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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의 자원과 조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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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주화운동의 태동

1970년대는 두 개의 기폭제가 민주화운동을 알리는 시작이 되었다. 하나는

’70년 11월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과 ’71년 8월 광주대단지 주민들의 저항이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2차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정책은 저곡가 저임 84) 강창성, 앞의 책, p. 383.

85) 신현익, "전두환군부정권 성립과정에서의 미국의 역할", 고려대 박사 학위논문, 2006, p. 80.

86) 강창성, 앞의 책, p. 385.

금 정책으로 처음부터 노동자 농민들의 희생의 토대위에서 시작되었다. 그 결과 1차 5개년 계획이 끝나기도 전인 ’66년부터 도시가계와 농촌가계의 역전이 시작 되고 1966년부터 ’70년 사이 매년 60여만의 농촌인구가 대도시, 특히 서울로 몰려들었다.

농업이 주산업이었던 광주·전남은 이중 삼중으로 수탈을 당했다. 쌀을 생산해 서 생산비 이하에 팔아야 했으며, 아들딸이 태어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거나 다 마치지 못하고 자퇴를 하고 도시로 나가 구로공단이나 평화시장의 저임금 노동 자로 전락했고 급기야는 본인들도 보따리를 싸들고 서울 등지로 나가 지게꾼 날 품팔이, 식모살이를 하며 청계천 답십리 판자촌 빈민이 되어갔다. 전라도 사투리 는 천민의 표상이었으며 답십리 청계천 판잣집에서 쫓겨나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 폭동을 일으킨 주축이 전라도 사람들이고 오늘날 성남시에 전라도 사람들 이 많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는 ’69년 국민투표에서 3선 개헌에 성공한 박정희는 ’71년 4·27 대 통령 선거에서 온갖 부정을 저지르고도 근소한 차이로 가까스로 승리하자 김대 중 후보의 예언대로 영구집권을 위한 총통제를 획책하였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 결의 7·4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는 등 희대의 사기극을 연출하면서 유신헌법과 유신체제를 구축하고 ’70년대 전반에 걸쳐 긴급조치와 최루탄과 몽둥이로 정권 을 유지하기에 급급하였다.

(1) 학원가의 교련 반대운동

1971년 4·27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전남대 대학가가 술렁이고 있었다. 고등학 교 동창인 김정길, 정상용, 이양현은 전남대에 본격적인 사회과학 써클을 만들어 조직적인 학생운동을 준비했다. 정상용, 이양현은 고교시절부터 향토반(후에 광 랑으로 개칭)이라는 독서회 활동을 해서 일찍부터 사회의식에 눈을 뜬 상태였다.

이들은 조천준, 문덕희, 박형선, 김창남 등과 매주 한 번씩 만나 동학혁명, 4․19 혁명 등을 주제로 발표와 토론을 하고 조용범 교수의 후진국 경제론, E. H.

Carr 교수의 『역사란 무엇인가』 등의 책을 읽고 토론을 하였는데 그 활동이 사찰 당국에 알려져 감시를 받게 되었다. 곧 이어 4․27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고, 선거는 1969년 3선 개헌 국민투표에 성공한 박정희 후보와 신민당의 김영삼, 이 철승을 누르고 후보가 된 40대 기수 김대중 후보와의 대결이었다. 당시 선거는

대통령선거라기보다는 군사독재와 민주세력간의 싸움이었다. 4월 초에 함석헌, 이병린, 천관우 등 재야인사들이 모여 민주수호 국민회의를 만들었고, 학생들은 민주수호 청년학생위원회를, 백기완 등은 민주수호 청년위원회를 만들어 총선투 쟁을 준비하였고 광주·전남에서는 홍남순을 중심으로 민주수호 전남협의회를 결 성하였다. 전남대는 전국 대학생들과 함께 부정선거를 막기 위해 선거참관운동을 벌이는 등 노력을 하였으나 결과는 패배였다.

4·27 선거를 전후해서 전국에서 교련반대 시위가 시작되었다. 전남대도 5월까 지 문리대와 의예과를 중심으로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9 월 준비를 거쳐 10월초 전국적인 학생 시위가 시작되었다. 전남대는 고재득, 홍 유석, 라병수 등 군대를 제대한 복학생과 송정민, 허신석, 박연재 등이 주도했고 법대 학생회장 김진이 총학생회 총무부장을 맡으면서 총학생회가 함께 했다. 민 족사회연구회에서는 정상용이 전면에 나서기로 하고 나머지는 시위 군중 속에 서 함께 하기로 했다. 당시 ‘녹두’지라는 지하신문이 배포되었다. 녹두지의 창간 사는 녹두장군 전봉준과 동학의 혁명정신을 연결시키고자 했던 내용으로 박석 무가 썼다.

당시 대학교 시위는 학원의 병영화나 교련 문제를 넘어 8월에 일어났던 광주 대단지 폭동 등 민생문제까지 거론했으며 이에 놀란 박정희 군사정부는 고려대 에 무장군인을 투입시켜 시위 주동자를 납치해가고 곧바로 위수령을 내려 전남 대 등 전국 주요대학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이 시위로 전국적으로 174명을 제 적, 무기정학을 시켰는데 전남대만 33명이었다. 그만큼 전남대 시위는 격렬했다.

박정희 공업화 정책의 모순이 가장 심화된 광주·전남에서 당연한 귀결이었다.

(2) 지역 내 최초의 반유신투쟁으로서 ‘함성지 사건’

1972년 10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유신헌법이 발표되었다. 4․27 선거당시 김대중 후보 예언대로 박정희 영구집권 음모가 드디어 구체화 된 것이다. 국회는 해산되었고 국회의원들은 남산 중앙정보부에 불려가서 10분도 못되어 모두 각서 를 쓰고 나왔다. 각서를 거부한 김상현, 조연하, 조윤형, 김한수 의원 등은 뇌물 죄로 구속되었다. 12월 9일 전남대에 ‘함성’지가 뿌려졌다. 8절지를 양면으로 접 어 신문 형태로 만들어졌고, 앞면에 나온 창간사는 매우 강렬했으며 명문이었다.

함성지는 전남대만이 아니라 광주 시내 몇 개 고등학교에 뿌려졌으며 내용에 유

신 헌법 뿐만 아니라 박정희 개인에 대한 직접 공격까지 들어있어 박정희가 진 노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함성지는 이강, 김남주가 제작 배포하였다. 두 사람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 듬해 3월 서울 일원에 뿌려 ‘서울 놈들’(당시 김남주의 표현)을 움직이고, 고발지 를 서울에서 광주의 학생운동 지도자한테 부치기 위해, 이강이 광주에서 제작해 서울에 있는 김남주에게 부치려다 수화물이 발각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정보부 가 국가보안법을 적용하기 위해 당시 북중학교 교사였던 박석무를 교사하였다는 명목으로 수괴로 만들고, 김정길, 김용래 등의 조직을 붙여서 조작했던 사건이 다. 사건은 조작되었지만 이강, 김남주의 함성, 고발지 투쟁은 반 유신 투쟁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함성지 사건이 갖는 의미를 세 가지로 함축할 수 있다. 첫번째는 최초의 반유 신 투쟁이었다. 1973년 4월 18일 박형규 목사와 기독학생회(KSCF)가 주도한 남산 부활절 사건을 최초의 반유신 투쟁으로 알고 있는데 함성 고발지 사건은 이보다 5개월이나 앞섰다. 두번째는 이강, 김남주는 전남대 학생운동이 서울이나 특정 대학을 뒤쫓아가는 운동이 아니라 주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준비 해왔다는 것이다. 이런 정신은 민청학련과 교육지표 사건, 광주 민중항쟁과 ’80 년 이후의 전국 운동건설 과정에서 광주 ․ 전남의 선도성과 주도성의 정신으로 이 어졌다. 세번째는 함성 고발지 재판 과정은 ’73년 4월부터 12월까지 10차례 이 상 공판이 진행되었는데, 공판 때마다 전남대 학생들이 초만원을 이루었고 법대 같은 경우에는 강의를 전폐하고 공판과정을 지켜보면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유 신 헌법의 부당성을 확인하는 학습의 장이 되었다.

(3) 지역 청년운동, 민중운동 등의 자양분 : 민청학련 사건

1973년 9월 하순 경 함성지 사건 관련자들은 1심에서 박석무, 이강, 김남주를 제외하고 모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리고 한동안 잠잠했던 대학가에 최초로 서울대 문리대 시위가 터졌다. 박형규 목사의 제일교회에 다니던 나병식, 황인성 과 광주 출신 고아석과 서울 문리대 학생회가 주도한 것이다. 문리대 교정에는 헬리콥터가 동원되어 사진을 찍었으며 주동자는 구속되었다. 국회에서 김대중 납 치사건과 구속학생 석방문제를 들고 일어났고 얼마 후 구속 학생들이 풀려났다.

국민과 학생들, 국회의원들이 유신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천년만년

갈 것 같은 유신의 견고한 성곽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전국의 캠퍼스가 다 시 유신정권과 일전의 태세에 돌입했고 재야 민주 인사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남대에서는 김상윤이 문리대를 중심으로 함성지 사건으로 제적당한 사람들을 복학시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움직이고, 윤한봉은 민족사회연구회의 후신인 교양 독서회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가면서 장준하, 백기완, 함석헌, 법정 등 민주 인사들이 100만인 개헌청원 서명운동으로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에 놀란 박정희 군사정부 는 ’74년 1월 긴급조치 1호를 선포하고 유신헌법을 부정 비방 왜곡한 죄로 장준 하, 백기완을 구속시켰다. ’73년 말에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정치재야원 로들과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계 인사, 지역적으로는 서울, 광주, 대구, 부산 등 곳곳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반유신 투쟁의 열기가 모아지고 있었다.

광주·전남은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광주·전남의 대표였던 홍남순 변호사 사랑방 에 야당 당원들을 비롯한 민주 인사들이 모여들었고, 이기홍, 김세원을 중심으로 혁신계 인사들이 함께 하였으며 학생운동의 선배 격이었던 박석무, 전홍준이 바 삐 서울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특히, 김세원은 우홍선 등 인혁계 인사들과 전국 적 연계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고, 당시 박석무와 조대 의대생이었던 전홍준은 서울의 조영래, 장기표 등과 연계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74년 초 이런 자연 발생적 흐름들이 전국적인 대학생들의 연대조직으로 모아질 필요성이 대두되어 윤한봉이 전남대 대표로 서울대 황인성과 연결되고, 학생들은 대표자 모임을 통 해서 통일성을 확보하고 좀 더 체계적으로 3,4월 대학생 연합시위를 준비하였다.

민청학련의 처음 논의는 1973년 10월 이후 서울대 학생운동의 핵심인물이었던 나병식,이철, 유인태 등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으며 대구, 부산, 광주 등 전국 대학 으로 연결이 시도되었다. 전국적인 연결은 1973년 초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하였 으며 1974년 초 서울대와 경북대, 그리고 전남대 등의 학생들이 모여서 전국적 인 시위를 계획하였다 4월 3일에는 민청학련 명의의 유인물들이 각 대학에 뿌려 졌다.

박정희 정권은 3월 29일 각 대학 학생운동 지도부의 대규모 검거에 들어갔으 며 연행된 학생들의 강압적인 고문과 폭행 심문을 근거로 4월 3일 오후 4시 긴 급조치 4호를 발표하였다. 4월 25일 중앙정보부에서 민청학련사건을 발표하면서 당시 240여명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으며 이중 민청학련 배후조종자는 2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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