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의생활에 대한 관심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138-150)

V. 연암문학에 나타난 의식주 생활

1. 의생활에 대한 관심

의식주 생활은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이면서도 그 중요성의 정도를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삶을 형상화시킨 문학에서도 그것 은 특수한 소재들에 가려 소홀히 취급되기도 한다.그러나 연암은 작품의 도처에서 의식주 생활 표현을 주요 관심사로 등장시키고 있으며,지역과 계 층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지는 모습까지도 묘사의 대상으로 삼았다.연암문 학에 나타난 의식주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 어떻게 전개하는 방식을 취했 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현대의 의식주 생활은 지역성이 무화되고,계층성이 완화되는 모습을 띤 다.1)교통의 발달과 대도시로의 진출 경향은 지역성의 소멸을 가져왔고 경 제력의 향상으로 인해 계층성이 희박해지게 된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그렇 다면 연암의 경우,당시에 심각한 괴리로 작용했을 지역과 계층의 문제들을 어떻게 표현하고 또 극복해 갔을까 하는 점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서울 출신의 사대부라는 제한적 위치를 벗어나 황해도 연암협에서의 은거생 활과 경상도 산골 안의에서 맞이했던 안의 현감,그리고 비록 짧은 기간이 었으나 충청도 면천 군수 및 강원도 양양 부사 시절의 경험 등은 지역성의 고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고 할 것이다.또

1) 최인학 외 7인, 한국민속학 새로 읽기 , 민속원, 2001, p.116.

한 서민들과 가까이 호흡할 수 있을 만한 적절한 관직이 부여됨으로 인하여 연암의 문학은 계층을 초월한 의식주 생활 표현의 유리한 기회를 얻게 되었 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외국을 여행하는 것이 일상의 일처럼 되어 버렸으나 연암의 시대 에 중국에 한번이라도 다녀 온 사람의 숫자는 극히 드물었다.문학인으로서 천재일우의 기회를 얻었던 연암은 연경을 거쳐 열하를 돌아오는 삼 개월 남 짓한 시간 동안 중국인의 의식주 생활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그것을 글로 남 겼다. 열하일기 에 실린 내용들은 우리나라의 의식주 생활풍속과 중국의 풍속을 서로 비교 대조할 수 있도록 매우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이 논문에서는 중국인의 민속과 공통되는 부분은 물론,서로 다른 특수성까지 동시에 취급하는 혼합적 방식을 사용하여 의식주 생활 모습을 비교해 보고 자 한다.

먼저,의생활 가운데 연암문학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의관 제도의 현황과 개선책의 제시라 할 수 있다. 경도잡지 의 기록과 연암의 글 사이에 접맥되고 있는 흐름을 일단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사대부들은 평상시 거처할 때 흔히 복건·방관·정자관·동파관을 쓰고,조관 은 당건을 쓴다.그러나 노상에서는 모두 갓을 쓰고 당혜·운혜를 신는다.유 자는 도포를 입는다.조관의 상복도 역시 이것을 입는다.그러나 무관은 늘 직령을 입는다.겨울에는 모선을 갖는다.그 만듦새는 양쪽 기둥을 담비 털 의 누런 털로 싸서 대나무 마디의 모양으로 만드는데 검은 비단 한 폭으로 잇는다.혹 수달피로 기둥을 싸기도 한다.그것으로 손을 따뜻하게 하고 얼 굴을 보호한다.봄·가을에는 비단 한 폭으로 먼지를 막게 하고 노루 가죽으 로 기둥을 싼다.2)

2) 士夫平居多戴 幅巾方冠程子冠東坡冠 朝士唐巾 街上俱用笠子 穿唐鞋雲鞋 儒服道袍 朝士常 服亦用之 武官常服直領 冬持毛扇 其制兩柱裏以貂頷黃毛 作竹節狀 聯以黑緞一幅 或用獺皮

이것은 조선후기 유학자들이 몸에 걸쳤던 옷과 머리에 썼던 관을 생생하 게 묘사한 경도잡지 의 일부이다.사대부들이 갓을 쓰고,도포를 입고,겨 울에도 부채를 들고 있는 의생활의 풍속을 잘 보여주고 있다.연암은 마치 이 기록을 보고 그것을 중국의 복식과 비교하여 보충과 비판을 가하려는 듯 한 필치로 열하일기 에 아래와 같이 썼다.위의 글과 여러 면에서 관계성 이 엿보인다.

우리나라 도포나 갓은 중국의 중 복색과 흡사하다.그들이 여름철에 쓰는 갓을 더러는 등으로 만들기도 하고,더러는 종려로 만들기도 한다.도포는 특히 깃이 모가 난 것이 좀 다를 뿐이다.그러나 그들의 도포는 모두 흑공단 이거나 문사를 쓰고,가난한 자는 오히려 수화주나 산동주 도포를 해 입는 다.

우리나라 의관은 많이들 신라의 옛 제도를 그대로 밟아 왔는데,신라는 처 음으로 중국 제도를 본뜬 것이다.그리하여 세간에서는 불교를 숭상하였으므 로 일반 민간에서는 중국의 중 본색을 많이 본떠 천여 년이 지난 오늘에 이 르기까지 변할 줄을 몰랐다.그리고 도리어 중국의 중들이 우리네 의관을 즐 겨 본떴다고 말하고 있다.어찌 그렇다고 할 것인가?(중략)

우리나라 풍속에는 겨울에도 갓을 쓰고 눈 속에도 부채를 놓지 않아 다른 나라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3)

우리나라의 복식에 대한 연암의 역사적 인식을 엿볼 수 있다.그러나 이

暖手護面也 春秋用紗幅障塵 獐革裏柱. 京都雜志 , 卷之一 風俗 <巾服>.

3) 我東袍笠與帶 恰似中國之僧 其夏天所戴 或藤或椶 袍特方領異耳 然袍皆黑貢緞或紋紗 其貧 者猶袍秀花紬野繭紗 而東方衣冠多襲新羅之舊 新羅始倣華制 然俗尙佛敎 故閭閻多效中國僧 服 至今千餘年而不知變 反謂中國僧徒悅我東衣冠而效之 豈其然乎 (中略) 東俗之冬天戴笠 雪裏把扇 爲他國所笑. 熱河日記 , 銅蘭涉筆.

것은 우리나라의 풍속을 비하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연암 은 이와 같은 비판을 기술하기 위하여 역사적이고 제도적인 흐름을 정확히 꿰뚫고자 노력하고 있다.선비들이 즐겨 착용하는 도포나 갓은 그 연원이 신라에 있고,그것이 불교가 성행했던 당시의 중국 제도와 관계가 있음을 밝혀 주었다.중국의 승복을 모방한 신라의 의관제도가 천여 년이 지난 연 암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고수되고 있다는 것이다.그러면서 연암은 시대의 변화에 따르지 못한 채 고루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풍속이나 전혀 실용적이 지 못한 생활 관습을 지적한다.곧 눈이 내리는 겨울에도 갓을 쓰고 부채를 들고 있는 풍속을 예로 들면서,이런 것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조롱을 받 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열하일기 에는 우리나라 사신단과 청나라 관원들 사이에 복장의 차이가 컸음을 나타내는 기록이 곳곳에 보인다.연암이 열하의 피서산장에서 보았 던 청나라 관리들의 관복은 붉은 모자에 좁은 소매의 괴상한 옷이어서 보는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우스꽝스러웠다고 한다.그러나 청나라 사람 들은 도리어 조선의 관복을 이상하게 보더라는 것이다.

이불(李紱)의 목당집 에 실린 ‘경인년 설 아침 조회에’라는 시에,

조선은 옛날부터 사귄 지 오랜 나라 의관은 생소하고 풍속도 야릇 사모와 관복으로 봄 조공을 드리니 바다 구석 해 뜨는 곳 평화로운 곳

이라고 하였다.아침나절 산장문 밖에서 수없는 관원들이 조회를 마치고 물러나오는데,붉은 모자에 마제수를 입은 것이란 사람으로 하여금 보기 창 피하게 했건만 우리 사신의 의관은 화려하기가 신선 같아 보였다.

그러나 거리 아이들은 이상하게 놀라 도리어 연극 놀음판 배우 같다고 하 니 답답한 일이 아닐까 보냐.4)

청나라의 관복이 부끄럽게 생겼고,조선의 관복은 신선과 같은 모습이라 고 평하는 말에서 연암의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다.5)연암은 복장 제도의 경우,명나라의 것이 옳다는 의식을 갖고 있는데 지금 그 복장은 연희 마당 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이어서 명나라 전통을 지키려는 조선 관복의 모습이 마치 광대들의 의복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점을 안타까워하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특히 청나라 사람들에게 옷과 갓을 자랑하려 했던 것 같 다.審勢編에서는 ‘때로는 의복과 갓 제도를 자랑하여 그들이 부끄러워 수그 러지는 것을 보려 하고’6)라는 표현을 썼다.연암은 이 대목에서 독특한 민 속적 이해를 남기고 있다.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조선의 옷은 朱子家禮의 법식을 따라 품위가 있고 명나라의 제도를 고수한다는 일종의 자부심 같은 것을 갖고 있다고 여겼던 것은 사실이다.그렇지만 연암은 그것이 결코 옳 지 않다는 생각을 확실히 표명하고 있다.우리가 청나라의 옷이 볼품없다고 무시하지만 중국인들은 도리어 조선의 사행단을 보면서 복장이 걸승이나 도 사 같다고 조소를 보냈다고 했다.연암은 우리가 진실로 북벌을 도모하려면 부국강병으로 실력을 길러야 하는데,御馬法의 경우 폭넓은 긴 소매의 거추 장스러운 옷을 입고 견마를 잡힌 채 말을 몰아서야 되겠느냐는 것이다.먼 저 옷을 실용적으로 고쳐 입어야 한다는 의도가 반영되고 있다.청나라가 조선에게 강제에 가까운 여러 종류의 요구를 해 오면서도 의관제도를 고수 4) 李紱穆堂集庚寅元朝早朝詩 朝鮮內屬來王久 肯怪衣冠太俗生 紗帽版袍春入貢 海隅日出最昇 平 朝日山莊門外 見千官退朝 茜帽蹄袖 使人大慚 而我使衣冠可謂燁如仙人 然街兒驚怪 反 謂場戲的一樣 悲夫. 熱河日記 , 避暑錄.

5) 김혈조, 「열하일기를 통해서 본 연행 사신의 의식주 생활」, 한문학보 20, 우리한문학 회, 2009, p.90.

6) 或自誇衣冠 觀其愧服. 熱河日記 , 審勢編.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138-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