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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대항프레임 : 독재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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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살펴보았듯이 신군부 세력은 광주를 타 지역과 고립시키고 운동세력을 분열시키기 위해 온갖 매체를 동원하여 오월광주항쟁을 비상사태 수습론, 안보위 협론 등의 ‘안보’ 의식을 바탕으로 마치 ‘간첩’, ‘불순분자’, ‘북한의 사주’등에 의 해 전개된 것처럼 몰아갔다.

이에 시민 투쟁공동체는 ‘애국’과 ‘민주화’ 논리로 대항하였다. 당시 공식적으 로 발행된 투사회보 등 전단지와 시민궐기대회에서 발표된 성명서 등 문안과 대 자보에 나타난 슬로건과 구호에서 투쟁공동체의 이러한 애국과 민주화의 프레임 을 파악할 수 있다.

아래는 투사회보와 시민궐기대회 낭독된 원고 중 애국’과 ‘민주화’와 관련된 내용들이다.

“전남 애국 청년들이여 총 궐기하라! 전남 애국 근로자들이여 총 궐기하 라! 전남 애국 농민들이여 총 궐기하라! 60만 민주 시민들이여 총 궐기하 라!” <광주시민총궐기문, 1982. 5. 21, 전남민주통일을 위한 국민연합회, 민

주청년 민주구국 총학생연맹>

“공산당보다 더 흉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의 사병 특전단은…(중략)…, 민 주 군대여! 말하라. 저 흡혈 살인마 전두환과 유신 잔당 놈들을 죽일 것인 가? 아니면 민주를 외치는 순박한 애국시민을 죽일 것인가를? 민주경찰이 여! 대답하라? 우리 아들딸들이 다 죽어가도 그들에게 최루탄을 쏘아 댈 것 인가? 아니면 민주 국민에의 편에 서서 무참히 죽어가는 애국 시민을 살릴 것인가를? …(중략)… “민주군대여 말하라. 우리 아들딸들이 죽어도 전두환 의 꼭두각시가 되겠는가?…(중략)…, 민주경찰이여 공수특전단은 우리 전라 도 사람의 씨를 없애겠다고 했다. 그들을 용서할텐가? 애국시민이여! 파괴와 방화를 금지하고 민주 시민의 역량을 발휘하여 각 동별로 프랑카드를 들고 질서 있게 도청 앞으로!…(이하 생략)…” <민주수호전남도민 총 궐기문 198 2. 5. 21 전남민주통일을 위한 국민연합회, 민주청년 민주구국 총 학생연맹>

“애국시민이여, 동별로 프랑카드를 들고 전시민이 참가합시다.” <투사회 보 제7호 1980년 5월 24일, 광주시민 민주투쟁협의회>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김일성은 순수한 광주의거를 오판하지 말라 광주시민 일동 ” <민주시민 회보 제 9호 (뒷면) 1980년 5 월 26일>

“민주시민으로서의 해야 할 일, 군인들이여 그대들은 지금 누구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가. 자신들의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얹고 대답하라 조국과 민족 을 수호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온 국민의 희망을 저버리고 사리사욕에 광 분하는 전두환 일당을 위해서인가. 우리가 지난날 국토방위임무에 충실했던 국군이었듯 그대들도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민간인이 아니란 말인가. 당 신 일개인의 반기가 조국과 민족을 구하는 길임을 명심하라!” <민주시민회 보 제10호 1980년 5월 26일 광주시민 학생 구국위원회 (구, 수습대책 위원 회)>

“민주화여! 권력안보 동냥 말고 총력안보 지지하자. 유신잔당 뿌리 뽑고 김일성도 격퇴하자.” <제 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원고>

“최규하 대통령 각하! 우리 광주 시민은 김일성의 오판을 대단히 염려하 고 있습니다. 현 난국을 극복하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김일성의 오판을 막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광주 시민과 온 국민의 바램이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온 국민은 각하와 계엄 당국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과도정부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내는 글 제 5차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 원고 5. 26>

이상에서 보듯이 광주항쟁 당시 유포된 투사회보와 시민궐기대회 등의 구호 내용에서 나타난 의미틀(frame)은 바로 신군부 억압세력의 ‘안보’ 논리에 대한 대항담론으로서 ‘애국’과 ‘민주화’를 지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다섯 차례에 걸쳐 진행된 민주수호시민궐기대회 행사장에서 태극기와 애 국가 등이 의례와 의식의 상징으로 빠짐없이 등장하였다. 오월광주항쟁하면 태극 기가 연상될 정도로 태극기 아래 결집을 이루었던 광주시민들의 의미틀은 무엇 일까? 최근 인터넷 상에서는 당시의 장면을 운동 참여자들의 ‘신호’체계로 해석 하려는 넌센스도 등장할 정도이다.

“5․18측에서 제공하는 광주비디오를 보면 태극기가 유독 자주 등장을 합 니다. 특히 21일 광주 외곽지에서 광주로 들어오는 모습을 촬영한 장면과 광주지역을 돌아다니는 트럭에는 태극기가 1개~2개~3개씩 보입니다. 태극 기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간혹 관을 덮는 과정에서 태극기가 사용 되기도 하였으나, 특이한 점은 21일로 추정되는 장면을 보면 차량에 태극기 가 많이 사용되었습니다.(KBS푸른눈의 목격자 유르겐 힌츠패터의 영상에서 21일 또는 이전으로 설명되는 동일한 장면) 태극기가 혹시 무슨 암호같은 것이 아닐까요?...”205)

이처럼 보수진영에서 광주항쟁의 의미를 왜곡하기 위한 의도로 분석하는 이러 한 글들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반대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광주항쟁과 애국가, 태극기의 관계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시의 기자의 눈으로 상황을 정리한 자료집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도청 옥상에 네 방향으로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의 리듬이 장 중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애국가에 때를 맞춘 듯 ‘따따따, 따다다.’ 요란한 총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그 동안 산발적으로 몇 발씩의 총성이 울린 적은 있지만 이렇게 많은 총소리가 일제히 울려나온 것은 처음

205) http://systemclub.co.kr/board/bbs/board.php?bo_table=board02&wr_id=53112

이었다. 애국가 리듬이 발포 명령이었던 것이다. 왜 하필이면 신성한 애국가 가 국민을 죽이라는 발포 명령이 되었을까? 나로서는 마음이 아팠다. 물론 이 때의 발포는 사전 예고성을 띤 듯 모두가 공중을 향해 발사되었다. 그러 나 이 총성은 광주사태가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임 에는 틀림없었다.206)

그런데 오월항쟁 과정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애국가는 계엄군의 최초 발 포 신호였다.

발포가 시작되자 군중들은 다소 동요의 빛을 보이는 듯 했으나 오후 1시 10분에는 1천여 명이 다시 한국은행 광주지점 앞에 집결한다. 이때부터 공 수부대는 장갑차 1대씩을 금남로와 노동청 쪽으로 돌려놓고 사격자세를 취 하고 있었다. 사격수들은 ‘앉아 쏴’ 자세였다. 한국은행 광주지점 앞 충장로 지하상가 위의 큰길에 모여든 시위대원들은 대형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 쳤다.

‘계엄령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최 돼지 물러 가라.’, ‘끝까지 광주를 지키자.’, ‘연행자를 석방하라.’등 그 동안 외쳐온 구 호는 모두 쏟아져 나왔다. 그 뿐이 아니었다. 시위대원들은 차분하고 장중하 게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닿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 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

이 애국가의 노래 소리는 시위광장을 구경하고 있던 시민들도, 이들과 대 치하여 사격자세를 취하고 있던 공수부대원도 듣고 있었다. 어떤 행사를 시 작하려는 듯 노래 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장중하게 울려 퍼졌다. 최 후의 결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불러보는 애국가이기나 한 듯 했다. 잠시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몇 사람이 구호를 다 시 외치기 시작하고 5-6명의 젊은이들이 각각 태극기를 들고 큰 길 한복판 으로 뛰어나갔다. 도청 광장으로부터 300여 미터 덜어진 길 한복판에서 태 극기를 흔들면서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령 해제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 었다. 이 건물 저 건물에서 시민들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따당, 따당!’ 총성이 울려 나왔다. 순식간이었다. ‘앉아 쏴!’ 자세를 취하고 있던 공 수부대의 사격수들이 정조준해서 사격을 한 것이다.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치던 5, 6명이 그대로 쓰러졌다. 머리와 가슴 과 다리에서 피기 쏟아졌다. 땅에 떨어진 태극기에도 피가 흥건하게 젖어

206) 김영택, 『10일간의 취재수첩』, 사계절, 1988.

들었다. 아스팔트 길은 시체와 신음소리와 태극기가 피로 덮여 있었다. 그러 자 몇 사람이 쏜살같이 시체와 부상자들을 끌어내고 있었다. 그러더니 또 다른 5, 6명이 여자가 태극기를 들고 나가 흔들면서 또 구호를 외치고 있는 게 아닌가. 다시 일제히 사격이 가해졌다. 그들이 다시 맥없이 쓰러졌다. 사 격수들의 사격 솜씨는 조금도 오차가 없었다. 정확하게 5, 6명을 맞추어 쓰 러뜨리고 있었다. 그러면 또 다시 끌어내고 다시 태극기를 들고 나가 흔들 면 또 여지없이 총알이 날아와 그들을 쓰러뜨렸다. 이렇게 하기를 대여섯 번을 하였다.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태극기를 흔들고 구호를 외칠 뿐인, 다만 평화 적으로 시위를 하는 우리의 아들들에게 왜 총을 쏘아대는 것인가? 시위 학 생들이 무기를 들고 대항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욕설을 퍼붓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순수하게 평화적인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다 도대체 왜 총을 쏜단 말인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그렇 다고 나가지 말라고 만류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태극 기를 들고 나가 흔들며 구호를 외치다가 금방 시체로 변하는 사람들, 그 시 체를 보면서 자신도 또 시체로 변할 줄 뻔히 알면서 뛰쳐나가는 우리의 젊 은이들, 누가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13시 30분 시위 군중의 장갑차 1대가 쏜살같이 공수단이 있는 도청 광장 앞을 통과했다. 공수부대가 집중적으로 사격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장갑차 위에서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태극기를 흔들며 ‘광주만세’를 외치던 그 청 년은 웃통을 완전히 벗어버린 채였다. 공수부대가 쏜 총에 맞아 그의 고개 가 푹 숙여졌다. 장갑차는 학동 쪽으로 빠져나갔다. 이 때 이 장갑차를 향해 일제히 가해진 사격에 충장로 입구 도심빌딩 4층에서 머리를 내밀고 구경하 고 있던 황효성(60세)이 총에 맞아 숨지기도 했다.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 던 장형태 지사는 도청 마이크를 통해 “공수단을 철수시키고 연행자를 석방 토록 최선을 노력을 할 테니, 학생 여러분! 자제하고 해산하여 귀가하시기 바랍니다.” 하며 눈물어린 목소리로 호소하고 있었다.

이 때 동구청 앞에서 학생 4명, 처녀 1명, 노인 2명 등 7명이 총에 맞아 쓰러져 있다는 보고가 광주 시청으로부터 도청에 들어왔다. 그 시체는 동구 청 1층 바닥에 있다는 것이다. 1시쯤 발포명령과 함께 쏟아진 총알을 맞고 쓰러졌음이 분명했다. 바로 눈앞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엄청난 상황 이었다. 이 날은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 광장의 분수대 앞에 ‘부처님 오신 날’을 기리는 대형 아치가 금남로 길을 굽어보고 있었다. 하필이면 한 평생 살생을 하지 말라고 설법하신 부처님이 태어나신 날, 이 같은 대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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