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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교육사상의 역할

Ⅴ. 북간도 한민족교육사상의 형성과 전개

3) 민족교육사상의 역할

1919년 3월 1일 전 세계 한민족은 마침내 ‘평화’를 기치로 민족독립운동을 일 으켰다. 10년 무단통치의 압박, 해외독립운동기지의 성장, 한민족 민족의식의 성 장이 그 동인으로 되었다. 이는 전 세계 한민족의 민족의식이 가장 크게 표출된 거사였다. 전 세계 한민족이 “자주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에 일치단결해서 봉기 한 전형적ㆍ전 민족적ㆍ대규모 독립운동이었으며 이는 그 전이나 후를 막론하고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신용하, 1988: 215).

운동은 국내외로 급속히 퍼졌다. 한반도 내에서는 각 도, 각 지방으로 번졌으 며 해외로는 간도, 연해주 등 모든 독립운동기지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간도 에서는 2월부터 이미 운동의 조짐을 감지하고 연해주와 연계하여 거사준비를 추 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김약연(金躍淵) 등을 파견하여 연해주와 독립운동 관련 합의를 진행하였으며 2월 18일과 20일에는 33명의 북간도 주요 반일지사들이 연 길에서 반일운동방략(反日運動方略)을 결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간도의 각 사립학교들에서도 2월부터 거사소식을 전해 듣고 지 원준비를 하고 있었다. 명동(明東), 광성(光成), 정동(正東) 등 학교들에서는 학생 대표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할 것을 비밀리에 결의하였다. 이는 교원과 학생대표들의 적극적인 인도와 민족의식으로 고취된 학생들이 적극적인 호응결 과이다. 또한 1905년 이래 각 사립학교들에서 민족교육사상을 토대로 교육을 진 행한 효과라고 할 수 있다. 학생대표들은 선두에 서서 반일사상을 선전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할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기독교동지청년회(基 督敎同志靑年會)’, ‘충열대(忠烈隊)’. ‘자위단(自衛團)’ 등 반일청년단체들을 조직하 여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김경식, 2004: 428).

1919년 3월 7일, 북간도에 3ㆍ1운동의 소식이 전해졌다. 국자가(菊子街: 지금의 연길)와 용정촌 소재의 조선인 사립학교들은 3월 10일부터 휴교에 들어갔고 학생

200) 이 부분은 연구자의 논문(2008) 만주사변이전 북간도 학생들의 교육운동 을 참조하여 작성하였다.

과 교사들은 독립선언 축하식(金東和, 1992: 99)과 시위운동준비에 들어갔다. 명 동, 정동 등 학교들에서는 300여명의 학생들을 모집하여 시위운동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전개를 위해 재원 확보, 정보 입수 등 일들에 착수하였다. 드디어 3월 13일 반일시위운동이 용정에서 터졌다. 당시 용정은 가장 큰 조선인 집거 지역인 데다 일본 총영사관이 주재하고 있어 반일시위에 맞춤한 곳이었다.

조선독립축하회와 반일시위운동이 열린다는 소식에 교원, 학생들과 군중들은 원근을 막론하고 결집되었다. 용정 부근은 물론이고 멀리는 200리 밖에 있는 중 학교, 초등학교 학생들까지도 밤새 도보로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몰려왔다. 이날 모두 12개 조선인 사립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운동에 참석하였고 일제가 운영 관리하던 학교의 학생들까지도 몰려들었다. 용정, 화룡, 국자가 등 각 지역의 수 천 명 학생을 비롯한 총 3만여 명이 모인 서전대야(瑞甸大野)201)는 전례 없는 반 일 대시위장이 되었다.

김영학(金永學)은 김약연 등 17명의 독립지사들을 대표하여 용정천주교의 종소 리가 울리자 “독립선언포고문”과 “공약3장”을 낭독하였다. 그의 낭독이 끝나자마 자 대회장은 “조선독립만세”가 진동하였다. 이어 곧 거리시위로 나섰다. 시위대의 선봉은 명동학교와 정동학교의 교원과 학생 320여명으로 조직된 “충열대(沖烈 隊)”가 맡았다(김철성, 1993: 376). 일제의 자료에 의하면 그 중 과반수가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한다(金正明, 1967: 23; 李明花, 1990: 121). 그 동안 민족의식 과 민족정신으로 무장된 교원과 학생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선봉에 섰다. 그들은 일제에 대한 증오감과 독립에 대한 염원을 구호에 담아 여지없이 드러냈다. 이날 시위행진에서 17명이 장렬히 희생되었는데 대부분 선열에 서서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이었다(이명화, 1990: 118).

학생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북간도 민중들의 반일투쟁은 3ㆍ13운동 끝난 후에도 지속되었다. 충렬대의 대원들 또한 결사대(決死隊), 맹호단(猛虎團)을 조직하여 계속 반일운동을 진행하였다. 특히 맹호단은 충렬대 대원을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반일비 밀무장조직이었다. 이는 충렬대 대원중에서 20세 이상의 우수한 청년학생으로서 명

201) 현재 中國 吉林省 龍井市中心幼稚園마당에는 自然石으로 된 紀念石碑가 있는데 正面에는 漢 字로 “瑞甸大野”라고 새겨져있고 背面에는 “1919년 3월 13일 延邊人民 3万余名이 이곳에 會 集하여 反日大會를 擧行하였다. 1995년 4월 15일 龍井 3․13紀念事業會”라고 새겨져 있다.

동학교의 학생 15명, 정동학교 학생 10명, 국자가 도립학교 학생 3명, 화전사 명당모 배영(培永)학교 학생 2명으로 조직된 암살대였다(김철성, 1993: 378). 맹호단은 일본 밀정과 친일주구들을 암살하고 일제의 통치기관을 파괴하며 일본침략세력을 유력하 게 타격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적극적인 반일활동을 벌였다. 학생들은 그동안 민 족교육사상을 기반으로 교육운동을 통해 쌓아온 민족의식과 애국주의 독립사상으로 진정 투쟁의 선두에 서서 일제와 맞대고 싸웠다. 그들은 민족교육구국운동이 점차 반일무장투쟁으로 나아감에 있어서 선봉, 교량적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이러한 학생들의 민족교육사상의 표현은 1920년 일본인이 감행한 간도 특대 참사에서 무려 38개의 학교(박금해, 2008: 83-84)가 일제에 의해 소실되었다는 사 실에서도 입증된다. 그리고 1920년대에도 사립학교와 학생들은 줄곧 교육운동을 통해 반일, 항일운동을 진행한 것으로 보면 당시 조선인사립학교들은 대부분이 민족교육사상을 발양, 전승하는 교육기관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동시 에 학생들을 선두로 민중들의 규합은 간도 조선인들의 민족적 자긍심과 스스로 개척한 땅에 대한 보호의식을 키워주었다. 이는 북간도에서의 적극적인 독립운동 과 항일운동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2) 민족정체성에 미친 영향

1910년대를 걸쳐 형성된 북간도 민족교육사상은 결국 민족교육의 큰 발전을 이끌어 냈으며 이를 통해 양성된 학생들은 1920년대의 항일무장투쟁의 가장 핵 심 역량으로 되었다. 민족교육사상의 가장 큰 역할은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 시키는 과정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중국이라는 대국에서 민족의 끈을 놓지 않 고 지속시키도록 만든 의식적인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움직임의 저변 에는 바로 이주와 함께 자각하기 시작한 북간도 조선인들의 자생적 민족의식이 짙게 깔려 있었다.

민족교육사상은 이주민의 자생적 민족의식을 기반으로 전통사상을 비롯하여 다양한 외래사상, 근대적 민족주의 사상을 수용함으로써 1910년대 형성된 것이 다. 그것을 기반으로 1920년대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조를 받아들이기도 했으 며 1930년대 이후의 일제의 식민주의 정책의 민족말살에도 견뎌냈다. 뿐만 아니

라 이주국가에서 끊임없는 자치운동으로 이주민들의 법적지위 확보를 위해 노력 했으며 그 결과 1952년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창립을 보게 되었다. 자치구역의 확보는 민족교육의 전개를 가능하도록 했으며 그러한 민족교육은 또한 민족의식 의 전승을 활성화시키고 촉진시키는 토대의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1960~70년대를 걸쳐 일어난 중국의 문화대혁명 10년 동란은 중국조선 족의 민족교육은 물론 모든 민족주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여 폄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좌’적 관점은 사회주의 중국에서 민족문제의 가장 주요한 위험 요소가 지방민족주의라고 인정(연변대학교육학심리학교연실, 1989: 302)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교육은 바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민족언어무용론(民族言語無用論)’, ‘중국어학습대방향론(漢語學習大 方向論)’ 등 역설적인 내용들의 충격으로 민족어맹이 속출했다. 뿐만 아니라 한족 학교에 진학하는 조선족학생들이 증폭하였고 민족학교가 통폐합되는 현상이 비 일비재했다.(김성봉ㆍ김해영, 2010: 49-54)

그러나 이러한 민족문화에 대한 의도적인 타격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사회는 민 족교육과 민족문화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한 민족문화와 민족언어를 고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이주 초기로부터 줄곧 쌓아온 민족의식에 기반을 둔 민족교 육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많은 해외 학자들은 중국의 조선족 문화가 강 대한 중국 문화권 안에서 자기들의 문화의 맥을 이어왔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다(김 강일, 1993: 13-26; 김정길, 2005). 특히 문화대혁명이라는 무지몽매한 문화말살의 정치운동 가운데서도 민족의 문화를 보존하여 왔다는 사실에 경이로워하고 있다.

이러한 민족의식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고 또 민족교육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민족교육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민족교육을 통해 민 족사, 민족지리, 민족언어 및 민족문화202)에 대한 교육을 지속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주국가에서 소수민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203)을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2) 중국조선족민족사교육과 민족문화교육에 관련된 연구는 김해영의 연변조선족자치주 민족사교육과 디지

202) 중국조선족민족사교육과 민족문화교육에 관련된 연구는 김해영의 연변조선족자치주 민족사교육과 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