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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백회의 집합적 정체성 : 여성운동가에서 민주투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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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이유로 당하는 억압과 차별로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사회구조를 바꾸 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민주화운동을 통해서 권위주의 체제를 무너지지 않고는 여성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여성운동가로서 정체성 이 자연스럽게 민주투사로서 정체성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남편(이훈우 : 민청학련 관련자)과 교제를 하다가 결혼할 생각이었으니까 남편의 권유로 송백회라고 운동하는 사람들 모임에 나가 보라고 하여 참여하게 되었어요. 모임에 갔는데 감옥 뒷바라지도 하 고 언니들이 주제를 정해서 발췌해 가지고 와서 학습하는 거 보면서 뭐라고 해야하나? 여성운동을 하고 자각심을 갖고... 여자들이 각 분야를 공부하는 거 보니까 여자들이 자기들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거가 참 좋았어요. 그렇 게 송백회 들어가고 나서 나도 일을 하고 싶어 졌어요. 내가 주부로서 아내 로서 역할도 있지만 용기를 얻어가지고... 그래서 25세에 대학시험을 쳐서...

대학에 가게 되었고 유치원교사가 되었어요. 송백회 사람들 운동하는 사람 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람 자체를 귀하게 존중해주는 거 좋았어요. 그런데 5․18이 일어나 전두환 일파에 대해 분노가 너무 컸어요. 머리 속에 온통 다 른 생각은 없었고 오로지 이겨야 한다... 광주를 구해야 한다... 그랬어요. 죽 음이 눈앞에 왔다 갔다 하는데... 저는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는게... 어떤 새로운 세상이 곧 열릴 것 같이 가슴이 벅찼어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심 했지요. 도청에 들어갔을 때 구름다리 밑에 시신이 주-욱 있었잖아요? 시신 이 두려웠지만 무서웠지만 그래도 자기 삶의 자리에서 이렇게 함께 하는 게 공동체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함께라는 것, 함께 사는 것이 이렇게 좋구나 생각 했지요..."(중략)

"5․18은 참으로 처절했어요. 저는 당시 도청 안에 수위실 입구에서 자기 자식들 시체 찾으러 오는 사람들 접수 받는 일 그런 일을 했어요. 며칠인가 기억이 안나는 데 몸이 그야말로 삐쩍 마른 노인이 속이 다 닳고 타서 입술 이 다 갈라져 가지고 덜덜 떨면서 자식을 찾으러 왔어요 너무나 처절했어 요. 그 아이가 살았을까? 죽었을까? 그런 생각이 마음에 왔다 갔다 하면서 ... 송백회를 생각하면 사람에 대한 그리움 같은 거, 그런 것 같아요. 좋은 세상 꿈꾸고 인간자체가 어떤 지위나 직위가 아니라 존귀한 건데 모든 사람 이 사람다워지는 거 그런 사회를 만들자고 했고, 그런 의식을 느꼈어요. 윤 경자 언니 집에서 같이 김밥을 말아서 시민군들한테 가져다주고 했는데 한 마음이 되는 게 너무 좋았어요. 한마음이 되는게 기쁘고 즐겁고 우리가 하

고 있는 것이 꿈이 아니고 영화가 아니고 이런 게 현실이구나! 이런 세상이 있구나!"199)

위 증언에서 나타나듯이 송백회가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은 한마디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대접받는 평화로운 공동체로 요약된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이러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신념을 놓지 않고 시민군과 함께 한 이들의 활동은 오월광 주항쟁을 구조적, 문화적으로 통합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이제 나 같은 경우는 매일 나가는 거지. 집에 애들 두고 어머니두 계셨 는데 나갔다 오구. 딴 사람들, 처녀들은 거기서 다 갔지. 영희까지 유아랑, 이윤정. 이런 사람들이 혁혁한 공로를 세웠는데 처녀들은 다들 거기서 자고 먹고 하여튼 여러 가지 활동들을 다했죠. 그니까 내 개인적으로는 그냥 가 서 저녁때 집에 오구. 그때 내가 두고두고 안 잊혀지는 게 도청으로 들어가 는데, 시민군들이 이렇게 있잖아. 근데 아주 험상궂지, 그야말루 깡패나 그 런 사람들이 총을 들고 있는 그런 모습들이 감동 내지는 충격이야."

"시민 대표라든가 여성 대표라든가 그걸 하나 읊으라 그러데, 문화팀들이.

그 때 박효선씨랑 김태종이랑 문화팀들이 ‘내가 다 아니까 읽으쇼!’ 하면 가 서 그냥 읽는 거지. 그리구 삐라 나오면 또 뿌리구, 대자보 붙이구 같이 그 냥 그런 거 했어요. 그거 참 이상하데 그니까 두 가지야. 자기 내부에 그 두 가지가 지금까지 내려오는 건데. 하나는 민중들의 그 역량 있죠. 그니까 그 절대적 신뢰! 어떤 계기가 왔을 때 민중의 절대적 신뢰는 진짜 무조건 가져 야 되겠더라구. 그 열기와, 같이 막 나누고 하는 거 우리는 다 알죠 음식도 나눠 먹구 아줌마들 쌀두 가져오구. 그런 거 보면서 ‘민중이 이런 건가’ 하 는 생각이 들고 도청 앞 분수대에서의 열정들 있잖아요. 정말 하나의 공동 체로 간다는 거. 그니까 ‘우리 인간의 감정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는가’

하면서 또 하나는 끊임없이 계엄군이 쳐들어오네 마네 하는 그 초조함과 공 포라고 할까? 그 두 가지가 끊임없이 그냥 그니까 낮에는 엄청난 환희, 글 고, 밤에 각자로 들어갔을 때는 총소리 들으면서 이건 갑자기 들어와서 언 제 죽이지 않을까, 그때는 뭐 죽기 아니면 살기잖아요, 그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 두 가지 교차점이 있죠. 이 두 가지 교차점이 끊임없이 자기를 괴롭히 는 거야 같이 있을 때는 행복하구 혼자 있을 때는 공포스럽구. 이 분열증,

199) 박두리, 구술증언, 2011.12.8.

이 분열증이 사실은 지금까지 계속이야. 난 심리를 분석해보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늘 우리가 자신감 없어 하구 무서워하나? 그 공포감이 어떤 땐 굉장히 더 강할 수가 있어. 그래갖구 암튼 그런 와중에서 역할이 그 정도였 는데 와갔구 이제 5월 27일 함락이 되고 끝났잖아요. 끝나고 살아난 사람도 있구 그렇게 된 거죠 그니까 그 거대한 역사에서 한을 엄청 또 지배하는 게 있더라구."200)

"송백회를 생각하면 사람에 대한 그리움같은 거, 그런것 같아요. 좋은 세 상 꿈꾸고 인간자체가 어떤 지위나 직위가 아니라 존귀한 건데 모든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거 그런 사회를 만들자고 했고, 그런 의식을 느꼈어요. 윤경자 언니 집에서 같이 김밥을 말아서 시민군들한테 가져다 주고 했는데 한마음 이 되는게 너무 좋았어요. 한마음이 되는게 기쁘고 즐겁고 우리가 하고 있 는 것이 꿈이 아니고 영화가 아니고 이런게 현실이구나! 이런 세상이 있구 나!"201)

항쟁과정에서 이들은 시신이 두려웠지만 무서웠지만 그래도 자기 삶의 자리에 서 이렇게 함께 하는 공동체가 아름다움을 인식하며 투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해 갔다. 그리고 운동에 참여하게 된 대부분의 동기도 주체적인 결단에서 비 롯되었다. 다음 구술증언을 통해 확인해 본다.

"이제 시대가 시대인 만큼 탄압의 구조니까 이제 역으로 분출된 거죠. 거 기에 이제 자율적으로 주체적으로 살려는 원칙들이 첨가되는 거지. 여성 스 스로도 그게 왜 중요하냐면, 그 후로 송백회도 보면 물론 처음엔 남편에 의 해서 다들 시작했지만 다들 주체적으로 해 가더라고. 이런 분들이 다들 대 단한 역량을 발휘했잖아요. 임영희도 그렇고. 다들 보면 단순히 어떤 자연발 생적인 그런 게 아니라 주체적인 역량으로 해갈 수 있는 그런 저력들이 이 미 80년 전에 스스로 형성됐던 것 같아요. 그래 갖고 잘 나가다가 80년 5 월에 이제 터진 거지. 근데 사실 우리는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터질 줄은 몰 랐어. 나중에 굉장히 비판도 하구 했는데 나 자신도 사실 그런 것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어. 우리가 갖고 있었던 변혁운동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었는 가? 우리가 쫓아다녔던 게, 그것이 이렇게 보면 굉장히 낭만적이었던 것 같

200) 홍희윤. 앞의 책, 2005.4.

201) 박두리, 구술증언, 2011.12.8.

애. 낭만적 혁명이고 사상이라구 해야 하나? 내 개인적으로도 보면 그게 80 년 전인데 굉장히 근사한 거야. 하여튼 낭만적 혁명이 주는 그런 것, 가슴 아리게 하는 그런 것들이 있잖아요. 모택동, 중국의 혁명. 이상한 환상인데 그런 것과 더불어서 사람을 고양시키는 그런 것들이 있었는데 80년 사건으 로 이제 눈앞에서 막 터진 거잖아요. 이거는 혁명도 아니고 잔학한 그런 것 들이. 우리가 갖고 있던 후회지, 후회 막연히 갖고 있던 낭만적 혁명이 확 벗겨지고 자기 실제를 들여다보는 거고. 그나마 갖고 있었던 허위의식 요것 들의 감수성이 다 깨져 버린 거예요. 5․18이라는 게 그 운동 실제라는 것도 다 보인 거구. 더불어서 자기 개인이 갖고 있던 그 허위의식들도 다 깨져 버린 거예요. 그래갖고 한 십 몇 년 허우적거린 것이 지금까지 허우적거린 거예요."202)

정유아는 1980년에 송백회에 참여하였다. 그녀는 명문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 여성으로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구속자 옥바라지를 주된 활동을 시작 한 송백회에 대하여 운동단체로 여기지도 않았지만 송백회에서 추천하여 YWCA 농촌부 간사가 되었고 5월항쟁에 참여하였다.

“어려서부터 남에게 뒤지기를 싫어하고 남달리 지적 욕구가 강했던 나는 대학시절에 많은 책과 사람들을 접했다. 그때부터 사회구조의 불평등과 인간 의 부재에 대해 고민했고 서서히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내가 정식으로 사회단체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부터다. 1980 년 이전에는 어머님이 위암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병간호 및 집안살림올 도 맡아 하고 있었다. 1979년 어머님이 오랜 투병생활 끝에 돌아가시자 사회활 동을 시작한 것이다. 1980년 3월부터는 YWCA 농촌부 간사로 활동했다. 그 때 농촌부 사업의 일환으로 무공해 두부를 만들어 팔았으며 농촌 여성지도자 양성교육 프로그램올 마련했다. 2박 3일 동안 1회 교육을 실시했는데 주로 외부 강사나 기존의 농촌 여성운동가들을 초청하여 강연하는 형식이었다."

"농촌부 간사로 일하면서 동시에 1980년 이전의 유일한 여성단체인 송백 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송백회는 각계각층의 의식있는 여자들이 민주화운동 올 하다가 구속된 사람들의 옥바라지와 사회문제에 대한 인식의 공유를 위 해 만들어진 모임이었다. 현대문화연구소의 윤한봉 선배가 주도가 되어 개

202) 홍희윤,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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