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한국에 대한 스페인의 역사적 관심

문서에서 한국-스페인 수교 70주년 : (페이지 49-52)

(4) 사회·문화 분야

6. 한국에 대한 스페인의 역사적 관심

알폰소 오헤다 마린 스페인한국연구소 (CEIC) 명예회장

스페인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알고 인지한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습니다. 이슬람 지배 하에 있던 알 안달루스(

al-Andalus

) 시기인 12세기에 세우타(Ceuta) 출신의 지도 제작자 겸 지리학자, 여행자이자 말라가에 자리잡은 타이파 왕국의 왕 이드리스 2세의 증손자인 알-이드리시가 신라를 중국 동쪽의 섬나라로 구별하였던 것입니다. 무슬림 및 기독교 지리학자들이 한국이 반도인지 섬인지 알아내는데6 수 세기가 소요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알-이드리시는 금이 풍부한 이 지역을 중시하였고, 개나 원숭이조차 금목걸이를 하였으며 주민들은 금실로 짠 옷을 걸쳤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여행자들이 신라 땅에 발을 들이면 온화한 기후에 매료되어 다시는 그 땅을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한다고 언급했습니다. 한국의 혹독한 겨울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알-이드리시는 신라의 가이와(계림이나 계귀?)라는 도시를 찾아냈습니다. 13세기에는, 하엔 지방의 알칼라 라 레알 출신의 지리학자, 시인, 역사가인 이븐 사이드(Ibn Said)가 땅이 비옥하고 사람이 살기에 쾌적한 섬들로 이루어진 신라(

al-Silā

)를 언급 하였습니다. 알-이드리시와 이븐 사이드 모두 시대에 뒤떨어진 오래된 지리적 정보를 모은 셈인데, 왜냐면 12세기와 13세기에는 이미 신라는 멸망하여 고려(Koryo) 왕조가 세워진 후였기 때문입니다.

한국,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조선 왕조에 대해 스페인이 정확하고 발전된 개념을 가지기까지는 몇 세기가 더 소요되었습니다. 조선이라는 명칭을 가장 비슷하게 처음 사용한 유럽인은 스페인의

6 Geógrafos del siglo XVII tales como Texeira, Linschoten, Mercator, Pierre Duval y otros contemplaban Corea como si fuera un territorio insular.

수도사 마르틴 데 라다(Martín de Rada)로 1575년7 「중국, 정확히는 타이빈에 관한 보고서

Relación verdadera de las cosas de China que propiamente se llama Taybin

8」에서 조선을 ‘차우 시엔(Chaussien)’으로 지칭했으며 이 보고서는 펠리페 2세에게 제출되었습니다. 중국 역사와도

7 Asílo afirman Cheong Sung-hwa y Lee Kihan, en “A Study of 16th-Century Western Books on Korea: The Birth of an Image”, Korea Journal, vol. 40, núm. 3, 2000, p. 274.

8 Como acertadamente señala Laurentis, Martín de Rada identificó Chaussien (Chosun) y Cauli (Caoli, Corea) como dos países diferentes. Véase, Ernesto de Laurentis, Evangelización y prestigio. Primeros encuentros entre España y Corea, Madrid, Verbum, 2008, p. 34. Téngase en cuenta que las noticias sobre Asia llegaban a Europa en aluvión, desde fuentes distintas, sin contrastarlas debidamente y, en líneas generales, desde la arrogancia cultural y religiosa de los occidentales.

9 Geoff Simons, Korea. The Search for Sovereignty, New York: Palgrave MacMillan, 1995, pp. 69-109.

헤수스(Jerónimo de Jesús) 수도사는 1595년 2월 10일자 편지에서 “일본이 마닐라를 정복하여 땅에서 땅으로, 섬에서 섬으로 이동하여 카가얀(Cagayán)까지 이를”10 가능성에 대해 언급합니다.

사실, 불신과 의심은 양국 모두에 해당되는 것으로, 히데요시도 그의 영토 내에서 반란을 목적으로 하는 스페인-포르투갈 공동작전에 대해 의심하기도 했습니다.11

그러나 우리는 필리핀이 아니라 한국이 침략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해 연구하였다는 점에서 ‘일본이라는 요소’가 스페인이 한국에 대해 알게 된 계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일본이라는 요소’가 한국에 복음을 전하고자 한 스페인의 초기 선교에도 결정적인 작용을 했습니다. 예수회 신부인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éspedes) 신부와 프란시스코 데 라구나(Francisco de Laguna) 신부가 각각 1593년과 1597년에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도미니크 수도회의 기록에 따르면, 스페인 국왕의 교회 보호권(

Patronato

)을 가지고 설교자 들의 수도회(=도미니크 수도회)가 1618년 필리핀에서 한국으로의 선교를 시도했지만 실패했 습니다. 필리핀과 한국 간에 직접 항로가 없었기에 세 명의 도미니코 수도사가 유력 가문 출신인 조선인 한 명을 통역 겸 안내자로 데리고 그들을 한국 해안으로 수송해 줄 선박을 구하기 위해 일본 으로 항했지만 실패한 것입니다.

17세기 대부분과 18세기, 그리고 19세기 중반까지 한국과 스페인 간의 교류 역사의 두 번째 장이 열립니다. 정보와 자료의 극심한 부재가 이 시기를 특징 짓습니다. 이 오랜 어둠의 시기를 밝혀줄 연구가 부족하여, 한국에 대한 스페인의 관심이 사라져버린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특히 ‘쇄국 정책’으로 인해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지만 19세기 후반 스페인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되살아 납니다. 스페인 국가역사기록보관소에 남아 있는 스페인 외교부의 무역협정 추진계획이나 스페인

10 Emilio Sola, Libro de las maravillas del Oriente Lejano, Madrid, Editora Nacional, 1980, p. 90.

11 Sanjay Subrahmanyam, The Portuguese empire of Asia, 1500-1700: a political and economic history, Wiley-Blackwell, 2012, p. 160.

사람들의 한국 방문, 아말리아 아마도르(Amalia Amador) 같은 일부 스페인 국민의 한국, 그 중에 서도 특히 (인천) 제물포 정착 사실 등이 그 사례입니다.

양국 간 교류의 세 번째 장은 1950년 3월 외교 관계 수립 이후 시작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70년간 지속되고 있습니다. 정치, 문화, 경제, 사회, 교육, 과학 및 관광 부문에 걸쳐 가장 활기차고, 완전 하며 다양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스페인과 대한민국, 양국 모두 시장경제체제에서 빠 른 경제 발전을 이룬 점, 그리고 민주적 정치 제도의 정착이라는 세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나란히 발전을 이루어 온 점이 특징적입니다.

문서에서 한국-스페인 수교 70주년 : (페이지 4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