 재배하 였다. 벼의 재배는 철기문화의 도입과 함께 한반도 중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한강유역에 건국한 백제는 한강하류의 충적평야의 비옥한 토양과 수리시설에 적합한 환경을 토대로 농업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이미 벼농사를 실시 하고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과 장려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4 ). 신라는 비교적 늦은 5세기 경에 벼의 보급이 활발해졌는데, 통일 이후 민정문서 에는 직전과 구분전에서 벼를 주작 물로 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국가에 의한 수리시설이 마련되고 우경(牛耕)을 실시한 기 록도 보인다5 ). 이 시기의 농업 생산은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과정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생 활 속에서의 자연 발생적인 것으로서, 그 경험과 기술이 전습되었다. 국가 기반이 확립되어감에 따라 일반 관직과 더불어 특수기능이나 기술을 전담하는 특정관서를 필요로 하였고 이러한 관서는 담당 업무의 특성상 도제적(徒弟的)인 형태의 후계자 양성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의 삼국은 공히 기술관서와 관직을 설치하였으며6 ), 각 분야에서의 기술적 발전을 이루었고 일본에 이를 다시 전래시키는 역 할을 수행하였다. 신라 통일 이후에는 토목・영선을 관장하는 예작부, 궁중음악을 담당하는 음성서(音聲 署), 미술을 관장하는 누각전 등을 두었으며, 공장부에서 전국의 수공업을 관장하였는데, 4) 다루왕 6년에는 남쪽의 주군에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하며, 기루왕 10년에는 홍수로 인해 손실 된 전답을 보수하고 휼민(恤民)할 것을 유사에 명하였다. 5) 법흥왕 23년(536)에 건조되어 원성왕 14년(798)에 보수한 바 있는 현재의 영천지역에 있 는 청제(菁堤)의 비문에 보와 둑을 관리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또, 백제는 김제지방에 벽골지를 새로 열었는데, 이러한 수리사업 기술은 벼재배의 비중이 해당사회에서 심화되 어가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보이는 백제지(百濟池)・한 인지(韓人池) 등의 기록은 당시의 수리기술이 일본에 전래되었음을 보여준다. 6) 백제는 내관(內官)으로 도부(刀部)와 마부(馬部)・약부(藥部)를 두었고 외관으로는 주부(綢部)・ 사공부(司空部)・일관부(日官部) 등을 두었으며, 전문직 기술관료로서 의박사・역학사・채약사 등이 있었다. 신라 역시 내성(內省) 산하에 40여개의 매우 다양한 관청이 있었으며 천문박사・ 누각박사・의학박사・율령전박사 등을 두어 기술 전수를 담당하도록 하였고조하방(朝霞防)・금 전(錦典)・기전(綺典), 모전(毛典), 염궁(染宮), 철유전(鐵鍮典), 칠전(漆典), 피전(皮典), 궤개전 (机槪典), 와기전(瓦器典), 물장전(物藏典), 남하소궁(南下所宮), 급장전(給帳典) 등이 있었다.

(11)

각 분야마다 의도적인 기술・기능의 전수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7 ). 수공업분야에서 는 특히 어아주・조하주・능라 등의 비단과 무기, 불교예술품, 도자기 등이 뛰어난 수준 을 보이고 있다. 한편, 농민들은 부과된 마포・견・사마(絲麻) 등의 조세 수납을 위해 가내 수공업에 의해 4- 5승의 삼베, 8- 10승 정도의 명주를 제작하였다. 이는 거칠고 질긴 섬유였으며 물물교환하거나 자가수요를 충당되었다. 이러한 가내수공업은 점차로는 반농반공(半農半 工)의 민영수공업 형태로 진전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반면에, 귀족들이 사용하던 피륙 중 삼베나 모시는 8- 12승에 달하고, 명주는 12- 15승에 이르는 섬세한 것이었다. 신라는 조하주, 조하금, 가발, 해표피, 금대은, 주옥(珠玉)등의 특산품을 당나라에 진상 또는 수출 하였다. 이와 함께 관복이나 귀족들이 사용하는 고급직물의 염색술 등도 발달하였는데, 백제와 고구려는 일본에 직조기술과 기술자를 전파하기도 하였다. 앞의 직물업을 비롯하여, 진전된 민영수공업은 단계적으로 전문적인 관영수공업소의 작업으로 전화되었는데, 국가 및 귀족 수요품의 일정한 질과 양의 유지를 위하여 점차로 관영수공업으로 진전되어 갔다. 즉, 왕실이나 관청 소속의 장인과 노비에 의한 수공업품 의 생산은 국가 권력을 바탕으로 하여 상당한 정도의 기술 축적을 이루게 되었고8 ) 이로 써 전문적인 수공업관청의 조직과 견습공을 포함하는 기술관리집단이 성립되어갔던 것 이다. 이러한 고대국가의 관영수공업은 관청과 왕실 및 귀족용 또는 교역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목적으로 더욱 발달하였으며, 특히 직물・금속・도기 부문이 발달하였다. 신라 는 금속・야금 및 세공기술이 우수하였으며, 건축의 경우 역학과 수학의 원리를 응용하 였다. 농업생산과 관련하여 천문학에도 높은 관심을 가졌으며, 718년에는 누각(漏刻)을 제작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초기로부터 관청수공업을 통하여 정복전쟁에 사용되는 무 기류의 생산과 귀족층의 생활용품을 생산하도록 하였다. 고구려는 이미 기원 이전부터 야금술의 발달로 강철을 생산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철제품으로는 무기와 철제 농기구가 제작되었고, 이는 농업생산성을 높이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불교 전래 이후 사원・불상・불화 등 우수한 불교 예술품이 제작되었고, 불교의 융성 에 따라 많은 서적의 보급과 함께 인쇄술・제지술도 발전하였는데, 신라의 백추지(白 紙 ; 楮紙)를 중국에서 제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고구려의 담징(曇徵)이 일본에 종이와 먹의 제조법을 전하였다. 도자류로는 정교한 문양전과 기와・질그릇 등을 제작하였다. 통일이후 신라는 당나라의 장인제도를 받아들여 공장부에서 전국의 수공업을 관장하 였는데, 각 분야마다 의도적인 기술・기능의 전수제도를 마련하여 유칠전(鍮漆典)・도등 7) 직업훈련연구소, 한국직업훈련발전사, 1989, pp. 60- 62. 8) 삼국시대의 전반적인 경제 및 생산체제는 신분제도에 근거한 인신적인 지배체제를 바탕으로 하 였으며 신분에 따라 규정된 생산 노동에 동원되었고, 이는 강제적인 신분 및 노동의 세습을 의 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12)

국(陶燈局)・물장전(物藏典)・와기전(瓦器典)・금전(錦典) 등을 설치하고 간(干)・사( 史)・종사지(從舍知) 등의 관인을 두어 각종의 수공업제품의 생산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수공업은 특히 어아주・조하주・능라 등의 비단과 무기, 불교예술품, 도자기 등이 뛰어 난 수준을 보여준다. 수공업의 발달은 상업의 발달을 촉진시겼는데, 신라는 소지왕 12년(490) 3월 왕경에 시전을 설치하였고9 ) 그 후 509년에는 왕경에 동시10 )와 이를 감시 관리하는 동시전(東市 典)이 설치되었다. 한편, 695년에는 서시와 남시11)를 두고 감독 관청도 설치하였다. 또한, 농가의 가내수공업을 기반으로 하는 향시(鄕市)의 성격을 가진 소규모 상업도 이루어졌 다. 백제는 국내의 상업으로서 장시와 행상이 활발하였는데, 왕도에서는 도시부(都市部) 를 두어 관리하였고, 지방에서는 향시를 중심으로 필요한 물자를 교환하였다. 또한, 지정 학적 조건에 의해 중국・일본과 해상을 통한 문화 교류는 물론 멀리 아라비아에 까지 교류가 이루어졌다. 신라 상인들은 중국의 산동반도와 양자강 연안 각지의 신라방(坊)에 신라소(所)를 설치하여 행정업무를 맡아보도록 하였고, 신라원(院)이라는 절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해상무역이 더욱 발전하면서 9세기에는 청해진이 설치되었다. 고려는 초기 이래로, 인적자원의 양성・공급을 위한 제도적인 장치로서의 교육제도와 과거제도를 새로이 정비하였다. 이에 태조 13년(930)에는 서경에 학교를 세워 의(醫)・복 (卜) 과정을 두었으며, 992년에는 중앙에 국자감을 설치하여 국자학은 문무관 3품 이상, 태학은 5품 이상, 사문학은 7품 이상의 자제가 입학하도록 하였다. 기술계로는 율학, 서 학, 산학 과정이 마련되었으며 8품 이상과 서민의 자제가 입학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러한 입학자격의 구분은 신분과 관품에 따라 차등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유학이 우대된 것에 비하여 잡학이 천시된 것은 고려사회가 유교적 귀족사회을 지향하였던 데 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고려 초기에 이미 수도와 지방에서 유학, 무학, 의 학, 율학, 서학, 산학, 음양학의 7학이 교육되었으며, 현종 8년(1017)의 동당감시에는 잡과 라는 기술학 과목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교육과정은 유교적 교양을 갖춘 관리의 양성과 선발에 있다. 동일한 교육체제 내에서 운영되기는 하였으나, 『고려사』의 공상인은 기술로 국왕을 섬기므로 오로지 그 직업에만 종사하여야 하며 벼슬하여 선비와 함께 할 수 없다. 라 한 기록을 통하여, 기술생도에게는 신분적인 한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12). 그리하여 관학에서의 기술 교 육은 곧 부진해졌으며 각 해당 관청에서의 실무교육으로 실시되었다. 관리의 선발과정으로서의 과거에는 문신선발을 위한 제술과・ 명경과 ・잡과의 구분 이 있었는데, 잡과의 의학・천문・음양지리 및 율학・서학・산학 등 기술관 시험은 중시 9) 『三國史記』卷3, 新羅本紀 3, 소지왕 12년조. 10)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 4, 지증왕 10년조. 11) 『삼국사기』권8, 신라본기 8, 효소왕 4년조. 12) 『高麗史』, 선거지3, 직관조.

(13)

되지는 않았다. 고려의 기술직 종류와 선발 과목은 < 표 Ⅱ- 1> 과 같았으며, 과거를 통하 여 선발된 자는 선별하여 담당 관서에 배속시켰다. < 표 Ⅱ- 1> 고려의 기술직 종류와 선발과목 과 별 고 시 과 목 비 고 명법업(明法業) 율(律)・령(令) 등 법률전문직 명산업(明算業) 구장(九章)・산술(算術)・잡술(雜術)・삼개(三開)・ 사가(謝家) 통계・회계직 명서업(明書業) 설문(說文)・오경자의(五經字義)・진서(眞書)・행서 (行書)・전서(篆書)・인문(印文) 등 서기직 의업(醫業) 소문경(素文經)・본초경(本草經)・명당경(明堂經)・ 맥경(脈經)・주경(紂經)・난경(難經)・구경(灸經) 등 의료직 주금업(呪 業) 맥경(脈經)・연골자방(涓骨子方)・창저론(瘡疽論)・ 명당경(明堂經)・본초경(本草經) 등 주술・의료직 지리업(地理業) 신집지리경(新集地理經)・유씨서지리결경(劉氏書地 理決經)・경위령(經緯令)・지경경(地鏡經)구시결(口 示決)・태장경(胎藏經)・사결(詞決)・소씨서(蕭氏書) 등 충수지리 관련직 하론업(何論業) 진서진장(眞書秦章)・하론(何論)・고경(考經)・곡례 율(曲禮律) 등 의전(儀典)전문직 농업 기술면에서 고려시대에는 농업 생산을 근간으로 하였으므로 농사를 장려하고 농 번기의 동원 금지, 농력(農曆)의 배포 등 생산력의 확대를 꾀하였다. 고려시대의 농업기 술은 우경(牛耕)에 의한 심경법(深耕法)과 2년 3작식의 윤작법이 실시되었으며, 쟁기・보 습・가래 등의 농기구도 발달하였다. 후기에는 농업기술의 발달에 따라 농업생산력이 더 욱 증가하였고 벼재배도 확대 보급되었다. 이에 이암은 원나라의『농상집요(農桑輯要)』 를 소개하여 농업기술의 진작에 효과를 보았다. 고려시대의 공장제도는 신라의 그것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였다. 개경과 그 주변에는 관 공장이, 외방에는 소(所)에 소속된 전업적인 공장과 사원에 소속된 장인이 있었다. 『고 려사』등에 의하면, 관공장은 무기를 총괄하는 군기시(軍器寺), 왕실과 관아의 영조물 및 부속물을 관할하는 선공시(繕工寺), 철기금속류를 담당하는 장야서(掌冶署), 장식품 세공 을 전담하는 공조서(供造署) 및 왕실과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온갖 수공업제품을 관리하 는 관아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 관청에서는 제품의 질과 양을 유지하기 위하여 수공업 분야별로 기술이 우수한 장인들을 선발하여 기술감독자로 배치함으로써 장인들을 행정 적・기술적으로 지도 통제하고 기술 전습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13 ). 또한, 외방의 장인 13)『고려사』식화지3, 諸衙門工匠別賜. 이들 감독자들은 100여명에 달하며 녹봉을 받고 연간 300일 이상을 관청에서 일하였다.

(14)

들을 상번하여 공역(工役)에 종사하도록 하고 급료를 지급하였다. 지방의 경우 중앙관청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각 도 단위로 금기방, 잡직방, 갑 방등의 공장이 조직되어 견직물, 모직물, 자수품, 피혁 등을 생산하였다. 지방 수공업장 은 지방 특산물은 물론 공물이나 지방귀족들을 위한 수공제품 등을 제작하였는데, 장인 들은 급료를 받으면서 일반 장인들의 기술감독 및 지도 훈련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 다. 고려시대의 전업적인 수공업 집단으로 소(所)를 들 수 있다14 ). 소는 소리(所吏)와 공장 인 소민(所民)으로 구성되었는데, 각기 전문화되어 있는 수공업제품을 생산하여 세공과 별공의 공물로서 수납하였다. 자기소의 경우를 보면, 청자기를 전업적으로 생산하여 고 급품은 왕실과 관아에 납부하고 그 이외의 생산물들은 시장에 내다 팔거나 다른 물건과 교환하여 생활을 유지하였다. 이는 가내수공업에 비하여 한층 전문화된 형태이며 이들은 제한된 생활 환경으로 인하여 세습적인 기술 전수가 이루어졌다고 보인다. 소는 고려 중 기 이래로 일반 군・현에 흡수되면서 그 기능이 약화되었고, 고려말 이후로는 대부분 소 멸되었다. 제조업 각 분야별로 살펴보면, 먼저 방직업은 삼국의 발달된 제직과 염색기술의 바탕 위에 중국・거란・여진 등과의 교류를 통하여 더욱 발달된 직물생산이 가능하였다. 중앙 과 지방의 공장체제의 전문 제직기관에서 장인에 의해 생산되었으며, 농촌의 가내수공업 혹은 사원 수공업에 의해서도 생산되었다. 관영수공업은 상의국(尙衣局), 액정국(掖庭局), 잡직서(雜織署), 도염서(都染署) 등을 중앙관아에 두어 직물의 생산을 담당・관리하였다. 각 관청에는 정6품의 봉어(奉御)로부터 정9품의 승(承)에 이르는 관리와 아전들이 행정 실무와 감독을 맡아보았으며, 각 부서의 장이 견직물류와 모직물을 각각 분업 생산하였 다. 고려 초기에는 지방 각 도의 직조수공업장에서 다수의 장인들이 직물과 피혁제품을 생산하였으나, 고려말에는 대부분이 철폐되었고 갑방(甲坊)만이 능라(綾羅)를 저장하는 창고의 용도로 남아 있었다. 고려말 목화의 보급으로 일반 평민의 의료(衣料)가 종래의 베에서 무명으로 바뀌었다. 목면 제직은 민간 가내수공업이 중심을 이루어 화폐대용인 5승포(升布) 역시 가내수공업 으로 생산하였다. 각 지방 특산물의 생산은 농민이나 사원에 소속된 전문장인들에 의해 제직되었다. 사원에서는 여승・승처(僧妻)・노비 등을 사역하여 국가 및 지방에 공납할 물품을 제작하였으며, 자가 사용과 판매를 목적으로 한 직물 생산도 이루어졌다. 또한 직물은 고려의 교역품 중 큰 비중을 차지하였는데, 송(宋)과는 錦・綾・羅紗・ 絹・麻布・苧布・ 등을 교역하였다. 고려 중기 이전까지의 제직기술이 상당히 발전하 였음을 알 수 있으나 몽고의 침입 이후 경제의 침체로 인하여 사치품인 견직물 생산은 점차 쇠퇴하였다. 원과의 교역에서도 견직물의 수출이 줄고 백저포가 주종을 이루게 되 14) 소에는 금소・은소・동소・철소・자기소・사소・주소 등이 있었다. 기술의 전문성으로 인하여 소민은 관영수공업장에 출역하기도 하였다.

(15)

었으며, 오히려 중국의 비단을 역수입하게 되었다. 제지업은 삼국시대 이래 발전하여 고려시대에는 상당한 수준의 기술을 확보하고 있었 는데, 송나라에서 고려 종이를 최상으로 여겨 불경 종이 등의 용도로 다량 구입해 간 것15 )등은 이를 보여준다. 국가에서는 종이의 원료인 닥나무의 재배를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하였다. 또, 왕실이나 중앙관청에 종이를 공납하는 지소(紙所)가 있었으며, 일반 백 성들도 피지(皮紙) 등 각종 종이를 공납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후기에는 인쇄술이 크게 발달하여 초기의 고정식 목판인쇄방식은 점차 이동식인 활판인쇄로 발전하였다. 그리하 여 1234년에 주자(鑄字)로써『상정고금예문』50권을 인출하였다고 하며, 금속활자의 사 용은 고려말에는 더욱 활발해져서 1392년에는 서적원(書籍院)을 두고 주자인쇄를 맡기었 다. 한편,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하여 국가와 귀족의 보호 하에서 사원경제가 크게 발전하 였다. 사원에서의 직포・제와・제염・양조・제지 등은 초기에는 자체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운영되었으나, 점차로 민간의 수요에 대응하는 공장 형태로 진전되어 갔는데, 그 생산과정은 사원 소유의 사노비를 근거로 하는 것으로, 세습적인 기술의 전수가 이루어 졌다고 보인다. 화약제조법의 전래로 화약과 화포를 사용하였는데, 최무선이 중국으로부터 도입한 제 조법을 배워 1377년 화통도감(火 都監)을 설치하였다. 고려는 태조 2년(913) 3월 도시 중심부에 시전을 설립하였는데, 고려말까지도 번성하 여 외국 상인의 출입도 빈번하였다. 개경에는 경시서가 설치되어 시전의 물가조절과 시 전의 상황을 감독하였으며, 상행위의 감독 이외에도 상품 종류의 통제 기능도 발휘하여 이를 범할 경우는 극형에 처하기도 하였다16 ). 고려말에는 기술계 3학을 국자감에서 분리하여 기타 잡과와 같이 해당 관청에서 교수 관의 전문적인 지도를 받게 되었다. 10학 중에서 유학과 무학은 양반층의 업무이며, 나 머지 8학은 잡학으로 기술관이 담당하였다. 기술관은 예능 즉 실용적인 기술・기능을 가 진 자를 의미하였으며, 잡학(雜學)에 분류되었고 악학의 악생(樂生), 악공(樂工), 화학(畵 學)의 선화(繕畵)・선회(繕繪)・화사(畵史) 등은 천민도 종사할 수 있는 잡직(雜織)이었 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말의 10학 중심 관학체제를 계승하였고 태종 6년(1406)에는 10학이 설치되었는데, 기술계로는 역학・음양풍수학・이학・자학・율학・산학・악학 등이 있었 다. 조선시대는 유교적인 정치 실현을 목표로 삼았으며, 문무관 중심의 양반관료체제가 형성됨으로써 기술직은 전담 계층에 한정되었다. 따라서, 국가 경영에 필수불가결한 기 술직 관리를 확보하면서도 이들이 권력 핵심의 고위관직에 침투하는 것을 제어하는 일 은 차단되어 있었다. 15) 전상운, 韓國科學技術史, 민음사, 1983. p. 192. 16)『高麗史』卷79, 志33, 食貨2, 布 辛偶 7년 8월.

(16)

조선 초기에는 기술관 양성을 위한 기술학을 중시하고 교육을 장려하였으며, 기술관에 대한 차별도 비교적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족의 자제도 교육생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러나 15세기 후반이후 양반관료체제가 확립되면서 양반 사대부에 의하여 관념적으로 천 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술관이 법제적으로도 차별대우를 받게되었으므로 기술학은 점 차 사족신분층의 소업(所業)에서 멀어지게 되었으며17 ), 기술관은 중인(中人) 이하의 신분 층으로 고착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기술관의 정예화를 위해 기술직의 세습을 강조하였음에도 잘 이루어지 지 않았으나, 양반으로의 신분상승이 어려워지자 현재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세습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직업은 직역(職役)으로서의 의미가 더 강화되었고 신분 세습적인 경향이 강화되어서 지배층으로부터 도태가 더욱 심화되었다. 세종대의 10학을 중심으로 한 조선시대의 잡학교육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 표 Ⅱ- 2> 를 통해서 조선 전기에 기술관 양성 교육은 소관 기술관아에서 실시되었는 데, 『경국대전』에 의하면, 역학・의학・음양학・산학・율학・화학・도학 등이 설치되 었다. 기술학에 종사하는 기술관 중 역관・의관・천문관・지관은 정3품 당하관까지 올라 갈 수 있는 상급기술관이고, 산관・율관・도류・금루・화원은 종6품 전후해서 거관하는 하급 기술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악생 이하는 공・상인이나 천인계층에서도 들어갈 수 있는 유외(流外) 잡직의 기술관이었다. 이 중에서 상・하급 기술관은 중인계층에 속 하며, 잡직기술관은 천인신분층에 속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기술관이 되기 위해서는 각각의 기술학에 입속하여 기술학생도가 되고, 전 문지식을 습득하여 잡과나 기술과(잡학) 취재에 합격해야 했다. 『경국대전』에는 기술 학 생도 정원을 6,737명으로 규정하였는데, 중앙의 경우 전공기술학에 따라 소관 기술관 아에서, 지방의 경우 지방관아에서 각각의 전문서와 경서 그리고 경국대전을 교육하였다. 이들의 교육은 중앙인 경우 소관 기술관아의 교수(종6품)・훈도(정9품)가 담당하였으며, 한학 2명과 의학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술관으로 임용되었다. 생도는 일강(日講)・월 강(月講)의 성적을 연말에 종합하여 조용(調用)하였다. 지방관청의 생도 중 1- 2명을 선발 하여 중앙 관청에 파견교육을 실시하였다. 기술학 생도들은 정기적인 잡과와 기술관 취재를 통하여 임용되었는데, 응시자격은 정 규 잡학 생도와 7품 이하 관리로서 기술학에 자질을 가진 자로 하였으며, 잡과는 모든 기술학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역과・의과・음양과・율과만을 대상으로 시행되었 다. 잡과 합격자는 일단 해당 기술관아의 권지로 배속되었는데, 이는 지방의 비사족 자 17) 양반층 기술학 진흥을 위하여 습독관(習讀官)제도를 마련하였는데, 『경국대전』에 의하면 한 학 30인, 의학 30인, 이문 20인, 천문학 10인의 습독관을 두었다. 국가에서는 기술학 정진을 위해 시종인[구사(丘史)]를 지급하고 군직체아직을 주며, 성적우수자는 현관(顯官)에 계 수(啓授)하고 생원・진사에게는 습독사일(仕日)을 성균관 원점으로 인정해 주는 등의 특 전을 주었다. 그러나 기술학에 대한 천시와 법제적 차별대우 그리고 습독관이 되면 청요직으 로의 진출이 어려운 점 등으로 인하여 습독관을 기피하였다.

(17)

제들의 면역 내지는 신분상승의 통로로 이용되어지기도 하였다. < 표 Ⅱ- 2> 조선시대의 잡학의 교육 내용 종 목 담당부서 목 적 교과과정 기타 자 학 (字學) 교서관 (校書館) 문서정리・교정담당 하급관리의 양성 說文・字林・圖書 등 무 학 (武學) 병조 (兵曹) 무관(武官) 양성 武經七書・陳圖・將鑑博議 등 이 학 (吏學) 승문원 (承文院) 외교문서 담당관의 양성 정원30명(세종대) 역 학 (譯學) 사역원 (司譯院) 통역관 양성 漢學・蒙學・女眞學・經國 大典・四書・小學 등 정원:한학 75명, 몽학35명, 여진학 54명(續大典) 음 양 (陰陽)・ 풍속학 (風俗學) 관상감 (觀象監) 음양・풍속 기술관 양성 1.천문학:經國大典・天文學 步天歌・七政算內外編・交 食推步 2. 지리학: 經國大典 龍捉 賦靑寫・胡舜申明山論・地 理門庭疑龍河林照謄 등 3. 명과학 : 經國大典・哀天 綱應天歌範圍數・剋擇通書 ・徐子平등 정원: 천문학40 지리학10 명과학10 유 학 (儒學) 예조 (禮曹) 일반하급관리 양성 四書五經・通鑑・大學衍義 ・楚辭 등 雜學의 유학은 세 조이후 폐지 산 학 (算學) 호조 (戶曹) 전곡(錢穀) 등의 회 계 담당 관리 양성 詳明算啓蒙算・揭輝算・五 曹算・地算 교수1,별제(別提)2 ,훈도(訓導)1,학생 61(속대전) 악 학 (樂學) 장악원 (掌樂院) 악공 양성 雅樂・琴琵編・鐘編 율 학 (律學) 형조 (刑曹) 법률 집행 및 소송 행정 담당관리 양성 大明律・唐律疏義無寃錄 중앙: 교수1, 별제 2, 훈도1, 학생80 (속대전) 의 학 (醫學) 전의감 (典醫監) 혜민서 (惠民署) 의원 양성 纂圖脈銅人經直指方・得效方 ・婦人大全澹疹集・胎産集要 ・救急方・和劑方・本草・經 國大典 전의감 56 혜민서 62 (속대전) 도 학 (圖學) 도화서 (圖畵書) 화공(畵工) 양성 竹・人物・山水・翎手花草 등 도화서 31명 (속대전) 도 학 (道學) 소격서 (昭格署) 도경습독 노장(老莊)중심의 철학 10명 1518년 폐지 조선시대의 농업은 공양왕 3년에 공포된 과전법을 근간으로 한다. 고려 후기에는 국가 의 간섭을 받지 않는 대규모의 사전이 사적으로 세습되면서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확

(18)

대되어 있었다. 이는 국가 존립기반인 토지와 인구의 기반을 해체하는 것이었으므로 국 가재정의 조달과 군수의 확보 및 관리들의 생계보장 등을 위한 사전개혁에 나서게 되었 다. 또 국가재정의 효율적인 운용을 위해 토지와 인구에 대한 직접적인 파악이 이루어졌 다. 이러한 관점에서 농업생산은 국가재정, 즉 조세수입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농업생산성을 증대시키기 위한 대책의 마련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필요는 국가의 적극적인 권농정책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세종대에는 권농교서 를 간행하여 농업생산기반의 안정과 확보에 주력하였고 새로운 농업기술 개발에 노력하 였다. 고려말까지『농상집요(農桑輯要)』・『사시찬요』등의 중국 농서를 간행, 보급하였 고, 중앙관료나 지방관리들은 이를 표준으로 권농을 독려하고 농사를 지도하였다. 그러 나 점차 우리 농법과 농업환경에 맞는 새로운 농업기술을 지원할 수 있는 농서를 필요 로 하게 되었다. 세종 11년(1429)에 실정에 맞는 관찬 농서인『농사직설(農事直設)』이 편찬, 보급되었 다. 이는 우리 나라의 선진 농업 지역에서의 관행농법을 충분히 수집하여 편찬한 것18 ) 로, 선진농업기술을 확산시키려는 노력의 하나였다. 성종 23년(1492) 강희맹은 경기도 지 역 소농민의 관행농법에 주목하여, 열악한 경영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사찬(私纂) 농서인 『금양잡록』과 월별 농사작업 및 다양한 작물의 재배법을 다룬『사시찬요초』등을 저 술하였다. 이와 같은 농서의 간행은 중종 12년(1517)의『농서집요』, 광해군 11년(1619) 의 『농가월령』으로 이어졌다. 농서의 보급은 연작법・이앙법・시비법의 보급과 노동수단의 다양화 등 농업기술 발 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선시대의 농서들은 실질적인 지주인 양반층을 독자층으로 하였 으며, 농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이들에 의한 농업지도 관리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농서의 보급은 정부의 권농정책과 맞물리면서 국가적인 정책 사업으로 진행되었 다. 한편, 수공업은 15세기에는 관영수공업인 공장제가 중심이 되었는데, 조선은 건국 초 기부터 전국의 공장을 경공장과 외공장으로 등록시키고 이들에게 일정한 부역의무를 부 과시킴으로써 기술노동력 확보를 원활히 하고자 하였다. 관영수공업장은 양인 혹은 천인의 부역동원을 통한 생산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조선초 기에는 정부의 불교탄압정책의 일환으로 폐지된 사찰의 노비를 편입시키기도 하였다. 이 어 세종대에는 공조 소속의 각종 공장에는 양인과 공천(公賤), 사노비(私奴婢) 중에서 기 성 장인의 추천을 받아 보충하고 번(番)을 나누어 입역하도록 하였는데, 초기의 관노비 중심의 공장체제는 양인 중심의 공장으로 점차 바뀌어 갔다. 양인 중심의 관영수공업장 운영체제는 장차 민간수공업이 발달할 수 있는 토대를 마 련한 것이라 하겠는데, 양인의 경우 부역의무에 해당하는 일정기간 동안만 근무하면 나 18)『농사직설』은 주곡의 생산에 중점을 둔 것이며 채소나 과수 특수작물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 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19)

머지 기간에는 독자적으로 제품생산에 종사할 수 있었으므로 관부에의 예속도가 낮았다. 또한 공장들은 원칙적으로 2번(番)교대제 근무를 하였는데, 규정된 일수19 )를 채우면 체 아직(遞兒職)을 받도록 규정하였다20 ). 16세기 이후에는 정부의 재정 악화로 인하여 다양한 관청수공업장의 유지가 어려워졌 는데, 양인 공장에게 체아직 뿐만 아니라 월봉[料米]마저도 지급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관영수공업장은 다시 편의적으로 공천으로써 공장을 충원하게 되었으므로 기존 의 양인공장들은 민간수공업자로 전환하게 되었다. 17・8세기에는 무기제조와 같은 특수 한 분야에만 한정되어 관영수공업장이 존재하였다. 이에 따라 관청수공업에서 생산하는 품목도 감소되었고 상품의 질도 저하되었는바, 사 장(私匠)을 관역(官役)에 동원하여 사용하였으며21), 이때 동원되는 공장들은 임금을 받았 으며, 장포(匠布)22 ) 만을 내고 사영(私營) 수공업에 종사할 수도 있었다. 먼저 관영수공업의 발전 또는 분업화 정도를 보면, 관청수공업장의 중심이었던 경공장 은 무기제조와 귀족계층의 생활용품 및 관수품의 제조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무 기를 제조하는 군기감(軍器監) 수공업장에는 경공장의 23%가 소속되어 있었고, 귀족계층 의 생활용품을 만드는 상의원(尙衣院) 수공업장에는 21.4%가 소속되어 있었다23 ). 군기감 소속의 공장들은24 ) 각종 무기의 제조 공정을 분담하거나 그 보조적 작업과정 을 담당하였으며, 세분화된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 부분품들로 하나의 완제품을 제작하였 다. 특히, 야장(冶匠)・주장(鑄匠)・연장(鍊匠) 등은 한가지 제품의 공정을 순차적으로 담 당하는 공장이었는데, 비교적 세분화된 분업 단계를 운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의원의 경우 소속된 공장은25 ) 11종의 장인이 고급 직물을 제직하였으며, 분업관계가 상당히 진 19) 일반 공장은 900일 근무하면 일정한 체아직을 받았고 상의원 능라장과 조지서의 지장은 특별 히 우대하여 600일만 근무하면 체아직을 제수하였다. 20) 『경국대전』 吏典 雜織條. 21) 『연산군일기』 권 53, 연산군 10년 5월 을해조. 권 45, 연산군 8년 8월 신묘조. 연산군 때의 실정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당시 관장의 수가 부족하여 물품 생산에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그 기술도 정밀하지 못하여 사장을 불러 만들도록 하였다. 그런데 당시에 이미 사장을 고용한 고용주가 등장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은 대신들 을 통하여 사장을 동원하지 말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즉, 당시 기술적인 측면에서 민 간수공업이 훨씬 앞서 있었고 민간수공업부문이 점차 조직화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22) 조선시대 공장안에 등재된 경공장들은 자신의 책임량을 초과한 생산품은 자유로이 판매 할 수 있었는데, 그 대신 소정의 공장세를 납부하였으며 세를 납부하는 공장을 납포장 (納布匠)이라 하였다. 23) 강만길, 朝鮮前期工匠考, 『史學硏究』12, 한국사학회, 1964. 24) 칠장(漆匠)・마조장(磨造匠)・궁현장(弓弦匠)・유칠장(油漆匠)・생피장(生皮匠)・아교장(阿膠 匠)・연사장(鍊絲匠)・갑장(甲匠)・궁인(弓人)・시인(矢人)・쟁장(錚匠)・고장(鼓匠) 등의 공장 이 소속되어 있었다. 25) 『경국대전』권6, 工典, 工匠, 옷띠를 만드는 다회(多繪)장・금박(金箔)장・이피(裏皮)장・숙 피(熟皮)장・사피(斜皮)장・생피(生皮)장・모의(毛衣)장・사금(絲金)장・하엽록(荷葉綠)장・청

(20)

전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관영수공업장에서만 발달한 경우는 인쇄공장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교서관 (校書館)의 작업을 보면, 야장과 주장은 금속활자를 제조하였고, 목장과 각자장은 목활자 를 제조하였으며, 균자장이 활자를 이용하여 식자, 조판하면 인출장이 인쇄하였다26 ). 이 러한 교서관에서의 출판 공정은 그 분업조직이 크게 세분화되어 있어 각각의 공정에 적 정한 인원을 안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각 산업 별로 보면, 먼저 방직업은 견직업과 면업이 중심이 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 성종 대까지는 정부에서 잠업진흥정책을 수립하여 서울을 비롯한 전 국에 잠실 도회를 설치하고 5등호제에 따라 뽕나무 수량을 의무화하는 양잠정책을 펴서 생산을 배증하였다. 관영수공업장을 중심으로 궁중이나 양반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 한 견직업이 활발하였으며, 당시의 민간수공업은 주로 공물을 바치기 위한 잠사・면주를 생산할 뿐이었다. 관영수공업장은 공조의 상의원(尙衣院)과 호조의 내자시(內資寺)・내섬 시(內贍寺)・제용감(濟用監) 등에 직조시설을 설치하고 관련 장인을 배치하여, 관원의 감 독 하에 우수한 제품을 생산하였다. 상의원의 경우 특히 능라장은 105명이나 있었는데, 이들은 제직 기술이 치밀하고 어려움을 인정받아 비교적 우대를 받았다27 ). 한편 임진왜란 이전에는 잠업의 정착과 국가경제의 안정에 따라 민간에 의한 양잠도 활성화되었으며 견직물이 상품으로서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연산군은 견직물 생산 을 장려하여 직조기술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중종대 이래로 경공장(京工匠) 소속의 능라장(綾羅匠)・방직장(紡織匠) 등이 관장을 기 피하고 독립수공업으로 전환함으로써 점차 관장제 견직업이 쇠퇴하였다. 그러나 사장(私 匠)이 제작한 사(紗)・나(羅)・능(綾)・단(段) 등이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게 되면서 조선 견직물 생산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한편 중종 12년(1517)과 이듬해에 「농상교 서」를 발표하였다28 ). 이는 잠실의 감고(監考)나 지방의 관리자가 아닌 직접 생산에 종 사하는 일반 농민층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양잠의 전과정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여 농가 의 생산을 증대시키도록 하여 민간 중심의 권잠정책을 확립하였다. 중종 13년(1518)에는 세종때 편찬된 『언해잠서(諺解蠶書)』를 수정 보완하여 발간하였는데29 ), 농민들이 쉽게 양잠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중종의 권장에 힘입어 잠업이 농가의 부업으 염(靑染)장・홍염(紅染)장・초염(草染)장・매집(每緝)장・침선(針線)장・합사(合絲)장・연사(鍊 絲)장・도다익(都多益)장 등이 있었다. 26) 『경국대전』에 의하면 균자장(均字匠)40명, 인출장(印出匠)20명, 각자장(刻字匠)14명, 주장(鑄 匠)과 조각(彫刻)장 각각 8명, 야장(冶匠) 6명, 지장(紙匠) 4명, 목장(木匠) 2명 등 합계 102명 이 소속되어 있었다. 27) 『경국대전』권1, 吏典, 雜織, 능라장은 지장(紙匠)과 함께 3번으로 나뉘어 6개월씩 복무 하도록 되어있으며, 사만(仕滿) 600일에 가계(加階)되었다. 28) 『중종실록』권27, 중종 12년 2월 임신조 ; 권32, 중종 13년 3월 병오조. 29) 『중종실록』권32, 중종 13년 4월 기사조.

(21)

로 자리잡게 되었다. 임란 이후 경제 악화로 사치성 직물인 견직업은 다시 침체하게 되었으며, 영조 이후의 강력한 사치금지책으로 고급견직물[紋織物, 문직물]의 생산이 금지되었다. 그 결과 조선 후기에는 영세한 농촌 수공업에 의한 면주와 같은 단순한 견직물만이 남게 되었으며, 고 급견직물은 대부분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다. 유교적 관념체계의 심화로 인한 장인 천대와 사치 금지로 인하여 직물 생산 의욕이 저하되었으며, 실용적이고 손쉬 운 면업의 발달로 인하여 많은 민간수공업의 노동력이 면업에 충당되었다. 조선의 면업은 견직업과는 달리 농촌의 민간수공업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15・6세기까 지 빠른 속도로 성장・발전하였으며 대외교역의 대표적인 수출품이 되었다. 그러나 면포 가 정부의 조세수입의 징수 수단이 됨으로써 질적인 향상보다 양적인 증가만을 꾀하게 된 결과 점차 추포화하였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면 면작은 평안도・황해도까지 보급되어 전국 장시 거래 상품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기계생산 에 의한 값싼 면포의 유입으로 재래 면업이 쇠퇴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마직물은 고대로부터 조선전기까지 중요한 의료로서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생산되었 다. 그러나 세종 이후 면업의 성장으로 인하여 물품화폐로 사용되었던 마포를 면포가 대 신하게 되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지방의 특산물로 자리하게 되었다. 저포는 고급직물임 에도 불구하고 원료가 충청・전라도 해안지역에서만 재배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섬세한 직조기술이 요구되어 농가의 일반적인 부업으로서 적절하지 못하였으며, 지 방 특산물의 성격을 띄면서 점차 생산 규모가 축소되었다. 제지업의 경우, 각 관청의 사무용, 저화 발행용, 서적 간행용, 부의용, 군수용 등 다양 한 용도의 막대한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먼저, 닥나무 재배를 지방 수령의 주요 책무로 하여 적극 권장하였다. 초기에는 국가에 필요한 종이를 각 도에서 매년 상납하는 공물로 써 충당하였으나 점차 종이의 수요도 증가하였다. 또한 양질의 종이를 일정한 곳에서 동 일한 품질로 대량 생산할 필요에 따라 서울에 관영제지업장인 조지소(造紙所)를 설치하 였다30 ). 조지소의 생산 기술은 점차 향상되어 세종대에는 최고 품질의 종이를 생산하게 되었으며, 변천을 거듭하여 경관직 6품 아문으로 자리잡았고, 「구임제(久任制)」를 실시 하였다3 1). 초기의 지장은 대부분 공천(公賤)으로 60세에 면역하였으며, 기타 양인과 도죄(徒罪)를 범한 자 등을 도지서에 배정하여 사역시켰다. 기타 조지서에 배치되어있는 90명의 차비 노(差備奴)가 지장의 조역을 담당하였는데, 이들은 경노(京奴)와 선상노(選上奴)로써 보 30) 조지소는 본래 저화용 종이의 품질을 균일화하기 위하여 설치하였으나, 저화의 보급이 실패하 자 사대교린용 표전(表箋)・전문지를 비롯한 국용의 종이를 생산하는 기구로 기능이 전환되었 다. 31) 이로써 특수한 기술과 경험・자격 등을 가진 공장들이 임기에 구애받지 않고 작업하게 됨으로 써 기술직을 전문화시키고 행정 능률을 향상되었는데, 조지소의 별좌(別坐) 1인을 구임관으로 정하여 제지 기술과 능률의 향상을 도모하였다.

(22)

충하였다. 지장은3 2) 조지서, 교서관의 경공장과 경상・전라・충청・황해・강원도의 외공 장이 있었는데, 이들 지장은 입역의 대가로 지장전을 지급받았다. 그러나 세종 27년 지 장위전 혁파 이후에는 삭료월봉(朔料月俸)을 지급하자 사공장에서 종이를 제조하여 생계 를 유지하였다. 조선업에 있어서는 우리 나라 전통의 재래식 한선(韓船)이 제조되었다. 한선은 11세기 에 이미 보편화되어 고려 정종대에는 초마선(哨馬船)을 연안 조창(曹倉)에 배정하였고 조선 초기까지도 조운선으로 사용되었다. 한선구조법은 고려이후 조선시대에 계승 발전 되었다.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조선(造船) 담당 관부로서 선부서(船府署)와 전함도감(戰艦都監) 등이 있었는데, 조선시대에도 사수감(司水監)이 설치되었다33 ). 이는 사재감(司宰監)에 병 합되었다가 세조11년(1466)에 전함사(典艦司)로 명칭을 바꾸었는데34 ), 전함사의 내사는 선박관리와 조선관리 사무를 관장하였고, 외사는 조선소였다고 보여진다. 영・정조때 수운판관과 해운판관이 없어지고 공조에 흡수되면서, 이후 조선장으로서의 기능은 삼남지방의 수영이 점차 대신하게 되었고, 선재(船材)가 풍부한 전라 좌・우수영 과 산하 읍・진이 사선의 건조장과 관선 청부제조장이 되었다. 이상 각 산업에 종사하였던 각 공장들은 공통적으로 조선 초기에는 공천으로 부역되 었으나, 점차 양인의 비중이 커졌다35 ). 초기에는 양인 공장의 경우 관영수공업장에 근무 기간에는 급료를 지급받았고 그 외의 기간에는 전업적인 사영수공업에 종사할 수 있었 으며, 체아직을 제수 받아 관원으로 신분상승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로 체아직 수여가 줄어들고 급료조차 지급하지 못할 정도로 관영수공업의 규모는 축소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에는 기존의 공장들이 사장으로 독립하였고 이들은 기술 축적과 일반민의 수공업품에 대한 수요 증가로 후기 수공업의 주체로 성장하였으며, 농촌에서는 전업적인 지방의 사공장이 생활용품을 생산 판매하였다. 한편, 농민 부업형태의 가내수 공업은 자급자족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조선후기에는 국가 기관으로부터 공가(工價)를 받은 상인의 주문에 의하여 생산을 담 당하는 현상이 일반화되어 관영수공업의 민영화를 촉진하였고 19세기에는 공장제 수공 32) 『경국대전』工典, 工匠에 의하면, 공장은 전국 총 6,559명이었으며, 그 중 지장이 총 790명 으로 공장 중 최다수를 점하고 있다. 특히 전주와 남원이 가장 많은 지장을 보유하고 있엇다. 33) 태조 원년(1392) 7월에 전함의 영수를 관장하고 전수 등의 일을 감독하기 위한 기관 으로서 설치되었다. 34) 『경국대전』에는 경외의 선박(船艦)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내륙하천의 조운 선인 참선(站船) 및 각도 조운선의 관리까지 관장하였다. 태조 6년(1397)에는 전함사에서 직접 건조한 선박을 왕이 용산강에 나가 관람하였으며, 세종 16년(1434)에는 사수색에서 만든 전함 과 유구국의 전함을 비교한 기록이 있으며, 문종 원년(1451)에는 조선의 조선술에 관한 보고서 를 수성전선색(修城典船色)에 보냈다. 또한 세조 7년(1461)에는 신숙주가 한 척의 배를 가지고 병선과 조선을 겸할 수 있는 병조선(兵漕船) 개발을 연구케 하였다고 한다. 35) 강만길, 朝鮮前期工匠考, 『史學硏究』12, 1961.

(23)

업으로 진전되었다. 조선시대의 상업 역시 농본주의 정책으로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다. 도시상업은 서울의 경우 태종13년 총 1,360칸의 시전(市廛) 행랑(行廊)을 조성하고 상설 점포를 설치하였는 데, 개성과 평양 등에도 이와 같은 상설 점포가 있었다. 경시서(京市署)에서는 시전을 관 장하고 행랑세 징수를 담당하였는데, 시전은 점차로 궁중과 부중(府中)의 수요를 조달하 는 국역을 부담하는 반면 금난전권(禁難廛權)을 가진 육주비전[六矣廛, 육의전]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도시상업은 비교적 직업적인 상인층의 형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시전은 그 대표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육의전은 독점판매권을 행사하는 6전이 합하여 단일한 경제단위를 구성한 일종의 상인조합 형태로서36 ), 각 전은 도중(都中)을 구성하여 각종 부담을 총괄 하고 상품독점권을 화보하며 상호 친목을 도모하는 등 실력을 집결하였다. 이러한 도중 의 조직을 통하여 상인 계층이 재생산되었으며 또한 직업으로서의 상업을 경험적으로 교육하는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도중은 자격 심사를 통해 가입한 도원(都員)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전마다 가장 연고 가 밀접한 자 즉, 도원의 아들이나 사위 등이 우선적으로 가입되었다. 무연고자는 총회 에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예은(禮銀) 등을 납입하고 가입할 수 있었다. 도원은 혈연관계 를 우선으로 하여 자격을 세습하였으므로 부자가 대를 거듭하여 도제적인 훈련과정을 거쳤던 것이라 하겠다. 거액의 납입금 낸‘판신래인’역시 혈연관계는 아닐지라도 어려 서부터 양육되고 훈련된 도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여진다37 ). 지방상업은 주로 장시를 중심으로 하는데, 장시(場市)는 15세기 후반 전라도에서 발생 하여 점차로 3남 지역과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장시는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유통경 제의 활성화로 발생하였는데, 그 토대는 역시 농업생산에 있었다. 연작법의 보급으로 농 업생산력이 증대됨으로써 발생한 잉여생산물을 필요한 물품과 교환하는 형태가 주를 이 루었으며 따라서 농업 선진지역이던 3남 지역에서 먼저 보편화되었다. 16세기에는 정부 의 금압이 완화되면서 전국으로 보급되어 각 군현마다 개설되기에 이르렀다. 초기에는 15일장이 대부분이었으나 16세기에는 10일장과 5일장이 보편화되었다. 거래 상품은 대부분 농민이나 수공업자들이 가내수공업으로 생산한 생활용품이었다. 장시의 개설이 정기화되자 동일구역 내를 순회・행상하는 보부상이라는 일정한 그룹을 형성되 었다38 ). 양자는 각기 정해진 규율과 조직을 가진 상인조합 혹은 행상조합이라 할 수 있 3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24, 1994, pp. 122- 150. 37) 판신래인일 경우 50세 이상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가입이 불가능하였으며, 24세 이하 인 경우는 총회에서 가입여부를 결정하였다. 이는 어려서부터 상전에게 봉사하다가 장성 한 후에 주인으로부터 일정한 자산을 얻어서 독립 경영하는 관례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38) 보상(褓商)은 주로 정교하고 비교적 고가인 잡화 즉, 금은 장신구・주단・포목・관구・혁대・ 도자・필묵 등을 취급하였다. 반면 부상(負商)은 조잡한 일용품인 목기・연초・토기・어염・도

(24)

으며, 이러한 조직은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었다. 보상의 경우 총회에서 접장(接長)・영위(領位)・반수(班首) 등의 임원을 총회의 성원인 요중(僚中)이 선거에 의해 선출하였다39 ). 부상은 천인 출신이 대부분이어서 자신들을 보 호하기 위하여 국초 이래로 조합을 구성하였는데, 내부적으로는 공동체적인 단결력을 강 하게 보여준다. 회원에게는 신표를 지급하여 해당지역을 벗어나서 영업을 하거나 취급 품목을 어기는 경우에는 엄격한 제재를 가하였다. 접장은 조직을 운영 재원의 조달과 조 직의 보호를 위하여 회원 명단을 작성하고 항상 인원을 파악하였다. 이러한 상업과 그 조직의 발달로 17・8세기에는 여각・객주 등이 화물의 도매업, 위탁판매업, 금융업등을 겸하게 되는 자본의 축적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전통시대의 대외무역은 외교적인 사행(使行)시 역관(譯官)의 역할에 주목하게 된다. 역 관들은 기본적인 임무인 통역 이외에도 사행시에 국가가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물품의 구입을 담당하였으며, 특별히 허용된 사무역(私貿易)의 기회를 통해 독자적인 경제활동 범위를 확보하였다. 이들은 우리 나라의 특산물을 판매하고, 중국의 경서・약재・사치품 등을 들여와 큰 이익을 남겼다. 이러한 역관들의 무역활동은 사실상 대외무역에서도 중 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자기・홍두깨・초석(草席)・바가지・짚신 등을 취급하였다. 보상의 상품은 기술상으로 발달된 세공품이 주로 하는데 반하여 부상의 상품은 농업생산에 수반하는 조잡한 가내수공업품을 주 로 하였다. 39) 요중의 산하단체인 동몽청(童蒙廳)이 실력행사를 담당하였으며, 때로는 폭력을 행사하기 도 하였다.

(25)

Ⅲ . 개화기의 직업교육훈련

1 . 개화기의 정치・사회적인 변화

“개화”는『주역』의‘개물성무 화민성속(開物成務 化民成俗)’에서 취한 것으 로 당시에 변혁 혹은 진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온건개화파로 분류되는 민영익, 김홍집, 김윤식 등은 중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과 같은 동도서기론적인 개화 내지 는 점진적인 개화를 주장하였다. 반면에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급진개화파40) 일본의 문명개화(文明開化)운동의 영향으로 변법적 개화, 재경장개혁의 추구, 청국 의 간섭 배제, 정변방법의 도입 등을 주장하였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고종과 측근 세력들은 중국의 중체서용 (中體西用)이나 양무운동과 같이 서양의 과학기술을 빌려 왕조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자강정책을 추 진하고자하여 1881년 1월에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41). 조선은 먼저 개항 전후의 무력적인 외압을 겪으며 군사력의 강화를 시급한 과제 로 인식하고 1876년에는 김기수 등을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파견하였으며, 1881 년에는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신사유람단]으로 박정양 등 12명의 관리와 51명의 수행원을 파견하여 약 4개월간 동경・오오사카 등지를 시찰하였다. 이들은 귀국 후 각종의 견문서를 작성하여 보고하였으며 실제로 통리기무아문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42). 또한 1881년 9월 26일에는 청나라에 영선사를 보냈는데, 영선사 김윤식, 종사관 윤태준 등과 공장 18명을 포함하는 69명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텐진기기국에서 병 기제조는 물론 각 분야의 자연과학지식과 외국어 습득에 노력하였으며, 중도 철수 한 학도와 공장들은 기기창을 신설하고 근대적 병기를 제조하도록 하였다. 한편 군제를 종래의 오군영제도에서 무위영・장어영의 2영으로 개편하였으며, 일 40) 18세기 북학의 대외통상론을 계승한 개화파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1868)을 모델로 하는 입헌군주제 혹은 서양식 공화정을 지향하는 급진성을 보였다. 이는‘변법개화사상’으로 발전하였고 사회진화론과 연결되면서는 힘이 강한 일본에 의지하려는 매국적인 근대지 상주의를 낳았다. 따라서 변법개화파는 주관적으로는 애국심에서 출발하였으나, 결과는 친일매국으로 전락한 인사가 적지 않았다. 41) 1882년 11월에는 통리아문과 통리내무아문으로 분리하였으며, 1882년 12월에는 통리아문 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 개칭하고 김윤식, 김홍집, 김옥균, 어윤중, 박정양, 윤치호 등의 초기개화파들을 대거 임명하였다. 1884년 10월에 다시 통리군국사무아문을 의정부 에 통합하고 통리교섭사무아문 만이 남게되어 기구가 축소되었다. 42) 일본은 이들 시찰단을 통하여 아시아연대론을 설득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정한론(征韓 論)의 미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으며, 이는 후일에 대동합방론으로 발전하였다.

(26)

본에 다녀온 별군관(別軍官) 윤웅렬이 중심이 되어 1881년 4월 무위영(武衛營) 소속 으로 최초의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였다. 별기군은 소부대로서 구식 군대를 대치할 만한 규모는 아니었으나, 교련・무장・제복・계급・전투실기 등을 모두 근대화하였고 장차는 구식군대를 모두 신식군대로 교체하고자 하였다. 정부의 개방・통상정책과 국방체제의 개선으로 단기적으로는 서울의 관료층과 개 항장의 상인들이 이익을 얻었으나, 외국인의 특권과 외국상품의 범람을 야기하여 농민과 하층민의 경제적 압박은 가중되었다. 1881년『조선책략』43 )이 조선에 유입 되면서는 이른바 위정척사계44 ) 유생들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고 영남 유 생들의 만인소를 비롯하여 각지의 상소가 빗발쳤다. 또다른 불만 세력의 하나인 구 식군대는 차별대우에 분개하여 1882년 6월 폭동을 일으켰다. 대원군의 등장으로 군란은 수습되었으나, 외교정책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일 본은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제물포조약 과 수호조규속약 을 맺어, 일본에 배상금을 지불과 활동영역을 보장하였다. 이로써 일본의 정치・경제적인 침투를 강화시켰으 며 청나라 역시 속국 조선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대원군을 천진 에 유폐하였다. 청은 실질적인 속방관계를 강화하고자 군대를 서울에 상주시키고 외국인 정치・ 외교 고문을 통하여 내정에 깊이 간섭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침투를 견제하려는 조 선 정부의 의지와 상통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하여 서 구형 근대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김옥균 등의 개화당은 나라의 완전 자주 독립 과 자주 근대화를 추구하는 정변 즉, 먼저 위로부터의 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무장 정변을 모색하였고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얻어 1884년 우정국 개국축하연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켰다. 이어 박영효・서광범・홍영식・서재필・김옥균 등이 실권을 장악 하고 국가제도를 전면적으로 혁신하는 정강・정책을 발표하였는데, 뒤이어 출동한 청군의 개입으로 정변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들의 개혁안은 청과의 조공관계 폐지・신분제의 폐지・입헌군주제에 입각한 내 각제의 실시・조세제도 개혁 등 서구 근대국가를 모델로 하는 것이었으나, 일본에 의지한 개혁 방법론은 외면당하였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청나라와의 경쟁에서 불리 해진 일본은 중국과 천진조약을 맺음으로써 청・일간의 정치적 세력균형을 이루었 43) 『朝鮮策略』은 일본에 있던 청(淸)의 외교관 황준헌이 쓴 책으로, 조선이 러시아의 남 하를 막기 위해서는 친(親)중국・결(結)일본・연(聯)미국의 외교정책을 써야한다고 권고 한 것이었으며, 이는 일본 흥아회(興亞會)의 아시아연대론 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44) 위정척사는 군대와 산업문화를 앞세운 서양과 일본의 침투가 비도덕적이고 야만적인 것 이므로 그들과의 교섭은 장차 조선을 경제적・문화적인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예견하였 다. 의리와 도덕성을 강조하는 유교문화를 정(正)으로하고 힘의 논리를 앞세우는 서양과 일본문화를 사(邪)로 규정하였다. 중심세력은 이항로(李恒老), 기정진(奇正鎭), 최익현(崔 益鉉) 등이었다.

수치

표 차 례 &lt; 표 Ⅱ- 1&gt; 2년제 수원농림학교 본과 교과과정(1906년) 110 &lt; 표 Ⅱ- 2&gt; 3년제 수원농림학교 본과 교과과정(1909년) 111 &lt; 표 Ⅱ- 3&gt; 실업학교 시행규칙에 설정된 농업학교 교과과정 113 &lt; 표 Ⅱ- 4&gt; 잠업교육 상황 117 &lt; 표 Ⅲ- 1&gt; 간이농업학교 교과과정 및 주당 교수 시간수 119 &lt; 표 Ⅲ- 2&gt; 공립 간이실업학교 상황 120 &lt; 표 Ⅲ

참조

관련 문서

농업발전조례(農業發展條例 Agricultural Development Act)는 특별법의 개 념으로 법과 동등한 지위를 지니며 농업지원관련법을 통합한 법규이다. 대만 정부는 1973

필요할 뿐만 아니라 저개말국 내부에서의 社會階層間 不平等을 해소하 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또한 선진국어l 선 개말도상국의 經濟發展파

우리나라의 직업교육훈련체제와 호주의 국가 수준 직업교육훈련체제를 분석하기 위해 직업교육훈련 정책, 직업교육훈련 체계, 직업교육훈련 유 형, 직업교육훈련 제도,

입천장쪽 겉질뼈의 두께는 세 군 모두에서 이틀능선에서 치아뿌리끝쪽으로 갈수 록 약간씩 증가하였으나 그 차이는 미미하였다.Park등(2008)은 사체에서 위턱

오늘날 인적자원개발은 국가발전 전략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본원 , 은 인적자원개발 및 직업교육훈련 분야의 국책 연구기관으로서 관련 정책과 연구를 주도해

혹자는 직능원이 직업교육훈련에 관한 실질적 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설립된 기관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직업교육훈 련 관련 연구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관련 사업의

모드조성 분석은 점 분석을 이용하여 각 광물이 전체 면적에서 차 지하는 체적비율로 광물의 정량을 구하는 분석방법이다.. 특히 창녕지역에는 국가지정문화재

청소년과를 제외한 나머지 3개과가 직업교육훈련 정책 시행 에 따른 업무를 직접 관장하고 있으며, 특히 최근 직업교육훈련 개혁 을 적극적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