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내 정치적 요건
유신체제를 구축한 박정희는 사실상 3부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무소불위 의 권한을 행사했다. 그러므로 박정희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이에 따른 권력의 공 백은 정치권에 커다란 혼란과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가 당총 재로 있었던 공화당은 공석이 된 총재를 새로 선출해야 했으며, 의원직을 박탈당 했던 전 신민당 총재 김영삼과 연금조치를 받았던 김대중 등은 정치활동을 재개
하기 위해 움직였다.
10․26정변 이후 총재권한을 되찾은 김영삼은 1979년 11월 4일, 최규하 과도 정부에 3개월 이내 헌법을 개정한 후 2개월 이내 신헌법에 의한 직접선거로 대 통령을 선출할 것을 요구했다. 11월 16일 국회에서 신민당의 입장을 이민우가 대표로 밝혔다. 신민당은 박정희 사후 정국은 신헌법에 따라 새로운 정권이 수립 될 때까지의 ‘과도기’이며,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도 중립적 입장에서 정권교체 를 수행하는 것 이상을 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118) 또한 10․26정변 관련 수사가 종결된 이상 비상계엄은 더 이상 유지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최규하에게 ‘양심적 정치범의 즉각 석방’ ‘긴급조치 위반자들에 대한 사면복권’,
‘김대중 사면복권’, ‘학원의 자유 보장’, ‘11월 13일 민주화 조치를 요구하다 연 행된 9명의 인사들의 즉각 석방’ 등을 요구했다.119)
공화당은 11월 10일 당무회의를 거쳐 통일주체국민회의 후보를 내지 않기로 결정하고 12일 신임 총재로 김종필을 선출했다 11월 18일에는 김종필과 김영삼 이 회동했고, 11월 23일에는 최규하와 김영삼이 회동했다. 김대중은 12월 8일에 야 연금이 해제되어 다른 이들보다 정치활동이 다소 늦었다. 최규하는 대통령 취 임식에서 잔여임기를 채우지 않고 가능한 빨리 개헌과 총선을 하겠다고 언명했 다.120)
이른바 3김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은 12․12군사반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 고, 헌법 개정 및 정권교체를 위한 정치일정에 관심을 쏟았다.121) 1979년 12월 27일 신민당이 헌법개정공청회를 개최했고. 1980년 1월 16일에는 국회 헌법개 정심의특별위원회가 첫 공청회를 가졌다. 여기에 홀부르크 미 국무부 동아시아차 관보, 레스터 울프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 위원장 등이 방한하여 낙관적 분위기 조성에 일조했다. 이들은 주요정치 인사와 회동한 뒤, 정국은 안정되어 있으며 ‘민주절차를 빠른 시일 내에 진행하기를 희망한다.”라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122)
김영삼은 1980년 1월 19일 정부가 과도기간을 너무 길게 잡고 있다고 언급하
118) 김삼웅 편저, 『서울의 봄 민주선언』, 한국학술정보, 2001, pp. 34-36.
119) 위의 책, pp. 41-43.
120)『동아일보』, 1979년 12월 21일자.
121) 심지연, 『한국정당정치사』, 백산서당 2004, pp. 283~284.
122) 『동아일보』, 1980년 1월 16일, 19일자.
고, 필요한 시기에 임시전당대회를 통해 대통령 후보지명을 하겠다는 입장을 밝 혔다.123) 김영삼을 중심으로 한 신민당은 정권교체에 대한 기대를 갖고 가능한 한 정치일정을 단축하는 데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동교동계는 계엄령 즉각 철회, 최규하 대통령 대 행체제의 퇴진, 거국민주내각 구성 등을 요구하는 11월 12일의 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약칭 범민주통일국민연합’)의 성명 에 동참했다. 하지만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 저지를 위한 국민대회’(YWC A위장결혼식사건)에는 신민당과 마찬가지로 참여하지 않았다.124)
1980년 1월로 접어들자 신민당 내 소장 의원들이 범민주세력 통합을 촉구했다.
1979년 12월 29일 김영삼과 김대중은 내외신 기자들에게 민주주의를 위해 두 사람이 단결할 것이라는 내용의 합의사항을 밝혔지만125) 대동단결은 제대로 진 척되지 않고 있었다. 소장 의원들은 재야인사까지 포괄하는 민주화운동세력의 대 통합을 이루고, 범 민주세력이 단결한 이후 대통령 후보단일화를 이루어내야 한 다고 역설했다.126)
1980년 2월 25일 후보단일화 추진을 위 한서명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에 양김 은 3월 6일 단독회담을 갖고 대통령 후보 과열경쟁을 삼가고, 재야민주화세력과 합심해서 민주회복에 주력한다는 데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집권 에 대한 야망을 포기할 의사는 전연 없었다. 이는 재야세력 통합에 대한 양 세력 의 입장차로 표출되었다.127)
한편,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공화당도 소장 의원들을 중심으로 정풍운동을 전 개하며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하고자 했다. 하지만 공화당이 추진한 당 개혁은 정 풍대상자로 지목된 인사들에게 당내 요직을 다시 맡기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 다.128) 이는 공화당 지도부가 여전히 과거와 절연할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 이었다.
정권교체와 집권 가능성을 낙관했던 신민, 공화 양 정당들은 새 헌법 시안에
123) 위의 신문, 1980년 1월 19일자.
124) 김준,“1980년의 정세발전과 대립구도”,『5․18민중항쟁과 정치·역사·사회』3, 5․18기념재단, 2007, p. 19.
125) 김삼웅 편저, 앞의 책, p. 90.
126)『동아일보』, 1980년 1월 19일자.
127) 심지연, 앞의 책, pp. 289~290.
128)『동아일보』, 1979년 12월 26일자.
관심을 쏟았다. 1979년 12월 말부터 국회 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 주관 아래 개헌공청회가 중앙 및 지방에서 열렸다. 개헌공청회는 대중적 관심을 모으며 계 엄 하에서 정권교체와 민주화에 대한 기대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 1980년 1월 16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첫 공청회가 열렸고, 이후 공청회는 광주, 대전, 부산 등 전국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개최되었다. 부산에서 열린 공청회에는 3,0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순회공청회는 여섯 차례 진행된 후 1월 29일 완결되었 다. 공청회에 참여한 거의 모든 이들이 강조한 것은 사법권 독립, 지방자치제 실 시,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 보장 등이었다.129)
2월 9일 양당은 대통령 중심제, 대통령 직선제, 임기 4년에 1차 중임, 통대선 출의원제 폐지 등 거의 대부분의 내용에서 일치하는 헌법시안을 마련했다.130) 2 월 25일에는 서울시내 인촌기념관 에서 김종필, 김대중, 김영삼 3자 회동이 있 었다. 이 자리에는 주한 미 대사, 주한 일본대사, 정일권 전 국회의장 등이 참석 했으며, 향후 정국을 낙관적으로 전망하는 인식이 분위기를 이끌었다.
박정희 정권이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부터 영남과 호남의 지역차별이 본격화되 었다. 1965년 10월 15일 실시된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전국에서 470 만 표를 얻어 455만 표를 얻은 윤보선을 15만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서울 에서 윤보선에게 2대 l 비율로 참패한 박정희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영남과 호남의 압도적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는 정부 인사와 경제시책에서 철저하게 호남을 차별하는 지역주의 정책을 펼치고 나왔다.
지역차별 정책으로는 군부의 장성 진급과 공직 인사에서 두드러져서 4대 권력 요직 중 중앙정보부장, 검찰총장, 국세청장에 전라도 출신은 한명도 없었다. 지 역차별 현상은 생존과 직결된 경제정책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박정희 집권 초기인 민정 제1기의 4년 동안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공업단지와 산업단 지 조성이 영남에 치우치고 고속도로 건설, 도로포장 등 인프라 구축도 영남에 집중되었다. 제3, 제4공화국이 끝난 직후인 1981년 들어 전라도에 500명 이상 고용하는 공장은 36개로 영남 159개의 22%에 불과했다.131) 1978년 당시 광주 시민 l인당 연간소득은 전국 평균 6l만9,037원의 74.5%인 46만1.451원에 지나
129) 『조선일보』, 1980년 1월 30일자.
130) 『동아일보』, 1979년 2월 9일자.
131) 김동욱, "한국자본주의의 모순구조와 항쟁주체", 『광주민중항쟁연구』, 정해구 외, 사계절, l990, p. 89.
지 않았고, 같은 해 광주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은 전국 7만4,121원의 절반이 안 되는 47.3%인 3만5,073원이었다.
이러한 지역차별정책의 결과는 호남 출신 영세민 비율이 전국 최고인 12.6%
(198l년)와 l6.6%(1990년)로 전국 평균 6.9(1981년)와 7.7%(1990년)의 두 배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공업시설은 물론 농업생산성 향상에서도 푸대접받 는 전라도에서는 가난한 농촌을 지킬 수 없어 고향마을을 떠나는 이농현상이 홍수처럼 벌어졌다. 1940년대 경상도 인구와 엇비슷했던 전라도 인구는 박정 희의 지역주의정책이 펼쳐지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 계속 감소추세를 나타내 더니 2000년대 들어 경상도 인구의 40%이하로 격상하고 말았다.
박정희 정권의 김대중 탄압은 호남 사람들을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박정희는 야당의 신예 정치인 김대중이 장차 자신을 위협하는 도전자로 압박해올 것을 예 견했음인지, 김대중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지 못하도록 총력을 기울였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시에는 김대중 후보의 자택에서 폭발물이 터지고, 정일형 선거대 책본부장의 집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는 등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국가정 보기관이 조직적·폭력적으로 선거에 개입하는 경향이 노골화되었다. 관권개입과 금품살포, 지방색 조장과 중상모략, 여기에 김대중을 빨갱이로 몰아세우는 용공 조작까지 행해졌다.
박정희는 그 후에도 국회의원 선거유세를 다니는 김대중을 교통사고로 위장해 살해하려 들었고,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납치해 동교동 자택에 연금하 기도 했다. 이들은 당초 김대중을 납치해 옆방에서 살해한 후 토막 낸 시체를 바 다에서 처치하려고 했으나, 뜻하지 않게 실패하고132) 동교동 자택에 연금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이와 동시에 김대중은 정치활동이 일체 금지되었다. 심지어 박정희는 1974년 2월 김대중이 요청한, 위중한 부친의 병문안은 물론 장례식 참 석조차 허용하지 않았다.133) 그 이후에도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에 대해 구속과 연금을 반복하면서 탄압했다. 김대중은 10·26정변 한참 후에야 연금에서 풀려나 고 사면·복권되었다.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주어지는 핍박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전라도 사람들로부터 장차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정치인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김
132) 김경재, 『김형욱회고록4』, 인물과사상사, 2009, p. 171.
133) 김대중, 『나의 삶, 나의 길』, 산하, 1997, p. 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