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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예술에 대한 가치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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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연암문학에 나타난 구비전승과 민속예술

2. 공연예술에 대한 가치 인식

서민들의 고달픈 삶을 달래주고 민중의식을 대변해 주던 노래가 민요이 다.그런 까닭에 민요는 지식인들의 시가와 달리 구별되어 천대를 받았으며 기록문학과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명맥을 유지해야 했다.시가의 밑바닥에 깔려 설움을 받으면서도 민중의 벗이 되었던 민요의 성격은 다음의 말로 요 약될 수 있을 것이다.“시가가 영화를 누리며 독존을 자처할 때에도 민요는 불운의 역경에서 민중을 대변하고 그들의 생활을 노래했었다.높은 교양과 기교를 요하는 景幾何如體歌나 時調나 歌辭를 민중들이 능히 구사할 리 없 다.또 그러한 귀족적인 허식과 의식적인 생활관이 현실적으로나 생리적으 로 불합리하여,민중들은 관념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자존한 야성을 추구 하고 거기에서 생을 호흡하였다.그들의 생활의 공명 하에 자연발생적으로 도출한 민요가 문학적 시가와 스스로 성격을 달리하게 되었다.”52)

이러한 의미를 가진 민요가 한문으로 이루어진 산문문학에 사용된다는 것 은 희귀한 일이다.물론 연암문학에서도 민요의 노랫말이 채록되어 있거나 민요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주는 대목을 찾을 수는 없다.그러나 연암 은 자신의 문학세계를 통해 민요와 음악의 효과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분명 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는 어떤 특별한 사건이나 정황을 묘 사할 때 그 효과를 글 속에 반영시킬 줄 아는 작가였다.

열하를 향하던 연암의 일행이 연경에 머물렀을 때의 일이다.청나라의 건 륭제는 연경에서 수백 리 떨어진 북방의 국경지역 열하에 나가 있었다.일 행은 매우 피곤하였지만 건륭제의 생일에 맞추어 열하로 가기 위해 서둘러 52) 임동권, 한국민속학논고 , 집문당, 1975, p.21.

야 했다.그리고 그 일행 가운데서 또 열하로 갈 사람들을 선발하게 되었다.

연암은 마두들을 뽑아 치우고 견마잡이 한 명만 데리고 가게 되어 장복이는 떨어뜨려 두고 창대만 같이 가게 되었다.연암과 창대는 장복의 손을 붙들 고 눈물을 흘렸다.다른 일행들도 서로 이별하기가 섭섭한 나머지 목이 메 었다.연암은 머나먼 이국에서 이별을 경험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 인지를 하루 종일 생각했다고 한다.그리고 생이별의 괴로운 정을 노래한 우리나라의 민요 <배따라기>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나라 대악부에도 ‘배따라기’곡이 있다.우리말로 배가 떠나간 다는 말인데 그 곡조가 창자를 에이듯이 구슬프다.그 법식인즉 꽃배를 만들 어 마당에 내놓고 어린 기생을 한 쌍 뽑아 장교 복색으로 꾸며 붉은 옷에 갓을 씌우되 갓에는 자개 갓끈에 범 수염과 흰 깃을 단 화살을 꽂고 왼손에 는 활을 잡고 오른손에는 채찍을 쥐고는 먼저 군례로 창을 하고,첫 번째 나 팔을 불면 온 마당은 풍악을 잡힌다.배 좌우에는 기생들이 한 패씩 모두 비 단 치마에 수놓은 옷을 입고 한목으로 ‘어부사’를 부르면 풍악이 뒤를 따른 다.두 번째,세 번째도 처음과 같이 창을 부르고 나팔을 불면 다른 어린 기 생이 장교 복색을 하고 배 위에서 배가 떠나는 방포 소리 창을 부른다.그러 면 배는 닻을 감아 올리고 떠나게 된다.이때에 기생패들은 한목으로 노래를 불러 축하를 한다.

닻 감아라 배 떠나간다.

이때 가면 언제 오나.

만경창파에 가는 듯 돌아오소사.

碇擧兮船離,此時去兮何時來,萬頃蒼波去似回.

이 노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눈물 나는 이별 곡조다.53)

<배따라기>는 ‘배 떠나는 노래’라는 서도 방언으로서 배가 항구에서 떠날 때 부르는 노래이다.떠남은 이별을 동반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자연히 애상 적인 정서가 흐를 수밖에 없다.특히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서도의 애 절한 정서 표출이 이 노래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배따라 기>에는 하나의 장르나 정서 및 미학으로 파악될 수 없는 다양한 양상이 존재한다.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배따라기>에는 ①서도 민요로서 뱃사공들 이 부르는 어업노동요인 배 떠나는 노래 <배따라기> ②조선시대에 관서지 방을 중심으로 공연되었던 종합예술적 성격의 <배따라기 극>,일명 <船遊 樂> ③<선유락>의 일부인 단가 <배따라기> ④근대에 잡가집과 유성기음 반에 수록된 잡가 <배따라기> 등이 있고,2차적인 자료로서 ⑤<선유락>을 감상하거나 대동강에서 <배따라기>를 듣고 지은 악부시를 들 수 있다.54) 즉 <배따라기>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민요뿐 아니라 극,단가,잡가,악부 시 등의 여러 장르에 걸쳐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복잡한 문제가 발생한다.위의 장르에 속한 각각의 <배따라기>를 채록 분석한 바에 의하면,민요 <배따라기>는 1인칭 화자가 돛을 달고 어 장에 도착하기 전까지의 상황을 단순 소박하게 묘사하거나,어장에 나아가 는 들뜬 기대감을 담고 있는 노래라고 한다.그렇다면 애상적 정조와는 거 리가 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오히려 근대의 잡가 <배따라기>가 이 정 조에 근접해 있다.생업으로 배를 타는 주인공이 바다에서 모진 풍파를 만

53) 故我東大樂府有所謂排打羅其曲 方言如曰船離也 其曲凄愴欲絶 置畵船於筵上 選童妓一雙 扮小校 衣紅衣 朱笠貝纓 揷虎鬚白羽箭 左執弓弭 右握鞭鞘 前作軍禮唱初吹 則庭中動鼓角 船左右羣妓皆羅裳繡裙 齊唱漁父辭 樂隨而作 又唱二吹三吹 如初禮 又有童妓扮小校 立船上 唱發船砲 因收碇擧颿 羣妓齊歌且祝 其歌曰 碇擧兮船離 此時去兮何時來 萬頃蒼波去似回 此吾東第一墮淚時也. 熱河日記 , 漠北行程錄.

54) 김종진, 「<배따라기>의 존재양상과 문학 교육적 의의 -민요를 중심으로」, 우리문학연 구 28, 우리문학회, 2009, pp.305~306.

나 죽을 고비를 넘긴 후 평양 대동강으로 돌아와 가족과 상봉하고 다시는 배를 타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는 내용이 담겨있는 애절한 노래라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민요 <배따라기>와 잡가 <배따라기>를 혼용하는 경우가 된 다.55)

열하일기 에 나오는 <배따라기>의 기록으로 인하여 이 민요는 기원이 매우 오래였음이 확인되었으나 내용의 애상성에 관한 것이 문제로 남는다.

연암은 이별의 슬픔을 떠올리는 자리에서 <배따라기>를 연상하며 그 곡조 가 매우 처연하다는 사실을 말하고,이어서 기생들이 등장하여 부르는 <어 부사>와 악기 연주의 실황을 자세히 묘사했다.특히 기생들이 입고 나오는 옷의 모양은 공연을 위한 형상이었음이 분명하다.따라서 연암의 <배따라 기>는 민간에서 구연되었던 민요가 아니라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배따 라기 극>과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배따라기> 장르 구분 ②에는 일 명 <선유락>이라고 부르는 극이 조선시대에 관서지방을 중심으로 활발히 공연되었다고 하였다.연암은 젊은 시절에 가졌던 여행 경험을 통해 <선유 락>을 직접 감상했을 가능성이 높고,③의 단가나 ⑤의 악부시를 깊이 이해 하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극화된 <배따라기>는 공연을 위한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곡조를 더욱 애상적으로 바꾸어갔음을 짐작 하게 하고,근대 잡가에 이르면 흥미 위주의 극도의 상황을 설정하여 이별 과 고난의 슬픔을 형상화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계되는 일로서 서민들을 상대로 한 연극이 성황을 이루었을 것으 로 짐작된다.물론 민속극의 전승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배따라기 극>과 같은 연극의 공연에는 양반 관객이 참여한 가운데 서민들도 즐거이 구경할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연암의 시대에 있었던 연극의 현황을 경도 잡지 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55) 위의 논문, pp.314~316.

연극에는 산극(山戱)과 야극(野戱)의 두 부(兩部)가 있는데,나례도감에 예 속되었다.산극은 시렁을 매고 포장을 치고 사호․만석․승무를 상연한다.

야극은 당녀․소매로 분장하고 춤을 춘다.만석은 고려 때 중의 이름.당녀 는 고려 때 예성강 가에 와서 살던 중국 창녀(倡女)의 이름.소매도 옛날 미 녀의 이름이다.56)

연극의 종류를 크게 대분하고 그것들을 맡아보는 관청까지 있었음을 밝혀 놓았다.연극이 성행했음을 알려주는 구절이다.서민들이 이 연극을 가까이 즐길 수 있었는지 명확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저자 유득공은 이것이 중요 한 풍속이라 하였으므로 산극과 야극들은 민간의 환영을 받으며 널리 공연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의 경우,연극 관람이 더 일반화되었던 것 같다.연암은 열하일기 에 서 중국 여인들이 연극 구경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여러 차례 기술하 고 있다.대표적으로 절이나 도교 사원이나 묘당의 대문을 마주보는 곳에는 극장이 있고 그 규모는 많은 관중을 끌어들일 정도로 컸다고 한다.작은 마 을에는 명절에 삿자리57)극장을 짓고 연극을 하는데 여인들이 야단스레 단 장을 하고 여러 명이 함께 수레를 타고 구경을 다녀오는 모습을 잘 기록해 놓았다.58)노소를 막론하고 꽃으로 머리를 치장하고 패물을 차며 분을 바르 는 이색적인 풍습은 공연예술의 객석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시대 우리나라 여인들의 극 구경은 이보다 훨씬 제한적이었을 것으로

56) 演劇有山戱野戱兩部 屬於儺禮都監 山戱結棚下帳作獅虎曼碩僧舞 野戱扮唐女小梅舞 曼碩 高麗僧名 唐女高麗時禮成江上有中國倡女來居者 小梅亦古之美女名. 京都雜志 , 卷之一 風 俗 <聲伎>.

57) 갈대로 결어 만든 자리 58) 熱河日記 , 馹迅隨筆 <戱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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