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사회교육운동

Ⅴ. 북간도 한민족교육사상의 형성과 전개

2) 사회교육운동

(1) 사회단체의 조직과 활동

이주 조선인들은 그 수가 양적으로 확대될수록 지속적인 청나라와의 갈등과 모순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북간도 조선인들은 더욱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이주민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실력을 쌓을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이러한 노력의 시도로 북간도 이 주 조선인사회의 첫 사회단체인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가 1909년 7월 설립되었 다.196) 간민교육회는 이주민사회에서 이주민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일제와 같은 외래세력에 대항하면서 이주 조선인들을 일깨워서 보다 낳은 이주사회에서의 정 착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했던 일종의 이주민자치단체였다.

1907년 일제는 만주 지역 조선인들을 보호한다는 명의로 북간도 용정촌에 통 감부임시간도파출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주 조선인들은 일제의 치외법 권(治外法權)을 반대하기 위해 뭉쳐야 했고 이를 견제하고 이주 조선인들을 보호 할 수 있는 공식 조직을 구성해야 했다. 공식조직에 대한 구축 필요성은 사실 이 주민들의 ‘우리의식’과 ‘공동체의식’이 성장하면서 줄곧 잠재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일제의 간도진출은 바로 이주 조선인들이 자치기구를 설립할 수 있도록 계 기를 마련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한편 이러한 일제의 세력 확장에 맞서 청은 조 선인들에 대한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제2차 치발역복을 통한 귀화입적을 강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중압박에서 북간도 유지들은 조선인들의 권익을 보호 하고 계몽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간민교육회를 발족시켰던 것이다.

1909년 간도협약(間島協約) 체결 후 김약연(金躍淵), 박무림(朴茂林) 등 이주 민 사회 유지들을 기반으로 한민자치회를 결성하였으나 청의 허가를 받지 못해 공식적 단체로 성장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타국에서 언어, 풍속, 성격이 다 르기” 때문에 ‘민족자치’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면서 청의 연길부청에

196) 간민교육회의 설립연도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는데 대체로 연변조선족자치주당안관(延邊朝鮮族自 治州檔案館)에 소장되어 있는 연변대사기에 따르면 1909년인 것으로 확인된다.

지속적인 인가신청을 하였다(전신자, 2002: 109). 결국 조선인학교에서 ‘중국어를 주요과목’으로 교육에 있어 ‘청의 지도에 의거’할 것을 전제로 간민교육회의 성립 을 인가받았다(전신자, 2002: 109). 당시 간민교육회의 회장은 이동춘(李同春)이었 는데 그는 이미 오래전에 북간도에 이주해온 재산가로서 조선인사회에서 명망이 높은 인물이었다(반병률, 1998: 88). 당시 연길지부(延吉知府) 도빈(陶彬)의 통역 관이었던 이동춘이 있었기에 중국지방 당국의 지지와 협조를 받아 간민교육회의 발족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간민교육회는 북간도 각지에 지회를 두어 한민족 이주민의 사회를 조직화하는 한편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모범농촌활동을 벌이고 사회교육운동을 전개하여 이주 조선인들의 사회 경제력 향상을 도모하였다. 또한 문맹퇴치운동과 농촌사회 의 경제력 향상을 위해 식산회(殖産會)를 조직, 생산 판매 소비조합 등을 운영하 기도 하는 등 다양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나갔다.(김경식, 2004: 334)

한편 간도 각지에 학교와 교회를 설립하고 교사를 파견함으로써 반일계몽운동 을 추진할 인재를 양성하여 후일의 북간도 민족운동의 기초를 쌓았으며 또한 교 회설립과 소비조합 상조회 조직을 통한 동포들간의 단결을 도모했다(勸業新聞 1914년 4월 12일자). 이러한 활동을 통해 북간도 이주민들의 민족의식을 향상시 키고자 했다. 그들의 노력으로 많은 민족교육기관이 설립된 것은 물론 이주조선 인들이 단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북간도 각 지역에 권학위원(勸學委員)을 파견하여 교육비를 징수하였다.

한편 조선족 농촌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함으로써 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제 시하였고 적극적인 학교설립을 위해 민중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을 피력하였 다. 뿐만 아니라 국자가에 간민모범학당(墾民模範學堂)을 설립하여 소학부, 직업 학교, 교사양성소 등을 통합적으로 운영하였으며 연구회를 만들어 중국지방정부 의 이주조선인교육을 지도하기도 하였다(박금해, 2008: 35). 이와 같은 간민교육 회의 노력으로 당시 북간도에는 명동, 와룡동, 소영자 등에 중학교가 설립되었다.

당시 소학교는 훈춘지역까지 합하여 약 20개 설립되어 북간도 교육운동의 비약 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간민교육회는 또한 당시 사립학교들에 교재가 없거나 있지만 미숙한 상황을 파 악하고 교과서편찬에 착수했다. 이 작업은 계봉우(桂琫瑀), 정재면(鄭載冕), 남공선

(南公善) 등 당시 광성(光成), 명동(明東), 창동(昌東) 등 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인 사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민족의식 고취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교 재들이 편찬됨으로써 사립학교들의 교재로 보급되었다. 대표적인 교재는 오수불망 (吾讐不忘), 최신동국사(最新東國史), 대한역사(大韓歷史), 大東歷史略(대동역 사략),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 유년필독(幼年必讀) 등이다(박금해, 2008: 35).

이러한 간민교육회는 4년 남짓한 활동을 통해 연길을 중심으로 북간도 지역의 교육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관여하는 내용이나 범위면에서 교육이라는 특정 영역에 한정되어 있음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단순한 사회단체라는 성격의 한계성으로 말미암아 간민교육회의 지도자들은 전 영역에 걸친 실질적인 간민자 치기구의 발족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승리로 탄생 한 중화민국의 연성자치(聯省自治)제도가 출범되었다. 이에 힘입어 이동춘, 김약 연, 김립 등 간민교육회의 주요 인물들은 1913년 2월 간민교육회를 토대로 한인 자치기관으로서 간민회를 건립하기로 결의했다. 그 후 중국 지방정부와 협의한 결과 1913년 4월 26일 국자가(局子街延: 오늘날의 延吉)에서 북간도 지방 최초의 조선인 자치기구인 간민회를 탄생시켰다(서정민, 2007: 464).

간민회는 조선인의 중국 입적(入籍)을 비롯해 민생, 교육 등을 관장하였는데 이로써 북간도 조선인들을 조직화하고 규범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지속적으로 교 육사업을 강화하는 한편 중국 지방정부와 협력하여 호구(戶口)를 조사하였다. 당 시 동만(東滿)지방 조선인들은 15만여 명에 달했는데 간민회는 조선인의 토지매 매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중재하기도 하면서 조선인사회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음악이나 체육을 통해 당시 북간도 민중들의 민족의식을 고취 하고자 노력했다. 일단 명동학교와 광성학교에서 신찬창가집(新撰唱歌集)과  최신창가전집(最新唱歌全集)을 편찬하여 간도 내의 민족교육기관에는 물론 북간 도 전 역 조선인들에게 널리 알림으로써 민족의식을 고취하게 되었다(박금해, 2008: 36). 1913년 단오절에는 북간도 각 지역의 조선인 학교들을 연합하여 용정과 국자가(局子街)에서 연합운동대회를 개최함으로써 당시 북간도 지역 학교와 학부 모들이 참여한 사회운동으로 한인사회의 조직화에 기여했다(서정민, 2007: 464).

이처럼 간민교육회, 간민회와 같은 자치단체와 기관들은 북간도 유지들을 중심 으로 한반도의 애국계몽사상의 영향을 수용하면서 중국정부의 정책에 유연히 대처

하는 지혜를 보였다. 이로써 간도 조선인들의 이주사회에서의 위상을 높이고 민족 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자생적으로 마련해 나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197)

그 외에도 당시 북간도에는 다양한 사회단체들이 사상적 지주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특히 유림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적 성향을 띠고 있는 사회단체들이 많았 는데 이를테면 친협회(親協會), 사우계(士友契), 공교회(孔敎會), 농무계(農務契) 등 단체들이다(김경식, 2004: 355). 이러한 단체들은 간민회의 급진적인 움직임에 반발하면서 대립적인 구도를 형성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회단체들 은 서당교육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새로운 사조에 걸맞게 사숙개량회(私 塾改良會)를 조직해 신교육을 수용하고자 했다. 그들은 민족의식의 고취를 전통 의 강한 유지(維持)와 함께 수행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급진과 온건의 사회단체인 간민회와 농무계가 모두 해체의 상황에 놓 이자 일부 인사들의 협심으로 장업회(獎業會)가 발족되었다.

오직 실업교육만이 현 세계 인류의 급선무이며 잠시도 늦출 수는 없는 것 입니다. 그러나 이제 인심이 흩어져서 대중적 힘이 전혀 없는 때를 맞아 자 본이 충족하지 못해 유통이 원활하지 못할까 근심하고 지식이 완비되지 못 하고 소식이 통하지 못하여 실제 효과를 거두기 어려운 연고로 우리 동인들 은 장업회를 특별히 발기하였습니다. 이 장업회는 신(新), 구(舊)를 가리지 않고 정치와 관계없이 오직 실업교육을 진흥시키려는 것을 기본으로 삼습니 다(김경식, 2004: 359).

197) 墾民敎育會와 墾民會의 성립과정 선후 순서와 연계성에 대해 학계에서는 상이한 주장이 있다. 김경식 (2004: 332-340)은 이에 대해 잘 정리했다. 즉 墾民敎育會가 먼저 성립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墾民會로 발전되었다는 주장과 그 반대로 墾民會가 먼저 성립되었고 그 뒤 墾民敎育會로 되었다는 주장이다. 여 기서 전자는 본 연구에서 소개한바 대로이고 그 후자의 논지를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907년 金躍淵, 金永學, 具春善 등이 和龍 明東의 長財村에서 ‘延邊僑民會’를 조직하여 이주민들의 친목과 단결

197) 墾民敎育會와 墾民會의 성립과정 선후 순서와 연계성에 대해 학계에서는 상이한 주장이 있다. 김경식 (2004: 332-340)은 이에 대해 잘 정리했다. 즉 墾民敎育會가 먼저 성립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墾民會로 발전되었다는 주장과 그 반대로 墾民會가 먼저 성립되었고 그 뒤 墾民敎育會로 되었다는 주장이다. 여 기서 전자는 본 연구에서 소개한바 대로이고 그 후자의 논지를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907년 金躍淵, 金永學, 具春善 등이 和龍 明東의 長財村에서 ‘延邊僑民會’를 조직하여 이주민들의 친목과 단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