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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수립 전후 미군정의 제주도 진압정책

제2절 5․10선거의 실패와 미군정의 공세, 그리고 정부수립:

3) 정부 수립 전후 미군정의 제주도 진압정책

제주도 5․10선거와 6․23재선거가 실패하고, 박진경 연대장이 암살된 뒤 제11연대장에 최경록 중령, 부연대장에 송요찬178) 소령을 임명한 미군정은 정부수립을 위한 정지작업에 들어갔다. 미군정의 무차별적인 체포와 계속된 정찰작전 등으로 제주도 소요는 어느정도 가라앉은 듯이 보였다.

미군정은 신생 한국정부에 권력을 이양하거나 군대를 철수하는 별다른 사건없이 1948 년 여름을 보낼 수 있기를 희망했다. 남한의 국제적인 지위는 여전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 고, 유엔 총회 회기 중에 대한민국 정부가 승인을 받을지도 미지수였기 때문에 이승만조 차도 은인자중하고 있을 정도였다.179)

이에 따라 미군정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해 내부의 불안요소 제거를 명분으로 제 주도에서 경비대와 경찰을 이용해 소탕작전을 계속했다.180) 박 연대장의 작전을 이어받은 최경록 연대장도 무차별적인 검거작전을 계속해 박 연대장 재임시절부터 합산하여 6주 동안 4천여명을 체포했다.181)

6월 26일에는 오후 6시부터 다음달 오후 6시까지 만 하룻동안 전개된 작전에서 ‘폭도 혐의자’ 176명을 체포했다.182) 이후 제주도 소요는 표면적으로는 8월 초순께까지 어느정 도 가라앉았다.183)

로버츠184) 준장의 명령으로 제11연대 제3대대 고문관으로 부임한 웨솔로스키185) 중위는 178) 로버츠 준장은 1948년 10월 초토화작전의 한 가운데 서게 되는 송요찬을 최상의 장교라고 격

찬했다. 로버츠 준장이 브라운 대령에게 보내는 비망록, 1948년 6월 21일, 제주4․3위원회, 앞 의 책 8, 89쪽.

179) 존 메릴, 침략인가 해방전쟁인가: 1948-1950 한국전쟁의 국내적 배경 (서울: 과학과 사상, 1988), 183쪽.

180) 존 메릴은 신생 대한민국 정부에 권력을 이양하거나 군대를 철수하는 과정에서 방해요인으로 작용할지 모르는 그 어떠한 최후의 장애에도 부딪히지 않고서 그해 여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랐으며, 따라서 일시적으로 잠잠해진 4․3봉기를 진압하는 군사적전을 수행해 나가는 일에 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밝혔으나 이 시기 무장대의 활동은 강력한 토벌작전으로 인해 숨어들었을 뿐 경비대와 경찰의 토벌작전은 계속됐다. 존 메릴, 앞의 책, 183쪽.

181) Hq. USAFIK, G-2 Weekly Summary No. 146, 2 July 1948; 웨솔로스키는 “정보 담당자들이 과도한 열정을 갖고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것 같았다”고 증언했다. 웨솔로스키 증언.

182)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871, 28 June 1948.

183) 미보병 제6사단 야전명령 제7호, 1948년 8월 5일, 제주4․3위원회, 앞의 책 8, 57쪽.

184) 윌리엄 로버츠(William L. Roberts) 준장은 1948년 5월 20일 테릴 프라이스(Terrill Price) 대 령 후임으로 통위부 고문관으로 부임했다.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이 육군성장관 케네스 로얄(Kenneth C. Royall)에게 보내는 보고서. 제목: 국방경비대 역사, 1949년 2월 7일, 제주 4․3위원회, 앞의 책 8, 103쪽.

185) 웨솔로스키는 미국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1948년 6월경부터 8월 18일까지 제주도에서 근무했 다. 그는 처음 최경록 연대장의 제11연대 부고문관겸 제1대대 고문관으로 부임했다가 뒤에 송요찬 연대장이 이끄는 제9연대 고문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1950년 본토로 귀국했다가 한국

작전고문관도 맡았다. 대대 고문관의 역할은 대대장들에게 부대가 행동을 개시하거나 충돌을 일으킬 때 대대장들에게 자문하는 것이었다.186) 웨솔로스키 중위는 제11연대와 함께 여러차 례 소탕작전에 참가했으며, 한라산 윗세오름까지도 작전을 벌이는 등 매우 적극적으로 행동 을 취했다. 지형이 험해 차량을 이용할 수 없어 소를 이용해 물자보급을 하면서 2-3주 동안 남쪽지역에서 한라산을 향해 소탕작전을 벌인 적도 있었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187) 또 전체 부대원 150여명이 승선할 수 있는 해안경비대 소속 경비정 YMS(Yard Mines Sweeper) 2척을 이용해 제주도 전체에 대한 수색에 활용하면서 직접 마을에 진입해 대형 을 갖추고 마을을 통과하는 등 정찰활동을 벌이고 귀환하기도 했다. 이 경비정들은 부대 원들의 당일 작전에 이용되기도 했고, 섬의 오지까지 힘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됐다.188) 연락용 비행기 L-5도 미고문관의 지휘 아래 제주도 전역을 비행하면서 정찰과 물자수송 을 했다.189)

이처럼 경비대의 대대적인 소탕작전이 전개되는 동안 무장대와의 전면적인 전투는 8월 2일 서광리에서의 교전190)을 제외하고는 8월 중순까지 거의 없어 외관상 미군정의 진압 작전이 성공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는 경비대의 무차별적인 토벌작전을 피해 무장대가 지하로 숨어들어 갔기 때문이었다.

7월 12일 통위부 이형근 참모총장은 “대체로 제주도 사건은 일단락 되고 민심은 안정 되었다. 앞으로 종래와 같은 폭동은 없을 것이다”고 천명했다.191) 이어 7월 15일 제11연대 는 애초의 제9연대 병력의 배속을 해제해 제9연대로 재편했고, 연대장에 제11연대 부연대 장 송요찬 소령을 임명했다. 이어 7월 21일 제3여단의 제5연대와 제6연대에서 각각 1개 대대씩 2개 대대를 차출해 제주에 증파하고 제11연대는 7월 24일 수원으로 철수했다.

브라운 대령은 선거반대 소요가 성공한 이유를 첫째, 제주도 민정장관의 정책 실패192), 둘째, 응원경찰대가 저지른 지나친 만행과 공포감 조성, 셋째, 경비대내 공산주의 동조자 들의 침투로 인해 제11연대장 2명이 공산주의 선동가들과 협상하는 바람에 초래된 지연 전쟁에 참전했고, 1960년대에 중령으로 예편해 현재 미국 플로리다주 세인트피터즈버그에 살 고 있다.

186) 웨솔로스키 중위는 자신이 제주도에 갔을 때는 진압됐을 때여서 희생자가 많지 않았으며, 무 장대가 조직화되지 않았지만 상황이 가변적이었다고 증언했다. 웨솔로스키 증언.

187) 웨솔로스키는 경비대의 출현이 무장대에 노출됐다고 확신했다고 회고했다.

188) Letr, Wesolowsky to Dr. Allan R. Millet, March 6, 1996.

189) 웨솔로스키 증언.

190) 경찰은 서광리에서 8월 2일 무장대와 교전을 벌여 무장대 50여명과 교전을 벌여 무장대 2명이 사살되고, 경찰 1명이 부상당했다.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907, 10 Aug 1948.

191) 동아일보 1948년 7월 13일.

192) 브라운 대령이 지적한 제주도 민정장관의 정책 실패는 첫째, 활용 가능한 병력을 이용한 초 기 진압의 실패, 둘째, 제주도 경찰에 대한 지휘 실패, 셋째, 제주도에 도착한 응원경찰에 대 한 효과적인 동원 실패, 넷째, 경비대에 대한 명령 지시와 명령 이행에 대한 실패 등이다.

Brwon Report, 앞의 글.

전술(제주도 민정장관이 강력하고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다면 경비대는 즉각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넷째, 제주도민들에게 만연된 공포감과 행정조직 기능의 완전 붕괴, 다섯째 정부의 통제에 반감을 갖는 제주도민들의 특성과 법 없이도 살았던 제주도의 역사적 배 경, 여섯째 제주도민간의 혈연관계로 분석했다.193)

브라운 대령은 즉각적인 진압을 통해 사태해결을 하지 못한 것이 선거반대 소요가 성 공한 원인으로 분석했다. 이는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194)라는 그의 발언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서 미군정의 제주도에 대한 정세 인식은 원인 치유책을 찾기 보다는 ‘진압’만을 강조하려했다.

브라운 대령의 후임자인 웨솔로스키 중위도 “나의 판단은 반란을 진압하고, 선동자를 섬멸하며 민간정부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섬멸에 관한 것이었다”라 고 언급했다.195) 이와 같이 미군정 요원들은 제주도 소요를 ‘민주주의대 공산주의 대결의 장’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제주도 작전을 총지휘한 브라운 대령은 경찰의 잔악성과 비효율적인 정부기관도 원인 이 있지만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의 계획에 비하면 지엽적인 원인들이라고 분석하고, 제주 도가 공산주의자들의 거점으로 조직됐다고 결론을 내렸다.196)

자신의 지휘에도 불구하고 박진경 연대장이 암살되고 자신에게 부여된 재선거 실시를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지 못한 브라운 대령은 딘 소장에게 첫째, 최소한 1년 동안 경비대 1개 연대를 주둔시킬 것, 둘째, 제주도 경찰을 효율적이고 훈련된 경찰로 재조직할 것, 셋 째,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미국식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 것,197) 넷째, 제주도 행정기관을 부패와 비효율성이 없는 기관으로 만들 것을 건의했다.198)

정부 수립을 앞두고 딘 소장은 브라운 대령의 보고서를 토대로 제주도 민정장관 에드 가 노엘(Edgar A. Noel) 소령에게 브라운 대령의 건의사항을 완전 이행하도록 지시하고 이와 동시에 ‘모든 방법을 동원해’ 제주도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 다.199) 또한 딘 소장은 남한의 모든 정부부처에 대해서도 ‘제주도 문제를 최우선 관심사’

로 두도록 지시했다.200)

193) 위의 글.

194) 조선중앙일보 1948년 6월 8일.

195) 웨솔로스키 증언.

196) 로스웰 브라운 대령이 7월 초순 제주도를 떠나면서 제6사단장 올랜도 워드 소장에게 보낸 서 한. 1948년 7월 2일, 제주4․3위원회, 앞의 책 9, 37쪽.

197) “이는 공산주의 해악을 적극적으로 입증하고, 미국식이 제주도의 미래와 건전한 경제발전에 긍정적인 희망을 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선동에 효과적인 역선전 을 하는 것이다. 미국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시켜주고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압력을 가하게 되 는 것을 의미한다.” 위의 글.

198) 위의 글.

199) Brown Report, 앞의 글.

이와 같은 딘 소장의 지시는 스스로 제주도 정책의 실패를 자인하는 것이다. 미군정청

이와 같은 딘 소장의 지시는 스스로 제주도 정책의 실패를 자인하는 것이다. 미군정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