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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계를 위한 이주와 교육

Ⅳ. 북간도 한민족교육사상의 형성 배경

1) 생계를 위한 이주와 교육

함경도 6진 지역에 있어 두만강 대안은 변경민중의 생명선이었다. 중앙에서 요 구하는 삼(參), 진주, 초피(貂皮) 등 진상품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 땔 감을 마련하거나 소먹이 꼴을 베는 일조차도 두만강 대안에서 취득해야 하는 중 요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이주형태는 그 성격을 달리하게 되었다. 기 존의 범월잠입과 같은 월경(越境)형태는 산삼 등의 채집을 위주로 잠시 이동했다 귀국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점차 농토개간과 농사를 위한 경작영주의 형태 로 변화되어 북간도 지역에는 조선인들의 토지개간과 함께 이주민 마을들이 형 성되기 시작했다. 대부분 만어(滿族語)로 되어 있던 산과 강 등 지명들이 조선인 들의 마을 생성과 함께 조선어 지명으로 점차 바뀌게 되었다. 이로써 북간도 지 역에서는 점차 이주민들이 정착하여 조선인사회를 형성해가기 시작했다. 이주 성 격의 변천에 따라 북간도 이주민들의 의식 역시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교육의 식의 태동으로 이어졌다.

(1) 이주 및 정착, 촌락의 형성

사실 6진 지역 사람들에게 있어 북간도를 비롯한 만주지역은 단 강 하나를 사 이에 두고 있어 아주 가까운 곳이다. 하지만 또 국경이라는 이유로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 미지의 세계이자 별천지로서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함경도 지역에서는 이미 오랜 세월 북간도는 화원 같은 살기 좋은 곳이며 만주에는 어디로 가나 기 름진 황무지여서 쌀 창고로 불리면서도 땅임자는 없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이다 (현룡순, 1993: 68). 당시 북간도에 대한 두만강 남안 백성들의 절절한 마음은 다 음 월강곡(越江曲)(현룡순, 1993: 69)에서도 생동하게 표현된다.

월편에 나붓기는 갈잎대가지는 애타는 내 가슴을 불러야 보건만 이 몸이 건느면 월강죄란다.

기러기 갈 때마다 일러야 보내며 꿈길이 그대와는 늘 같이 다녀도 이 몸이 건느면 월강죄란다.

이는 북변의 민중들이 가사로써 간도에 대한 애절한 동경을 표현한 것으로 월 강죄(越江罪)에 대한 두려움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어찌할 방법이 없어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북변의 상황은 이중하 (李重夏)의 감계사등록(勘界使謄錄)에서도 나타난다.

관북 지역은 땅이 본래 거칠고 메말랐고 해가 갈수록 자주 흉년이 듭니 다. 두만강을 건너면 곧 경작하지 않는 땅이고 바라보이는 정경이 끝없이 탁 트여서 땅의 이로움이 우리나라 보다 배가 됩니다. 그러므로 금지하는 것을 무릅쓰고 숨어 들어가면 동쪽으로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해가고, 북쪽으로 길림으로 갑니다.75)

75) 勘界使謄錄 上, 乙酉 12月 6日, 別單草. (이왕무, 2008: 160 재인용)

뿐만 아니라 북간도 땅의 비옥함은 안수길의 북간도라는 작품에서도 표현되 고 있다. 그는 두만강 양쪽의 땅을 두고 “이상한 일이었다. 같은 백두산에서 발 원하는 강물인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은 토질이 어쩌면 그렇게도 다 를까? 이쪽이 박토인데 반해 대안지방은 시꺼먼 땅이 기름지기 그대로 옥토였 다”고 했다(이승수, 2006: 345).

하지만 함경도 변방 민중의 월강은 엄격히 통제되어 있어 월강은 곧 법을 어 기는 범죄행위였다. 월강죄(越江罪)는 또한 월경죄(越境罪)76)라고도 하는데 청나 라가 두만강과 압록강 북부일대를 봉금지대로 정한 뒤 몰래 월강하여 사냥을 하 거나 채집을 하는 사람들에게 씌우는 죄목이었다. 두만강과 압록강이 변경이기 때문에 월경죄라고도 했다. 따라서 봉금령 기간(1677~1885) 조선인들의 이주형태 를 일컬어 범월잠입현상이라고 하고 그 시기를 범월잠입(犯越潛入)시기라고 한다.

청은 1644년 입관(入關)한 후 만주가 조상의 발상지라는 이유와 점차 황폐하여 간다는 이유로 1677년(康熙 16년) 두만강, 압록강 대안의 천 여리 되는 간도지 역77)을 봉금지대로 정하였다. 그리고 봉금령(封禁令)78)을 내려 민간인의 출입과 일체 활동 및 그들의 천입(遷入)을 일체 엄금하는 봉금정책을 취하였다. 그에 앞 서 조선에서도 압록강 남안에는 4군을, 두만강 남안에는 6진을 설치하고 행성(行 城)을 구축하였다. 이로써 변경을 통제하였으며 청이 봉금정책을 취한 이후에는 국경정책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데 이 지역은 함경도 두만강 유역의 사람들에게 생계유지의 젖줄기로서 사냥과 인삼, 약초 등 채집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경제적 원천지였던 것이다.

그만큼 변방 민중들의 북간도를 향한 범월현상은 지속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 었다. 다음 순조실록의 기록에서도 이를 입증하고 있다.

76) 越江을 통금하던 시기 월강은 죄목으로 일단 붙잡히기만 하면 사형을 당한다. 1831년부터 1869년까지 월 강사건은 9번이었고 참수당한 사람이 53人에 이르렀다(洪鍾泌, 1993, 68).

77) 압록강 하류인 구련성(九連城) 부근으로부터 吉林 舒蘭縣의 法特哈門에 이르는 일선 지역에 “禁山圍場”을 설 치하였다. 여기서 금산이란 특산물채집을 금지하고 산을 보호하기 위해 산을 봉하는 것이고 ‘圍場’이란 청나 라 旗人과 왕공귀족들이 기마, 사격 등을 연무하거나 수렵을 하기 위해 설치한 곳이다(朴昌昱, 1991, 181).

78) 김춘선은 청이 압록강 두만강 북안을 개간하지 않고 봉금정책을 실시한 이유를 길림통지(吉林通志)에 근거하여 세 방면으로 제시했다. 첫째는 만주족의 “龍興之地”에 대한 보존과 수호를 위하여; 둘째는 만주 기병과 기인들의 양생지역에 대한 보호를 위하여; 셋째는 백두산 일대의 인삼, 진주와 진귀한 야생동물 등 토산물을 독점하기 위해서이다(김춘선, 2001: 23).

육진(六鎭)은 모두 극변(極邊)입니다. 단지 두만강(豆滿江) 일대로서 남북 의 한계(限界)를 삼고 있는데, 그 너비는 거룻배도 용납할 수 없고, 그 깊이 는 치마를 걷고 건널 수 있으므로, 금방(禁防)이 조금 허술해지고 방수(防 守)가 점차 해이해지면, 범월(犯越)의 근심이 곳곳마다 도사리고 있습니다.

무산(茂山)의 초피(貂皮)와 인삼은 모두가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 고, 경원(慶源)의 은화(銀貨)는 대부분 피지(彼地)에서 무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이 잠시라도 얼어붙으면 나무하고 꼴을 베는 아이들이 다니는 길 이 이루어지는데, 어리석은 백성들은 마치 외부(外府)처럼 보고 완악한 풍속 이 법기(法紀)를 알지 못하니, 구탈(甌脫)이 서로 바라보이는데도 간두(奸竇) 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또 오랑캐의 산에는 초목(草木)이 무성한데, 우리나 라 경내(境內)에는 민둥산이 되었으니, 백성들이 금법(禁法)을 무릅쓰는 것 은 오로지 이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빨리 본도에 신칙(申飭)해서 거듭 변금 (邊禁)을 엄중히 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땔나무가 부족한 지역에 이르 러서는 또한 그 땅을 관할하는 수령으로 하여금 특별히 나무 심는 법을 할 당해 가르치게 함으로써 10년의 이로움을 기다려 훗날의 용도에 이바지하게 한다면, 폐해를 구제하는 한 가지 방도가 될 듯합니다.79)

그러므로 생계를 위해 두만강 유역에는 변경민들이 월경하다가 붙잡혀서 단두 대에 오르더라도 몰래 잠입하는 범월잠입 현상이 잦았던 것이다.80) 두만강 변뿐 만 아니라 함경도 기타 지역의 사람들도 만주를 동경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이유는 물론 함경도 전역에 만주가 별천지이며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있는 희 망의 땅이라는 통념적인 소문이 있었던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 조선조 통치의 피 폐에 북관의 민중이 그만큼 힘들어 했다는 것을 설명한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세도정치와 삼정문란으로 조정이 불안정했다. 토지국유 제의 붕괴와 함께 심한 봉건수탈로 각종 가렴잡세가 가혹했고 농촌경제의 피폐

79) 純祖實錄 卷 5, 3年(1803) 8年) 5月 11日(甲辰), “六鎭, 俱是極邊. 而只以豆滿一帶, 作爲南、北界限, 以其 廣則曾不容舠, 以其深則足可褰裳, 禁網稍踈, 防守漸弛, 犯越之患, 在在皆然. 茂山之貂、蔘, 非盡我土之産, 慶源之銀貨, 率多彼地之貿. 以至江氷乍合, 樵牧成蹊, 愚氓視若外府, 頑俗不知法紀, 甌脫相望, 奸竇莫遏. 且 胡山則草木蔚茂, 我境則林樾童濯, 民之冒禁, 職由於此. 亟宜另飭本道, 申嚴邊禁. 至若薪樵不足處, 亦令守土 之臣, 別課種樹之法, 以待十年之利, 以效他日之用, 恐爲捄弊之一端也. 詢廟堂後, 仍命嚴飭.”

80) 압록강 남안의 평안감사로 파견되었던 민유중의 1669년 보고에 따르면 “강변일대의 변민들이 국경을 넘 어 인삼 캐는 것은 큰 이익을 얻자는 것이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일의 요행을 바라고 나라 의 변금령을 어기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라고 하면서 범월잠입현상에 대한 변방민들의 사정 을 말하고 있다(吳唅, 1980: 3960).

가 극에 달했다. 게다가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변지역에는 연년 수재, 한재, 충재 등 자연재해81)가 덮쳤다. 특히 1869년 기사(己巳)년에는 전례 없는 대기근 으로 일단 생계유지가 시급했다. 이러한 상황을 윤정희(尹政熙)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종즉위 갑자(甲子)년 이후 북변은 연년 흉작으로 민생의 간난(艱難)이 심하더니 거금(距今) 85년(1870) 고종 경오(庚午)에는 전고에 없는 대기근이 라 이로 인하여 경원, 경흥 양군은 폐읍의 지경에 이르렀고 유난(流難)하는 기민(饑民)은 인상식(人相食)의 참화(慘禍)와 노변(路邊)에 기아(飢餓)의 사 체가 낭자(狼藉)하여 자불인견(自不忍見)의 대변을 양출(釀出)하였다. ... 유 난하는 기민은 월강하여 피(彼) 청인의 노예 혹은 자녀로 환양(還糧)하고 혹 가모(嫁母), 혹 수양자(收養子)로 명을 연하여 여생을 유지하였다. 때문에 경 오 기근은 아민(我民)을 월강케 한 동기라 운한다(尹政熙, 1991: 14).

결국 간도를 동경해 오던 농민들은 결단을 내리고 떼를 지어 간도이주를 시작 했다. “앉아서 굶어죽을 바엔 차라리 배불리 먹기 위하여 가다가 죽는 한이 있더 라도 강을 건너가련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로써 본격적인 함경도 농민들의 북간도 영주(永住)로서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영주현상은 이미 1851~1856년경에 북간도 해란강(海蘭江) 유역인 덕신

이러한 영주현상은 이미 1851~1856년경에 북간도 해란강(海蘭江) 유역인 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