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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교육의 이념으로서의 자유교육: 형이상학적 세계관

문서에서 평생학습의 새 패러다임 (페이지 144-148)

제 6 장

2. 학교교육의 이념으로서의 자유교육: 형이상학적 세계관

오늘날 학교를 통하여 학습되고 있는 교육의 내용을 하나의 개념으로 특 징짓기는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학교의 교과는 주지교과에서부터 실제적 성 격을 띠는 교과에 이르기까지 그 성격이 다양하고, 특별활동이나 방과 후 활 동 등의 이름 아래 여러 복합적인 교육내용이 학습되고 있다. 그러나 학교는 장구한 세월동안 교육을 위한 특별한 장소로 간주되어 왔으며, 학교교육의 전통적인 내용은 지식 또는 주지교과였다는 데에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토록 오랜 시간 동안, 그리고 비교적 별다른 변화를 겪지 않고 지식이 학교교육의 핵심적 내용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지식을 통한 교육이 학습 자의 마음에 가져다주는 변화에 대한 굳건한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이론적 으로 뒷받침해 온 철학적 전통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교육의 내용은 지식 이어야 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교육관을 자유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명 명할 수 있다면, 자유교육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교육내용으로서의 지식의 가치를 의심하는 오늘날의 세계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들이 볼 때 인류의 역사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떨쳐버린 르네상스를 기점 으로 ‘비교육적’ 세계관으로 점차 물들게 되었다.

중세로부터의 해방을 구가하였던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들어, 그 동안 삶의 중심을 지켜왔던 신이 그 자리를 인간에게 내주게 되면서 교육의 영역에서도 고대로부터 그 기반을 이루어왔던 형이상학적 토대는 사라지고 그 공백을 인간 의 합리적 이해가 메우게 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희랍 로마시대로의 복귀를 통해 ‘재탄생’ 또는 ‘문예의 부흥’을 모색했다는 사실에서 또 다른 특징을 나타낸다. 교육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르네상스의 이 움직임은 표면상 고대 희랍 로마 시대의 교육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르네상스 인들이 부활시키고자 하였던 희랍시대는 자유인과 노예의 삶이 이분법적으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고, 당시 자유민들의 교육은 여가를 통한 관조를 통하여 최고의 덕과 아름다움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하는 교육이었다.

이것은「국가론」에서 철학자-군주의 양성을 위한 교육과정을 제안한 플라 톤에서 잘 드러난다. 플라톤은 교육을 통해 도달해야 하는 최종적인 상태를

“좋은 것의 형식”이 모든 것의 의미와 본질이며 모든 것이 따라야할 신적인 표준이라는 것을 깨달은 상태’로 규정하고 있다.

중세는, 한 마디로 말하여, 고대 희랍의 이 이상을 희랍 시대보다 더 철저 하게 실천하고자 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제도적인 면에서 볼 때 중세는 기독교의 테두리 안에서 교육이 그 명맥을 유지했던 시대라고 할 수 있지만, 종교는 비단 교육의 범주를 구획하는 외형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스콜라 주의로 대변되는 당시의 교육은, 그 내용에 있어서도, 신을 사고의 중심에 놓 고 신의 존재를 철저하게 이론적으로 증명하려는 노력으로 특징지워진다.

신을 중심으로 하여 철저하게 짜여졌던 중세의 삶은, 희랍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완벽하게 구현함으로써 희랍보다 더 희랍적인 시기였지만 이것은 인간의 삶을 이루고 있는 또 다른 측면인 인간적 토대와 실제적 삶을 정당 하게 존중하지 않음으로써 삶에 있어서 개인의 지위를 협소하게 만든 것이었 다. 르네상스인들이 새 시대를 구안할 때 그들이 중세를 거부하고 고대로 되 돌아가려고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에게 중세는 고대 희랍의 이 상을 왜곡된 형태로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스콜라주의로 상징되는 중세의 교육은 이러한 오류를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인들이 중세에 대하여 이와 같은 비판적 사고를 견지하고 희랍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이미 삶의 세속적 측면에 대한 관심이 강하게 깔려있었다.

다시 교육의 관점에서 말하면, 이제 르네상스는 중세와는 반대로 교육을 인 간중심의 활동으로 전환시킨 계기가 된 것이다. 중세의 교육은, 그것이 철저 하게 신을 중심으로 한 사변적 논의로 이루어졌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 르네 상스 인들에게 반감을 사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을 교육의 중심으로 세운다 하더라도 당장 새로운 교육의 내

용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고전을 여전히 교육 의 핵심 내용으로 삼는다 하더라고 그러한 내용을 가르치고 배우는 이유는 학습자 개인에게 그리고 다수의 사람에게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정당화의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당화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교육이(더 정확하게는, 당시의 교육 을 옹호하고자 하였던 사람들이) 취할 수 있었던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예 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교육의 가치를, 실제적인 삶과의 관련은 불분명하지 만 그 나름의 설득력을 갖는 ‘교양의 형성’ 이나 ‘지적 능력의 발달’에서 구하 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육이야말로 실제적 삶에 도움을 준다는 식으로 교육의 가치를 ‘유용성’에서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교육을 정당화하고 자 했던 노력은 서로 다른 이 두 가지 방향을 하나의 설명체계로 통합하는 절묘한 방안을 생각해 내었다(물론, 이와 같은 방안이 특정 사람들에 의하여 명백한 형태로 제시된 것은 아니다.). 이른바 형식도야이론은 그 두 방향의

‘관련’에 주목하여, 고전을 내용으로 하는 전통적 교육을 정당화하려고 한 것 이다.

형식도야이론이라는 용어는 20세기에 들어 그 이론에 해당하는 생각을 비 판하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붙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람들이 비교적 분명하게 그러한 사고를 갖게 된 시기를 르네상스 시대와 그 이후로 보는 것에는 별 무리가 없다. 당시 사람들은 사람의 몸의 여러 기관이 각기 상이 한 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억력, 추리력 등과 같은 정신능 력(또는 마음의 부소능력)도 인간의 마음속에서 각각 상이한 위치를 차지하 고 있다고 생각했다. 형식도야이론은 이러한 초보적인 심리학을 배경으로 하 여, 몸의 근육이 운동과 같은 훈련에 의하여 발달하는 것처럼 부소능력(즉,

‘형식’)도 고전을 공부함으로써(즉, 도야를 통해서) 길러질 수 있다는 주장을 나타내었다. 형식도야이론은 잘 단련된 부소능력은 우리가 특정한 사회적 기 술을 발휘해야하는 사태를 당하면 어김없이 그 능력을 발휘하여 우리에게 유 용한 도움을 준다고 설명하였다. 교육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권이 인간의 손 에 쥐어졌던 르네상스와 그 이후 시대에서, 그러나 여전히 고전을 내용으로

하는 전통적 교육을 따르는 당시의 형편에서 형식도야이론은 교육의 명분을 세워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형식도야이론은 고전 공부의 목적(넓은 의미에 서는 교육의 목적)을 유용성의 측면, 즉 그것을 배우는 것이 일상의 문제사 태의 해결에 도움이 된다는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교육받는 것은 힘들지만 참고 견딜만한 것’이라는 위안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형식도야이론의 설명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렇게 완전한 것이 못된다는 의심을 받게되었다. 사람들은, 교육의 목적이라는 것이 형식도야이 론에서 설명한 대로 일상의 문제사태를 잘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면 굳이 어 려운 고전을 배우는 우회적인 방법을 고수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 게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교육의 내용으로서의 지식을 일상의 문제사태로 대치하고자 했던 생활적응교육으로 표출되었다.

형식도야이론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생활적응교육도 후에 다시 비판의 대상 이 되었고 그것이 불러온 교육의 폐단도 드러났지만, 그렇다고 하여 다시 교 육 내용으로서의 지식의 위치가 확고부동해진 것도 아니다.

이상의 고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식이 학교교육의 중심을 이루고 있고 그에 따라 지식을 학습하는 경험만이 숭고한 가치를 지닌 학습이라는 인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와 같은 인식은 완전한 것도 아니요,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어 준다. 나아가 위의 고 찰은 학교가 또는 학교와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지식을 학교의 교육내용 으로 고수하기 위하여 얼마나 편협하고 왜곡된 노력을 기울여왔는가 하는 것 을 여실하게 폭로해주고 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하여 학문적인 지식을 학습 하는 경험이 학습이 아니라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학문적인 지식을 학습하는 것은 가치로운 일이며, 가치를 개입시키기 이전에 엄연히 학습이다.

그러나 오직 이러한 종류의 학습 경험만이 학습인 것은 아니며 그것을 제외 한 삶의 경험들이 학습에서 제외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존엄하고 고귀한 순간만을 가리켜 우리의 삶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형태 의 학습, 즉 체계적이고 전통적인 지식을 학습하는 것만을 학습이라고 보아 야할 정당한 이유는 없다. 그 동안 우리의 삶에서 학습을 박탈하였던 이 같

은 교육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우리의 삶에서 학습을 온전히 드 러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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