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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조직의 발전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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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보겠다’ 그래 가지고 거기 간사로 일을 하게 된 거예요."218)

이상의 증언을 토대로 볼 때, 당시 송백회 회원들은 광주지역의 종교, 문화

활동가 등 다양한 운동가들과 일상적 운동의 경험을 공유하며 역량을 키워가

고 있었고, 송백회는 이러한 지역의 운동적 토대 위에서 점차 조직화를 지향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라지사업으로 털양말 뜨기와 영치금 모금을 중점으로 전개하였다. 옥바라지 사업 은 털양말 뜨기에 기독교장로회 소속 양림교회, 한빛교회, 계림교회 등 여신도회 가 대거 참여하면서 양심수 돕기 운동으로 확산되어갔다. 고난 받은 자들을 돕고 자 하는 양림교회 여신도인 이영애(YWCA이사), 문예원 등 교회여성들의 참여로 송백회의 활동은 교회조직들과 연대가 깊어졌다.

해가 바뀌어 1979년에는 유신말기의 정치적 억압은 최악의 사회적 상황으로 치달아 송백회 사무실로 쓰고 있었던 ‘현대문화연구소’에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이 정보기관에 보고되는 상황이 되었다. 사회운동을 하는 성원들끼리 하는 회의나 만남조차도 도청이나 정보기관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종이에 써서 의사소통을 하고 찢어버리는 등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분위기였다. 회원이 60여명 정도 로 늘어나면서 진보적 지식인여성그룹이 대거 참여하였고 여름방학을 기회로 4팀 의 사회과학과 여성문제 학습 모임이 만들어졌다. 『페다고지』,『해방 전후사의 인식』,『전환시대의 논리』,『8억인과의 대화』등 기존의 남성위주의 사회변혁운 동에 대한 사회과학 분야에 대한 학습과 함께 루이제 린저, 베티 프리탄, 시몬느 보봐르 등 여성운동가의 삶을 다룬 분야를 공부함으로써 자주적 여성운동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 갔다. 이미 70년대 중반에 있었던 동일방직사건, YH사건 등 을 통해 여성노동자문제 대한 의식이 싹은 텄으나 아직 본질적인 여성 문제나 급 진적 여성해방운동에 대한 관심은 낮은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당장 눈앞에 직 면해 있는 기생관광이나 가부장적 사회구조가 주는 성차별문제 수준에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역량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민주화운동 기금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생활고에 시달렸고 민주화운동 기금을 마련하는 일은 당 시로서는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구속되었다 석방된 학생운동 출신들은 학교가 제적되어 취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사회운동을 지속했기 때문에 부인들은 가부 장적 이중적 질곡속에서 살아야 했다. 육아 책임과 남편 옥바라지 등을 위해 채 소장사, 꿀 장사, 월부 책장사, 노동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런 상황에서 회 원들의 회비나 후원금으로 민주화운동 기금을 마련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송 백회는 소설가 황석영, 화가 여운, 국중효 등의 문화예술가들의 도움을 받아 도 자기를 구운 작품과 미술품을 모아 전시회를 열어 상당한 자금을 확보하였다. 또 한 이렇게 마련된 재정은 후일 광주항쟁당시 초기 사업비로도 사용되었다. 유신

체재의 억압기제가 점점 강화 될수록 사회운동 단체들 간의 연대는 굳건해 지고 있었다. 송백회는 당시 돼지가격 파동을 풍자하여 만든 극단 광대의 공연 ‘돼지 풀이’ 입장권 판매와 사회운동 활동가 가족 야유회 및 새해 등반, 함평고구마 피 해보상투쟁 등 각종 시위 현장지원과 더불어 월례 강좌를 개최하였다.

1979년 중반을 넘어서면서 송백회는 민주화운동 외곽지원이나 보조적 역할을 뛰어넘어 전문적인 사회운동가 집단으로 성숙되어갔다. 1979년 가을 광주YWCA 에서 독일 에르체 프로젝트(한국 여성노동자 농촌여성들의 교육) 수행을 위한 실 무자(간사) 채용이 있었다. 송백회는 광주운동권 및 현대문화연구소 윤한봉 소장 과 논의하여 정유아(농촌문제부), 이윤정(사회문제부)을 조직적으로 Y에 파견하 기로 결정하였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송백회는 점차 전문적 사회운동 조직으로서 문제의 식을 확산하는가 하면 국내외적으로 연대를 형성하며 성숙된 조직의 모습을 갖 추어가기 시작하였다. 다음은 연구자의 당시 기억에 의한 참여관찰기록으로서 남 해어망 분회장이었던 임미령과의 인터뷰 과정에서의 내용이다. 이는 송백회가 단 순한 옥바라지 모임으로서 활동이 아니라 여성문제뿐만 아니라 계급적 관점에 따른 여성운동으로 발전 해 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는 운동을 할려고 YWCA에 들어갔어. 나는 내 삶을 민주주의에 바치 겠다! 그리고 결혼하지 않고 YWCA를 통해서 민주화운동을 하겠다!, Y가 기독교 단체이기 때문에 운동을 하는데 바람막이 역할로 Y를 많이 생각한 거지, 그래서 Y를 들어 간 거지. 그래서 Y사회문제부 간사로 가 가지고 광 주지역 민주노조건설을 해 보려고, 양현이형이랑 날마다 모이고, 만나고 성 애랑 날마다 만나고 학습하고, 호남전기 소그룹 만들어가지고 자취방 돌면 서 학습시키고 학습하고 나도 그렇게 생활 한거지. 그러다 광주항쟁을 만난 거지. 그 전에 이제 송백회라고 하는 조직을 만들었어.”219)

두 간사의 파견으로 송백회, 사회운동권과 YWCA는 보다 긴밀한 연대가 형성 되어갔다. 예컨대 민청학련 출신 이양현은 출소 후 청계피복 노동조합에서 활동 하다 광주로 내려와 YWCA 이윤정, JOC 김성애, 호남전기, 남해어망, 광주어망

219) 이윤정, 증언.

등 여성노동자들과 소그룹 학습 모임을 만들어 연결망을 구축하고 민주노조건설 을 위한 의식 계발 교육활동에 주력하였다. 당시 광주권 여성노동운동은 가톨릭 노동청년회(JOC)가 1960년대부터 소그룹을 통해 활동해오고 있었다. 이윤정은 가톨릭노동청년회(JOC) 김성애와 연대하여 소그룹학습모임을 조직하고 YWCA 공개 노동자 합동교육 프로그램 편성을 상호 조직적 활동에 기반하여 진행하였 다. 농촌문제부 정유아는 가톨릭 농민회와 연계하여 여성농민의 의식계발교육사 업을 시작하였다. 송백회는 자주적 시민여성조직으로 발전해 가면서 사회운동과 의 연결망 구축, 저변확대를 위해서 실무자파견만이 아니라 임원진으로 홍희윤은 YWCA 이사로 임영희는 농촌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YWCA 사회문제부와 농 촌문제부에 핵심회원을 파견한 것은 송백회가 양심수 후원 등 민주화운동 외곽 지원조직이라는 틀을 벗어나 여성 노동자와 여성 농민 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 을 시작함으로써 여성운동조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다음 두 여성노동자의 증언을 통해서 위와 같이 송백회가 여성운동조직으로 변화 발전해 가는 과정을 살펴보자. 남해어망 분회장이었던 임미령과 호남전기 지부장이었던 이정희는 송백회와 연대하고 있었던 JOC 김성애, YWCA 이윤정, 사회운동권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이양현, 이강, 김상윤, 윤상원등과 소그룹학습 을 토대로 미시동원맥락을 만들어 가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가치, 여성노 동자로서의 삶이 사회화 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그니까 저는요 새로운 세상 그니까 그 정말 암울하고 희망이 없는 그런 세상, 가난하고 힘들고 그런 세상에서, 지오세나 뭐 노동조합이나 YWCA나 그다음에 뭐 섬유 연맹이나 이런데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세상, 새 로운 희망, 진실 뭐 참 이런 것들에 대한 내 안의 어떤 요구하고 탁 맞아 떨어 졌던 거 같아요. 그래서 그런 열정을 내게 되지 않았을까....”220)

“성애(호남전기 부녀부장)랑 JOC활동을 하면서 문어발식 소그룹(6-7명) 을 10팀 넘게 만들어서 맨날 밤 12시 넘어서 까지 자치방을 전전하면서 학 습을 시키고 조직을 만들었어. 김성애, 이양현씨랑 녹두서점 김상윤씨, 윤상 원씨, 그리고 우리 만나면 동해물과 백두산이 늘 불러 주었던 전남대 학생, 이름은 잘 기억이 안나는데 이렇게 우리 모임도 10명 정도가 같이 학습을 220) 임미령, 앞의 구술증언.

했고, 열심히 하다보니까 크리스찬 아카데미 교육을 1,2차 받고, 그때 한명 숙씨가 우리 강사였네, 우리가 빨갱이로 몰리고 용공분자라고 했제. 아카데 미 교육을 받고 여성운동에 눈이 뜨이게 되었제.”221)

시대적 폭압에서도 송백회는 ‘여성운동조직’으로서 80년 민주화 봄과 함께 성 숙해 가고 있었다. 1980년 3월이 되자 송백회는 2차 정기총회를 열어 회장 홍 희윤, 총무 정현애, 회계 및 서기 이윤정, 책임간사 임영희로 새로운 집행부를 구성하여 보다 조직적인 활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당시에 정보형사의 감시를 받 으며 민주화운동을 한다는 것은 개인의 굳은 의지와 결단을 통해서 가능했다. 민 주화운동에 대한 인식은 폭압적인 정치권력에 항거하는 레지스탕스 운동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다. 조직의 핵심멤버였던 임영희는 항상 광주경찰서 종교담당 강형사와 송백회 담당 이형사의 감시와 미행을 당하고 있었고 그밖에 회원들도 정보당국의 감시망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 시기에 10·26 정변이 일어났고 야 당을 비롯한 민주진영에게는 잠시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기대가 정치적기회로 오는 듯 하였지만 12·12사태로 등장한 신군부에 의해 대대적인 민주세력에 대한 탄압의 서곡을 준비하고 있었다.

송백회는 점차 사회전반에 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특히 핵문제와 환경문제, 농촌여성문제 등을 학습하고 일본 기생관광 실태 파악에 들어갔다. 기 생관광에 대한 자료조사와 강의 및 한국여성의 수탈정책에 대한 일본의 야만성 을 세미나를 통해 굴욕적인 한일협정과 국가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을 고양하게 된다. 1980년 학원민주화 봄이 암울한 기운으로 다가 올 무렵 광주운동권은 5월 5일 광주 댐 근처로 야유회를 간다. 야외 공간에서 모임은 유희의 성격이 아닌 다가올 계엄군부의 폭압에 대한 발언과 향후 운동권이 대처해야 할 걱정으로 휩 싸여 있었다.

인간적 유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송백회는 하나의 모성적 공동체로 개인적 신뢰와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한 정체성으로 80년 5월과 마주하게 된다.

정보당국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 송백회와 현대문화연구소에 있었던 모든 서류 는 소각과 정리단계에 들어갔다. 시국사건으로 항상 연계되어 구속되거나 사건의 연루성에 끊임없이 주목받아 왔던 장소로서 모든 자료들을 폐기하였다. 이러한

221) 이정희, 앞의 구술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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