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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출시스템과 부실화 배경

1995년 7개의 주택금융전문회사(이하 주전)34), 1개의 지역은행 그리고 5개의 신용협동조합으로 이루어지는 총 13개의 일본 금융기관이 사실상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1997년 11월에는 주요 도시은행 중의 Hokkaido Takushoku 은행이 건 전자산과 부채를 Hokuyo 은행으로의 이전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영업 중지를 선 언했다. 1998년 10월에는 Long-Term Credit 은행과 Nippon Credit 은행이 잠정적 으로 국유화 되었다.

금융자율화 (1970년 후반)

주택담보대출 및 부동산개발업자에

대한 대출 증가

부동산가격 급락 및

대출 부실화 1990년 은행위기

금융자율화 (1970년 후반)

주택담보대출 및 부동산개발업자에

대한 대출 증가

부동산가격 급락 및

대출 부실화 1990년 은행위기

<그림 4-6> 1990년대 일본 은행위기의 배경

32) 이 비용의 81%를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하고, 나머지를 S&L산업이 부담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Curry and Shibut(2000)을 참고하기 바란다.

33) 이 부분은 Ueda(1998), Gower(2000), Kanaya and Woo(2000), Kawai(2003)를 요약․정리한 것이다.

34) 주전은 원래 주택저당대출 취급을 목적으로 은행과 여타 금융기관에 의해 설립되었으나, 추후에 주전의 업무는 부동산 개발업자에 대한 대출까지 확대되었다. 그 결과 주전은 부동산 가격 하락 위 험에 지나치게 노출되었다. 버블 붕괴로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자 이 위험은 현실화되어 주전의 부실 여신 문제가 발생했다.

이와 같은 은행위기가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으로 우선 1980년대의 부동 산 버블 형성과 1990년의 버블 붕괴를 들 수 있다. <그림 4-7>가 예시하는 바와 같이 은행이 주택저당대출과 부동산 개발업자에 대한 대출을 크게 늘린 상황에 서 버블 붕괴로 부동산 가격이 급락하자 대출 부실화와 은행 부실화가 발생했다.

일본 은행상업은 도시은행(city), 지방은행(regional), 신탁은행(trust), 장기신용 은행(longterm), 신용금고(shinkin)로 세부 분류된다. <그림 4-8>는 이들 세부 부분 별로 부동산 관련 대출이 전체 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나타내고 있다. 각 세 부 부분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부동산 관련 대출 비율은 은행산업 전체적으 로 동일한 패턴을 보이고 있다. 즉, 부동산 관련 대출이 1980년대 중반부터 증가 하기 시작하여 1990년 전후에 정점에 달하고, 그 이후에도 크게 줄어들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자료 : Ueda(1998)

주 : CITY는 도시은행, REGIONAL 1은 상위 지방은행, REGIONAL 2는 하위 지방은행, TRUST는 신탁은행, LONGTERM은 장기신용은행, SHINKIN은 신용금고를 각각 나타 낸다.

<그림 4-7> 일본 은행들의 부동산 산업 대출 비율

<그림 4-9>는 일본 은행들이 부동산 관련 대출의 비중을 크게 늘렸던 1980년 대 중반이 일본의 지가가 급등했던 시기임을 보여준다. 또 <그림 4-9>은 1990년

대에 들어 지가가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여주는데, 이는 은행들이 부동산 관련 대 출을 크게 늘린 상황에서 부동산 버블이 붕괴되자 은행들의 부실여신 문제가 발 생했을 가능성을 시시한다. 실제로 Ueda(1998)는 148개 은행들에 대한 횡단면 자 료를 이용하여, 1990년까지 부동산 관련 대출이 많은 은행일수록 더 심각한 부실 여신 문제를 겪었음을 보였다.

자료 : Kawai(2003)

주 : 지가는 6대 도시 평균 지가이며, 주가지수는 TOPIX index임

<그림 4-8> 일본의 지가, 주가지수, 명목 GDP 추이

일부에서는 부동산 버블 이외에 일본의 금융시스템이나 금융감독 구조도 일본 의 은행위기를 불러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지적도 있다.35) 미국의 S&L 위 기와 달리, 은행위기 후 일본의 금융시스템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던 것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다.

1970년대 후반 각종 자본시장 규제완화 조치36) 이후, <표 4-1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본 대기업들의 자금조달 방식에 큰 변화가 있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35) 대표적인 예가 Schaede(1996)이다.

36) 이때 취해진 자본시장 규제완화 조치는 일본정부가 더 많은 국채를 발행하고자 하는 목적과 미 국의 금융시장 개방 압력을 수용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1990년대 초반 사이에 일본 대기업들은 은행차입을 통한 간접조달의 비중 (1979~83: 30.3%→1984~88: 8.7%→1989~93: 4.3%)을 줄이고, 회사채 발행을 통한 직접조달의 비중(1979~83: 7.6%→1984~88: 16.1%→1989~93: 11.8%)을 늘렸다. 아 울러 이 기간 동안에 일본 대기업들은 내부유보(retained earning)37)를 이용한 내 부조달의 비중(1979~83: 57.5%→1984~88: 76.6%→1989~93: 83.8%)을 크게 늘렸 다. 이처럼 일본 대기업들이 회사채 발행과 내부조달의 비중을 늘리자 일본은행 들은 시장점유율과 수익성이 하락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표 4-12> 일본 대기업의 자금조달 방식 추이

(단위 : %)

자료 : Gower(2000)

주 : 대기업의 구분기준은 기간별로 다름. 가장 최근 기간인 1989-1993년의 선정기준은 시가총액 10억엔 이상임. 1969년 표본기업 수는 484개, 1993년 표본기업 수는 651개임.

한편, 1979년 양도성 예금증서(CD)가 도입되고 1985년부터는 예금금리 자유화 조치가 시행된 결과, 1980년대 중반에 은행의 유효 자금조달 비용(effective deposit cost)이 증가했다. 반면 이 기간 동안에 은행의 유효 대출금리(effective lending rate)는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여 유효 예대금리차(effective lending margin) 가 크게 축소되었다(그림 4-10).

37) 이 기간 동안에 일본 대기업들의 내부유보가 증가한 이유로는 일본경제의 성장세가 둔화되면서 기 업들이 마땅한 투자처를 찾기 어려웠던 점을 들 수 있다.

기 간 내부조달 외부조달

은행차입 회사채

1969~73년 41.3 47.3 5.4

1974~78년 53.3 31.8 9.8

1979~83년 57.5 30.3 7.6

1984~88년 76.6 8.7 16.1

1989~93년 83.8 4.3 11.8

자료 : Gower(2000)

<그림 4-9> 일본은행들의 자금조달 비용 및 대출금리 추이

시장점유율 축소, 수익성 하락 및 예대금리차 축소에 직면한 은행들은 1980년 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부동산 담보 대출의 취급을 크게 늘리게 되었다.

부동산 담보 대출은 심사비용이 적게 들 뿐만 아니라38) 리스크도 상대적으로 적 다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39) 유효 예대금리차는 은행들이 부동산 관련 대출을 늘리게 됨에 따라 회복되기 시작했으며, 1987년부터는 안정적인 수준으로 유지 하게 되었다(그림 4-10).

은행들의 부동산 담보 대출 증가는 여러 경로를 통해 이루어졌다(표 4-13). 첫 번째 경로는 은행들이 부동산 거래와 관련한 대출을 직접적으로 증가시킨 경로 (1983: 6.4%→1987: 10.2%→1990: 11.3%)이다. 두 번째 경로는 은행들이 금융 및 보험회사에 대출을 증가시키고, 금융 및 보험회사는 증가된 대출금을 이용하여 부동산 담보 대출을 늘린 경로(1983: 5.9%→1987: 10.2%→1990: 10.0%)이다. 세 번째 경로는 개인에 대한 부동산 담보 대출을 확대한 경로(1983: 9.9%→1987:

11.3%→1990: 16.3%)이다.

38) 부동산 관련 대출은 미래 부동산 가격에 대한 추정 외에 별다른 신용분석을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심사비용이 적게 들었다.

39) 일본의 부동산 가격은 1975년에 잠시 하락한 것을 제외하면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였으므로 부동산 을 담보로 하는 대출은 상당히 안전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표 4-13> 일본은행들의 대출대상 추이

(단위 : %)

자료 : Gower(2000)

실제로 은행들의 부동산 담보 대출 증가는 상당한 위험(default risk)을 수반한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은행들이 담보로 잡은 부동산의 가격 이 상당히 고평가된 상태였으므로 부동산 담보 대출은 부동산 가격의 하향위험 (downside risk)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1980년대 버블 형성기에는 부동산 담보비율(loan-to-valuation ratio)이 최고 125%에 달한 적이 있었는데, 이처럼 부동 산 담보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부동산 가격의 하향위험은 더욱 증폭 되었다. 둘 째, 부동산 담보 대출의 확대는 상당한 신용위험(credit risk)의 증가를 동반했다.

부동산 담보 대출은 대기업보다는 주로 소규모 기업이나 개인에게 이루어졌으므 로, 과거 은행대출이 대기업 중심으로 이루어질 때보다 대출자의 신용도가 크게 낮아졌다. 소규모 기업이나 개인에 대한 대출이 증가하면 할수록 대출자에 대한 모니터링에서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지 않게 되어 대출자에 대한 모니터링이 어 려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당시 은행들은 대출자에 대한 신용평가와 모니터링보 다는 부동산 담보 대출의 판촉에 더 열을 올리는 상황이었다.40) 담보를 징구하고 이루어진 대출은 은행들로 하여금 대출자에 대한 신용평가와 모니터링을 하는 유인을 줄였으며, 그 결과 은행대출의 평균적인 질적 수준은 크게 떨어졌다.

40) Bank of Japan(1991)은 이에 대한 증거로 신용평가와 모니터링 업무가 대출판촉 부서에 소속된 점을 들고 있다.

1983년 1987년 1990년

제 조 업 28.9 20.4 15.7

비제조업 58.0 64.5 65.0

(부동산) 6.4 10.2 11.3

(금융 및 보험) 5.9 10.2 10.0

(기타 비제조업) 45.7 44.1 43.7

개 인 9.9 11.3 16.3

기 타 3.2 3.8 3.0

1990년대 초반 부동산 버블의 붕괴는 부동산 담보 대출에 내재된 리스크가 현 실화 되었다. 1990-91년 기간 중 금융당국이 통화량을 긴축하고 은행의 부동산 대출에 상한을 도입하자 버블은 붕괴되었다.41) 부동산 버블의 붕괴는 담보가치 를 크게 손상시켰으며, 이는 상당수의 부동산 담보 대출을 회수불능 여신 (non-performing loan)으로 만들었다.42)

당시 일본의 금융당국은 몇 가지 정책적인 오류들을 범했는데, 이러한 정책적 인 오류들도 부동산 버블의 발생 및 붕괴와 함께 일본 은행위기의 발생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첫 번째 정책적인 오류로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금융자유화 의 속도가 너무 느리고 폭도 제한적이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일본의 금융자유화 는 매우 서서히 진행되었다. 금리자유화를 예로 들면 1985년 시작되어 9년 뒤인 1994년 완료되었다. Ueda(1998)는 만약 일본이 전면적인 금융자유화 조치가 1980 년대에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일본 금융위기로 인한 비용이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금융자유화에도 불구하고, 은행산업 내에서 세부적인 업 무영역 제한이 여전히 존재했다. 즉, 장기여신을 취급하는 은행과 단기여신을 취 급하는 단기은행이 분리되어 있었으며, 신탁은행과 소규모 은행은 각각 신탁업 무와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 업무에만 특화되도록 되어 있었다. 금융자유화 조치 는 자본시장과 은행산업간, 그리고 은행산업 내 세부업무영역간의 경쟁을 격화 시켰다. 대기업들이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을 통한 직접조달을 늘리자 대기업에 대한 여신 제공을 목적으로 설립된 장기신용은행과 신탁은행의 대출 수요가 크 게 줄어들었다. 또한 도시은행들이 중소기업과 개인에 대한 대출을 경쟁적으로 늘리는 과정에서 그동안 중소기업과 개인에 대한 여신을 주로 취급해 온 소규모 은행들의 시장규모가 상당부분 잠식당했다. 이처럼 금융자유화 과정에서 어려움 을 겪게 된 특화 은행들은 부동산 담보 대출을 경쟁적으로 늘렸다.

두 번째 정책적인 오류로는 은행 리스크 관리체계에 공백이 발생했던 점을 들

41) 일본의 부동산 버블 붕괴의 원인 및 결과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Hoshi and Kashyap(1999)과 Kanaya and Woo(2000)를 참조하기 바란다.

42) 이때 은행권 전체의 부실채권은 약 700조 엔에 달하였으며, 상위 25개 은행 중 14개가 적자를 기록했 다.

수 있다. 일본은행들은 감독당국인 재무성의 직접적이고 포괄적인 규제를 받았 다. 선진 금융시스템에서는 은행이 자체적으로 리스크 관리체계를 갖춘 가운데 주주와 예금자에 의한 감시를 받는 체제이지만, 일본에서는 재무성이 이 모든 것 들을 전적으로 대신하는 체제였다. 그러나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규제완화를 통해 재무성에 의한 은행 통제가 사라졌지만, 이를 대체하는 새로운 시스템은 만 들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 은행들이 부동산 담보 대출을 늘리면서 부동산 가격하 락 위험에 심각하게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 었다.

(2) 정책대응

1997년부터 1998년 사이에 체계적인 은행위기에 직면하기 전에는 금융당국이 상당히 미온적인 방식으로 대응했다. 1996부터 1997년 사이에 금융당국이 취한 대표적인 조치로 예금보험요율의 인상, 적정시정조치의 입법화, 예금보험제한의 일시적 폐지 등을 들 수 있다. 예금보험요율은 1971년부터 예금부채의 0.012%로 고정되다가 1996년 3월에 0.048%로 인상되었다. 적정시정조치는 은행이 자기자 본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취해지는 조치로서, 금융당국은 이 조치를 통하여 은 행에 경영개선계획을 제출하고 여신을 위험도에 따라 5단계로 분류하고 외부감 사를 받을 것을 요구할 수 있다. 1996년 6월부터 2001년 3월까지 예금보험공사는 부실은행의 예금의 전액을 보장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은행보다는 신용협동조합의 부실여신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었다. 은행의 부실 여신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공적 자금의 투입이 필요했으나, 공 적 자금의 투입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처럼 금융당국이 초기에 미봉적인 대응으로 일관한 이유로 다음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당시 일본경제는 부실 금융기관 처리를 위한 법적 장치와 적절 한 사회안전망을 갖추지 못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금융당국은 부실 금융기관의 처리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둘째, 금융당국은 일본경제가 성장세를 회복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