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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re are we?(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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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가상과 실재의 이미지 상호작용

2. Where are we?(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이 작품의 컨셉은 <내려놓음>이다. 매일 우리는 뉴스에서 여러 가지 상황과 사건을 본다. 노약자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무력한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거나 국가를 상대한 테러 등은 인간으로서는 결코 해서는 안 될 짓이다.

《Where are we?》는 미국 911테러 이후에 제작한 작품이다. 911테러는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발생한 희대의 사건으로, 오사마 빈라덴과 알카에다 이슬람 테러조직이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을 붕괴시키는 초유의 사건이다.

이 테러 사건으로 온 세계인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 당시 모든 미디어 채널은 마치 리얼리티 쇼처럼 이 영상을 반복적으로 보여주었는데, 이는 충격과 공포를 더 극대화시키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이 영상을 귄터 안더스의 이론으로 고찰 해보면, 우리는 실시간으로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911테러 영상을 보게 된다. 텔레비전에서 보여준 이 영상은 전자 복제된 환영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그 시간에 존재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환영은 허구도 아니고 실재도 아닌 팬텀이다. 팬텀은 기술로 복제된 영상이면서 이 복제된 영상은 원본과 일치한다. 가상과 현실 시간의 격차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더스는 TV의 영상을 팬텀(Phantom)이라고 하였다. 안더스는 TV 생중계는 복제의 진위를 따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생중계는 사건과 보도 사이에 시간차가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여기서 복제는 현실을 대체 하고 있지만 이러한 현상은 다른 모든 매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안더스에게는 복제가 현실을 대체하고 있지만 실재는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보드리야르에게 는 실재가 사라진다. 가상은 실재가 있을 때만 허구이지만, 실재가 사라진 곳에 서 그 허구는 실재보다 더 강력한 실재가 된다고 하였다.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는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이미지를 제공하려는 노출증 환자 같다. 그리고 우리는 가상과 실재의 경계가 허물어진 곳에 나타난 강력한 실재를 보고 싶어 하는 관음증 환자가 되고 있다. 그리고 더욱 더 자극적인 이미지를 찾는 절시증 환자로 변해가고 있다. 이것은 현실도 아니고 가상도 아닌 팬텀을 만들어내면서 이 이미지는 현실을 왜곡하고 사건을 조작할 수도 있다.

《Where are we?》작품은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마주하면서 인간의 실존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Where are we?》의 영상은 허구도 아니고 실재도 아닌 현실이지만 전자 복제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사건의 진실보다 그것이 텔레비전에서 보도가 되었는지의 기준으로 판단한다. 어떤 사건의 재생형태가

원본보다 사회적으로 더 중요해지면, 이때 원본은 재생을 지향하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미디어 속 가상의 모델에 맞춰 현실에서 자신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Where are we?》작품은 디지털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가상의 이미지가 실재 로 인식되어 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인간은 과연 어디에 서있는지를 묻고 있 는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 작품이다.

《Where are we?》작품은 두 개의 쓰레기통 안에 각각 영상을 설치하여 우리가 친숙하고 익숙한 장소에 배치했다. 이 작품의 영상 중 하나는 911테러 영상으로 쌍둥이 빌딩이 불타고 붕괴되는 모습과 동시에 폭발음이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있다. 또 다른 영상의 도입 장면에서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 처음 에는 천천히 자유롭게 걷다가 점점 빨리 걸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밀치고 부딪치는 내용이다. 이 영상의 마지막은 여러 명의 사람들이 하늘을 쳐다보는 퍼포먼스로 관람자와 눈을 마주치게 된다. 이 영상의 사운드는 도시소음을 삽입했다. 이 작품은 관람자가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쓰레기통을 열었을 때 영상의 이미지와 소리를 반복적으로 보고 들을 수 있다.

이 작품 제작을 위해 911테러 영상을 다운로드했으며, 프리미어 프로그램에서 이미지를 편집했고, 이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재생할 수 있게 이미지를 저장했다.

쓰레기통 뚜껑에 센서와 웹컴을 설치해 관람자가 쓰레기통 뚜껑을 열었을 때, 컴퓨터의 전원이 자동으로 들어와 스피커가 켜지고 인터랙티브 프로그램과 센서가 작동해 이미지와 소리를 동시에 들을 수 있게 했다.

이 작품의 영상 내용은 어둡고 무겁지만 관람자가 쉽게 작품의 내용을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인터액티브 미디어 아트로 제작했다. 관람자는 이런 제작 과정을 거친 작품을 보면서 마음으로 상상하고 물리적으로 미디어 인터페이스와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 디지털 미디어의 상호작용성은 쓰레기통과 스피커이다.

유년시절 TV에서 유괴사건 뉴스를 보면서 울분했던 그 감정이 계속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2001년 미국 911테러 보도 뉴스를 접하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세상에 인간의 사악하고 나쁜 모든 감정들을 쓰레기통에 다 버리고 문을 닫고 싶었다. 즉 우리에게 불행을 가져다주는 요인들은 다 쓰레기통 에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중국 노자의 인생철학의 핵심은 ‘성인의 인격을 갖추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성인은 사회적 의미와 독립된 개체적 가치를 지닌 성인을 말하며, 노자가 말하는 성인은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사회적 차원에서의 성인의 의미이다.

노자의 이상적 인간상을 추구하는 수양의 구체적 실천 과정으로 만족함을 앎, 검소함을 중시함, 지혜를 버림(棄智), 욕망을 버림(去欲)의 4 단계가 있으며, 최고의 심도 있는 단계가 욕망을 버리는 단계이다. 이는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 일수록 소박한 본성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이다. 지식과 지혜는 인간의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로 인간의 욕망을 매개한다.

또한 노자는 무욕의 차원에서 다투지 않음을 언급하였는데, 이는 다투지 않음 으로써 무욕을 체현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노자는 여러 차례 무욕하여 다투지 않음의 숭고함을 언급하였으며, 또 무욕하여 다투지 않음의 우월함을 언급 하였다. 이렇듯 노자는 인간의 수양론이라는 일종의 다른 차원의 도덕철학체계를 가짐으로써, 인간이 실현해야할 도덕적 이상형93)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장자의 수양론은 노자철학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장자 수양론에서 의 득도는 최상의 정신 경지에 나아감을 말하고 있다. 즉 인식론적 각성을 얻지 못하면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없다94)는 것이다.

이와 같이 노자와 장자의 사상은 지금의 현대인의 욕망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제언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연구자는 “노자의 욕망을 버림(去欲)”이라는 개념을 한 번 더 사유함 을 통해 본 작품의 내재적 의미로 표현하였다. 이 작품의 메시지는 ‘욕망을 버림 으로써, 현존재로 소박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93) 신진식, 「노자의 수양론 체계」, 윤리교육연구 Vol.25 No.-, 2011, pp. 169~191.

94) 김기, 「장자 수양론의 구조적 특성 연구-노자의 복귀사상과 관련하여-」, 유학연구Vol.40 No.-, 2017, p.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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