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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代 의례의 견문과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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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연암문학에 나타난 풍속

3. 淸代 의례의 견문과 묘사

다음으로 여기서 논할 儀禮는 사회인류학에서 사용하는 통과의례(riteof passage)를 가리킨다.통과의례란 한 인생이 출생에서 사망까지의 과정을 지내면서 그 곡절마다 찾아오는 변화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의식을 포괄하 여 일컫는 말이다.이때 사람들은 상징성을 지닌 특별한 행동을 하게 되며, 이것이 풍속으로 고정되는 경우가 많다.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冠婚喪祭 라는 四禮로 분류되어 민간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연암이 민간의 의례를 자신의 글에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은 중국 기행문 집인 열하일기 에서였다.그는 열하로 가는 길에 풍속에 관한 여러 가지 체험을 하고 그것들을 세밀하게 묘사해 놓았다.특히 청나라 사람들의 婚禮 풍속을 구경하고서는 그 정경을 치밀할 정도로 세세하게 적고 있다.민속에 대한 그의 관심이 두 나라의 혼례 풍속을 비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제 공해 준 셈이다.

중국인의 결혼 행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데 그 정황으로 보아 서는 親迎 의식을 수행하러 가는 것으로 보인다.친영이란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직접 신부를 맞이하는 의식이다.연암은 가마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물건들의 형상으로부터,신부를 도와줄 여인들의 생생한 모습과 말 탄 남자들의 숫자와 생김새,옷의 특징까지를 그대로 묘사하였다.분량이 많은 편이지만 친영 행렬의 현장을 살펴보기 위해 전체를 인용하기로 한다.

문 앞에서 피리,젓대 소리와 꽹과리 소리가 들리기에 뛰어나가 보니 결혼 행렬이다.채색 그림을 그린 사초롱이 여섯 쌍,푸른 일산 한 쌍,붉은 일산 한 쌍,퉁소 한 쌍,최금 한 쌍,피리 두 쌍,징 한 쌍에 가운데는 네 사람이 푸른 덮개 가마 한 틀을 어깨에 멨으니,사면에는 유리창을 달았고 네 귀에 는 비단 색실이 휘늘어졌다.가마의 허리 복판에는 가마채를 대어 푸른 실을 동아줄로 삼아 가로 틀었고,가마채의 앞뒤에는 다시 짧은 방망이를 가운데 로 꿰어 틀어서 그 양쪽 머리를 넷이 어깨에 메고 여덟 발이 한 걸음이 되 어 발을 맞추고 보니 가마는 까딱도 않고 흔들리지 않아 허공에 매달려 가 게 되어 그 방법이 썩 묘했다.

가마 뒤에는 수레 두 채가 다 검정 천을 씌워 방처럼 만들고 당나귀 한 마리로 끌고 간다.한 수레에는 두 노파가 같이 탔는데 얼굴은 다들 늙어 보 잘것없지마는 그래도 화장을 했다.머리는 죄다 벗겨져 바가지처럼 번질거렸 으나 뒤로 젖혀진 자그마한 쪽에는 꽃송이를 잔뜩 꽂았고,두 귀에는 귀걸이 를 늘이고 검정 저고리,누런 치마를 입었다.

한 수레에는 젊은 여자들 셋이 같이 탔는데,붉은 바지 또는 초록빛 바지 에 치마라고는 도무지 걸치들 않았다.그중의 한 소녀는 꽤 예쁘게 생겼다.

알아보니 노파들은 수모와 젖어미요,젊은 여자들은 시녀들이다.말 탄 사람 들이 30여 명이나 빽빽이 둘러싸고 가는 중에는 몸집이 뚱뚱하고도 크고 망 측하게 생긴 자가 입가와 턱 아래는 검은 수염이 숭숭 나고 몸에는 구조망 포를 차려입고 금빛 안장을 차린 백말에 은등자를 넌지시 디디고 빙그레 웃 고 앉았다.뒤에 오는 수레 두세 채는 옷농을 잔뜩 실었다.32)

32) 門前有簫笳鐃鉦之聲 急出觀之 乃迎親禮也 綵畵紗燈六對 靑蓋一對 紅蓋一對 簫一雙 笳一 雙 蓽篥二雙 疊鉦一雙 中央四人 肩擔一座 靑屋轎 四面傳玻瓈爲牕 四角嚲 綵絲流蘇 轎正 腰爲杠 以靑絲大繩 橫絞杠之 前後再以短杠 當中貴絞 兩頭肩荷 四人八蹄 一行接武 不動不 搖 懸空而行 此法大妙 轎後有兩車 皆以黑布爲屋 駕一驢而行 一車共載兩個老婆 面俱老醜 而不廢朱粉 顚髮盡禿 光緖如匏 寸髫北指 猶滿揷花朶 兩耳垂璫 黑衣黃裳 一車共載三少婦 朱袴或綠袴 都不繫裳 其中一少女 頗有姿色 蓋老是粧婆 乳媼 少的是丫鬟也 三十餘騎 簇擁 着一個胖大莽漢 口旁頤邊 黑髭鬆鬆 權着九瓜蟒袍 白馬金鞍 穩踏銀鐙 堆着笑臉 後有三兩

通遠堡라는 시골에서 큰비를 만나 며칠을 묵고 있던 연암 일행이 잠시 갠 날에 보았던 중국인들의 친영 행렬 모습이다.연암은 이것을 ‘迎親禮’라 표 현했다.이런 시골에서 상당한 규모의 행렬이 호화로운 가마를 앞세우고 시 녀들과 手母와 옷농을 실은 수레들을 굴리며 가는 것이나,또 30여 명이나 되는 말 탄 남자들이 신랑의 일행이 되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 도 재력 있는 집안의 친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풍속에는 이렇게 꽹과리 등을 두드리며 행하는 요란한 친영은 드물다.고려 때까지는 일반적으로 남자가 장가들어 여자의 집에 오래 머무 는 풍속이 있었다.이른바 男歸女第라는 婚俗이었다.그러나 조선왕조에 들 어와 유교문화의 유입으로 인하여 풍속이 변하고 유교적 가례에 따르는 것 이 원칙처럼 되어 버렸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우리의 혼례 풍속 가운데 신부 집에서 혼사를 치르 고 삼일 후에 交拜合巹之禮를 행하는 소위 三日對飯이 있었다.이것이 유학 자들의 생각에는 가례에 어긋나고 무리한 것이었다.그리하여 士林에 의해 절충되어 혼인날 저녁에 교배합근하고 다음날 시부모를 뵙는 풍속이 이루어 졌다.이것을 半親迎이라 하였다.이것은 가례에 규정된 친영이 너무 복잡하 고,고유혼속이 뿌리 깊기 때문에 두 가지를 절충해서 가례의 정신과 고유 혼속을 다 살리고자 한 데서 나온 소산이라 하겠다.33)그러므로 반친영을 하며 절충식으로 혼례를 치르는 우리에게는 중국의 영친례가 낯설고 요란한 풍속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연암은 이국의 혼속을 소개하면서도 실용적 사고를 적용하고 있 다.사람이 타고 가는 가마는 흔들림이 적어야 하는데,거기 친영에 사용하

車 滿載衣櫥. 熱河日記 , 渡江錄.

33) 안병태, 「혼속의 친영에 대하여 , 한국민속학 5, 한국민속학회, 1972, p.45.

는 가마는 복판에 가마채를 대고 가마채의 앞뒤에 방망이를 꿰어 완전히 고 정시킨 채로 네 명이 메고 가는 방식이어서 안정감이 있다고 본 것이다.가 마를 사용하게 될 경우 이런 방식이 좋겠다고 생각한 연암은 혼례를 소개하 는 자리에 가마에 대해 매우 자세한 기록을 남겨 실용성 있는 탈것으로 만 들고자 했다.

다음으로,연암이 네 가지의 의례 가운데 가장 많은 언급을 했던 의식은 喪禮이다.그는 상례를 비롯한 의례들을 잘 익히려면 朱子家禮 를 자세히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가례 는 비록 주자가 내용을 미처 확정하지는 못한 책이지만 먼저 익히 보아 두는 것이 좋으니,무릇 생전에 봉양하고 돌아가신 뒤 장례 치르는 때 에 차례와 절목을 절충하여 취할 수 있네.34)

<與人>이라는 제목의 편지인데,누구에게 보낸 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이 글의 수신자가 弱冠의 젊은 나이에 거듭 상례를 당하여 어찌할 바 를 모르는 형편임을 전제로 삼고 있다.연암은 그를 여러모로 위로하면서 주자가례 를 권하고 그에 따라 순서를 취하고 절충하여 대비하도록 친절하 게 지도하였다. 주자가례 란 송나라 시대에 주자가 관혼상제 등 가정의 예 법을 집대성해 만든 책이라고 알려져 있다.오래 전부터 가정을 위한 예법 의 필요성을 깨달은 학자들이 수많은 가례를 저술했으나 결국 주자의 것이 의례의 정통으로 위치를 굳혔다.주자가 이것을 직접 기록했는가의 여부는 계속 문제점으로 남아있다.연암도 위의 글에서 ‘朱子未定之書’라 하여 주자 가 그 내용을 확정하지 못한 책이라 하였다.

34) 家禮雖是朱子未定之書 而先宜熟觀 則凡於送養之際 次第節目 可以取衷矣. 燕巖集 , 卷之 三 孔雀館文稿 <與人>.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초기부터 왕가나 유학자의 집안에서 이 가례를 지키 기 시작하여 점차 서민의 의례에 이르기까지 일반화되어 왔다.그러나 조선 사회와 가정의 현실에 맞지 않다는 점 때문에 늘 갈등의 불씨가 되었던 것 이 주지의 사실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암은 상을 당한 젊은이에게 주 자가례 의 기록에 따라 행하도록 조언하고 있다.연암은 상례와 같은 인생 의 중요한 의례를 일반화된 격식으로 치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 었던 것이다.물론 수신자가 일반 서민이 아니라 한문을 아는 선비라는 점 에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지만,가례에 대한 연암의 입장은 전통 보수적 인 색채를 띠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연암의 전반적인 사고는 가례와는 달리 진취적이어서 전통 보수의 입장만을 시종 견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연암은 이와 같은 의례들은 시 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을 또 다른 글을 통해 펼쳐 놓음으로써 독자들에게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한다.그가 중국 여 행길에 직접 경험했던 喪家의 俗禮 풍속 기록은 바로 이 점을 반영하고 있 다.대문 앞에 牌樓를 세우고 악공들을 배치해 두었다가 조문객이 올 때면 풍악을 요란스럽게 울리는 독특한 풍습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아홀관으로부터 길옆 마을 가운데 허연 패루를 높다랗게 세운 데가 자주 눈에 띄었다.이것은 다들 초상집이라고 한다.삿자리로 만들었는데 기왓골 이라든가 지붕의 치문들이 나무나 돌로 만든 것과 다를 게 없었다.높이는 네댓 길씩이나 되는데 상갓집 대문 앞 여남은 발자국 떨어져 세우고 그 아 래서는 풍악꾼들이 죽 늘어섰다.바라 한 쌍,피리 한 쌍,새납 한 쌍이 밤낮 자리를 떠나잖고 조객이 문 어귀에 나타나기만 하면 소리를 더 내어 불고 치고 야단이다.또 안에서 상식이나 제전이 있어 곡소리가 들리면 밖에서도 이내 맞받아 불고 뚜드리고들 한다.(중략)

상갓집 제도를 구경하려고 대문 앞까지 몇 자국 발을 옮기니 안에서 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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