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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광복을 위한 이주와 교육

Ⅳ. 북간도 한민족교육사상의 형성 배경

3) 민족광복을 위한 이주와 교육

19세기 말 청일전쟁으로 말미암아 전국적으로 퍼지게 된 의병항전은 1910년 경술국치이후 독립군의 항전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의 이념과 논리를 합일시켜 형성된 독립전쟁론(윤병석, 1996: 383)을 뒷받침으로 하 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전개된 독립운동은 1905년, 1910년 일제의 노골적인

97) 柳麟錫, 義菴集 卷 24, 興同門士友書 , “近因大荒禁不得. 來居者不下萬數. 其餘地尙可容幾萬戶. 土甚饒.

一人耕而食十人. 一年耕而食三四歲. 菽粟如水火. 人多有仁心. 其中往往有義氣人. 可與之爲善謀事. 延攬英雄.

不難容接. 徐圖所爲. 果若庶幾矣. 至於自守之事. 今不遑念及. 而要之亦庶幾耳. 且越國境而卽止. 得吾不忍遠 去之心.”

한반도 침점과 함께 국내에서의 활동이 한계에 부딪치자 해외독립운동의 기지를 설립하는 데로 의견이 모아졌다. 특히 1905년 을사조약은 그동안 반봉건, 반외세 운동을 활발히 벌이던 선각자들의 활동무대를 국외로 전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 다. 이른바 독립운동기지란 이주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여러 지역을 민족정신 이 투철한 항일운동의 세력근거지로 만들어 그곳을 중심으로 일제와의 독립전쟁 을 준비하고자 하는 근거지를 말한다(박주신, 2007: 58).

당시 한반도 내에서는 애국계몽운동에 의해 다양한 구국운동이 일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애국계몽운동은 의병운동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으로 민력계발 및 민 족독립역량양성운동을 총칭한다. 그것은 문화운동, 신교육구국운동, 언론계몽운 동, 민족산업진흥운동(실업구국운동), 국채보상운동, 신문화·신문학운동, 국학운동, 민족종교운동, 해외독립기지 창건운동 등을 포함한다(慎鏞廈, 1987: 352).

이러한 상황에서 독립운동기지 선정에는 다음 여건들을 충족시켜야 했다(최홍 빈, 2000: 44). 첫째, 해당 지역 조선인사회를 바탕으로 반일단체를 조직하여 조선 인사회의 자치능력을 신장시키면서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조선인사회에 대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애국계몽운동과 민족주의 근대교 육을 진흥시킬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근대산업의 진흥을 위한 실업권장활동을 통한 경제적 기반을 수립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기독교ㆍ대종교 등 종교의 선 교활동을 통하여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조선인사회의 단합과 근대 의식의 각성을 조장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조 선인들의 이주가 시작되어 1900년대에는 조선인사회가 전면 형성된 북간도 지역 은 해외 독립운동기지로 가장 먼저 주목될 수 있는 여건을 지닌 지역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한반도 내의 애국지사 및 반일운동가들은 간도, 러시 아의 연해주 등 곳으로 정치적 망명을 시작하였다. 1897년 독립협회가 해산된 후 조직된 상동청년회마저 1906년 초에 해산되어(徐紘一, 2006: 81-82) 독립운동가들 의 망명은 더욱 활발해졌다. 이는 1910년 경술국치 및 일제의 무단통치와 더불어 조선반도 내에서 조직적인 민족운동이 완전히 불가능해지자 더욱 고조되었다.

당시 북간도 망명 정치인들 가운데 주목할 수 있는 인물이 이상설(李相卨)과 이동녕(李東寧)을 중심으로 하는 여준(呂準), 장유순(張裕淳), 이회영(李會榮) 등98)이다. 이들은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함께 근대교육을 진흥시키고 군

사학교를 개설하여 광복군과 같은 민족군대와 민족운동의 전위대를 양성하려고 계획했던 것이다(윤병석, 1984: 115). 그들은 이회영의 자택에서 망명계획의 모임 을 가졌다. 그 결과 해외 독립운동기지의 첫 정착지를 북간도 조선인사회의 중심 지인 용정(龍井)으로 정하고 이상설99)을 만주망명 선발대 핵심인물로 정했다. 당 시 북간도 용정은 이미 형성된 조선인사회를 기반으로 교육활동이 가능했다. 국내 와 거리가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연해주, 동ㆍ서간도와도 편리한 교통으로 외교에 이로워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쉬운 곳이었다(강재언, 1984: 11). 또한 독립운동기지 선정의 여건과도 일치했다. 이것이 용정을 독립운동기지로 선정한 이유이다.

이에 대해 이회영(李會榮)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李觀稙, 1985:

130-131).

단기(檀紀) 4239년 병오(1906) 하(夏) 선생이 광복운동의 원대한 素志를 행함에는 국내에서만 행하는 것이 불리한 줄 각오하셨다. 선생은 이상설(李 相卨), 유완유(柳完悠), 이동녕(李東寧), 장유순(張裕淳) 등 여러 선생과 심심 (深深)밀의하시고 광복운동을 만주에 전개키로 하고 만주택지와 도만인물을 논할 새 북간도 용정촌은 교포가 다주(多住)하여 교육하기 최미(最美)하고 노령(露領)이 북통(北通)하여 외교가 편리하며 내지가 일위수(一葦水)를 격 (隔)하여 왕래가 역호(亦好)하니 택지(擇地)는 용정촌으로 정하고, 그러나 도 만(渡滿)인물을 택(擇)키 난(難)하도다. 요컨대 동지 중에 명예(名譽)ㆍ지식 (知識)ㆍ도량(度量)ㆍ지고(志高)ㆍ인내(忍耐) 등을 겸비한 인물이라야 한만인 (韓滿人)의 모본(模本)이 되어서 기초를 선수(善修)하고 사업의 성공을 가히 기약할지로다. 보재(溥齋) 선생이 개연(蓋然)히 말씀하시되 수모(誰某)를 막 론하고 인정상에 이친척(離親戚) 기분묘(棄墳墓)하고 황한한방(荒漢寒方)에 고주고난(孤住苦難)하는 것이 또한 어렵지마는 조국과 민족이 중대한지라 이제 이험(夷險)을 어찌 선택하리오. 내가 불민하나 만주에 나아가 운동을

98) 이 가운데서 李會榮을 비롯한 기타 新民會 회원들인 李相龍, 安昌浩, 朴殷植, 申采浩 등 독립지사들은 주 로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99) 이상설은 충청북도 출신으로 이회영, 이시영, 여준(일명 여조현) 등과 함께 이제촌의 문하에서 배우기도 하고 또 유인석에게 배우기도 했다. 그는 25세인 1894년에 마지막 과거에 급제하여 승정원, 성균관 등에 서 두루 관직을 거치는 와중에 헐버트박사를 만나 신학문을 배웠으며 또한 동서양의 다양한 학문들을 습 득하여 당시 학계의 권위자로 되었다(일목, 2002: 97). 이상설은 1906년 4월 18일 이회영과 이동녕의 전송 을 받으며 간도로 출발했는데 그의 노선은 서울→인천→상해→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간도 용정 촌의 순서였다(金錫營, 1979: 129).

열고자 하노라 하신대 만좌제공(滿座諸公)이 보재선생의 기고(氣高)를 다 절 찬하시더라. … … 선생은 용정촌에 기주(寄住)하시고 차지(此地)에 서전서 숙(瑞甸義塾)을 설립하여 교포자제를 교육하시며 비밀리에 선생과 기맥(氣 脈)을 통하여 광복소지(光復素志)를 신(伸)하시도다.

이상설(李相卨)에 이어 여준(呂準, 일명 呂祖鉉), 이동녕(李東寧, 일명 李亮), 박 무림(朴戊林, 일명 朴禎瑞), 정순만(鄭順萬, 일명 王昌東), 황공달(黃公達) 등이 잇 따라 용정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즉시 교육활동에 착수하여 용정에 서전서숙을 설 립하였으며 이로써 북간도에서 교육구국운동 및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간도에 망명하여 교육활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을 활발히 벌인 독 립지사들 가운데는 양인출신의 인물들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이동휘와 계봉우를 들 수 있다. 특히 이들은 외래사상인 기독교와 애국계몽운동과 연결시켜 망명 후 간도 교육구국운동에서 기독교사상의 전파와 조선인 교육에 큰 역할을 한 인물 들이다.

두 사람은 모두 함경도 출신으로서 하층 양인임에도 불구하고 입신양명의 성 장기를 거쳐 민족의 불운을 감지하고 민족운동에 적극 나섰다. 1905년 을사조약 을 전후로 애국계몽운동에 투신, 국권수호를 위한 민족주의 성장에 선도자로 부 상했다. 또한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및 신민회 등 항일애국결사에 적극 참여하 기도 했다.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 및 이 두 학회를 통합한 서북학 회(西北學會)에 참여하면서 구국교육을 주도하기도 했는데 이미 함경도 지방에서 는 명성이 자자했다. 1911년 간도 망명 후에는 그곳 독립운동 및 교육구국운동의 핵심인물로 부상했다(윤병석, 2003: 164). 특히 당시 북간도의 이주 조선인들은 대부분 함경도 출신으로 이동휘(李東輝)와 계봉우(桂奉瑀)는 그곳 주민들을 단결 시키고 교육운동에 참여시키는 데 용이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정치지식인들의 북간도 망명을 계기로 애국계몽의 민족주의 사상이 북간도에서 확산되기 시작했 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1860년대부터 이루어져 온 조선반도 사람들의 북간도 이주는 반세기를 거쳐서 그 이주 동기나 목적에서 점진적이고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생계를 위 한 농업이주의 초기 이주동기에서 1880년대 이후 유지들의 이상사회 건설을 위

한 집단이주를 거쳐 독립을 위한 항일민족운동의 성격이 강한 정치적인 민족이 동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간도의 사회, 정치, 교육 등 분야에서 공간 적인 비약을 일으켰다. 특히 교육은 이주 초기의 가정교육에서 유지들의 진보적 인 서당교육을 거쳐 독립지사들의 근대식 개량서당의 형성단계로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결국 1910~20년대 활발하게 전개되는 사립학교 설립운동 의 동인으로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