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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체제의 몰락과 정치적 기회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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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체제는 1972년 유신헌법 선포로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는 1979년까 지의 정치체제를 가리킨다. 이 시기는 한국현대사 속에서 민주주의가 철저히 말 살된 ‘한국 민주주의의 최대 암흑기’였다. 박정희는 1972년 유신헌법을 선포하여 대통령직선제를 폐지하고 간선제로 전환하였으며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를 신설 하여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임명케 함으로써 의회를 대통령 통제 하에 두었을 뿐 아니라 국민에 대한 각종 감시와 통제 기제를 제도적으로 강화하였다.

유신체제는 선거 민주주의적 방식으로는 유지가 불가능할 정도로 정치적 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에 대응하여 높은 수준의 폭압과 감시를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유신체제는 1960년대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잉태되었다. 1961년 쿠데타를 통 해 집권한 박정희는 1963년 ‘민정이양’을 위한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 후 1967년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1969년 박정희 정권은 연임만 이 허용되었던 당시 헌법을 3선이 가능하도록 하는 개정 작업에 착수하였다. 소 위 ‘3선 개헌’이었다. 이는 장기집권에 대한 우려를 낳았고, 전 국민적 반대투쟁 을 촉발하였다. ‘3선 개헌’ 반대투쟁이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의 다른 정치사 회적 저항과 맞물리면서 박정희 정권은 심대한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였다.

정치적 위기는 1960년대 말 이후의 경제적 위기와 중첩되면서 전반적인 체제 위기로 전환되고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1960년대는 수출 지향적이고 노동집약적 인 산업화의 시동기였다. 박정희 정권은 정부 차원에서 강력한 수출드라이브정책 을 실시하였고, 내부의 경제적 자원과 외국차관을 수출 증진과 성장 촉진에 집중 적으로 투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수출지향 기업들이 출현하였고, 이들은 1960년대 후반부터 일정한 수출성과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 동집약적 산업화는 1970년대 초부터 병목지점에 도달하게 되었고, 이들 수출지 향 기업들은 다수가 차관기업으로 많은 수가 부도 위기에 몰리면서 한국 경제에 는 전반적 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박정희 정권은 기업들 의 부채를 합법적인 방식으로 유예하는 ‘8·3조치’를 1972년에 시행하였지만 전 반적인 위기는 수습되지 않았다. 이처럼 정치적·경제적 위기가 맞물리면서 박정 희 정권은 유신 전야에 심대한 체제위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 체제위기는 1960년대 노동집약적 산업화의 위기, 초기 산업화의 모순에서 비롯된 기층민중 의 생존권투쟁, 군부통치의 장기화에 대응하는 반독재민주화투쟁의 고양으로 인 한 정치적 위기의 만성화, 미국과 중국의 수교 등 동북아에서의 국제적 냉전구조 의 해체로 인한 반공 이데올로기의 위기가 상호작용하면서 확대되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출현한 전체주의적 체제가 바로 유신체제였다. ‘3선 개헌’ 직후 치러진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와 김대중 후보의 접전을 겪은 후, 박정희를 정점으로 하는 군부통치 엘리트들은 선거를 통한 정권 재창출이 사 실상 불가능하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고, 그에 따라 아예 직선제를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을 간접선출하며 대통령 연임 조항을 없애는 등 장기집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반민주주의적인 유신헌법을 만드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던 것이다. 유신체제는 바로 이처럼 심대한 체제위기에 직면한 박정희

정권이 1인 종신집권체제 구축을 통하여 ‘폭력적인 방식’으로 위기 타개를 위한 시도라고 규정할 수 있다.

유신정권은 1960년대까지 그나마 일정하게 존재하고 있던 민주주의적 형식성 과 절차성을 완전히 청산하고 억압적 국가기구를 중심으로 전방위적인 탄압을 가하며, 이를 통해 점차 고양되어 가는 민중적 저항을 억제하는 ‘초 강압적 군부 정권’이라는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의 억압적 재편은 역으로 국민들 의 더 큰 정치적 불만과 저항을 촉발하였다. 그러자 정치적 불만을 억제하기 위 하여, 언론과 국회에 대한 강도 높은 통제와 탄핵이 자행되었고, 이는 또 다시 국민적 분노와 저항을 촉발하는 ‘정치적 악순환’을 낳았다.

이러한 정치적 악순환의 정점에 ‘긴급조치 9호’ 시대가 존재한다. 유신체제의 수립 이후에도 저항이 확산되고 국민들의 정치적 불만이 제어되지 않자, 유신정 권은 유신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긴급조치권을 악용하여 1975년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였다. 이를 통해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과 대통령을 비판하는 모든 형태 의 말과 행동을 금압하고, 특히 그것을 국민들에게 감추기 위해 언론보도 자체를 통제하였다. 정부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기 위하여 비판적 표현과 보도 자체를 처 벌하는 ‘민주주의의 최소기준’에서 보더라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억압적 체제 였기 때문에 일체의 저항운동은 불법화되었지만, 역으로 저항의 잠재력은 대단히 확장되었다.58)

그러나 철옹성 같던 박정희 유신체제는 내부의 균열로 인하여 스스로 무너지 고 말았다. 부마항쟁과 연이은 대학들의 소요 움직임으로 인하여 충격을 받은 중 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고 만 것이다. 그것이 10․26정변이 다. 그날은 부마항쟁의 불길이 인근 대구로 북상할 조짐을 보이던 중이었다.

부마항쟁은 10월 20일 종료되었으나, 곧이어 대구의 주요 대학들에서 소요 움 직임이 있었다. 이에 경북대와 영남대는 부마항쟁의 확산을 막기 위하여 10월 22일과 23일에 각각 휴교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10월 25일 계명대 학생 2,000 여 명이 유신철폐를 요구하며 시위에 돌입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밤,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의 만찬장에서 부마항쟁과 대 야공작에 관해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대화를 나누던 중, 정보부장 김재규는 미리 준비해 온 권총으로 박정희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을 저격·살해하였다. 사건 58)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2』, 돌베개, 2009, p. 19.

직후 김재규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통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무회의를 소 집하여 자신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정승화가 협력하지 않음으로써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한 상태에서 김재규 는 전두환 휘하 보안사요원들에게 체포되었다. 정변을 일으킨 김재규는 정권 장 악에는 실패하였지만 뒷날 법정에서 그 스스로 ‘유신의 심장’이라 표현한 독재자 박정희 제거에는 성공하였다. 그로써 유신체제도 급격히 무너졌다.

김재규의 10·26정변이 박정희의 절명과 함께 사실상 유신정권을 붕괴시켰으 며, 체제의 종말을 조금이나마 앞당겼다. 그 철옹성 같던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 고, 짧았으나 ‘서울의 봄’을 가져오게 된 것도 엄연히 10·26정변의 결과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0·26정변이 발생하지 않은 가운데 부산과 마산지역의 시위가 계속 되었다면 피해는 훨씬 더 대규모로 확산될 상황이었다. 김재규의 10·26정 변은 그러한 흐름을 일단 끊어준 것이다. 물론 박정희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유신 체제는 신군부체제로 계속 이어졌으며, 오월광주항쟁이라는 유혈투쟁과 6월 민 주항쟁 같은 전 국민적 투쟁 등 이후의 오랜 저항을 통해서만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김재규 식의 테러 방식으로는 결코 군사독재 해체가 불가능한 것임을 반증한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전두환 신군부체제의 출현은, 유신체제가 어떤 방식으로 몰락을 고하였든 그 무렵으로서는 출현할 수밖에 없 는 계급적·정치적 조건의 산물임을 반증하는 것일 수 있다. 전자의 주장에 동의 하더라도 당시로서는 박정희 정권의 종식 그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했을 수 있다.

10·26정변이 아니었다면 박정희 정권의 종식이 그처럼 급속히 진행될 수 있었을 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10·26정변과 박정희의 죽음은 유신체제가 직면하고 있던 여러 위기들의 결과 였다. 그 위기의 얼개는 종속적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중화학 공업화의 파행,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급속히 팽창한 노동자와 중산층 민심 이반, 제도야당을 포함한 반유신 저항연대 구축, 제한적이긴 하나 한미 간 갈등의 심화 등 다양한 수준의 위기들이 첩첩이 어우러진 모습이었다. 바로 이런 위기들의 복합적 작용 속에서 부마항쟁으로 대표된 아래로 부터의 저항이 폭발하였고, 그 대응을 둘러 싸고 국가 내 권력 분파들이 갈등과 균열을 일으켜 정권 스스로 무너졌다. 즉 유 신체제 붕괴의 1차적이고 직접적인 요인은 국가권력의 내부 갈등과 대립(10·26 정변) 때문이었지만 이러한 권력의 내부 갈등 자체를 불러일으키고 폭발시킨 것

은 아래로 부터의 투쟁(부마항쟁)이었던 것이다.59)

예컨대 유신체제는 박정희의 죽음과 더불어 사실상 무너지기 시작하였으며, 그 것은 김재규의 10·26정변에 따른 것이었고, 그 결정적 계기가 부마항쟁이었다.

그리고 신군부에 의해 체제가 다시 반동화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부마항쟁과 10·26정변이 몰고 온 유신체제 붕괴의 역사적 의미를 무효화할 수는 없다. 이는 박정희 일파의 5·16쿠데타로 체제가 반동화 되었다고 해서 4월혁명의 역사적 의 미가 무효화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60)

의원직을 박탈당했던 전 신민당 총재 김영삼과 연금조치를 받았던 김대중 등 은 정치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움직였다. 10·26정변 이후 총재권한을 되찾은 김 영삼은 1979년 11월 4일, 최규하 과도정부에 3개월 이내 헌법을 개정한 후 2개 월 이내 신헌법에 의한 직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할 것을 요구했다. 신민당은 박 정희 사후 정국은 신헌법에 따라 새로운 정권이 수립될 때까지의 과도기이며 최 규하 대통령 권한대행도 중립적 입장에서 정권교체를 수행하는 것 이상을 해서 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61) 또한 10·26정변 관련 수사가 종결된 이상 비상계엄 은 더 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최규하에게 ‘양심적 정치범 의 즉각 석방’, ‘긴급조치 위반자들에 대한 사면복권’, ‘김대중 사면복권’, ‘학원의 자유 보장’, ‘11월 13일 민주화 조치를 요구하다 연행된 9명의 인사들의 즉각 석방’, 등을 요구했다.62)

공화당은 11월 10일 당무회의를 거쳐 통일주체국민회의 후보를 내지 않기로 결정하고, 12일 신임 총재로 김종필을 선출했다. 11월 18일에는 김종필과 김영 삼이 회동했고, 11월 23일에는 최규하와 김영삼이 회동했다. 김대중은 12월 8일 에야 연금이 해제되어 다른 이들보다 정치활동이 다소 늦었다. 최규하는 대통령 취임식에서 잔여임기를 채우지 않고 가능한 한 빨리 개헌과 총선을 하겠다고 언 명했다.63) 이른바 3김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은 12·12군사반란을 심각하게 받아 들이지 않고, 헌법 개정 및 정권교체를 위한 정치일정에 관심을 쏟았다.64)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동교동계는 계엄령 즉각 철회, 최규하 대통령 대 59) 조현연,『한국현대정치의 악몽 - 국가폭력』, 책세상, 2001, p. 194.

60)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앞의 책, pp. 350-354.

61) 김삼웅 편저, 『서울의 봄 민주선언』, 한국학술정보 2001, pp. 34-36.

62) 김삼웅 편저, 위의 책, pp. 41-43.

63) 『동아일보』, 1979년 12월 21일자.

64) 심지연, 『한국정당정치사』, 백산서당 2004, pp. 283-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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