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초토화작전과 재선거를 위한 정지작업: 1948.10-1949.5
1) 주한미군 철수와 여순사건, 초토화작전의 관계
1948년 9월 15일부터 시작된 주한미군의 철수와 뒤이은 여순사건의 여파는 제주도에서 의 초토화작전으로 나타났다. 주한미군의 철수문제는 1947년 초부터 제기돼 장기주둔을 주장하는 국무성과 조기 철수를 주장하는 군부간에 논쟁이 계속돼다가 1948년 4월 8일 트 루만 대통령이 NSC-8을 승인함에 따라 같은 해 12월 말까지 주한미군을 철수키로 잠정 결정하고, 9월 15일께 비밀리에 철수를 시작했다.223) 미국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앞두고 신생 대한민국 정부내의 암적 요소로 간주되는 ‘공산주의세력의 척결’을 시도해 남한 정 부의 기둥을 튼튼히 하고 아시아에서 미국의 위신을 세워야 했다.
미국은 미군이 철수하면 동해안을 따라 게릴라 작전이 벌어질 것으로 예견하고, 이를 이끄는 그룹은 제주도에서 작전을 벌이고 있는 그룹일 것이라고 보았다.224) 이에 따라 주
222) 초토작전은 일본군이 만주에서 의병운동을 진압할 때부터 사용한 것으로, 의병의 근거지가 되는 산간 소마을을 불태워 평지의 일본군 지배하에 있는 마을로 집단 이주시키는 것을 말한 다. 이것은 1930년대의 만주에 있어서의 집단마을과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이 취한 전략촌의 원형이 되는 전술이었다. 등원창 지음, 엄수현 역, 일본군사사 (서울: 시사일본어사, 1994), 138쪽.
223) 주한미군의 철수작전명은 Finespun이다. 1948년 4월 육군성과 극동사령부는 제24군단 작전참 모부가 작성한 Finespun계획을 승인했다. 철수 개시일은 애초 1948년 8월 15일로 계획됐으나 육군성에서 승인받은 뒤 1948년 9월 15일로 연기된 것이다. 최초의 철수 부대는 제865 방공포 병 자동화기 대대와 제35 병기 파견대로 일본으로 주둔지를 옮기기 위해 제24군단을 떠났다.
이 부대는 1948년 9월 14일 2대의 LST에 승선해 인천을 출항했다. 잔여 병력은 9월 16일 USAT 제너럴 콜린스(General Collins)호에 승선해 인천항을 출항해 요코하마로 갔다.
Historical Outline of G-3, USAFIK, RG 338, NARA; 이어 1949년 3월 23일 주한미군철수를 1949년 6월말까지 연기한 대한정책 지침서인 NSC-8/2를 승인해 6월 30일 주한미군은 군사고 문단만을 남긴 채 철수를 끝냈다. 제민일보사, 앞의 책 4, 363-364쪽.
한미군은 우선 철수의 걸림돌로 작용하는 제주도 소요를 진압해야 했다. 4월부터 계속된 제주도 소요는 5․10선거와 6․23재선거를 파탄내면서 이미 주한미군의 위신에 큰 타격을 주었기 때문에 제주도 소요를 진압해야만 미국은 명예로운 철수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 각했다.
신생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미소양군의 철수 문제가 제기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군사, 경 제원조에 대한 새로운 약속과 유엔으로부터 국가승인을 받아 국가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안정시키는 것이 시급한 시기였다.
국방경비대의 작전지휘권은 ‘한미군사행정협정’에 따라 주한미군사령관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경비대의 모든 작전명령은 이를 발표하기에 앞서 해당 미고문관을 거치도록 돼 있었다. 통위부 고문관 로버츠 준장이 이를 국무총리 이범석에게 상기시킬 정도였다.225) 제주도 주둔 고문관들도 미군의 철수 때까지 제주도에 남아서 현지 작전에 대한 조언 과 한국군에 대한 훈련을 실시했다.226) 딘 소장은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억제와 척결에 관 심을 갖고 있어 주한미군사령부 G-2가 경비대에 게릴라 상황에 대한 보고서 제출을 요청 하기도 했다.227)
해안선 봉쇄와 응원경찰대의 파견, 제5여단 참모장의 제주도 방문 등 토벌작전의 준비 단계를 거쳐 10월 5일 제주 출신 제주경찰감찰청장 김봉호가 평남 출신 경무부 공안과장 홍순봉으로 교체되었고,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창설돼 강경 진압작전이 구체화됐다.
제주도경비사령부의 창설 등 강경 진압작전은 군사고문단의 정책적 결정을 바탕으로 이 뤄졌다.228)
224) WEEKA No. 34, 21 Aug 1948.
225) “국방경비대의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으며, 경비대의 작전에 관한 모든 명령은 발표되기 전에 해당 미고문관을 통과해야 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통위부 고 문관 로버츠 준장이 국무총리 이범석에게 보내는 서한, 1948년 9월 29일, 제주4․3위원회, 앞 의 책 8, 90-91쪽.
226)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이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미군사고문단 주간활동, 1948년 9월 13일, 제주4․3위원회, 앞의 책 8, 71쪽.
227) 제24군단 G-2는 “경비대 참모부에 1948년 3월과 6월에 경기, 충남북, 경남지역의 게릴라 상황 에 대한 G-2 평가서를 딘 장군에게 제출했으나, 그 이후 아무런 정보도 받지 못했다”면서
“딘 장군의 관심을 고려해 게릴라 상황과 경찰작전의 결과를 명확히 하는 종합보고서를 제출 할 것”을 요청했다. 미제24군단 정보참모부가 국방경비대 참모부에게, 제목: 공산게릴라 상황, 1948년 9월 20일, 제주4․3위원회, 앞의 책 7, 247-248쪽.
228) 로버츠 준장은 제5여단 고문관 트레드웰(James H. W. Treadwell) 대위에게 보낸 서한에서
“제주도 부대들에 대한 검열결과 신발, 의복, 지도, 소총, 실탄, 식량 등 모든 주요 범주의 주 요 장비들이 현저하게 부족했다”며 “지적된 사항에 대한 시정조치를 즉각 취하고 보고할 것”
을 지시했다. 로버츠 준장이 트레드웰 대위에게 보낸 서한, 제목: 제5여단 소속 미군 고문관 의 지위 및 능력, 1948년 10월 9일, 제주4․3위원회, 앞의 책 8, 91-92쪽; 이와 함께 제9연대도 무장대와의 교전에서 병사 1명이 죽고, 4명이 부상당했다며 무전기와 총기류, 탄약 등을 즉각 보내주도록 고문단장에게 요청했다. 이후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창설됐다. 제59군정중대 노엘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10월 17일 포고문을 발포하고 10월 20일 이후 해안선으로부터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의 포고문 발표에 이어 초토화작전을 앞두고 경비대의 증강을 위
233) Despatch No. 81, Subj: Review of and observations on the Yosu Rebellion, John J. Muccio, American Mission in Korea to the Secretary of State, Nov 4, 1948.
234) 이에 대해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육군성 기획작전국장 찰스 볼테(Charles L. Bolte) 소 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송호성 준장은 전술을 모르며 여수에서 실패했다. 우리가 비록 그에 게 모든 찬사를 보내지만 풀러(Fuller) 대령이 실제 중요한 일을 했다”고 언급했다. Roberts to Major Gen. Charles L. Bolte, Director of Plans and Operations, Department of the Army, 19 Aug, 1949.
235) 한국군 고문관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 대위 보고서, 국방경비대 역사, 군사고 문단장 로버츠 준장이 육군성장관 케네스 로얄(Kenneth C. Royall)에게 보내는 보고서, 1949 년 2월 7일, 제주4․3위원회, 앞의 책 8, 100-104쪽.
월 22일 제주도 주둔 제9연대 고문관 버제스(F. V. Burgess) 대위에게 “정찰을 시작하고 본토로부터의 반란군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찾아낼 것”을 지시236)하고, 정보주임에게 전화로 메시지를 남겨 “여순사건과 관련한 심사가 이뤄질 때까지 제주도 상륙을 감시하 고 체포토록”지시237)하는 등 작전지시를 내렸다.
주한미군사령관 콜터 소장은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문을 보내고 “한국정부는 육군과 해 안경비대, 국립경찰의 파괴분자들을 뿌리뽑아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신병을 모집해 훈련 하고 교화시켜야 한다”고 밝혔다.238) 이후 여순사건의 여파는 숙군작업으로 이어졌다. 미 군정 당국은 제주도 주둔 제9연대 병사의 집단 탈영과 박진경 연대장의 암살 직후 국방 경비대에 대한 제한적인 숙군작업에 착수했었으나 여순사건 이후 대대적이고 본격적인 숙군작업이 시작되었다. 반년 정도에 걸쳐 진행된 숙군과정 전체를 통해 약 5천명 정도의 장교와 사병들이 숙청됐다. 그 가운데는 실제로 죄가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239)
또한 여순사건은 주한미군의 철수와 맞물리면서 미국으로서는 부담을 안게 됐다. 미국 은 여순사건 진압과정에서 드러난 경비대의 문제점에 대해 예정된 12월의 주한미군 철수 에 앞서 개선이 이뤄질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해 미군이 철수한 뒤 남한내 질 서를 유지할 수 있는 한국군의 능력에 대해 우려했다.240)
이에 따라 여순사건이 진압되자 자연히 제주도 소요사태의 진압문제가 그 다음의 관심 사로 부상하게 되었고241) 제주도 토벌작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제주도 문제 또 한 정부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한 긴박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송 연대장의 포고문 발표와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제주도의 무장 대는 10월 24일 선전포고와 함께 호소문을 발표242)하고 공세를 강화하는 가운데 송 연대 장이 이끄는 제9연대의 초토화작전은 사실상 10월 하순에 시작됐다.
10월 28일에는 송 연대장이 제1대대 병사 17명을 ‘공산주의자 세포’혐의로 체포해 이 가운데 6명을 29일 처형243)한 데 이어 29일 북제주군 애월면 고성리 부근에서 제2차 작 전을 벌여 135명을 사살했다.244) 11월 2일에는 연락기 L-5를 동원해 항공관찰을 실시한 결과 도로 장애물이 제주도 남쪽 도로에 설치됐고, 전신주들이 절단된 모습을 관찰했
236) Radio 32, Message, West, Advisor, G-3 to Capt. Burgess, Chejudo, 1250 22 Oct 1948.
237) Radio 36, Message to Chejudo, 1400 22 Oct 1948.
238) Despatch No. 81, Subj: Review of and Observations on the Yosu Rebellion, John J. Muccio, American Mission in Korea to the Secretary of State, Nov 4, 1948, p. 6.
239) 존 메릴, 앞의 책, 225-226쪽.
240) Despatch No. 81, 앞의 글.
241) 존 메릴, 앞의 책, 343쪽.
242) 김봉현․김민주(공편), 앞의 책, 166쪽.
243) 버제스 대위가 로버츠 준장에게, 제주도 상황요약, 1948년 10월 30일, 제주4․3위원회, 앞의 책 8, 95-96쪽.
244) 971th CIC to G-2, Corps, Flash No. 289, 022210 Nov 1948.
다.245) 수개월 동안 계속된 제주도의 소요가 가라앉지 않는 가운데 여순사건의 경험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던 무초(Muccio)는 11월 3일 국무성에 보낸 전문을 통해 “제주도 공산 주의자들을 섬멸하는데 있어 정부의 눈에 보이는 무능력에 대한 긴장감이 여전하다”고
다.245) 수개월 동안 계속된 제주도의 소요가 가라앉지 않는 가운데 여순사건의 경험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던 무초(Muccio)는 11월 3일 국무성에 보낸 전문을 통해 “제주도 공산 주의자들을 섬멸하는데 있어 정부의 눈에 보이는 무능력에 대한 긴장감이 여전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