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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조선인의 역사·문화적 특징

Ⅳ. 북간도 한민족교육사상의 형성 배경

1) 북간도 조선인의 역사·문화적 특징

1860년대 이전 북간도 지역은 청정부의 봉금령으로 200년 가까이 방치된 상태 였다. 북간도는 함경도 북부지역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은 당시 청과 조 선의 국경이 명확하지 않았던 지역이라 왕래하던 주민들은 함경도 변방의 주민 이 많았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함경도는 평안도, 황해도와 함께 조선조의 북삼도(北三道)에 속한다. 그 가운데 함경도 북부지역은 한반도 최북단의 변방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 대륙의 한 족(漢族), 거란(契丹), 여진(女眞) 등 민족과 접촉해 왔으며 고구려말기 이후로는 늘 불안정 상태였던 지역이다.35) 이러한 상황은 조선 초기(1441년: 세종 23) 김종

35) 고조선시대는 濊貊(부족동맹)의 治下, 古朝鮮 멸망 후 漢四郡(BC 108)이 설치되자 玄堍郡에 속했다가 한4 군 철수 후에는 沃沮에 귀속되었고, 광개토대왕 20년(410) 고구려가 東夫餘(285∼410)를 멸망시키면서 고

서(金宗瑞)에 의해 두만강 변 북변(北邊)에 6진(六鎭: 종성(鐘城)·온성(穩城)·회령

속의 섬이나 마찬가지였는바 북변지역은 북으로 남으로 고립된 상황이었기 때문 이다. 이러한 북관의 사정은 아래 후송 유의양(後松 柳義養)의 북관노정록(北關 路程錄)에 잘 나타나 있다(최강현 , 1984: 109).

대개 북도길이 뫼와 물이 많다. 물들은 다 태산 장곡(泰山長谷)으로 흘러 오기 때문에 가뭄 때에는 발목에 차는 물들이라도 잠깐 비가 오면 깊기도 매우 깊을 뿐만 아니라 물 힘이 극히 세어 건널 길이 없고, 또 배들을 하류 에서 끌어 올려다 건너려 해도 자연 지체하기 쉽다. 그 배라는 것도 모양은 널판 한 잎을 길게 놓고 두 옆에 성주목(成柱木)을 구유처럼 파서 양 옆에 하나씩 모로 붙였으니, 대체로 모양도 괴이하거니와 그렇게 센 물을 타고 건너기에는 퍽 위험하였다. 나도 서너곳 그런 배를 타고 건너기는 했지만 바쁘지 않은 길이라도 바로 길손이 나가지 못하고 사람을 먼저 내보내 길을 밟힌 후에야 길을 떠나야 했다.

지리적으로 열악한 이유로 함경도 북부지역은 조선후기까지 남쪽과의 교류보 다 여진과의 접촉이 더 잦았다. 그리하여 삼남을 중심으로 하는 남도 사람들에게 는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또한 여진과 조선의 이질적인 두 문화의 중첩으로 변경문화 및 접경문화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신정일의 택리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신정일, 2004: 162).

우리 백성과 오랑캐가 섞여서 농사를 지어 가며 사는 곳, 풍속은 활과 칼 만 알았지 책은 알지 못한다. 100년 전 옛 땅이 지금은 진이 되었는데, 알목 하의 물은 흘러서 옛 터전으로 잇달아 내려가누나.

이러한 상황은 조선왕조의 함경도 출신 관리들은 대부분 무관이라는 사 실에서도 반증된다.

종성에 유배되어 19년을 살았던 미암 유희춘도 북도 풍속의 우매함을 이 야기했다. 이러한 내용에서도 북관의 이질적인 문화현상이 엿보인다.

북녘은 비루하고 무지한 풍속이 있어 매번 입춘 때마다 장정들을 벌거벗겨

서 목우를 몰게 하고 이것을 나경이라 한다. 그러다가 더러 추위 때문에 큰 병을 앓는 자도 있으니 감사는 모름지기 이를 엄하게 금하여야 할 것이다.39)

실제로 그동안 많은 연구들을 통해 밝혀진 조선후기 지방의 모습은 대부분 경 기(京畿)이남지역이었다. 황해도(黃海道)나 평안도(平安道), 함경도(咸鏡道) 등 북 삼도(北三道)에 대한 모습은 확인하기 어려웠다. 국토 최북단의 육진 지역에 관 련된 논의는 특히 드물었다.40) 이는 현재 북한에 속해 있기도 하거니와 자료 또 한 확보하기 어려운 까닭에 연구 성과가 적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방관으로 파견된 사람들의 기행문이나 유배인들의 문학작품, 그리고 소수의 그 지역 학인 들에 의한 저술에서 그 일상을 알아볼 수 있다.

그들이 묘사한 북관지역은 한마디로 낯선 지역이다. 기후와 자연지형뿐만 아니 라 언어, 문화 등 풍토의 독특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남방에서 살던 지방관 이 함경도에 부임하면 가장 어렵고 이질감을 느끼는 것이 언어였다고 하는데 이 는 제주도의 사정과도 유사했다. 육진지역은 오랫동안 여진인과 함께 거주한 지 역으로서 6진이 설치된 뒤에도 여진인(女眞人)들의 잔여로 여진언어(女眞言語)가 많이 섞이게 되었다. 그 언어는 여타 지역 언어와 확연히 달라 알아듣지 못할 사 투리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유의양의 북관노정록에서는 오히려 경성(鏡城) 이북이 경성 이남에 비해 나았다고 했는데 그 원인을 경성 이북의 육진지역은 남쪽의 사람들을 이주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41)

그런가 하면 함경북도의 독특한 문화 가운데 하나가 조선의 지지(地誌)들에 한 결같이 표현되는 것처럼 무속이 성행하였다. 특히 유배인들이나 지방관들의 기록 에는 꼭 무속에 관한 내용들이 등장하곤 했다. 홍양호(洪良浩)의 이계집(耳溪集)

에서나 유의양의 북관노정록, 박제가(朴齊家)의 여차잡절(旅次雜絶) , 수주객

39) 柳希春, 眉巖日記草(박종훈, 2008 재인용).

40) 북간도와 관련지어 육진지역의 역사를 다룬 연구는 연변의 학자들에 의해 진행된바 있는데 그 가운데 김 춘선(2001)의 연구에서 비교적 자세히 소개되었다. 그러나 주로 이주와 범월현상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교육사에 관련된 이 지역의 연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41) 최강현이 역주한 후송 유의양의 북관노정록 89쪽에는 북관의 사투리를 기록한 것이 있다. “어미를 <워 미>라 하고, 형을 <형애>라 하고, 오라비의 처를 <올집어미>, 아우는 <더런>, 도토리는 <밤>, 밤은

<참밤>, 호박은 <동화>, 동화는 <참동화>, 수수는 <숙기>, 옥수수는 <옥숙기>, 천둥소리는 <쇠나기 운 다>, 강가는 <개역>, 병아리는 <뱡우리>...황소는 <둥구레>... 괭이는 <곽지>...가져오라는 말은 <개야오 라> 하더라”.

사(愁州客詞) 등에서 그 양상을 알아볼 수 있다. 홍양호는 북쪽 풍속은 귀신을 좋아하여 사(師)라 불리는 남무(男巫)는 많은 사람들의 추대를 받았다고 한다.42) 또한 박제가의 정유각집(貞蕤閣集)에서도 무속에 관한 시가 등장한다. 무당을 흉내 내어 아이들이 흥얼거리는 무가(巫歌)43)나 쌀밥을 놓고 기원하는 모습44)로 부터 일상화된 무풍을 이야기했으며 마지막으로 흡사 굿놀이를 연상케 하는 놀 이마당의 풍경45)을 그려냄으로써 북관의 무속흥행을 묘사했다. 정조 때의 참판 홍의영(洪義泳)의 북관기사(北關記事)에서는 관북의 무속을 다음과 같이 표현 했다.

지방풍속이 무격(巫覡)을 즐겨하여 의약(醫藥)을 쓰지 않는다. 여러 가지 병 에 걸리면 곧 소를 죽여 신에 바치고는 빈다. 그리하여 소의 수효가 매우 적다.

여염집 사람이라도 소를 죽이되 그 짓을 조금도 천하게 생각하지 않는다.46)

유의양의 북관노정록 또한 북관의 무속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최강현 역, 1976: 83).

읍내 동성 밖에 뫼가 있고, 뫼 언덕에 포기 나무가 있으니 읍내 사람들이 신을 위하여 집에 질병이 있으면 달려가 빌고 돼지 다리나 닭이나 술잔이나 저희 힘대로 가져다가 놓고 배례를 무수히 하며 손을 비벼 빌고 베를 짜면 두어 치를 끓어 내어 가지에 걸고 빈다. 먼저 비는 이가 내려오면 뒤에 올 라가는 이가 있어 바람 불고 비가 와도 사람이 끊이는 날이 적더라.

이상에서 보듯 함경도 무속에 관한 기록에 나타난 풍경은 고조선이후 제정일 치(祭政一致) 시대의 생활유산이 아닌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또한 함경도 북변에는 여타의 지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재가승(在家僧)47)

42) 洪良浩, 北塞記略, 孔州風土記 , “巫覡謂之師. 里中公事謂之風俗.”

43) 朴齊家, 貞蕤閣五集, 旅次襍絶 , “鼕鼕巫鼓惱比隣. 恒舞恒歌夜繼晨. 道上遺音時宛轉. 兒童強半學跳神.”;

愁州客詞 , “可憐髫齔歲. 男女俱上頭. 跣行將臺畔. 鬭草作巫謳.”

44) 朴齊家, 貞蕤閣五集, 愁州客詞 , “白粟精復精. 炊成一鍋飯. 祈禱南山拗. 年年事如願.”

45) 朴齊家, 貞蕤閣五集, 愁州客詞 , “無絲廑有竹. 巫鼓才人笛. 猶傳獅子舞. 笑聲時啞啞.”

46) 洪義泳, 北關記事(박종훈, 2007: 104 재인용)

47) 在家僧은 帶妻僧과 유사한 의미의 승려집단으로 주로 함경도 지역에서 많이 불리던 것이다.

행적이 보여 북관문화의 독특함을 한층 더해준다. 재가승이란 육진지역의 산간에 있는 특수한 집단으로 승려임에도 처자를 거느리고 사는 산승(山僧)을 말한다.

이에 대해 홍양호(洪良浩)의 북새기략(北塞記略)에서는 “산승(山僧)이 많이들 여염집에서 살면서 아내를 거느리고 고기 먹기를 예사로 한다. 그 자손들도 뒤를 이어 중이 된다.”48)고 했다. 또한 효종시기 온성에 유배되었던 유계(兪棨)의 시 남집(市南集)에서도 그곳 절간의 중들은 처자를 거느리고 있고 소와 말을 기르 기 때문에 절에서 살지 않는다고 했다.

이러한 북관의 재가승에 대해 김열규의 연구(1980)에서는 관북지방에서는 병역 을 피해 남아가 태어나면 죽이거나 거세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재가승의 제반 양 상을 제시하였다. 또한 재가승집단이 승(僧)을 자처한 원인은 병역이나 군역 등 각종 요역을 피하고자 한 것이라 했다. 이로써 당대의 사회제도가 변경민들에게 주는 부담과 고난을 추정하였다.

이상으로 살펴본 함경도 변방의 역사적 변혁, 지정학적 위치 및 민속, 언어, 무 속 등 생활문화에서 그곳 풍토의 낙후함과 우매함 및 무지함을 엿볼 수 있으며 처절한 교육현실을 추정할 수 있다. 즉 함경도 변방은 역사적으로 오랜 세월 글 이나 책과 같은 문(文)적인 기질보다 활이나 말을 잘 다루는 무(武)적인 북방민 족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한양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및 남도와는 문화 적으로 상당히 괴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함경도 변방의 문화적, 교육적 풍토는 조선후기에 진입할수 록 변모되는 양상을 보였다. 점차 무(武)적인 요소는 배제되고 문(文)적인 요소가 활성화되기 시작49)하면서 함경북도 특유의 교육현실과 교육열을 만들어 가게 되

그런데 이와 같은 함경도 변방의 문화적, 교육적 풍토는 조선후기에 진입할수 록 변모되는 양상을 보였다. 점차 무(武)적인 요소는 배제되고 문(文)적인 요소가 활성화되기 시작49)하면서 함경북도 특유의 교육현실과 교육열을 만들어 가게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