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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백회의 이념과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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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송백회 항쟁참여의 인지적 동학

이 장에서는 송백회운동에 나타난 참여와 저항의 인지적 동학(recognitive dy namics)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제를 통해 밝히고자 한다. 첫째, 송백회 조직의 이념과 가치 지향 및 항쟁의 역사적 국면에서 송백회운동 참여자들의 신 념과 조직에 끼치는 문화전통이 무엇인가를 부각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송백회 (원)의 규범과 문화전통이 상호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활동가들은 이를 어떻 게 인식하고 실천하였는지를 살피게 될 것이다. 둘째, 송백회의 항쟁 경험과 정 체성(collective identity)이 조직활동을 통해 어떻게 재구성되었지를 밝힌다. 우 선 송백회원들이 오월광주항쟁을 어떻게 경험하고 인식하였으며 그것들을 공유 하였는지를 문헌연구와 구술증언 등을 통해 밝힐 것이며, 송백회 조직원들이 갖 는 집합적 정체성은 무엇인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살핀다. 셋째, ‘프레임(fra me)’의 개념을 통해 당시 항쟁과정에서 나타난 인지적 동학을 보다 분명하게 규 명할 것이다. 우선 신군부 세력이 미디어 등을 통해 유포한 캐치프레이지인 ‘안 보’ 논리가 어떻게 항쟁을 진압하는 억압기제이자 도구로서 정치적으로 활용되었 는지를 살필 것이다. 연구자는 오월광주항쟁 과정에서 당시 신군부세력이 내건 비상사태 수습론, 안보위협론 등의 구호에 나타난 ‘안보’ 개념이 억압적인 프레 임으로 작용하였음을 규명할 것이다. 당시 광주항쟁 국면에서 항쟁진영과 권위주 의 진영간에는 진정한 ‘국가정체성’ 확보를 둘러싼 헤게모니 싸움이 전개되고 있 었음을 밝히고 항쟁과정에서 프레임 정치가 지닌 역동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제1절 송백회의 인지적 실천

에 여성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고 억압과 차별을 당하는 사회의 모순구 조나 문제구조를 말한다. 여성문제는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문제이고 오 늘날과 같이 상당한 수준의 사회발전 단계에서도 해결되지 않는 과제이다. 가부 장제 사회에서는 여성의 역할이 남성에게 종속되며 가족관계에서도 남성에 의한 여성지배뿐만 아니라 가장인 남성과 다른 남성들간의 엄격한 위계서열, 여성들 내부의 위계서열이 뚜렷이 나타난다. 여성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올바른 관점과 정립이 필요하다. 가부장제와 여성차별을 궁극적으로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에 기 인하다고 보기도 하고 성차별적인 의식과 관습 때문이라고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과는 달리 여성차별은 남녀간의 자연적인 차이나 인간의 그릇된 관 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라는 사회제도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한다고 보는 사회학적 입장들이 있다. 여성문제를 사회구조적인 불평등의 문제로 보는 입장들 또한 성차별을 정치·교육·직업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의 단순한 기회의 불 평등의 문제로 보는 입장과 성별 분업체계를 필요로 하는 계급사회의 기본모순 을 강조하는 입장으로 대별된다.177) 여성운동이란 문제해결을 위해 여성 스스로 가 능동적으로 조직화하여 행동해야 하며 여성 자신의 의식 변화가 선행되어야 하고, 이를 통해 여성들은 종례의 관념, 즉 주어진 상황과 역할을 감수하면서 기 존 윤리와 도덕률에 부합하고자 하는 태도를 벗어나 여성의 예속된 상태를 지각 하게 되고, 한 인간으로서 독립된 인격과 생활을 이루기 위해 집단적인 행동을 취하게 된다. 송백회는 바로 이러한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조직화된 단 체였다.

제3장 2절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70년대는 복음주의를 기본으로 한 여성운 동 조직인 YWCA을 제외하고는 우리사회의 여성문제 해결을 위한 단체가 없던 시기에 송백회는 진보적 여성들이 만든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위한 최초의 민주 여성 조직이었다. 당시 유신체제에 대항한 조직적인 저항운동은 주로 남성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카톨릭 농민운동이나 JOC, 또는 기독교 농민회에 합류한 농민 여성들, 기독교 청년회에 합류한 여성들의 활약이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종교의 외피를 쓴 운동이었다. 이 점에서 송백회는 자주적인 시민여성운동에 중요한 획 을 긋는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송백회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1970년대에 이르러 동일방직사건, YH사건과 177) 안진,『지역여성의 현실과 전망』, 대왕사, 2004, pp. 15-16.

같은 여성노동자의 생존권 투쟁이 격화되고 대학생들의 민주화운동에 여대생들 의 참여, 1975년 크리스천 아카데미의 '여성인간선언'과 기생관광 반대, 여성노 동자 생존권투쟁을 지원하는 교회여성운동 등이 무르익으면서 광주·전남에서도 민주화운동을 위해 여성중심의 운동성과 여성공동체적인 연결구조로서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비교적 선진적 의식층인 교사, 간호사, 청년운동가, 노동자들 외에도 민청학련 사건 관련 구속자 부인이나 민주화운동 활동가 부인들로 구성 된 송백회는 박정희 유신체제의 반민주적·권위주의적 정치체제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구속자 부인들은 남편들의 구금과 석방과정을 통해서 유신말기의 사회·정치적 모순에 대해 학습되어 갔고 민주화운동 활동가 부인들 또한 남편들 의 활동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성장하였다. 다음의 구술증언을 토대로 확인해 보 겠다.

“그때 긴급조치 7호 양심수들을 정기적으로 옥바라지할 수 있는 팀을 만 들자 했죠. 외로우니깐 옥바라지를 함으로써 가족들간의 위로나 결속도 되 고, 여성들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들을 이제 찾아보자 한 거죠. 그런 운 동권 남자 부인들이기는 해도 단순히 우리가 그것만은 아니거든요. 자율적 으로 여성들도 생각을 좀 해볼 때가 되지 않았는가 이런 것들이 합의가 된 거죠. 지향점은 구체적으로 안나왔지만 ‘일단 합의를 해서 회를 만들자, 행 동으로 하면서 추구를 하자’ 그런 것들이 굉장히 좋았어요. 누가 감옥에 있 다하면 같이 쳐들어가서 면회를 하구. 근데 면회를 잘 안 해줬어요. 그런 걸 막 싸우고, 근데 그런 것이 우리 자신들을 굉장히 변화를 시키더라구. 운동 이라기보다 하여튼 우리 주부들로서는 외부와 접촉을 하게 되니깐 굉장히 신이 나더라구. 면회 안 되면 막 쳐들어가고 그런 거 있잖아요. ‘참 재있네’

그럴 때마다 손으로 양말 떠서 막 보냈거든요. 양말을 무지하게 많이 떠서 보냈어요. 그런 것들이 아주 재미있더라고. 그러면서 변혁운동이 실체감으로 오는 거죠. 막연히 그런 거 있었어요.”178)

“송백회 만들 때 그때는 우리 모두 뜻이 같고 다른 생각 없이 박정희정권 을 부수자! 오로지 그 생각밖에 없었지. 나는 우리선생님(문병란)이 민주화 하니까 그 길이 해야 할 일로 여기고 뒷바라지 했지요. 여자들도 모두 나라 걱정한 마음이 돼서 같이 운동을 했지. 오로지 마음에 정의가 불타고 날마 다 데모하러 다니고 민주화를 위해서 싸웠제”

178) 홍희윤, 『5․18항쟁 중언자료집4』, 5․18연구소자료총서, p. 29.

“우리집은 학생들 운동권 학생들 윤한봉, 정용화, 조봉훈, 김남주등이 파 고 살고 하는 아지트였어요. 하루에 수십 명이 왔다 가고... 모두들 자고 가 고 선생님 말씀들 다 듣고 가고 하니까. 육체적으로 고되고 힘들어도 학생 들이 와서 민주화하고 학생운동 한다니까 힘이 나고 했지요. 선생님이 전교 조운동도 맨 먼저 시작했어요. 농민운동할때도 녹음기 하나 들도 일봉이 데 리고 다니면서 시골마을을 쭈-욱 다니셨어요.”

“나도 거의 밥을 못 먹고 힘들게 고생했지만 고생도 모르고 재미가 있어 서 신이 나서 운동권학생들 뒷바라지 했제. 우리 집 장맛을 안본 사람이 없 을 거요.”179)

이상의 구술자료에서 보듯이 송백회의 궁극적 신념은 여성문제의 해결을 위한 사회 구조적 민주화에 있다고 하겠다. 초기 양심수들에 대한 옥바라지 활동에서 보이듯, 모성공동체(母性共同體)로 출발한 송백회는 사회의 구조적 질곡을 통해 더 이상 양심수가 생겨나지 않고 여성에 대한 착취가 없는 구조적 틀로서 민주 정부 수립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민주화를 실현하고 여성의 성차별 과 여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박정희 유신독재를 물러나야 한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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