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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에서 송백회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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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YWCA 항쟁공동체 결성

송백회 회원들은 신군부의 광주·전남 지역 민주화운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 거령으로 현대문화연구소를 폐쇄함에 따라 녹두서점을 중심으로 정보를 교환하 고 연락을 취하면서 투쟁을 전개하였다. 임영희의 문화방송국 화염병 투척, 이윤 정, 정유아, 김영철, 김상집 등의 차량확보와 전남대 물품확보, 박경희, 홍희윤의 기독병원 헌혈운동과 함께 가두투쟁을 하였다. 민청련 관련자들은 대부분 예비검 속이 되어 남편들의 행방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윤경자, 김영자, 선점숙, 정희옥 등도 가두시위에 합류하였다. 많은 시민들의 참여에 따라 5월 23일에는 베이스캠프를 YWCA로 옮겼다. 첫째는 공간이 넓어 시민군들이 취사와 숙식이 가능하였고, 둘째는 계엄군에게 포위되는 마지막 상황이 되었을 때 피신할 수 있 는 통로가 많아 희생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 결정되었다.

다음 증언을 살펴보면 송백회가 항쟁 중반기인 5월 23일 YWCA로 거점을 옮 기고 항쟁의 장기화 투쟁을 준비하게 된다. 홍희윤, 정유아, 이윤정, 임영희 정 222) 임미령, 구술증언.

223)『광주YWCA70년사』, 1992.

현애 등은 극단 광대 등과 함께 YWCA항쟁공동체를 결성하고 도청지도부의 윤 상원, 정상용, 윤강옥 등과 함께 결사항쟁투쟁의 전의를 다져 감을 살펴 볼 수 있다.

“23일 YWCA로 옮기게 되었다. 그래서 조를 편성했는데 가두홍보조, 모금조, 리본 조, 대자보조, 취사조 등으로 조직화했다. 여성들이 YWCA를 중심으로 조직력을 갖 춰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비타협적인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여성들은 끝까지 죽 음으로써 지켜야 한다는 의견이었다.224)

“점차 체계를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이 때 홍보와 모금활동은 여성들 몫으로 되었 다. 조직 결성은 5월 23일 YWCA 소심당 강당에 모여 정하였는데 모금조(임영희), 대자보조(김정희), 선전홍보조(이윤정, 정현애), YWCA취사조(박승채), 가두방송조 등 으로 구성했다. YWCA항쟁지도부는 무기를 반납하자는 수습파들과는 달리 ‘끝까지 싸우자’는 항쟁파의 한 중심에 서서 투쟁을 전개하였다. 25일부터는 도청 취사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YWCA는 여성들 활동의 거점으로 투사회보 제작, 취사, 홍보, 선 전 등 모든 활동이 이곳에서 진행되었다. 하다 보니까 눈에 보이는 대로 무슨 일이 든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나중에는 주도적으로 진행을 해 가는 상태가 되었다. 처 음부터 5·18은 민중항쟁 자체가 계획적이지 않았지만 점점 확대되어 갔다.225)

송백회를 중심으로 한 YWCA항쟁지도부는 5월 26일 오후 계엄군의 최후통첩 을 받은 후 도청지도부와 ‘죽음으로 광주를 지키자!’며 YWCA 소심당에서 마지 막 회의를 하였다. 윤상원, 정상용, 이양현, 윤강옥, 김영철 등 도청팀과 이윤정, 정유아, 임영희, 정현애 등 YWCA팀, 극단 광대팀의 김정희, 최인선, 김영희, 투 사회보 팀 전용호, 박용준, 민청협 박몽구, 안길정 등과 결사항전을 결의 했다.

아래 증언들을 살펴보면 YWCA항쟁공동체는 회의구조를 통해서 투쟁방향을 결정하고 계엄군 진압의 최후통첩에 굴하지 않고 결사항전을 견인해 내었으며 광주시민투쟁위원회와 사수투쟁을 전개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곧 YWCA항쟁 공동체가 광주시민투쟁위윈회의 일원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도청만 지도부였던 것이 아니다. 도청만 지도부가 아니라 실제적으로는 YWCA에서 활동하던 여성들이 다 지도부였다. 왜냐하면 송백회 여성들이

224) 임영희, 5·18연구소와의 인터뷰, 1999.9.6.

225) 정현애, 5·18연구소와의 인터뷰, 1999.8.3, 2000.4.1.

항쟁 발발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있었거든. 단지 여성들이 총을 들지 않았 기 때문에 도청에 들어가 상주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리고 여성들이 도청지 도부가 올바로 갈 수 있도록 견인하고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도청 항쟁지도부만이 지도부가 아니었고 YWCA를 중심으로 활동한 여성들이 주 체세력이었다.226)

“남자들이 하라마라 해서 한 것이 아니다. 여성들이 내용을 만들어서 대 자보 쓰고, 프랑카드 쓰고, 궐기대회 준비하고 그랬다. 여성들이 선전활동을 많이 했다. 총은 안 들었지. 총을 들고 안 들고 차이였다. 왜냐하면 남성들 은 총을 들고 도청으로 들어갔고 여성들은 YWCA에 필경조하고 홍보조가 남아 있었다. YWCA가 필요성이 없었으면 왜 도청 항쟁지도부의 남성들이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YWCA에 와서 회의를 했겠느냐.227)

“5․18에 참여했던 여성들 있잖아요. 우리가 수류탄 투척 작업(연습)도 해 보고 총 쏘는 것도 가르쳐 달라고 해서 배웠는데, 정말 우리가 그런 여성이 라는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저력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해요. 남성들보다 훨씬 강했던 건 사실이에요. 정현애, 정유아, 이윤정, 저까지 포함해서 주축 멤버들이 없었다면, 항쟁파가 그렇게 만들어져서 들어갔을까 의심스러워요.

남자들도 자기들이 왜 YWCA에 들어와서 회의를 했겠어요. Y에서 회의를 해서 Y에서 기획 회의를 개최했어요. Y에서 기획회의를 한 것은 Y에서 그 만큼 둥지를 틀어 주어서 가능했다는 얘기죠. 저는 그걸 이야기를 하고 싶 어요. 그렇지 않으면 도청 상황에서 할 수가 없어요. 강경하게 끝까지 싸워 야 한다는 의지를 여성들이 강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에 뒷받침되지 않았나 싶어요. 여자들이 정리하는 역할을 단단히 해줬다고 생각해요. 그 부분에 대 한 평가가 제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228)

이상에서 항쟁과정에서 송백회는 단순한 참가자가 아니라 항쟁의 지도부에 서 주체세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으며 선전 홍보 활동 등 남성들과 분업적 구조를 가지면서 운동을 확장시켜 나갔다.

226) 이윤정, 앞의 책, 1999.8.10.

227) 임영희, 앞의 인터뷰, 1999.9.6.

228) 임영희, 위의 인터뷰.

2) 선전․ 선동활동

송백회는 들불야학의 투사회보와 극단 광대가 진행했던 시민궐기대회, 대자보 작성 부착 등 선전선동활동에 깊이 참여하였다. 광천동에서 빈민운동을 하며 들 불야학을 만들어 활동했던 Y신협의 김영철, 박용준은 YWCA에서 정유아, 이윤 정과 같이 근무를 하고 있었기에 송백회와 자연스레 연대하였다. 극단 광대도

‘돼지풀이’ 공연 당시 송백회가 입장권 판매 등 지원활동을 통하여 서로 연대하 고 있었다. 5월 항쟁기간 중 농촌현실을 고발한 돼지풀이 공연 후 다음 작품인 광대의 ‘한씨 연대기’의 연습실이 YWCA의 양서조합 사무실이었기에 항쟁이 발 발하자 극단광대, 송백회, 들불야학, 양서조합 팀은 자연스럽게 항쟁공동체를 형 성할 수 있었다. 들불야학의 ‘투사회보’ 발행도 광천동 야학 교실에서 22일까지 8호를 내고 22일 YWCA로 옮겨 작업을 하였다. 송백회는 홍희윤 집에 있던 등 사기를 가져와 투사회보의 인쇄 작업을 지원했고 회원들이 대자보 작성, 성명서 작성, 추모 리본 제작, 관 구입, 모금 등의 조직을 편성하여 업무를 분담하는 등 항쟁을 치밀하게 주도했다.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는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전남 도청 앞 광장에서 5 차례 열렸다. 궐기대회는 YWCA항쟁공동체의 회의에 의해 극단 광대 팀이 송백 회와 들불야학 회원 및 자발적으로 참여한 청년학생들과 함께 추진하였다. 24일 2차 민주수호궐기대회에 임영희, 25일 제3차 민주수호궐기대회에 홍희윤이 ‘광 주시민에게 드리는 글’과 민주시 등을 낭독함으로서 홍보활동을 했다. 당시 이윤 정이 지은 시 ‘민주화여!’229)는 송백회의 오월투쟁의 정신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 다. 25일 도청 분수대 궐기대회에서 임영희와 최인선이 낭독하여 시민들의 뜨거 운 호응을 받았다.

3) 자금지원과 물품조달

송백회는 물품지원 및 자금지원, 식량공급, 화염병제작, 부상자 파악, 시체수습 (염) 활동 등을 담당하였다. 항쟁초기부터 송백회 집행부는 회의를 통해 항쟁의 장기화를 대비한 자금지원과 물품조달을 맡았다. YWCA와 녹두서점에서 화염병 제작과 YWCA와 도청 시민군 취사를 위한 인원을 발굴·조직화하였고, 각종 물품 229) 『5․18광주민중항쟁자료집』, 전남사회문제연구소편, pp. 131-132.

을 조달하여 도청, YWCA, YMCA 등에 제공하였다. 송백회는 쌀, 김치, 생필품 등과 함께 항쟁초기에 자금 70만원을 전달했다.

이 초기 자금으로 사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검은 리본제작, 시체 염에 필요한 솜, 가제 천, 관 구입, 시민군들 취사를 위한 된장, 쌀 등 식료품 구입과 시민궐 기대회 준비를 하였다. 초기에 도청 취사팀은 주소연을 비롯한 10대들이 맡고 있다가 YWCA항쟁지도부는 장기투쟁을 대비하여 취사조를 YWCA사회문제부 교 육생과 JOC회원들을 조직화하여 이정을 조장으로 최정임, 김순이, 윤청자, 남동 성당 정경숙(분다)을 도청으로 파견하였다. 도청 취사 팀은 1일 3개조 팀이 교대 하였고 YWCA취사는 박승채가 군대에서 취사반에 있었던 경험으로 총괄하였다.

박승채와 25일까지 YWCA취사를 함께했던 류선영은 26일 도청으로 들어가 27 일 새벽에 사망하였다.

“19일 오전이 되자 학생들이 서점에 모여 화염병을 처음 제작하였고 이 화염병은 가두시위에 사용되었다. 나는 장성소재 삼계중학교에 출근하였지 만 조급한 마음에 조퇴를 하여 공용정류장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공수대원 이 시위 중 쫓기는 사람을 죽여 화장실에서 시체 2구가 발견되었다는 소문 을 듣고 서점으로 줄달음쳤다. ‘대한민국 군대가 양민을 학살하다니…’ 온몸 이 부르르 떨렸다. 사람들을 피신시키기 보다는 사람들을 모아 적들에게 대 항해야 하겠다는 다짐이 뜨겁게 솟구쳤다. 다시 아는 사람들에게 ‘모여서 싸 우자!’고 연락을 취했다. 20일 오전에 당시 전남대 학생이 서점에 와서 맨손 으로 공수부대의 총칼에 맞설 수 없다면서 화염병을 대대적으로 만들기 시 작하였다."230)

“22일 상황이 격화되어 언제 은행업무가 중단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 러 개인예금 50만원, 송백회 공금 20만원을 인출하여 궐기대회 팀에 전달 하였다. 이 기금은 유효적절하게 사용되었다. 이후 YWCA에서 선전활동, 모 금활동, 취사활동에 참여하였다. 25일 궐기대회에서 여성대표가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했는데 사회적 명망성이 있는 분들이 낭독을 거절하여 YWCA활 동 팀 가운데 연장자인 내가 수십만 인파가 운집한 분수대 연단에 올라 여 성의 입장을 대변하는 성명서를 낭독하였다.”231)

230) 정현애, 현대사료연구소, 1991.3.

231) 홍희윤,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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