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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백회(원)의 공유된 인식과 신념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144-152)

“우리집은 학생들 운동권 학생들 윤한봉, 정용화, 조봉훈, 김남주등이 파 고 살고 하는 아지트였어요. 하루에 수십 명이 왔다 가고... 모두들 자고 가 고 선생님 말씀들 다 듣고 가고 하니까. 육체적으로 고되고 힘들어도 학생 들이 와서 민주화하고 학생운동 한다니까 힘이 나고 했지요. 선생님이 전교 조운동도 맨 먼저 시작했어요. 농민운동할때도 녹음기 하나 들도 일봉이 데 리고 다니면서 시골마을을 쭈-욱 다니셨어요.”

“나도 거의 밥을 못 먹고 힘들게 고생했지만 고생도 모르고 재미가 있어 서 신이 나서 운동권학생들 뒷바라지 했제. 우리 집 장맛을 안본 사람이 없 을 거요.”179)

이상의 구술자료에서 보듯이 송백회의 궁극적 신념은 여성문제의 해결을 위한 사회 구조적 민주화에 있다고 하겠다. 초기 양심수들에 대한 옥바라지 활동에서 보이듯, 모성공동체(母性共同體)로 출발한 송백회는 사회의 구조적 질곡을 통해 더 이상 양심수가 생겨나지 않고 여성에 대한 착취가 없는 구조적 틀로서 민주 정부 수립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민주화를 실현하고 여성의 성차별 과 여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박정희 유신독재를 물러나야 한다고 믿었다.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을 간파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인들이 단체로 기생관광을 하는 것은 단순한 매춘이 아니었음을 인식한 것이다.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에 서 공개적인 성 상품화, 일제의 새로운 식민지 정책, 굴욕적인 한일협정 등이 복 합적으로 작용하는 사안이었는데, 송백회 회원들은 스터디 활동과 기초자료들 수 집활동을 통해 함께 분노하며 실천의지를 다짐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송백 회 회원들은 당시 사회 현상 뒤에 숨은 본질까지 파고드는 예리한 사회인식을 키워나가는 한편 여성으로서의 모성성도 더불어 키워나갔다. 창립 당시 총무, 제 2기 회장을 맡았던 홍희윤은 저명한 소설가인 남편 황석영의 영향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홍희윤은 맨 처음 송백회에 대해 단순하게 옥바라지 팀을 하나 만들 자는 생각으로 창립에 참여하게 된다.

다음의 구술증언을 통해 송백회원들의 신념과 가치, 그리고 인지적 틀을 확인 해 볼 수 있다.

“우리 여성들은 뭐가 있었는가 하면 송백회 창립과정인데 긴급조치 7호 9호가 있었죠? 긴급조치 7호 세대라고 하는데 그때 학생운동권들이나 재야 쪽이나 많이 감옥에 들어가 있었죠. 많이 들어가 갔었다가 ‘그러면 여성을 중심으로 해서 옥바라지 팀을 우리가 하나 만들자’ 그래 갖고 그때 윤한봉 씨라구 그분이 많이 도와줬죠. 그거 결성한 게 78년도인가? 송백회 결성을 했어요. 대개 구속자 가족들 하고 여교사들 하고 중심으로 해서. 그때 나는 1회 총무였어요. 총무하면서 그 당시 굉장히 열성적으로 옥바라지를 했지 요. 양말 모으고, 책 모으고. 이런 얘기하는 거는 80년 5월을 겪으면서 일 반적으로 평소 있던 조직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80년 5월 광주를 두 가지로 볼 수가 있는데 한 가지는 별 의식이 없이 공분(公 噴)에 의해서 갑자기 확 혁명적 그걸루 꼽히는 사람들이 있죠. 모든 혁명이 다 그렇지만 갑자기 시민들이 다 죽고 나자빠지고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막 공분을 느껴갖고, 거기 확 투여를 하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런 부류하구 또 하나는 기본적으로 자기 사고를 하고 의식이 있는 대개 지식인 출신이지. 그렇게 분명한 운동 목적이나 변혁에 대한 열정을 갖고 쭉 활동 해왔던 사람들이 80년을 맞이해갖고 자신을 전적으로 투여하는 것이지 이 두 가지가 결합해가지고 5․18이 어떤 의미에선 항쟁의 의미를 띤 거거든 요.”180)

“... 80년대 지나서 레드 콤플렉스(red complex)도 없어지고, 소설 『남

부군』도 나오고 그랬잖아요? 70년대 서울에 있을 때 극비리에 이제 우리 핵심 멤버들이 『임꺽정』 같은 소설을 읽거나 또 좌익서클 노래를 우리끼 리 부르고 막 그런 분위기는 있었어요. 좌파들이 60년대 이후에 다 당하고 막 그랬지만 한편으론 이상한 그리움 같은 것이 있잖아요. 우리가 이념적으 로 좌파는 아니지만 그 사람들이 정말 순결하게 죽었다는, 어떤 혁명에 헌 신하고 죽었다는 이상한 환상이 있었어요. 지금은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나 서 그런 환상도 사라졌는데. 그때는 좌익도 다들 지식인이었어요. 가장 순결 하게 한 사람들도 그렇고 다들 북쪽으로 올라갔으니까 이상한 그리움들이 서로 공개적으론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면면하게 흐르고 있었어요. 이제 고 런 것들이 숨겨진 정서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송백회 활동하면서 어떤 끈을 잡았다고나 할까. 어떤 한 부분에서 헌신을 한다는 자기 위안이랄까 그런 것들이 있고 여러 가지 송백회의 방향설정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봐도 굉장히 묵직하게 여성운동 이런 거 공부하고 여 선생들이 많이 투입이 됐거든요, 송백회에서 방학 동안에 막 짜고 그랬어 요.”181)

송백회는 신분, 직업 등의 구분을 뛰어 넘어 다양한 부류의 활동가들이 참여하 였다. 당시 현직 교사들도 송백회 활동에 결합했다.

“정현애 선생님 중심으로 여교사들이 많이 투입이 되고 한쪽에는 아줌마 부대들, 그 식구들이 있었고 한쪽에는 여교사 중심으로 학습을 했는데 정현 애 선생님이 많이 했고. 그러면 그 쪽에서는 이제 방향설정 같은 것들이 나 오면서 공부도 많이 했고 그랬어요. 돈도 자치적으로 회비 내서 옥바라지 했고. 절대 어디서 받은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끌어갔고. 그런 거 보면 대단 히 어떤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저거였는데 5․18로 맥이 끊겼다고 할까. 맥이 끊긴 건 아니고 5․18로 해서 그런 역량이 분출된 거죠.”182)

당시 송백회 서기를 맡았던 활동가 이윤정(연구자)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기 독청년활동을 통해 민주화운동과 관련을 맺기 시작한다. 이윤정은 기독교적 시각 에서 사회와 역사인식의 틀을 정립하기 시작하였고 민청학련 사건 등을 통해 운 180) 홍희윤, 앞의 책, p. 29.

181) 위의 책, p. 29.

182) 위의 책, p. 29.

동에 대한 신념과 열정을 쌓게 된다.

“그 때 제가 함석헌 선생님도 만나게 되거든요. 함석헌 선생님으로부터 간디 공부 학습을 받게 됐어요. 그러면서 보다 기독교적인 시각으로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인식이 심화됐었던 것 같애요. 그런데 이제 제가 또 하나 운동 을 하게 된 계기가 동부교회를 다니던 많은 선후배들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대거 구속이 됐어요. 그래서 ‘왜 박정희 유신정권은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을 감옥에 넣어야 되는가?’에 대해서 눈이 화악 뜨이기 시작했어요. 저한테는 그것이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어요. 지금 생각하면은 만들어진 사건이고 학생운동을 제거하기 위한 그런 거였는데. 거기 안에서 만났던 친구들이 대 학에 가서 운동을 했었어요. 정용화라고 있거든요, 전남일보 기자를 하시기 도 했던 정용화 씨. 그렇게 하면서 운동하는 분들하고 만나게 됐는데 윤한 봉 씨, 김상윤 선배 또는 김남주 시인 이런 분들을 만나게 되고 저한테도 어떤 새로운 열정 같은 게 크게 솟아올랐었던 것 같애요. 그 때가 유신말기 였는데요 그래서 인제 이쪽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던 사람들을 중심으 로 해서 구속자협의회라는 것이 만들어지는데요. 옥바라지를 위해서 구속자 협의회 가족들하고 우리 여성들이 뭔가를 해 보자, 또 우리가 여성 문제에 대해서 얘기를 해 보자 그래가지고 만들어진 것이 송백회라고 운동하는 모 임이었어요. 그리고 윤한봉 선생을 중심으로 해서 현대문화연구소라고 하는 그룹이 있었구요. 또 녹두서점이라고 하는 그룹이 있었고 또 여러 개의 조 그만한 운동조직들이 좀 있었어요. 거기에 같이 더불어서 인제 장기적으로 변혁운동을 고민해 보자고 결심한 거죠.”183)

송백회 회원들은 단순한 공분에 의해 사회운동에 참가한 것이 아니고, 활동과 정을 통해 점차 한국 사회의 변혁에 대한 신념을 키워나갔으며 광주항쟁의 과정 을 통해 조직의 역동성을 더욱 키워나갔던 것이다. 이들은 단순한 종교적 단체로 머물지도 않았고, 자유주의 여성운동이 주장하는 남녀평등운동에만 매몰되지도 않았다. 옥바라지라는 일상적 투쟁의 경험을 통해 공동체 의식, 인류애, 헌신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였으며, 나아가 사회변혁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가치를 가 지며 인지적 실천을 하였다.

183) 이윤정,『5․18항쟁 중언자료집4』, 5․18연구소자료총서, pp. 50-51.

“그니까 80년 5월에 투여할 수 있는 조직 체계는 송백회, 문화팀으로서 광대, 그리고 들불야학 팀들이었고 이제 하여튼 민청 세대들, 학생운동 출신 들이 있었죠. 그 당시는 그런 걸 못 느꼈는데 지금은 우리 스스로 송백회를 재조명해 볼 필요는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성운동이라는 게 그 당시만 해도 서울 쪽도 없고, 광주에도 여성운동이라는 게 유신체제가 너무 엄혹하 니까 기독교 운동이라든가 가톨릭 운동같이 어떤 종교성을 빌려갖고 운동했 던 게 참 많았잖아요? 그런 데서 돈도 많이 빌려 쓰고. 여성운동이라는 게 그때는 참 그랬어요. 근데 우리는 그런 건 아니었지. 자발적으로 변혁운동에 관심이 있어서 구체적 현실에 옥바라지를 하고 그랬으니까. 우리 나름대로 전망도 가지고 있었고. 그러니까 생각해보면 우리는 의식을 못했지만 여성 운동이 전체적으로 남한사회에서 상당히 주체적으로 뿌리를 내린 건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어요. 자화자찬인지 모르겠지만 5․18이 나지 않았다면 이런 여성운동이 전국적으로 뿌리를 내려서 전국적인 효과가 있었겠다 이런 생각 이 들죠. 그래도 어쨌든 그런 조직이 있었으니까 5․18이 탁 난 거죠.”184)

이상에서 보듯이, 송백회 창립멤버들은 여성들의 역할을 장기적인 사회변혁에 있다고 판단하여 송백회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인물과 단체들을 아우르는 사회 운동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송기숙)이 감옥에 갔는데 난 세상물정을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냥 얘들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울기만하고 그랬어요. 하도 막막하기만 하고 다들 그때는 살아서 돌아 온 다는 것을 생각을 못했죠. 옆에서들 홍희윤씨 호준이 엄마랑, 이강씨 부인이랑 주변에서 많이들 찾아와서 위로도 해주고 힘이 되어서 시간이 어떻게 지나고 지나니까 선생님이 나왔어요. 김밥도 말 지 못하는 사람이 그때 모밀집을 한다고 벌였는데... 그 뒤에는 화장품가게 도 하고... 서로 의지가 많이 되었제... 송백회 사람들 차암 고마웠어요. 명노 근교수 사모님 안성례랑 이웃들 많이 도와주는데 대단하더라구요.”185)

이처럼 공동체 활동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결속된 송백회는 특별한 학습과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민주화와 정의의 가치를 몸소 체득하였으며 뭉쳐야만 큰 힘을

184) 위의 책, p. 29.

185) 김영애, 구술증언, 2011.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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