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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함경도 변방 교육현실의 제 조건

Ⅳ. 북간도 한민족교육사상의 형성 배경

2) 조선조 함경도 변방 교육현실의 제 조건

“문화를 만들고 그 영향을 받는 것이 사람이고, 역사를 만들고 그 역사를 기록 하는 것도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문화와 역사의 주역으로 성장해 가는 과 정을 교육학에서는 교육현상이라고 부른다”(김인회․박선영․이문원 외, 1983:

4). 이러한 교육현상의 기술과 해석에서 역사의 주인공인 민중의 생활과 사회구 성의 발전과정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또 단순한 역사적 사상(事象)의 나열이 아닌 그 사상 속에 숨겨진 제 법칙을 찾아야 할 것이다. 북간도 이주조선인들은 이주와 함께 함경도 북부 변방의 문화와 역사 등을 그대로 전승하게 된다. 이러 한 맥락에서 함경도 북부 지역의 교육 문화적 풍토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1) 변방의 교육과 유배인 및 지방관

함경도 변방의 문화적, 교육적 풍토의 변동계기는 귀양 오는 유배인들의 영향 을 크게 받았다. 또한 함경도 관찰사나 북평사로 파견되는 지방관들이 학문 진작 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유배인 및 지방관과 유배지 교육과의 관계는 어 떠했으며 또한 이들은 지방민들에게는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함경도 변방의 교육현실에 영향을 주게 되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것은 북간도 교육현 실을 인식하는데 간접적이기는 하나 매우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이다.

가. 유배지 함경도

조선왕조에 있어서 함경도의 북변지역은 강역(疆域)의 최북단이다. 게다가 지 리적으로 산악이 많은 이유로 고립되어 있어 육지속의 섬이라 불릴 정도로 편벽 했고 불안정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비교적 늦게 조선왕조의 행정체제에 편입 된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조선시기 사화나 당쟁으로 말미암은 유형(流刑) 가운 데 극변안치(極邊安置)가 가능했던 지역이기도 했다.

조선왕조의 형벌은 기본적으로 대명률(大明律)에 의거했다. 유형(流刑)은 조선 조 다섯 가지 기본 형벌인 태(苔), 장(杖), 도(徒), 유(流), 사(死) 가운데 하나인바 사형에서 감1등(減1等) 된 중형(重刑)이었다. 이러한 유형은 천도(遷徒), 부처(付 處), 안치(安置) 세 종류가 있다. 그 가운데 안치가 가장 가혹한 유형으로 본향안 치(本鄕安置), 절도안치(絶島安置), 위리안치(圍籬安置), 극변안치(極邊安置) 등이 있다.50) 이러한 유배는 쉽게 말하면 죄인을 원악(遠惡)의 지역에 격리시키는 것 으로 대부분 섬이나 극변지역이다. 조선조의 가장 대표적인 유배지역은 호남 도 서지역과 서북 극변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유배지역으로 제주도를 비

50) 遷徒는 죄인을 고향에서 천리 밖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것으로 심한 경우 전 가족을 모두 벽지로 강제 이 주시키기도 한다. 부처는 관원에 대한 형벌로 일정한 지역을 지정하여 留居하게 하는 경우이다. 안치는 配所의 일정한 장소에 격리시키는 것으로 왕족이나 고관 현직에 있는 자에 한해 적용되었다. 이러한 안치 는 본향안치, 절도안치, 위리안치 등이 있는데 대개 극변에 안치되는 경우를 또한 극변안치라고도 한다.

이 가운데서 위리안치는 격리된 집 주위에 가시나무로써 圍墻을 설치하고 그 안에 유폐시키는 것을 말하 며 이때는 가족을 동반할 수 없다(金民壽, 1975: 43-44; 양진건, 1991: 35-53).

롯한 호남지역은 도서(島嶼)유배지의 전형(典型)이고 서북의 육진지역은 극변유 배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배지는 조선초기인 태조(太祖)에서 성종(成宗)때까지만 하더라도 그 리 많지 않았을 뿐더러 주로 남쪽에 치우쳐 있었다. 이는 아무래도 이 시기는 조 선조가 세종대를 거치면서 비교적 안정되기도 했었거니와 북변이 완전히 정리되 지도 않았고 특히 사화나 당쟁으로 인한 정치적 갈등이 그리 심하지 않았기 때 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조선 중기로 접어들면서 4차례의 사화(士禍)를 계 기로 많은 사람들이 유배길에 올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북변의 변경지역에도 많은 유배지가 생기게 되었으며 6진 지역 또한 유배지로 합류되었다. 그 후 조선 말기까지 6진 지역은 호남의 도서지역 못지않게 많은 유배인들이 정배되는 전형 적인 유배지로 되었다.51)

그렇다면 함경도 북변에는 어떤 사람들이 유배되었으며 그 유배인들의 특징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은 과연 유배지의 교육적 풍토의 개변과 학문 진작에 어떠 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고찰해야 한다. 이것은 당시 함경도의 교육적 풍토를 이해 하는 데 중요한 단서일 것이다.

조선조는 국초부터 유교입국(儒敎立國) 정책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사대부들 사 이의 정치적 입장 차이로 많은 갈등이 있었다. 이는 결국 학설의 대립, 학문의 파벌을 잉태시켜 당파의 정권다툼으로 이어졌으며 마침내는 피비린내 나는 사화 나 당쟁 등의 당옥(黨獄)을 초래하게 되었다(양진건, 1991: 44). 바로 이러한 과정 에서 유형이 남발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조선조의 유배인들은 대부분이 고위정 객인 정치인들이었다.

정치인들은 학문적 소양으로써 정치를 하는 선비출신인바 정치인이자 곧 교육 인(학자)이었다. 즉 조선조의 선비들은 수기치인(修己治人: 개인의 인격과 학문적 소양을 닦은 후에 남을 다스린다)을 전제로 한 사대부로서 기본적으로 학자이면 서 정치인이었고 정치인이면서 또한 학자였다(양진건, 1991: 45). 따라서 그들이 추구하는 성리학 역시 예교(禮敎)적ㆍ정교(政敎)적인 측면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

51) 유배지와 유배길에 관한 연구로 김민수(1975)의 朝鮮時代 流配考 와 김경숙(2005)의 조선시대 유배길 등 연구를 참고할 수 있고 유배의 심리, 성격 등에 관해서는 양진건(1999)의 그 섬에 유배된 사람들을 참고할 수 있다. 함경북도에 유배된 인물들은 부록 2를 참조.

고 있다. 대개 이 두 측면의 성격을 동시에 소유한 선비를 일컬어 학자관료 즉 사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따라서 박제가(朴齊家)나 정약용(丁若鏞), 김정희(金 正喜) 등 당대의 거유들이 유배지에서 학문적 정상에 오르는 것은 어쩌면 아주 예사로운 것이며 그들이 유배지에서 자기교육 및 교학활동은 피치 못할 것이라 할 수 있다.

참된 유자(儒者)는 벼슬에 나가면 한 시대에 도를 실천해서 백성들에게 자유로운 즐거움을 누리게 하고 물러나 숨어있으면 만세에 가르침을 전하여 배우는 이로 하여금 큰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아가서는 행할 만한 도가 없고 물러난 뒤에는 전할 만한 가르침이 없다면 비록 참된 유자라 할지라도 나는 믿지 않습니다.54)

이는 율곡이 학자로서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음을 역설하는 대목으로 유배인들 의 교학활동은 이러한 학자 본연의 모습과 매치를 이루고 있다. 추사 김정희가 제 주도에 유배해 있는 동안 그의 내종질(內從姪) 민규호(閔奎鎬)는 두 차례 방문하 여 김정희의 학통을 이었을 뿐만 아니라 완당집(阮堂集)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는 완당김공소전(阮堂金公小傳)에서 김정희에게 배우고자 몰려오는 사람들을 장날의 사람에 비유했고 또 그 가르침의 효과가 몇 달 안에 인문이 크게 발달해 탐라의 거친 풍속을 깨우침에 크게 공헌했다고 했다.55)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유배인들은 자신이 유배된 사실에 대해 마냥 비관적이고 실망적인 것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비교적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서 학문적 정진을 위한 시간으로 독서나 교학에 열중했던 것이다. 초정 박제가의 경우 오히려 유배의 시간을 하늘이 준 독서의 기회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했다.56) 그는 “혼자 생각해보니 내 평생에 이처럼 한가한 날은 없었다. 하늘이 나를 대접하는 것이 참으로 지극하구나.”57)라고 했다.

54) 李珥, 栗谷全書 卷 15, 東湖問答 , “夫所謂眞儒者. 進則行道於一時. 使斯民有熙皥之樂. 退則垂敎於萬世.

使學者得大寐之醒. 進而無道可行. 退而無敎可垂. 則雖謂之眞儒. 吾不信也.”

55) 金正喜, 阮堂先生全集 卷 1, 阮堂金公小傳 . “居謫舍 遠近負芨 自如市纔 數月人文大開 彬彬有京國風 耽 羅開荒 自公始.”

56) 朴齊家, 貞蕤閣五集, 六月二十八日國祥望哭 , “二十五年文武道 忽焉墜地欲何如 小臣曾是無閑日 此謫天 應敎讀書”.

57) 朴齊家, 貞蕤閣文集, 卷 4, 寄稔兒 , “但使我有書如上所列, 則在此如在家, 自念平生無此閑日, 天之餉我至 矣. 了無窮愁之意, 汝輩之可. 克己看書, 不可悠悠泛泛失此時日也”.

결국 유배정책은 함경도 변방과 같이 지역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고립되고 폐쇄된 유배지역 학문 진작의 핵심 역량으로서 유배지역 교육사 형성의 중요한 정책적 동인으로 되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유배인들의 정배(定配)가 관북지역 학문적 문풍 형성에 무분별의 역할 을 했다면 당쟁이 더욱 심해지는 조선후기에는 지방관들의 영향이 점차 부각되 었다. 특히 어떠한 당색의 지방관이 파견되느냐에 따라 학문적 풍토가 기울어질 정도로 지방관의 역할이 컸다. 그들은 관북 서원과 사우 설립을 적극 추진하여 유배인들을 배향하기도 하고 관북의 유생들을 당대 명사들에게 소개하여 수학할 수 있도록 중재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한 본인의 학통을 관북에 전수하는 등 관북유림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그 대표적 인물은 관북 서원과 사우들에 서 가장 많이 배향하고 있는 함경북도관찰사로 있었던 노봉 민정중(老峯 閔鼎重:

1628~1692)과 북평사로 경성에 갔던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 1651~1708)을 들 수 있다.

나. 유배인과 지방관들의 교육적 영향

조선시기 관북에는 [부록 2]의 관북 유배인 일람표에서도 보이듯 적지 않은 사 람들이 유배되었는데 그들은 대개 사화나 당쟁으로 유배된 고위정객들이다. 바로

조선시기 관북에는 [부록 2]의 관북 유배인 일람표에서도 보이듯 적지 않은 사 람들이 유배되었는데 그들은 대개 사화나 당쟁으로 유배된 고위정객들이다.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