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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북간도 한민족교육사상의 의미

1) 민족교육

한 민족을 기타 민족과 구분하는 중요한 지표를 민족성 또는 민족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민족의식은 또한 민족정신이라고도 표현되는데 민족을 구성 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민족에 대한 관념 내지는 의식으로 집단의 식 혹은 사회의식, 공동체의식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자기의식은 공동문화를 가 지고 있는 동족과의 접촉에서보다 이민족 및 이문화(異文化)와 접촉하는 과정에 서 변화가 생기게 된다(김해영ㆍ양진건, 2009: 182). 북간도 이주민사회에서 근대 적인 민족 개념이 생성되기 이전에 이미 민족생성현상에 해당하는 이주민으로 구성된 공동체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그러한 공동체를 영위하기 위한 공동체 의식은 이미 민족을 자각하기 시작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간도는 19세기 이래 조선인들의 이주공간이다. 조선인들의 이주라는 현상에 는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선, 고향을 등지고 떠남을 담고 있다. 19세기 중반 삼정문란(三政紊亂)과 가렴주구로 인한 변방민중의 생활궁핍을 타개하기 위 한 월경이민이 크게 늘었다. 이는 이주민들의 봉건 왕조에 대한 불만을 아울러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그들의 반체제적인 성향과 함께 반골정신이 담겨져 있다 고 하겠다.

다음으로, 타민족과 공존해야 함을 의미하고 있다. 타민족 혹은 타국의 통치권 안에 있는 이주공간에서 이주민은 필연적으로 다른 민족들과 공동생활을 영위해

야만 한다. 북간도 이주 조선인의 경우 적어도 만족과 한족이라는 두 민족과 공 존해야만 했다. 이는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름을 경험적으로 피부에 닿게 실감 하는 과정으로 이주민들의 자기판별의식이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러한 이문화의 체험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문화적 현상들에 대한 비교가 진행된다.

타민족과의 공존구도가운데서 성장하는 자기판별의식과 함께 이주민들은 집단 적인 생활영위가 곧 이주민사회에서 존립 가능한 유일한 대책임을 의식하게 된 다. 따라서 공동체의식 또는 집단의식으로 표방되는 피아(彼我)에 대별되는 ‘우리 의식’ 또는 ‘자기의식’이 생성된다. 특히 이러한 의식은 억압받고 착취 받고 있다 는 불평등 혹은 피해의식이 강해질수록 더욱 확고해지고 강렬해진다고 볼 수 있 다. 그리하여 ‘뭉쳐야만 산다’,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는 의식이 점차 생기게 되었고 이는 서서히 민족의식으로 자각해갔으며 그것을 공동체 내에서 혹은 후대들에게 전파시켜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주민들의 교육에 대한 절박감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고 봐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이주민사회에서 교육은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집단거주의 형태로 마을을 형성하고 마을의 안정과 정착이 이루어짐과 함께 민중내부로부터 시작되 었다고 할 수 있다. 마을 유지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교육활동은 대개 조선후기 한반도 내의 서당교육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했으나 내용이나 방법 적인 측면이 아닌 교육목적에서 한반도의 그것과는 실제적으로 다른 면도 보여주었다. 이는 이주지역에서의 교육은 봉건적 지배집단이 피지배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교화의 장치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이나 사회 이동 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에 대 한 욕구와 갈망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주민사회에서의 민중들의 의식이 향상되었 음과 함께 당면 해결하고자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이주 전 조선조체제 하에서 변경 민중들은 봉건적 신분계층 간의 갈등과 모순 을 겪어야 했다. 그렇다면 북간도 이주 이후에는 일단 타민족과 대치상황이라는 경쟁구도로 민중의식은 더욱 빨리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주사회에서는 보 다 확고한 정착과 적응이라는 과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기 때문 이다. 특히 청나라의 치발역복(薙髮易服), 귀화입적(歸化入籍)33)의 노골적인 동화

33) ‘치발역복(薙髮易服)’, ‘귀화입적(歸化入籍)’은 청나라의 이주 조선인에 대한 동화정책으로 청나라 사람들처

정책으로써 자국민화하고자 하는 움직임,(김춘선, 1998: 78) 청인이나 한인(漢人) 점산호(占山戶)들의 무자비한 착취, 동족(同族)으로서 청에 입적하여 지주가 된 조선인들의 횡포 등에 대한 능동적인 대처와 함께 민족의식은 더욱 폭발적인 성 장을 보였다.

경제적으로 토지소유를 위한 전민제(佃民制)를 출현시켰다. 당시 북간도 지역 농 경지는 대부분 이주 조선인들이 개간한 것인데 청정부에서는 귀화조선인에 한해서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토지소유권을 제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인들이 귀화하지 않고도 토지소유를 할 수 있도록 출현한 것이 전민제인데 이는 비귀화인 들이 귀화인의 명의로 토지를 구입하는 형태를 말한다(김춘선, 1998: 78-79).

사회적으로 북간도 이주민들은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집단공동체를 구성하여 조선인 마을들이 많이 출현하였다. 따라서 이주민들은 이러한 마을공동체를 중심 으로 집단의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마을공동체의 형성은 교육이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문화적으로 북간도 이주민들은 당장 부딪힌 이민족과의 갈등과 모순 속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교육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러한 의식은 서당교육을 활발하게 벌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민족교육을 ‘민족의 공동체적인 삶의 증진을 위한 교육’으로서 ‘민족으로서의 삶을 반영하고 깨우치게 하고 개선하게 하는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이종각, 1990: 15). 이때 이주와 함께 북간도 조선인 사회에서 형성된 교육은 그것이 전 통적인 것이든 근대지향적인 것이든 간에 이미 민족교육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고 봐야 할 것이다. 이로써 북간도 민족교육의 출발은 한반도 근대 민족교육의 출발과는 다소 상이한 모습임을 인식할 수 있다. 한반도 내의 근대민족교육은 외 세 침입의 충격으로 형성된 저항적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교육이었다. 이는 근대 지향적인 측면과 민족지향적인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그러나 북간도 민족 교육의 경우 민족지향적인 측면이 근대지향적 측면보다 앞서 존재했다. 이때의 민족교육에서의 민족의 의미는 국가나 국민이라는 정치적 의미보다 삶을 반영하 는 운명공동체적․문화적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럼 머리를 깎고 청나라 옷으로 귀화하여 청나라에 국적을 올리고 청인으로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정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