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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절 마지막 토벌과 미국의 인식: 1949.5-1954.9

5․10단선을 반대로 내건 4․3봉기, 더 나아가 1947년 3․1절 시위에서부터 시작된 제 주도 소요는 1949년 5․10재선거로 정점을 맞았다. 5월 5일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의 해 체318)와 군경철수는 토벌이 종식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5월 8일부터 13일까지 제주 도 재선거를 시찰한 유엔한국위원단은 1948년 5․10선거 때와 마찬가지로 감시활동을 벌 였다.319) 이들의 제주도에 대한 시찰활동은 내무장관과 제주도에 최소한의 경찰호송만 하 고 공식영접행사를 생략토록 요청했으나 관리들의 열성과 환대를 받았기320) 때문인지 포 로수용소에 구금된 무장대원을 면담했으면서도 진지한 대화를 하지 않았다.321) 또한 철저 한 보안대책 때문에 유엔한국위원단 시찰단은 완전한 행동의 자유와 융통성 있는 활동을 하기가 어려웠다.322) 드럼라이트도 국무성에 유엔한국위원단의 단기간 시찰로는 제주도 사태를 설명하기에 역부족이라고 보고했다.323)

유엔한국대표 조병옥은 5월 16일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은 극동의 민주주의 보루로서 투쟁하고 의무를 충실히 수행할 것이라며 제주도 사건을 예로 들면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미국의 원조를 요청했다.324)

317) 동광신문 1949년 5월 17일.

318)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448쪽.

319) United Nations Commission on Korea, Press Release No. 16, 17 May 1949.

320) 위의 글.

321) 한 무장대원은 6월 19일 내신기자들과의 면담에서 “유엔위원단과 얘기도 해보았으나 아무 흥 미가 없었다. 도대체 유엔은 본래의 사명과 너무나 동떨어진 방향으로 걸어나가는 것 같다”

며 유엔한국위원단 시찰단의 시찰에 불만을 드러냈다. 경향신문 1949년 6월 25일.

322) Despatch No. 358, Inclosure No. 1, U.N. Document, A/AC.26/SC.2/15, (Extract) UNCOK, Sub-Committee Ⅱ, Subj: Report on Trips to the Provinces Affected by Recent Disturbances, 9 June 1949, Subj: Transmitting Excerpt from UNCOK Report on Visit to Cheju Island, 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 June 17, 1949.

323) 위의 글.

무초는 5월 26일 국방장관과 교통장관에게 한국군이 제주도와 지리산 작전에서 거둔

‘성과’를 언급하며 한국 진압군은 그러한 행위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고 추켜세웠다.325) 재선거가 성공했으나 제주도의 무장대 세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승만은 5월 22일 맥아더 사령관에게 서한을 보내 “제주도 등지를 소탕하기 위해 무기가 필요하 다”며 미국의 무기 지원이 필요함을 강조했다.326)

이와 함께 제주도에 주둔중인 토벌대의 행패도 심해 김용하 제주도지사는 6월 16일 미 대사관 관계자들을 만나 제주도에 주둔중인 제2연대가 도민들을 매우 고압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서북청년회가 독단적이고 잔인한 태도로 도민들을 대하고, 경찰국장마저 이 단체 출신이라는 점이 더욱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말했다.327)

공산주의 세력의 섬멸을 명분으로 한 학살은 5․10재선거 뒤에도 계속됐다. 체포되거 나 귀순한 제주도민들은 재판과정에서 형식적이거나 혹은 재판절차도 없이 가혹한 선 고를 받았으며, 숱한 고문을 견뎌내야 했다.328) 6월 3일부터 7월 12일까지 민간인 1652 명과 군인 47명을 기소해 345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238명에게는 무기징역, 311명에 게는 15년형, 705명에게는 7년 이하 징역형을 선고했으며, 54명에게 무죄를, 46명은 석 방했다.329)

이승만은 정부 수립 1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을 때 제주도는 대부분 잔 인한 공산테러분자들의 손아귀에 있었다.…그러나 지난 봄까지 공산세력은 궤멸됐고, 선 거는 평화적으로 치러졌다. 정부가 우리 수중에 들어오기 전에 군대에 침투하기 위해 민주주의 절차의 이름으로 허용됐었던 공산주의자들은 대부분 근절됐다”고 대내외에 천 명했다.330) 이승만은 제주도 5․10재선거의 상처뿐인 성공에 자신감을 가졌다. 10월 2일 에는 이승만의 승인에 따라 제주도에서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249명이 집단처 형됐다.331)

로버츠 준장은 1949년 8월 육군성 기획작전국장 찰스 볼테(Charles L. Bolte) 소장에게 미국을 대신해 한국인의 희생이 요구되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인들을 모른다는 내용의 의

324) 연합신문 1949년 5월 18일.

325) Despatch No. 607, Muccio to Department of State, 26 May, 1949.

326) Letr, Syngman Rhee to General MacArthur, May 22, 1949.

327) Despatch No. 354, Inclosure No. 1, Memorandum of Conversation No. 63, June 14, 1949, Subj:

Views of Governor's affairs in Chejudo, American Embassy to the Secretary of State, 16 June 1949.

328) 재판과정의 불법성과 고문에 대해서는 제주4․3연구소, 무덤에서 살아나온 4․3 ‘수형자’들 (서울: 역사비평, 2002) 참조.

329) JOINT WEEKA No. 9, 12 Aug 1949.

330) Telegram No. 1023, 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 14 Aug 1949.

331) 앞의 글, No. 17, 7 Oct 1949. ‘게릴라’로 분류돼 사형선고를 받은 249명에 대한 집단처형은 유 례가 없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미심장한 서한을 보냈다.332) 이 서한은 미군사고문단이 자국의 이익 아래 활동하고 있음 을 극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10월 하순 이승만에게 “한국군은 미군의 한 날개로서 공산주의 에 맞서 방어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미국 정부의 정책을 수행하는데 지원을 다할 것”

이라며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동양의 작전 및 전초기지인 한국의 전략적, 전술적 중요 성을 고려해 미국으로부터 무기와 장비를 얻을 수 있도록 원조를 요청해 줄 것”을 건 의했다.333)

무초는 10월 국무성에 제주도 작전이 너무 파괴적일 정도로 성공해 ‘반도’들이 ‘전략적 으로 가장 중요한 섬’에서 어떠한 종류의 회복도 할 수 없음을 보고할 수 있게 돼 기쁘다 고 보고했다.334) 무초의 이 보고는 제주도에서 민간인 대량학살이 자행됐는데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를 척결해야 하는 제주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보여준다. 전투사령부 해체 뒤에 는 8월 13일부터 독립 제1대대가 소탕작전을 벌였다. 10월 24일에는 봄철 소탕작전이 끝 난 뒤 처음으로 무장대가 활동에 나서 3명이 사살됐다.335)

11월 초순 김용하 지사가 미대사관 관리들에게 서청회원들이 계속해서 말썽을 일으키 고 있고, 군 장교들이 소나 말들을 육지로 수출하는 등 사업을 벌이고 있는가 하면 군인 들이 어획량의 3분의 1을 군용으로 징수하고 있다고 비난했다가336) 11월 15일 비리혐의 로 경질돼 김충희로 교체됐다.337) 정부 고위관계자들은 공산주의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행 위를 옹호했다. 내무장관 김효석은 12월 11일 대구에서 연설을 통해 “대한민국을 파괴할 목적으로 살인과 방화 등을 자행하다 체포된 공산주의자들을 심문하면서 고문을 사용하 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고, 내무차관 장경근도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때때로 고문을 사용해야 한다며 오히려 고문을 권장했다.338)

해병대사령부는 1950년 2월부터 6월까지 5개월 동안 한라산 지구의 토벌작전을 2개대로 나눠 전개했다. 2개 중대에 중대당 제주서와 모슬포서, 서귀포서와 성산포서가 편입돼 군 332) Roberts to Maj. Gen. Charles L. Bolte, Director of Plans and Operations, Department of the

Army, 19 Aug 1949.

333) Memorandum for President Syngman Rhee, Subj: Status of Korean Forces, Shin Sung Mo, Minister of National Defense, ROK to Syngman Rhee, 22 Oct. 1949.

334) The Ambassador in Korea(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 Oct 13, 1949, FRUS, 1949, Ⅶ, pp. 1086-1087.

335) Despatch No. 704, Subj: Summary of Political Affairs of the Republic of Korea, October, 1949, 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 Nov 7, 1949.

336) Despatch No. 749, Inclosure. Subj: Tour of CHEJU DO - by Capt. Fischgrund, 22 Nov 1949, Capt. Harold Fischgrund, Asst. Adv. G-3 to Chief, KMAG, Subj: Transmitting report by Captain FISCHGRUND(KMAG) on trip to Cheju Island, American Embassy to Department of State, Nov 28, 1949.

337) A-376, 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 Nov 18, 1949.

338) A-438, 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 Dec 20, 1949.

경합동토벌대가 조직돼 토벌작전에 나섰다.339) 주한미대사관은 1950년 8월 13일 제주도에 서 활동하는 신부가 제주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보고340)하자 제주 도 상황을 직접 시찰하기 위해 해군무관 존 세이퍼트(John P. Seifert), 3등 서기관 도날 드 맥도날드(Donald S. Macdonald), 부영사 필립 로우(Philip C. Rowe) 등으로 팀을 구 성해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제주도지사를 비롯한, 도청 국장, 해병대 지휘관, 경찰 간부 들을 만나 제주도 상황을 파악해 대사관에 보고서를 제출했다.341) 미대사관은 향후 제주 도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이려 한다면서 한국 당국도 그렇게 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 다.342) 이들은 경찰과 관련해 대게릴라 전투 경험이 있는 1명의 미고문관이 있어야 한다 고 건의했다. 또 고문관은 소수의 무장 게릴라와 오름에 있는 지지자들을 소탕하고 향후 게릴라 활동의 재발방지를 위한 일환으로 내륙에 정찰 초소를 세워 공격적인 토벌작전을 즉시 시작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토벌작전과 정찰활동을 위해 전투경찰대대가 창설돼야 하고 보병 및 게릴라 전술훈련을 받아야 하고 해병대를 보다 위급한 본토로 철수시키는 게 바람직하다고 건의했다.343)

이와 같은 건의가 있은지 며칠 뒤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는 8월 24일 한라산 무장대를 소탕하기 위한 전투신선대를 만들어 작전에 나섰다.344) 이들이 제주도 방문을 통해 집계 한 무장대수는 15-30명의 무장 게릴라를 포함해 100여명으로 추산됐다.345) 경찰관 300여 명이 대게릴라 정찰에 투입되고 검문초소를 날마다 운영하고 있다고 밝힌 경찰은 한국전 쟁 발발 이후 8월 중순까지 보도연맹원 700여명을 검거했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또 잠재 적인 파괴분자들로 보도연맹원 2만7천여명과 4․3 당시 ‘공산주의자’로 분류돼 죽은 친척 5만여명이 존재한다고 주한미대사관 관리들에게 밝혔다.346) 미대사관은 간헐적인 습격을 하던 무장대에 의해 11월 6일 제주시 부근에서 경찰관 6명과 경비병 2명이 피살되고, 9일 에는 경찰관 9명이 피살되는 한편 소총 16정과 탄약 1500발을 도난당했다347)는 보고를 받

339) 양봉철, 앞의 글, 70쪽.

340) Everett F. Drumright to John M. Allison, Department of State, Aug 29, 1950.

341) Memorandum for the record, Subj: Conditions on Cheju Island, John P. Seifert, Naval Attache, Donald S. Macdonald, Third Secretary of Embassy, Philip C. Rowe, Vice Consul, Aug 17, 1950; 이 보고서는 한국 당국에 가치가 클 것으로 생각해 국무총리 서리와 내무부장관에게

341) Memorandum for the record, Subj: Conditions on Cheju Island, John P. Seifert, Naval Attache, Donald S. Macdonald, Third Secretary of Embassy, Philip C. Rowe, Vice Consul, Aug 17, 1950; 이 보고서는 한국 당국에 가치가 클 것으로 생각해 국무총리 서리와 내무부장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