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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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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회·문화 분야

1. 초기 단계

1.1 스페인 성직자들의 활동과 견해

3인의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코 하비에르(Francisco Javier)와 코스메 데 토레스(Cosme de Torres), 후안 페르난데스(Juan Fernández)는 포르투갈의 동인도 수도였던 고아에서 일본어 통역이자 파울로 데 산타 페(Paulo de Santa Fe)라는 세례명을 받은 일본인 안지로(혹은 야히로)의 증언 덕분에 1549년 일본의 가고시마섬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조선 왕조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1566년 발렌시아 출신 코스메 데 토레스는 한국에 가기로 결심하고, 교황청 사절단 설치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해 포르투갈인 빌레라(Vilela)를 파견하려고 했으나, 이 시도는 봉건전쟁이 한창이던 일본의 상황으로 인해 결실을 맺지는 못했습니다.

한국과 스페인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라면, 마드리드 출신 예수회 신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12가 1593년 12월부터 1595년 초봄까지 한국 땅에 거주한 첫 유럽인으로 공인되고 있으며, 이 체류가 자타가 확인한 것처럼 미리 계획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논란이 되는 주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데, 세스페데스가 조선 땅을 침범한 15만 명 이상의 일본 군인들 가운데 2천 명 가량의 신자에게 성직자로서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로 인해 항상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한국의 일반인들과는 별다른 접촉이 없었던 것 같으나,

12 Chul Park, Testimonios literarios de la labor cultural de las misiones españolas en el Extremo Oriente: Gregorio de Céspedes, Madrid, MAE, 1986 (véase la amplia bibliografía allíincluida); Ralph M. Cory, “Some notes on Father Gregorio de Céspedes.

Korea’s First European Visitor”, Transactions of 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vol. XXVII, Seoul, 1937, pp.

1-55; Juan G. Ruiz de Medina, Orígenes de la Iglesia Católica Coreana entre 1556 hasta 1784. Roma, Institutum Historicum S.

I., 1986.

13 Relación de una gravíssima persecución que un tyrano de los reynos de Japón, llamado Cambucodono, ha levantado contra los christianos, en los años de 88 y 89, Pedro Madrigal, Madrid, 1591, p. 66v.

14 Luis de Guzmán, Historia de las missiones que han hecho los religiosos de la Compañía de Jesús, para predicar el Sancto Evangelio en los Reynos de Japón, segunda parte, Alcalá, Viuda de Juan Gracian, 1601, p. 501.

15 Ibid., p. 502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자료를 제공합니다. “튼튼한 선박을

17 Hilario Ocio; Eladio Neira, Misioneros Dominicos en el Extremo Oriente, 1587-1835, vol. 1, Manila, 2000, p. 83. Juan Mar-tínez Cid de Santo Domingo nacióen 1577 en la localidad de Manzanal de los Infantes (Zamora).

18 Diego de Aduarte, Historia de la Provincia del Santo Rosario de Filipinas, Japón y China, de la Sagrada Orden de Predicado-res, Tomo I, Zaragoza, 1693, págs. 471-472. Aduarte ofrece una visión personal sobre la campaña japonesa en Corea.

19 Sinica Franciscana, vol. III, Firenze, Ad Claras Aguas, 1936, p. 409.

옛 한국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스페인 성직자를 한 명 고르라면 주저없이 예수회 신부이자 『역사 지리학』(1752)의 저자인 페드로 무리요 벨라르데(Pedro Murillo Velarde)를 들 수 있습니다. 무리 요는 17세기 중반까지 유럽에서 계속된, 한국 영토가 섬으로 이루어졌다는 오류를 지적했습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코레아(

Corea

), 티오센쿠(

Tiocencu

) 혹은 카올리(

Caoli

)는 중국의 제후국으로 산지가 많고, 보리와 다양한 과일이 풍부했다. 백성들은 진주를 채집하였고, 중국인들과 거의 같은 풍습을 가졌고 비슷한 옷을 입지만, 다른 언어를 쓴다.”20고 적었습니다.

1.2. 한국에 대한 최초의 국가적인 인식

히데요시의 팽창주의로 인해 스페인은 필리핀에서 어려운 상황에 놓였음을 언급한바 있습니다.

통치자였던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Gómez Pérez Dasmariñas)는 1592년 계엄령을 선포하고 마닐라 방어를 강화하며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동시에, 성직자 들로 하여금 외교관 및 정보원의 역할을 하도록 해서 히데요시의 진정한 의도와 군사 활동을 알아 내고자 했습니다. 이런 경계 상황에서 임진왜란은 한국에 대한 여러 다양한 정보가 제공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코레아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강하고 거친 나라로 그 곳에 간다면 질 것이 분명한 전쟁 하기 어려운 나라이다. 따라서 (히데요시는) 마닐라를 공격하기 위해 코레아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21 조선침략을 스페인령 마닐라를 공격하기 위한 작전으로 분석한 이 정보는 완전히 거짓 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전쟁에 대한 다른 해석은 1595년 2월 10일자 헤로니모 데 헤수스(Jerónimo de Jesús)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적은 편지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 일본인들이 (한국과의) 이 전쟁에 임하면서 다른 새로운 전쟁은 일으키지 말기를.”

20 Pedro Murillo Velarde, Geographia Historica, Tomo VII, Madrid: Imprenta de Manuel de Moya, 1752, p. 165.

21 Carta del licenciado Ayala al rey, del 15/07/1589. Fragmento copiado de E. Sola, Libro de las maravillas del lejano oriente, Madrid, Editora Nacional, 1980, p. 44.

한국과 스페인 간 교류의 두 번째 장에 들어가기 전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세스페 데스”와 “라구나”가 한국을 방문한 첫 스페인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면, 스페인 땅을 방문한 첫 한국인들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일부 한국인 기독교도들이 당시 스페인에 속한 필리핀의 마닐라 및 군도의 다른 지역에 거주하였으며, 앞에 나온 토마스의 경우도 그 사례입니다. 또한 불교 에서 예수회 신자로 개종한 견습수사 “가요”는 1614년에 필리핀으로 향하는 배를 탔으며 다음 해 일본으로 돌아가 그 곳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또 다른 한국인 성도 “토마스”는 수 년간 캄보디아의 한 성당에서 봉사했습니다. 이후 폴란드 출신 사제인 알베르토 메신키(Alberto Mesinki)와 함께 마닐라에 도착하여 1642년 7월 선교사들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고, 마찬가지로 순교하였습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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