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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교육사상의 전개

Ⅴ. 북간도 한민족교육사상의 형성과 전개

2. 민족교육사상의 전개

1860년대로부터 본격적 이주와 정착을 시작한 북간도 이주 조선인들은 일제에 저항하기에 앞서 청나라 주류민족인 만족과 그리고 한족들과 경쟁구도를 갖추어 야 하는 의식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이주민들은 이주 전 대부분 변방의 하층 민중 출신으로 오랜 세월 중앙으로부터 소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봉건적 수탈대상이었다는 점에서 늘 반체제적인 반골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 가 그들은 북방변경에 있으면서 역사적으로 여진족 등 이민족과의 지속적인 접 촉을 해야만 했다. 그 이유로 자와 타의 구분을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빨리 자각 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후기에 들어 민중의식이 비교적 빨리 성 장하는 대표 지역가운데 하나가 북방변경지대이기도 했다.

이렇게 볼 때 이주초기 북간도조선인사회에서 민족 및 민족의식의 개념생성은 동일한 생활공간 속에서 타민족에 대한 ‘우리의식’, ‘자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 다. 이는 결코 국가나 국민의식으로서의 거대하고 서구적인 또는 외세에 대한 저 항적인 민족주의의 개념에 입각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그들은 새로운 삶의 개 척을 위해 고향을 등지고 과감하게 이주를 한 이주민으로서 그들의 개념 속의 국가인 왕조에 대한 미련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들의 우 리의식 속에서 태동되는 민족의 개념은 운명공동체적이고 문화적 민족으로서 법 제적이고 정치적인 국가나 국민과 결코 일치한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민족의 끊임없는 압제와 침탈을 경험하면서 민족과 국가의 존재 당 위를 서서히 체득해 나갔을 것이다. 이주 이전의 전근대적 향촌 질서를 극복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근대적인 사회ㆍ경제적 제 관계를 지향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읽고 쓴다는 의미는 더 이상 한반도내에서와 같이 지배집단의 논리와 가치체계에 편입하고자 하는 허구의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 동체 성원으로서의 인간됨을 확인하는 것이었다(한국교육연구소 편, 1993: 243).

이러한 맥락에서 북간도 민족교육사상은 국가나 국민의 개념이 강한 민족주의 적 측면보다는 사회․문화․운명공동체적인 개념이 강한 공동체의식, 민족의식을 출발로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주민 공동체 안의 사람들 사이에 상호작용하는사회적 힘(social force)’에 기인되는 것으로 이는 사회를 변화시키

려는 또는 그 변화를 막으려는 사회내부로부터의 움직임이다(김인회, 1994:

24-25). 북간도 이주민사회를 구성한 함경도 사람들에게 있어 사회적 힘이란 새로 운 삶을 추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힘을 가지고 있 었다. 또 타민족과의 갈등과 모순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는 측면에서는 공동 체의식의 변질 즉 동화를 막고자 하는 사회적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어찌되었건 이와 같은 사회적 힘에 의해 이주민들은 집단공동체 생활을 영위 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공동체 속에서 이주민들의 의식은 점차 체계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어 경제적 힘, 종교적 힘, 교육적 힘, 정치적 힘으로 승화된다(김인회, 1994: 25). 결국 이 힘을 후세에 전달하고자 하는 의식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 러한 의식이 민족의식의 초기단계이고 민족교육사상의 태동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이주민들의 교육에 대한 의식은 그들이 처한 특수한 상황, 즉 이민족과 공존한다는 특징에서는 민족교육사상의 맹아라 할 수 있겠지만 아직 근대적인 산물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주라는 행위 자체가 민중들의 새로운 삶의 터전 마련 을 위한 움직임으로 이는 기본적으로 전근대적 향촌 질서에 대한 거부반응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주민들의 교육적 의식 속에는 이미 새로운 사회ㆍ경제적 제 관계를 염원하는 근대지향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바로 북간도 이주민들의 단순한 생존권의 확보에 국한되지 않고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노력했던 모습 속에 담긴 발전 지향적인 의식세계가 북간 도에서의 성공적인 정착을 이루어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을 것이다.

이는 북간도에서 다양한 열악한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힘의 양성 과정이다. 그것은 이후의 근대적 물결의 수용과 함께 한반도에서 급속히 전파되 는 자주ㆍ독립의 민족주의적 사조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기반으로 되 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근대적 민족교육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적극적 수용의 모 습을 보일 수 있었다고 하겠다. 사상의 개념을 정신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 이성적 반성 이전의 생활 감정, 의식아래 있는 지향 등으로 이해할 때 이상에서 살핀바와 같이 북간도 민족교육사상은 시종일관 북간도 이주민들의 민족의식과 일맥상통하게 성장해 왔음을 알 수 있다.

Ⅳ. 북간도 한민족교육사상의 형성 배경

북간도 이주 조선인의 출신지는 이미 많은 연구들에서도 제시되었고 또 현재 의 연변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에서도 표현되듯이 함경도 출신34)이 가장 많고 그 버금이 강원도이다(이종수, 2009: 71).

[그림 Ⅳ-1] 북간도와 함경도 북부 대칭지도

* 槻木瑞生(1975)의 연구 p.102의 지도의 부분을 취해 필자가 명칭을 한글로 표기하 고 함경북도와 북간도 지역의 도시를 추가 표기함.

34) 현재 중국 동북에 분포되어 있는 조선족의 한반도 출신지역을 보면 압록강 유역의 신의주(新義州)와 두만 강 유역의 회령을 축으로 한반도를 동북3성 쪽으로 뒤엎은 결과라 할 수 있다(김경식, 2008: 864). 이는 동북3성에 분포되어 있는 조선족의 방언을 살펴도 알 수 있는 것으로 함경도 출신이 절대다수를 차지하 는 북간도 즉 현재의 연변(연변조선족자치주)은 주로 함경도 사투리를 쓰고 있고 평안도 출신이 다수인 遼寧省 남부 즉 서간도 일대는 평안도 사투리를 쓰고 있으며 吉林省 서북부나 黑龍江省의 조선족은 주로 경상도를 비롯한 남한의 방언을 쓰고 있다(김동춘, 2007: 22). 이러한 현상은 기타 이주민사회에서도 나타 나는 현상으로 일본 오사카의 猪飼野(이카이노) 지역에 가면 도처에서 제주도 사투리를 들을 수 있어 ‘일 본 속의 제주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림 Ⅳ-1]를 통해 함경도 북부지역과 북간도 지역은 두만강을 축으로 대칭되 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북간도 이주민들의 출신이 함경도 북부지역임을 나 타내는 지리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북간도의 역사 문화적 배경과 교 육현실 및 그 사람들의 교육의식에 대한 이해는 함경도 변방에 대한 이해를 전 제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한 지역의 독특한 지리·문화적 특성과 역사적 배경은 특정한 역사단계 의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추상적인 인간 일반이 아니 라 현실의 사회적 제 관계 속에서 생활하는 역사사회적 존재이고 그 생활과정 및 생존방식 자체가 교육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봐야 하기”(양진건, 1991:

25) 때문이다. 역사에 있어서 민중의 삶의 실천방식을 지도하는 교육현실은 당시 의 역사적 현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조선후기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 지 북간도 이주한민족의 원천을 제공한 함경도 북부지역의 독특한 역사적 배경 및 문화적 특성, 변방 교육현실에 대한 제 조건을 고찰해야 한다. 이는 당대 함 경도 변방이 처한 역사적 교육현실과 그들의 이주지역인 북간도 교육현실의 총 체를 파악하기 위한 전제이다.

1) 북간도 조선인의 역사·문화적 특징

1860년대 이전 북간도 지역은 청정부의 봉금령으로 200년 가까이 방치된 상태 였다. 북간도는 함경도 북부지역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은 당시 청과 조 선의 국경이 명확하지 않았던 지역이라 왕래하던 주민들은 함경도 변방의 주민 이 많았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함경도는 평안도, 황해도와 함께 조선조의 북삼도(北三道)에 속한다. 그 가운데 함경도 북부지역은 한반도 최북단의 변방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 대륙의 한 족(漢族), 거란(契丹), 여진(女眞) 등 민족과 접촉해 왔으며 고구려말기 이후로는 늘 불안정 상태였던 지역이다.35) 이러한 상황은 조선 초기(1441년: 세종 23) 김종

35) 고조선시대는 濊貊(부족동맹)의 治下, 古朝鮮 멸망 후 漢四郡(BC 108)이 설치되자 玄堍郡에 속했다가 한4 군 철수 후에는 沃沮에 귀속되었고, 광개토대왕 20년(410) 고구려가 東夫餘(285∼410)를 멸망시키면서 고

서(金宗瑞)에 의해 두만강 변 북변(北邊)에 6진(六鎭: 종성(鐘城)·온성(穩城)·회령

속의 섬이나 마찬가지였는바 북변지역은 북으로 남으로 고립된 상황이었기 때문 이다. 이러한 북관의 사정은 아래 후송 유의양(後松 柳義養)의 북관노정록(北關 路程錄)에 잘 나타나 있다(최강현 , 1984: 109).

대개 북도길이 뫼와 물이 많다. 물들은 다 태산 장곡(泰山長谷)으로 흘러 오기 때문에 가뭄 때에는 발목에 차는 물들이라도 잠깐 비가 오면 깊기도 매우 깊을 뿐만 아니라 물 힘이 극히 세어 건널 길이 없고, 또 배들을 하류 에서 끌어 올려다 건너려 해도 자연 지체하기 쉽다. 그 배라는 것도 모양은 널판 한 잎을 길게 놓고 두 옆에 성주목(成柱木)을 구유처럼 파서 양 옆에 하나씩 모로 붙였으니, 대체로 모양도 괴이하거니와 그렇게 센 물을 타고 건너기에는 퍽 위험하였다. 나도 서너곳 그런 배를 타고 건너기는 했지만

대개 북도길이 뫼와 물이 많다. 물들은 다 태산 장곡(泰山長谷)으로 흘러 오기 때문에 가뭄 때에는 발목에 차는 물들이라도 잠깐 비가 오면 깊기도 매우 깊을 뿐만 아니라 물 힘이 극히 세어 건널 길이 없고, 또 배들을 하류 에서 끌어 올려다 건너려 해도 자연 지체하기 쉽다. 그 배라는 것도 모양은 널판 한 잎을 길게 놓고 두 옆에 성주목(成柱木)을 구유처럼 파서 양 옆에 하나씩 모로 붙였으니, 대체로 모양도 괴이하거니와 그렇게 센 물을 타고 건너기에는 퍽 위험하였다. 나도 서너곳 그런 배를 타고 건너기는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